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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아이보리

제임스 아이보리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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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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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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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회
(2018년)
제91회
(2019년)
배리 젠킨스
타렐 앨빈 맥크래니
(문라이트)
제임스 아이보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파이크 리
데이빗 라비노위츠
찰리 왓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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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클랜스맨)

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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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1986년)
제40회
(1987년)
제41회
(1988년)
로버트 그린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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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아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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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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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제임스 아이보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파이크 리
데이빗 라비노위츠
찰리 왓첼
케빈 윌못
(블랙클랜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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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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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제23회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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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에릭 하이저러
(컨택트)
제임스 아이보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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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자상 데뷔작 작품상
제43회
(1986년)
제44회
(1987년)
제45회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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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그의 영화)
제임스 아이보리
(모리스)
테오 앙겔로풀로스
(안개 속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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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755E><colcolor=#ffffff> 제임스 아이보리
James Iv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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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제임스 프랜시스 아이보리
James Francis Ivory
출생 1928년 6월 7일 ([age(1928-06-07)]세)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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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영화감독, 프로듀서, 각본가
활동 1953년 – 현재
신체 180cm
학력 오리건 대학교 (미술학 /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영화학 / 석사)
파트너 이스마일 머천트 (1962~2005 사별)[1]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전성기2.3. 침체기 그리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3. 작품의 특징4. 필모그래피5. 여담6.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미국영화감독, 영화 제작자, 각본가.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전성기를 보낸 감독으로, 시대극 영화를 우아하게 연출해 명성을 얻었다. 그를 대표하는 연출작으로 '전망 좋은 방'(1985), '모리스'(1987), '하워즈 엔드'(1992), '남아있는 나날'(1993)이 있으며, 각본가로서 대표작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이 있다.

2. 생애

2.1. 초기

1928년 6월 7일,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직후 양부모에게 입양되었다.[2] # 어릴 적 아이보리는 오리건 클라마스 폴스에 있는 지역 영화관에서 뽀바이 클럽에 참석했는데, 이곳에서는 서부극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이 함께 상영되었다. 이 경험에 깊이 매료되어, 나중에 영화 세트 디자이너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 클라마스 유니온 고등학교 졸업후에는 오리건 대학교에서 건축과 미술을 전공했다.

프랑스어를 배우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오리건 대학교를 졸업 한 후 잠시 프랑스로 갔는데, 이곳에서 영화감독의 꿈을 꾸게 되었다. 이후 아이보리는 영화학과 석사 과정을 밟기 위해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영화예술대학원에 입학했다. 아이보리가 첫 번째로 연출한 영화는 자신이 각본을 쓰고, 촬영을 한 다큐멘터리 〈베니스: 주제와 변주곡〉이다. 이 작품은 석사 논문이었는데, 6.25 전쟁으로 인해 징집되어 중단되었고, 이때 그는 2년간 독일에서 복무했다. #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돌아와 30분짜리 석사 논문 다큐멘터리를 끝내고 1957년에 USC를 졸업했다. 이 다큐는 1957년 뉴욕 타임스가 그해 최고의 비극장 영화(non-theatrical films) 10편 중 하나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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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아이보리(앞)와 이스마일 머천트
1959년 아이보리는 인도 미니어처 그림을 바탕으로 한 두 번째 단편 영화 〈검과 피리〉를 공개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인도 도시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더 델리 웨이〉를 만들기 위해 뉴욕 아시아 협회로부터 보조금을 받게 됐다. 이 시기에 인도인 배우 내레이터를 기용하고 있던 인도의 영화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와 뉴욕에서 친해지게 되는데, 이후 이들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1961년 아이보리는 머천트와 협력하여 영화 제작사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스〉을 인도에서 설립했고, 이들의 협업은 1961년부터 머천트가 사망한 2005년까지 44년간 지속되었다. 이 제작사는 적은 제작비로 뛰어난 시대극을 제작하는 영화사로 유명해지게 된다. 또한 독립 영화 역사상 가장 긴 파트너십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으며, 머천트가 사망할 때까지 40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머천트는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내 인생의 동반자였어요. 저는 45년 동안 뉴욕과 다른 어디에서든 그와 공개적으로 함께 살았습니다.
제임스 아이보리 #
첫날 저녁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아이보리가 건조하고 학문적인 방식이 아니라 이해심을 가지고 인도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미국인에게서 본 적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마일 머천트 #
아이보리, 머천트 콤비가 첫 번째로 만든 장편 영화는 독일계 유대인 영국 작가 루스 프라워 합발라[3]의 초기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63년 작품 〈가장〉이었다. 이 작품은 인도 영화의 거장 사티야지트 레이가 크게 관여하기도 했다.[4] 1965년에는 인도를 무대로 연출한 〈셰익스피어 왈라〉가 제1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경쟁 부문 초청작으로 선정됐으며, 주연을 맡은 인도의 배우 마두르 재프리[5]가 은곰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 후 2편의 영화를 인도에서 찍은 후, BBC에서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2.2.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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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의 제임스 아이보리[6]
제임스 아이보리는 1953년 20대의 어린 나이에 영화계에 데뷔를 했지만, 본격적으로 영화계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한 시기는 1970년대부터다. 이 시기의 아이보리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거나[7], 고전 소설을 원작으로 해 시대극 영화를 연출했다. 아이보리가 자신의 연인 이스마일 머천트와 함께 설립한 제작사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스〉를 통해 만든 17편의 영화는 대부분 영국과 미국의 고전 소설이나 일반 소설을 원작으로 해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당대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E. M. 포스터[8]의 많은 소설을 각색했고, 미국의 대문호 헨리 제임스의 소설, 미국 시인 조셉 몬큐어 마치의 시, 영국 작가 진 리스의 소설 등을 원작으로 해서 연출해 성공을 거두었다. 또 이 시기부터 '머천트 아이보리 영화'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실제 영화 제작사를 의미하기보다는 특정 영화 장르를 지칭하기 위한 일반 용어로 자리 잡았다. '머천트 아이보리 영화'는 문학 작품을 각색해 우아하면서도 세련미 넘치는 작품으로 유명했으며, 문학적 충실성,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 복잡한 주제, 풍부한 캐릭터로 알려졌다

1972년 6월, 〈세이비지〉로 칸 영화제 감독 주간 부문에 초청받아 호평받았고, 1979년에는 리 레믹이 주연을 맡고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유럽인들〉을 연출해, 처음으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전세계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게 된다.[9] 이 작품은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에서 공개한 첫번째 시대극 영화이다. 박스오피스에서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평단에서도 준수한 평을 받아 골든 글로브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영국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리사 에이크혼), 미술상, 의상상 후보에 올랐다. 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처음으로 후보(의상상)에 올랐다.
1961년에 시작하여 40년 이상 지속된 감독, 작가, 버클리 출신 제임스 아이보리와 뭄바이 출신 영화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의 협업은 영화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고 성공적인 것 중 하나로 입증되었다. 코스튬 드라마와 문학적 각색은 머천트 아이보리 브랜드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전망 좋은 방〉과 〈하워즈 엔드〉 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이 지칠 줄 모르는 듀오는 빈번한 협업자인 시나리오 작가 루스 프라워 합발라와 함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고 문화, 국적, 계층 간의 긴장과 분열을 강조하는 정교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버클리 미술관 태평양 영화 기록 아카이브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스는 박스오피스에서 거물로 떠오르며, 억제된 영국인이 시대복을 입은 호화로운 드라마로 시장을 독점했다. 이러한 문학적 각색들은 휴 그랜트, 헬레나 본햄 카터, 루퍼트 그레이브스, 줄리안 샌즈의 경력을 시작하게 했고, 엠마 톰슨다니엘 데이루이스를 스타로 만들었다. 대부분은 1963년 데뷔작 〈가장〉 부터 이따금 그들과 함께했던 루스 프라워 합발라가 각본을 썼다. 그녀는 심지어 뉴욕 미드타운의 같은 아파트 건물에 살았다. (중략) 이 영화들은 시대극을 데이비드 린 감독의 전성기 시절처럼 중요한 위치로 되돌렸다. 제인 오스틴 각색의 호황은 이들이 없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브리저튼〉을 만들어낸 원인으로 머천트 아이보리를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가디언 #
1981년에는 매기 스미스이자벨 아자니가 출연한 프랑스 영화 〈4중주〉를 연출했는데, 이 작품은 이자벨 아자니에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줬고, 매기 스미스에게는 이브닝 스탠다드 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연기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줄리 크리스티가 주연을 맡은 로맨스 영화 〈인도에서 생긴 일〉을 공개했고, 1984년에는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주연을 맡은 〈보스톤 사람들〉을 공개했다. 헨리 제임스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시대극이었는데, 이 작품으로 레드그레이브는 제5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85년 12월, E. M. 포스터의 1908년 소설을 원작으로 한 로맨스 영화 〈전망 좋은 방〉을 공개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아이보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 됐으며, 주연을 맡은 헬레나 본햄 카터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박스오피스에서 제작비 대비 7배의 수익을 올렸고, 제5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8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의상상, 미술상, 각색상을 수상했다. 또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작품상, 여우주연상(매기 스미스), 여우조연상(주디 덴치)을 수상했고, 전미 비평가 위원회 작품상,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외국어 작품상, 이탈리아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에서 외국어 작품상과 감독상 등을 수상했다.

1987년 9월, E. M. 포스터의 1971년 소설[10]을 원작으로 한 로맨스 퀴어 영화 〈모리스〉를 공개했다. 이 작품은 아이보리가 직접 공동 각본가로 참여했다. 흥행면에서는 전작보다는 저조했지만, 이 작품도 평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퀴어 영화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아이보리의 연출작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 중 하나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했고, 당시 신인 배우였던 제임스 윌비와 휴 그랜트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해 총 3개부문을 수상했다. 다만, 제6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의상상 후보에 그쳤다.

모리스〉가 호평을 받은 이후에는 두 편의 미국 영화를 연출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첫 번째로 연출한 작품은 미국의 여성 작가 타마 야노비츠[11]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1989년 영화 〈장미빛 모자〉이다. 버나뎃 피터스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참패를 겪었다. 이듬해에는 미국의 소설가 에반 S. 코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브리지 부부〉를 공개했는데, 이 영화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조앤 우드워드)과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로부터 여우주연상, 각본상 후보에 올랐고, 어느정도 호평을 받았으나, 흥행에서는 제작비를 회수하지 못하는 실패를 거뒀다.

1992년 2월에는 E. M. 포스터의 1910년 소설 〈하워즈 엔드〉를 원작으로 한 시대극을 공개했다. 이 작품은 아이보리의 재기작으로, 관객들과 비평가들 양쪽 모두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로저 이버트는 2005년 자신의 '위대한 영화' 리스트에 이 영화를 등재했고, 레너드 말틴은 4점 만점의 4점을 주며 극찬했다. 흥행에서도 제작비 대비 3배가 넘는 수익을 거둬 성공을 거두었다. 제6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여우주연상(엠마 톰슨), 각본상, 미술상을 수상했다. 또한 영국 아카데미에선 11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작품상을 수상했고, 이외에도 칸 영화제 45주년 특별상, 전미 비평가 위원회 감독상 등을 수상했다. 미국 감독 조합에서는 아이보리의 성취를 높게 평가해 최고의 영예인 D.W. 그리피스 상을 수여했다.

1993년 10월에는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12]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영화 〈남아있는 나날〉을 공개했다. 주연은 〈하워즈 엔드〉에서 호흡을 맞춘 안소니 홉킨스엠마 톰슨이다. 이 작품은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의 전성기를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평가는 상당히 좋은데 원작소설 못지 않게 훌륭하게 만들어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제임스 아이보리의 최고작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 또한 아이보리의 연출작 중 가장 큰 흥행 성공을 거뒀는데, 제작비 대비 4배의 수익을 거뒀다. 흥행과 작품성을 모두 잡아냈기 때문에 '제임스 아이보리 커리어 절정기의 작품'이라고 평가 할 수 있다. 제6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포함해 8개 부문에 후보에 올랐으나, 대진운[13]이 좋지 못해서, 단 한 부문도 수상하지 못했다. 아이보리는 아카데미에서 세 번째로 감독상 후보에 올랐으나, 또 다시 수상하지 못한다.[14]

2.3. 침체기 그리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1995년 샐리 헤밍스토머스 제퍼슨을 등장시킨 시대극 영화 〈대통령의 연인들〉을 공개했다.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으나, 전작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듬해에는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으로 출연한 파블로 피카소의 전기 영화 〈피카소〉를 공개했지만, 이 작품 역시 흥행과 비평에서 큰 실패를 거뒀다.

1998년에는 카일리 존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군인의 딸은 울지 않는다〉를 연출했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바바라 허쉬, 릴리 소비에스키가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 작품은 이전 두 작품에 비해 호평을 받았다.

2000년대에도 네 작품을 연출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이 흥행과 비평에서 실패를 거뒀으며, 1980년대~90년대 전성기에 거뒀던 성과를 이뤄내지 못했다.[15] 2009년 개봉한 〈시티 오브 유어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이후 제임스 아이보리는 사실상 은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영화계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트러블이 많아서 안소니 홉킨스와 수잔 말릭이 출연비 미지급 문제로 고소하기도 했다. 평도 좋지 않았던 편이다.
아카데미 각색상 수상 소감
그런데 2017년 8년만의 복귀작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대성공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아이보리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각본을 쓰고 공동 제작자로 참여했는데, 원래는 루카 구아다니노와 공동 감독직에 있었으나,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각본가로 참여했다. 이 영화는 그가 각본에 참여했지만 연출하지 않은 유일한 장편 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평론가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는데, 그의 세련된 각본과 완성도 높은 각색으로도 높은 평을 받았다.[16] 개봉 이후 많은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각색상을 수상해 오스카 위너가 됐다. 또한 89세의 나이로 오스카상과 영국 아카데상을 수상해 두 상 모두에서 역대 최고령 수상자가 되었다.

아이보리는 아카데미 수상소감으로 "소설을 각색하는 작가로서 지키는 첫 번째 규칙은, 먼저 작가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첫사랑은 우리 대부분에게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그 중간이든, 누구나 첫사랑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경험을 겪고 나서 온전하게 그 과정을 지나왔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 영화의 펄먼 가족처럼 사랑이 넘치는 부모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섬세하고 현명한 감독인 루카 구아다니노 뿐만 아니라 뉴욕 북부의 이웃인 피터 스피어스와 브라이언 슈워드스트롬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물론 영화의 감동으로 가득 찬 멋진 배우들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영감을 받은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 밤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작가 루스 합발라와 두려움 없는 프로듀서 이스마일 머천트의 영감을 받지 않고는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머천트 아이보리에서 50년 가까이 함께 일하면서 이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후로는 2018년 영화 〈댄스 어게인 위드 미 헤이우드!〉를 제작했고, 2022년에는 다큐멘터리 〈A Cooler Climate〉를 연출하는 등 고령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3. 작품의 특징

The First Loves of James Ivory
시각적으로 아름다움, 성숙하고 지적인 주제, 빈틈없는 캐스팅,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영국 아카데미 평생공로상 선정 이유 출처
아이보리의 독립성, 영국 영화에 대한 영향력 있는 참여, 프로듀서 이스마일 머천트와의 지속적인 협력적 파트너십은 영국 영화의 초기 커플인 파웰과 프레스버거와의 비교를 불러일으킨다. 두 팀 모두 성적 억압의 영향이나 서로 다른 문화의 충돌을 다루는 소재에 끌렸다. (중략) 파웰과 프레스버거는 다양한 형태의 시각적 실험을 통해 강렬한 색상, 자주 움직이는 카메라, 영화적 병치를 사용하여 호화롭고 은유적인 시각적 질감을 구현한 반면, 아이보리의 작업은 시각적 과장으로부터 물러서며, 비교적 보수적인 시각적 스타일을 고수하는 뚜렷한 축소를 나타낸다.
International Dictionary of Films and Filmmakers
문학 작품을 우아한 시대극으로 재창조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영화 감독이다.

자신의 연인인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와 함께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스를 설립해 300만 달러가 넘지 않는 중간 규모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문학의 결을 섬세히 살린 고풍스러운 시대극 영화를 주로 연출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또한 독일 태생의 영국인 여성 각본가인 루스 프라워 합발라가 그의 작품에 자주 각본가로 참여했는데, 이 세 명은 2002년 BAFTA에서 평생 공로상(BAFTA Fellowship)을 수상했다.[17] 더 뉴요커는 "아이보리의 섬세하고 정교한 연출, 머천트의 쇼맨십, 합발라의 문해력이 뛰어난 시나리오로 화려하고 감정적으로 사실적인 영화가 탄생했다"고 평했다. #

아이보리 자신은 미국인이지만 영국의 소설들을 원작으로 해 호평을 받았다는 것도 특기할만하다.[18] 특히 문학의 기풍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우아하고 서정적인 스타일로 한 세대를 요약하는 형식미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초기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 연출은 사티야지트 레이장 르누아르의 스타일의 영향 아래 있다. 이후로는 영국 문학의 위대한 저작들에 바치는 영화를 주로 찍었고, 이때 나온 작품들이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줬다. 또 그의 작품에는 영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배우들이 굉장히 많이 출연했다.

'하워즈 엔드', '전망좋은 방', '모리스' 등 E. M. 포스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 과거 영국 귀족사회의 모습을 담아내 대부분 이상주의와 강박관념, 그리고 계급적인 위치에 따른 위선을 단아한 형식으로 묘사했다. '남아있는 나날'에서는 시대의 모순과 개인의 갈등이라는 고전적인 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비통한 슬픔을 전해준다. 아이보리의 후기작들은 주로 영국 귀족계급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왔으며 서정적인 동시에 내면적이고 사실주의적 정확함을 지닌 고전적이고 단아한 영화 형식미의 정수를 보여줬다. 출처

에드워드 시대의 영국의 양식화된 이미지를 쉽게 떠올리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지만, 인도에 관한 그의 초기 영화에 내재된 다른 문화의 상호작용에 대한 통찰력 있는 조사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동진 평론가는 제임스 아이보리가 가장 잘 하는 것은 원작이 있는 작품을 명품스럽게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평가했다. 출처

4. 필모그래피

<rowcolor=#fff> 년도 제목 연출 각본 제작 비고
1963 가장
The Householder
장편 영화 데뷔작
1965 셰익스피어 왈라
Shakespeare Wallah
제1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1970 봄베이 토키
Bombay Talkie
1972 세이비지
Savages
1975 공주의 자서전
Autobiography of a Princess
와일드 파티
The Wild Party
1977 로즈랜드[19]
Roseland
1978 조지와 보니의 사진 위의 훌라벌루
Hullabaloo Over Georgie and Bonnie's Pictures
TV 영화
1979 유로피언
The Europeans
제32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다섯시 사십팔분
The Five Forty-Eight
TV 영화
1980 맨하탄의 제인 오스틴
Jane Austen in Manhattan
1981 4중주
Quartet
제34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1983 인도에서 생긴 일
Heat and Dust
제36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1984 보스톤 사람들
The Bostonians
1985 전망 좋은 방
A Room with a View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제43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영국 영화 협회 선정 20세기 최고의 영국 영화 73위[20]
1987 모리스
Maurice
제44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1989 장미빛 모자
Slaves of New York
1990 브리지 부부
Mr. and Mrs. Bridge
제4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1992 하워즈 엔드
Howards End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제45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1993 남아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영국 영화 협회 선정 20세기 최고의 영국 영화 64위
1995 대통령의 연인들
Jefferson in Paris
제48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1996 피카소
Surviving Picasso
1998 군인의 딸은 울지 않는다
A Soldier's Daughter Never Cries
2000 러브 템테이션
The Golden Bowl
제53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2003 프렌치 아메리칸
Le Divorce
제6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비경쟁 부문 초청작
2005 화이트 카운티스[21]
The White Countess
2009 시티 오브 유어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The City of Your Final Destination
2017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아카데미 각색상 수상

5. 여담

  • 커밍 아웃한 게이이며, 영화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와 연인 관계였다. 머천트가 2005년 사망 할 때까지 평생을 함께한 동반자이기도 했다. 아이보리는 가디언 인터뷰에서 머천트의 보수적인 배경(인도 무슬림) 때문에 연인 관계를 비밀로 유지해야 했다고 말했다. 또 아이보리는 머천트의 죽음을 자신에게 일어난 최악의 사건이라고 설명했고, "그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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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아이보리 (왼쪽) & 이스마일 머천트
  • 1965년부터 2005년까지 아이보리와 그의 연인인 영화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는 꾸준히 다양한 영화를 제작하거나 연출했다. 1987년, 이 두 사람의 업적은 크리스토퍼 리브, 샘 워터스톤, 그레타 스카치, 상원의원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을 포함한 수십 명의 지지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워싱턴 D.C.의 케네디 센터에서 열린 모리스 시사회에서 영예를 안았다.
  • 대기만성형 영화 감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제임스 아이보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된 영화 '전망 좋은 방'은 그가 50대 후반에 연출한 영화다.
  • 1951년 오리건 대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했고, 2003년에 그의 개인 논문을 대학에 기부했다.
  • 배우 새뮤얼 웨스트는 인터뷰에서 "제임스는 오늘날 과소평가되는 아름다움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착해서 그와 함께 일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와 계속 일하고 싶어합니다. 내 직업 생활에서 가장 행복한 경험 중 하나입니다."라고 말했다. #
  • 헬레나 본햄 카터는 제임스 아이보리가 진화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
  • 아이보리의 영화 판권 대다수는 코헨 미디어 그룹이 소유하고 있다. 복원판 재개봉 및 블루레이도 코헨 미디어 그룹 쪽에서 담당한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하워즈 엔드는 옛 판권사였던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블루레이 출시했다가 절판되었다. 전망 좋은 방만 크라이테리온에서 출시한 상태.
  • 2020년 CGV에서 ‘제임스 아이보리 특별전’이 6월 25일부터 7월 1일까지 열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전망 좋은 방’, ‘모리스’ ‘하워즈 엔드’까지 4편이 상영됐다. #
  • 2021년 회고록을 집필해 출판했다. 제목은 "Solid Ivory." #
  • 가즈오 이시구로와 절친한 사이이다. 이시구로는 2023년 인터뷰에서 "90년대 당시 아내와 저는 한 살 미만의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 외출을 많이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마일 머천트와 제임스 아이보리와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사실 지난달에 뉴욕에 갔을 때 제임스를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현재 94세이며 여전히 건재합니다."라고 말했다.

6. 외부 링크



[1] 인도인 영화 제작자로, 아이보리 감독과 함께 머천트-아이보리 프로덕션스를 설립해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다.[2] 출생 당시 이름은 리차드 제롬 헤이젠(Richard Jerome Hazen)이었고, 양부모가 제임스 프랜시스 아이보리라고 개명했다.[3] 독일 쾰른에서 태어나 나치를 피해 도망쳐 영국으로 이주했다. 부커상과 오스카상을 모두 수상한 유일한 작가다.[4] 아이보리 "저는 사티야지트 레이에게 〈가장〉의 원본 버전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와 친해졌고, 그것이 큰 형태 없는 난장판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너무 길고, 너무 많은 부분이 있었죠. 저는 그가 아마도 우리에게 그것을 어떻게 재구성할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보고 한 가지 조건 하에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냥 하도록 허락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말입니다. 그는 그것을 다시 편집하는 데 4~5일이 걸렸고, 그는 영화 전체를 플래시백으로 바꾸었는데, 원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다시 편집했고 그것은 훌륭했고, 그런 다음 그는 그것에 대한 음악을 감독했습니다" #[5] 요리책을 출판해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6] '유럽인들' 촬영 당시 찍은 사진이다.[7] 인도 감독 사트야지트 레이와 절친한 사이였다. 루스 프라워 합발라랑 레이랑 어느 정도 인연이 있었던 편이라 생겼다고. 레이의 몇몇 영화는 아이보리 프로덕션에서 판권을 소유하고 있다.[8] 대표작으로 기나긴 여행(1907), 전망 좋은 방(1909), 하워즈 엔드(1910) 등이 있다.[9] 이후 아이보리는 1979년 '유럽인들' 이후 2000년 '러브 템테이션'까지 칸 영화제에 자주 초대받는 칸 패밀리가 된다.[10] 이 소설은 포스터 사후에 출판되었다. 포스터는 생전에 출판을 시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반응과 법적 태도 때문에 그 당시에는 출판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1] 미국의 여성 소설가이며, '장미빛 모자'의 각본가로 참여했다.[12] 제임스 아이보리의 2005년 영화 '화이트 카운티스'의 각본가로 참여하기도 했다.[13] 쉰들러 리스트, 피아노(칸 황금종려상), 아버지의 이름으로(베를린 황금곰상)[14] 당시, 쉰들러 리스트피아노가 대부분의 상을 가져갔다.[15] 당시 머천트-아이보리 영화가 너무 많이 나와서 대중들이 물렸던 것도 큰 원인으로 있었다.[16] 원작 소설을 뛰어넘은 각색이라는 평도 받았는데, 실제로 원작자도 자기 책보다 낫다고 말했다. 이동진 평론가는 "각색을 보며 여러 가지면에서 놀랐는데 우선 제임스 아이보리가 88세임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의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감각적인 방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90세를 앞둔 노인이 ‘이 정도의 지적인 생산물을 내놓을 수 있구나’라는 사실이 놀라웠다”라고 평했다. 또한 소설과 다른 영화의 엔딩 부분도 언급하며 “각색이 정말 기가 막히다”라고 덧붙였다. #[17] 정확히는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스 명의로 수상했다. 참고로 BAFTA 평생 공로상을 수상한 첫 번째 단체다.[18]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국인으로 오해받았다고 한다. #[19]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들과 젊은 크리스토퍼 워컨이 출연한다.[20] 1999년 조사[21] 가즈오 이시구로가 각본가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