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쿠릴타이 ᠻᠦᠷᠦᠯᠳᠠᠶ (Хуралдай/Qurilta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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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db1><colcolor=#fff> 국문 명칭 | 쿠릴타이, 예케 쿠릴타이, 위대한 쿠릴타이 |
영문 명칭 | Yeke Quriltai |
창시자 | 칭기즈 칸 |
시작 연도 | 1206년 오논강 쿠릴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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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북아시아 유목 세계 및 중세~근대에 칸의 명에 의해 개최되었던[1] 몽골의 정책 결정 기관이자 회의다.흉노, 선비족, 오환, 거란 등도 쿠릴타이가 있었다.
2. 상세
새로운 칸을 선발하는 일이나 법을 제정하는 일,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 계획을 수립하는 일 등 중요한 사안은 거의 쿠릴타이를 통해 이루어졌다. 실제로 몽골 제국의 모든 칸은 공식적으로 쿠릴타이를 통해 선출되었다. 다만 유목 제국의 특성 상 온갖 곳에 퍼져있는 여러 부족들의 수장들을 모아 집합시키는 것은 영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었던지라, 칸의 재위 기간 동안 겨우 두세 번 정도 개최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충 5~6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지는 행사였기 때문에 칸의 숙소(오르두) 근처 목초지에서 큰 규모로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쿠릴타이가 끝난 다음에는 약 일주일 동안 이어지는 축제[2]가 열렸다.한자로는 忽里勒台, 忽鄰塔[3] 등으로 표기되어있으며, 페르시아어 자료에는 قورولتای로 표기되어 있다. '모이다'를 뜻하는 몽골어 동사 quri-에 접미사 lta가 붙어 명사형이 된 것으로, 직역하자면 '모임'이라는 단순한 뜻이 된다. 다만 단순히 모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정확히는 가족이나 혈연끼리 모이는 일을 칭한다.
몽골에 복속된 시기의 고려왕들도 황제의 사위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킵차크 칸국의 소 쿠릴타이에는 러시아의 보야르들이나 종속된 국가의 사신들이 오기도 했다.
한민족은 유목민족도 아니긴 하지만, 고려시절에 칭기즈 칸의 혈족과 고려 왕족이 결혼했었기 때문에, 고려 왕족들이 정식으로 원나라 쿠릴타이에 참석하였었다. 가령 충선왕이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원무종의 즉위를 지지하기도 했다.[4]
쿠릴타이, 특히 후계자 선정을 위한 쿠릴타이가 개최되면 모든 일이 중단되는지라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유럽 정복이 멈췄고 몽케 칸의 죽음으로 남송 정복이 미뤄지기도 했다. 게다가 쿠빌라이와 아라크부카의 사례처럼 적당히 명분만 있다 싶으면 기존에 선출된 지배자를 무시하고 자기 파벌 사람들로만 구성된 쿠릴타이를 열어 즉위하기도 했다.
다음 칸을 정하는 선거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쿠릴타이는 예케 쿠릴타이라고 불렀다.
3. 몽골 제국의 쿠릴타이 목록
- 일시: 1206년
- 장소: 오논강, 쿠데우 아랄
- 주최자: 칭기즈 칸
최초의 쿠릴타이로 테무진이 몽골 통일을 달성하고 칭기즈 칸이 된다. 그리고 몽골 제국이 선포되었다.
여러가지 제도도 개혁했는데, 우익과 좌익에 각각 보오르추와 무칼리을 임명해 1만명을 통솔할 권한을 주었다. 그 외의 장수들에게 천 명을 통솔할 권한을 주었다.
또, 칸의 친위대인 케식을 천 명 정도에서 만 명으로 크게 확대했다. 이 케식은 근본적으로 항복한 장수들의 자녀와 친척으로 이루어진 인질들이었다. 그러나 이 케식에서 성장하고 공을 인정받으면 높은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 일시: 1211년 3월
- 장소: 케롤란 강
- 주최자: 칭기즈 칸
칭기즈 칸이 항복하고 속국이 되라는 금나라의 요구를 쌩깐뒤, 칭기즈 칸은 신하들을 불러모아 쿠릴타이를 개최한다. 며칠 동안 회의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칭기즈 칸이 산으로 올라가 텡그리에게 깊은 기도를 올린뒤 나흘째 날, 몽골-금 전쟁이 결정된다.
오고타이 칸이 세 번의 거절 끝에 대칸으로 추대되었다.
- 일시: 1235년
- 주최자: 오고타이 칸
바투 칸은 몽골-금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산시성의 영지를 할당받았다.
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이 정해진다. 남송, 고려 전역에 대한 추가 병력 지원이 결정된다.(몽골의 제3차 고려 침략)
오고타이 칸은 1237년에 사망하면서 자신이 아끼던 아들 코추
바투 칸은 귀위크와의 갈등 때문에 불참한다. 몽골 왕족들은 집안의 장로가 오지 않았는데 쿠릴타이를 치를 수 있냐고 항의했다. 거기다가 섭정이었던 퇴레게네는 귀위크를 대칸으로 세우기 위해 뇌물 등 각종 술수를 쓰며 시레문 대신 귀위크가 다수의 지지를 얻을 때까지 쿠릴타이를 지연시킨다. 두 사람의 영향으로 쿠릴타이는 3년간 지연되게 된다.
1246년 초가을, 결국 귀위크 칸이 대칸으로 선출된다.
바투 칸은 즉위식에는 형인 오르다를 보내고 참석하지 않는다.
이 쿠릴타이에는 바투 칸이 막 정복했던 블라디미르 공국의 대공이자 키예프 공국의 실질적인 권력자인 야로슬라프도 참석했다. 그러나 퇴레게네 카툰과 의심스러운 저녁 식사를 한후 갑자기 열병이 나기 시작하더니 죽었다. 이 죽음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대표적인 설은 독살설이다. 하지만 다른 역사학자들은 굳이 독살처럼 은밀한 방법을 쓰지 않고도 속국의 지도자를 처형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고 생각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야사에 따르면, 야로슬라프는 몽골의 종교 의식을 거절했고, 그 대가로 독살당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설에도 반박할 점은 있는데, 몽골인들은 비교적 종교에 관대했기 때문이다.
바투는 귀위크 칸 사망 직후 툴루이 가(家)와의 연대감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이를 알았던 소르칵타니 베키는 몽케 칸에게 통풍에 걸린 바투 칸을 만나러 가라고 했고, 주치 울루스까지 가서 바투 칸으로 부터 지지 약속을 받는다. 1250년 알라카마크에서 툴루이 가(家)와 주치 가(家)의 주도 아래 쿠릴타이가 개최되었으나, 반대 세력의 비판을 의식해 오난 - 케틀란 지역에서 즉위 후 쿠릴타이를 재소집한다.
1251년 여름 쿠데우 아랄에서 모든 가문이 참석한 공식적인 쿠릴타이가 개최되었고 몽골 4대 대칸으로 추대되었다. 쿠데우 아랄은 1206년 칭기즈 칸이 쿠릴타이를 연 곳으로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5]
이 과정에서 모친 소르칵타니 베키의 정치력이 상당히 발휘되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아들 몽케의 칸 즉위를 위해 바투에게 오고타이 군대의 동태를 전달하는 등 주치 울루스와의 친밀한 관계를 다져나갔고 툴루이가 보르테 소생[6][7]의 아들 중 말자임을 골자로 툴루이 가(家)의 정통성[8]을 주장했다.
귀위크 칸의 미망인 오굴 카미시 카툰을 비롯한 오고타이 가문은 선거 전부터 몽케 칸을 강하게 반대했다. 선거 후에 오고타이 가문이 몽케 칸에게 "대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몽케 칸에게 왔는데, 그 가문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왔다. 하지만 몽케 칸의 매사냥꾼이 매사냥꾼답게 군대의 움직임을 조기에 감지했고 반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몽케 칸은 오고타이 가문의 왕족들이 선거를 무효로 하고 오고타이의 손자 시레문을 대칸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봤다. 몽케 칸이 몽골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한 재판을 통해 섭정 오굴 카미시를 비롯한 77명에서 330명이 처형되었다. 특히 오굴 카미시 카툰은 소르칵타니 베키에 의해 흑마법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자루에 담겨 강물에 던져졌다.
1250년 10월, 몽케는 고려에 사절을 보내 즉위를 알린다.
- 일시: 1252년~1253년
- 주최자: 몽케 칸
1. 훌라구 칸에게 중동을 침공하라고 명령한다.
2. 쿠빌라이에게 우량카다이와 대리국을 침공하라고 명령한다.
3. 살리 노얀에게 인도를 침공하라고 명령한다.
아리크부카가 대칸으로 선출되었다.
쿠빌라이 칸이 대칸으로 선출되었다.
아리크부카의 대칸 선출 소식을 듣고 황급히 남송과의 휴전협상을 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아 개최한 쿠릴타이다. 주요 인물로는 오고타이 칸의 아들이자 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에서 굵직한 공을 쌓은 카단 오구르가 있다.
이후, 대칸 자리를 두고 툴루이 가문 내전이 벌어진다.
툴루이 가문 내전 이후, 사한국 중 삼한국의 칸들이 만나 원나라에 맞서 동맹을 맺는다.
4. 원나라의 쿠릴타이 목록
- 장소: 원나라, 대도
- 일시: 1307년 6월 21일
1307년 테무르 칸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붕어하자 몽골 제국에서 되풀이되던 후계자 쟁탈전이 다시 재현되어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황후, 외척, 권신 등 몽골 귀족끼리의 격렬한 권력 다툼이 되풀이되었다. 권력 다툼의 중심이 된 이들은 외척인 곤기라트[9] 부족을 중심으로 결속된 궁정 귀족들이었다. 테무르 칸의 황후 브르간은 곤기라트부 출신이 아니라 튀르크계 위구르족의 바야우트씨(伯岳吾氏) 출신이었기 때문에 테무르 칸의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황제로 밀었다. 당시 고려에서 충렬왕 세력이 테무르 칸의 황후 브르간과 안서왕 아난다에게 줄을 댔기 때문에 충선왕은 아난다의 즉위를 반드시 막아야 했으며, 이때 충렬왕까지 대도로 와서 이 일에 개입할 정도였다.[10]
방계 즉위에 의해 기득권을 위협받는 것을 두려워한 중신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브르간 황후와 안서왕 아난다를 살해하고 아유르바르와다를 먼저 불러들였지만[11] 몽골 고원의 방위를 담당하던 카이산이 대도로 향하자 결국 카이산이 황제에 즉위하는 것으로 상호 합의를 보게 되어 형식적인 쿠릴타이를 통해 카이산이 즉위한다. 훗날 태정제(泰定帝)로 즉위하는 계국대장공주의 남동생 이순테무르도 후계 순위에서 밀어내는데 성공한 시점에서 카이산이 대칸이 되어도 상관없었던 충선왕이 원나라의 중신들을 설득해 카이산의 입성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공로로 카이산 칸 시절 그는 황태제가 된 아유르바르와다의 스승인 태사로 임명되었다.
카이산은 즉위 직후에 아난다와 브르간 카툰에게 사약을 내려 사사한다.
5. 준가르 칸국의 쿠릴타이
- 장소: 준가르 칸국, 타르바가타이 산기슭
- 일시: 1640년
- 주최자: 에르데니 바가투르 콩타이지
마지막 몽골계 쿠릴타이. '대초원 법률'이 채택되었다.
6. 근황
현재도 헝가리에서 전통 보전 차원에서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다.참고로 대한민국도 참여한다. # 카자흐의 고려인 관련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목민족 한가운데에서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이 워낙 병신같지만 멋있다 보니, 역사 커뮤니티에서는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이었으니 고려 칸국으로 몽골제국의 정당한 후계자라는 드립부터, 우리는 유목민족을 지배했다며 고구려, 발해, 환국 농담까지 나온다.
참고로 일본과 핀란드가 참여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실제 기마민족 자격으로 참여하는 한국과 달리 관전자 수준의 위치로 참여한다. 그리고 참여 빈도수 역시 한국보다 현저히 낮다. 지구 반대편 한국이 참여하는 것도 웃긴데 핀란드까지 참여하다 보니 커뮤니티에선 환핀대전 드립을 치기도 한다. 쿠릴타이를 주제로 한 Kurultáj dal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가사가 헝가리어로 되어있다. Ingen 채널에서 이 노래가 업로드되었는데# 영상 속 지도를 보면 북유럽과 중국, 러시아의 일부 지역, 튀르키예, 불가리아, 헝가리, 몽골, 그리고 의아하게도 한반도와 일본이 포함되어있다. 쿠릴타이 축제 참여국 및 민족집단으로 보인다. 즉 범투란주의에 따라 우랄 알타이 제어는 거의 다 참여한다.
[1] 물론 칸의 자리를 계승하는 문제는 예외, 특히 쿠빌라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독자적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할 수도 있다.[2] 토이(toi)라고 부른다.[3] 원조비사[4] 예시로 든 충선왕은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던 관계로 목소리가 더 컸는데, 충자돌림의 대부분의 군주나 공민왕의 아내(노국대장공주)를 보면 대부분이 방계왕족의 자식인 반면 충렬왕은 유일하게 현직 황제의 딸과 결혼하였기에 그 사이에서 나온 충선왕은 다른 고려 왕들보다 원나라 내에서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었다.[5] 몽케가 바투의 지원을 받아서 카간이 되었기 때문에, 바투의 울루스는 독립적인 위치를 갖게 된다.[6] 칭기즈 칸에게는 여러 부인들이 있었지만, 첫째 부인인 보르테의 자식들만이 유산으로 영토를 물려받았다. 딸들도 몽골에 복속된 오이라트, 위구르 등의 수장과 혼인을 해서 각 세력들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잡았다. 물론 칭기즈 칸이 총애하던 부인 중 일부는 몇몇 강을 분배받기도 하였다.[7] 정확하게는 몽골의 분배방식에 따라서 몽골의 초지와 대부분의 인원들은 막내 툴루이가, 서쪽의 가장 먼 초지에서부터 일부 인원을 받은 형태로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가 받았고, 동쪽은 자신의 동복형제들에게 분배하였다. 여기에 보르테 소생의 딸은 혼인한 지역에 공동 통치자가 되었고, 보르테는 칭기즈 칸의 정실로써 이미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밑에 다른 일부 아내들이 몇몇 강을 받았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아들들에게 분배된 것은 초지였고, 정주 지역들은 공동 통치 구역으로 그곳에서의 수익은 예케 몽골 울루스 전체의 수익이었다. 그러나 우구데이가 대칸에 오르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고하게 하는 과정 속에서 우구데이 가(家)의 독주와 공동재산 사유화는 점차 주치 가(家), 차가타이 가(家), 툴루이 가(家)에서도 시행되면서 1차적으로 우구데이 가(家)의 귀위크 사후 툴루이 가(家) 몽케의 즉위와 주치 가(家)의 독립적인 권한 보유를 불러왔고, 이후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와의 대립 속에서 서부의 3가(家)가 독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8] 당시 몽골족의 재산 분배는 막내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지역을 받고, 맏이가 가장 먼 지역을 받았다. 칭기즈 칸도 몽골제국 영토 중 몽골초원에서 서쪽으로 가장 먼 킵차크 초원에서부터 순서대로 주치-차가타이-오고타이에게 분배하였고, 막내인 툴루이가 몽골초원을 받았다. 그외에 동쪽의 만주지역은 동복동생 3명에게 분배하였다.[9] 옹기라트 혹은 콩기라트[10]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부마였기 때문에 종친 내에서 서열이 높았고, 친왕의 딸과 혼인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던 충선왕보다도 더 높았다.[11] 세조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던 충선왕 또한 계승 경쟁에서 발언권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충선왕은 자신과 함께한 아유르바르와다를 밀었는데 기록은 없지만 당시 충선왕은 이 복잡한 정국 속에서 대도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있었던 아유르바르와다와 중신들 사이를 연결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