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21:27:00

핫코다산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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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경과
3.1. 1일차(1/23)3.2. 2일차(01/24)3.3. 3일차(01/25)3.4. 4, 5일차(01/26-27)3.5. 6일차 이후(01/28-02/02)
4. 계급별 생존율5. 원인6. 이야깃거리7. 창작물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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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핫코다 설중행군 조난사건(八甲田 雪中行軍 遭難事件)은 1902년 1월 아오모리현의 산악 지역에서 훈련 중이던 일본 제국 육군의 중대 규모의 행군 부대가 혹한으로 조난당해 부대원 210명 중 199명이 동사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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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한 병사의 시체 오늘날의 핫코다산

2. 배경

20세기 초 일본 제국만주조선의 이권을 두고 영일동맹으로 러시아 제국과 계속 대립 중이었으며 대러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일본군도 대러시아 전쟁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 중에는 러시아군홋카이도를 거쳐 혼슈 북부로 침공하는 것을 막는 방어작전도 있었다.

도호쿠 일대에 주둔한 육군 제8사단러시아군의 침공을 방어하고 물자 보급선을 확보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8사단은 육로침공만이 아니라 일본 해군이 제해권을 상실하여 아오모리 해안철도[1]러시아 제국 해군 함정들이 포격하여 사용 못하게 될 것을 전제하고 이 상황에 대비한 보급루트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생각한 보급선이 바로 내륙의 핫코다산을 관통하는 하치노헤-핫코다산-아오모리 루트였다.

자국 영토 내에서 보급선을 확보한다니까 이상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아오모리현은 홋카이도와 마주보는 혼슈 최북단으로, 예전부터 명목상 의 관할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도 많았고 일부 지역에선 아이누가 건재하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후 30여 년밖에 안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902년 당시에는 도호쿠 본선이 아오모리로 오는 유일한 철도였기 때문에 대체루트를 답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또 다른 루트인 오우 본선이 완전개통되는 것은 이 사건이 일어난 지 3년 후인 1905년이었다.
주요 직위자
사진 파일:external/www.h7.dion.ne.jp/w_img247.jpg 파일:external/www.h7.dion.ne.jp/w_img246.jpg 파일:external/www.h7.dion.ne.jp/w_img249.jpg 파일:external/www.h7.dion.ne.jp/w_img248.jpg
이름 구라이시 이치
(倉石一)
간나리 분기치
(神成文吉)
야마구치 진
(山口 鋠)
후쿠시마 다이조[2]
(福島泰蔵)
계급 대위 대위 소좌 대위[3]
소속 5연대 31연대
직책 군의관 중대장 대대장 중대장
생몰년 1872년 10월 22일
1905년 1월 27일[4]
1869년 12월 20일
1902년 1월 27일
1856년 12월 27일
1902년 2월 2일
1866년 5월 23일
1905년 1월 28일
신분 사족 평민[5] 사족 평민
가족 아내, 슬하에 2녀 아내, 슬하에
1남(서자) 2녀(적녀)
아내, 슬하에
1녀(양녀)
독신
이후 결혼, 슬하에 1녀

동계 행군에는 8사단 예하의 히로사키에 주둔한 31연대와 아오모리에 주둔한 5연대가 각각 참가했다. 두 연대의 행군대는 우연히 같은 시기에 같은 핫코다 지역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행군했다.
  • 31연대의 행군대는 조난사고와는 무관하며, 지원자 37명의 소수 인원이 후쿠시마 다이조 대위의 인솔하에 11박 12일에 걸쳐 224 km의 행군을 희생자 없이 완수했다. 이들 중에는 훈련 취재를 위해 동행한 기자도 있었다. 후쿠시마 대위는 동계훈련 경험이 풍부해서 혹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았고, 민간인 안내원들을 배치하여 길을 잃고 헤매는 일도 겪지 않았다. 하지만 악화된 기상 때문에 안내를 거부하는 안내원들을 강제로 행군에 동원해서 이들이 동상을 입었고 개중에는 끝내 장애가 생긴 사람도 있었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이들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않았고 기껏해야 입원치료 또는 귀가 교통비 정도만 제공했다. 일본 정부는 오랜 세월이 지난 1930년대에 와서야 당시 안내원들에게 보상했다고 한다. 동행했던 기자를 통해 31연대 행군대가 행군 중 조난당한 5연대의 희생자들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알려졌지만, 지휘관인 후쿠시마 대위가 이를 은폐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행군이 끝나고 귀영한 뒤에 5연대의 참사를 알게 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 5연대는 2대대 병력을 중심으로 하되 1대대와 3대대에서도 병력을 차출하여 최종적으로 210명이 행군에 참가했다. 조난 사고를 당한 것은 바로 이 210명의 5연대 행군대이다. 지휘관은 2대대 예하 중대장 간나리 분키치(神成文吉) 대위가 맡았다.[6] 여기에 2대대장 야마구치 진(山口 鋠) 소좌와 대대 본부의 장교들이 혹한기 훈련 교범 연구라는 명목으로 편성 외 인원으로 따라갔다. 명목상 지휘관은 간나리 대위였지만, 이렇게 끼어든 대대장 때문에 지휘권이 양립해서 사태가 악화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더구나 야마구치 소좌는 이 행로를 단 하루 만에 주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5연대 행군대의 편제와 임무는 다음과 같다.
    • 1소대 및 지휘반 - 취사, 작전 통제
      지휘관 중대장 간나리 분키치 대위, 1소대장 이토 다루아키라 중위 등 46명(위관급 장교 2명/부사관 6명/병 27명)
    • 2소대 - 짐 운반
      지휘관 2소대장 스즈키 마모루 소위 등 42명(위관급 장교 1명/부사관 5명/병 36명)
    • 3소대 - 행군방법 연구
      지휘관 3소대장 오하시 요시노부 중위 등 42명(위관급 장교 1명/부사관 4명/병 37명)
    • 4소대 - 숙영
      지휘관 미즈노 다다요시 중위 등 45명(위관급 장교 1명/부사관 8명/병 36명)
    • 특별소대(장교와 부사관만으로 구성)
      임시지휘관 나카노 중위 등 23명(위관급 장교 1명/부사관 22명)
    • 편성 외 대대 본부
      지휘관 대대장 소좌 야마구치 진 등 12명(좌관급 장교 1명/위관급 장교 3명/견습사관(소위 대우) 2명/부사관 6명/ 0명)

3. 경과

3.1. 1일차(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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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 초반

탐사대는 1902년 1월 23일 목요일 아침 7시경 부대를 출발했다. 행군 초반에는 여정이 매우 순조로웠고 날씨도 혹한기 산악훈련을 하기 적절한 추위 정도였기에 탐사대는 현지 주민들이 자청하는 길 안내마저 사양하며 순조롭게 산을 올랐다. 이 날의 목표지점은 하코다 산에서 20 km 떨어진 타시로 온천. 오후 4시에 부대는 우마타테바 산 정상에 올랐는데 이는 목표지점에서 겨우 4 km 남은 지점이었다.

그러나 오후부터 급격하게 기상이 악화되었다. 차라리 오전 중에 기상이 악화되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부대로 복귀하거나, 주둔지를 세우고 사태를 지켜보다가 복귀하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산 중턱 가까이 올라갔는데 급격하게 추워지고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자 장교들은 고민에 빠졌다. 내려가자니 지금까지 올라간 것이 모두 헛수고가 되고, 행군을 강행하자니 기상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결국 갑론을박 끝에 일단 계속 가 보자고 결정했는데 이는 대형참사를 만들어 낸 최악의 오판이었다.

눈은 계속 더 쏟아지고 밤이 될수록 날씨는 더 추워졌으며 병사 개개인이 휴대하던 비상식량도 다 얼어서 먹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물자를 운반하던 썰매부대인 2소대는 폭설로 본대에 뒤쳐진 끝에 결국 2소대 지휘부는 썰매를 포기하고 썰매에 탑재한 물자를 2소대 병사 개개인이 휴대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로써 병사들의 체력부담은 더욱 커졌다. 심지어 가장 말단 병사는 무쇠솥을 짊어지고 다녔다.

오후 8시가 되어서야 겨우 숙영지를 결정했다. 부대 행군에서 숙영지는 일몰 2~3시간 전에는 결정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 때는 이미 해가 진 후였다. 부대는 눈을 파서 비박지를 만들었고 오후 9시까지 낙오된 부대도 모두 도착해 취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8척(2.4 m)을 파도 땅이 나오지 않자 눈 위에 화구를 설치했는데 폭설 속에서 불도 쉽게 붙지 않았다. 게다가 겨우 불을 붙이면 당연히 눈이 녹아버려 화구가 꺼지고 솥이 엎어지는 등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3.2. 2일차(01/24)

오전 1시에 겨우 덜 익은 쌀과 데운 청주를 배급했다. 하지만 청주는 애써 데웠더니 악취가 심해 아무도 마실 수가 없었다. 결국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가운데 동상자가 속출했다. 지휘부는 당초 오전 5시 행군을 재개할 작정이었으나 숙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오전 2시 아오모리로 복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눈이 하도 와서 방향이 분간되지 않는 지경이었다. 복귀가 어렵자 차라리 핫코다산 동쪽 다른 길을 통해 마을로 내려가기로 하였으나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엉뚱한 협곡으로 가다가 산 중턱 하천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사실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안 그래도 폭설과 눈보라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길들이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나침반조차 얼어붙어 작동하지 않았기에 방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판이었다. 더군다나 사토 가쓰데루(佐藤勝輝) 특무조장이 길 안내를 잘못 하는 바람에 부대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던 게 결정적이었다.

결국 벼랑을 기어올라가기로 했는데 이 과정에서 결국 첫번째 사망자가 나왔다. 기이국 신구번의 옛 번주 미즈노 다다모토(水野忠幹)[7]의 장남 4소대장 미즈노 다다요시(水野忠宜) 중위[8]가 졸도한 뒤 그대로 동사하였다.

부대는 오후 2시 반까지 행군하였지만 기껏해야 첫째날의 숙영지에서 700m 이동했을 뿐이었다. 훗날 실측 결과 겨우 10분 거리에 불과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일몰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길을 찾지 못한 부대는 결국 부대원 다수가 동사할 줄 알면서도 개활지 한 곳을 잡아 임시 숙영지로 삼았다. 하지만 눈을 팔 공구를 지닌 병사들은 전원 낙오하였기에 전날과는 달리 눈을 파서 만든 비박지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이때의 체감온도는 무려 영하 50도에 달했고 결국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밤에 50명 이상이 죽어나갔다고 추정된다.

3.3. 3일차(01/25)

부대의 운명은 사실상 이 때 결정 되었다. 기온은 영하 41도로 곤두박질 쳤는데 이는 일본 기상관측 역사상 가장 낮은 기온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산 위 하늘에 엄청난 규모의 저기압 세력이 형성되어 눈과 폭풍이 몰아쳤다.

부대는 길을 찾지 못한 채 무의미한 행군을 계속할 뿐이었다. 후대의 조사에 따르면 기적적으로 제대로 방향을 찾았는데도, 폭설 때문에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채로 길을 잘못 들었다고 착각하고 발걸음을 되돌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지휘관 간나리 대위는 이날 아침 그나마 체력이 남았다고 판단된 병력을 특무조장 2명을 포함한 12명을 선발하여 2개 조로 척후대를 편성해 각 특무조장을 척후대장으로 임명한 후 선발로 내보냈다. 말이 좋아 척후대지 사실상 구원을 요청하는 연락병이었다. 이들 척후대 중 1개 조는 이후 연락두절, 전원 동사했으며 다른 1개 조는 길은 찾아냈으나 민간인이나 마을을 발견하진 못했다.

사태가 이 지경으로 치닫자 남은 생존자들도 살기를 거의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편제도 유지되지 않았고 그저 앞에 사람이 가면 뒤를 따라가는 식으로 대열이 유지되었다. 지쳐서 조금이라도 늦으면 바로 낙오되고 낙오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그야말로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였다. 이 시점에서 이미 중대원들 대부분이 죽고 살아남은 사람은 210명 중 60~70명 밖에 안 되는 상태였다.

한편 산악지대와 달리 날씨가 화창해진 아오모리의 부대 주둔지에서는 훈련인원이 돌아오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도, 복귀자도 없어서 이상하게 여겼다. 하치노헤나 인근 지역의 군, 경찰들에게 연락해 본 뒤에야 뭔가 큰일이 벌어졌음을 깨닫고 구조대 파견을 준비했다.

3일차에 부대를 해산하고 각자 알아서 생존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과 없었다는 증언이 모두 존재한다. 해산명령이 없다고 증언을 한 이토 중위장교 신분이었으므로 똥군기로 초래된 참사의 책임전가를 위해 거짓말로 회피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부대 해산명령에 대해 증언한 사람은 부사관들인 고토 후사노스케 오장과 고하라 주사부로 오장이다.

3.4. 4, 5일차(01/26-27)

생존자들은 잔여인원을 2개 조로 편성하고 각자 길을 달리하여 나아가기로 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살아있던 간나리 대위와 구라이시 대위가 각 1개 조를 거느리고 나아갔다. 하지만 구라이시 대위 조는 길을 잘못 들어 또다시 헤매었다.

간나리 대위 조는 비교적 정확하게 나아갔으나 지휘자인 간나리 대위가 쓰러졌다. 간나리 대위는 동행하던 고토 후사노스케(後藤 房之助, 1879-1924) 오장에게 "본대에 연락하여 구조대 파견을 요청하라."는 명령 겸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을 지키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고토 오장은 무작정 산 아래쪽으로 걷던 중 선 채로 눈에 묻힌 상태로 정신을 잃었다가 구조대에게 발견되어 최초 구조자가 되었다. 고토는 생명은 건졌으나 이후 양손과 양발을 모두 절단했다.

고토 오장은 구조되면서 정신을 잃은 상황에서도 간나리 대위의 이름을 되풀이하여 말했다. 이에 구조대는 그 주변을 수색하다가 죽기 일보 직전인 간나리 대위를 발견했다. 간나리 대위는 목숨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얼마나 추위에 시달렸는지 구조대가 급히 주사를 놓으려고 했어도 피부가 얼어서 주삿바늘이 부러질 지경이었다.

27일자 구조는 이것으로 종료되었다. 구조대조차 반수가 동상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게 그나마 회복된 날씨에서 이런 일이 나왔다는 점. 결국 간나리 대위는 향년 32세로 사망했다.

3.5. 6일차 이후(01/28-02/02)

구조대 다수조차 동상에 걸리다 보니 구조작업은 29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구조작업을 위한 병력도 부족해 센다이의 5포병연대에서 지원병력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29일 구조대는 산 곳곳에 구조작업을 위한 초소와 거점을 마련하고 이곳들을 중심으로 수색작업을 개시했다.

1월 31일부터 본격적으로 생존자가 발견되었다. 생존자가 가장 많이 발견된 곳은 구라이시 대위 그룹이 숨은 절벽이었다. 이들은 혹한을 그나마 피할 수 있는 절벽 아래 움푹 패인 곳에 숨은 덕에 그나마 생존자가 많았다. 대대장 야마구치 소좌도 이때 같이 구출되었으나 2월 2일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45세. 이 참사의 가장 큰 책임자로, 부하들에게 업혀 다니가 구출된 후 사망했다. 당시 일본 육군의 공식 사인은 심장마비였는데, 아래 언급된 영화 <핫코다산(1977년))>에서는 당시 널리 알려진 설을 따서 야마구치가 구출된 후 병원에서 권총으로 자살하는 모습으로 끝을 내지만 현재는 환자가 권총으로 자살하는 동안 병원 근무자가 몰랐겠냐는 의문에서부터 병원에 총성을 들은 다른 환자가 없었다는 점, 무엇보다도 야마구치의 손이 동상에 걸려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권총자살설은 거의 허구로 취급되고 있다. 유력한 사망원인으로는 책임전가를 위한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살해나 마취 부작용, 음독자살 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이후 2월 2일에 나머지 생존자들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들은 산 곳곳에 있는 주인이 부재 중인 오두막에 들어가 버티며 용케 생존했다. 하지만 생환자 다수가 사지를 절단해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이 외에 미우라 다케오 하사, 다카하시 후사지 하사, 곤노 이치지로 이등병, 사사키 이등병, 오노데라 일병, 총 6명이 더 구조되었지만 이들은 구조 후 치료 도중 사망했다.

최종 생존자는 210명 중 겨우 11명. 그나마 심각한 동상을 입지 않은 사람은 구라이시 이치(倉石一) 대위, 이토 다루아키라(伊藤格明) 중위, 하세가와 데이조(長谷川貞三) 특무조장 등 3명 뿐이었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동상이 너무 심각해서 사지 일부를 잘라야만 했다. 오이카와 헤이스케(及川平助) 오장은 아킬레스건과 손가락 3개, 야마모토 도쿠지로(山本徳次郎) 일병은 왼쪽 다리를 통째로 절단했다. 몸 상태가 가장 온전했던 구라이시 대위는 이후 러일전쟁의 산데푸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마지막 생존자 오하라 주사부로(小原忠三郎) 오장은 두 발과 손가락을 절단하고 1970년까지 살다가 91세로 사망했다. 1964년 육상자위대에서 이 사건의 재조사를 위해 오하라 오장을 인터뷰할 때 그가 있던 곳은 국립 하코네 요양소[9]였으므로, 아마도 사건 이후 평생 국립병원에서 살다가 죽은 듯하다. 꽤 장수했던지라, 양차 대전과 일본의 패망 및 전후 부흥까지 지켜보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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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자위대 간부에게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오하라 오장

4. 계급별 생존율

계급 참가자 생존자 생존율
좌관급 장교 1 0 0%
위관급 장교(군의관 포함) 10 2 20%
견습사관(소위 대우) 2 0 0%
특무조장 4 1 25%
부사관(간호원장 포함) 45 4 8.9%
병(간호사 포함) 148 4 2.7%
합계 210 11 5.2%
생존자 중 사지가 멀쩡한 사람은 위관급 장교 2명과 특무조장 1명뿐이었고 부사관 이하 생존자는 모두 동상 때문에 사지 일부를 절단했다. 병보다 장교, 부사관의 생존율이 높은 이유는 장비의 방한성능 차이일 가능성이 크다. 장교와 부사관의 장비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병의 장비가 너무 열악했다.

당시 이들에게 지급된 방한의류는 다음과 같다.
  • 장교 / 부사관
모직 외투 1벌, 모직 전투모 1개, 플란넬[10] 동복 1벌, 장갑 1짝, 장화형 군화, 장화형 설상화 각 1족
  • 병사
모직 외투 2벌, 펠트제 전투모 1개, 일반 전투복 1벌, 장갑 1짝, 군화 1족(단화형)

또한 이 작전에 임하면서 전 병력에게 혹한 대비로 발에 고춧가루를 뿌린 뒤 양말을 3겹으로 신게 했다. 일본에 고추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는 먹지 않고 이렇게 썼으니 나름 전통 문화.

5. 원인

가장 큰 원인은 당연하게도 기상 조건이다. 당시 아오모리현과 핫코다산 일대는 아오모리의 한랭한 날씨를 생각하더라도 예상을 넘어 엄청나게 추운 이상기후였다. 행군 3일차였던 1902년 1월 25일홋카이도 아사히카와-41℃라는 혹한이 들이쳐 일본 기상 관측 사상 가장 낮은 최저온도로 남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동계장비를 갖추더라도 조난당하여 동사하기 쉽다. 더구나 군사들 중에는 따뜻한 기후를 띄는 도호쿠 이남에서 지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매 겨울마다 혹한을 견뎌야 하는 현지 사람들에게도 저런 날씨는 재앙인데 도호쿠 이남 출신 일본인에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까지는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천재(天災)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같은 행군로를 같은 시기에 무사히 주파한 31연대의 경우와 비교하면, 5사단의 조난 사고는 결국 인재(人災)였음이 명백하다. 우선 제대로 된 동계장비를 준비할 생각이 없었다. 설상화 등을 갖추긴 했지만 여분이 없었거니와 이상기후에 가까운 혹한에 도저히 대처할 수준이 아니었다. 개개인에게 동계장비를 준비하라고 말만 하고 제대로 챙기거나 확인하지 않았다. 거기다 부대원 대부분이 이와테현, 미야기현의 농촌 출신이었다. 같은 도호쿠 지방이긴 하지만 추위 면에선 비교가 안 된다. 겨울전쟁핀란드의 겨울 전장에 우크라이나 농민 출신 병사들을 투입시킨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한국으로 치면 전라도, 경상도 출신 병들을 최악의 극한의 고장 장진군 같은 곳에 동절기 훈련으로 내보낸 것과 비슷하다. 이때 병사들이나 초급간부들이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범한 행군인 줄 알고 지카다비(일본의 버선 모양 얇은 신발)를 챙기거나 적당히 행군하다 저녁에는 쉬면서 핫코다산의 노천온천에서 몸을 녹이자는 생각으로 수건만 챙긴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겨울산을 너무 가볍게 봤다. 겨울에 산을 오르기란 비교적 가벼운 차림을 한, 등산에 능통한 사람이라도 어려울 정도로 고된 일이다. 하물며 무거운 군장을 지고 행군을 하고 야영까지 해야 하는 군대가 심지어 준비조차 미흡한 상태에서 현지인의 안내를 받지 않고 무작정 산을 올라갔음은 크나큰 실책이었다. 현지인을 안내인으로 고용했다면, 경험을 통해 폭설이나 혹한을 예측해 많은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다. 하다 못해 적어도 맞게 들어선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거나 같은 자리에서만 빙글빙글 도는 무의미한 행군을 막을 수는 있었을 테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국 해당 지역을 가본 경험이 있는 사토 특무조장이 부대를 선도했는데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이 때문에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하는 고생을 해야 했고 그 결과 미즈노 다다요시 중위 등 여러 명이 동사했다.

그 밖에 지휘계통의 문제도 있었다. 신속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공식적인 지휘관 간나리 대위 외에도 대대장 야마구치 소좌가 동행했고 간나리와 같은 계급인 대위도 여러 명 있었다. 간나리 대위는 말이 지휘관이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다른 대위들과 논의하고 야마구치 소좌에게 다시 의견을 구해야 하는 체계이니 이런 위기상황에선 최악이었다. 게다가 당시 일본군의 권위적인 분위기상 대대장 소좌 앞에서 대위들이 일치감치 복귀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6. 이야깃거리

  • 이후의 역사는 이 사건을 더욱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훈련의 이유였던 러시아군의 아오모리현 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러일전쟁의 육상 전투는 한반도, 만주 지역과 요동반도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일본 육군은 시베리아 내전 때도 동계장비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가 동상에 시달리는 등 이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전혀 얻지 못하였다.
  • 패전 전 일본 육군이나 패전 후 육상자위대 모두 추모 겸 해당 루트로 동계행군훈련을 몇 차례 실시했다. 이때는 당연히 동계장비를 충분하게 준비한 데다 1902년의 맹추위의 날씨가 재현되지 않아서 무사히 성공했다. 특히 육상자위대의 경우 이 당시에는 없던 재질인 고어텍스로 만든 방한복이 보급되었고 통신 및 위치 파악용 전자장비 등도 지급한데다 이미 도로가 뚫려 있으므로 1902년 당시의 악천후가 다시 몰아쳤더라도 무사히 성공했을 것이다. 1997년에 3명이 사고사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동사가 아닌 화산지형 특성상 발생하는 유황 가스 중독이었다.
  • 사고 현장에는 사고 사실을 외부로 처음 알린 고토 오장의 동상을 세워 놓았다. 아오모리시 외곽에는 설중행군조난자료관을 세워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방문기
  • 이 루트는 현재 40번 아오모리현도가 지나가고 있다.
  • 많은 사람들이 죽은 곳이 대개 그렇지만 이 사건 이후 이후 이 산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사망사건이 여럿 발생한다거나, 버려진 산장에서 뜬금없이 구조대로 전화가 걸려온다거나 하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진다는 괴담도 있는 모양이다.
  • 이 사건을 다룬 동상에 대한 의학 논문이 있다.링크

7. 창작물

  • 1971년 닛타 지로(新田 次郞, 1912~1980)에 의해 이 사건을 다룬 소설 <핫코다산 죽음의 방황(八甲田山死の彷徨)>이 발간되었다. 닛타 지로는 아름다운 동행, 고고한 사람 등 여러 등반소설을 펴낸 작가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바뀌고 조난 상황의 상당 부분이 각색 되어서 실제 사건과는 다르다.
  • 1977년에는 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핫코다산(八甲田山)>이 개봉했다. <일본침몰>로 유명한 모리타니 시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키타오오지 킨야, 타카쿠라 켄, 미쿠니 렌타로, 탄바 테츠로, 오가타 켄을 비롯한 당대 유명 남배우들이 총출동한 호화 캐스팅으로 유명하다. 1977년 키네마 준보 베스트 4위에 선정되었고, 개봉한 다음 해 일본 영화 흥행 순위 1위를 차지하며 그 때까지의 역대 흥행순위 기록을 갈아치웠다. 영화 중에 메이지 시대의 유명한 군가인 눈의 진군이 행군 장면에서 자주 나온다. 원작처럼 영화에서도 사실을 각색한 부분들이 있는데 가령 31연대 병력이 행군을 완료하고 민간인 안내원과 서로 거수경례하며 예를 갖추는 장면은 창작이다. 이 영화는 제5공수특전여단 동사사고를 다룬 국방홍보원 영화 아! 민주지산과 더불어 대한민국 육군에서 동계작전과 방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교육용으로 틀어준다. 그 때문에 핫코다산 대신 한국식 한자 독음인 '팔갑전산 사건'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 한국 창작물에서는 작전명 충무 에필로그에서 언급된다. 치안 유지와 러시아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사실상 영구 주둔하게 된 한국군과 자위대가 공동동계훈련을 하면서, 위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측에서 핫코다 산 근처에서 동계훈련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언급되고 이 이야기를 들은 한국군이 민주지산에서 발생한 제5공수특전여단 동사사고를 얘기하는 내용이다. 작전명 충무를 쓴 김경진은 전작인 데프콘 한미전쟁 편 4권에서도 이 민주지산 사고를 언급한 적이 있다.

8. 관련 문서



[1] 도호쿠 본선 하치노헤-아오모리 구간으로, 현재는 제3섹터로 이관되어 아오이모리 철도선이 되었다.[2] 주요 직위자 중에서 유일하게 이 행군이 끝난 뒤 결혼식을 올릴 때 촬영했다.[3] 최종계급 소좌[4] 러일전쟁 중에 일어난 산데푸 전투에서 야포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이때 그와 함께 참전하여 같이 중상을 입은 후쿠시마 다이조는 치료 도중에 다음날인 28일에 사망했다.[5] 위계는 1901년 9월 30일 정7위를 받았고 1902년 1월 27일 사망하면서 종6위로 올랐다.[6] 간나리 대위는 1894년에 군대에 입대해서 보병 특무조장으로 임관해 군복무를 시작했다(과거 일본군이나 현재의 자위대는 사관생도가 졸업하면 먼저 조장(원사)으로 임관한 후 소위로 진급한다). 1897년 9월 7일 소위로 진급한 후 동년 10월 25일 중위로 진급했으며 1901년 5월 25일에 대위로 진급했다.[7] 생몰: 1839년 1월 21일-1902년 4월 30일. 메이지 유신 후 남작. 장남이 죽고 석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8] 생몰: 1877년 9월 1일-1902년 1월 24일.[9] 러일전쟁 직후 실명하거나 사지를 잃은 상이군인을 수용하던 폐병원(廢兵院)이 전신이다.[10] 면과 모직을 혼방사로 섞어 짠 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