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20:09:52

지바 도시치

1. 개요2. 안중근 의사와 맺은 인연3. 다이린지(大林寺)4. 지바의 유족들5. 기타

1. 개요

[ruby(千葉十七, ruby=ちば とおしち)]

일본 제국군인, 교도관이자 철도원. 1885년에 태어났으며 1934년에 사망했다.

다름아닌 안중근 의사의 전담 교도관으로, 수감된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평생 동안 안 의사를 기렸으며 이로 인해 대한민국에서도 유명하다.

2. 안중근 의사와 맺은 인연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사죄드리고 싶은 심정이오
뤼순 감옥에 수감 된 안중근에게
안중근 문서의 일본의 시각 문단에도 서술되어 있듯 당시 옥중에서 안중근의 고귀했던 성품, 대의 명분, 그리고 인성을 가까이에서 본 일본인들은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의 재판에 관련된 검사, 변호사, 그리고 뤼순 감옥의 간수들도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1]

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는데, 안중근의 사형 집행일에 몹시 슬퍼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 의사 같은 사람을 중죄인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몹시 괴로워했고, 이에 안중근은 그를 위로하며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또한 본분이니 자기의 임무에 최후까지 충실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위로하면서[2] 그와 나눈 인연을 나름대로 소중히 여겼는지 작별 선물로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 -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내용의 유묵(, 생전에 남긴 글씨 또는 그림)을 써 주었다.[3] 그는 이를 평생 소중히 간직했으며 훗날 이 유묵은 총 26점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반환되어 안중근 의사 유묵으로 지정되었다.

한 마디로 안중근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알려주는 이라고 할 수 있다.

3. 다이린지(大林寺)

안중근 의사의 유묵비 「爲國獻身軍人本分」와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찰이다.

안중근 의사와 그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1981년 사찰 경내에 현창비(顯彰碑)를 건립했다. 당시 미야기현 지사였던 야마모토 소이치로는 "안중근 의사의 기일(忌日)을 맞아 한일양국의 영원한 우호를 기념하며"라는 글을 비석 배면(背面)에 새겨 한일우호를 강조하였다.

해당 사찰의 사이토 타이켄(齊藤泰彦) 주지는 30년 이상 매일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공양을 드리고 있으며 매년 9월 첫 일요일에 한국의 안중근의사숭모회와 함께 위령법요식 및 친선교류회를 개최하고 있다.#

안중근이 순국한 후 그는 간수 일을 그만두고 철도원으로 일하며 살았는데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 대림사를 세워 안중근 의사를 기렸으며 1934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자손과 후손들이 지금까지 절을 관리하며 기리고 있다. 매년 안중근 의사 탄신일(9월 2일) 즈음 주말에 다이린지에서 추모법요(法要)가 거행되는데 초반에는 일본인들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직접 찾아가고 싶다면 도쿄에서 도호쿠 신칸센을 타고 쿠리코마코겐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가면 되는데, 내려서 30분 정도 걸어야 한다. 많이 걷지 않으려면 다음 역인 이치노세키역에서 도호쿠 본선으로 갈아타서 이시코시역으로 온 뒤 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아타고 신사 앞에서 내리면 된다. 아타고 신사 바로 옆이 다이린지라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직접 가고 싶은 사람이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 찾아가보자.[주소][5]

4. 지바의 유족들

그의 유족들도 그의 증언과 안중근의 유품을 통해서 안중근을 존경한 것으로 보인다.[6] 물론 이들도 극우 성향 일본인들로 인해 고생이 많은 듯하다.#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그의 안중근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사실 일본인으로서 안중근을 모시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7]

5. 기타

  • 사실 안중근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위의 일화를 알았을 때 신기해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사실 상기했듯이 스스로 큰 대의를 품고 활동하는 이들을 지사(志士)라고 부르며 어느 정도 존중해 주는 당대 일본의 사회 분위기까지 알고 보면 그렇게 신기한 일도 아니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그의 이야기를 조금 각색해서 다루었다.
  • 그가 안중근에게서 유묵을 받은 과정에 얽힌 일화를 보면 그는 안중근의 간수를 맡는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군인으로서의 의무 사이에서 많이 괴로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안중근의 조언이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라며 격려이자 이해한다는 말을 해 주었으니 그의 업적이 상기했던 바와 같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안중근의 사형 집행도 슬퍼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말 다했다.
  • 영화 영웅에서 그의 행적을 다루었는데 노지마 나오토가 연기했다.

[1] 사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천황을 적대시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이 절대 아니었고 넓게 잡으면 에도 막부 후기부터 스스로 큰 대의를 품고 활동하는 이들을 지사(志士)라 부르며 어느 정도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보니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에 맞서 투쟁한 안중근을 좋게 보는 견해도 나올 수 있었다. 또한 치바는 보신 전쟁 당시 에도 막부편에서 싸웠다가 패해 쑥대밭이 된 센다이번(미야기현) 출신이라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제국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2] 정말 군인다운 군인을 눈앞에서 죄인으로 마주하고 있고 거기에 사형집행인이 사형수에게 위로를 받은 상황까지 와버렸으니 지바 입장에서보면 안중근을 쉽게 보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3] 이것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니 내게 너무 미안해 하지 마라 라는 위로라고 볼 수 있다. 즉, 사형수가 되려 사형집행인을 위로한 것. 안중근 입장에서도 자신을 보고 흔들리는 지바의 모습이 안타까웠을 수도 있다.[주소] 宮城県栗原市若柳大林町裏219[5] 예전에는 쿠리하라 전원철도선을 타고 오카역에서 내리면 됐지만 2007년에 폐선되었다.[6] 안중근 의사 유묵을 반환할 때 유가족들이 낙담하자 지바 가문과 아사히신문의 관계자 전원이 이야기를 나눠 반환 배경 일화를 기념으로 남기기로 했다고 한다.[7] 도시치 본인도 처음부터 안 의사를 존경한 것은 아니며 그의 성품과 인품을 직접 본 후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의 가족들도 결코 쉽지 않았을 일이라는 건 당연했을 것이며 자손들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히 일본 전역에 우경화가 만연한 21세기에도 극우 성향의 일본인들의 망언들과 각종 증오 범죄 등의 행동을 보면 중국인, 한국인 등 식민지인을 잘해야 이등신민, 못하면 사람 미만으로 보던 군국주의천황제 파시즘에 광신으로 찌든 일본 제국 시절의 도시치 본인과 가족, 그리고 유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답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