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23:59:03

우파 자유지상주의/옹호와 비판


1. 개요2. 옹호
2.1. 사유재산권과 선택의 자유2.2. 상속의 정당성과 합리성2.3. 사회적 약자의 성공과 발전2.4. 사회적 약자의 성공과 발전에 대한 보론2.5. 자유지상주의는 서민에게 도움이 된다.2.6. 현행 체제의 경제적 문제점2.7. 자유의지라는 용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2.8.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와 공화주의와의 관계2.9. 개인주의는 현실에서 존재 할 수 없는 이상향이기만 한 것인가?2.10. 강요야말로 과학과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이다.2.11. 과연 자유지상주의자는 도덕적인 이유로 재산권을 옹호했을까?
3. 비판
3.1. 윤리관에 대한 비판3.2. 사회복지 미비로 인한 기회의 평등의 위기3.3. 법철학적 의문
3.3.1. 사유화의 철학적 난제들
3.4. 사적 자본의 국유화에 대한 고찰3.5. 실현될 수 없는 이상 (아나코 캐피탈리즘의 경우)3.6. 타협의 필요성 (아나코 캐피탈리즘의 경우)3.7. 자유라는 개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3.8. 자유지상주의적 자유관은 도덕주의적이다.3.9. 자유지상주의는 개인적 윤리인가?3.10. 반지성주의적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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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문서는 우파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옹호와 비판 의견을 서술한다.

2. 옹호

2.1. 사유재산권과 선택의 자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가의 성격이 권력을 좌지우지한다는 입장이지만, 오히려 국가의 권력이 그 국가의 성격을 들었다 놓는 상황이다. 그들의 논리대로 설령 [국가=자본가의 위원회]라고 하더라도 사유재산권이 보호된다면 자유지상주의의 입장에선 [국가=모든 인민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유재산권이 보호될 경우, 충분히 자격만 갖췄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 또한 언론과 출판을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공동체가 자유지상주의적으로 충분히 보호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과도 같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묻는다. 힘쎄건 아니건, 우리 모두는 똑같은 사람이 아닌가? 왜 할 수 있는 것을 똑같이 하지 못하게 억누르려고 드는가? 우리는 선의를 품고 있다. 자선사업과 기부의 규모가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이 일반적으로 그것을 증명해 줄 것이다.

또 국가 권력의 창출 과정에 따라 사유재산권 철폐의 효과나 영향,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동의받지 않고 이루어진) 정당한 폭력이라는 말과도 같은 모순이다. 아나키즘에서는 '자발적' 공동체를 만드니 그 공동체에 가입한 사람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철폐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방식이건 민주집정제 방식은 이와 다르다.

왜냐하면 자발적 공동체가 아님에도 국가가 '개인'들에게서 떠들 수 있는 권리를 강제로 뺏아간다는 사실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력이든 법적으로든 말이다. 결국 둘다 국가가 폭력을 사용해 개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유재산권이 어떻게 국가의 억압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까? 바로 모든 인간의 행동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항상 행동하는 존재다. 행동이란 항상 수단을 통해 목적을 성취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때 그 수단은 사물, 재화, 상품 등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일컫는다. 사유재산권은 곧 저런 수단물에 대해 최우선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사유재산권을 통해 타인이든 정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사유재산권이 없다면 정부나 타인이 자기 멋대로 나의 수단물을 강탈해갈 수 있고 나의 모든 자유로운 행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언론 자유라고 할 때도 만약 종이, 잉크, 펜, 컴퓨터, 인쇄기, 노동, 녹음기 등의 소유를 국가가 쥔다면 우리는 언론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언론활동이라는 목적 추구가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물을 정부가 강탈했기 때문에 우리는 언론활동에 필요한 모든 구체적 활동은 사실상 국가권력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그들의 눈치만을 볼 수 밖에 없고 결국 우리는 허울뿐인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은 바로 교환이다. 교환은 내가 너에게 그리고 네가 나에게 서로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다. 건물주의 소득이 높은 이유는 건물주가 막노동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더 많은 가치의 상품을 많이 제공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일자리, 주거지, 업무공간 등 막노동자가 제공하는 것보다 시장에 더 필요하고 근본적인 요소들을 창출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창출한 주체인 이상 수요를 파악해서 그것에 가격을 붙이고 어떻게 거래하여 금전화할 지도 시장 현장에 있는 그의 전적인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코 무슨 신분제 사회처럼 막노동자가 천하다고 더 낮은 수입을 얻는 게 아니다. 이것은 이재용같은 기업가가 일반 사원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밖에 없으며 그래야만 하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막노동자의 소득이 낮은 근본적인 이유는 막노동자의 노동을 낮게 평가하려는 사람들만 있기 때문이며 막노동자들은 그것에 동의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매우 높게 평가해주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동의한다면 충분히 높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 자본가의 착취와 가스라이팅에 의해 실제보다 노동가치가 과소평가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하더라도 정작 노동계급이 자신들의 노동에 값을 매기는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노동계급의 권익은 더욱 수직하락했다. 왜일까? '사적재산의 자유로운 교환'이라는 객관적인 지표가 없으니 노동가치가 유명무실해지고 결국 사회 모든 분야에 대한 정치권력의 전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당이 신도 아닌데 자본이라는 객관적인 지표가 사라진 시장에서 재화에 대한 적정 가격을 매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마르크스가 정치권력의 예속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 우울하고 속물적인 학자들의 비판인 것을 떠나 이는 필연적인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제기능을 잃어버린 시장에서 그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전제적인 정치권력밖에 없고 이것이 프롤레타리아의 권리는 커녕 제 권력유지에만 급급한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한 주체라는 것이 이미 역사 속에서 수없이 증명되었다.[1]

또 금융 혹은 돈놀이가 정당한 이유, 토지를 지대소득이 정당한 이유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했기 때문이다. 돈이 급한 사람에게 돈을, 토지의 이용권과 그 부산물이 급한 사람에게 원하는 것들을 제공하였고 그 제공의 대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교환이 이루어진 이유는 공급자는 그것을 누가 필요한 지 또 얼마나 필요한 지 또 어떻게 해야 수요자를 더 만족시킬 지 판단하고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이 불로소득이라는 말은 굉장히 잘못된 표현이다. 자유지상주의자 입장에서 이것은 그저 노동을 하지 않은 소득이 아니라 결정하고 판단하여 수익처가 될 곳을 가려내어 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투자소득이라고 하는 것이 정당하다.

또한 자유지상주의 사회에서 인신매매나 장기매매와 같은 행태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며 침소봉대하는 진중권 교수의 주장에는 심대한 어폐가 내재되어 있다. 왜냐하면, 작금에 성행하는 인신매매장기매매는 당사자의 자발적인 동의가 결여된 상태에서 납치나 폭력과 같은 방법으로 수행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히 자유지상주의의 원리와 배치된다. 또한, 인신매매는 심지어 신체의 소유자가 자발적으로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자유지상주의의 원리와 부합하지 않는데, Rothbard에 의하면 어떤 인간의 신체와 그 의지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따라서 타인에게 양도될 수 없기 때문이다.(단, 모든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이러한 입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경우에 자기 스스로를 팔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로버트 노직의 '자발적 노예' 개념이다.) 즉, 신체포기각서와 같은 것은 적법하지 않으며, 그것이 강제될 경우 노예제와 진배없다는 것. 그러나, 물론 어떤 개인이 자신의 신체 일부를 신체로부터 분리하여 판매하거나 증여하는 행위는 정당하다. 만약 이것이 금지되어야 한다면, 헌혈이나 장기기증과 같은 행위도 부당하다고 주장해야 일관적일 것이다. 왜 증여는 정당하지만 금전을 대가로 판매하는 행위는 부당한가? 전자가 정당하다면 논리적으로 후자도 정당하지 않은가? 단순히 사회적 미덕을 근거로 개인의 행동을 제약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신체의 소유권이 그 자신이 아니라 사회에 존재한다는, 즉 개인이 사회의 노예라는 파시스트적 학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판 단락의 '윤리관' 주장은 우파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신경 쓸 내용이 아니다. 개인의 소유권 및 재산권 수호와 그러한 권리의 행사에 대한 자유를 인정하자는 것이 골자이며, 따라서 타인의 재산권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성매매, 마약, 장기매매를 합법화하자는 것이지 이를 장려하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마약과 성매매를 좋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한 것은 개인이 이미 합당하게 얻은 재산을 쓰는 것을 규제하며, 개인의 양심과 생각을 통제하려는 거대정부일 것이다. 그리고, 설령 마약과 성매매를 좋게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국가로부터 침해될 수 없는 개인의 자유일 뿐이다.

2.2. 상속의 정당성과 합리성

이런 점에서 상속세야말로 가장 치졸하기 짝이 없는 세금이다. 첫째. 사유재산권은 이용과 처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것을 그냥 버리고 가든 거지에게 주든 자식에게 주든 얼마든지 자유롭다. 그런데 왜 특정 행위만 금지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거지에게 기부하는 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들먹여가며 칭찬한다. 그런데 왜 자식에게 주는 것은 부당한가? 어차피 둘 다 (사후)증여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주든 그것은 재산권자 뜻에 달린 것이다. 상속이 기회의 평등에 모순된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중세의 신분처럼 국가가 제도적으로 상속을 자식에게만 주어야 한다고 강제해야 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둘째. 상속을 하는 이유는 부를 대대손손 아껴쓰기 위함이다. 즉 미래세대가 방탕하게 날려먹지 말고 이것으로 미래에 더 유익한 일들을 하라는 의미다. 우리는 이것을 저축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서민의 저축은 정당하고 부자의 저축은 그른가? 부자는 항상 방탕해야 정상이라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얼마나 재산권의 본질을 흐리면서 인간을 대상으로 편가르기 및 우열 나누기를 좋아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셋째. 상속이란 결국 다른 수 많은 경제행위 중 한 가지다. 다만 생애 마지막에 이뤄지는 것의 차이다. 생존기간동안의 경제행위는 인정하면서 왜 마지막에만 허용을 하지 않는가? 바로 상속에 의해서 상속자의 인생이 결정이 된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상속이란 행위로 인해 상속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인생의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가 영구화되는 즉 말 그대로 삶과 운명을 바꾸므로 그것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인생이란 상속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각자의 삶을 만들어나가는데 있어서 존재하는 여러 환경과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부잣집에 태어났다고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고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삶을 사는 기초점일 뿐이다. 다만 더 힘드냐 그렇지 않냐의 차이다. 앞으로의 삶은 각자가 알아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재화교환에 있어 가장 큰 분배 특징 중 하나는 생산성이다. 특정한 장소에서 노동이 재화를 벌어들이는 생산성보다 재화가 재화를 벌어들이는 금융노동 생산성이 높을 뿐이다. 이는 극단적으로 소말리아 같은 환경에서 역전된다. 환경과 장소에 따라 수요와 공급, 생산성의 차이가 천차만별인 이유. 게다가 그 다원화되고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공장노동자도 본인의 선택에 한하여 언제든지 주주가 되어 자본가가 될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자본가/노동자로 이분화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가장 큰 오류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주장이다.[2]

게다가 노동 재화와 금융 재화는 양의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금융 규모가 커진 노동 산업은 노동에 대한 자본 교환성이 커진다. 즉 재화를 버는데 있어 노동자의 파이가 커진다.

여담으로 재산의 상속을 부정하는 것은 곧 스웨덴을 거의 홀로 먹여살리다시피 하는 대재벌 발렌베리 그룹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좌파들이 이상향으로 여기는 스웨덴의 복지제도 전반의 붕괴로 이어진다. 애초에 자유시장이냐 정부개입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상속재산의 부정은 그 어느 쪽에서도 인정받을 수 없는 허황된 논리인 것이다. 이미 실패로 끝난 소련이라면 또 모를까...

2.3. 사회적 약자의 성공과 발전

기회균등을 강조하여 경제적 여건이 돼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위에서 언급한 인간은 무생물도 동식물도 아니라는 주장을 반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성공은 그의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지 단순히 그가 얼마나 의욕을 품는가 단순히 얼마나 노력하느냐와는 상관이 없는 주장이다. 노력해도 안되더라 하는 근거는 행동을 노력 혹은 의지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행동은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부여되는 불확실성을 뚫고 자신이 만족할만한 결과를 성취해내는 것이다. 여기에 부자라서 더 성공하고 가난해서 실패하고 장애인이라서 극소수만 성공한다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현실에서 쉽사리 성공하지 못하는 이런 현상 자체는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답은 두 가지다. 첫째, 만약 자신의 물질적 삶 혹은 물질적 제반 환경의 개선만을 원하는 것이라면 본인의 노력 여부과 자유시장에 의해 쉽게 이루어진다. 꼭 환경개선이 아니더라도 최빈국과 개발도상국 사람이 아닌 이상 어느정도 궤도에 오른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지멀쩡한 인간이 굶어죽지는 않는다. 물론 슈퍼스타처럼 상위 1프로에 도전하는 것을 이루고 싶다면 평범한 노력만으로는 힘들고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생각치 못했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발명을 하고 특허를 신청해 독점적인 권리를 인정하는 특허권을 바탕으로 부를 끌어모아야만 한다. 이는 단순 노동이 기계와 로봇에 의해 점점 대체되어가는 오늘날의 정보화 시대에서 남다른 혁신적 사고와 창의성이 강조되는 이유이기도 하며, 반대로 그가 그만큼의 수입을 얻는 것에 대해 자격과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라는 의미도 된다. 상식적으로 그런 업적을 세울 만한 인물은 소수이고 그 소수가 그렇지 못한 나머지보다 재산 상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교환과 희소성의 법칙 상에서 당연하다. 그런데 오직 '저 사람이 나보다 훨씬 수입과 혜택이 많다는 사회적 박탈감'만을 이유로 이에 사회주의적 비판의식을 갖는다면 그게 오히려 부당하지 않은가? 마르크스가 혁명을 주장하던 당시는 지금같은 정보화 시대가 아닌 기계가 공장에 막 보급되기 시작하고 아동과 극빈층에 대한 폭력에 가까운 강제노동이 일상이던 20세기 산업혁명 시기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둘째, 만약 본인만의 영달을 넘어 이타심에 기반하거나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하위 1%처럼 극도로 어려운 생활을 해나가는 최하위 계층의 삶을 더 낫게 만들고 싶다면, 자기 스스로 자발적으로 도와주면 된다. 어렵다면 다른 사람들과 연대해서 도와주면 될일이다. 우파적 자유지상주의는 복지국가나 복지정책을 비판하지 기부와 같은 자발적 복지는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사회주의자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미국은 그렇게 야박한 나라가 아니다. 자기들 세금이 하층민에게 가는 걸 싫어할 뿐이지 자신이 선택한 자선과 기부는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인의 의지가 아나라 자신의 의지이니까.

그럼 여기에 대해 과연 일개 개인들에게 자신의 신념과 혹은 도덕, 감정(충동)에 의거한 자발적 복지는 체계적이지 못하고 매우 가변적이거나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 없는 소리다. 왜냐하면 결국 복지정책은 이타심에 기반해 있지 않는다는 반증이고 결국 정부나 정책 당국 같은 특정 소수의 이타심에 기반한 자의적인 정책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과 무관하게 자기 멋대로 정책을 피겠다는 전체주의적 발상이 아닐 수가 없다. 그리고 결국 뒷받침하는 근거는 사회의 불만을 달래우고 내부 분열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는 단순히 사회 체제의 존속을 위해서라는 독재자적 발상으로 국한될 수 밖에 없다.

재산권 논의 중 하나가 바로 맨 처음 소유권에 대한 논의다. 맨 처음으로 소유한 사람의 권리는 어찌해서 인정되는가? 바로 그 사람이 그것을 받을만한 자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사실이 권리로 이어질 수 없다고 한다면 역으로 왜 사실이 권리박탈 혹은 권리무효로 이어져야 하는가? 내가 나의 노력, 능력 등 각종 작용을 하였음에도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예를 들어 오직 서울에 있는 나만이 그 사물에 사람의 힘을 가했는데 왜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부산의 누군가도 소유여야 하는가 혹은 왜 아무도 소유하지 말아야 하는가? 누군가가 재산의 소유권을 가졌다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 아닌 '기존의 사실에 대한 당위적 증명'이다. 이것이 나의 소유이니 부당하게 간섭하지 말라는 사회와의 계약이 추가된 것이며, 이에 다른 구성원들 역시 자신의 소유권 증명을 위해 동의한 것이라는 소리다. 이것을 사회논리가 아닌 마치 어떤 가치판단도 개입할 수 없는 자연과학적 사실처럼 취급하는 것은 심각한 논점일탈이 아닐 수 없으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상시 비판받는 지점이다.

이것은 소극적 자유적극적 자유의 고질적인 상충과도 밀접한 연관이 존재한다. 소극적 자유는 물리적이며 가시적인 침탈로부터의 탈피가 자유라고 주장하며, 적극적 자유는 어떤 개인이 수행할 수 있는 행위들의 선택지 집합, 즉 기회가 다양한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원의 희소성을 근거로 적극적 자유론을 비판한다. 자원은 언제나 희소하므로, 그 희소한 수단을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그에 상응하여 타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의 범위를 제약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자원을 소비한 만큼, 다른 개인이 소비할 자원은 줄어든다. 즉, 만약 적극적 자유론을 일관적으로 적용한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가 부당하다는 언어도단에 봉착한다는 것이다. 즉,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소극적 자유, 즉 자유를 행위의 정당성으로 정의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강변한다.(G. A. Cohen 1995)[3] 자신이 사용하는 수단이 그 자신에게 있어서 정당한 수단인지, 혹은 정당하지 않은 수단인지의 여부가 행위를 수행할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이다.(G. A. Cohen 1995) [4] 즉, 나는 살인을 할 자유(정당성)가 없는데, 그 이유는 타인의 신체라는 수단이 나에게 있어서 정당성이 결여된 수단이기 때문이라는 것.

2.4. 사회적 약자의 성공과 발전에 대한 보론

물론 인간은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바로 자녀의 빈곤은 그 자녀를 낳은 부모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빈곤을 물려주고 싶지 않으면 자식을 낳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여건이 안 되는 부모들이 계속해서 자녀를 낳아온 것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가부장적 전통 때문이지 결코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의 책임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성리학이 국가이념이던 조선이나, 기독교적 왕권신수설이 존재하던 유럽의 중근세 등이 해당한다. 이러한 다산의 미덕은 체제가 가장 강조하는 최우선 규범이기도 했고, 또한 동물적인 본능이 결합하여 현대까지도 끈질기게 생명줄을 붙들고 있다.[5]

하지만 이미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는 저출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의 젊은 세대는 확실한 여건이 보장되지 않으면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을 새로운 미덕으로 삼기 시작했다. 자유시장경제에서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력 또한 수요와 공급 법칙의 영향을 받는다. 만약 모든 가난한 부모들이 자식을 낳지 않아서 인구가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노동력의 가치는 올라간다. 기업은 부족한 노동력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채용 기준을 낮추고, 높은 임금을 제공하며, 사내 복지를 향상시킬 수 밖에 없다. 또한 인구는 노동력일 뿐만 아니라 구매력이기도 하다. 기업은 인구 증가를 유도하여 구매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사적 영역에서의 자발적인 사회복지를 제공 할 수 밖에 없다. 기업의 복지기부는 착하면 하고 아니면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지극히 가치중립적이고 합리적인 행위이다.

이에 대해 '가난한 사람은 자식을 낳을 권리도 없느냐?' 라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인간의 탄생은 부모가 아닌 자식의 권리일 뿐더러, 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무조건적인 복지의 남발은 건전한 시장경제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남아있다. 화폐는 단지 중앙은행이 지급을 보장하는 유가증권에 불과하다. 실물 자원을 무시한 채 단지 돈을 무한대로 찍어내서 모든 출생자들에게 과도한 출산장려금과 양육비를 지급하다보면 결국 그 길의 끝에는 감당이 안될 인플레이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5. 자유지상주의는 서민에게 도움이 된다.

부익부의 이유 중 하나는 국가가 화폐발행권을 독점하여 제한 없이 찍혀 나오는 불태환권 종이 화폐를 강제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민들이 저축한 돈의 가치를 훔쳐서 화폐발행권을 가진 정치인들과 자산을 가진 부자에게 이전시킨다. 또한 세금 역시 불태환 화폐로 걷어갔기에 이러한 독점으로 불태환권 사용을 강제하였다. 서민을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세금 감면이란 제도를 사용해야한다. 세금을 걷으면서 동시에 찍어낸 화폐를 뿌리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또한 서민이 월급을 모으는 속도보다 자산 가격이 오르는 속도가 더 빠른데 이 역시 화폐 가치 하락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생산량이 한정적인 금을 이용하여 금본위제 혹은 기타 태환권을 사용하자는게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이다.[6] 이럴 경우 화폐 가치 하락으로 인해 빈자가 계속 빈자가 되는 현상을 기존 인플레이션 체제보단 완화시킬 수 있다. 또한 서민을 돕겠다는 정책 역시 소비세 면제 등의 정책이 기존 정책보다 더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소상공인과 서민을 도울 수 있으며 전재산이 일부 늘어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2.6. 현행 체제의 경제적 문제점

또한 현행 경제 체제의 문제로 인해 이를 개혁하는 것이 서민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화폐가 시장에 유통되는 출발점은 중앙은행이 국가가 발행한 국채를 사들이는 것이다. 물론 중앙은행은 노동자들처럼 노동을 통해 화폐를 구하는 것이 아닌 국가에게 그러한 권리를 받고 찍어낸다. 그러나 화폐를 찍어낼 때 국채를 사들이면서 찍어내는데, 결국 시중에 풀린 화폐는 동일한 양의 부채와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 또한 부채는 이자가 붙으며 사회 전체의 총 부채는 사회 전체의 총 화폐보다 많아진다. 또한 이러한 부채를 돈이 풀려있을 때도 못 갚았는데 돈을 갚아서 총 통화량이 더 줄어버리면 더 못 갚을 우려가 존재한다. 따라서 부채라는 것은 갚을 수 없거나 갚기 힘든 구조이기에 만기에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하여 더 많은 화폐를 찍어내어 그 화폐로 이전 부채를 갚는 것이다. 다만 만기는 미뤄졌으나 부채는 더 커졌다는 우려가 있다. 이런 식으로 서민들의 자산을 탈취하여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해졌을땐 금리를 올리는 척 하여 자산 가격을 폭락시킨다. 그리고 폭락한 자산을 싼 가격에 사들이며 실물 자산 및 부동산을 얻을 수 있으며 경기변동 사이클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경기 변동이 몇 번 반복되다 보면 금리를 장기우하향 시켜 돈을 풀며 하이퍼 인플레이션 혹은 대규모 파산이 일어난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가는 대신 금리를 올리고 돈을 거둬들이는 방식이 채택된다면 돈을 못 갚을 것이고 뱅크런이 발생될 수 있다.[7]

은행이 화폐를 버는 방법은 이자를 주고 화폐를 개인들에게 빌려서, 더 큰 이자를 받고 그 화폐를 나눠주기 때문이다. 개인들에게 3% 이자 주고 1년짜리 예금상품 팔아서 그걸로 5% 짜리 10년물 국채를 사면 은행은 공짜로 2%를 무위험 수익으로 얻을 수 있다. 이것은 금융상품 마다 만기가 다르다는 것을 이용하고 또한 개인들이 갑자기 은행에 몰려와서 화폐를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성립이 된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사이클에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막겠다고 대출을 조이고 만기를 안 늘려주고 오히려 금리를 올려버리면 화폐 가치의 장기적인 우하향을 고려한 영끌족, 이자나 겨우 내던 중소기업, 레버리지를 한 투자자들에게 피해가 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돈을 빌려준 은행은 자기가 대출해둔 돈을 최소한의 손실을 보면서 회수하기 위해 저들의 자산을 대규모로 시장가에 덤핑을 하게 되고 이를 감지한 다른 보유자들도 더 떨어지기 전에 다 던져버리려고 하고 그것 때문에 더 떨어지고 현대사회의 복잡한 금융시스템에서 누군가의 자산은 곧 누군가의 부채기 때문에 이들이 망하면 이들한테 받을 화폐가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망하고 그렇게 연쇄 파산이 도미노처럼 번지게 된다. 국채 또한 전혀 안전하지 않게 된다. 국채가 안전 자산 취급을 받는 것은, 만기 까지 기다리면 원금이 보장되기 때문인데, 바로 그 만기 까지 기다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빚을 갚을 때는 화폐를 줘야 하는 것인데 내일까지 안 갚으면 내가 파산이며, 국채를 들고 있는 사람들도 국채를 팔아서 화폐를 번 다음 그걸로 갚아야 하는데 위의 상황에서는 금리가 올라가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발행한 낮은 이율의 국채의 가격은 떨어진다. 즉 채권을 만기까지 안 들고 중간에 팔게 되면 확정 손실이 나게 된다.
그래서 은행은 갚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대출을 갚을 화폐가 없다. 그 분위기가 제 2금융권을 넘어 제 1금융권에 다다르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하이퍼 인플레이션과 극심한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대규모 파산은 화폐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현상, 크게 올라가는 현상으로 언뜻 보면 정반대 되는 현상같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 일시적 단기적으로 가치가 올라간 화폐로 폭락한 자산을 사들이려고 해도, 은행이 버티기에 그 화폐를 뺄 수가 없기 때문에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 된다는 점이서 완전히 동일한 현상의 두 가지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화폐가 그 본질적인 가치, 즉 제로로 돌아간 것이다.

이러한 위험은 서민들의 재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중앙은행 및 현행 화폐를 반대하며 금본위제 및 감세[8]를 지지하는 경향이 크다.

2.7. 자유의지라는 용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체로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그 자신이 과학도거나, 혹은 문과적 인간이라고 해도 과학에 매우 호의적인 이들이다. 물리학적으로 자유의지의 존재가 부정될 수도 있다는 것은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들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거기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 입장이 대다수일 것이다. 자유의지라는 말이 잘못되었다면 우선은 '사람들이 지금껏 자유의지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무언가' 라고 해도 좋다. 가령 강한 결정론을 주장하는 어떤 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만일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감금당한다면 그는 빨리 풀려나서 자유롭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구타한다면 얼른 구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 납치나 구타가 애초에 정해져있던 순리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인간이 정해진 목적을 통해 행동한다라는 공리는 그 것이 결정론적이든, 자유의지론적이든, 여전히 부정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어떤식으로 목적이 형성되었든, 목적 자체의 존재는 여전히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목적에 따라 행동한다는 공리가 유효한다면 여전히 인간행동학은 유효하고, 그렇다면 우파 자유지상주의가 정당한 이유 또한 증명이 된다. 이렇듯 자유지상주의 담론에서 논의되는 '자유'라는 것은 자연과학에서 논의되는 결정론/비결정론 논쟁과는 관계가 옅은 내용이다.

한때 존재했거나 혹은 현존하는 모든 권위주의적 체제들은 모두 독재로 치달았다. 구좌파에는 노멘클라투라, 핵심계층 등이 있으며, 신좌파는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인 태도로 인해 사상적 부모라고 할 수 있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자들에게 좌파 파시즘이라는 비난을 들으며 버림받았다. 한편 권위주의 우파에는 군사정권, 문민독재 등의 사례가 있다. 또한 그 모든 권위들이 소수의 무력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전근대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주도 하에 갑자기 근대적인 독재체제로 전환한 메이지유신과 같은 사례는 오히려 일부에 불과하며, 근대 이후에 출현한 히틀러, 마오쩌둥, 박정희 등의 사례들은 모두 민중의 대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이루어졌다. 이렇듯 다수결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며, 다수결이 잘못된 방향으로 치달았을 때 옳은 선택을 하는 일부 소수는 대책 없이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애초에 '권위'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 권위가 옳은지 아닌지는 별 상관이 없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모두가 동의하는 권위는 있을 수도 없을 뿐더러, 당장은 옳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권위가 있다 하더라도 언제든 악으로 치달을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수많은 관점을 적용해서 논점을 흐리는 것은 참으로 의미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이름에 "민주"라는 글자가 들어간 나라 치고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는 하나도 없다. 민주집중제 등 이름 외에는 민주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왜곡된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또한 본질은 무시한 체 쓸데없이 담론의 크기만 키우다 보면 혼란 속에서 왜곡되고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단지 자유라는 단어의 철학적(?) 해석 때문에 계속해서 반대파들로부터 비생산적인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리버테리어니즘은 차라리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을듯 하다. 반(反)권위주의라고 하면 어떨까?

2.8.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와 공화주의와의 관계

우파적 자유지상주의는 보수주의가 아닌 우파라는 극히 드문 위치를 가지고 있다. 모든 우파들이 보수주의자라고 맹신하는 몇몇 좌파들은 이를 공격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수주의라고 보기에도 어폐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파적 자유지상주의는 좌파에게 도저히 인정받을 수 없는 사상이다. 반대로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들 또한 좌파를 강력하게 거부하기도 한다.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신좌파들이 통상 좌파적 자유지상주의로 분류되나 정작 신좌파들의 행태를 보면 실질적으로 자유지상주의적인 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우파적 자유지상주의는 같은 우파 사상인 공화당과 친하다. 미국의 사례를 봐도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따로 정당을 만들기도 하지만, 또한 공화당(미국)에도 다수가 속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급진적인 (우파적)아나키즘대신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주장함으로써 공화주의자들의 거부감을 누그러뜨리고, 공화주의자들 또한 가시적인 실적을 거둠으로써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현실적인 협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보기에 좌파는 경제적으로 분배에만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성장을 저해하거나, 심지어는 전체적인 파이를 축소시키기까지 한다. 반론으로 북유럽 부국들의 사례가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북유럽 부자국가들은 인구가 적고 돈이 많기 때문에 좌파 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이지, 좌파 정책을 펴서 돈을 많이 번 것은 아니다. 발렌베리 없는 스웨덴, 석유 없는 노르웨이를 생각해보라. 아랍권 산유국들의 사례를 봐도 정치적인 수준은 차치하고 복지수준 자체는 북유럽에 못지 않다.

실제로 청교도적인 성격이 없는 세속적 공화주의자들의 경우 매춘이나 가벼운 마약[9]의 허용을 긍정하는 경우도 있다.[10] 반면 비판 문단에서는 일관적으로 극단적인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데, 장기기증의 경우 떼어내면 생명에 지장이 있는 기관은 적출 즉시 살인행위로 이어지기 때문에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에 지장이 없는 기관이나 사후기증의 경우 단지 일종의 공공재적인 성격으로서 국가가 통제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일 뿐, 금전적인 대가가 주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장기를 노리고 일어나는 범죄나 무허가 사채업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장기 강탈은 애초에 치안의 문제이다. 비단 장기매매 자체에는 아무런 도덕적인 긍정도 부정도 없는 것이다. 또한 현재 장기기증자들에 대한 예우가 형편 없다는 비판이 줄을 잇고 있는데, 이럴 바에는 차라리 장기매매를 인정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수요자들에게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2.9. 개인주의는 현실에서 존재 할 수 없는 이상향이기만 한 것인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것이다." 이는 신좌파들이 밥먹듯이 주장하는 구호다. 문명의 발전에 따라 개인주의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기 때문에 구좌파라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아주 수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이가 아닌 이상 어느정도는 신좌파적인 담론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좌파는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이 당연한 반면, 우파가 같은 것을 말하면 뜬구름 잡는 망상이다? 이런 주장은 내로남불에 불과하다.[11]

그렇다면 자유지상주의에서 개인의 무장과 투쟁이 인정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이의 부당한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수호하는 방어권 및 정당방위와, 더 나아가 국가의 폭거에 대항하는 저항권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저항권은 현실에서 분명히 유효하게 존재하는 것이며 자유지상주의는 이를 현재보다 확실하고 모순없이 적용하는 것을 지향하는 사상이다. 즉 자유지상주의에서 세금 철폐 등 언듯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경제적 주장을 하는 것은 그것이 기업가와 자본주의를 전적으로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집단이 개인을 억압할 수 없다는 개인주의를 절대적으로 적용하고 사회적 혁신의 잠재성을 결코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개개인의 '저항권'과 경우에 따라서는 무력투쟁이 인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무력이 동원된다고 해서 자유지상주의가 아니라는 주장에는 심각한 어폐가 있으며, 그것을 반란으로 보는 것은 더더욱 논점을 호도하는 것이다.[12] 한 마디로 남의 권리를 빼앗는 무력이 아닌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무력이며 돈이 핵심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혁신이 핵심이고 돈은 그저 그것들의 장식품인 셈. 더군다나 우파 자유지상주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개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노동자나 정부가 자본가의 자유를 침해했을 때 뿐만이 아니라 그 반대로 자본가가 노동자나 정부의 자유를 침해했어도 가차없이 이에 응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응징의 주체는 결코 일반 대중이나 소수 특권층뿐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유로운 활동을 잘 하면서도 그 개념조차 이렇게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부의 정도와는 무관하게 혁신을 거듭할 수 있는 원동력이 차고 넘치는 이들도 포함된다. 게다가 이 응징자들의 자리 역시도 하나가 아닐 뿐더러 그들도 역시 서로서로를 견제하는 것이 여전하기 때문에 자격 없는 응징자를 내쫒는 것 역시도 문제가 없다.[13]

그리고 그런 것을 따지기 이전에 우파 자유지상주의가 자본주의 계열이 아니라고 말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우파 자유지상주의가 조건 없는 하이브 마인드급의 일방적인 만장일치를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사실상 우파 자유지상주의에서는 법률을 제정하는 상황 외에는 만장일치가 필요 없으며 법률로 모든 인간에게 체제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면 특정 사상을 옹호하는 것을 체제 전복으로 보지도 않는다. 민주주의와 결합된 자본주의는 다른 체제들과는 달리 자본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걸로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가능하게 허용해 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해당 체제의 완전한 전복을 노리기보다는[14]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걸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똑같은 논리로 우파 자유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잘 먹고 잘 살기만 한다면 사실 그것만으로도 체제를 전복시키지 않겠다고 동의한 것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인간이 절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소극적 권리는 너무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민사법만 존재하고 형사법이 적용되는 법률이 없는 사회[15] 그것이 바로 자유지상주의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파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체제론이란 정부는 법률을 강요하는 주체로서 이 주체가 나에게 법률을 강제할 정당성이 없으니 개인이 이에 거부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 기존 체제를 뒤엎고 어떤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서 새로운 주체를 세우겠다는 개념이 아니다.[16] 한 마디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게 아니라 개인의 선택권을 극대화하는 것이며 이 선택이 다른 이의 소극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국가가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들에서 우파 자유지상주의 자체에 이렇게 다른 사상과 생각을 가진 자라도 충분히 잘 대우해주고 불이익을 주지 않는 민주성이 내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우파 자유지상주의의 가장 큰 적은 포퓰리즘이나 엘리트주의 따위를 이용해서 돈이나 자본가 같은 특정 대상이나 계층, 개인 등을 악마화하며 만악의 근원이라고 무분별한 비난을 가해 강제성을 띤 법률과 제도를 만드려는 행동들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상술한 무장과 무력의 필요성 역시 그러한 시도에 개개인이 실질적으로 반발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해 인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나는 국가의 통제가 좋으니 세금 내고 형사법 적용 받으며 살고 싶다.'라고 말한다면, 진성 우파 자유지상주의자는 '그렇다면 너는 너와 뜻이 맞는 집단을 만들어서 그런 방식으로 살 되, 그걸 거부하는 자들에게까지 그런 삶의 태도를 강요하지 마라.'라고 단언할 것이다. 자유지상주의의 본질이 아무 지배적 체제도 인정하지 않는 '반 권위주의'인 시점에서 체제를 강요받고 있는 것은 오히려 우파 자유지상주의자들인 것이다.

무엇보다, 꼭 자유의지주의적인 정부가 세워지지 않더라도 자유의지주의자들의 논리와 주장은 모든 사상이 그렇듯이 얼마든지 현실에 존재하는 정부의 정책들을 설계하는 데에 영감을 줄 수 있다. 공익을 위해 사적인 경제적 수요와 욕구를 제어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는 공산주의 이념을 전면적으로 채택한 정부는 이제 드물다못해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많은 공산주의적인 정책들[17]은 많은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산의 최적화를 위해 관공서와 우체국의 서류작업의 일부를 사유업체에 맡기거나, 교육의 일부를 사적 영역에 개방하는 등등, 굳이 모든 정부를 뜯어고치지 않아도 정부 운영에 상당히 적용할 수 있는 자유의지주의적인 정책들 또한 많이 존재한다. 세상에 100%는 존재하지 않으며, 공산주의든 자유의지주의든 어느 이념의 이상 사회든 결국 끝없이 다가가야 하는 점근선으로 바라보아야지, 이 사회를 한 치의 오차도, 이론적 결함도 없이 완전히 실현하려 하고자 한다면 그런 것이야말로 종교 근본주의자들 내지는 교조적인 맑스주의자들이 해오던 그것들과 같은 우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2.10. 강요야말로 과학과 가장 거리가 먼 개념이다.

과학이 지금과 같이 절대적인 신뢰를 얻게 된 이유는 그 성과로 인한 효용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이 지금과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비결은 독선을 배제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창조론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았다면 진화론을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백신의 위험성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는다면 백신의 안전성을 개선해나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세상 어디에나 좀 별나고 극단적인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과학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아니, 무의미한 정도를 넘어서서 심지어는 과학적 방법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과학주의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비판 측에서 예시를 드는 집단들은 자유지상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미쉬 등으로 대표되는 몇몇 다양한 상황의 보수적 기독교도들로 보인다. 그들은 종교적 이유로 강한 결정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자유지상주의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18] 랜드 폴이 그들의 자유를 존중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들이 자유지상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애초에 서로 상관이 없는 두 집단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근거 자체가 잘못 된 비판이다.

또한 자유지상주의가 백신의 접종을 강제하거나, 진화의 법칙을 교육하는 것을 강제하는 것을 반대하므로, 과학과 상치되는 반과학이라는 통설에 있어서는 이견의 여지가 다분하다. 왜냐하면, 사실당위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양자를 혼동하는 것은 자연주의의 오류나, 도덕주의의 오류에 부합한다. 자연과학은 사실에 국한된 과학이지 어떤 행위나 정책이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를 판별하는 당위의 과학이 아니다. 과학이 유일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창조가 아닌 진화가 타당하다는 것이며, 백신이 병원체를 퇴치하고 발병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법적으로 개인들로 하여금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관한 문제는, 자연과학이 아닌 정치철학의 영역이다.[19]

2.11. 과연 자유지상주의자는 도덕적인 이유로 재산권을 옹호했을까?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인 한스-헤르만 호페는 논증윤리를 통해서 재산권의 존재를 증명했다. 논증윤리란 한스-헤르만 호페가 주장한 재산권에 대한 논증으로, 구체적으로 호페는 논쟁 과정에서 그 누구도 자신이 스스로 상정하고 있는 그 어떤 전제도 일관되게, 논리성을 갖추면서 부정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즉, 일부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가 단순히 도덕적인 이유만으로 재산권을 옹호했다고 해서 모든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당장 비판 단락만 해도 수많은 리버테리안 중 단지 기독교 색체가 있는 사상가의 논증만을 가져와서는 자유지상주의 전체의 공인된 논증인 것 마냥 일반화하고 있다.
논증은 ‘아무 맥락과 근거가 없는 명제(free-floating propositions)’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희소한 수단(scarce means)’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 행동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한 개인이 논증이라는 ‘명제적 교환(propositional exchanges)에 참여함으로써 ‘입증(demonstrates)’하는 ‘선호(prefer)’가 곧 사유재산임이 나타난다. 첫째로, 만약 우리가 ‘자신의 물리적 신체(his physical body)’를 ‘독점적으로 이용할 권리(right to make exclusive use)’가 이미 전제되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어떤 것도 제안할 수 없었을 것이며, ‘논쟁의 수단에 의해 제시된 어떤 명제(any proposition by argumentative means)’에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논쟁은 서로가 ‘자신의 신체(one’s own body)’에 대한 ‘상호 배타적 통제(mutually exclusive control)’를 ‘인정(recognition)’하는 행위로, 이는 말해진 명제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의견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at least on the fact that there is disagreement)’ 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언제나 동의가 가능하다는 ‘명제적 교환으로서의 논쟁의 특색(the distinctive character of propositional exchanges)’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이로써, 어떤 ‘규범(norm)’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소유권(property right to one’s own body, self-ownership)’이 ‘선험적(a priori)’으로 정당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정말로,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제안한다.(I propose such and such.)”를 말하기 위해서는, ‘자기 신체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the exclusive right of control over his body)’이 ‘정당하다는 규범(a valid norm)’을 전제 했어야만 했다. 자기소유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누구나 ‘실행모순(practical contradiction)’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게 주장하는 그 순간, 그는 이미 반대하고자 했던 바로 그 규범, 자기소유권은 암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The Economics and Ethics of Private Property》, 한스헤르만 호페

그리고 설렁 도덕적인 이유가 맞다고 해도(물론 안 그럴 가능성이 훨씬 더 높지만) 우파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은 극단적인 유물론적 사고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세상이 정말 단순히 빈부의 싸움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겠는가? 종교, 문화, 정치 등의 여러가지 이유가 엄연히 존재하며, 그것이 경제적인 이유를 넘어서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더구나 오늘날의 노동조합들은 임금 인상, 근로 환경 개선, 근로 시간 단축을 요구하지 기업이 무너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기업이 무너지면 그건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아무런 득도 되지 않으며, 이렇게 되면 기업이 망해도 자본가들은 아무 책임이 없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자본가들은 아무 것도 한 게 없을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 논리대로라면 기업이 망하면 그건 십중팔구 노동자들이 게으르거나 무능해서 그런 거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딱히 별 노동도 안하고 노동 현장에 있지도 않는 자본가들이 어떻게 자신의 노동자들을 방해해서 수익을 못 내게 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런 짓을 할 자본가가 있기는 한 걸까? 더구나 공산주의 사회는 실업자가 없기 때문에 국가가 아무리 부자라도 그 모든 국민들에게 임금을 무조건 주어야 하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더 적은 임금 밖에 줄 수 없다. 그런 사회가 합리적이라면, 도대체 공산권이 무너지고 냉전에서 패배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냥 서방권이 부를 부당하게 독차지해서 그랬던 것인가? 무엇보다 이 부분은 경제만 잘 돌아가면 만사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인 마냥 주장하는데, 그럼 애초에 왜 비판을 가하는 것인가? 자본가들이 기업을 세우지 않으면 돈이 제대로 순환하지 못해 빈부격차가 더 커질 게 뻔한데다가 국가가 세금으로 하는 복지정책도 예산이 한정되어 있어 한계가 있는 마당에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기는 한 건가? 애초에 최고의 복지가 일자리 아닌가? 아니라면 기업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게 해주는 정부는 최악의 정부인가? 물론 아니다.

결국 우파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의 주요 근거인 부의 불평등은 역설적으로 그 외의 조건들 모두를 일관되게 무시하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 셈이다. 인권을 들먹여도 전부 불평등으로 인한 문제라고 지적하는 선에서 끝날 뿐이지, 그 개인이 가진 종교, 문화, 정치 등의 다른 요소들은 일절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걸 고려하는 것은(심지어 당사자가 말해도!) 순진무구하다 못해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일쑤인 것이다. 만사가 경제만 잘 돌아가면 자동으로 해결될 거라고 보는, 부와 무관하게 인간이 가진 이성, 심리, 신념, 이상, 행복 등의 요소가 전부 허상이라고 주장하는 셈. 굉장히 오만하고 단순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정작 현실에서는 그나마 이론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던 동독이 문화와 행복 등 경제를 제외한 다른 요소를 끝까지 무시한 결과 불만에 찬 인민들 스스로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오히려 순진무구했던 측이 누구였는지는 명확하다. 애초에 그 '순진하다'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루소조차 사회계약과 공유의 본질을 시민의 행복과 이성을 증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봤다는 점에서 다른 조건 다 무시하고 경제에만 집착하는 것을 현실적이라고 볼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미국 예외주의라고 볼 근거 역시 어디에도 없다. 당연하겠지만 미국의 현재 주요 양당인 민주당, 공화당은 물론이고 과거의 주요 정당들인 연방당, 민주공화당, 국민공화당, 휘그당, 입헌연합당 모두 우파 자유지상주의를 표방하지 않는다.[20] 그저 자본가들이나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이윤벌이를 매우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수단이다 보니까 사용하는 것 뿐이지 이게 정치의 영역까지 침범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미국이 기업국가인가? 애초에 우파 자유지상주의는 경제의 독립과 그에 따른 권리 보장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그런데 정치의 영역에 발을 들여 지배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게다가 기회의 평등이 안 지켜지고 있다는 주장도 또 부의 문제에만 허구한 날 집착한다. 이는 오로지 부만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나 다름 없다. 애초에 부자라고 해서 무조건 가난한 사람보다 더 기쁘게 사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이에 대한 비판이 현실적이라면 유대인 배후자본설음모론이 아니라 학계의 정설이 되어야 정상이다.[21]

즉, 비판 단락의 모든 경우는 전부 이윤 추구만이 최고의 목적이므로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일절 고려할 이유가 없는 기업국가가 있을 때나 합당한 이야기이다. 왜 시장 권력에 의한 지배가 그렇게 강했는데도 어째서 현실에는 여전히 손해를 감수하는 공기업과 복지가 존재하고, 정치 권력이 멀쩡히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왜 전기, 수도, 난방, 가스 등의 요소는 지금도 민영화되지 않고 공기업이 다루고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기업인들은 경제적인 분야에서만 전문가이지 다른 분야까지 다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군사적, 외교적,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도 다 고려해야하는데 이 분야에서 비전문가인 기업인들이 아무런 문제없이 통치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애초에 자본주의, 우파 자유지상주의와 같은 사상들을 일종의 '부르주아 독재'로 간주하고 민영기업에 의해 모든 것이 좌우되고 있으니 그런 민영기업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국가에게 권력과 생산 시설, 자본을 되찾아주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구원하여 그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노동을 장려하자는 사상[22]은 이미 냉전의 종식과 함께 자멸한지 오래다.

무엇보다 비판 단락의 '매춘'이라는 예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떠한 상품을 만드는 생산자들은 모두 각자의 이유가 있다. 매춘 역시 서비스 생산의 일부일 뿐이다. 만약 매춘이라는 서비스를 생산하기 싫다면 단순 노동 등 다른 노동을 할 방법도 있다. 어찌됐든 아무리 불건전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다른 노동을 제치고 그것을 선택한 것은 이유가 있다. (마땅한 노동기술이 없든, 그러한 행위가 타 노동보다 더 벌이가 크든)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그 매춘이라는 행위가 정말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은 것인가? 만약 그 사람이 상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면 별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매춘도 상점 아르바이트도 결국 노동과 서비스 제공이란 측면에서 전혀 다르지 않다. 단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떤 감정을 가지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상점 아르바이트를 한 가난한 사람도 매춘을 하는 사람도 결국 본인의 판단으로 그 직업을 선택한 것이다.

3. 비판

3.1. 윤리관에 대한 비판

자유지상주의자는 성매매, 마약, 도박, 장기매매 등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에게만 피해가 갈 수 있는)개인적 일탈'에 해당하는 행위를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과거 진중권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공병호를 디스할 때 '님이 원하는 사회가 되면 장기매매도 판치는 퍽이나 아름다운 사회가 되겠군요'라는 말을 곁들이기도 했다. 또한 안전벨트나 오토바이 헬멧을 쓰지 않는 것에 대한 처벌 같은 것도 거부하기도 한다. 그건 곧 개인의 자유국가라는 이름으로 제한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도로같은 경우에는 그 소유주가(사인이든 공공이든) 규칙을 만들고 사유물에서 개인을 퇴거시킬 권리도 있다. 그리고 당연히 피해를 봤을 때 당신이 보상을 청구할 수도 있다. 반대로 말하면, 그 도로가 자신의 사유물이거나, 그 도로의 주인이 "타인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안전을 책임지게끔 제3자가 강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는 자유지상주의적 사상 하에, 그런 규칙을 별도로 만들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핼멧이나 보호기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남을 상품처럼 보고 가치를 매기는 식으로 위험을 강요하는 잣대와 같다. 곧 돈으로 본질을, 세상을 살 수 있다면 당하는 사람의 자유는 제한될 것이고 수많은 혼란이 생겨날 것이다. 개인이 국가랑 맞먹을 수 있으며, 든든한 우방을 구성할 복제인간|생물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충실한 애완동물을 인간보다 더 뛰어나게 뜯어고치거나 인간을 도구만도 못하게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지받고 불가침의 영역으로 굳어가 살아남을수록 합리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능률과 절약의 이름 하에 권력의 남용과 지탄받을 행위의 정당화는 더욱 쉬울 것이다.

모든 자유주의의 공통된 고민거리인 '인간 사회는 본질적으로 자유가 일부 제약될 수밖에 없으며,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면 타인의 자유가 침해된다'는 것도 문제이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자유의 일부를 제한받을 것을 타인에게서 강요받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사회학에는 이것을 '사회화'라고 부른다. 자유가 제한되는 정도는 사회의 관습에 따라 다르지만 어쨌거나 수백킬로미터 반경 내에 타인이 없는 오지 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피할 길이 없다.

어쨌든 자유지상주의의 이러한 극단적인 관점은 보통 자유주의자들에게조차 좀 맛이 가거나 괴상망측한 소리로도 들릴 수 있으며 국가주의자나 보수주의자들이 들으면 혈압 오를 내용일 수 있다. 때문에 도덕성을 더 강조하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선 자유의지가 선(善)의지로 발현될 수 있게 하는게 진정한 자유주의라는 논쟁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마약하고 성매매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윤리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일 뿐이긴 하다. 그러나 '다수의 윤리관에 반하는 일탈이 발생할 수 있지만, 자유에 따른 결과일 뿐이니 상관없다.'는 입장은 국가가 어느정도 윤리를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다수 정치철학적 입장의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제프리 프리드먼(Jeffrey Friedman)은 이들이 정의한 자연법이 사유재산권 추구의 우선성에 대해서 일관성이 없다고 말한다.
"…자유지상주의가 평등주의라는 의견에 우리는 대체 왜 (중략)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할 자유가 동등한 인권에 의해 제한되어야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희생하여 막대한 재산을 소유할 자유가 평등한 인권에 의해 훼손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기는지 묻는다. 이것 만으로도 자유주의의 나머지 철학적 사례에 대해 결정 지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략) 사유재산권에 대해 바로 이런 발상은 임의로 정해진 권위가 피어날 가능성을 포함해, 개인의 독점적 권위가 "잘못된 행동에 권리를 부여해 합리화하도록[23] 만든다."[24]

- Friedman, Jeffrey (1993).[25]

현실적으로 자유지상주의를 이루는 논리상의 완벽한 자유만으로 사회는 운영될 수 없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자유지상주의는 경제적으로 사유재산권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는 자들의 힘과 권위에 기댄다는 문제가 발생하며 이 과정에서 권력자들의 책임면피성 도구로 이용될 소지가 있다.

3.2. 사회복지 미비로 인한 기회의 평등의 위기

자유의지주의자들에게 있어 이 문제는 '그게 뭐?' 하고 끝날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좌파적인 관점에서 관찰한다면,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이에 따라 사회의 계층화를 불러올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미국 사회는 탈락자에 대한 무자비와 계층화 때문에 사회적 안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26] 미국 정부에서는 나름 이 문제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듯 하지만[27] 쉽진 않아보인다.

자유지상주의의 이념상, 상속권자의 상속권을 빼앗을 수 없다. 그러면서 세금을 통한 부의 재분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이를 위한 대안으로 기부와 자선, 봉사활동을 이야기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또한 전적으로 개인들의 선택이기에 기대할 만한 물건들이 아니다.

3.3. 법철학적 의문

법철학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의문이 제기된다.

사유재산권은 왜 신성시 되는가?

이는 계약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의 결과물에 대한 보호가 이뤄지지 않으면 계약 당사자의 지위가 불안정해지고 이는 즉 법적 안정성의 저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 많은 국가에서 헌법상 규정하고 있듯이 국가안보나 공공복리를 위해 사유재산권 및 국민의 기타 기본권은 법률로써 제한될 수 있다.

만일 기본권 제한을 막기 위해서 최소한의 법률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면, 사유재산권은 강자들의 전유물이 될 것이며, 심지어 강자마저도 사유재산을 온전히 간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28]

3.3.1. 사유화의 철학적 난제들

한 사람이 무엇에 노동을 가하는 행위가 왜 그를 그 무엇의 소유주이게 하는가? 그 이유는, 아마도 그 사람이 그 자신의 노동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가 소유한 것에 의해 침투된, 이천에 소유주가 없는 것이었던 것을 소유하게 하기 빼문일지 모르겠다. 소유권이 나머지에 스며들어간다. 그러나 내가 소유한 바를 내가 소유하지 않은 바와 섞음이, 왜 내가 소유하지 않은 바의 취득이라기 보다 내가 소유한 바의 상실이 아닌가? 내가 한 강통의 토마토 쥬스를 소유하고 있어 이를 바다에 부어 그 입자들(내가 추적할 수 있 도록 방사선이 적어진)이 바다 전체에 골고루 퍼지게 한다면, 나는 이 행위를 통해 바다를 소유하게 되는가, 아니면 어리석게도 나의 토마토 쥬스를 허비한 것인가?
로버트 노직, 로버트 노직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221쪽- [29]
(P) 개인 A가 자신의 노동을 대상(object) Q와 혼합하는데 일종의 범주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물체(object)와 혼합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다른 물체(object)입니다. 그러나 노동은 물체가 아닌 행위(action)로 이루어진다. 일련의 동작이 물리적인 객체와 어떻게 혼합될 수 있습니까? [30]
-제레미 월드론Jeremy Waldron(1983), 《Two, Worries About Mixing One's Labor》- [31]

노동으로 사유화가 발생한다는 관점은 그의미의 불명료함 때문에 여러 논쟁이 있어 왔다.

3.4. 사적 자본의 국유화에 대한 고찰

마르스크수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언론사를 기업이 소유하나 국가가 소유하나 자본가들의 소유라는 점에서 다른 건 하나 없다고 재반론 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생산 방식을 토대(하부구조)로 한 국가 자체(상부구조)가 자본가들의 위원회라는 것이다. 다만 이행기 체제의 노동자국가이거나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하였다면 이들은 사적 자본 철폐의 수단으로서의 국유화에 찬성한다. 실제로 소련에서는 신경제정책 이래로 '사적 자본'을 국유화하는 방식을 통해 사적 자본을 철폐하였다. 다만 그 이행기 체제의 한계로 사영기업은 영세하지만 존재하였다.[32]

흔히 재산개념을 비판했다고 알려진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이 주장했던 것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소유(possession)물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점유와 사용(occupancy and use)'[33] 개념에 근거해서 '자본주의적 재산(capitalist property)'에 해당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하는 것도 그러한 개념에 근거해서 자원을 직접 사용하는 사람들의 자치 공동체가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34] 이러한 자치 공동체는 '동의를 받은 권력에 의한 통치'를 추구하는 주류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방식이나 '민주집중제'에 의해 완벽히 민주적이지만 한 번 위임된 권력이 독재를 할 수 있다는 단점을 지닌 국가론과도 다르다.

하여간 사유재산권이 국가의 억압을 막기 위해 필수적인 수단이라고 인정하더라도 문제가 남는다. 그렇다면 사유재산권은 어떠한 윤리적 요청에서 나오는 근본적인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합목적적인 수단일 뿐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 그렇다고 그 자체가 모든 논의의 전제가 되는 당연한 윤리적 '공리'라고 놓는다면, 그게 왜 공리가 되느냐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것을 공리로 놓는 것은 정치철학자인 온건 우파 롤즈 역시 하고 있는 일이라서 우파 전체에 공통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로크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전적 논증이 있다. 즉 사유재산은 노력에 의한 산물이므로 이를 보장하는 것이 지극히 정당하다는 것. 그런데 건물주가 막노동을 하는 사람보다 수천배 이상의 노력을 해서 돈을 그리 버는 것인가? 능력의 차이에 따른 보상의 차이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과연 수천배 이상의 돈을 버는 것이 그만큼의 능력 차이가 있어서인가?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주된 치부 수단인 금융, 좀 더 고전적으로 말하면 돈놀이가 정당한 노력의 대가인가? 또한 토지를 이미 소유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아 불로소득을 올리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루소의 표현을 빌리면 이러한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은 순진한 사람인 것이 아닌가.

물론 이러한 노력, 능력, 선점, 타이밍, 운, 기타 모든 수단에 의한 소득과 사유재산의 차이를 인정한다고 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상속된 재산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상속재산을 리셋 하고 시작하자고 하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동의를 할까? 물론 위에 뻔히 나와 있듯이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상속재산이 왜 정당한가에 대해서 만큼은 대답을 하지 못한다. 수백년 전의 보수주의자들은 그에 대해 신의 섭리나, 사회 전체가 노력[35]을 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식의 대답을 했지만,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인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상속은 인간이 자유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의 균등을 망가뜨리는 대표적인 불로소득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즉, 나의 자유를 위해 남의 자유를 망가뜨릴 권리가 있는가? 하는 모순점이 생기게 된다.

거래를 통한 소유권 획득만 따져 봐도 이런 문제가 있다. 어떤 사람의 소유권이 정당한지 재판에서 따지려면 그 사람이 정당하게 소유권을 이전받았다는 것을 증빙하면 된다. 그렇다면 그 전 소유자의 소유권이 정당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민법(재산법)적으로 필연적인 요건이다. 정당한 소유권 없는 자에게서 물건을 매수한 사람이 정당한 소유권을 얻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 전 사람의 소유권을 따져야 하고, 그렇다면 또 그 전 사람의, 또 그 전 사람의....이렇게 추급해 들어가다보면 최초의 소유권에 대한 정당성을 논증해야 한다. 그런데 최초에는 권리가 아니라 단지 어떤 물건, 어떤 땅을 특정인의 수중으로 가져왔다는 사실만 남게 된다. 그런데 '사실'이 왜 '권리'가 되는가?

자유지상주의가 개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사유재산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증을 하려면 이러한 윤리적, 법철학적 질문에 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사상이 아니라 단순한 이해관계의 논리, 부르주아들의 자기변호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비판에 대해서 당위적인 해명이 필요하다.

3.5. 실현될 수 없는 이상 (아나코 캐피탈리즘의 경우)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자유의지주의적인 원칙에 입각해서 먼저 정부와 국가를 폐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들이 '정부 없애자(또는 극소화시키자)' 라고 만장일치로 [36] 동의해야 한다. [37]

결국 자유의지주의의 이상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선 국가와 정부의 철폐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 국가를 만장일치로 폐지하거나 극소화시킬 방법이 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만장일치는 말처럼 쉽게 찍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인권과 시민들의 의중이 그나마 보장되고 정부 운영에 반영된다고 여겨지는 서구와 북미 국가들도 이것을 알기에 아쉬운대로 '그나마' 차악의 정부형태인 민주정부를 채택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자유의지주의의 장점과 이점을 설명해도 '세금을 내고 국가의 형사법의 통제를 받는 한이 있어도 지금이 편하고 좋으니 그냥 이대로 살'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자유의지주의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자유의지주의의 입장에서는 모든것은 자발적이어야 하고, 그렇기에 원칙대로라면 사회의 변화에 관한 토론에서의 합의 또한 만장일치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자유의지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세금을 되도록 축소시키는 것이 옳을까? 이 경우에는 현실성만 따지자면 어느정도 시도해볼 만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체제는 자유의지주의자들이 원하던 사회가 전혀 아닐 것이다. 여전히 세금이라는 갈취와, 법이라는 자의적 지배가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이 사회를 진정 자유의지주의적인 사회라고 칭할 수 있을까? 모든 이전과 질서는 자발적이어야 하지 않는가?

자유의지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아무리 상대주의자일지라도 갈취범과 소매치기범에게 관용을 베풀 것을 인정하지는 않듯, 우리도 세금을 뜯는 정부라는 갈취범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 는 것이 옳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갈취라는 것이 무엇이 갈취이고 어느것이 갈취가 아닌지조차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동아리 멤버들이 모여있는 방에서 다른 멤버가 사서 뜯어먹고 있는 과자를 한움쿰 쥐는 것이 갈취인지 아닌지는, 타인이 먹으려고 산 과자를 움켜쥐는 것이니 삥뜯는 것이 맞다는 의견부터, 동아리 방에서 과자를 뜯었다는 것은 과자를 나눠먹는 것을 전면 거부하진 않을 것이라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했기에 삥뜯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까지,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세금이 갈취인지 아닌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며, 세금을 절대악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으나 필요악 내지는 필요선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많다.

결론적으로 세상에 만장일치란 없으며, 모든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자유의지주의는, 역설적으로 자유의지주의를 완고하게 거절하는 사람들 때문에, 결국 사회를 위한 실질적인 처방전의 역할보다는 사회를 비평하기 위한 문학 작품으로서의 역할에 그치게 될 것이다.

3.6. 타협의 필요성 (아나코 캐피탈리즘의 경우)

현대사회는 고도로 복잡화, 다원화 된 사회로, 독립된 한명의 개인에 의해 시작된 작용(노력, 능력, 발명, 특허 등)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가는 과정에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직, 간접적인 기여를 피할수가 없게 되었다. 만약 원시시대의 자급자족 사회라면 소유권적 자유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개간한 나의 논밭에서 농사를 짓고, 내가 옷감을 채취하고 옷을 지어 입고, 내가 도구를 만들고 사냥을 하여 얻은 부산물들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그러나 상술했듯 현대사회는 고도로 복잡화, 다원화 된 무한대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작은정부, 개발독재, 사민주의, 공산독재와 같은 사회 형태들은 기왕에 필연적으로 형성된 그러한 관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 나름대로의 해석들일 뿐이다. 현재까지 출현한 어떠한 사회형태를 보더라도 (비교적)작은정부라고 해서 결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재가 없는 것이 아니며, 공산독재라고 해서 개인의 모든 노력이나 능력, 의지와 같은 것들이 절대적으로 무의미해 질 수도 없다.[38]

또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문구가 좌파, 특히 여권주의 진영에서 나온 말이 맞으나, 이것이 내포한 의미는 말 그대로 개인을 우선시하고 사회를 세컨드로 간주하겠다는 주장과는 정 반대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 문구는 오히려 공적인 업무(종종 남성의 역할로 인식되어온)와 사적인 업무(종종 여성의 역할로 인식되어온)를 엄격히 분리해왔던 전통적 공사구분[39]을 허물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문구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문서 참조.

3.7. 자유라는 개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사실 자유지상주의 작가들이 자유(freedom)라는 개념에 대해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다시 한 번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자유(freedom)'라는 단어는 색인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자유(liberty)'라는 단어가 나오긴 하지만 '윌트 체임벌린'의 구절로 독자를 안내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른바 '자유지상주의자' 의 작품에서 이것은 놀라운 일 이상입니다. 정말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Alan Haworth(1994) 《Anti-Libertarianism》, p. 95-[40]

자유의 개념은 여타 다른 개념들처럼, 절대적으로 존재한 개념이 아니라 어떠한 역사적 맥락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이 역사적인 개념인 이상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자유의 개념에 관해 탁월하게 정리하고 있는 사상가로 가장 먼저 꼽을 만한 사람은 데이비드 흄이다. 흄의 정리가 중요한 이유는, 고전적인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자유의지와, 정치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정치적 자유의 개념을 명쾌하게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흄에 따르면,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는 '무차별성의 자유(liberty of indifference)'로, 인과필연성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로의 자유다. 반대로 정치적인 맥락에서 우리가 자유에 대해 언급할 때는, 그것은 '자발성의 자유(liberty of spontaneity)'로, 외적인 강제가 아닌 자신의 내적 동기에 의해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공화주의적 자유의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사상가로 바뤼흐 스피노자를 꼽을 수도 있다.[41] 바뤼흐 스피노자의 자유관은, 자유를 '자신의 내적 욕망에 따라 행위하며, 외부의 강제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바뤼흐 스피노자의 자유관 하에서 본다면, 설령 물리적인 강제의 형태로 나타나는 직접적인 강압 하에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내적 욕망[42]에 따라 행위하지 못하는 이상 그는 여전히 강제 하에 있는 것이다.

반면 로크에게서 출발해 이사야 벌린에 이르는 자유주의적 자유관은 전혀 다른 자유를 상정한다. 즉 그것은 강제로부터의 해방, 신체적 행동의 자유, 그리고 사유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권리를 의미한다. 비록 로크가 권력관계에 의한 제약을 강력하게 비판하고는 있지만, 그가 결국 자유의 범위를 사유재산권에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자유관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지는 못하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 개념의 의미에 주목할 때, 자유지상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할 지점은 좀 더 명확해진다. 즉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 로크에게서부터 출발하는 소유권적 자유만이 자유라고 상정해야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만약 우리가 소유권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보다 거시적인 권력 관계로부터의 자유를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체적으로 자유롭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노예의 상태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를테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과도한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미성년자가 있다면, 현대적 자유주의자들 혹은 공화주의자들은 그것이 '자유로운' 행위라는데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그것이 자유로운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신체적 강제에 의한 행위가 아닌, 하나의 경제적 '선택'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경제적 소외와 현실적 한계로 인한 반강제적 행위가, 강압에 의한 강제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는가?

3.8. 자유지상주의적 자유관은 도덕주의적이다.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지만,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자유론의 논거로 삼는 존 로크는 결코 세속적인 철학자가 아니었으며[43], 그의 소유권 논증은 많은 면에서 기독교 도덕에 기대고 있다. 로크의 『제1 통치론』은 '아담의 정당한 계승자는 누구인가'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제2 통치론』만을 주로 읽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이는 기이하게 여겨지기 쉬운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제1 통치론』의 주제를 그저 기이한 것으로만 여겨서는 시대착오적 오류에 빠지기 쉽다. 기독교 도덕의 언어로 말하는 존 로크에게 아담의 계승자 문제는 중요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왕권신수설이 어용철학으로 이용되고 있었고, 이때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주된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창세기의 구절이었다. 신은 아담에게 지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관리할 권리를 주었고, 전제군주는 아담의 정당한 계승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소유권은 정당화된다는 것이 왕권신수설 측의 주장이었다. 로크는 이에 반대하며 아담의 정당한 계승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했고, 기독교 도덕을 바탕으로 소유권적 자유를 옹호했다. 로크의 소유권 논증을 요약한다면 '자연물은 자연법에 의하여 만인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며, 노동은 그러한 공동 소유물을 자신의 소유로 전환하는 유일한 작업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노동을 통해 사유 재산을 축적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다'가 될 것이다. 따라서, 로크의 소유권 논증에서 자유는 어디까지는 부차적인 문제였고,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자연법에 대한 순응이라는 기독교 도덕의 요구였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도덕적 접근법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의 색체만을 빼버린 채, 로버트 노직의 저서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에서도 거의 똑같은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에서 로버트 노직이 제시하고 있는 소유권적 자유에 대한 논증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따른다.

(1)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2) 사람의 노동과 그 신체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는 곧 노동을 통해 얻은 것에 대한 소유권으로 이어진다.
(3) 따라서 이러한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은 자유에 위배되는 것이고, 반대로 이러한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은 자유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조금만 면밀히 살펴보더라도 이 논증의 기이함을 알 수 있다. (1)과 (2)는 말하자면 도덕적 요구에 해당된다. (1)에서 제시되는 '비침해성의 공리'라는 것은 '자연법의 요구'라는 도덕적 언어의 비종교적 버전일 뿐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도출되는 (2)의 명제와, (3)의 자유 개념 역시 도덕에 바탕을 둔 개념이 된다는 것을 알 수있다. (1)과 (2)로부터 (3)을 도출하려는 것은, 미리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정해놓고 그에 합당한 것만을 자유로 인정하려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44] 쉽게 말하자면 자유지상주의에서 소유권적 자유의 개념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나쁜 행위다'라는 도덕적 비난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자유에 불필요한 의미를 부차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비판한다면, 이는 자가당착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자유에 불필요한 의미를 부차적으로 부여하고 있는 것은 자유지상주의자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소유권에 대한 요구는 단지 도덕적 요구일 뿐이며, 그것은 그 자체로 자유의 개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자유지상주의적 자유관의 도덕주의적 경향성은 그것이 자유 개념을 독단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그들에 따르면 소유권적 질서에 부합하는 것은 자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부자유인데, 이러한 견해가 과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가? 이미 19세기에 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자본에 의한 노동자의 예속을 지적했다. 물론 우울할 정도로 속물적인 학자들은 '마르크스는 시장 권력에 의한 예속을 비판하면서도 정치 권력에 의한 예속을 온당하게 비판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되풀이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시장 권력 또한 분명한 하나의 권력이라는 점이다. 시장 권력에 의한 예속을 독단적인 자유개념을 통해 예속이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3.9. 자유지상주의는 개인적 윤리인가?

자유지상주의는 '소유권적 자유주의'로 분류되는 하나의 정치철학적 사상이며, 최소국가라는 정치체제를 직접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정체에 대한 지향 역시 뚜렷하다. 지향하는 유토피아의 분명함으로만 놓고 본다면, 공산주의 사회라는 개념이 아직까지도 다소 모호한 것으로 남아 있는 마르크스주의보다도 더 강력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자들이기 때문에, 공적 영역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반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단 정치철학을 표방하는 이상, 개인적 자유에 의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발상은 유아론에 불과하다는 원론적인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다. 자유의지주의자들은 개인적 선의를 공적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그러한 선의가 공적 문제 해결을 위한 충분한 답변이 되지는 못한다. 만약 개인적 선의에 의한 기부나 협력의 가능성을 놓고 자유지상주의를 옹호한다면, 그와 똑같은 논리로 전체주의를 옹호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기억해야만 한다. 설령 전체주의 사회라고 해도, 주권자의 선의만 있다면 어떤 끔찍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고, 개인들은 자유롭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당연하지만 우리들은 그러한 전체주의 사회가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야경 국가를 제외하면 어떤 공적 통치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현실적으로 자유로운 국가가 되리라 기대하는 것 또한 어렵다.

3.10. 반지성주의적 측면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다 보니 자연의 보편적인 지식을 다루는 과학과 충돌하는 내용이나 집단을 용인하는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미스 USA 후보들에게 진화론과 창조설에 대해서 물었을 때 아이들에게 모두 가르치고 직접 선택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지극히 자유의지적인 대답에서 그러한 태도가 드러난다. 또한 백신 반대론자들도 과학적 근거보다는 개인의 신념을 이유로 백신을 거부하며, 랜드 폴이 백신 반대론을 펼치는 것을 보면 때로는 자유지상주의가 과학을 지지하기 보다 오히려 과학과 충돌하는 측면을 옹호할 때도 있다. 또한, 카토 인스티튜트가 담배 회사의 후원을 받아 간접 흡연으로 인한 피해가 과장되었다는 주장을 펼치다 반박당하거나 지구 온난화 허구설여러 주장을 답습하는 등 대기업의 후원을 받아 과학적으로 의심이 가는 연구를 내놓는 것은 일각에서 비판받는다.

다만 이 문제는 자유의지주의자들을 비롯한 개인의 책임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 만약 사람들이 지구 온난화 과장설 등의 비과학적인 주장을 믿어서 생태계가 더 심하게 훼손되고 인류의 존립이 위협받는다면, 그것의 책임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대중에게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가정 시) 지구 온난화를 믿고 대응을 요구하던 사람들에게 보상할 도리가 없다는 데에 있다.


[1] 화룡점정으로 공산당원들은 경제가 자신들이 계획한 대로 성장하지 않으면 본인들이 경영을 제대로 못해서 그런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노동을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는 결론만 내린 채 체제 붕괴 직전까지도 생사람들을 태업죄나 사보타주죄로 때려잡았다. 이는 노동가치설을 광신한 결과 자본가들이 세운 공적을 싸그리 부정하고 오로지 노동자들만이 이윤을 낼 수 있다고 단정했기 때문이었다. 문자 그대로 자신들에겐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믿은 것이다. 결국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공산주의 붕괴를 막겠다는 명분으로 개혁과 개방을 시도하자마자 공산권 내부에서 그냥 공산주의 자체를 무너뜨려버리려는 움직임이 우후죽순으로 발생했다.[2] 사실 마르크스 본인도 잘나가는 변호사의 자식이고 부인은 귀족이며, 친척 중에는 재벌도 있었다. 그 유명한 제라드 필립스.[3] Cohen, G. A. (1995). Self-Ownership, Freedom, and Equality. 영국: Cambridge University Press.[4] Cohen, G. A. (1995). Self-Ownership, Freedom, and Equality. 영국: Cambridge University Press.[5] 동물적인 본능이면 현대에도 져버릴 수 없고 미래에도 잔존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지만, 이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짱돌을 집어든 까마득한 과거부터 인류는 자연을 역행하는 존재로 거듭났다.[6] 물론 금본위제 역시 비판점이 존재한다. 다만 경제규모와 화폐량을 연결짓는 시도는 저축의 중요성을 간과하는데,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이를 뒷받침할 화폐량이 늘어나야 하는 것은 맞으나 경제 전체의 화폐량이 늘어나야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소비부문의 화폐비중이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감소된 화폐는 저축으로 이어지고, 이 저축이 바로 경제규모를 확대시키는 밑바탕이 된다. 현대엔 저축에 기반하지 않는 온갖 과오투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투자되기 위한 돈이 계속 늘어나는 반면, 정작 사회적으로는 유의미한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나 기술발전은 화페저축량을 증가시키는데, 소비재 가격을 최종적으로 낮추고, 만약 시간선호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화폐량이 소비부문에서 빠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7] 갚는다고 표현하였으나 정확히 말해선 누군가가 받아야 할 화폐를 못 받는 것이다. 예금, 적금, 입출금통장 등도 포함된다.[8] 다만 아나코 캐피탈리즘의 경우 세금 자체를 반대하는데 이는 그들이 무정부주의자들이기 때문이며 현실적으로는 감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9] 대마초 같은 경우. 사실 이건 가벼운 마약이라고 칭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약의 기준을 조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실제로 대마초의 부작용은 알코올과 니코틴은 물론, 심지어는 카페인에 비교되기도 하는 경미한 수준이다.[10] 젭 부시는 201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자유지상주의 성향 후보인 랜드 폴에게 자신이 고등학교 때 마리화나를 피운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한국 좌파들이 조지고 부시고라고 비난하는 그 조지 W. 부시의 동생 맞다.(!!!) 그리고 현임 대통령인 트럼프 또한 마리화나 합법화를 지지한다고 밝혔다.기사1기사2[11] 이런 내로남불은 개인주의가 강해지면 공동체가 망할 거라고 착각하는 사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좌파와 우파가 같은 논리로 다른 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은 우파 자유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공동체의 이분법이 적용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애초에 공동체 자체를 파멸시키자고 하는 건 개인주의가 아니라 이기주의이고,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지워버리자고 하면 공동체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이다.[12] 미국의 총기규제 논쟁도 이에 맞닿아 있다.[13] 물론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아나코 캐피탈리즘 등의 학파도 존재한다.[14] 극소수 좌우의 수구적 극단주의 테러분자를 제외하고[15] 공동체주의가 강한 한국에서는 생소한 걸 넘어 터무니없이 느껴지는 개념이겠지만, 이것은 즉 오직 소극적 자유만 인정되는 사회를 말한다. 권리 배상(민사법) 외의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대가, 범죄 예방(형사법) 등의 명목으로 법을 제정하고 싶을 때가 바로 만장일치가 필요할 때다.[16] 우파 자유지상주의에서 정부는 치안과 선택적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일 뿐이다.[17] 이를테면 수많은 국가들이 시행하는 사회보장제도와 의약품 가격 규제 등은 공익을 위해 세금, 규제 등을 통해 개인의 몫과 욕구의 일부를 제한하는 공산주의와 상통하는 면이 있는 정책이다. 그렇다고 이 시스템을 조금이라도 채택한 모든 정부가 공산주의 정부라면, 현재 전 세계는 완전히 공산화되었다고 결론내려도 무방할 것이다(...)[18] 심지어 종교적 결정론은 과학적 결정론과 달리 권위주의를 내제하고 있기 때문에 타협 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조차도 없다.[19] 예컨대, 각양각색의 영양소나 비타민을 균일하게 섭취하는 것이 어떤 개인의 건강을 보존하는데에 있어서 가장 적합하다는 사실영양학이 규명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영양소의 섭취를 정부가 개인들에게 강제해야 하는가? 명백히 양자는 전적으로 다른 문제일 것이고, 개인에게는 건강이 아닌 다른 가치들을 선택할 권리가 존재한다.[20] 2020년대 기준으로 공화당은 재정보수주의, 기독교적 사회보수주의, 문화적 보수주의가 주류이며 민주당은 현대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가 주류이며 최근들어서는 사회주의 세력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21] 즉, 우파 자유지상주의가 시장에 의한 종속을 시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강제로 모든 사람을 시장에 종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 행동을 하면 이윤이 생길 거라고 보는 사람들이기에 자발적으로 시장을 만들고 그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 이 역시 인간의 자유의지로 행해진 것이고 누군가에 의한 강제적 종속이라고 볼 수 없다. 또 시장 권력이 정치 권력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은 기업국가가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것을 간과한 논리다. 당장 빌 게이츠도 미 법무부에 의해 독과점 위반으로 회장직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명심하자. 비판자들의 근거로 보면 모든 것 뒤에는 부가 있으니 법무부가 독과점 위반을 내세운 것도 사실 법무부에 누군가 뒷돈을 줘서 빌 게이츠를 모함하라고 지시를 내린거라고 해석된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전혀 없다.[22] 실제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사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찬양부터 시작하였다. 그 이후에 이윤 추구로 인해 그것만이 사회 존재의 유일한 이유가 되어 이윤 추구라는 명분으로 어떤 만행도 다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23] 정당히 여기도록[24] We can press on from 'the observation that libertarianism is egalitarian' to ask why, if (…) the liberty of a human being to own another should be trumped by equal human rights, the liberty to own large amounts of property 'at the expense of others' should not also be trumped by equal human rights. This alone would seem definitively to lay to rest the philosophical case for libertarianism. The very idea of ownership contains the relativistic seeds of arbitrary authority: the arbitrary authority of the individual's "right to do wrong."[25] "What's Wrong with Libertarianism". Critical Review. 11 (3). p. 427.[26] 현재 미국의 계층화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정권에서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혁명의 유산성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아이젠하워 같은 초기 냉전 시대 공화당 대통령들도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세운 복지국가의 기초에 대해 반대된 의견은 없었을 정도니.[27] 로비 때문에 자살과 사회안전망에 대한 연구도 안되는 상황이라서 더욱 힘들다(…).[28] 도둑, 강도, 폭동 등[29] 로버트 노직,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남경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7. 221쪽[30] (P) Individual A mixes his labour with object Q, seems to involve some sort of category mistake. Surely the only things that can be mixed with objects are other objects. But labour consists of actions, not objects. How can a series of actions be mixed with a physical object?[31] Waldron, Jeremy (1983). "Two Worries About Mixing One's Labour". The Philosophical Quarterly. 33 (130): 37–44.[32] 주의할 점은 사적 자본과 군소한 사유재산을 혼동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라고 하여 사유재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소련 민법에서도 계약법이 엄연히 존재하였고 '시장'이란 게 존재하여 상행위가 이뤄졌다. 군소한 사유재산들은 '자본'이 아니기 때문이다.[33] 즉 그것을 직접 사용하는 사람들이 소유, 통제를 인정받아야한다.[34] 프루동은 이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고 불렀다.[35]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한 마음으로 열심히 산다는 얘기다.[36] 자유의지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이념을 소유하고 있기에 소수에 의한 결정은 물론이요, 다수에 의한 결정에도 부정적일 것이다.[37] '모든 계약과 재화이동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라는 명제는 모든 자유의지주의자들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정부라는 물건을 돌리기 위해선 세금과 법이라는 강제성이 필연적으로 따라붙게 된다. 그렇기에 자유의지주의의 입장에서 정부는 재화와 질서를 강제로 배분하는, 없어져야만 하는 적이 될 것이다.[38] 사실 맑스주의자들이 일단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하자는 주장을 일단 밀어붙이고 본다는 인식은 만연하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은 오히려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그들의 말로는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생산력의 증대를 의해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배분할 것을 주장한다. 물론 그 단계에서 계속 머무르면 안 되고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서둘러 넘어가긴 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전위적인 혁명을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39]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공사의 구분을 강조해왔으며, 대표적인 공적인 업무에는 정치가, 대표적인 사적인 업무에는 경제가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정부의 경제 개입 등 정경유착을 싫어하는 것이 이 때문. 반대로 공화주의 등 집단주의 진영에서는 공사의 합을 주장하기에 '시민의 덕성' 을 강조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것이다' 는 문구는 오히려 공과 사의 합을 주장하는 문구이며, 그렇기에 오히려 공과 사의 분리를 주장하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라인의 이념과는 정 반대되는 뜻을 함축한 문구이다.[40] Haworth, A. (1994). 《Anti-libertarianism: Markets, Philosophy, and Myth》. British: Routledge. p.95[41] 스피노자가 공화주의적 자유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공화주의적 자유라는 개념은 퀜틴 스키너와 필립 페티트의 연구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정말로 현대적인 공화주의적 자유를 옹호했는지 아니면 일종의 '적극적 자유'를 옹호했는지는 논쟁의 여자가 있다.[42] 물론 스피노자 철학에서 욕망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스피노자의 욕망은 인간이 자신의 역량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것, 자기 스스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본성 그 자체이다.[43] 엄밀히 말하자면, 로크가 활동했던 17세기 후반 유럽은 일반적 의미로의 '세속화'가 이루어진 세계도 아니었다.[44] 그렇다면 로크의 소유권적 자유 또한 단지 도덕적 개념에 불과한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일단 그렇다고 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크를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 개념의 기원으로 놓는 것은, 사실 꽤 시대착오적인 해석이다. 전술했듯이 로크에게서는 자유 개념보다 기독교 도덕의 언어가 더 중요한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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