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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레아 필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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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성스럽다고 여겨진 아인 바니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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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키드르 성지와 옛 신전 유적

1. 개요2. 역사
2.1. 중세
2.1.1. 십자군 전쟁기
2.2. 근현대

1. 개요

아랍어 بانياس
히브리어 בניאס
그리스어 Πανεάς
영어 Banias

골란 고원 서부, 헤르몬 산 인근의 도시 유적. 기원전 4세기 경에 그리스 야생의 신 판을 모시는 신전 도시로 세워져 판니온으로 불렸다. 로마 제국기 카이사레아 필리피라 불렸고, 베드로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는 등 기독교 성지가 되었다. 중세 십자군 전쟁기에는 다마스쿠스의 남쪽 요충지로써 자주 전장이 되었다. 2천년간 이어지던 도시는 1967년 3차 중동전쟁 당시 파괴되어 무주지가 되었고, 현재 이스라엘 관리 하에 있다. 동북쪽에 수베이바 (님로드) 성채가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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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카이사레아 필리피 전경. 좌측에서부터 아우구스투스 신전, 판의 동굴, 제우스 신전, 판 신전 및 춤추는 염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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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 왕국 시절의 궁전 유적

기원전 200년 판니온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군을 격파하고 팔레스타인페니키아 지역을 셀레우코스 왕조령으로 석권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염소 다리를 가진 판 신전이 세워졌다. 셀레우코스 조의 쇠퇴기 무렵인 기원전 50년경, 판니온은 골란-하우란 일대를 통치한 현지 군벌 리사니아스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23년 리사니아스가 사망하고, 3년 후 후계자인 아들 제노도로스도 요절하자 일대는 로마 제국의 속국인 헤로데 왕국령이 되었다. 헤로데 대왕아우구스투스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며 남서쪽 3km 지점의 오므리트에 신전을 세웠다.[1] 그리고 기원전 3년, 헤로데의 아들 필립보 2세가 판니온에 자신과 카이사르의 이름을 붙인 신도시 카이사레아 필리피를 세웠다.

이 무렵 카이사레아 필리피는 신약의 복음서에서 베드로예수가 메시아임을 인정하는 장소로도 등장하는데, 한국 개신교가 사용하는 성경에는 '가이사랴 빌립보', 한국 천주교 성경에는 '카이사리아 필리피'로 음역하였다.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에 이 장소는 훗날 그리스도교도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서기 34년 필립보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왕국은 로마령 시리아 속주에 편입되었고, 카이사레아 필리비는 자치도시가 되었다. 다만 3년 후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가 일대의 왕이 되었고, 그는 점차 옛 헤로데 왕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는 카이사레아 필리피에 궁전을 세워 자주 거주하였고, 61년에는 네로 황제를 기리며 지명을 '네로니아스'로 개칭했다가 68년 네로의 암살 후 원복하였다. 67년 개전한 유대 전쟁 당시 베스파시아누스는 카이사레아 필리피를 거쳐 티베리아스로 남하하였고, 73년에 일대는 다시 로마령 시리아 속주에 편성되었다.

3세기가량 카이사레아 필리피로 이어지던 지명은 로마 제국 후기 들어 판니온에서 유래한 (카이사레아) 파니아스로 바뀌었다. 이는 360년대 율리아누스 황제가 다신교 부활에 나서며 이곳을 포함한 여러 도시들에서 그리스도교 성당들을 신전으로 환원시키려 시도의 일환이라고도 여겨진다. 비록 지명은 바뀌었지만 옛 시절의 종교로 돌아가려는 작업은 실패하였고, 동로마 제국 시기에 파니아스는 시리아 남부 그리스도교의 거점 중 하나였다.

2.1. 중세

635년 아인나딘 전투와 티베리아스 함락 후 파니아스는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이슬람 제국군에 관대한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다만 636년 반격에 나선 헤라클리우스는 팔레스타인 방면으로 남하하며 파니아스를 보급 거점으로 삼았다. 다만 이어진 야르무크 전투로 동로마 제국은 시리아를 완전히 상실했고, 파니아스는 기존 시가지의 대부분이 버려지는 등 쇠퇴하였다. 다만 아랍 발음인 바니아스로 불리게 된 도시는 우마이야 왕조 하에 안정을 회복하여 디마슈크 주에 속한 자울란 (골란) 군의 치소이자 군사 거점이 되었다. 8세기 초엽 성지 순례를 다녀온 앵글로색슨 수녀 휘게부르크는 많은 기독교도가 살고 교회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9세기의 지리가 알 야쿠비에 의하면 바니아스 지명은 ‘마디나툴 아스카트’ (부족들의 도시)로 바뀌었고 주민들은 대부분 카이스-가파탄 계열의 부족에 속했다 한다. 10세기 일대에는 동로마 제국의 시리아 침공을 피해 모여든 난민들이 유입되었고, 주민들은 대부분 순니-수피 무슬림이 되었다. 968년에는 이스마일파 극단 조직인 카르마트가 점령하였고, 970년 파티마 왕조가 수복했으나 재차 카르마트가 점령하여 암흑기를 보내다가 975년 다시 파티마 령이 되었다. 다만 현지 주민들은 무함마드 빈 아흐마드 앗 나블루시의 영향력 하에 파티마 왕조에 반감을 지녔고, 바니아스에는 그의 하디스 학교가 세워져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 빈 하팀과 알 발루티와 같은 아랍 학자들이 활약하였다. 11세기 후반 바니아스는 셀주크 제국과 그 속국인 부리 왕조에 속하였고, 십자군 전쟁의 전면에 나섰다.

십자군 치하에서 바니아스가 와전된 벨리나스 (Belinas) 혹은 카이사레아 필리피로 불렸다. 바니아스 영주는 예루살렘 왕국 산하 베이루트 영주령에 속하였다. 1132년 12월 샴스 알 물크 이스마일이 수복했고, 1137년 장기 왕조령이 되었다가 1140년 무인 앗 딘 우누르가 십자군에 넘겼다. 12세기 중반 토론 영주 옹프루아 2세의 주요 거점이 되었고, 구호기사단이 주둔했다. 1157년 5월 누르 앗 딘이 투석기와 함께 포위하자, 보두앵 3세가 포위망을 뚫고 구원에 나섰으나 이듬달 야곱의 여울에서 패배하였다. 다만 안티오크와 트리폴리 측의 원군에 바니아스는 십자군 령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1164년 11월, 누르 앗 딘은 기어코 바니아스를 점령했다.

이후 십자군은 갈릴리 최북단인 후닌 (샤토 누프)을 최전방으로 삼아 바니아스의 장기-아이유브 수비대와 대치하였다. 당시 도시를 방문한 이븐 주바이르는 무슬림의 최선선이며 성문 아래에 흐르는 강 줄기에 물레방아가 있고 서쪽의 평원은 십자군과 무슬림이 반씩 소유한다고 기록하였다.[2] 1177년 보두앵 4세가 재차 바니아스를 포위하였고, 성주 삼산 앗 딘 아주크가 공물을 바친 후에야 철수했다. 1179년 살라흐 앗 딘이 집권한 후 후닌 방면의 텔엘카디 (텔단)를 요새화하여 바니아스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1187년 알 아프달이 7천 기병과 바니아스에 주둔, 크레송 전투와 하틴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후 바니아스는 다마스쿠스의 에미르 알 아프달의 영토가 되었고, 후삼 앗 딘 비샤라의 이크타 (영지)였다.
1200년 알 아딜은 파크르 앗 딘 자하르카스를 보내어 수베이바 (님로드) 성채를 점령하였고, 1202년 보내어 후삼 앗 딘을 축출하며 바니아스-후닌-토론(티브닌)-보포르 일대를 이크타로 주었다. 같은해 지진으로 바니아스는 일부 파괴되었고, 파크르 앗 딘은 성탑을 세웠다. 그의 사후 영지는 사림 앗 딘 쿠틀루바에 넘어갔고, 5차 십자군 시에 3일간 포위되었다. 알 무아잠 이사가 상실 시에 군사적 가치를 없애기 위해 성벽을 허물도록 하여 쿠틀루바는 그에 응하고 영지를 반납하였다. (1219년 3월) 그후 알 무아담의 동생 알 아지즈 우스만이 바니아스 영지를 얻었고, 그의 자손들이 세습하였다. 1253년 7차 십자군이 일시 점령했으나 수베이바 수비대에 축출되었다.

2.1.1. 십자군 전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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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수베이바 성채

1124년 6월 다마스쿠스의 에미르 툭테긴이 이곳까지 남하하여 티레 공방전 상황을 주시하다가 결국 항복 협상에 나섰다. 1126년 11월 툭테긴의 와지르 알 마즈다가니가 아스트라바드 출신 바흐람 앗 다이의 아사신에게 바니야스를 내어주었다. 그는 일대를 장악하여 이븐 알 칼라니시에 의하면 '아무도 대놓고 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다고 한다. 다만 바흐람은 1128년 헤르몬 산 서쪽의 와디 앗-타임에서 현지 부족들과 싸우다 사망하였다.

1129년 9월, 아사신이 바니야스를 십자군에 할양한다는 음모가 발각되자 다마스쿠스의 에미르 부리는 친아사신 와지르인 아불 알리 타히르 빈 사이드 알 마즈다가니를 살해하고 시내의 아사신들을 학살하였다. 그러자 바니아스의 아사신 공동체는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에 보호를 요청했고, 이에 11월 십자군이 도시를 접수하였다. 기세를 이어 십자군은 다마스쿠스로 진격했으나, 마르즈 앗 사파르 전투에서 패배한 후 폭풍까지 몰아치자 바니야스로 철수하였다. 다만 십자군의 지배는 오래사지 못하여 1132년 12월, 다마스쿠스의 에미르 이스마일이 십자군 내전[3]을 틈타 바니아스를 점령하였다.

이마드 앗 딘 장기가 본격적으로 시리아 통일 전쟁에 나서던 1137년 11월, 바니야스 태수 이븐 투르굿이 항복하였다. 1140년 다마스쿠스 섭정 우누르는 매년 연공을 바치고 바니야스를 넘기겠다는 조건 하에 예루살렘 왕국의 풀크와 동맹하였다. 마침 그해 6월, 바니야스 태수 이브라힘 투르굿이 티레 약탈 도중 전사하자 우누르와 풀크가 도시를 공격하였다. 수비대는 우누르에 항복하였고, 풀크는 레이니어 드 부스를 영주로 봉하고 회군하였다.

1148년 7월, 2차 십자군은 바니야스를 지나 다마스쿠스를 포위했으나 실패하였다. 1151년 12월 튀르크 부족들이 바알벡에서 남하해 바니야스를 약탈했고, 이에 바니야스 수비대가 바알벡을 습격했으나 아이유브가 격퇴하였다. 다마스쿠스 공략을 시도하던 누르 앗 딘은 다마스쿠스의 에미르 아바크에게 바니야스 협공을 제안했으나, 후자가 대신 십자군 측에 조공하자 여론이 들끓었다.

1157년 2월, 보두앵 3세가 바니야스 부근 국경을 넘은 무슬림 양치기들을 공격해 가축을 빼앗았다. 그해 5월 누르 앗 딘은 바알벡의 반란을 진압하고 바니야스를 점령했다. 다만 토론 영주 음프헤 2세가 보두앵 3세에 구원을 요청하며 버텼고, 이에 후자가 진군해오자 누르 앗 딘은 도시에 방화하고 철수하였다. 그러자 보두앵 3세는 추격에 나섰으나, 훌레 호수에서 누르 앗 딘의 기습을 받아 패배하였다. 1164년 8월,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 전선에 묶여있는 틈에 누르 앗 딘은 하림 전투에서 안티오크-트리폴리 연합군을 격파한 후 10월에 바니야스를 점령하였다. 1169년 티레 대주교 프리드리히는 바니아스 주교 장과 함께 새로운 십자군을 요청하러 서유럽으로 향했으나 호응은 저조하였다.

1174년, 누르 앗 딘이 이집트의 살라흐 앗 딘을 토벌하려던 중에 사망하자 레반트의 정세는 요동쳤다. 그해 6월,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는 어린 술탄 앗 살리흐 이스마일의 다마스쿠스를 취하기 위해 바니야스로 진격했으나 이질에 걸렸다. 사경을 헤매던 아모리는 다마스쿠스 섭정 이븐 알 무카담의 십자군 포로 전원 석방 및 살라흐 앗 딘에 대한 동맹 제안을 수용하고 퇴각한 후 급사하였다. 1179년 봄,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4세는 헤르몬 산의 무슬림 가축들을 약탈하다가 살라흐 앗 딘의 부관 파루크샤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였다. 이때 왕국의 대원수 음프헤 2세가 전사하였고, 살라흐 앗 딘은 야곱의 여울 성채 공격이 실패하자 바니야스에 주둔하였다. 이어진 마르즈 아이윤 전투 역시 살라흐 앗 딘의 승리였고, 야곱의 여울 성채도 결국 함락되며 골란 고원 일대는 반세기 만에 완전히 무슬림 수중으로 회복되었다. 1187년 4월, 대망의 하틴 전투 직전에 살라흐 앗 딘은 장남 알 아프달에게 선발대를 주어 전장으로 정한 티베리아스와 다마스쿠스 사이의 바니야스에 주둔시켰다.
아이유브 왕조 내전이 발발하던 1201년 6월, 앗 자히르와 알 아프달의 연합군이 남하하자 바니야스 태수 후삼 앗 딘 비샤라는 다른 인근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그에 복속하였다. 다만 이어진 다마스쿠스 공방전은 이집트 술탄 알 아딜의 승리였고, 바니야스 역시 술탄의 휘하에 남았다. 1202년 바니야스 태수는 파크르 앗 딘 자라카스로 교체되었다. 1217년 5차 십자군이 요단강을 건너 바니아스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1219년 3월, 바니아스 태수 쿠틀루바가 성벽을 허물고 시리아 부왕 알 무아잠에게 도시를 넘겼다. 이후 5차 십자군의 본대가 다가오자 술탄 알 카밀은 예루살렘, 사페드, 토론과 함께 바니야스의 성벽을 허물어 대비하였다. 6차 십자군 전야이던 1228년 2월, 바니야스 태수 알 아지즈 우스만은 티레 인근에서 십자군을 기습해 70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다.

1247년 4월, 중앙집권화에 나선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시리아로 북상하자 알 아지즈 우스만의 아들인 바니야스 태수 앗 사이드 하산이 항복하였다. 앗 살리흐와 투란샤의 사후 바니야스로 돌아와 부친의 맘루크들을 설득해 재집권한 앗 사이드 하산은, 1250년 9월 알레포의 앗 나시르 유수프가 이집트의 맘루크 정권 토벌을 위해 남하하자 이집트로 도주하였다. 이로써 바니야스는 마지막 아이유브 술탄 앗 나시르 유수프의 영토가 되었다. 1251년 앗 나시르 유수프가 이집트 원정에 실패하자, 그해 말엽 앗 사이드 하산이 바니야스 수복을 시도했으나 도시에 이르기도 전에 사로잡혀 유프라테스 강변의 알 비라로 유배되었다.

1259년 말엽, 시리아 정복에 나선 몽골 제국의 훌라구 칸은 알 비라를 함락하고 앗 사이드 하산을 석방하였다. 후자는 기존 영지를 회복시켜 줄 것이라는 칸의 약속에 향도가 되어 몽골군을 안내하였다. 1260년 2월, 키토부카의 몽골군이 다마스쿠스에 입성할 때에도 동참한 앗 사이드 하산은 4-5월 키토부카와 함께 남하하여 수바이바와 바니아스를 항복시키고 그 태수로 복귀하였다. 다만 그의 영화는 길지 않아 같은해 9월에 벌어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역시 몽골군 측에 참전했던 앗 사이드 하산은 패배 후 포로로 잡혔고, 본래 그를 용서하려 했던 맘루크 술탄 쿠투즈는 그가 몽골 측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을 접하자 처형하였다.

아이유브-맘루크 측의 교란에 실패하자 루이 9세는 1253년 루이는 티레에 머물며 나블루스 습격을 계횟하나 현실성을 고려하여 바니야스로 목표를 바꿨다. 루이가 시돈을 재건하는 동안 프랑스-십자군 연합군은 바니야스를 포위했다. 현지 제후들이 좌측, 구호기사단이 우측, 템플기사단과 프랑스군이 정면을 맡아 공격하여 별 저항 없이 도시를 점령했다.[4] 다만 외곽의 알 수바이바 성채 및 성채와 도시 사이의 언덕을 시리아 군이 장악하여 불안정하였다. 십자군은 수바이바 성채 주변 접근하나 위로부터의 돌 세례를 받은 후 적의 추격으로부터의 엄호 격으로 관목지에 불지르고 후퇴하였다. 루이는 이듬해 앗 나시르 유수프의 휴전 체결한 후 귀국하였다.

1266년 7월, 바이바르스는 티레 측의 비밀 동맹 연장 제안에 티레가 십자군의 바니야스 습격을 도왔다며 거절하였다. 그 직후 바이바르스는 바니야스를 위협할 수 있는 마지막 십자군측 내륙 거점인 사페드를 함락하였다. 이로써 바니야스는 외세의 위협에서 벗어나 기나긴 안정기를 누릴 수 있었다.

2.2. 근현대

오스만 제국기 바니아스는 메타왈리 쉬아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인구 5백의 작은 마을이었다. 다만 풍부한 수자원과 마을을 두른 과수원 덕에 풍요로운 편이었고, 수로를 통해 집집마다 물이 공급되었다.

1918년 아랍 반란과 함께 영국군이 점령한 후 프랑스가 시리아 왕국을 진압하느라 국경 협상에 응하지 못한 틈에 영국령 팔레스타인은 사실상 골란 고원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다 1922년에야 바니아스와 골란 고원 일대는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 넘어갔다. 1941년 연합군의 시리아 전역에 있어 호주군이 일대를 장악하였고, 뒤이어 시리아로 진격하였다. 1946년 시리아의 독립과 1948년 1차 중동전쟁 후 바니아스 및 골란 고원은 시리아 령으로 남았다. 1953년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의 국경 조정 협상이 있었으나 결렬되었고, 1960년대 들어서는 바니아스 지류 문제를 두고 양국 간의 분쟁이 일었다. 1964년 시리아는 바니아스 지류를 73km 길이의 수로를 통해 골란 고원 남동쪽의 야르무크 강으로 돌리려 하였고, 이는 1967년 욤 키푸르 전쟁 시에 이스라엘 군이 총력을 기울여 골란 고원을 장악하는 계기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이때 바니아스 주민들은 헤르몬 산 남쪽 기슭의 마즈달 샴스로 피신하였고, 이스라엘 군은 모스크나 교회 등의 종교 시설을 제외한 시가지를 불도저로 밀어버려 2천년 역사의 도시는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1] 흰 대리석 기둥이 일부 남아있다[2] 핫드 알 무카시마. 곡물은 양분하고, 가축은 자유로이 왕래함[3] 알릭스, 퐁스 vs 풀크, 레몽[4] 첫번째 공격은 격퇴되었는데 인근 언덕의 요새를 공격하러 가던 후발대가 당도하여 도시 장악하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