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2:38:15

키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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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적 진행3. 국제사회의 압력4. 특징5. 단점
5.1. 하마스의 기습 침공
6. 여담

1. 개요

Kibbutz / קיבוץ

이스라엘 국토에서 농업협동조합임업협동조합축산업협동조합수산업협동조합을 결성한 유대인들이 집단농장사업소를 경영하는 공동체.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시오니즘 운동의 주류를 차지했던 노동 시오니즘 운동과 연관이 있다.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의 한 사례이자 성공한 몇 안되는 자발적 사회주의 공동체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의 실패에 이른 집단농장 시스템이 대규모로 유일하게 성공한 곳이 친미 국가이자 자본주의 국가라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공산권도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다른 독자적 사회주의에 기반한 키부츠에 대한 소개를 거의 하지 않았다. 성공 원인은 물론 하나의 키부츠는 하나의 집단주의 공동체이기는 하지만 그 지분이 국가 전체에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공동체의 정착민에게만 주어지는 배타적 지분이라 집단 소유권에 가깝고, 또 해당 키부츠의 생산-판매-분배는 상부 조직의 명령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시장과 거래했기 때문에 관료제적 실패가 없었기 때문이다.

2. 역사적 진행

키부츠 개척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가 파국을 맞이하게 된 원인으로서 지금도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사실 팔레스타인 땅의 소유권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1] 팔레스타인 땅의 소유권의 90%는 시리아 다마스커스와 레바논 베이루트의 부재지주들이 가지고 있었고[2][3] 팔레스타인 땅은 인구가 적은 곳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포그롬을 시작으로 대량의 유대인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로스차일드 등 유대인 거부들은 시리아와 레바논의 지주들과 직접 거래해서 소유권을 사들였다. 그리고 키부츠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키부츠의 초기설계는 아나코-사회주의 성향이 짙은 다비드 벤구리온, 이츠하크 벤즈비, 이츠하크 타크빈 등 이민 1세대의 영향이었다. 히틀러의 선전중에 유일하게 맞은거 하나가 유대인들은 원래 사회주의 지지도가 높았다. 국가가 없는만큼 탈국가 노동자연대를 외치던 사회주의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고 소비에트에도 매우 협조적이었으나 스탈린은 대숙청으로 유대인 사회주의자들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쳤고,[4] 그래도 미련을 가지고 있던 독일 공산당 조직명단을 독소불가침조약 이후 히틀러에게 고스란히 건네주어 잠입해있던 독일계 유대인들이 체포되게 만들었다. 이는 전후 유대인 사회에서 강한 친미 반-소비에트 기류를 가지게 만들었고 사회주의자의 연대고 나발이고 믿을 놈은 우리밖에 아무도 없다는 믿음을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관계를 영원히 파탄관계로 만들었다. 팔레스타인 인들의 경작권을 존중하여 키부츠 회원으로 받아들였다면 현지 농경에 풍부한 경험을 지닌 팔레스타인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고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도 유대인들이 소유권을 사온만큼 어차피 바쳐야할 지대가 사라지니 둘이 서로 win-win할 공간이 있었다. 그랬다면 둘 사이의 관계는 지금과 아주 달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 유대인들은 타민족은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집단 PTSD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후에 서로 원한을 쌓으면서 막장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스라엘인들은 소유권을 가졌고 자영농을 할 생각이었으니 팔레스타인들의 소작권을 취소했고, 대대손손 소작을 지어먹고 살던 팔레스타인 인들의 극렬한 분노를 사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소작농이 마름이나 지주에 비해 절대 약자이긴 했으나 지주마름이 소작농의 땅을 함부로 뗄 수는 없었다.[5] 떼는 그 순간 굶어죽으란 소리나 마찬가지므로 그 얌전하던 소작농이 너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낫들고 뛰어오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들어 괴롭히고 싶어도 경작하기 곤란한 곳으로 땅을 옮긴다거나 땅을 조금 줄이는 식으로 처벌할 수밖에 없었다. 소작농에게는 그만큼 경작권이 중요한 문제였는데 키부츠는 유대인만 배타적으로 가입되는 협동농장 시스템상 팔레스타인 인들의 경작권을 깡그리 무시함으로서 공존의 가능성을 없앴다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팔레스타인 인들의 입장이 이렇다는 거고 이스라엘의 입장은 '그렇다고 해서 팔레스타인 인 전원이 소작농은 아니잖은가'로 대변된다. 포그롬이 시작될 시 팔레스타인 전체인구는 30만에 불과했고 이 당시에도 아랍인들에게 핍박받으면서도 수천 년간 버텨온 유대인은 1만 2천 정도가 있었다. 나머지가 다 아랍인인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이곳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 주요원인이자 영원히 전쟁을 유발하는 헬게이트, 그러면서도 중세를 버텨낸 성지관광도시 예루살렘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기독교도, 드루즈교인도 몇만 단위로 있었다. 현존 팔레스타인 인 선조의 70% 이상이 영국이 발주한 기반시설, 도시공사가 불러온 호경기에 끌려 외부에서 들어온 아랍 인들이다.[6] 둘 다 선주민의 서사[7]는 있지만 혈통적으로는 대다수가 이주민들[8]이고 그 이주민들이 선주민들의 서사에 동화된 것에 가깝다.[9]

물론 아랍인들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이사한 한국인들하고 외부에서 들어온 일본인들하고 같냐? 라는 식으로 따지겠지만 유대인도 엄연히 더 오래 현지에서 버틴 사람들이 있었고, 아라비아 반도도 아니고 동아시아 전체보다도 크고 수많은 민족이 사는 중동 전체가 다 아랍땅이라는 아랍 민족주의도 시오니즘과 도낀개낀인 내수용 주장일 뿐이다.[10] 한편 그렇다 쳐도 이스라엘 이주민들이 팔레스타인 선주민들을 깐 역사적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이 서사가 진실이니까 이주민들이 이 서사에 동화되는 것이다. 이 동네를 이해하기 위한 대전제를 말하자면, 절대 선이 없다는 거다.[11] 전부 다 자기가 맞다고 할 근거들이 다 있다. 그래서 중재가 극도로 어렵고 싸움이 극렬한 것이다.

이 동네의 역사이해에 있어서 대규모 인구이주가 없었던 동아시아 서사를 대입해 이스라엘 아랍인은 친일파니 일제니 이런 사고방식은 애초부터 틀려먹었다. 돌아갈 국가가 있는 식민제국과 피식민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내부의 종족 분쟁으로 보는게 사실에 부합한다는 말이다. [12]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젊은 이스라엘인들이 외부로 떠나가기 때문에 키부츠에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졌다. 젊은 이스라엘인들이 키부츠에 합류하지 않는 이유는 크게 봐서 두가지인데 하나는 귀농 문서에도 드러나있는 텃새, 키부츠의 운영위원회를 차지하고 있는 노인들의 텃새사회주의 공동체를 표방하고 있는 키부츠에서는 상상을 초월하게 귀찮다. 두번째로는 이 노인들은 노동력이 거의 없는데 분배금은 똑같이 받아간다. 키부츠초기 모델에서는 일할 수 있는 나이대의 사람들이 절대 다수여서 노인들에게 분배금을 후하게 줘도 노인복지라고 넘어갈 수 잇었으나 지금 키부츠는 노령화가 극심해 들어가면 농촌의 젊은 이장들처럼 온갖 잡스러운 일부터 어려운 일까지 본인이 다 해야한다. 그러면서 분배금은 똑같이 받아간다. 다소 개혁해서 젊은이에게 4배 정도의 월급을 제공하는 키부츠도 많이 늘었지만 키부츠의 운영은 기본적으로 1인1표의 투표제이고, 중요한 자산운용이나 일분배에서 젊은이들에게 불리한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연히 젊은이들이 기피할 수밖에 없다. 결국 여느 선진국의 농촌들처럼 노령화와 외국인 노동력에 의존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13]

이런 상황을 맞아 팔레스타인 인들은 그래서 키부츠의 소유권은 인정할테니 제발 경작권이라도 돌려달라고 하거나 차라리 임노동자라도 써달라고 요구하는데 오랫동안 이스라엘은 외국에 이상한 홍보를 해서 자칭 - 자원봉사자 -로 불리는 저임금 노동자를 대량으로 데려와서 경작하지, 그들보다 더 저임금인 팔레스타인 인들은 절대 쓰지 않았다.[14] 이는 팔레스타인 인들을 더 열받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심지어 이렇게 경작할 사람이 없는데 키부츠의 절대 수는 더 늘어나기만 하고 서안지구에 정착지가 요새처럼 계속 박히며 가자지구 바로 바깥에도 키부츠가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그나마 네타냐후 정부도 이건 도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가자지구의 약 7천 명의 팔레스타인 임노동자 쿼터를 배분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로서 가자지구에 상당히 숨통이 트이게 되었고 이걸 근거로 하마스도 이젠 이스라엘과의 공존을 꾀하는 노선으로 틀었다는 기대를 가지게 만들었다. 물론 그 기대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으로 산산조각 났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7천 명이 가자지구를 왕래하면서 스파이 짓을 통해서 지도를 그리고 방어위치를 모두 정찰해서 이스라엘 본토에 대한 완벽한 기습을 꾀할 수 있었다고 보고 취업허가를 모두 취소하고 전원 체포하였다. 이들은 아직 전쟁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가자지구로 추방될 예정이다.

3. 국제사회의 압력

한편으로 국제사회는 서안지구내에 키부츠 건설을 중단하라는 압력이 거세다. 아랍 연맹은 당연하고 미국마저도 추가적인 키부츠 건설로 팔레스타인 인들을 자극하지 말라고 한다. 바이든 등 서방이 밀고있는 2국가 협정에선 서안지구를 팔레스타인령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그게 비현실적인건 정작 팔레스타인 인들도 안다. 오슬로 협정에서 서안지구의 지위는 매우 애매하게 내버려뒀는데 구체적으로 각자 이미 차지하고 있는 지역은 각자 행정권과 경찰권을 인정하되, 서안지구 90%에 해당하는 미개발지는 행정권을 정하지 않았고 경찰권만 이스라엘이 행사한다. 팔레스타인은 이것을 우리것으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이스라엘은 아직 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건 아라파트라빈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다. 서로의 강경파들을 자신들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니 일단 평화부터 만들고보자고 둘이 짜고 일부러 애매하게 놔둔채로 협정을 맺은거다. 나머지는 차차 해결하자는 의도였는데 이스라엘의 극우가 이츠하크 라빈을 암살하고 팔레스타인쪽에서도 하마스등 강경파가 아라파트가 굴욕적인 협상을 했다고 뛰쳐나가 뒷방 늙은이로 만들면서 후속 협상이 지연되면서 오늘날도 이 모양이다.

양자 현상유지를 천명한 오슬로 협정 이후 30년이 지났고 그 동안 유대인 인구는 2배, 팔레스타인 인구는 3배가 늘었다. 이스라엘만 정착지를 건설한게 아니라 팔레스타인 인들도 꾸역꾸역 나가서 공장짓고 상가지으면서 개척을 해나가고 있고 IDF는 껀수 잡히면 트랙터로 계속 밀어버리고 있다. 이를 대비해 아라파트네타냐후도 협상했었고 아라파트사망 후 마흐무드 압바스와도 나름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었다. 밖에서야 둘이 죽도록 싸우니까 둘다 정지해! 같은 소리를 하는데 안에 사는 둘은 서로 인구가 늘다보니 30년전 협정을 도저히 정지시키지 못할 상황인 것이다. 이스라엘 쪽 입장에서야 어찌하던지간에 젊은이들은 늙은이들이랑 섞이기 싫어하니 늙은이들 키부츠는 외노자로 돌리고 젊은이들은 그들끼리 모아서 새로운 키부츠를 꾸준히 건설해야할 상황이기도 하고, 팔레스타인인 입장에서도 서안지구를 개척하고 그 자치권을 확보하는 문제는 결국은 협상할 문제다. 어차피 키부츠 짓는건 못막으니 IDF가 트랙터로 상가를 밀어버리는 짓은 막아야하니까 말이다. 결국 서로 하나 하나씩 주고받는 협상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15]

가장 좋은건, 서로 손을 잡고 키부츠소유권을 공유하면서 개발하는 것이다. 졿던 싫던 앞으로도 영원히 둘은 같이 살아야하니까 말이다.[16] 물론 이런 온건론이 다 그렇지만 양쪽 강경파로부터 무진장 공격받는다. 특히나 이번 전쟁같은 악재가 발생한 상황에서는 논의가 한동안 진전될 수가 없을 것이다.

4. 특징

키부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기본적인 조건은 어떠한 사유재산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동생산과 공동분배가 기본적인 원칙이니, 농장에서의 생산물들과 생활 용품들은 모두 공동 소유이다. 그리고 사업소를 포함한 집단농장의 외부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모두 키부츠 공동체에 귀속된다. 키부츠는 동구권의 공산주의 집단농장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서구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협동조합 운동에 가깝다. 20세기에 상당한 성공을 거뒀고,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둔전병단농촌으로 기능하면서 자급자족유격전을 동시에 추진하는 업적을 남겼다.

5. 단점

1990년대부터 점차 쇠퇴하고 있다. 키부츠의 경영에 동참하는 회원들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니, 농업임업어업에서 상업공업으로 경제사업을 조정하면서 외국인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를 점점 확대하고 있다.

사실 자원봉사라는 말도 옛말인 게 과거와 달리 해외에 사는 유대인들이 자원봉사 겸 이스라엘 체험 형식으로 키부츠에 머무는 것이 매우 드물어지고 있다. 시온주의가 강렬했던 2차대전 시기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를 하지 못해도, 이주 전 테스트, 혹은 자식에게 경험을 쌓게 한다는 의미로 키부츠 참여를 권했는데 현대의 재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지지가 과거만은 못하며, 지지한다 해도 인생의 수 년을 바쳐 자원봉사할 만큼 민족주의 의식이 강하지 않다. 한편으로 외국으로 나갈 방법이 없었던 시기에 외국인들이 이 유대인들에 대한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꽤 많았는데 호주가 시행한 워킹 홀리데이처럼 재미있고 신기한 체험을 한다고 광고해 단순노동을 할 단기 일꾼을 외부에서 속여서 데려온 것에 가깝다.

한국이나 일본인들도 혹해서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한국같은 경우 교련 교과서같은 곳에서 보이던 친이스라엘적 왜곡으로 이스라엘 발전이 키부츠를 통한 것이라 우리네 새마을 운동처럼 배워야 한다는 투로 써대고 언론도 보도한 게 컸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는 인건비가 너무 싸고 힘들고 키부츠 실태도 많이 알려져 한·일 같은 나라에서 인기가 전혀 없어져서 현재 대부분의 키부츠는 동남아인 외국인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다.

5.1. 하마스의 기습 침공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발단에 많은 수의 태국인 사망자가 존재했는데, 팔레스타인 인들은 이 외국인들도 똑같이 증오한다. 이스라엘 정착지를 늘리고 운영해주는 원동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팔레스타인 인들도 키부츠의 경작권을 노리고 있기에 더더욱 미워한다. 태국인들도 얼마나 미워하는지 배에 한 방 쏴서 고통스러워하는 태국인을 두고 가래로 수 차례 내려찍는데, 머리를 노리고 찍었으나 어깨를 잘못 찍어 고통스러워하는 꼴을 보고 즐거워하다가 끝내 계속 내려찍어 목을 떨어뜨릴 정도로 증오에 사무쳐 있다. 이런 짓을 해서 겁을 줘서 팔레스타인 땅에 외노자들이 못 오게 만들면 이스라엘 놈들이 결국 키부츠를 못 만들거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쓸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17]

현재까지도 키부츠 스스로는 이 외국인들이 어디까지나 자원봉사자들이고, 이들은 키부츠 인들보다 단순노동을 하는데다가 체재비에 불과하니 낮은 임금을 받는게 당연한 것이라고 정당화하지만, 그거 다시 말하면 우리는 무급노예를 부린다는 말이 된다. 협동농장 시스템에서 저임금을 주면서 기술숙련도 안 시켜주는 것은 가장 좋게 말해봐야 노동력 착취이며 자칫 잘못하면 바로 노예제이야기가 나온다.[18] 그냥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를 쓴다고 말하는 게 키부츠 스스로에게도 가장 정치적 타격이 덜하다.

키부츠의 치안유지는 청원경찰원격감시민방위연좌제를 활용하는 인보()에 의존하고 있다. 서부영화에서 단골로 나오는 마을 보안관 또는 대학교 캠퍼스대학본부 자치경찰을 떠올려야지 이해하기 쉬운데, 오늘날의 이스라엘 농촌은 오스만 제국탄지마트에 편승하면서 바닷가와 변방(邊方)의 황무지습지를 개척하는 방식으로 악착스럽게 재건했으니, 산적들과 떼강도와 테러단의 습격에 취약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경찰도 키부츠들을 매의 눈으로 순찰하고 있다. 그래도 키부츠는 테러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청장년들에게 선호되기도 한다. 하지만,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하마스는 키부츠에 마구잡이로 공격을 가했기에 이런 안전도 꼭 절대적인 게 아니다.

키부츠의 성범죄는 꽤나 심각한 편으로 아예 처벌조차 안되는 해외토픽급 성추행강간이 가끔 일어나기 때문에 1988년야엘 그린버그 윤간 사건과 1990년대성폭행 사건들과 2000년대성희롱 사건들을 매우 세심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상술한 이스라엘 경찰이 키부츠를 매의 눈으로 순찰한다는 건 키부츠를 외부로부터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키부츠 내에서 묻히는 범죄가 있는지 뒤지기도 한다는 의미다.

위의 말을 보면 알겠지만 사실상 작은 사회 그 자체이며 연좌제를 실시하는걸 보면 알겠지만 유대인에 대한 우월주의적 사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현대인권따위가 지켜질거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키부츠 촌민들 가운데 정치력이 강한 사람에게 피해를 당한 여성들은 유대인 여성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된 처벌이나 보상을 기대하는건 사실상 어렵다. 외국인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여성 혼자 이스라엘 키부츠를 여행하거나 취업하는 것은 결코 권하지 못할 일이다. 여성 아니라 누구든지 지금처럼 팔레스타인 인들의 분노가 커져가는 상황에서는 첫번째로 위험해서 가면 안되고, 두번째로 가봐야 노동착취당하니 가면 안되며,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 인과 유대인이 서로 싸우고 있는 최전선에 낄 이유가 없으니 절대 가면 안된다.

태국인들이 키부츠에서 많이 일하고 있는데 태국에서 일하는 것보다 몇 배는 벌 수 있기에 거액을 바쳐가며 서로들 오려고 한다.하지만, 상술하던 대로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하마스는 키부츠에 마구잡이로 죽이고 태국인들도 잡아갔던 만큼, 수천 명이 넘는 태국인들이 겁에 질려 태국으로 돌아갔다.

6. 여담

미국의 유대인 정치인 버니 샌더스가 확고한 사회주의적 신념을 갖게 된 계기가 키부츠다. 1964년 첫 부인과 결혼 직후 이스라엘에서 일정 기간 머물렀는데 그때 키부츠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키부츠 공동체를 보면서 인간의 성실함을 믿으며 타협과 연대정신에 기반한 사회주의는 가능하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이 속한 미국 민주당, 본인의 지지기반과 유대계 정치 로비집단간의 굉장히 복잡미묘한 관계 때문에 말을 아껴서 정확하겐 알 수 없는 주제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과 오히려 이 시절 이후 시오니즘에 대한 애착을 버린 점을 보아 마냥 긍정적인 경험만은 또 아니었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 #

자세하게 말하자면 버니 샌더스 본인은 유대인이지만 오히려 이스라엘 문제만 빼고 나머지 모든 면에선 진보적인 편인 나머지 미국 유대인 주류와 이들을 강하게 의식하는 나머지 민주당 주류와 달리 애초에 정치 경력도 대부분을 무당으로 보냈고 근 10년 동안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성장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더 비판적으로 변한 편이며 막상 본인의 핵심 지지계층도 나머지 민주당 주류와 달리 확실하게 좌파로 기울어진 편이다. 샌더스는 이런 본인이 속한 정당과 민주당 입당 이전 독립 무당파 정치인 시절 쌓아올린 지지층 사이에 복잡한 정치적 구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 관련 이슈 자체에 말을 아끼는 편이었으나 본인의 인지도도 올라가고 각종 이스라엘 관련 이슈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온건하지만 확실히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당신은 시오니스트입니까?'란 질문을 받자 '이스라엘이 존재할 권리는 믿지만 미국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자간 더 균형잡힌 역할을 해야한다'며 대답을 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정치 활동 경력상으로도 주변인들의 회고 등을 참조해 보면 오히려 키부츠에 가기 전에는 그 시절 또래 진보 유대인 청년답게 시오니즘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막상 키부츠에서 생활한 후 시오니스트 단체들을 비롯한 다른 유대인 중심의 운동권하곤 연줄을 끊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젊었을 땐 키부츠에서 잠깐 일했지만 나중에 이스라엘에게 비판적으로 돌아선 영국의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자서전에서 이스라엘과 사회주의 시오니즘에 대해 품고 있던 낭만이 현지에서 직접 만난 이스라엘인들의 차별적인 성향은 물론이거니와 비단 아랍인에 대한 차별과도 별개로 서방에서 나고 자란 유대인이었던 자신에게 이스라엘 영구 정착을 강권(키부츠 설립의 근본 목표)하면서도 뜨내기 이방인 취급하는 분위기에 대단히 실망했다고 회고했다. 지금도 사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대인적 정체성을 강하게 자각하고 살면서 막상 이스라엘 현지에 가본 이후 같은 '유대인'이란 피상적인 정체성이 감추고 있던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너무도 다른 문화와 사회분위기에 대한 실망과 그리고 '너도 유대인이라면 무조건 이스라엘에 살며 기여해야 돼'란 식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질색하고 오히려 이후 이스라엘에게 거리를 두게 되는 유대인들도 꽤 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하면 샌더스는 키부츠에서 사회주의적 노동관은 강하게 영향을 받았어도 그 이면인 전쟁통의 이스라엘 정착민 사회의 배타성이나 강압성엔 상당한 실망을 느끼고 키부츠란 기관이 상징하는 사회주의 시오니즘의 시오니즘 부분에 대한 애착은 버린 걸로 보인다.

키부츠에서는 공동 육아 개념도 포함되었는데 이 때문에 근친혼에 대한 거부감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키부츠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베스터마르크 효과 문서 참조. 조사 결과 키부츠에서 성장한 사람들 중 같은 키부츠 출신 이성과 결혼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19]
[1] 오스만 튀르크령 시절부터 이미 팔레스타인은 부자들이 살만한 땅이 못 되었다. 일단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보다도 더한 사막 한가운데 깡촌인데 이집트 총독은 사람이 바뀌던 말던 지속적으로 오스만 술탄의 지배에 반란과 저항을 하면서 팔레스타인은 전화에 휩싸여 있어서 아랍인 지주들이 거기 살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이집트가 영국령으로 넘어가면서 팔레스타인이 최전선이 되고 예루살렘에 유대인이 몰려들면서 치안마저 붕괴 직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차대전 패전으로 영국령으로 국가의 소유권이 뒤바뀐다는 점과 대두하는 아랍 민족주의는 투르크인 지주에게도 소유권 몰수가 발생하지 않을까하는 불안요소로 작용했다. 결국 레바논의 부재지주가 팔레스타인의 땅을 산게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아랍계와 튀르크인 지주층이 일단 이주하면서, 혹은 이주해서 부재지주가 되고 멀리 있는 자기땅이 관리가 안 되니 유대인들에게 팔아 버린 것이다.[2] 유대인 최초 정착지역들이 레바논과 시리아 접경지, 해안선에 밀집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안지구는 요르단, 가자지구는 이집트의 부재지주들의 것이어서 접촉할 방법이 없어 매입하지 못했다. 다만 남부 사막지대는 베두인 족의 것이었는데 원래 아랍은 베두인을 말하는 것으로 아직까지도 아랍인들은 자신을 아랍인이라 칭하지 않고 베두인을 아랍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말해, 동족 의식이 없다. 그리고 그 베두인 족은 UN 영토분할 투표에서 자기들을 오랫동안 천대하고 탄압했던 아랍인들이 밉기도 하고 유대인들은 베두인을 포섭하기 위해 경제지원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찍었고 그래서 가자지구 동편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사막 지역이 유대인 지역으로 편입된 것이다. 아랍인들은 유엔의 영토분할안부터 문제시 삼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거 주민투표로 결정된 것으로 달리 대안이 전혀 없었다. 불만 있으면 수천 년 간 아랍인들이 베두인들을 차별하고 탄압하지 말았어야 했다.[3] 베두인과 아랍인들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아랍인들은 도시와 농경을 중심으로 하다보니 도시와 도시 사이의 상단을 운영했다. 그런데 최단경로가 사막이기 때문에 베두인 족의 경로를 지나가야 하고 그러다보니 베두인 족 중 가장 강한 부족과 용병계약을 해서 카라반을 운영했다. 안 그러면 털어버리니까, 약한 부족과 계약해도 강한 부족이 와서 털어버리면 저항을 못하니 당연한 일인데 이 강한 부족에 돈=식량이 흘러들어가니 더 강해진다. 베두인 부족이 강해지는만큼 통행료 성격의 용병료가 계속 오른다. 그래서 용병료 내기 싫은 아랍인들은 사막을 우회하는 경로로 카라반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베두인은 우리 안 써? 알았다는 식으로 사막을 나와서 상단을 공격해 모두 죽이고 재화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상단을 터는 김에 주변 농경지도 털고,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유목민 vs 농경민의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아랍인들이 그러니 베두인들을 도둑놈·약탈자라고 생각해서 증오하는데, 베두인들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무역과 경호업으로 먹고 사는데 우릴 써주지도 않지. 우리 경쟁 무역로를 뚫지. 우리보고 굶어죽으란 말이냐? 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사막에서 나와서 무역로를 털었다. 결국 견디다 못해 다시 용병계약을 하는데 감정이 좋을 리 없다. 그런데 유대인은 지중해를 통해 무역을 하지 사막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지중해에서 가지고 온 상품을 베두인과 거래했다. 영업구역 분쟁이 안 생기고 사막에 없던 물자를 공급해주니 베두인 역시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었다. 거기에 유대인들이 현지를 잘 모르고 아랍인들과 분쟁이 생기자 원래 중심 생업 중 하나가 용병업이던 베두인을 고용해 호위를 맡기기 시작했다. 우리 물건도 별 말 없이 잘 사주고, 우리 부족 실업자들까지 고용해주는 사람들이니 유대인과 베두인 사이가 안 좋을래야 안 좋을 수가 없으며 반대급부로 아랍인과의 사이는 더더욱 안 좋아졌다. 지금도 아랍인들은 베두인들을 사람 취급 안 한다. 이 같은 관계는 시나이 반도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령일 때 이스라엘을 가장 열심히 빨아준 현지인은 시나이 베두인들이었다.[4] 대숙청 당시 유대인만 휩쓸려나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순수한 슬라브인조차도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적이 있다, 더 나아가 외국인과 만난 적이 있다, 외국에 친척이 있다, 농민 출신이 아니다라는 의혹만으로 처형당하던 시기에 유대인은 어떤 형태로건 숙청당할 건덕지가 너무 많아서 말단 병사나 농민이 아닌 한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5] 소작은 빌려주는 걸 붙힌다. 돌려받는 걸 뗀다고 표현한다.[6] 이러한 역사 때문에 많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를 마치 '유대 식민자들이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건국한 이스라엘이 원주민 팔레스타인 인들을 탄압한다'라는 과장된 주장을 반유대주의로 여기고 있다.[7] 유대인 측에서는 시오니즘·구약성경,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아랍민족주의·제국주의 점령론이 있다.[8] 유대인은 물론이고 아랍인들마저 대다수가 영국에 대한 할양 이후 들어온 이주민들이다.[9] 그리고 이 서사는 대개 상대민족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킨다. 아랍령일 당시에 버티고 있던 그 3만 유대인들이 수천 년간 당해온 수모가 이주해들어온 유대인들에게 전달되는 것에 대해 아랍인들은 전혀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이슬람은 관대하다"라고 되뇌이고 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다. 그 많던 유대인들이 3만 명만 남을때까지 반복되는 학살과 강간, 차별적인 판결, 재산 몰수, 회당 입구를 1미터로 제한하는 유치하고 치밀한 굴욕 등을 수천 년간 괴롭혀온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리고 그 서사와 그로 인한 아랍인들에 대한 불신과 공포 역시 이주해들어온 유대인들에게도 "똑같이" 전달된다. 안그래도 집단적인 PTSD에 시달려서 터전을 버리고 들어온 사람들에게 여기에도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은 절대로 국가의 주도권을 놓으면 안 된다는 집착을 가지게 만드는 원인이다.[10] 당장 사막지방 원주민들인 베두인들이 수천 년전부터 지금까지도 아랍인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는지 보면 안다. 그래서 베두인들이 팔레스타인 분할 투표때 아랍인이 아니라 유대인 쪽에 붙은 것이다.[11] 전문가들조차 이 선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널려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산 사람들은 친유대 서사만 알고,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산 사람은 친 팔레스타인 서사만 안다. 둘 다 억울한 사람들이 있고 둘 다 나쁜 놈이 있으며 둘 다 명분이 있다. 이걸 다 알질 못하면 어느 한쪽 편에 가담해 싸움을 부추기는 거 밖에 안된다.[12] 물론 영국 식민지배 이전부터 아랍계 주민들이 더 높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 #.[13] 이스라엘은 단기 외국인 노동자 비중이 높다. 유대인이 아닌한 이스라엘에 이주할 이유 자체가 없으며 유대인들도 이스라엘로의 이주를 기피한지 오래다.[14] 이 자칭 자원봉사자 놀음의 내부논리는 키부츠가 원래 사회주의 협동농장 시스템으로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배분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약상 절대로 임금노동자를 써서는 안된다. 그래서 자원봉사자라고 칭하는 것인데.유대인이 아니므로 장기거주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반드시 돌아가야할 외국인이거나 정착할 유대인이어야한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인은 돌아갈 사람들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니기에 안쓰는 것이다. 물론 이건 유대인들의 내부논리고 실상은 그냥 저임금 노동자를 지주가 부려먹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니 팔레스타인 인들 보기에는 유대인놈들끼리 인종차별을 말장난한다고 여겨 더 화나게 할 뿐이다.[15] 이렇게 말하자면 이 둘이 처음부터 온건파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츠하크 라빈하가나의 유격대 출신이고 아라파트는 유대인에 대한 과격한 테러행위로 힘을 모은 사람이다. 민병대는 언제나 전쟁범죄의 의혹을 받기 쉬운데 그 중에서 민병대 유격대는 잡히면 즉결처형을 해도 아무 문제없는 전쟁범죄자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종족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자기 영역이 아닌 남의 영역을 다니는 부대가 적대 부족의 영역에 왜 들어가겠는가? 대민지원을 하러?, 아라파트도 떨어뜨린 비행기와 터트린 폭탄이 족히 몇십개에 이른다. 하나 떨어뜨릴때마다 몇백명은 족히 사라진다. 둘다 눈이 돌아가 끔찍한 짓을 저질러본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끔찍한 원한이라도 죽이고 또 죽이다보면 만족함을 얻는 순간이 오고, 나이들어 혈기가 빠지고나니 그 회한에 빠져 자신과 똑같은 실수를 하면서 사라져갈 젊은이들의 목숨이 아까워 협상할 마음이 든 것에 가깝다. 물론 아직 혈기넘치고 충분히 죽이지 못한 젊은이들은 복수를 외치면서 그 둘을 저버렸지만,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말했듯이 이미 죽은자의 핏값을 분이 풀릴때까지 받아내려고 하면, 살아있는 모든 유대인과 팔레스타인들을 다 죽여도 못 갚을 것이다.[16] 현재 국제사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2국가 체제가 온전히 자리잡을 가능성도 낮지만, 만약 실현된다 해도 이스라엘 안에서 아랍인이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 이스라엘 인구 900만 중에 유대인은 600만 이스라엘 아랍인이 300만이다. 이건 투표권이 없는 팔레스타인 인 440만을 제외한 숫자다. 이러니 2국가 해법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협력한 아랍인이 항거한 아랍인에 비해 벌을 받는 형태의 협정이 된다. 팔레스타인 인 이라는 유전형질은 없다. 이스라엘 아랍인이나 팔레스타인 인이나 둘다 똑같은 아랍인이고 똑같은 수니파 이슬람에 똑같이 그 동네서 살아왔다. 땅 소유권을 가지고 버틴 자영농들은 나크바때 강제이주되지도 않아서 선주민 비중은 이스라엘 아랍인이 오히려 더 높다. 단지 이스라엘에 협력적인지 아닌지로 갈리는데 재미있게도 이스라엘 아랍인은 팔레스타인 인들을 증오하고 팔레스타인 인들도 이스라엘 아랍인들을 증오한다. 한쪽은 이스라엘의 하수인, 한쪽은 자기 사는 동네 머리위로 로켓을 날리는 미친 광신도들로 자기들을 무슨 배신자랍시고 똑같이 죽이니 미워한다. 이런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인에 서안지구를 다 떼주면 이스라엘 아랍인들이 이번에는 쫒겨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땅 소유권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이스라엘 아랍인이 되었기 때문에 선주민 비중은 이스라엘 아랍인이 더 높은데 영국이 발주한 공사보고 이주온 외부 뜨내기들에게 대대손손 물려받은 땅을 줄바에야 총을 들 사람들이다. 이 아랍인들끼리 붙여놔도 당연히 내전 일어난다. 둘다 미워하는데다 300만대 440만이라 숫적으로 어느 한쪽이 압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사는 동네가 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국제사회의 화약고인 이 동네는 이해관계와 정의관념이 헬게이트급으로 실타래가 꼬여있다.[17] 온건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아랍인들은 키부츠를 부수는 건 비현실적인 목표로 보고 먼저 어차피 부족한 키부츠의 노동력 수급상황을 보고, 경작권을 가져오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키부츠의 내부 논리상 일단 경작권을 가져오면 다음 단계로 소유권을 공유하는 투쟁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키부츠는 현재도 법적으로 사회주의 공동체로 직접 노동하는 자들의 공유재산이다.[18] 장기간 거주하면서 아무리 일을 해도 단순노동밖에 할 수 없고 원천적으로 소유권 획득이 불가능하며 아무런 기술숙련도 익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노동의 대가는 "자원봉사"이므로 생존할 수 있는만큼만 받는다. 매우 교과서적인 노예제다.[19] 이스라엘이 성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이긴 하지만 키부츠에서 양육하는 영유아들은 나이차가 얼마 나지 않으면 남녀 할 것 없이 단체로 목욕을 시키는 등 남매처럼 양육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