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07:37:38

키쿠코 비

도쿠가와 키쿠코에서 넘어옴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노부히토 친왕비 키쿠코
宣仁親王妃喜久子
파일:FDN4VTUVgAEEQxg.jpg
본명 도쿠가와 키쿠코 (徳川喜久子)
출생 1911년 12월 26일
사망 2004년 12월 18일 (향년 92세)
배우자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자녀 없음
학력 여자가쿠슈인 본과 졸업[1]
오시루시 거북패랭이꽃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노부히토 친왕과의 결혼2.3. 쇼다 미치코와의 갈등과 화해2.4. 말년2.5. 여성 천황 긍정
3. 황실 가계도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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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다이쇼 덴노의 3남인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아내(친왕비).

2. 생애

2.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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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함께

할아버지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에도 막부를 비롯해 일본 역사상 마지막 정이대장군이다. 아버지 도쿠가와 요시히사(德川慶久) 공작은 요시노부의 7남이다.

외가는 방계 황족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이다. 외할아버지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有栖川宮威仁親王)은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마지막(10대) 당주이다. 다케히토 친왕의 자녀들 중에서 차녀인 미에코 여왕(實枝子女王)만이 요절하지 않고 성장하여, 요시히사 공작에게 시집갔다.

키쿠코는 요시히사와 미에코의 차녀로 태어났다. 요시히사와 미에코의 장녀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차녀의 탄생을 기뻐했다고 한다. '키쿠코(喜久子)'라는 이름은 할아버지의 이름 요시노부(慶喜)에서 喜를, 아버지의 이름 요시히사(慶久)에서 久를 따서 붙여진 것이다.

외가인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은 대대로 서예를 가업으로 삼아, 대대로 '아리스가와 류 서도'라는 독특한 서예 기법도 전수해 오고 있었다. 미에코는 키쿠코에게 '아리스가와 류 서도'를 전수했고, 키쿠코는 학교의 서예 수업에 참가하지 않고 '아리스가와 류 서도'만 연습했다.

키쿠코도 당시 일본 황족과 화족의 딸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가쿠슈인을 졸업했다.

2.2. 노부히토 친왕과의 결혼

파일:FDN4ThIUUAEgSkm.jpg

1930년, 키쿠코는 7살 연상인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과 혼인한다. 다이쇼 덴노세습친왕가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이 10대에 막을 내리는 것을 유감스러워했다. 그래서 3남 노부히토 친왕을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나 다름없는 키쿠코와 혼인시키고, 노부히토 친왕의 미야고(궁호)를 아리스가와노미야의 구 명칭이었던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로 명명한 것이다. 또 키쿠코의 부계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가문이었기 때문에, 당대 일본 황실에서 지향하던 공무합체(公武合體) 혼인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사다코 태후는 맏며느리 나가코 황후에게는 어려운 시어머니였고, 시집살이를 시켰다. 그러나 둘째며느리 세츠코 비, 셋째며느리 키쿠코 비, 넷째며느리 유리코 비는 귀여워했다고 한다.

노부히토 친왕과의 결혼 생활에서 자녀는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노부히토 친왕에게 동성애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다.

2.3. 쇼다 미치코와의 갈등과 화해

1958년, 아키히토 황태자가 쇼다 미치코와 혼인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결혼은 황실의 오랜 전통을 깬, '평민'과의 '연애결혼'이었다.

이미 11년 전인 1947년 5월 3일에 신헌법이 시행되면서 신분제가 폐지됨에 따라 화족이 지위를 잃었고, 동년 10월 14일엔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이 황적이탈하여 평민으로서 구황족이 되었다. 그러나 구황족과 화족들의 콧대는 여전히 높았고, 그들은 분노하여 미치코를 반대했다. 사실 말이 평민이지, 미치코의 친가는 대재벌가이며, 외가는 옛 화족이고, 미치코 본인의 재능과 미모도 뛰어났다. 그런데도 오직 '평민' 출신이라며 미치코를 미워하고 천대한 것이다.

키쿠코 비도 큰형님 나가코 황후, 작은형님 세츠코 비, 야나기하라 뱌쿠렌[2],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3], 노부코의 언니이자 이방자의 친정어머니인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 등과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아키히토 황태자의 아버지 쇼와 덴노가 허가해서 무마된다.

미치코는 시집온 후로도 혹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렸다. 노부히토 친왕은 미치코 황태자비의 친정아버지를 무시한 적이 있고, 키쿠코 비는 미치코 황태자비가 유산하자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작은형님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는 마음이 누그러져, 나중에는 미치코 황태자비와도 잘 지내게 된다. 반면 큰형님 나가코 태후는 죽는 순간까지 큰며느리 미치코 황후를 미워하고 괴롭혔다.

2.4. 말년

자녀가 없던 키쿠코 비는, 대신 조카 아키히토 황태자의 세 자녀 나루히토 친왕, 후미히토 친왕,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를 손주처럼 귀여워하며 애정을 쏟았다. '아리스가와노미야류 서도'를 후미히토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어린 후미히토는 서예를 배우며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서예 교습을 통해 작은친할머니 키쿠코 비와 조카손자 후미히토는 더욱 친해졌다.

또한 키쿠코 비는 사야코 공주도 각별히 총애하여, 그녀의 약혼과 결혼 과정을 관심있게 지켜보기도 했다. 사야코 공주는 2004년 무렵부터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키쿠코 비의 사망으로 인해 결혼식은 2005년으로 미루어졌다.

2.5. 여성 천황 긍정

1965년 후미히토 친왕이 태어난 이래, 일본 황실에는 줄줄이 공주들만 태어나고 있었다. 왕자 출산을 가장 기대받은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도, 결혼하고 8년 동안 유산으로 고통받다가 2001년 12월에야 간신히 아이코 공주를 낳았다. 그래서 여성 천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코 공주가 태어난 직후인 2001년 12월, 키쿠코 비는 주간지에 글을 썼다. 그 글에서 그녀는 아이코 공주의 탄생을 기뻐하는 동시에, "여자천황 계승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키쿠코 비는 "과거에도 여성 천황들이 있었다. 그러니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근거를 들었다.한편 갓 출산마사코 황태자비에게 "다음에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압박하는 것에 반대하여 펼친 주장이기도 하다. 주간지에 쓴 글에서 키쿠코 비는 "억지로 자녀를 강요하면 황새가 기분 나빠한다."라면서 우회적으로 이러한 압박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보수파들은 "키쿠코 비는 여성 천황[4]에 대해 찬성했지, 여계 천황[5]에 대해 찬성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에서는 여성 미야케(황족 가문) 허용 등을 적극적으로 논의하였고, 당시 여론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아베 신조 당시 관방장관을 위시로 한 극우들의 강한 반발에 지연되었고, 2006년 9월 6일 키코 비늦둥이 고명아들 히사히토를 낳으면서, 여성 천황 논의는 잠잠해져 버렸다.

하지만 후미히토의 장녀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기저로 가라앉아 있던 후미히토 일가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폭발했다. 이에 따라 여성 천황 논의도 다시 급부상했다. 2019년 10월, 나루히토 덴노의 즉위식 다음에 나온 최신 여론조사 결과, 일본 국민의 80%가 여성 천황에 찬성한다고 했다.[6] 참고로 2000년대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여성 천황 허용에 대해서 논의하던 무렵의 찬성 여론은 60% 정도였다.

3. 황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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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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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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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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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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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4. 여담

할아버지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드라마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촬영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1]가쿠슈인 여자중등과, 여자고등과 통합과정[2] 다이쇼 덴노의 친어머니 야나기하라 나루코의 조카로, 유명한 문학가.[3] 황실의 사돈이자 가쿠슈인 동창회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권력을 휘둘렀다.[4] 여자가 천황에 오르는 것.[5] 여자 천황의 후손이 천황에 오르는 것. 이 경우, 여자 천황의 남편도 황족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만약 여자 천황의 남편이 평민이라면 문제가 된다.[6] 정확하게는 아이코 공주의 차기 천황 즉위에 찬성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