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PC통신 서비스[1] | |||
하이텔 | 천리안 | 나우누리 | 유니텔 |
- [1] 2024년 10월 31일 천리안을 끝으로 모두 서비스 종료.
1. 개요
하이텔 접속 후 초기 화면. 당시 PC통신의 포털식 구성이 잘 드러난다. 상단부에 컬러 디자인이 ANSI 코드로 작성되어 있는 걸로 보아 최소한 2000년대 이후 화면이다. |
2. 케텔 시절
케텔 로그인 화면.
대한민국의 PC통신의 근원지다. 기존 전자게시판 기반의 서비스를 발전시켜 1986년에 시작된 케텔이 하이텔의 전신이었기 때문.
하이텔의 전신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전자는 한국경제신문에서 개발한 Ketel로, '개털'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던 추억의 통신망이다. 초창기에는 뉴스를 중심으로 데이콤의 생활정보서비스(천리안의 전신)에 서비스를 공급하는 일종의 IP였지만, 자체 접속망을 갖추고 게시판과 채팅, 동호회 등을 갖춘 PC통신 서비스로 발전하게 되었다. 무료 통신망으로 인기가 아주 많았기 때문에 저녁시간대엔 늘 이용자가 폭주했다. 당시 8비트 컴퓨터로도 접속할 수 있었고 전화요금도 통화시간이 아니라 통화당 지불이므로 부담없었지만, 모뎀값이 대단히 비쌌다. 당시의 모니터 싼 모델값과 비교될 정도. 후자는 한국통신이 1991년 9월부터 시험서비스를 개시한 비디오텍스 서비스 '하이텔'이었다.
하지만 한경이 운영한 케텔은 수익성이 전혀 없었고 1990년 들어 신문사의 재정도 악화되자 한국경제신문에서 케텔을 매각하려고 했다. 한국경제신문은 이후 "한경 에코넷(ECONET)"이란 PC통신망을 새로 만들었다. 역시 전화접속이며, 이것은 일반인이 가입 활동할 수 있는 한국경제신문 뉴스사이트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신문사들이 기사 송고를 위해 자체 BSS를 운영했는데 여기에 부가서비스로 각종 동호회가 개설되었다. 한경의 케텔 매각 시도에 한국통신을 위시한 여러 회사가 합작하여 1991년 12월 한국PC통신(주)를 세우고 케텔을 인수했다. 이후 1992년 3월 서비스명을 케텔(KETEL)에서 코텔(KORTEL)
이때 코텔이 제한적으로 무료 운용되고 하이텔이 유료 서비스로 둔갑하면서 사람들이 코텔로 이전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신규 서버엔 아무도 가지 않았고 결국 '서비스 업체도 땅파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마지못해 동의하여 대부분이 하이텔로의 이전을 수용하게 되었다.
3. 하이텔 시절
1992년 7월 가입비 10,000원 + 이용료 월 9,900원으로 유료화를 단행한다. 단, 가입비는 1990년대 후반까지 면제되었고, 이용 요금은 1990년대 후반에 11,000원으로 오른다. 덕분에 한국PC통신 본사 앞에서 유료화 반대 촛불시위가 벌어졌는데, 이 시위가 한국 최초의 네티즌 주도 촛불시위다. 당시 하이텔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 이 시위에서 훗날 '하동연'으로 자리 잡는 '동호회 연합회'가 결성되었고 당시 KETEL 전체 동호회의 대다수가 동호회 초기화면을 통일해서 바꾸는 등, 상당한 파급이 있었다.사회언어학에서도 이 사건이 유의미하다. 이 시점이 남한 한국어의 두음법칙이 음운화(phonologization)를 완료한 시점이라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즉, '연합회'의 도출이 더이상 /련합회/ → [연하푀\]가 아니라, 아예 기저형에서부터 /연합회/가 되었다는 의미. 만약 ㄹ어두 기저형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국련', '한총련', '자민련', '소련' 등의 사례를 따라 '하동련'이 되었을 것이다. 즉 '聯'의 본음은 '련'이고 두음 법칙상 '연'이 될 뿐임을 인지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본음 자체가 '연'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 이후 '전장연', '대진연' 등 수많은 파생형이 생기게 되었다.
시위의 원인은 단순 유료화 반대가 아닌 "신용카드 ONLY"라는 대금 결제 조건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체크카드가 보급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학생들의 경우 카드 발급을 받을 수 없으므로 자동으로 유료 이용자 층에서 떨어져나가게 된다. 이러한 촛불시위와 결합된 온라인 시위의 결과로 결국 회사는 유료화 요금 결제 조건을 신용카드 ONLY에서 "지로 선납제"까지 후퇴하게 된다.
당시 '꿈따라'라는 하이텔 유료회원들을 대상으로 발간하던 매거진 형태의 월간 소식지가 있었다.매달 우편을 통해 회원들의 집주소로 직접 일일이 보내줬다. 그런데 이 촛불시위를 당시 KORTEL 소식지인 '꿈따라'에서 '촛불잔치(!)'라고 표현하는 바람에 다시 한 번 가루가 되도록 까였었다. PC통신 세대가 아닌 세대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 부분인데, 촛불잔치는 가수 이재성의 1985년 히트곡 이름이다. 단순 폄하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유행가 제목을 따다 붙여놓고 뉘앙스를 가볍게 퉁치려 해서 당시 유저들이 빡친 것.
1994년부터 한국통신(현 KT)에서 PC통신의 인기가 높아지자, 프랑스의 미니텔을 모델로 한 하이텔 단말기를 만들어 보급했다. 01410 접속만 가능한(즉, 채팅이나 정보 검색만 가능하고 파일 다운로드 따위는 안 됨) 단말기를 무상으로 대여해준 것. 2,400bps(0.3KB/s)짜리 모뎀, 브라운관, 키보드를 포함하고 있었다. 전화 접속뿐 아니라 시리얼 통신도 가능했기 때문에 당시 얼마 없었던 리눅스 유저들은 자기 컴퓨터에 2번째 접속하는 터미널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현 세대 리눅스 컴퓨터에서도 터미널로 사용 가능하다! 심지어 한글 입출력까지 완벽하게 지원한다.
(하이텔 단말기. 출처 : 하이텔 단말기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한 문화일보의 2023년 기사 )
한국통신에서는 사람들에게 대여해 준 후
별칭으로는 안녕텔 및 안녕전화, 로우텔, 빡텔, 미친텔(...)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안녕전화라는 용어를 즐겨 쓴 사람이 이영도이다. serial란에 올린 드래곤 라자 연재분 말미의 잡담에 이 용어가 많이 언급되었다. 하이텔에 저런 멸칭이 붙은 이유는 심심하면 서버 접속이 끊겨서 처음부터 다시 전화걸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했기 때문에 빡친 이용자들이 내뱉는 육두문자에 가까웠다. 200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저 당시 전화접속이 끊기면 모뎀으로 전화를 걸어서 → ID. 비번 치고 로그인 → 아까 전에 활동하고 있던 게시판이나 동호회로 명령어를 직접 입력(예: go serial, go ani 4)해서 다시 들어가야 했다. 특히 대화방에서 채팅 중에 "통신장애로 퇴장되었습니다" 뜨면 사람 성질 버린다. 2010년대 이후로 치면 배그나 롤 하는 중에 회선 장애로 갑자기 접속이 끊어지는 사태에 비유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게 한 시간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에러였다는 것.
유명한 동호회 중 하나로는 개오동이 있었다. 개털 오락 동호회의 약자. 케텔 시절 하도 장애가 많아서 케텔을 '개털'이라고 불렀던 것이 그 시초다. 개오동 공지란에 있던 개오동의 역사를 적은 게시물에 이 유래가 언급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오락동호회로 잘못 알고 있다. 그렇다고 개오동나무가 유래인것은 더더욱 아니다. 2000년대 이후 '적절한 그분'으로 인터넷에서 희화화된 김대기도 이 곳 출신이며, 김동준 해설도 이곳 운영진 출신이다. 이 분과 스타크래프트로 맨날 싸우던 분도 이곳 출신. 유명한 개발자 몇몇을 배출한 게임제작동호회도 원래 개오동의 게시판에 있다가 독립해 나간 케이스이다. 이러한 인원풀이 있었기 때문인지, 당시 PC통신상에서 스타크래프트를 다루는 게임 동호회중에서는 심도있는 글이 많이 올라오던 게임 동호회이기도 하였다. 멀티플레이 전략은 물론, 한스타가 나오기 이전부터 스타크래프트 캠페인 모드의 대사번역이 가장 빨리 올라왔으며 캠페인 스토리에 관한 이야기도 꽤 있었다. 나우누리에서 비슷한 포지션의 게임동호회로는 나모모가 있다.
사실 개오동의 리즈 시절은 스타크래프트 이전이었다. PC방 열풍이 불기 전 특히 도스 환경에서의 게임은 소수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게임 실행, 공략, 또는 ** 안 하고 깨기 등 모든 범주가 다양하게 논의되었다. 개오동에선 국회의원을 두 명(이찬진, 안철수)이나 배출하여 나름대로 대한민국 정치사에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안철수는 백신 개발자로써 개오동 외에도 여러 곳에서 활동했고, 개오동에서 유령 회원을 정리하는 목적으로 회원을 전부 탈퇴시키자 바로 재가입 신청을 넣은 적도 있다.
또 유명한 동호회 중 하나로 애드립 동호회가 있다. 1990년대 PC에서는 소리를 내기 위해 애드립, 사운드블라스터, 옥소리 등의 기판이 추가로 필요했고, 애드립 동호회는 도스 환경에서 이들을 구동시키기 위한 다양한 정보와 창작물(주로 작곡한 곡)이 오가는 교류의 장이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미디(MIDI) 음원으로 작곡을 하는 미디 동호회도 활동하였다. 1990년대 말 사운드카드 및 미디가 소프트웨어 에뮬레이션으로 구동되고 메인보드에 통합되는 시대의 변화를 맞아 쇠퇴하게 되었다.
동호회에서 가장 규모가 큰 PC 관련 OS동우회(공식 명칭이 동호회가 아닌 동우회였다.)가 있었는데, 온라인 쇼핑이 없던 시절 PC관련해서 다양한 제품들의 공동구매를 이끌어내고,(워낙 규모가 큰 동호회였기 때문에, 제품 총판과 공동구매를 많이 이끌어 냈다.) OS 동우회에 제품이 좋다는 소문(바이럴?) 이 돌면 해당 제품이 용산전자상가에서 해당 제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현상이 있었다.
한국 1~2세대 오타쿠의 산실인
판타지 소설계에서도 드래곤 라자와 퇴마록, 데프콘이 연재된 곳이라는 의의를 갖고 있다. 작가 라인업에서는 후에 작가들이 (결성의 계기는 좀 씁쓸하지만) 커뮤니티를 결성할 정도로 화려한 나우누리 SF에서 밀리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퇴마록과 이영도의 브랜드 파워는 나우누리의 쟁쟁한 작가진들과 맞먹어도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 링크의 이미지는 2004년에 찍힌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화면에 나와있는 피마새의 연재 시작일은 2003년 12월 24일이고, 특히 37챕터는 2004년 11월에 연재되었다. 해당 스샷에도 37-1편이 올라온 날짜가 11월 15일로 찍혀있다. 나우누리 활동 작가를 포함해 여기에 거론된 여덟 명의 작가들 중 1997~1998년에는 연재를 시작한 다른 일곱명에 비해 전민희(세월의 돌, 나우누리 연재)는 1999년 4월로 연재 시작이 가장 늦다. 해당 스샷에 올라온 마법교육기관 유그드라실 연재글의 경우, 글의 제목 자체가 권 단위로 매겨진 것을 볼 때 출판이 4권에서 중도 종료되자 이후 분량의 출판본 원고를 창작연재란에서 공개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해당 시점(2004년)이면 하이텔 자체가 완전히 사양화되어 창작연재란(시리얼) 역시 그저 PC통신 자체에 추억과 애착을 가진 몇몇 네임드 작가들이 순수한 호의로 글을 올려주는 공간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통신연재소설(특히 판타지)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이면 해당 스샷을 보고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하루에 올라오는 글의 편수가 많아봐야 고작 2~3편에 심하면 아예 한 편도 올라오지 않는 날도 드물지않게 보일 정도이니 (전성기에 비교할 것도 없이) 시리얼란은 참혹한 수준의 침체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글을 올린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이건 또 어이없을 정도로 네임드밖에 없다. 한국 판타지판에서 이영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고, 유기선의 극악서생 역시 옛날 소설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 중에도 아는 사람이 제법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 2000년대 초중반에 연재되다가 흐지부지 연중된 작품이 2010년대 중후반 이후 웹연재 플랫폼에서 재연재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상당한 규모의 팬덤이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악서생 자체가 장르의 주요작품 중 하나로 꼽힐만한 작품인 것.
그리고 최인호(엑사일런)와 마법교육기관 유그드라실의 유지훈은 저 둘에 비하면 이름값이 부족한 인물이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네임드였다. 둘 다 출판운은 엄청 안 풀렸다는 것이 문제지만, 유지훈의 경우 하이텔에 마법교육기관 유그드라실 소모임(팬 모임)이 만들어져 활발하게 활동할 정도의 인기는 가지고 있었고 엑사일런 역시 밀덕 요소를 결합한 판타지나 대체역사물 등으로 상당한 인기를 얻은 화제작을 여러 편 연재했던 작가이다. 해당 스샷에 나온 <중전이 되는 법>의 경우 조아라에서도 연재하여 작가의 거의 유일한 완결작이 되었는데, 전체 조회수 270만회 이상에 추천수도 2만 3천회 이상, 선호작품 등록수도 2천건 이상으로 어느 정도의 지명도는 확보한 작품이었다. 게다가 해당 작품이 연재된 2005~2006년은 조아라가 본격적인 전성기에 진입하기도 이전, 드림워커와 경쟁하던 시기였다. 즉 유지훈과 엑사일런 역시 당시의 통신연재 판타지 분야에서는 충분히 네임드로 분류 될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니까 저 스샷에 등장하는 작가 5명 중에서 레전드급이 1명, 스타급이 1명, 네임드급이 2명이고 무명은 달랑 1명 뿐이라는 엉뚱한 비율이 나오고 있는 것. 결국 2004년 말의 하이텔 시리얼(창작연재란)은 초보 작가들의 등용문이라는 기능은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해당 기능은 인터넷으로 옮겨가고) 그저 PC통신에서 이미 지명도와 팬덤을 확보한 몇몇 작가들이 기존 매체에 대한 호의와 향수 때문에 자신의 글을 발표하는 창구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흑역사급 동아리도 있는데, 하이텔 내에 존재했던 '주부동호회(주부동)'는 서울 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 및 기타 학부모 단체들과 연계하여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시리즈, 소년기사 라무의 한국 방영을 필사적으로 반대한 바 있다.
그리고 축구 국가 대표팀 서포터즈 '붉은악마'를 하이텔 축구동호회를 주축으로 결성해 냈다.관련자료1관련자료2
학생운동단체가 애용하기도 했다. 바른통신동호회(go barun). 전대협 시절과 한총련 시절 여기서 자료집을 받아 인쇄해 각 학교에 배포하기도 하고 연락을 주고받는 통로로 사용했다.
김영삼 정부시절 청와대 신문고도 하이텔에 개설되었다(go bluehouse). 이것은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에 모두 있었던 듯.
좀 더 범위를 넓히면 대우자동차가 전성기였던 1994년에 대우자동차가 '오토컴'이라는 기업 최초의 자동차 게시판을 개설해 현재 보배드림급의 파워를 자랑했다. 1993년에 현대자동차도 PC통신 서비스를 천리안에서 제공했으나, 현대차는 자사 모델만을 중심으로 서비스했다. 대우 오토컴은 타 제조사 관련 내용도 자유롭게 적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토컴'은 대우자동차 홈페이지가 1996년도에 설립된 이후로는 힘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민간인 측에서 서버 이전을 받고 2002년 1월까지 운영하다 폐쇄되었다. 이후 오토컴 내의 동호회들 중 하나였던 대우 르망, 대우 씨에로 오너들의 '내친구 르망(LCN)'은 자체적으로 게시판 데이터를 대우차로부터 백업받아, LCN이라는 자체 동호회를 세운 뒤 이시절의 자료들을 제한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1991년에 세워진 진보계열 동아리인 '바른 통신을 위한 모임(이하 바통모. 천리안의 희망터와 나우누리의 찬우물 포지션.)'도 있는데, 1988년 10월에 한겨레가 창간되자 진보성향 유저들은 한국경제신문에 한겨레 기사도 올려달라고 했으나 한경 측이 이를 거절하자 일부 유저들은 직접 한겨레 기사를 타이핑해서 케텔 게시판에 올려놓기도 했다. 이런 유저들이 모여 처음엔 ‘한국민주통신동호회(이하 한민동)’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200명의 발기인을 모아 동호회로 만든다는 목표로 준비작업에 들어가 1991년에 위와 같은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전대협 말기와 한총련 초기에 자료를 교환하는 게시판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상한 것들을 올리고 다닌 건 아니다. 노태우 정권 말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철학 쪽은 일반 출판물로도 해금돼 있었다.
하이텔 출신의 유명 네임드로는 김유식, 안철수[1], 이영도, 김경진, 델리스파이스, 듀나, 이우혁, 송락현, 주석, PCTools 김현국, 그리고 앞서 말한 적절한 그분 등이 있다. 그 외 plaza란에서 IMF가 닥치기전 독자적으로 IMF를 예견했다가 코렁탕을 먹을 뻔한 용자 (seokjeff : 석진욱)도 당시 plaza란 유저들 사이에서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흑역사급 인물로는 김완섭이 있다.
여성운동 진영에서 종종 보이는 "부모 성 함께 쓰기"도 하이텔에서 출발하였으며 (조은광순, 신정모라 등), '벙개' 등의 통신용어, '수구꼴통' 등의 표현 등이 처음 시작된 곳도 하이텔이다.
네이버가 시초라고 알려진 "지식검색 서비스"의 시초가 바로 하이텔의 "하이텔 서당" 서비스. 하이텔 서당의 GO 인덱스(메뉴 직접 이동 명령인 GO 명령으로 찾아가는 일종의 부호)중 하나가 TE31 이었다. 처음에는 "TE31"이 아니라 "TE11"이었다. 원래는 컴퓨터 하드웨어 관련 질문답변을 올리는 TE01, 컴퓨터 소프트웨어 관련 질문답변을 올리는 TE02.... 이런 식으로 해서 기타 질문답변을 올리는 TE10 까지 있었으나 몇몇 이용자들이 부적절한 질문을 올려대서 게시판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여서 생겨난 것이 유치하거나 사소한 질문답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게시판인 "호기심해결 Q/A (TE11)"이였다. 이후 하이텔의 인덱스 개편작업을 통해 "TE11"은 "TE31"로 바뀌었고 이는 하이텔의 서비스 종료까지 쭈욱 이어졌다. 그래서 아직도 하이텔 서당은 "알지롱 (TE31.COM)"으로 명맥을 유지 중이다. 물론 하이텔서당 시절부터 있었던 구성원은 지금은 극소수이며 대다수의 구성원들은 서당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참고 링크.
하이텔 내에는 동호회(SIG)외에도 여러 기업체나 노동조합 등 재야 사회단체들의 CUG(Closed Users Group. '폐쇄이용자그룹', 닫힌 모임)가 존재하였는데, 모기업인 한국통신 노동조합 CUG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CUG는 1994년에 개설되어 1995년 한국통신 파업 당시 투쟁지침을 하달하고 파업 관련 속보를 보내서 대국민홍보에 나서는 등 대대적으로 홍보에 나서다 그해 5월 22일~6월 4일 사이에 이용약관에 따라 게시글 28건이 삭제되었고, 6월 6일에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와 동법 시행령 16조에 따라 폐쇄되었다가 이용자들의 항의로 열흘 만에 철회되었다. 6월 6일 폐쇄 이후 노조 측은 하이텔 PLAZA에서도 게시글을 작성하다 노조 관련 게시글 181건(노조 측 게시글 7건, 나머지는 일반사용자 게시글들)이 무더기로 삭제되기도 했다. 1, 2, 3 이후 노조 측은 CUG 폐쇄 건에 대해 한국통신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으나 1996년 1심, 1997년 2심, 1998년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세 번 다 패소당했다.
불법자료 단속은 나머지 3~4대 통신 중에서 가장 철저히 했는지, 일단 동호회 통합자료실 개념이 없어 나우누리, 유니텔과는 달리 (듣보잡 소모임에) 우회적으로 올려서 (동호회 통합자료실로) 우회적으로 받는 수법이 먹히지 않았고, PCCOM[2] 이하
2003년에는 기존의 VT 기반의 PC통신 서비스와 완전 단절된 인터넷 커뮤니티로의 전환을 발표하는 등, PC통신 서비스를 중단하기 위해서 행보를 보이더니, 결국 2007년 2월 28일, 하이텔VT 서비스를 중단하였다.
KTH 관계자는 "이번 결정에 따라 오는 3월부터 하이텔 서비스는 폐지되고, 현재 이용자들이 축적한 동호회, 게시판 등의 DB는 포털 파란의 클럽서버로 이전될 것"이라며 "이외에 아이디스크(IDISK), 프리미엄 e메일 등 기존 멤버십 서비스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밝혔다. 관련자료1관련자료2
4. 2000년대부터
이렇듯 하이텔은 천리안, 나우누리와 함께 잘 나가는 PC통신 3대 브랜드였다. 대개 유니텔도 포함하여 4대 PC통신으로 불리지만 유니텔은 후발주자로서(1996년 탄생) 독자적인 "유니윈(Uniwin)"이라는 전용 윈도우즈용 클라이언트를 사용했으며 GUI 인터페이스 등 현대의 인터넷과 비슷한 느낌이었기에 2024년 4월 1일 만우절에 나무위키 대문에서 사용한 올드한 느낌의 파란색 바탕 화면에 깨알 같은 흰색 글자 느낌은(새롬 데이타맨이나 이야기 같은) 3대 PC통신의 전유물이었다. 물론 3대 PC통신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세인 윈도우즈용 클라이언트를 내놓긴 했으나, 속도도 느리고 무엇보다 올드 유저들은 익숙한 파란 화면에 편안함을 느꼈기에(경로의존성) 대개 VT로 접속을 선호했고 기억도 그렇게 남아있기에 만우절의 나무위키에서도 VT화면을 사용해서 타임머신을 탄 것 같은 추억을 재현했다.하지만 그렇게 잘 나가던 하이텔을 비롯한 PC통신들은 1999년 초고속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조금씩 하락세를 타기 시작한다. 2000년을 정점으로 프리챌, 아이러브스쿨, 야후 코리아, 라이코스 등 1세대 포털사이트에 밀려 하이텔의 모뎀 서비스는 경쟁력을 잃었다. 하이텔은 나우누리, 천리안, 유니텔 등 다른 PC통신 경쟁업체들과 마찬가지로 포털업계에 진출해 00년대 초반에는 포털과 PC통신 서비스를 병행했다. 다만 2000년대 초반까지는 어느 정도 명맥을 유지했는데, 대표적으로 2001년~2002년 사이에 연재된 눈물을 마시는 새와 파이오니아 등이 있다. 이 시기는 초고속인터넷이 모뎀 서비스를 앞지른 지 한창 되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이텔 연재 소설이 인기를 끌었다. 위에서 실컷 각주로 욕하면서 서술했던 통신장애도 초고속인터넷 기반의 텔넷 LAN으로 직접 접속하게 되면서 통신환경이 훨씬 쾌적해졌고, 그 결과 2000년 하이텔은 200만 가입자(대부분이 유료 가입자다)를 돌파하는 등 반짝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던 2003년 8월, 하이텔은 PC통신 서비스 포기를 선언하고 완전한 웹 기반 서비스로 전환한 것을 발표한다. # 이전에도 포털과 모뎀 서비스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었지만, PC통신 자체에 대한 서비스 포기를 발표한 것이었고 이는 3대 PC통신 브랜드 중 하이텔이 처음이었다. 하이텔이 이러한 영업 전략 변경을 발표하면서, 경쟁 업체인 나우누리와 천리안도 PC통신 서비스 포기를 선언하고 웹 기반 포털로 속속 전환했다. 이 때문에 하이텔의 PC통신 포기선언은 PC통신의 완전한 종말로 여겨졌으며 현재도 PC통신이 완전 사장된 포인트를 이 시기로 정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쇠퇴기는 이미 초고속인터넷이 깔린 2000년부터 진행되고 있었지만, 브로드밴드에 완전히 밀려 영향력을 잃고 사업까지 포기하게 된 건 2003년이다.
그렇게 PC통신 모뎀 서비스에 대한 투자를 포기하고 포털로 명맥을 이어가던 하이텔은 2004년 7월 17일, 메가패스, 한미르와 합쳐져 파란닷컴으로 통합되었다. 당시 파란닷컴이 하고자 했던 서비스는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것으로 결국 물량전에서 밀려나 2012년 6월 폐쇄되어 완전히 흔적이 사라졌다. 방대한 PC통신 컨텐츠를 웹 인터페이스로 끌어나오는 과정에서 불만과 갈등이 있었고, 애니메이트를 포함 독립해나가는 동호회도 생겼다. 그리고 TCP/IP 통신 환경에서 하이텔은 그저일개 웹사이트에 불과했기 때문에, 결국 네이버의 검색엔진을 따라가지 못해 기타 포털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현재까지 케이티하이텔 법인은 존속되어 기존 하이텔 사용자들이 느끼기는 힘들지만 olleh tv 컨텐츠 유통이나, T-커머스 같은 인터넷 결제 서비스 등을 서비스 하고 있다.# 코스닥에도 아직 상장 중. (036030)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법인은 KT알파 문서 참조.
여담으로 KT에서는 하이텔 서비스가 종료된 후에도 10년 넘게 01410~01412 번호를 이용해 POWWOW 라는 이름으로 전화 모뎀을 이용한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서비스 당시 이용요금은 분당 3원(월 최대 4000원). 전화요금은 180초(평일)/258초(야간, 공휴일)당 35원.
PC 통신 모뎀 연결음은 여기서 들어 볼 수 있다.
터미널 화면은 하이퍼터미널 같은 터미널 에뮬레이터로 구경해 볼 수 있다. 01410은 여기 참고
케텔에서 하이텔을 거쳐 paran.com까지 갔던 이메일 계정은 이제 daum.net 이메일 계정에 통합되어 사용 가능하다. 동시에 하이텔 게시판에 올려진 일부 게시물 역시 티스토리로 옮겨졌다.
인포샵을 HiNET-P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HiNET-P는 텔넷접속 서비스이고 인포샵은 POWWOW(01410, 01411, 01412)라는 이름이었다.
2017년 8월 31일에 PC통신 서비스인 '014XY 서비스'가 완전히 종료되었다. (관련 게시물). 어느 사설 BBS에서 이 소식이 들려올 때 누군가는 정액제(야간/종일/도수정액형)까지 가입해서 이용하려 했다고 한다.]
01412에 연결은 되나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다. 인포샵은 연결이 되지 않고, 다른 게시판들은 모두 내용이 없다.
5. 관련 문서
[1] ahn.cs라는 아이디를 사용했다. 특수문자 아이디 사용은 초창기에만 허용되었으므로 매우 이른 시기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2] 보통 PCCOM(n)이며 pccom1, pccom2, pccom3 등이 있었다. 나우누리로 치면 나우지기에 상응하는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