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니 로프턴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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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 1995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 ||||||||||||||||||||||||||||||||||||||||||||||||||||||||||||||||||||||||||||||||||||||
데본 화이트 (토론토 블루제이스) 커비 퍼켓 (미네소타 트윈스)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 → | 데본 화이트 (토론토 블루제이스) 케니 로프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 → | 케니 로프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제이 뷰너 (시애틀 매리너스) | |||||||||||||||||||||||||||||||||||||||||||||||||||||||||||||||||||||||||||||||||||
1996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 |||||||||||||||||||||||||||||||||||||||||||||||||||||||||||||||||||||||||||||||||||||||
데본 화이트 (토론토 블루제이스) 케니 로프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 → | 케니 로프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제이 뷰너 (시애틀 매리너스) | → | 짐 에드몬즈 (애너하임 에인절스) 버니 윌리엄스 (뉴욕 양키스)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번호 28번 | ||||
칼 니콜스 (1989~1991) | → | 케니 로프턴 (1991) | → | 피트 잉카빌리야 (1992)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번호 7번 | ||||
크리스 제임스 (1991) | → | 케니 로프턴 (1992~1996) | → | 제프 저덴 (1997) |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번호 7번 | ||||
드와이트 스미스 (1995~1996) | → | 케니 로프턴 (1997) | → | 마크 데로사 (1998)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번호 7번 | ||||
제프 저덴 (1997) | → | 케니 로프턴 (1998~2001) | → | 브랜든 필립스 (2003~2005) |
시카고 화이트삭스 등번호 1번 | ||||
랜스 존슨 (1988~1995) | → | 케니 로프턴 (2002) | → | 윌리 해리스 (2004~2005)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등번호 1번 | ||||
코디 랜섬 (2001) | → | 케니 로프턴 (2002) | → | 네이피 페레즈 (2003) |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번호 7번 | ||||
아만도 리오스 (2002) | → | 케니 로프턴 (2003) | → | 아브라함 누네즈 (2004) |
시카고 컵스 등번호 1번 | ||||
오기 오헤다 (2001~2003) | → | 케니 로프턴 (2003) | → | 호세 마시아스 (2004~2005) |
시카고 컵스 등번호 7번 | ||||
라몬 마르티네즈 (2003) | → | 케니 로프턴 (2003) | → | 토드 워커 (2004~2006) |
뉴욕 양키스 등번호 12번 | ||||
알폰소 소리아노 (2002~2003) | → | 케니 로프턴 (2004) | → | 토니 워맥 (2005) |
필라델피아 필리스 등번호 7번 | ||||
제레미 지암비 (2002) | → | 케니 로프턴 (2005) | → | 페드로 펠리즈 (2008~2009)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6번 | ||||
제이슨 그라보스키 (2005) | → | 케니 로프턴 (2006) | → | 토니 아브레우 (2007) |
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7번 | ||||
마크 데로사 (2005~2006) | → | 케니 로프턴 (2007) | → | 데이비드 머피 (2008~2013)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번호 7번 | ||||
조 잉글렛 (2006) | → | 케니 로프턴 (2007) | → | 제이미 캐롤 (2008) |
케네스 "케니" 로프턴 Kenneth "Kenny" Lofton | |
생년월일 | 1967년 5월 31일 ([age(1967-05-31)]세)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인디애나 주 이스트 시카고[1] |
포지션 | 중견수 |
투타 | 좌투좌타 |
신체 | 183cm, 81kg |
프로입단 | 1988년 드래프트 17라운드 휴스턴 애스트로스 입단 |
소속팀 | 휴스턴 애스트로스 (199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92~1996)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1997)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98~2001) 시카고 화이트삭스 (2002)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2002) 피츠버그 파이러츠 (2003) 시카고 컵스 (2003) 뉴욕 양키스 (2004)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5)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6) 텍사스 레인저스 (2007)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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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키 핸더슨의 뒤를 이어 90년대 메이저리그를 풍미한 대도. 통산 도루 622개로 메이저리그 역대 도루 최다 15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올스타에도 6회, 골드글러브 수상자로 4회 선정될 만큼의 스타였다. 다만 한 가지 아쉽다면 상단의 긴 선수 경력 항목에서도 보이듯이 엄청난 저니맨이었다는 것. 그래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가장 오래 뛰었고, 은퇴 이후인 2010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만큼 대다수 야구팬들은 인디언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받아 들인다. 애초에 인디언스 커리어를 빼면 다른 팀에서는 1년 이상을 뛴 적도 없을 뿐더러, 이적 이후 다시 돌아온 적도 없다. 저니맨도 보통 철두철미한 저니맨이 아니다.2. 커리어
2.1. 아마추어 시절
케니 로프턴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다. 고등학생 미혼모의 아들로 슬럼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났을 때의 몸무게가 1.3kg에 불과한 미숙아였다.어머니조차도 로프턴을 나몰라라 해서 미망인이었던 할머니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내야만 했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기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가족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는 인터뷰를 남긴적도 있다.[2] 고등학교 시절에는 야구와 농구를 병행하였는데, 대다수 흑인들처럼 로프턴 역시 농구에 더욱 열광하였고 실제로 애리조나 대학교에도 농구 장학금을 받고 진학한다. 대학교에 진학해서도 야구보다는 농구에 더 관심을 기울였고, 심지어 1988년 NCAA에서는 팀을 전국 4강으로 이끄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2.2. 프로 시절
그렇지만 대학교 시절 보여준 퍼포먼스와는 별개로 로프턴은 NBA 스카우터들에게 별로 선호받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180에 불과한 작은 키가 결정적이지 않았을까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포인트 가드로서 로프턴이 보여준 순발력과 스피드에 주목한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그를 드래프트에서 지명하면서 로프턴의 야구 경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대학교 내내 5타석에만 들어섰을 만큼 야구에는 손을 놓고 농구만 했으니, 당연히 실력이 늘어났을 리가 없고 첫 마이너리그 시즌에 타율 .214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한다. 그래도 스피드는 어디 안가서 꼴랑 48경기 뛰고 도루는 무려 26개를 기록했다. 이후 차차 야구에 적응해 나가면서 성적이 급등해나갔고, 마침내 1991년 9월 확장 로스터를 통하여 로프턴은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하지만 스티브 핀리와 크레이그 비지오라는 테이블 세터진을 보유한 애스트로스에게 로프턴은 말 그대로 잉여 자원일 뿐이었고 1991 시즌의 종료와 동시에 로프턴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 된다.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1992 시즌, 애스트로스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로프턴은 제대로 잠재력을 폭발시킨다. 타율 0.282에 5홈런 48타점 66도루를 기록했던 것. 로프턴의 타고난 주루 능력에 힘껏 고무된 클리블랜드 프런트는 1992 시즌 종료 후 4년간 총액 630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의 계약을 그에게 선사한다. 1993 시즌에도 타율 0.329, 70도루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능력이 플루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데 이어, 1994 시즌에는 0.349의 타율로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을 차지한다. 1995 시즌 역시 3할대의 타율과 54도루를 기록하면서 팀을 WS로 이끌지만 전성기의 그렉 매덕스와 톰 글래빈이 이끄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게 패하면서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케니 로프턴은 연평균 타율 .316, 8홈런, 52타점 65도루라는 스탯을 찍으면서 리그를 대표하는 테이블세터로 자리매김하였으며, 클리블랜드 팬들에게 로프턴은 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1994년 로프턴은 112경기 523타석/459타수 160안타 106득점 60도루 52BB/56K라는 성적에 .349/.412/.536 .948OPS라는 웬만한 슬러거들이나 찍는 비율 스탯을 기록하며 대활약했다. 하지만 1996 시즌 종료 후 클리블랜드는 마퀴스 그리솜과 데이비드 저스티스를 받는 조건으로 로프턴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 한다. '트레이드는 야구에서 늘 일어나는 것'이라며 애써 덤덤한 반응을 보였던 로프턴이었지만 나름 충격적인 트레이드였는지 1997 시즌에는 47번 도루 시도 가운데 27번만 성공하는, 평소 그답지 않은 주루 플레이를 선보인다. 다행히도 타격이나 수비 능력은 클리블랜드에서 보여준 그 모습 그대로였다.
1997 시즌 종료 이후 로프턴은 FA 자격을 획득한 로프턴은 무수한 팀들의 구애 가운데 사랑하는 친정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의 복귀를 선언한다. 3년간 총액 2400만불의 계약. 하지만 30줄에 접어든 로프턴의 성적은 해가 갈수록 하향세를 그렸고 2001시즌에는 타율 .261, 16도루를 기록하면서 메이저리그 풀타임 출전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2001 시즌 종료 후 클리블랜드를 떠나면서 로프턴의 본격적인 저니맨 행보가 시작된다. 2002 시즌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계약을 맺고 백업 외야수로 활동하던 중,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됐고 샌프와 함께 드디어 생애 첫 월드시리즈 반지를 차지해보나 했는데... 또 한번 콩라인에 그치고 만다. 시즌 종료후 피츠버그 파이러츠와 계약을 맺었지만 전년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빵감독의 구애로 다시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 그리고 이번에도 대역전극의 희생양이 된다. 2002년 월드 시리즈, 2003년 NLCS 대역전극의 제물이 됐던 것이 몹시도 억울했던 건지 2004년에는 악의 제국으로의 이적을 감행하는데... 마치 운명의 장난에라도 걸린 듯이 다시 한번 대역전극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만다.
2005년과 2006년에는 회춘해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각각 2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했지만, 이 때도 우승반지 획득에는 실패했다. 2005 필리스는 2게임 차이로 와일드카드 획득에 실패했으며 2006 다저스는 NLDS에서 메츠에게 3-0 떡실신을 당한다. 2007년에도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나이를 거꾸로 먹은 듯한 활약을 선보여주던 중, 친정팀 클리블랜드로 다시 한 번 트레이드 된다. 불혹에 이른 2007 시즌, 로프턴은 타율 0.296, 7홈런, 38타점, 23도루로 녹슬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시즌 종료 후 다시 FA가 된 그를 필요로 하는 메이저리그 구단은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로프턴은 이 해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커리어 통산 기록은 타-출-장 .299 - .372 - .423에 2428안타 130홈런 622도루, 781타점.
2.3. 은퇴 이후
최근에는 골프 삼매경에 빠진듯하며, 2010년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구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2011 시즌에는 인디언스의 주루 코치로 잠깐 활동하기도 했으며 잠깐잠깐(주로 플레이오프 기간에) FOX 사에서 해설을 맡기도 한다.2013년부터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는데, 커리어에서 임팩트있던 시즌도 90년대 중반 인디언스에서 보낸 5~6 시즌이 전부였던데다가, 저니맨이라는 이미지, 살짝살짝 모자란 누적 기록 때문에 '명전 입성은 힘들 것'이라는 예상을 누구나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몇 년 정도는 버틸 줄 알았는데 첫 해 딱 18표로 3.2%의 득표를 받고 그대로 신속하게 후보 자격을 상실했다. 그러나 로프턴이 첫 해 광탈한 것에 대해서는 현지에서도 꽤 논란이 되었다. 로프턴 본인도 ‘내가 왜 못 들어가나’라는 입장을 밝혔었고, 구글에 kenny lofton을 치면 바로 hall of fame이 뜰 정도. 세이버 스탯으로 봤을 때 로프턴은 상당히 저평가됐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가 광탈한 것을 본 세이버메트리션들은 상당히 아쉬워했다.
게다가 2010년대 후반 이후 명예의 전당 투표 추세가 바뀌며 누적이 부족하지만 war가 높은 에드가 마르티네즈, 스캇 롤렌, 앤드루 존스 등의 후보들이 재평가되며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추세를 고려하면 로프턴이 탈락만 안 하고 버텼으면 무조건 명예의 전당 입성이 가능했기에 더 아쉽게 느껴진다. 케니 로프턴(68.4 bwar)보다 낮은 bwar를 기록했음에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수는 수두룩하다. 물론 war가 전부는 아니지만. 이제 기회는 베테랑 위원회를 통한 입성밖에 없는데, 아직까지 로프턴과 비슷한 시대를 뛰던 선수들 중 베테랑 위원회로 구제된 경우는 프레드 맥그리프뿐이기에 설령 구제되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보인다.
3. 여담
- 13번 팀을 옮겼는데 그 중 11번의 경우 플레이오프를 경험한다. 심지어 경험하지 못한 2번도 시즌 중간에 트레이드되어서 경험하지 못한 것. 어찌보자면 진정한 의미의 가을야구 청부사.
- 세이버메트리션의 대부 빌 제임스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로 번트를 잘 대는 타자라고 한다.
- 상술한 저니맨 이미지 때문에 한 때는 택배회사 DHL의 광고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현역 시절 에드가 마르티네즈와 더불어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타자로 꼽은 적도 있다.
-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결벽증 환자라고 한다.
- 2016년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시구를 맡았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해 홈 어드벤티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 랜디 존슨문서에 존슨의 패스트볼에 놀라 나가떨어지는 굴욕동영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