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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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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동방이학(東方理學)의 비조(鼻祖)3. 문무겸비명재상4. 고려 최후의 보루5. 선지교의 비극6.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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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몽주의 생애에 대해 다룬 문서이다.

2. 동방이학(東方理學)의 비조(鼻祖)

그의 조상 중 유명한 인물이 고려 인종의종 때 강직한 충신이었던 정습명이다.[1] 출생지는 경상북도 영일[2]이지만 얼마 후 경상북도 영천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3] 후에 크게 될 그릇이라서 그랬는지 작명에도 비범한 일화가 있는데 원래 1번째 이름은 난을 건네받는 태몽을 꾸고 낳아서 "몽란"이었으나 7살 무렵 어머니가 용이 나무 위에서 노는 꿈을 꾸고 마당에 나가보니 나무에 아들이 놀고 있어 "몽룡"으로 바꾸었고 학업을 마치고 성년이 된 18살에 주나라 주공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몽주"로 바꾸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꿈에서 주공 단을 만났는데 주공이 "몽룡은 훗날 한 나라를 지키는 충신으로 자랄 것이오."라고 말해 몽주라고 개명했다고 한다.[4] 영천시 임고면에 정몽주가 유년기를 보낸 외가가 있었으며 지금도 임고서원에서는 정몽주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낼 뿐만 아니라 선죽교 가설, 문집의 목판본을 인쇄 발간하는 등 지역의 중요한 위인으로 기리고 있다.

고려에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들여왔고 학문적 완성도도 높아서 스승인 목은 이색에게 '동방이학의 비조'[5]라는 찬사를 들었다. 이때의 일화가 비범한데 당시 성리학 관련 서적이라고는 몇 권밖에 안되던 시절 책을 읽고 정몽주는 내용에 대한 주석을 달고 의미를 풀었다. 해설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모두 과연 맞는 말인지를 의심했는데 후에 중국에서 성리학 서적이 대거 들어오면서 내용이 정몽주가 풀었던 내용과 거의 일치함을 알고 모두들 감탄했다. 훗날 홍건적 토벌에서 공을 세웠다가 김용에 의해 살해되는 김득배의 문생이기도 해서 살벌한 주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김득배의 죽음을 기렸다. 공민왕 초기인 1360년 과거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해 본격적으로 관직에 입문했고 1363년 여진족 토벌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이후 전농시승, 예조정랑을 거쳐 성균사성에 올랐다. 1372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친명파에 속하게 되어 친원파였던 이인임 등의 외교 정책에 반대하다 언양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이번에는 일본 규슈에 사신으로 가서 왜구 토벌의 확답을 받고 왜구에게 끌려간 수백 명의 고려인들을 데리고 돌아왔다.[6]

3. 문무겸비명재상

학문에만 치우친 것도 아니었는지 1380년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토벌하는데 참여했고 이성계가 왜구를 싹쓸이해버린 황산대첩 때에도 이성계의 부장이었다. 물론 무장으로서의 능력보다는 군내 사무나 병법 논의 등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문신이면서 장수로 활약한 이들이 있고 정몽주 자신의 이미지와는 달리 문약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차례 전투에 참여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무신 적성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이 점을 고려했는지 이성계가 정몽주를 회유하려 할 때 이 때의 일을 거론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는데 이 때도 이성계와 함께 활동했다.

1372년에 처음 명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었을때 정몽주는 임무를 마치고 고려로 귀국하는 길에 난파당하여 10여 일을 표류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주원장은 사람을 보내어 바다 위를 수색하게 했고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당시 난파로 사절단의 2/3 이상이 죽고 살아남은 것은 정몽주를 포함한 일부였다. 난파된 바다 위에서 발견될 때까지 버틴 것도 엄청나지만 발견된 것도 엄청난 확률로 천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0여 일을 표류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외교 국서를 놓치지 않았고 배에 실려 있었던 말 안장을 뜯어 먹으면서 버텼다고 한다. 물론 주원장이 정몽주를 수색해 귀환시킨 것은 그를 아껴서가 아니고 외교적 문제 발생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구조된 정몽주가 다시 남경으로 올라가 명나라 조정에 들어갔을때 그런 조난 사고를 겪고도 끝까지 사신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모습에 주원장과 주변 신하들이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1384년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아무도 명나라 사신으로 가려고 하지 않을 때도 성절사로 명나라에 건너가 명나라와의 관계 회복에 공을 세웠다. 정몽주가 사신으로 가는 것이 확정된 시점에서는 시간까지 촉박하여 바로 출발한다고 해도 주원장의 생일에 맞춰 도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밤낮으로 필사적으로 강행군을 해서 기한에 맞춰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12년 전에 풍랑으로 표류해서 죽을 뻔했는데 기일을 맞추려고 최단 항로를 택해 또다시 사신행을 갔다는 점에서 성실하고 책임감있는 성품이 잘 드러난다.

다행히 정몽주가 시일에 맞춰 도착했을뿐더러 주원장이 표문을 작성한 날짜를 보고 "이번 사절행이 위험한 줄 알고 서로 미루다가 널 보낸 거 아니냐? 용케 잘 왔다. 너 12년 전에 개고생했던 정몽주 아니냐?"라고 정몽주를 알아본 덕분에 사신단은 후하게 대접을 받고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다소 무리하게 책정되었던 조공도 철회시키는 데 성공했다.

일본과의 교섭 성과도 그렇고 명나라와의 마찰 등 외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 성과를 올린 것을 보면 고려 최후의 에이스 외교관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일본과의 외교 협상에서는 후에 정몽주의 죽음을 안 일본인들도 애도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7]

4. 고려 최후의 보루

1389년, 이성계가 우왕창왕신돈의 태생이라 주장하며 폐위시킨 뒤 공양왕을 옹립할 때 동참했다. 흥국사 9공신(이성계, 심덕부[8],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의 하나로서 이성계파로 여겨지게 되고, 반() 이성계파의 테러 대상으로 오르기까지 했다. 그렇게 수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이성계의 저의가 다른 데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이성계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양왕과 함께 조금씩 활동을 넓혀가다가 1392년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진양과 함께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성계가 멀쩡히 돌아오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이성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의 집에 방문했다. 기록으로는 이때 이방원과 술자리를 했고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자, 단심가로 화답했다고.[9]

5. 선지교의 비극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 《태조실록》 권1 <총서>,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1392년 을묘일(음력 4월 4일).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이 수시중(守侍中) 정몽주(鄭夢周)를 죽였다.
고려사》 권46, <세가>46 공양왕2 ##

태조의 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알리자 정몽주가 태조의 집을 찾아가 낌새를 살피려 했으나 태조는 평소처럼 그를 대했다. 태종이, 때를 놓칠 수 없다고 하며 정몽주가 돌아갈 때 조영규(趙英珪) 등 너덧 명을 보내어 길에서 그를 격살하게 하니 나이 쉰여섯이었다.
고려사》 권117, <열전>30, 정몽주##

어쨌든 이것으로 이방원은 정몽주가 이성계의 신왕조 수립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회유도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판전객시사(정3품)이던 조영규를 비롯한 아버지 이성계의 일부 부하들을 시켜 정몽주를 죽였다.[10]태조강헌대왕실록》에는 이성계를 문병하고 이어 판개성부사 유원의 문상을 갔다 오느라 원래 다다르기로 예정되었던 곳에 정몽주가 제 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자 이방원이 초조해 하는 모습도 실려 있다. 처음에는 자신을 습격하는 조영무 등에게 고함을 질렀으나 타고 있던 말이 먼저 칼에 맞고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다시 일어나서 집 쪽으로 뛰어가다가 뒤따라온 고여가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지교에서의 죽음은 이후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먼 후대 사람도 아니고 정몽주 본인의 제자였던 권우나 권근의 저술에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며 당대 사람들의 증언도 각양각색이다. 대표적으로 전해오는 야사에 의하면 정몽주는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을 수행하던 머슴 김경남[11]에게 너는 어서 피하라고 충고했으나 충직한 머슴은 같이 죽겠다고 하여 그를 뒤따라갔다. 이 설은 권근이나 권우가 머슴역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권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날 권근이 끝까지 모시고 가려고 했으나 군인들이 거리를 분주히 다니는 모습을 보고 정몽주가 주변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고 한다. 정몽주는 이 때 일부러 나귀를 거꾸로 타서 자객들을 기다렸다고도 한다. 어차피 죽을 것이면 죽일 사람 얼굴을 봐서 뭐하겠나라는 설도 있고 부모가 주신 몸을 상하게 되는데 그 꼴을 정면으로 볼 수 없어서였다는 설도 있다. 이것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그대로 재현했다.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것과, 수행하던 종에게 집에 돌아갈 것을 권유했으나 종이 그것을 거부하고 함께 죽은 것 등.

사실 이성계 낙마~정몽주 사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기록이 서로 미묘하게 다른 내용으로 남아있어 학계에서 논의가 분분하다. 다만, 대부분의 기록은 정몽주가 낙마한 이성계의 병문안을 가기 전에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계획에 대해서 알았다는 점에서 공통되며[12] 이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왜 죽을 줄 알면서 병문안을 갔는지에 대해서도 연구거리이다.

이 난리 중에 정몽주의 동생 정정과도 형과 같이 죽음을 당했고, 다른 동생 정정도는 유배되었다. 유배된 동생 정정도는 살아남아 형의 문집을 발간했다고 한다. 다만 이와 별개로 정몽주의 아내와 자식들에게만은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아 그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성계의 낙마 사고를 틈타 정몽주의 지시로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고, 고문하는데 앞장섰던 정몽주 일파는 정몽주의 암살 후 역으로 본인들이 죄다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데 선봉장에 섰던 김진양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죄를 자백하고 원지에 부처됐다가 곤장을 맞고 사망했으며 이숭인 역시 유배지에서 등에 장 100대를 맞고 처참하게 사망했다.
전하가 대답하기를,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강비(康妃)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지라, 전하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

하니, 강비가 노기(怒氣)를 띠고 고하기를,

"공(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自處)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하였다.
- 《태조실록》 권1 <총서>,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그렇게 정몽주 참살이 전부 다 끝난 이후 아들인 이방원이 독단적으로 정몽주를 죽인 것을 안 이성계는 대노하여 이방원을 크게 혼냈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크게 화를 내는 자리에 신덕왕후도 곁에 있었지만 이성계가 너무 화를 크게 내서 그녀도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인 이성계에게 한창 한소리를 듣던 이방원이 나중에 "어째서 어머니께서 변명해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하자 그제야 신덕왕후가 "공(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自處)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라고 이성계에게 말했다고 한다. 사실 이성계 본인은 정몽주를 꼭 죽일 생각은 없었고, 오히려 정몽주를 죽이면 자신만 욕을 먹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라서 결국 정몽주를 역적으로 죽였다고 선포하며 그의 목을 효수하게 된다.[13]

정몽주와 그의 일파는 이성계를 직접적으로 위해할 군사력이 없었는데, 이성계를 설득해 고려 왕조를 유지한 채 온건개혁책을 펼 것을 설득하려고 한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게다가 정몽주는 이성계와 매우 가까운 사이기도 했는데, 정도전 또한 정몽주의 소개로 이성계와 만났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몽주는 강경파들만 이성계에게서 떼어내면 이성계를 설득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걸 수도 있다. 이성계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은퇴하겠다는 발언을 여러번 했고[14], 찬탈의 야심이 있어도 500년 고려 사직을 직접 끝장내는건 역시 부담이 큰 일이라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성계는 정몽주 암살건에 굉장히 불쾌해 했고, 이후에 이방원에게서 등을 돌리게된다. 이 사건이 이방원을 세자로 삼지 않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는 의견이 많다. 이후 조선이 개국되고 왕위에 즉위한 후에도 《태조실록》에서 정몽주를 죽인 일과 관련하여 이성계가 "대신을 멋대로 죽였으니 누가 비난하지 않겠는가."라는 취지의 말로 간접적으로 이방원을 비난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와 정몽주 사이의 사적인 친분은 논외로 쳐도, 수십년간 국가에 많은 공을 세운 명재상을 합법적인 명령 형식을 갖추지도 않고 명분도 없이 사적으로 암살한 일이니 당연히 옹호가 불가능하다. 이색과 이숭인처럼 억지 명분으로라도 탄핵해서 유배를 보내거나 곤장을 쳐서 죽이는게 정치적 부담이 훨씬 덜한 방식이다. 아래는 정몽주의 죽음과 관련된 오해들이다.[15]
  • 백주 대낮에 사망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도 모른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총서,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비롯해 택리지 등의 야사 그 어디에서도 정몽주가 살해된 시각은 적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에서 정몽주가 야밤에 죽었든 대낮에 죽었든 고증에 어긋나게 각색했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정황상 적어도 늦은 밤은 아닐 거라는 주장이 존재한다. 근거로는 당시는 가로등도 없고 호환 위험도 있던 시대라 굳이 밤중에 돌아다니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는 점, 급한 밀의를 하느라 간 것도 아니고 병문안이었는데 해가 지면 바로 잠자리에 들던 시절에 환자를 밤에 찾아가는 건 큰 실례일 것이라는 점, 태조실록에서 이성계가 이방원을 꾸짖을 때에 사람들이 본인이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누가 정몽주를 살해했는지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잘 보이는 시간대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든다. 유명 역사블로거인 길공구는 늦은 오후쯤에 살해 당한 것이라는 추측을 제시하고 있다.

    통념상 백주대낮에 대놓고 사람을 죽인다는 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에 대다수의 매체에서는 정몽주가 밤중에 선죽교를 건너다 살해를 당한 것으로 묘사되며 이는 개국, 용의 눈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 등 역대 사극에서도 다르지 않았으나 태종 이방원에서는 처음으로 대낮에 살해당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 선죽교에서 죽었나?
    이 또한 알 수 없다. 후대 기록들과 야사를 제외하고, 정사인 고려사 정몽주 열전과 태조실록 총서만 보면, 정몽주와 함께 죽은 이는커녕 정몽주가 선지교에서 살해되었다는 언급도 전혀 없다. 고려사에는 정몽주가 태조를 문병하고 돌아가는 길에 격살했다는 짤막한 서술만 있고, 태조실록에는 중간의 유원의 집에 문상을 위해 잠깐 들렀던 것 정도만 추가되어있을 뿐이다. 이는 조선 후기에도 일부 유학자들이 가진 의문으로 자세한 내용은 선죽교 내용을 참고.
  • 정몽주를 죽인 무기는 철퇴? 칼?
    공식 기록인 태조실록,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무기를 들었다고만 나오며, 때려죽였다는 말이 나오나 그것이 철퇴를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철퇴로 때려 죽였다는 말은 택리지에만 나오는 기록으로 정몽주가 죽은지 400여년이 지난 후에 나온 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신뢰도가 낮다.
  • 함께 죽은 인물들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는가?
    연려실기술, 동사강목, 임하필기 등에 적힌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 하급 관원인 녹사(경조궁 녹사 혹은 이름이 김경조인 녹사)가 정몽주를 따랐다가 죽었다고 되어 있다. 특히 임하필기에서는 숭양(崧陽)의 어떤 이가 <진주김씨세보>라는 가정 계미년(중종 18년)에 쓰인 족보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그 녹사의 이름[16]과 당시 행적에 대해 적혀있었던 것은 물론 그 부친이 공민왕 때의 시중인 김구라는 이였다는 기록까지 적혀있었다고 하고, 이를 안 숭양의 인사들이 원래 있던 녹사비 옆에 새로운 비를 다시 세워주었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실제로도 그런 비들이 아직 선죽교에 남아있다고. 다만 모두 다 후대의 기록인 만큼 무조건 신뢰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 이방원은 왜 정몽주를 죽였는가?
    이방원은 후일에 "정몽주가 아버지를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또 정몽주는 절대로 찬탈 모의에 회유되지 않을 강직한 인물이라서 어쩔 수 없이 자기가 결단을 내렸다"는 논조로 변명했지만 설득력이 높지 않다. 우선 정몽주에게 직접 정치적 공격을 당하고 암살미수까지 당한 이성계 본인이 그걸 문제삼지 않고 계속 정몽주를 회유중이었는데 왜 그의 아들이 멋대로 끼어든지부터 의문이다. 정몽주가 이성계의 예상보다는 강하게 저항하긴 하지만, 어차피 조민수나 변안열 등 군대 지휘가 가능한 정적들은 전부 숙청당해서 군권을 이성계가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몽주의 저항은 이성계에게 현실적인 위협은 아니었다. 백성들의 존경을 두루 받던 정몽주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면 잃었던 민심도 꽤 회복하고, 높은 정당성을 가지고 왕이 될 수 있었을테니 이성계에게는 최선책이었다. 또 만약 이성계 본인이 마음속에 정해놓은 데드라인까지도 정몽주가 절대로 회유되지 않았다면 결국 그를 유배 보내고 양위받는 식의 차선책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방원이 멋대로 끼어들어 정몽주를 암살해버리면서 이성계의 양위 정당성은 오히려 훨씬 더 떨어진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역사학자 임용한 박사도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일 필요가 없었다." 라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이방원이 이성계의 명령을 거역하고 정몽주를 멋대로 죽인 것은, 이방원이 찬탈의 과정에서 눈에 부각될만한 자신의 뚜렷한 공을 세우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당시의 여론에서부터 현대의 사극까지도 이방원을 '정적 정몽주의 공격으로부터 아버지를 지킨 결단력 있는 효자' 로, 이성계를 '회유되지 않을 정몽주에게 헛되게 매달리느라 대업을 잃기 직전까지 몰린 아버지' 로 묘사한다. 하지만 정몽주라는 거물 정치인이 암살당했다는 강렬한 임팩트를 배제하고 역성혁명 과정에 대한 이방원의 기여분을 잘 생각해보면 사실 그는 한게 거의 없었다. 신진사대부 세력의 지지를 확보하고 최영, 조민수, 변안열 등의 무장 정적들을 모두 제거했을때 이미 이성계 입장에서 왕위 찬탈은 언제 먹어도 상관없는 다 된 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다 된 밥에 정몽주의 지지라는 훌륭한 반찬을 추가하느냐 마느냐는 어디까지나 이성계의 선택사항에 불과했다. 이때 이방원은 겨우 스무살을 넘어서 관직에 이제 막 출사한 하급 문관에 불과했기에 이 상황에 오기까지 아무것도 기여한게 없었다. 자신의 기여분 없이 완성 직전까지 온 역성혁명의 밥상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공을 최대한 부풀리기 위해서 저지른 일일 가능성이 높다. [17]

6. 후일담

당시 정몽주가 고려에 가진 영향력은 단순한 재상의 수준이 아니었다. 조선 개국에 가담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조준에게 조견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조선 개국에 대해서 조준이 동생을 설득하려 하자, 조견이 "또 달가(達可, 정몽주의 字)는 이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인 만큼 만약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이라도 달가와 달리하기를 구한다면 이것은 국사를 해치는 것이고 나라가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입니다."[18]라고 말할 정도였고 조준도 여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명문가 출신에 이성계측 주요인물인 조준의 가문에서 달가(=정몽주)와 뜻이 다르면 역적이자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의 위상이었으니 이성계 측이 그토록 그를 한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19]

이런 점에서 이방원이 한 일은 이성계와 당시 고려 전체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이 정몽주 살해 사건은 이방원이 단순히 '이성계의 아들 중 1명'에서 벗어나서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가 되는 계기이자, 이후 수십년간 이어지는 이성계와 이방원 간의 그 지독한 대립 및 애증 관계의 시발점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의 시신은 산중의 중들이 충신의 시체를 방치할 수 없다하여 목숨을 걸고 밤에 몰래 옮겨 장사지냈으며, 시중의 상인들도 며칠간 상점을 철시하고 충신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전한다. 게다가 일본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만나고 알게 된 일본인들마저 따로 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절에 정몽주를 위하여 시주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만 그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이설이 존재하는데 당시 정몽주와 가깝게 지냈던 명문가 우현보가 수습해 묻었다는 말도 있다. 후에 정도전이 우현보의 세 아들을 곤장을 때려죽인 사건에 자신의 어머니가 우현보 집안의 종의 자손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 점이 작용했다는 설도 있긴 하다.

다만, 또다른 일각에선 이것이 그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정몽주의 죽음을 슬퍼하고 후에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축출되고 나서 간적으로 규탄받고, 나중에 정몽주가 추앙받게 되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우현보의 집안인 단양 우씨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드높이려고 자칭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한편, 정몽주가 죽어간 다리는 당시 선지교라는 이름이었으나 정몽주가 죽은 자리에서 붉은 참대나무가 났다하여 이름이 선죽교로 바뀌었다. 개성에 남아있는데, 다리에 있는 검붉은 얼룩이 정몽주의 피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북한에 간 유홍준 교수나 여러 인물이 선죽교를 찾아가봤더니 북한에서도 정몽주를 기려서 선죽교에 아예 보호대를 설치하여 함부로 밟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 선죽교 다리에는 붉은 얼룩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얼룩의 범위가 60년 전과 현재의 모습이 좀 다른 듯.

역설적이게도 후에 2차 왕자의 난이 이 선죽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다. 일설에 따르면 조선 말기까지 남아있던 선죽교의 혈흔에 대한 증언과 현재 개경에 남아있는 피얼룩이 상당히 다르다고 하며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태종이 그를 공식 복권시킨 후에는 정몽주의 아들도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했다. 장손인 설곡 정보라는 인물도 벼슬을 했는데 충신의 집안에서 충신이 나오는 것인지 단종에게 절의를 지키고 그 삼년상을 치렀기에 결국 사사당했으나 이후 숙종때 절의를 인정받아 신원, 이조참의로 증직되었다. 이후 정조(조선)로부터 “살아 있는 사육신”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후 그 후손들도 대대로 벼슬을 했으며 그 중에는 우의정을 지내거나 학문의 거두가 된 이들도 나오는 등, 나름대로 번창한 편이다.

묘소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소재. 묘비명은 매우 담박하게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고려 수문하시중 정몽주지묘), 즉 '고려 수문하시중을 지낸 정몽주의 묘'라고만 쓰여져 있다. 사실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유림의 존경심이 담긴 표현이다. 본래 묘비에는 생전의 관직 뿐만 아니라 사후에 추증된 관직들도 모두 적어서 기리는게 보통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정몽주를 충신으로 인정하고 조선의 관직들을 추증하였으나 유림들은 정몽주가 오직 고려의 충신임을 주장하기 위해 이런 묘비를 지은 것.

묘소가 용인에 있는 이유가 흥미롭다. 정사와 야사의 중간적인 이야기이지만, 개성에 있던 유해를 그의 후손들이 선산이 있는 고향 경상도 영일로 이장하기를 조정에 청했고, 당시 왕은 기꺼이 허락하고 큰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상여를 다시 짜고 격에 맞추어 개성에서 영일로 이장하던 도중 용인에 이르렀을 때 바람이 불어 명정[20]이 산 중으로 날아가 이를 찾느라 중간에 멈추게 되었고 며칠을 허비하게 된다. 매일 매일 상여의 이동을 확인하던 왕이 이를 알고 영일이 아니라 그 곳 용인이 그가 원하는 장소라 하여 그 곳에 묘소를 차리라고 어명을 내려 그 지역을 하사한다. 이것이 대단한 것으로 그 지역은 왕골터라하여 왕들이 사후 묻힐 장소로 조정에서 미리 정해놓은 곳이며 왕의 재산 중 하나라는 것이다. 묘소 뿐 아니라 근처 지역도 함께 하사 받아 후손들이 관리하였으며, 60~70년대에 후손 가문에 큰 돈이 필요한 경우가 생겨 종친회의를 거쳐 일부 지역을 팔아 충당했는데 그 지역이 현재 에버랜드이다.

[1] 연일 정씨의 지주사공파의 중시조. 정몽주에게는 10대조다.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에 막장가도를 달리던 의종에게 목숨 걸고 간언한 인물이다. 원래 의종을 보살피고 보좌했으나 의종이 정사를 내팽개치자 이를 간언하다가 결국 왕의 눈 밖에 나자 자결했다.[2] 현 경상북도 포항시. 이런 이유로 포항에는 관련 사적지가 여러 군데 있으며 포항시립도서관의 이름이 '포은'도서관이었다.[3] 이 바람에 포항시와 영천시는 서로 우리가 정몽주 선생의 고향이라고 싸우기까지 했다. 관련 기사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정몽주 사망 후 나온 나레이션으로 영천에서 출생했다고 나왔다.[4] 사실 이는 논어에서 공자가 "내가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 지 한참이구나!(久矣, 吾不復夢見周公!)" 라며 자신의 쇠약함을 탄식한 구절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보통 공자가 자신이 평생에 걸쳐 실현하고자 했던, 주공의 예악이 이루어진 대동사회 건설의 꿈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에 대한 한탄으로 해석된다. 즉, '주공의 꿈을 꾼다(夢周)'라는 건 이상사회를 향한 강렬한 현실 개혁의 의지를 관철한다는 뜻이 되며, 과연 그 이름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정몽주의 평생의 벗이자 필생의 적이었던 이성계는 즉위 후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바꾸었는데, 단(旦)은 정몽주의 이름이 뜻하는 주공(周公)의 휘(諱, 본명)이다.[5] 東方理學의 鼻祖. 동방에서 성리학(理學)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이라는 뜻.[6] 현재 다자이후 시에 있는 간제온지(觀世音寺)가 바로 당시 정몽주가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지며 정몽주 본인이 지은 한시도 남아 있다.[7] 1급수씩 밀리기는 하나 이후 조선 초에도 외교, 국방, 내정을 섭렵한 팔방미인이 있었는데 바로 신숙주. 둘은 시호 또한 문충으로 같으나 부귀영화를 버리고 스러지는 고려를 위해 순절한 정몽주와 세종의 눈물겨운 부탁도 저버리고 세조패륜 행각에 동참한 신숙주는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후의 평가도 정반대이다.[8] 세종대왕의 장인인 심온의 아버지다.[9] 이 부분을 용의 눈물에서는 이성계와 정도전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일부러 이성계가 낙마한 것처럼 꾸며서 정몽주가 일을 도모하게 한 후, 개경으로 귀환한 이성계가 정몽주를 용서함으로써 한편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으나 실패한 것으로 각색했고, 이방원과 서로 시조를 읊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구구한 말 없이 비장한 표정으로 딱 시조만 주고받도록 깔끔하게 처리하여 명장면을 연출했다.[10] 죽은 장소가 선지교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당대 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며, 조선 후기에도 의심을 가지는 기록들이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선죽교 항목 참조.[11] 이 때 같이 죽은 머슴의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다. 용씨(龍氏)성의 머슴이었다는 말도 있다. 참고로 용의 눈물에서는 이상인이 배역을 맡았었다.[12]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의 사위인 변중량이 정몽주의 제자였는데 그가 스승에게 암살계획을 알렸다고 한다.[13] 그래서 당시 여론은 정몽주를 만고의 충신으로서의 애도했고, 이방원은 아비가 하지 못할 일을 부득이하게 떠밀려서 대신한 효자로 여겼다. 반면 이성계만 왕관에 눈이 멀어서 자식을 시켜 충신을 때려잡은 개자식으로 평판이 떨어졌다.[14] 다만 이건 진심이 아니라 왕이나 권신이 흔히 벌이는 정치적인 쇼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 왕조를 지키려고 발버둥치던 공양왕도 이성계가 진심으로 은퇴하려는게 아니라는걸 알았기에 받아주지 않았다.[15] 조선왕조는 이런 정치적 부담때문에 유력 왕씨 200명을 학살하는 왕씨 몰살이라는 극단적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16] 다만 필자인 이유원은 이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듯,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17]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정도전의 입을 빌려 이를 정확히 지적하는데,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건 대단한 공이 맞지만 그 공이 없었어도 대업은 성공했다고 말한다. 불과 몇 화 전에 이방원 덕에 살았다고 한 정도전이 말이다.[18] 조선왕조실록 정조 14년에 조견을 제사지내자는 건의에서 나오는 기록.[19] 근데 사실 이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된다. 왜냐면 이건 조선개국공신인 조견을 고려의 충신이라고 윤색한 과정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하여간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몽주의 위상이 그만큼 대단했으며 몇백년이 지난 후대에도 '당시엔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곧 역적이나 다름없었다'고 그의 위상을 높게 봤다는 것으로 해석하는게 좋을것이다.[20]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이며 장지에 매장할 때 관 위에 이름이 보이게 잘 펴서 관과 같이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