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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농구)

정진영의 수상 및 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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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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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정진영 (鄭鎭永)
생년월일 1973년 6월 26일 ([age(1973-06-26)]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학교 광신상고 - 건국대학교
포지션 포인트 가드, 슈팅 가드
신체 사이즈 184cm, 76kg
프로입단 1996년 현대전자 농구단 입단
소속팀 현대전자/대전 현대 다이냇/걸리버스 (1996~1998)
광주 골드뱅크 클리커스 (1998~2000)
울산 모비스 피버스 (2000~2004)
창원 LG 세이커스 (2004)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2004~2005)

1. 개요2. 고교-대학 시절3. 실업-프로 시절4.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 선수.

2. 고교-대학 시절

90년대 초 갑자기 고교농구계에 유망주들이 쏟아져나오던 시절, 중위권 팀이던 광신상고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다. 김현준, 문경은의 광신상고 후배이고 3점슛이 좋다는 점 때문에 이들의 후계자로 불리기도 했으나, 당시 고교농구계를 석권하던 휘문고 석주일-서장훈-현주엽, 용산고 김병철-양경민, 경복고 전희철-우지원, 홍대부고 이상민에 밀려 거의 무명 수준이었고, 2학년 때인 1990년 협회장기에서 우승컵을 들긴 했으나[1] 정작 3학년 때 단 한 차례도 4강에 오르지 못한 비운의 에이스이기도 했다.

건국대학교 1학년 때부터 주봉삼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주전이자 실질적 에이스로 발돋움했으나, 동갑내기 전희철이 국대에 뽑히고 우지원-김병철이 오빠부대를 몰고다니던 시절, 약체 건국대를 홀로 이끌다시피 했던 정진영은 대학농구연맹전 차수별 대회 예선 통과도 버거울 정도였고 그만큼 전국에 얼굴을 알릴 기회도 적었다. 채치수??

그러다 3학년이던 1994년, 변청운(192cm), 황문용(191cm) 등 좋은 신입생들을 받으면서 드디어 고독한 에이스에서 벗어나 건국대를 1994 대학농구연맹전 1차대회 4위로 이끄는 등 모처럼 호성적을 거두었고, 이 성적을 바탕으로 건국대에 1994-95 농구대잔치 출전티켓을 안긴다.[2] 첫 출전한 농구대잔치에서 정진영은 평균 20점을 올리며 에이스의 역할을 톡톡히 했지만, 팀은 1994-95 농구대잔치에서 정규리그 1승 12패로 14개 팀 중 전체 꼴찌를 차지한다.[3] 4학년이 된 정진영은 이상백배 한일대학농구대회 대학선발에 뽑히는 등 슬슬 인지도를 높여갔지만, 정작 팀이 1995 대학농구연맹전에서 연거푸 예선 탈락하는 등 성적이 좋지 못한 바람에 졸업전 마지막 농구대잔치에 참가하지 못한 채 황소군단의 유니폼을 벗는다. 건국대 졸업 후 정진영은 계약금 2억원에 세대교체 중이던 현대전자 농구단의 1996년도 유일한 신인으로 입단한다.[4]

3. 실업-프로 시절

대우증권, 동양제과의 창단으로 92학번의 우수 선수들 중 연세대, 명지대(이상 대우증권 지명), 고려대, 한양대(이상 동양제과 지명) 선수들이 대거 신생팀으로 가면서, 팀의 유일한 신인이던 정진영은 비교적 쉽게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데뷔무대였던 4월 코리안리그 실업연맹전에서부터 일약 팀의 에이스로 올라서며 현대전자를 전체 3위로 이끌더니[5], KBL 출범 직전 마지막 농구대잔치였던 1996-97 농구대잔치에서는 평균 22점(득점 7위)을 올리며 그야말로 맹활약, 유도훈, 정경호 등과 함께 현대전자가 실업부 2위로 6강 플레이오프에 오르는데 일등공신이 되고, 당시 언론들은 정진영의 맹활약을 "무명의 반란" 등으로 소개하며 전희철(동양제과), 김희선(삼성전자)과 함께 신인왕 후보로 언급하기도 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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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97 농구대잔치 직후 열린 1997년 KBL 원년시즌에서도 정진영은 14.5득점-1.9리바-2.7어시-1.5스틸을 올리며 토종에이스(팀내 득점 2위, 어시스트/스틸 1위)로 맹활약했지만, 외인 콤비 토드 버나드(C, 193cm)-라펠 맥길버리(F, 190cm)가 타 팀들에 비해 떨어졌던 탓에 소속팀이 원년시즌 8팀 중 7위에 머무는 것을 막지 못했다.

1997-98 시즌 상무에서 이상민, 조성원이 돌아오고, 대학 최고의 포워드 추승균이 입단하면서, 전 시즌 에이스였던 정진영은 졸지에 후보로 밀리게 된다. 팀은 1997-98 시즌 챔피언에 올랐지만 정진영의 출전시간은 정규리그 평균 13분, 플레이오프 이후부터는 4분에 그쳤고, 시즌 종료 직후 공익근무요원으로 입소한다.

그래도 재능은 인정받아서, 공익근무요원 복무 중이던 1998년 당시 신선우 감독의 로렌조 홀(C, 203cm) 영입 작전[7]의 반대급부로 광주 골드뱅크 클리커스로 이적한다.[8]

소집해제 후 입단한 광주 골드뱅크 클리커스에선 포인트 가드슈팅 가드를 넘나들며 평균 11.4득점-2.8리바-5.7어시-1.5스틸을 기록[9], 팀의 주전으로서 여전한 기량을 과시하지만, 얇은 선수층 탓에 시즌 막판 갑자기 9연패를 당하는등 무너지며 아깝게 6강 티켓을 놓치고 만다.

파일:정진영_농구.jpg

광주 골드뱅크에서 한 시즌을 뛴 후에 2:2 트레이드.(광주 골드뱅크 get: 정인교, 봉하민 ↔ 울산 모비스 get: 정진영, 박재현)로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로 다시 이적했다. 이적 후 처음 두 시즌에는 주전과 식스맨을 넘나들며 강동희-김영만과 함께 팀의 백코트에서 존재감을 보여줬지만, 2002-03 시즌 최희암 감독이 부임하고 시작된 팀 리빌딩 작업[10] 이후 전형수 등에 밀려 완전히 후보선수로 밀려났고, 2004-05 시즌을 앞두고 창원 LG 세이커스길도익(F, 191cm)과 1:1 트레이드 되었다.

2004-05 시즌 창원 LG 세이커스에선 부상 등을 이유로 단 한게임밖에 뛰지 못했고, 2004-05 시즌 중 김재훈과 함께 인천 전자랜드김훈, 김동언과 2:2 트레이드로 다시 이적한다. 인천 전자랜드에서 팀의 식스맨이자 나름 슬래셔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나, 2004-05 시즌을 마치고, 벤치에 계속 있으니 다른 길을 찾겠다며 은퇴했다.

실업 초년차와 프로 원년의 임팩트로 보면 한 팀의 주전멤버로 손색이 없었으나, 유난히 팀 운이 따르지 않았던 선수였다. 대전 현대에서 주전으로 잘나가나 싶더니 갑자기 이상민, 조성원이 돌아오고, 광주 골드뱅크에서 주전으로 한 시즌을 잘 뛰고 있는데 갑자기 강동희가 있는 으로 트레이드 되지 않나, 그래도 거기서 겨우 자리를 잡았더니 웬 고집 센 꼰대 감독이 떡하니 등장해 이유 없이 출전시간을 뺏질 않나... 가진 재능에 비해 빛을 많이 보지 못했던, 아쉬운 선수 중 한 명이다.

4. 관련 문서



[1] 상술한 강호들이 모두 불참한 대회였다.[2] 당시 농구대잔치 출전권은 시즌 성적을 합산하여 12개 대학팀 중 단 6팀에게만 주어졌다.[3] 유일한 1승은 같은 대학팀인 한양대를 꺾은 것이었다.[4] 입단 후 무명의 설움을 곱씹으며 하루 5~6시간의 팀훈련 외에 2시간씩 개인연습에 매진했다. 하루 8백여개의 슛을 던지며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로 훈련했다고 한다.[5] 이 때 우승팀은 전희철이 이끌던 창단팀 동양제과였다.[6] 하지만 현대는 6강에서 대학부 3위팀인 경희대에 1승 2패로 탈락하고 만다. 당시 정진영은 경희대 2학년 강혁에 틀어막혔다.[7] 당시 외국인 선수 1순위 선발권은 광주 골드뱅크가 가지고 있었다.1998년 당시 광주 골드뱅크는 IMF 여파로 부도위기를 맞은 나산그룹으로부터 농구단을 인수하면서 이민형(F, 190cm), 김영주(G, 180cm), 김현국(F, 189cm) 등 노장들을 반강제로 은퇴시킨 상태라 선수층이 얇은 팀이었고, 이에 신선우 감독은 광주 골드뱅크가 외국인선수 드래프트에서 로렌조 홀을 패스하는 것을 조건으로 대전 현대가 선수층이 얇은 광주 골드뱅크에게 유리한 1:2 트레이드(대전 현대 get: 최명도 ↔ 광주 골드뱅크 get: 정진영, 박재현)를 제안하였다. 이후 다음 순번인 청주 SK와는 재키 존스(C, 202cm)와 로렌조 홀의 맞트레이드를 통해 로렌조 홀을 영입했다. 하지만, 정작 현대는 SK의 재키 존스를 막지 못하며 챔프전에서 졌다(...)[8] 결국 이 트레이드는 삼각 트레이드였다. 대전현대 get: 최명도(from 광주 골드뱅크), 로렌조 홀(from 청주 SK) ↔ 광주 골드뱅크 get: 박재현/정진영(from 대전 현대) ↔ 청주 SK get: 재키 존스(from 대전 현대)[9] 팀내 득점 4위, 어시스트 2위, 스틸 1위였다. 팀내 득점 1-2-3위는 에릭 이버츠-현주엽-키이스 그레이였고, 어시스트 1위는 경기당 7.1 어시를 기록한 파워 포워드 매직히포였다.[10] 이때 강동희-김영만이 차례로 트레이드 되었다. 말이 개편이지 실제론 기아자동차 시절 흔적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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