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30:24

윤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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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윤상철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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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 구단으로 임대한 선수는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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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시티즌 FC 감독 겸 대표이사
Pyeongtaek Citizen FC
파일:윤상철.jpg
<colbgcolor=#35c5f0> 이름 윤상철
尹相喆 | Yoon Sang-Chul
출생 1965년 6월 14일 ([age(1965-06-14)]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78cm | 체중 73kg
직업 축구선수 (공격수[1] / 은퇴)
축구 감독
축구경영인
소속 <colbgcolor=#35c5f0> 선수 럭키금성 황소-LG 치타스-안양 LG 치타스 (1988~1997)
마르코니 스텔리언스 FC (1998)
뉴캐슬 브레이커스 FC (1999)
지도자 경신고등학교 (2004~2012)
평택 시티즌 FC (2019~)
경영 평택 시티즌 FC (2017~ / 대표이사)
국가대표 1경기 (대한민국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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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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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5c5f0,#191919> 학력 숭곡초등학교
경신중학교
경신고등학교
건국대학교
등번호 럭키금성 황소-LG 치타스-안양 LG 치타스 - 8
주발 오른발
별명 얼룩 치타, 동대문의 사나이
}}}}}}}}} ||

1. 개요2. 선수 경력
2.1. 프로 데뷔 전2.2. 럭키금성 황소 시절2.3. LG 치타스 시절2.4. 안양 LG 치타스 시절2.5. 임의 탈퇴 이후2.6. 통산 기록
3. 지도자 경력
3.1. 평택 시티즌 FC 대표이사 & 감독
4. 논란5. 플레이 스타일6. 수상7. 윤상철에 대한 말, 말, 말8. 이야깃거리

[clearfix]

1. 개요

파일:윤상철1.jpg
대한민국축구선수 출신 감독이자 축구 행정가. 현재 K3리그 참가팀 평택 시티즌 FC의 대표이사직과 감독을 맡고 있다.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공격수이다.

신태용, 김현석, 고정운과 더불어 1990년대 K리그를 풍미한 K리그와 FC 서울의 레전드. 1988년부터 1997년까지 FC 서울[2] 소속으로만 활약하며 통산 306경기 102골 32도움, K리그 최초 개인 통산 100골, 300경기 출전, 대상 3관왕[3]을 기록한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이지만, 선수생활 막바지에는 자신이 헌신한 구단에 토사구팽 당하며 불운하게 커리어를 마무리하였다.

2. 선수 경력

파일:Screenshot_2019-07-05-07-14-52-1-1.png

2.1. 프로 데뷔 전

공격형 미드필더와 윙으로 뛰었는데 주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이때부터 득점감각이 빼어나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2.2. 럭키금성 황소 시절

1987년 꼴찌를 기록하며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얻은 럭키금성은 1988년 드래프트 1순위로 윤상철을 선발했다. 당시 럭키금성의 구승회 단장이 건국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윤상철을 3년간 유심히 지켜봤다고 한다. 대학 시절부터 이어져 온 부상 때문에 프리시즌 훈련에 거의 참가를 하지 못했지만, 구승회 단장과 고재욱 감독은 상의 끝에 개막전부터 윤상철을 출전시켰다. 당시 감독이었던 고재욱은 미드필더로 놓기에는 아까웠던 윤상철의 득점감각을 감안해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변경시켰고, 첫 시즌 18경기 4골을 넣어 프로무대에 연착륙에 성공했다. 물론 쉽게 얻은 성과는 아니었다. 윤상철은 본인의 데뷔 시즌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무릎 후유증 때문에 데뷔 시즌을 앞둔 겨울에는 동계 훈련을 거의 하지 못했다. 운동을 못해 몸무게가 15kg 정도 불어있었다. 그래서 겨울 내내 체중을 감량하는데 집중했다. 당시 고재욱 감독님께서 개막전에 나를 내보내셨는데, 잠깐 뛰었는데도 몸이 안됐다. 한 두 달 정도 몸을 만들어서 5월 대우와의 홈 경기에서 후반 교체 멤버로 들어갔는데, 결승골을 넣었다."

"개막전이 끝나고 힘들었다. 그래서 남들 모르게 새벽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정말 운동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신인이 처음 프로팀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경쟁에 부딪히게 되는데 부상도 있고 동계 훈련도 안했던 나는 정말 힘들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럭키금성은 내 포지션이 전부 대표 선수였다. 경쟁해서 그 자리에 들어가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데뷔 첫 해 전반기 끝나고 축구를 포기하려 했다. 너무 힘들고 미래가 불투명해서였다. 후반기에 들어가기 전 합숙 훈련이 있었는데, 당시 조영증 코치님께 '너무 힘드니 한달만 나를 찾지 말아달라'고 했다. 코치님과 실랑이를 많이 했었다.(웃음) 결국 합숙 훈련에 내려는 갔다. 한 1주일 동안은 훈련을 하지 않았다. 산에 가서 혼자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그러다가 결심을 했다. 후반기까지만 더 뛰어보고 결정하자고. 다행히 후반기 때는 몸상태가 더 좋아졌다.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관련 기사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프로 무대에 적응한 윤상철은 프로 2년차인 1989년 리그 17골 6도움을 성공시키는 대활약을 펼쳤지만, '마의 20골' 고지를 돌파한 조긍연에게 밀려 득점 2위에 머물렀고, 팀도 시즌 막판 우승 다툼에서 미끄러지며 준우승에 그쳤다.

1989년 아쉽게 팀 성적이 준우승에 그쳤고, 우승을 가시권에 두고 있던만큼 1990 시즌을 앞두고 있는 팀의 목표 의식은 명확했다. 윤상철 역시 최고의 공격수로 인정받을 날을 벼르고 있었다. 동기 부여가 충만했던 만큼 출발이 좋았다. 1990 시즌 개막 후 4경기 만에 1위로 올라선 럭키금성은 이후 단 한 번도 선두 자리를 내주지 않고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윤상철 역시 개막 후 3경기 만에 시즌 첫 골을 뽑아내더니 4경기 연속골을 포함해 고비마다 골을 넣으며 팀 승리에 힘을 보탰다. 결국 윤상철은 1990년 30경기에 출전해 12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수상하고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도 이름을 올렸다. 프로 3년차에 공격수로 정상의 기쁨을 누린 것이다.

파일:90.11.2. 돌발슈팅 전문가, '윤상철 시대' 개막.png

2.3. LG 치타스 시절

1990년 득점왕 수상 후 윤상철의 플레이는 한층 더 원숙해졌다. 꾸준히 공격포인트를 올리며 이름값을 했고 1993년에는 도움상도 차지했다. 그 해 9골 8도움을 기록했으니 한 시즌 팀 득점(33골)의 절반을 책임졌던 셈이다. 8월 25일 동대문에서 열린 하이트배 코리아리그 유공전에서 프로 통산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윤상철의 활약에 힘입어 팀은 준우승을 차지했다.

물 오른 감각으로 1994년에는 두번째, 세번째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득점왕의 주인공이 됐다. 이기근에 이어 두 번째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한 두 번째 선수가 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컵 대회까지 포함해 24골은 당시 단일 시즌 최다골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2003년에야 김도훈(28골)에 의해 깨졌다. 20골대 득점왕은 팀 수가 열 개를 넘어선 2000년대 이후에야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 7개 팀이 경쟁한 1994시즌 K리그에서 윤상철이 21골이나 넣은 건 정말 대단한 활약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윤상철은 본인의 1994년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94년은 사연이 깊다. 조영증 감독의 부임 이후 내 입지가 좋지 못했다. 있는 선수들을 내보내고 세대 교체를 하더라. 그 당시 나는 주장이었는데 개막전을 뛰고 그 뒤로 열 경기 이상을 뛰지 못했다. 참 힘든 시기였다. 그런데 어린 선수들만 데리고 하니 팀이 그만 연패에 빠졌다. 결국 내가 열 몇 경기만에 투입됐는데, 투입된 그 경기에서 2골 1도움을 기록했다. 이제는 나를 벤치에 앉힐 이유가 없었다. 그 뒤로 계속 골을 넣었더니 결국 최다골이 됐다."

새로운 기록은 으레 전설적인 장면과 함께 탄생하고 회자된다. 1994년의 윤상철이 그랬다. 그 해 윤상철은 포항제철의 라데와 득점왕 자리를 두고 용호상박의 레이스를 펼쳤다. 윤상철은 국내 공격수의 자존심을 걸고 골몰이 중이었고 라데는 절정의 기량으로 골과 도움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내며 '유고특급'다운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팽팽한 득점 다툼은 시즌 막바지까지 이어졌다.

파일:94.11.14. 경향신문_국내파 윤상철, 해외파 라데, 94 프로축구 최고 스타.png

결국 정면 대결에서 프로축구사에 길이 남을 극적인 드라마가 연출됐다. 1994년 11월 5일 동대문운동장, LG와 포항제철이 맞대결을 벌였다. 두 팀 모두 우승 경쟁에서는 미끄러진 상태여서 윤상철과 라데의 득점왕 다툼에 초점이 쏠렸다. 두 선수 모두 시즌 18골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정규리그에서는 윤상철이 15골로 라데(14골)보다 한 발 앞선 상태였다. 전반 7분 윤상철이 최대식의 프리킥을 오른발로 연결하며 선제골을 터뜨린 것은 이 날 득점 경쟁의 신호탄에 불과했다. 이에 질세라 라데가 페널티킥으로만 두 골을 추가하며 득점수를 맞춰놓았다. 라데는 후반 6분에도 최문식의 패스를 받아 30미터 이상 특유의 드리블로 돌파한 끝에 골망을 가르며 해트트릭을 작성했다.

순식간에 경기에서도, 득점왕 레이스에서도 역전당한 윤상철의 오기가 발동했다. 불과 1분 뒤 페널티킥을 얻어낸 윤상철은 직접 골을 성공시키며 다시 라데와 나란히 섰다. 이어 후반 21분 김동해의 패스를 장기인 번개 같은 헤딩슛으로 연결하며 골을 추가, 이 날 경기에서 두번째 해트트릭을 만들었다. 해트트릭을 주고 받는 진기명기에 관중들의 넋이 빠졌지만, 아직 쇼는 끝난게 아니었다. 후반 38분 라데가 황선홍의 도움으로 왼발 슛을 성공시키며 팀 승리를 확정짓는 결승골을 만들었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을 때 라데와 윤상철 모두 정규리그 18골씩을 기록하고 있었다. 숨가빴던 당시 상황은 윤상철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 해 포항제철을 만나면 내가 유난히 골을 많이 넣었고, 라데도 우리 팀만 만나면 골을 몰아넣었다. 양 팀 수비수들이 우리한테 골을 안 먹으려고 서로 바짝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공교롭게도 득점 경쟁까지 치열해져서 라데한테 득점왕은 뺏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마지막 맞대결에서 내가 먼저 골을 넣었는데 라데가 뒤집으니까 나도 오기가 생겼다. 도망가고 따라잡고 하면서 엎치락뒤치락했다. 그 날 동대문에 오셨던 관중들은 아주 재밌는 경기를 보셨을거다."

94년 득점왕 경쟁의 최종 승자는 윤상철이었다. 그 날 시즌 마지막 경기를 치른 라데와 달리 윤상철은 2경기를 남겨놓은 상태였다. 윤상철은 다음 경기에서 대우를 상대로 2골을 추가하며 득점왕을 확정했다.

파일:94.11.17. 조선일보_94시즌 득점왕 윤상철 피날레 「21호」골.png

2.4. 안양 LG 치타스 시절

두번째 득점왕 이후 1995년에는 잠시 주춤하던 윤상철의 득점 활약은 1996년 다시 한 번 화제가 됐다. 1996 시즌 14골과 함께 개인통산 98골로 시즌을 마무리하면서 K리그 최초의 100호 골 기록 달성이 가능할지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파일:96.10.18. 한겨례_윤상철 올해 100골 채운.png

이듬해인 1997년 4월 9일, 윤상철이 99번째 골을 기록하자 축구팬들을 새해를 앞두고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이들처럼 초조하게 그의 신기록을 기다렸다. 하지만 샴페인을 터뜨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출전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팀이 세대교체를 단행하면서 기동력이 뛰어난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는 분위기였고, 어느덧 세른셋의 노장이 된 윤상철은 벤치를 지키는 날이 더 많아졌다.

고대하던 100호 골이 터진 것은 99호 골을 기록한 후 약 4개월이 지난 8월 13일 전북전에서였다. 모처럼 선발 출전한 윤상철은 팀이 2-1로 이기고 있던 후반 25분 올레그가 띄워준 공을 멋진 백헤딩슛으로 연결하며 마의 벽을 깨트렸다. 그것도 모자라 후반 추가시간이 적용된 48분, 함상헌의 패스를 받아 통렬한 왼발슛으로 1골을 더 보탰다. 프로 데뷔 10년 만에 프로축구사상 처음으로 100골을 돌파하는 주인공이 된 순간이었다.

파일:97.8.14. 조선일보_윤상철 프로 첫 100골.png

사실 100골 달성 시기는 좀 더 앞당겨질 수 있었다. 4월 19일 전북전에서 서정원이 페널티킥을 얻어내자 당시 소속팀의 박병주 감독이 키커로 윤상철을 지목했다. 이를 거절한 것은 윤상철이었다. 필드골로 대기록을 완성하겠다는 공격수로서의 자존심이었다. 그는 "99골을 넣고 나니까 더 어려워졌다. 모든 팀들이 내가 새 기록을 만드는 것에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고 죽기 살기로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래도 골게터로 자존심이 있는데 페널티킥으로 100번째 골을 넣고 싶지는 않았다. 축구를 하는 동안 한두번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10년 동안 한 팀에서 뛰면서 100골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소회를 밝혔다.

윤상철은 100골의 벽을 허문 뒤 또 한 번 프로축구사 최초의 기록을 세운다. 9월 27일 전남전에서 개인통산 3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10년 동안 매 시즌 평균 30경기씩을 소화해야 이뤄낼 수 있는 대기록이다. 그는 철저한 자기 관리와 꾸준한 기량 유지가 최고 덕목인 프로 선수의 교과서였다.

파일:97.8.15. 한겨례_프로축구 첫 100골 윤상철, 기록경신 독식해온 타고난 골잡이.png

아쉽게도 그의 기록 행진은 101골과 300경기에서 멈췄다. 노장인 그에게 전해진 것은 세대교체를 추진하던 소속팀 LG로부터의 결별 통보와 임의탈퇴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윤상철은 "내 몸 상태는 아직 더 뛸 수 있는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고 다른 팀에서 이적 제의도 있었다. 구단과 옥신각신하면서 상처도 받았지만, 그래도 10년을 한 팀에서만 뛰었는데 마지막을 K리그 다른 팀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호주에서의 마무리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파일:97.12.22. 조선일보_'토사구팽' 윤상철.png

럭키금성에서 LG 치타스, 다시 안양 LG로 팀명이 바뀌는 동안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며 프로축구의 과도기를 통과한 윤상철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윤상철이 K리그에 남긴 족적은 이후 K리그에서 헌신하고 장수하는 선수들에게 또 하나의 기원이 됐다.

2.5. 임의 탈퇴 이후

안양 LG에서의 임의탈퇴 이후, 30대 초중반으로 은퇴하기엔 이른 나이였던 윤상철은 선수 생활을 걸고 호주로 날아갔으며 그 곳에서 2년을 뛰고 축구화를 벗었다.

은퇴 이후, 자신을 내쫓다 시피한 구단임에도 FC 서울에 큰 애정을 보이고 있다. 2007년 FC 서울 시축행사에 피아퐁과 함께 참여했으며, 우리동네 예체능에서 열린 FC서울 창단 30주년 맞이 기념 축구경기에 참여했고, 2016 현대오일뱅크 K리그 개막 전 인터뷰에서 FC서울의 우승을 기원했다.관련 기사

2021년에는 1995-1996년 홈 유니폼을 복각한 레트로 유니폼 발표 영상에 당시 주장 기성용과 함께 메인 모델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여전한 친정팀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윤상철이 보유한 당시 유니폼을 받아 라보나 풋볼에서 복각했다.


2023년 9월 17일 FC 서울 40주년 축사와 시축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수로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했던 시기를 여기 FC서울과 함께 해서 행복했다. 40년이 400년 이상의 명문 구단이 되고 또한 세계적인 구단들과 나란히 하는 FC서울이 되기를 기원한다'는 축사를 남겼다. FC 서울로부터 1995년-1996년 원정 유니폼을 복각하고 본인의 이름이 마킹된 레트로 유니폼을 받고 입단과 데뷔전에 대한 기억, 동대문 운동장에 대한 기억, FC 서울의 미래를 위해 바라는 점 등의 인터뷰를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2.6. 통산 기록

시즌 클럽 리그 리그 FA컵 국내컵대회 대륙대회 합계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1988 럭키금성 황소 K리그1 18 4 1 1 1 0 - - 19 5 0
1989 38 17 6 2 0 0 40 17 6
1990 30 12 2 - 30 12 2
1991 LG 치타스 31 7 2 31 7 2
1992 28 6 2 8 1 0 36 7 2
1993 27 9 8 5 0 0 32 9 8
1994 28 21 1 6 3 0 34 24 1
1995 24 4 2 7 0 0 31 4 2
1996 안양 LG 치타스 30 12 3 1 0 1 3 2 1 34 14 5
1997 7 0 0 - 12 3 3 19 3 3
통산 261 92 27 4 1 1 41 9 4 - 306 102 32
파일:K리그 로고.svg 윤상철 K리그 통산 기록
파일:FC서울 엠블럼(백색배경).svg 윤상철 FC서울 통산 기록

3. 지도자 경력

호주에서의 선수 생활 마무리 이후 차범근 축구교실 코치와 경신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았다.

3.1. 평택 시티즌 FC 대표이사 & 감독

2016년 기사에 따르면 경신고 감독직에서 내려온 후 K3리그 신생팀 평택 지-스마트 FC (현 평택 시티즌 FC) 감독직을 수락하였다고 한다.관련 기사

하지만 K3리그 참가팀의 임원을 지도자로 등록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벤치에는 기술고문인 조정호 감독이 대신 앉아있었다.

2019년부터 평택 시티즌 FC 감독으로도 공식적으로 등록되면서 감독으로서 벤치에도 앉기 시작했다.

창단 첫해 리그 2위를 기록하며 K3리그 베이직에서 K3리그 어드밴스로 승격하였으며, 2020년이 되어서 어드밴스는 K3로, 베이식은 K4로 재출범하면서 K3리그 무대를 누비게 되었다.

2021년에는 스페인 FC 바르셀로나 출신 장결희도 자유계약으로 영입하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2021년 1일 평택시청에서 ‘프로축구단 창단 등 축구 발전방향 논의를 위한 간담회’를 개최하며 프로 구단이 되기 위한 첫 단추를 뀄기도 하였다.

4. 논란

평택 시티즌에 있으면서 일부 평택 선수들의 임금이 1년 가까이 체불되면서 선수단의 사기가 꺾여있으며, 특히 수당 계약을 맺은 선수들은 지난해에 10원도 받지 못했고, 그런 선수가 10명이 넘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K3리그에서 구단과 선수가 계약을 맺는 방법은‘연봉 계약’과‘수당 계약’으로 두 가지다. 평택시청으로부터 기본급을 받는 연봉제 선수들은 문제없이 급여를 받는다고 하지만 수당제 선수들은 2020년치 훈련수당·출전수당·승리수당이 모두 체불되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고 한다. 일부 선수들은 구단 사무국을 찾아가 수당 지급 여부를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곧 입금해주겠다" 뿐이었다. 수개월째 반복되는 대답에 선수들 모두 지쳐있다고 한다.

또한 K3리그 구단을 운영하려면 먼저 법인화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평택 구단은 법인이 2개여서 다소 복잡한 구조라고 한다. 팀 이름대로라면 ‘시민구단’이지만 따지고 보면 시민구단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는 듯 하다. 이러한 평택 임금 체불 문제 등으로 협회 내부에서 심의위원회가 예정되어 있고, 위원회 결과에 따라 리그 퇴출까지 가능한만큼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하도록 말하고 있으나, 계속 지지부진하면 결단을 내릴수 밖에 없고, 최악의 경우엔 선수들이 임금을 못 받은 채로 팀이 공중분해가 될 수 있다.

이를 보아 대표 이사로서 윤상철의 구단 운영에 상당히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애초에 한 사람이 대표이사와 감독이라는 두 자리를 모두 겸직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단순히 평택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K3리그 소속 팀이어서 주목을 덜 받은 것 뿐이다. 당장 김호강인덕 등을 비롯한 여러 구단 대표들이 지나치게 감독의 역할에도 간섭하는 일은 심심치 않게 문제가 제기되어 왔던 것이었고, 이런 문제가 거론됐던 팀들은 대부분 성적을 비롯해서 내부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갔다. 프런트로서 구단 운영과 선수단의 운영은 엄연히 별개의 업무임으로 분리되어야 마땅하다.

5. 플레이 스타일

PC통신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등등 거대 커뮤니티에서 K리그를 씹어먹는 윤상철을 대표로 뽑아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쳤음에도 그는 역대 어느 대표팀 감독에게도 철저히 외면당했는데 이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이 당시 한국에선 활용하기 힘든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체격이 큰 선수가 아니었음에도 발이 느렸고 경합능력도 떨어져서 서정원처럼 스피드로 수비수를 제치거나 최용수김도훈처럼 공중볼 척척 따내고 여차하면 피지컬로 상대 수비진을 비집고 들어가 골문을 열어젖히지 못했다. 활동폭도 좁아 황선홍처럼 페널티 박스 밖에서도 영향력을 미치는 플레이를 보여주지도 못했다. 눈이 즐거운 개인기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통산 101골 넘게 집어 넣을 수 있었던 건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의 득점감각과 슈팅센스가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슈팅파워는 평범한데 골키퍼와 수비수의 허를 찌르며 툭 차 넣는 타이밍이 예술적이었고 수비진 교란과 오프사이드 트랩 무력화에도 능한 포처 스타일이었다.[4] 피지컬로 밀어붙이던 시절에 기교로 승부했다는 김현석보다도 더 유니크한 타입이었다.

이런 타입은 그 당시 한국 대표팀에선 써먹을 방법이 아예 없었고 경쟁자들은 너무 강했다. 당시 한국은 스트라이커는 무조건 피지컬 좋고, 발이 빨라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지도자들 일색인 축구 후진국 이었다. 더군더나 황선홍, 김도훈, 최용수라는 역대급 타겟형 스트라이커 3명이 날개를 편 시점이었다. 요즘 태어났으면 보다 체계적으로 교육받아 부족한 부분을 좀 더 끌어올리고, 전술적으로 맞춰서 활용이 가능했겠지만 90년대에는 어느것도 무리였다.

6. 수상

  • 개인 수상
    • K리그 득점상 (2회): 1990, 1994
    • K리그 도움상 (1회): 1993
    • K리그 베스트 11 (4회) : 1989, 1990, 1993, 1994
    • K리그 감투상 (1회) : 1993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 우승 (1): 1988
  • K리그1
    • 우승 (1): 1990
    • 준우승 (2): 1989, 1993
    • 4위 (2): 1988, 1992
  • 리그컵
    • 준우승 (2): 1992, 1994
  • FA컵
    • 3위 (1): 1997

7. 윤상철에 대한 말, 말, 말

한마디로 때와 장소에 구애됨이 없는 꾸준한 슈터
고재욱 출처
LG의 공격축구는 윤상철의 득점과 궤를 같이한다.
조영증 출처
친했던 선수요? 아무래도 90년도에 럭키 금성에서 함께 활약하면서 득점왕을 거머쥐었던 윤상철 선수죠. 눈빛만 봐도 통했어요. 아주 영리한 선수였고, 볼을 잡으면 위치만 봐도 움직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죠.
최대식 출처
윤주태가 신기하게 골을 잘 넣는다. 문전에서 움직임이 좋고, 골 냄새를 잘 맡는다. 윤상철 형이 생각이 난다.
최용수 출처

8. 이야깃거리

  • 위에서 언급했듯이 K리그에서는 레전드급 활약을 펼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팀과는 지독하게 인연이 없었다. 국가대표로서는 1992년 10월 21일 안양종합운동장에서 있었던 아랍에미리트와의 평가전에 단 1경기 나온것이 전부이다.
  • FC 서울 최다 득점 기록 2위에 랭크될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펼친 선수지만, 국가대표 활약상이 없고 서울연고공동화 정책으로 연고이전/복귀 과정을 거쳐야 했던 서울이라 인지도가 낮다. 라이트 팬들은 까마득한 옛날 선수에 국가대표 활약상도 전무하니 기억이 없고, 코어 팬덤은 큼직한 물갈이만 2번 해 90년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5]
  • 평택 시티즌에서 감독직과 대표이사직을 동시에 맡고 있는데 평택 구단이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축구팬들이나 대중의 관심이 적은 실업팀이어서 그렇지 만일 프로팀에서 이랬으면 논란이 되었을 것이다.[6]
  • 2022년 8월 20일 여주종합운동장에서, 평택의 서포터에게 오지말라는 막말을 했다는 글이 올라왔다.#[8][9]


[1] 중앙 공격수[2] 럭키금성 황소, LG 치타스, 안양 LG 치타스[3] 1993년, 베스트 일레븐 & 도움왕 & 감투상[4] 뒷날 인터뷰에서 제일 상대하기 힘들었던 선수는 일화의 신의손이었다고 밝혔다. 페인트 동작에 속지않고 끝까지 버텨서 정말 골치아팠고, 그가 없었으면 100골 달성이 훨씬 빨라졌을거란 소감을 남겼다.[5]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에서 쫒겨난 게 96년. 윤상철이 서울을 떠나기 바로 직전 해다. 윤상철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팬들 상당수가 이 때 날아갔다. 남아있던 사람들, 단 2시즌이나마 윤상철이 뛰는 걸 본 사람들은 2004년 서울 연고복귀 때 또 대거 이탈한다.[6] 실제로 과거 대전 시티즌김호의 경우 대표이사 신분으로 감독의 역할에 상당히 개입하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7] 실제로 프로 스포츠 감독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직업군으로서 프로 스포츠 지도자들 중 흡연하는 사람이 심심치 않게 있다.[8] 당시상황을 설명하자면 평택은 무려 5:0으로 지고 있었고, 경기를 완전히 포기한듯이 무기력하게 움직이고 있어서 이를 보다못한 해당 서포터가 야유를하면서 정신차리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때 같은 평택응원석에 앉아있던 윤감독의 아내가 선수들도 속상할텐데 인신공격 하지말고 그냥 응원만 하라고하자 여기에 서포터는 이건 서포터의 영역이라면서 평택 응원석내에서 시비가 붙었고, 아래 벤치에서 이를듣던 윤감독이 그럴꺼면 오지말라고 소리쳐 이번엔 서포터와 윤감독간에 시비가 붙어 경기가 끝나고나서도 말싸움을 했었다고 한다.[9] 평택 시티즌 FC 항목의 사건사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해당 서포터는 과거에도 여러구단에서 문제를 일으킨 적이있었고, 그런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이 다른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내와 시비가 붙었으니 남편으로써 화가 날수밖에 없는 윤감독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건 아니지만, 그렇다고해서 경기도중 감독이 관중석의 팬한테 대놓고 오지말라고 막말하는 행위가 정당화 되는건 아니다.그런데 솔직히 눈앞에서 자기마누라가 싸우고있는데 눈 알돌아갈 사람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