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3:44:20

이강환

이강환
李康桓
파일:이강환1.jpg
출생 1943년 10월 3일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사망 2023년 7월 19일 (향년 79세)
부산광역시
국적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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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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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1943~194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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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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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1948~2023
본관 전주 이씨[1]
직업 조직폭력배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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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칠성파 이강환 1.jpg
대한민국조직폭력배이자 부산광역시 최대 폭력조직인 칠성파의 두목이었다.

2. 생애

요정을 하는 홀어머니[2] 밀양 박씨 박쌍봉(朴雙鳳)의 딸 박필남[3] 밑에서 경주시 안강읍에서 태어난 이강환은 소아마비를 겪어 한쪽 팔에 이상이 있는 등 몸이 불편했다. 체구도 작고 마른 편이라 친구들에게 자주 구타를 당했던 그에게 어머니는 "왜 맞고 다니냐"라며 야단을 쳤고 아들이 사고를 치면 자신이 뒷수습을 다 해주었다. 그는 이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차츰 배포를 키우고 신체적 콤플렉스를 극복하여 성장 후 조직폭력배가 되었다. 중학생 때는 울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이후 고등학교때 부산으로 이사해서 부산상고를 나왔다.

1970년대이강환의 손윗동서이자 칠성파의 초대 두목인 이경섭이 그에게 조직을 물려준다. 1970년대 말 이강환의 지도력 하에 칠성파는 20세기파, 역전파, 서면파의 일부 세력을 흡수해 1980년대 중반에는 부산의 암흑가를 거의 장악할 정도로 성장했다. 칠성파는 1980년대 초반부터 완월동을 비롯한 부산의 유흥업소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일부 조직원은 서울에 진출했다.

이강환은 1970년대에 야쿠자 출처[4] 및 영화 마약왕 속 이두삼 캐릭터의 실존 모델 이황순과 손잡고 마약 사업에 뛰어든 걸로 알려져 있으며 결국 1980년에 필로폰 제조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관련 기사[5]

약 5년간 복역한 이강환은 1985년에 출소한 후 1988년 10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경주문화원에서 화랑신우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취임했다. 화랑신우회는 자유당 정권 시절 이정재의 동대문사단 같은 연합조직으로 부산·경남 지역의 주요 폭력조직들이 연대한 것이다. 발족 당시 회원은 약 300명에 이르렀다.

1988년 11월엔 칠성파 간부 8명을 데리고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야쿠자 조직 사카우메구미 산하 가네야마구미 두목 가네야마 고사부로와 의형제 결연식을 가졌다.[6] 결연식 영상 뉴스 보도 이를 두고 대한민국 수사기관에서는 국내 조직폭력배 수괴가 국제 범죄조직으로 두루 인정받는 일본 야쿠자 수괴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은 최초의 사건으로 파악했다.[7] 이 행사엔 이강환과 친분이 있던 다른 조직의 우두머리들이 대거 참석했다. 당시 이강환은 민속씨름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어 씨름계 대부 김학용도 이 행사에 참석했는데, 당시 어린 씨름선수였던 강호동도 김 감독을 따라 참석했다.[8]

칠성파와 사카우메구미의 결탁과 함께 야쿠자는 부산에서 본격적인 사업을 벌였는데, 1989년엔 가네야마구미가 울산의 한 호텔을 직접 인수했다. 1990년에는 또 다른 야쿠자 조직이 부산의 모 호텔을 매입했다. 결연식을 마치고 동생이 된 이강환이 형 가네야마 고사부로에게 축하금 1억 엔을 받은 사례로 알 수 있듯, 이 시기를 기점으로 자금은 물론이고 범죄 기법 등 야쿠자의 각종 노하우가 국내 폭력조직에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때 받은 1억 엔의 사용을 두고 내부 갈등이 생겨 부두목 천달남이 영도파를 결성하고, 부두목급 간부였던 김영찬이 신칠성파를 결성하면서 이강환과 갈라섰다.

칠성파는 국내 최대 항구 부산항을 끼고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덕분에 야쿠자의 영향을 정면으로 흡수했다. 당시 대검찰청은 야쿠자의 국내 진출을 막기 위해 '야쿠자의 국내 유입 대책안'을 마련해 전국 수사기관에 내려보냈다.

1990년대 초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범죄와의 전쟁이 실시되자 서방파 두목 김태촌을 구속시킨 조승식 검사가 부산지검에 발령받아 부산 조직들을 수사했다. 칠성파 간부들을 대거 체포하는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이강환은 서울로 도피했지만 1991년 4월 특수대에 체포되어 부산지검으로 압송됐다.

재판에 넘겨진 이강환은 부하들을 시켜 갈라져 나온 신칠성파 두목 김영찬을 회칼로 난자해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히는 등 10여 차례에 걸쳐 폭력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재판을 다룬 뉴스 영상.[9] 재판 이듬해인 1992년엔 공판 과정에서 이강환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증인이 자택 앞에서 가스총과 회칼을 든 괴한의 습격으로 상해를 입기도 했다. 약 8년을 복역한 이강환은 출소 이듬해인 2000년에 나이트클럽 지분 분쟁에 연루되어 협박•탈세 등의 혐의로 재구속돼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복역 도중 또 다른 혐의로 형량이 추가되어 2003년 8월에 출소했다. 원래 출소일은 2003년 3월이었지만 벌금 4억 원을 내지 않아 약 5개월을 더 복역하고 나왔다. 그가 벌금 대신 교도소에서 치른 노역의 대가는 하루 200만 원꼴의 황제노역이었다.

이강환은 세 차례에 걸쳐 도합 16년의 옥고를 치르는 와중에도 칠성파의 공식적인 두목이었고 조직은 계속 존속되고 있었다. 특히 심복들을 교도소 접견장에 불러들여 비밀스레 각종 지시를 내렸다. 두 번째 징역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교도소에서 자주 의무실 신세를 졌다고 한다.

2007년 부산에 위치한 호텔에서 아들의 결혼식이 열렸다. 1,100여 명의 하객 중 500여 명 정도가 조직폭력배였고, 인기 개그맨과 가수의 축하공연이 벌어졌으며, 예식장 앞에는 유명 연예인의 것이 포함된 80여 개의 축하 화환들이 병풍처럼 드리워졌다. 서울의 전국구 조직폭력배 신상사가 참석했고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김동길이 주례를 맡았다.

2010년 건설업체 대표에게 3억 9,500만 원을 갈취하고 조직원을 시켜 그를 폭행하고 수사기관에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한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20여 명의 강력계 경찰관이 그의 신병을 확보하러 갔지만 이강환은 영장이 발부된 지 30분 만에 어디에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종적을 감추었다. 결국 지명수배가 되어 약 한 달 뒤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었고 약 2년에 걸친 수사 끝에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10] 이때 그가 선임한 변호인이 과거 자신을 수사하여 구속시킨 검사장 출신 변호사 조승식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호텔에서 부하 조직원 한모 씨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한다. 그동안 이강환의 수감•병치레 등 여러 변수가 있을 때마다 전모 씨, 권모 씨, 공모 씨, 강모 씨 등이 두목 대행을 맡아왔지만 공식적인 후계자로 지명되어 ‘회장’ 호칭을 사용하도록 허락된 것은 한모 씨가 처음이라고 알려져 있다.

2016년 동성 간병인을 성추행한 혐의로 입건됐으나 합의로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관련 기사

2019년 아내인 김해 김씨 김용출(金龍出)의 딸이 사망했다. 조용한 장례식을 치르고 싶다는 의사 때문인지 조직폭력배 경조사 특유의 세력 과시는 없었고 60대 이상 원로급 위주의 조문이 이뤄졌다고 한다.

2020년 앞서 후계자로 소개된 한모 씨가 약 7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 부산경찰청 권유현 폭력계장은 출소한 한모 씨가 이강환의 후계자가 맞냐는 부산일보 기자의 질문에 "이강환 씨는 이미 충성 경쟁을 앞세워 후계자를 2~3차례 바꿨을 정도로 놀랍도록 영리하게 조직을 관리하는 사람. 이 씨가 살아있는 한 누구도 보스를 잠칭할 수 없고, 보스를 칭하고 움직이기만 해도 외근 형사들의 주시를 한 몸에 받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2021년에 또 자신을 간병하던 20대 부하 조직원에게 부적절한 구강성교를 강요한 혐의로 입건됐으나 다시 합의했다고 한다.#

2022년 10월 23일 팔순 잔치가 열렸다. 칠성파 두목의 '팔순 잔치' 예고에…부산 경찰 긴장 공교롭게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검사 출신 김도읍 국회의원 자녀 결혼식이 열릴 예정인데, 여기에 수많은 정치인과 법조계 인사들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돼 검사와 조직폭력배가 한자리에 모이는 진풍경이 펼쳐질 전망이다. 이번에도 서울의 전국구 조직폭력배 신상사 등이 참석했지만 경찰의 예의 주시와 사전 경고로 행사는 조용하게 치러졌다. ‘깍두기 인사’ 대신 ‘구찌 클러치’ 든 하객… 조폭이 달라졌어요

2023년 7월 19일, 입원하고 있던 부산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영화 친구 속 칠성파 두목 이강환 씨 사망…경찰 '긴장'

3. 여담

  • 이강환은 부산 중구에 있는 코모도호텔 사우나에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수시로 출입했다. 부하들은 매번 90˚ 각도로 인사를 하며 몸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그의 옷과 양말까지 벗겨주었고, 커피숍에 갈 땐 항상 경호원 두 명이 입구에서 보초를 섰다고 한다.
  • 이강환은 1999년에 출소한 후 7개월 만에 벤츠 승용차를 구입했다. 당시 그는 약 2억 원에 달하는 차량 대금을 전액 현금으로 지불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 실화를 각색한 2001년 영화 친구에서 기주봉이 연기한 조직 두목 캐릭터는 이강환이 모티브로 여겨진다. 유오성이 연기한 이준석 캐릭터는 1966년생 칠성파 조직원 정모 씨가 모티브다. 실존 인물 정모 씨는 1991년에 이강환이 구속되었을 때 조직을 재정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 동아일보가 이강환에 대해 취재한 2003년 기사에 따르면, 지난 20여 년간 전국 교도소를 돌며 조직폭력배들을 상대로 교화 교육을 해온 교계 관계자가 “한국 주먹계 최고의 두목은 이강환”이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부산 주먹계 사정을 잘 아는 어느 체육계 관계자는 체구가 작은 이강환을 “간이 몸보다 몇십 배 더 크다고 보면 된다. 칼이 목에 들어와도 겁을 안 내는 성격이다. 카리스마가 대단하다.”라고 묘사했다. 한 칠성파 간부는 “원래 기질이 있는 분으로, 외길을 걸어왔다. 어느 분야든 고생하고 성취한 사람은 인정해 주지 않느냐. 이 세계의 상징적인 인물이며 많은 건달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최고다.”라고 설명했다.
  • 2006년부터 뇌경색소아마비 후유증이 심해져서 간병인 도움 없이는 움직이기도 힘들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 2007년 서방파 두목 김태촌은 자신이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전국구 조직폭력배 7명 중 하나로 이강환을 꼽았다.
  • 2013년 부산에서 고철 및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이강환의 아들 이호재(李昊宰)[11]가 자신의 아버지를 거론하며 고소인을 상습 협박하여 고소를 각하시킨 혐의로 입건되었다.
  • 죽기 전 인터넷에 근황이 공개됐는데, 병세가 완연하고 건강이 무척 안 좋아보였으며, 상술했듯 이미 간병인 도움 없이는 움직이기도 힘들다고 한다.#
  • TV조선에서 이강환의 생전(2015년) 육성을 공개했다. 돈이면 선배도 팔아먹고 자기의 유명세 이용해서 계파끼리 싸움질도 하고 의리도 없다고 한탄했다는 내용이었다.#


[1] 시조 42세손, 효령대군파 19세손 강(康)자 항렬을 쓴다.[2] 아버지 이기현(李起炫)은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일에 실종됐다.[3] 부산의 유명한 요정을 운영하며 이강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4] ...밀수 조직은 부산의 조직폭력배들도 같이 끌고 들어갔다. 부산의 2대 폭력단인 칠성파(두목 이강환) 20세기파를 필두로 폭력배들은 히로뽕 밀매, 알선에 손을 대게 되었다. 그들은 부산에 자주 들리는 일본 폭력단의 말단 조원들과도 긴밀히 접촉, 히로뽕 판매망 확충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중략) 1983년 12월자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 기사.[5] 기사를 보면 이강환 이하 칠성파 조직은 이황순 이하 마약 유통 조직의 배후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뒷배를 서주고 마약 판매 수익금의 일부를 지급받는 행위도 법리적으론 마약 제조의 공범이다.[6] 재일교포인 가네야마 고사부로의 한국 이름은 김재학이다. 그는 훗날 사카우메구미 본가의 두목까지 된다.[7] 김두한-선우영빈 관계나 신상사, 유지광 등 이전에도 국내 범죄조직이 일본 야쿠자와 동업하거나 연대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야쿠자와 의형제를 맺은 건 이강환이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결론적으로 이강환에게 악영향만 끼쳤는데 사카즈키고토하는 영상이 국내언론에 공개돼서 수사기관의 주의와 여론악화만 불러왔기 때문이다.[8]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예계나 프로스포츠계, 특히 투기종목계는 조직폭력배들의 입김이 작용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미국의 마피아-권투 관계, 일본의 야쿠자-스모 관계도 마찬가지디.[9] 이후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김영찬은 이강환과 화해한 뒤 은퇴하고 신칠성파는 1999년경 다시 칠성파에 합쳐진다.[10] 기사를 참고하면 왜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다. 정황상 검경의 수사 의지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고, 피해자라는 건설업체 대표의 진술이 불분명한 부분이 많아 법리적으로 혐의 입증을 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11]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이다. 파일:이강환 가족 족보.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