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9:36:52

문민독재


1. 개요

문민독재(Civilian dictatorship)는 문민, 즉 민간인 출신 정치인이 저지르는 독재다. 군인 혹은 군부가 저지르는 군사독재와 맞대응되는 개념이다.

2. 특징

집권 방법상 처음에는 민중의 저항을 비교적 덜 받는다. 일단 군사독재의 경우는 십중팔구가 쿠데타를 비롯한 반민주적이고 반헌법적인 방법으로 집권하지만, 문민독재의 경우는 대개 민주적인 선거라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잡는다. 선거에서 당선되었다는 얘기는 곧 민심을 반영했다는 것이니 민심에 무관하게 집권한 군사독재와는 달리 처음에는 그리 저항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독재는 오래 가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몰락하게 되어 있다. 집권 자체는 민주적으로 하더라도 이후 통치를 국민의 뜻과 무관하게 한다면 결국 민심을 잃기 쉽다.

냉전 당시 구 공산권 국가들은 문민독재인지 군사독재인지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 정치장교를 통해 군부 쿠데타 가능성을 차단하고 공산당이 군의 목줄을 확실히 잡고 있다는 점에서 문민독재로 볼 수 있긴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 김일성 등 대놓고 군사 계급을 받아서 현역 군인 신분으로 통치한 독재자들이나 군부의 수장공산당 당수를 압도하는 권력을 휘두른 중국 등의 사례도 있어서 군사독재로 볼 여지도 있다.

3. 목록

3.1. 아시아

3.1.1. 동아시아

3.1.2. 동남아시아

3.1.3. 남아시아

3.1.4. 중앙아시아

3.1.5. 서아시아

3.2. 유럽

3.2.1. 남유럽

3.2.2. 서유럽

3.2.3. 중부유럽

3.2.4. 북유럽

3.2.5. 동유럽

3.3. 캅카스[19]

3.4. 아프리카

3.4.1. 북아프리카

3.4.2. 동아프리카

3.4.3. 서아프리카

3.4.4. 중앙아프리카

3.4.5. 남아프리카

3.5. 아메리카

4. 기타

김영삼 정권을 깔때 정부의 공식 명칭인 문민정부에서 '문민'이란 단어를 가져와 '독재'와 결합시켜 '문민독재'라고 불리는 경우가 잦았으나 이는 일종의 멸칭이고 전술된 문민독재의 개념과는 다르다. 다만 문민정부 시절 군사정권 뺨치는 날치기 통과를 비롯해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한 행적들을 저지른 탓에 심지어 보수언론에서마저 이 용어로 지적받은 적이 있다.#

5. 관련 문서


[1] 이쪽은 일국양제를 무력화하려는 중국공산당시진핑의 위세를 이용해 호가호위하는 케이스다.[2]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초대 총통이 되었으나 독재자로 타락했다.[3] 응오딘지엠처럼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독재자로 변절했다.[4]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총리로 말레이시아 경제의 고도 성장을 이끌었다는 평가와 정적을 탄압한 독재자라는 평가가 공존한다.[5] 정계 은퇴 이후 정치적 제자인 나집 라작이 부패 논란으로 흔들리자,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야권과 손잡고 정계에 복귀하여 말레이시아 독립 이후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했다. 다만 그 야권이 제노포비아 등 여러 논란이 많은게 함정.[6] 싱가포르 경제의 고도 성장을 이끌었으나, 일당 우위 정당제를 구축하여 장기 집권하고, 부자 세습까지 성공했다.[7] 리콴유가 리셴룽에게 세습하기 이전에 징검다리로 내세운 바지사장이라서 독재자라고 보기 어렵다. 실권은 리콴유 일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8] 리콴유를 계승한 총리. 사실 아버지 리콴유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널널한 통치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권위주의적인 정치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도 독재자가 맞긴 하다.[9] 부친 자와할랄 네루의 후임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의 사망 이후 총리직을 계승해서 1967년 총선과 1971년 총선을 연달아 승리로 이끌며 인도국민회의의 총리로 재임했으나 1975년에 1971년의 총선과정에서의 부정이 문제가 되어 피선거권을 박탈당하게 되자 1975년 6월 25일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되어 1977년 3월 24일까지 독재정치를 펼쳤다. 이후 1977년 3월 16일부터 3월 20일에 걸쳐서 총선을 열었으나 패해서 실각한다. 다만 1980년 1월 3일부터 1980년 1월 6일에 걸친 총선에서 승리해서 다시 총리직에 복귀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후 시크교도 들에 대한 진압 문제가 원인이 되어 측근 경호원들에게 1984년 10월 31일에 암살당하고 총리직은 장남 라지브 간디가 승계하게 된다.민주적으로 집권해서 문민독재자가 되었다가 선거로 실각한 뒤 다시 선거로 집권해서 암살로 생을 마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특이한 케이스였던 셈이다.[10] 문민독재자 뿐 아니라, 독재자들 전체로 봐도 보기힘든 특이한 케이스인데, 집권 초에는 상왕 노릇하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를 등에 업은 진짜배기 독재자였으나, 2022년 카자흐스탄 시위를 틈타서 나자르바예프를 축출하고는 민주화 개혁을 단행해서 독재자 지위를 스스로 내려놨다.[11] 재임 기간 중 전쟁을 자주하고 군복 입은 모습이 자주 나와서 군사 독재자인 줄 아는 사람이 많지만, 군인 출신이었던 전임 아흐메드 하산 알 바크르 전 대통령이나 압둘 카림 카심 전 총리 등 1958년 왕정 폐지 이후에 집권한 역대 이라크 지도자들과 달리 민간인 출신이었다.[12] 아직 부분적 미승인국이지만 동시에 반쯤은 2012년 후기,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되어 독재자로도 본다.[13] 독재적인 권력을 휘두르긴 했지만, 국왕 요르요스 2세의 신임에 의해 총리로 임명될 수 있었고, 국왕의 신임을 잃으면 언제든지 실각할 수 있었기에 애매하다. 또한 메탁사스는 30년 이상을 군인으로 보내고 중장으로 전역한 군인출신이다. 다만 총리로 재직하기 시작했을 때는 전역한 지 15년이 넘었을 시기이기는 하다.[14] 민간인 신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집권했다. 다만 국왕의 승인이 없었으면 진압될 가능성이 높았다.[15] 민간인 출신으로 군사정권의 관료로 발탁된 후 군인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집권하여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한 특이 케이스.[16] 살라자르의 후계자로서 집권했다가 카네이션 혁명으로 축출되었다.[17] 수권법 문서 참조. 히틀러 본인도 맥주홀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고 총리 시절에는 장검의 밤 숙청으로 반대파들을 잔혹하게 숙청했다.[18] 물론 타 독재자들에 비하면 굉장히 온건했다. 독재적 요소도 정치적 분야에 국한되었지 국민 탄압에 악용하지는 않았다.[19] 분류하기에 따라 동유럽으로도 서아시아로도 분류된다.[20] 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을 지냈고, 독립 이후에는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장기집권을 추구하다가 축출되었다.[21] 군인 출신이며 쿠데타를 일으킨 적도 있지만 정작 쿠데타 당시에는 진압당해서 정권 획득에 실패했고, 출소한 후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독재 정권을 수립했기에 문민독재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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