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패션 모델
1. 개요
패션 모델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2. 초기
모델은 1853년 "오뜨꾸뛰르의 아버지" 찰스 프레데릭 워스(Charles Frederick Worth)[1]에 의해 처음으로 직업으로서 정립되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 마리 워스(Marie Worth)에게 자신이 디자인한 옷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고, 이런 종류의 모델링을 "하우스 모델"이라고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하우스 모델은 파리의 패션하우스들 사이에서 흔해졌다. 이 때 모델은 신체 치수에 대해 엄격하지 않았다. 패션 하우스는 고객들을 위해 다양한 체형을 가진 모델들을 기용하여 옷을 시연했다.모델을 모집하기 위해 사진사와 패션 하우스들은 그들이 원하는 모델을 공모했다. '안개 같은 금발과 유리 같이 반짝이는 눈, 둥근 팔과 어깨, 포동포동할 것'과 같은 공고문이 붙었다. 1910년대 패션모델의 미덕은 온화함이었다. 20년대 코코 샤넬의 등장과 더불어 패션모델의 기준이 바뀐다. 대담하고 강한 의지력을 가진 독립적인 여성의 이미지가 등장한 것이다. 한 쪽 발을 다른 쪽 발 앞에 놓고, 힙을 앞으로 기울이고 한 손은 주머니에 꽂고 다른 손은 자유롭게 몸짓을 전달하는 '코코 포즈'를 개발해 퍼뜨렸다.
최초의 슈퍼모델, 리사 폰사그리브스의 화보(1951) |
패션 사진이 발달하면서 모델들의 역할이 확장되기 시작했지만, 1950년대까지 모델들은 대체로 유명하지도 않았고 처우도 매우 열악했다.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모델은 1930년대에 유명했던 리사 폰사그리브스(Lisa Fonssagrives)로 알려져있는데, 그래서 그녀를 "최초의 슈퍼모델"로 부른다. 그녀는 200번이 넘도록 보그의 표지 모델을 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보그지는 모델들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46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모델 에이전시 중 하나인 "포드 모델스(Ford Models)"가 설립되었다. 1940년대 가장 많이 활동한 모델은 "징스(Jinx)"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징스 팰컨버그("Jinx" Falkenburg)였다. 시간당 25달러를 받았는데, 당시로서는 꽤 많은 액수였다. 파리에서는 미국 텍사스 출신의 도로시아 처치(Dorothea Church)가 최초의 흑인 모델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시 모델들은 대체로 패션계 내에서만 유명했고, 밖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1950년대 모델들은 오늘날의 모델들과 비교해 더 풍만했는데, 당시 탑모델 중 한 명이었던 빌헬미나 쿠퍼(Wilhemina Cooper)의 신체 사이즈는 38"-24"-36"이었다.
1950년대는 우아함과 정적인 아름다움 대신 개성이란 가치가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패션의 발랄한 측면을 드러내기 위해 디자이너 지방시는 체구가 작은 오드리 헵번 같은 말괄량이 타입의 모델을 선호했고, 발렌시아가는 순수함을 강조하기 위해 평범한 모델을 썼으며, 피에르 가르댕은 동양적인 여성미를 드러내기 위해 히로코 마츠모토란 일본계 모델을 기용했다.
Jinx Falkenburg의 화보. | 최초의 흑인 모델, 도로시아 처치. 대표적인 핀업 걸 스타일의 포즈다. |
3. 1960년대: 산업의 시작
1960년대가 되면서 모델 에이전시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비서 서비스가 모델 에이전트처럼 활동하면서 메시지 수신이나 예약에 대해 주당 요금을 받았고, 대부분의 모델들은 이런 청구서들을 직접 처리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다른 누군가의 수입의 일정 금액을 대가로 하여 에이전트로 활동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를 비서라고 칭했다.당시 모델들은 극소수의 모델들이 파리나 뉴욕으로 진출하는 것 외에 대부분 한 국가에서만 활동했다. 나라마다 다른 노동법 때문에 다른 나라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이탈리아에 패션하우스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패션잡지들도 잇달아 창간하면서 패션모델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에이전시들이 모델료를 볼모로 삼아 모델들에게 취업 비자도 없이 이탈리아로 올 것을 강요하는 일은 매우 빈번했다. 모델료는 당연히 현금으로 지급했고, 모델들은 세관원들에게 들키지 않게 돈을 숨기고 다녀야 했다. 파리나 밀라노의 고급 호텔에 경찰들이 급습하여 취업 비자 없는 모델들을 검거하는 일이 드물지 않을 정도였는데, 경쟁 에이전시가 경찰에 일부러 신고해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루머도 파다했다. 이런 혼란을 피하고자 모델 에이전시들은 국제적으로 규모를 키우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마릴린 에이전시는 파리와 뉴욕에 사무소를 두고 업무를 처리했다.
1960년대 말에는 런던이 유럽 최고의 시장으로 떠올랐다. 런던에서는 모델링에 좀 더 체계적이고 혁신적인 접근을 시도했고, 이 시기부터 모델들은 유명인으로 떠오르게 된다. 트위기를 비롯해 진 슈림프턴(Jean Shrimpton), 조애나 럼리(Joanna Lumley), 태니아 맬릿(Tania Mallet), 실리아 해먼드(Celia Hammond), 퍼넬러피 트리(Penelope Tree), 폴린 스톤(Pauline Stone) 등이 당시 영국의 패션계를 장악했고 이들의 선배들과는 다르게 수입도 매우 좋았다. 트위기는 16세의 나이로 1966년 "올해의 얼굴"로 뽑히기도 했다. 키 작은 모델들과는 계약을 기피하기는 했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모델 에이전시들은 모델들의 신체 사이즈에 대해 그렇게까지 구속하지 않았다. 당시 키 167cm, 가슴둘레 32에 보이쉬한 헤어스타일의 트위기는 이상적인 모델의 기준을 바꾸어놓기 시작했다. 트위기는 영국 평균 임금이 월 60파운드인 시절에 시간당 80파운드를 벌었다. 한 시간만에 남들 월급보다 많이 벌어갔던 것... 트위기의 헤어스타일이 "트위기컷"으로 명명되기까지 하는 등 트위기는 그야말로 당대의 스타일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진 슈림튼(1965) | 트위기 |
1967년 런던의 탑 모델 에이전트 7명이 "런던 모델 에이전트 협회(Association of London Model Agents)"를 만든다. 이 협회의 설립은 모델링을 보다 전문적인 영역으로 정립하고, 패션 산업을 바꾸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러나 점점 모델이 하나의 전문직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델들은 촬영 전에 헤어와 메이크업을 모두 하고 와야 했다. 반면 모델 에이전시들은 주로 모델의 홍보와 브랜딩만을 책임졌다.
같은 해, 모델이었던 윌헤미나 쿠퍼는 남편과 함께 빌헬미나 쿠퍼(Wilhemina Models)라는 모델 에이전시를 차린다. 그리고 1968년에는 FM 에이전시(FM Agency)와 모델스 원(Models 1)이 설립되어 오늘날 모델 에이전시들이 하는 기능과 비슷하게 모델들을 대표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 모델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처우가 더 좋아졌다. 포드 모델스는 모델들에게 선입금하기 시작했고, 다른 지역에서 올라와 살 곳이 없는 미성년 모델들에게 집을 제공하기도 했다.
4. 1970 - 1980년대
70년대 모델 에이전시들은 점점 더 비지니스에 눈을 뜨게 되었고, 홍보 차원으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쯤 에이전시들은 모델이 미디어에 노출되는 방식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모델 홍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도 했다.1970년대 초 스칸디나비아에는 장신에 금발벽안 모델들이 많았지만 이들을 써줄 클라이언트들은 별로 없었다. 포드 모델스가 스카우팅을 개척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북유럽의 모델들은 에이전시들이 주최하는 모델 콘테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는 1980년 포드 모델스가 시작하게 되는 "포드 모델스 세계슈퍼모델 선발대회(Ford Models Supermodel of the World)"로 이어지게 된다. 포드 모델스는 또한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브라질 모델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브라질 사무소를 차리기에 이르게 된다.
이 시기는 Sport Illustrated Swimsuit Issue가 발간된 때이기도 하다. 이 잡지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수영복을 입은 모델 화보를 실었는데, 풍만하고 건강미 넘치는 캘리포니아 모델의 사진에 모델의 이름을 적어두었다. 그러자 이 모델들이 유명인으로 떠오르고, 이후 이 잡지는 슈퍼모델의 척도로 여겨지게 되었다.
80년대 Sport Illustrated Swimsuit Issue의 표지. |
1970년대는 모델계에 중요한 이슈가 많았던 때이기도 했다. 1974년 베벌리 존슨이 흑인 모델로서는 최초로 보그의 표지 모델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비롯하여 그레이스 존스, 나오미 심스 등이 흑인 모델의 길을 닦았다. 1975년에는 마고 헤밍웨이가 향수 브랜드의 전속 광고 모델 계약을 하면서 전례 없는 백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성사시키고, 그 해 시사 잡지인 타임지의 표지모델이 되어 "새로운 미인"의 전형으로 등장했다.
보그의 표지모델이 된 최초의 흑인 모델, 베벌리 존슨 |
오늘날 영향력 있는 대부분의 탑 모델 에이전시들은 70년대와 80년대초에 설립되었다. 이 에이전시들은 오늘날의 에이전시들이 운영하는 표준을 창조해냈다. 1974년에는 네브스 모델스(Nevs Models)가 세계 최초로 남성모델 전문 에이전시로 런던에 설립되었고, 파리의 엘리트 모델스(Elite Models)와 일본의 프라이데이스 모델스(Friday's Models)가 1975년에 설립됐다. 그 다음해에는 싱가포르에 캘캐리스(Cal-Carries)가 아시아 최초의 체인형 모델 에이전시로 설립되었다. 1977년에는 셀렉트 모델 매니지먼트(Select Model Management)와 와이낫 모델스(Why Not Models)가 밀라노에서 문을 열었다. 80년대까지 프리미어 모델 매니지먼트(Premier Model Management), 스톰 모델스(Storm Models), 마이카스(Mikas), 메릴린(Marilyn), 메트로폴리탄 모델스(Metropolitan Models) 등의 모델 에이전시들이 줄줄이 문을 열었다.
80년대가 되면 대부분의 모델들이 모델을 전업으로 삼기 시작했고, 유럽 각지를 오가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모델링이 글로벌해짐에 따라 모델 에이전시들도 글로벌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1980년 포드 모델스는 포드 모델스 세계슈퍼모델 선발대회를 시작했고, 파리의 엘리트 모델스가 뉴욕에도 사무실을 열었다. 1981년에는 화장품 회사들이 탑 모델들과 고가의 홍보 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했다. 1983년이 되면, 엘리트 모델스는 Elite Model Look competition이라는 이름으로 자체 모델 컨테스트를 시작한다. 80년대 뉴욕에서는 "모델 전쟁"이라고 부르는, 모델들과 광고를 두고 포드 모델스와 엘리트 모델스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모델들은 엘리트와 포드, 윌헤미나를 오가며 활동했다.
1970년대 후반 뉴욕에서 짧은 머리의 중성적인 느낌을 가진 보이시한 외모의 모델들이 트랜드가 되었다. 그러나 유럽은 정반대였다. 여성스러운 이미지의 미국 모델들이 대거 유럽으로 떠났다. 1980년대 중반쯤부터는 거대한 헤어스타일이 유행했고, 보이시스타일은 물러갔다. 50년대부터 70년대초까지 유행했던 풍만한 모델들이 다시 각광 받았다. 패티 핸슨(Patti Hansen) 같은 모델은 화보 촬영에 시간당 200달러, TV광고에 2000달러를 받았다. 그녀는 80년대 동안 매년 평균 300,000달러를 번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패티 핸슨 | 80년대 CK 광고 모델이었던 브룩 실즈.[2] |
5. 1990년대
1990년대 초반은 80년대 후반의 슈퍼모델들이 지배했다. 당대에 가장 성공한 모델 중 한 명이었던 린다 에반젤리스타는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하루에 10,000달러 이상 벌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아요"[3]라고 하여 화제가 됐는데, 이 발언 이후 모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그녀를 비롯하여 나오미 캠벨, 신디 크로포드, 크리스티 털링턴, 클라우디아 쉬퍼 같은 당대의 탑 모델들은 세계에서 가장 얼굴이 많이 알려진 모델이 되었고, 그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수입을 거두었으며, 모델 산업 자체에도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다주게 되었다. 메이블린은 크리스티 털링턴과 1년에 12일 일하는 것을 조건으로 계약하면서 무려 80만 달러를 지불해야 했다.특히 야스민 가우리의 등장으로 금발벽안의 백인모델만을 내세웠던 패션계가 변화했으며 신디 크로퍼드가 그런 변화를 주도했다. 이는 2000년대 이후로 중동,남아시아 출신이 서양 패션계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4]
헤로인 시크의 상징, 케이트 모스 |
90년대 중반에는 건강미 넘치는 기존의 미적 관념에 대항하여 창백한 피부, 눈 밑 다크서클, 각진 골격으로 특징지어지는 "헤로인 시크(Heroin Chic)"라는 트렌드가 뉴욕과 런던의 패션 에디터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본래 헤로인 중독으로 고생하던 모델 제이미 킹에게 영감은 받은 것이었지만, 정작 헤로인 시크의 상징이 된 것은 캘빈 클라인 모델로 등장한 케이트 모스였다. 한편, 헤로인 시크 트렌드에도 불구하고 건강미 넘치는 클라우디아 시퍼는 1,200만 달러를 벌었다.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과 Sport Illustrated Swimsuit Issue의 인기 덕분에 타이라 뱅크스나 하이디 클룸 같은 건강미 있는 슈퍼모델에 대한 수요는 지속됐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이 되면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모델 에이전시들이 설립되었다.
빅토리아 시크릿 런웨이에 선 카롤리나 쿠르코바, 타이라 뱅크스, 하이디 클룸, 지젤 번천, 아드리아나 리마[5] |
1990년대 말이 되면 헤로인 시크의 시대는 끝난다. 10대 청소년의 의상이 주류 패션에 침투하고, 10대 팝 음악 시장이 커지고,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같은 아티스트들이 인조 가죽과 배꼽티를 유행시켰다. 좀 더 어린 수요층으로 인해 신인 모델들은 디지털 시대에 맞게 더 섹시해져야 했다.
6. 2000년대
지젤 번천을 필두로 아드리아나 리마, 알레산드라 앰브로시오 같은 브라질 모델들이 런웨이에서 각광 받았고, 2000년대 내내 광고 모델로도 활약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당시 패션 잡지들이 표지 모델로 패션 모델보다는 연예인들을 주로 채용했던 것에서 찾기도 한다. 오죽하면 "슈퍼모델의 죽음"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2000년대 후반에는 젬마 워드나 릴리 콜 혹은 사샤 피보바로바 같이 베이비 페이스 모델들이 유행하게 된다. 그리고 2000년대 내내 포드 모델스와 넥스트 모델 매니지먼트는 서로의 모델을 훔쳐갔다며 법적 분쟁에 얽힌다.
젬마 워드 | 릴리 콜 |
하지만 2000년대 모델계의 가장 큰 논란은 패션위크에 참가한 하이패션 모델들의 건강 문제였다. 70년대부터 모델들의 건강이 우려사항이 되어온 가운데, 어린 패션 모델들이 식이장애(주로 거식증)와 약물 남용으로 사망한 사실이 언론에서 크게 다뤄지기 시작했다. 영국 패션 협회는 디자이너들에게 16세 미만의 모델을 쓰지 않겠다는 계약에 사인하도록 했고, 2012년 3월 3일 보그는 식이장애가 있는 모델들과 16세 미만 모델들을 금지했다. 비슷한 움직임이 스페인, 이탈리아, 이스라엘 등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 최소 BMI지수를 넘긴 모델만 쓸 수 있도록 바뀌기도 했다. 2013년에는 뉴욕주에서 18세 미만 모델들에 대한 아동노동의 법적 보호를 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프랑스 등은 깡마른 모델들을 롤모델로 삼아 일부러 거식증에 걸리는 10대 소녀들이 늘어나자 패션잡지들이 모델들의 몸매 후보정을 못하도록 규제하기도 했다.
아래 두 장의 거식증 모델 사진들을 보면 그야말로 촉루와도 같은 몰골을 볼 수 있다.
거식증에 시달리는 패션 모델 |
28세로 사망한 모델 이사벨 카로.[6] |
한편으로 패션계는 점점 더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 인도, 중동 등 아시아 시장의 성장과 동아시아인들의 신체조건 향상으로 아시아계 모델들의 등장이 많아지고 있고, 백인이 아예 없는 모델 에이전시가 런던에 등장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의족을 한 에이미 물린스, 다운증후군을 가진 호주 소녀 메들린이 패션모델로 등장하기도 하고, 도브나 베네통은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평범하기도 하고 뚱뚱하기도 한 보통 사람들을 모델로 기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흰머리와 주름이 있는 만 45세 이상만 채용하는 에이전시도 생겼다. # 편견을 깬 패션모델들.
도브의 Real Beauty 캠페인 |
7. 2010년대
7.1. 금수저 모델 전성기
관련 문서: 금수저 모델2010년대 들어서는 유명인의 자녀들이나, 부모의 부를 바탕으로 형성한 SNS에서의 영향력을 이용해 쉽게 유명세를 얻은 금수저 2세들이 논란이 되고 있다.
7.2. 정치적 올바름
펨버타이징을 내세우는 패션 업계가 증가하고 몸 긍정이 여성 소비자들 사이에서 확산됨에 따라 패션 업계가 변화하기 시작 했다. 커머셜 패션 업계에서는 1970년대부터 있어오던 섹시함이 철폐되고 하이패션 업계에서는 저체중 모델에 대한 퇴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패션계에서 다양성(Diversity)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체형과 인종의 모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하이패션 브랜드 런웨이에서 유색인종 모델이나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2018년부터 빅토리아 시크릿은 섹시함이 아닌 정체성의 다양성을 내세워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여성 소비자의 양태를 반영하고 있다.
7.3. 인스타그램의 부상
2010년대 중반부로 인스타그램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커머셜 모델 시장의 트렌드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델 업계에서도 다양성을 추구하는 PC 열풍이 불고 있으나 PC 운동만으로는 상업적인 수요를 충분히 창출하지 못한다. 대신 현대 하이패션계에서 정형화된 체형에 맞지 않는 모델 역시 인스타그램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직접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패션모델 업계의 다양성 확장은 PC보다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7]현시대 하이패션 모델계의 모델을 구분하는 미적기준은 심하게 대중들의 취향과 유리되어 그들만의 세계가 될 정도로 나누어졌다. 상술한 것처럼 일류 디자이너들은 패션모델을 자신의 걸어다니는 옷걸이로만 취급하고 자신이 디자인한 옷에 사람들이 주목하길 바라지 모델에게 시선이 쏠리는걸 원치 않는다. 그런 이유로 패션모델의 아름다운 얼굴은 되려 디자이너들에게는 방해가 될 뿐이며, 체형은 이제 옷에 사람을 맞추는 옷걸이 그 자체가 되었다. 문제는 현실의 보통 사람들, 특히 남성들의 미적감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 과거 8~90년대까지는 대중들의 경제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철저하게 공급자 우선시장으로 형성되었고 사람들은 디자이너가 시키는 대로 모델이 입고 나오는 옷을 입었다. 하지만 21세기 이후 대중들의 소비력도 향상되고, SNS등으로 다양한 소통이 가능해 전세계 사람들의 미적감각과 취향을 얼마든지 한군데에 모을수 있으며 이들의 소비로 트렌드를 바꿀수도 있으며 그에 걸맞은 패션 브랜드기업들도 성장했다. 허나 기존 다수의 명품 디자이너들은 이런 패션의 대중화에 회의감을 가지고 점점 오트쿠튀르, 예술의 영역으로 자기 패션을 진화시키면서 점차 대중이 원하는 패션과 디자이너들이 원하는 패션의 간극이 엄청나게 커지면서 이제는 완전히 대중과 유리된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대중과 패션계가 갈라서면서 점차 대중들도 패션모델들이나 100% 살릴수 있는 옷걸이용 옷이 아니라 자기가 입고다닐수 있는 패션을 원하게 되고, 모델도 그에 맞게 대중의 취향과 체형에 점차 가까워진 모델의 수요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그 최첨단이 바로 인스타그램이라는 SNS를 통해 자신의 패션을 유통하는 문화였다.
커머셜 모델들이 인스타그램에 자신들의 사진을 많이 올리기 시작한 것은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 쇠퇴 및 매출 감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많은 커머셜 모델들이 인스타그램을 이용하여 트랜드에 맞는 화보를 바로바로 올리는 동안, 빅시는 도태되었다. 빅시는 어정쩡하게 중국 시장을 잘못 노리면서 PC 때문에 흑인 모델을 대거 고용하는 앞뒤가 안 맞는 전략을 짜다가 중국인들이 흑인 모델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발이 꼬였다. 빅시의 경우 중국 시장에 큰 투자를 하면서, 북미 지역의 고정 팬들과 뉴 트렌드 모두를 놓치고, 결국은 중국의 반미 불매 운동+중화권 취향 저격 실패로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얻었다.
중국 취향의 마르고 밋밋한 일자 몸매, 곱고 세련된 이목구비와 흰 피부 선호는[8] 북미 시장의 수요[9]와 충돌한다. 백인 모델이라도 북미에서 선호되는 모델과 유럽에서 선호되는 스타일의 모델, 한중일에서 선호되는 모델의 이목구비가 제각각 다 다른데 빅시는 여기서부터 실패하였다. 중국 시장과 북미 시장을 분리하지 않은 시작부터 레드 플래그인 셈.
인스타그램을 잘 활용해서 실적을 올린 커머셜 모델로는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 카멜라 로즈[10], 허버트 자매[11], 에밀리 펠드[12] 등등이 있다. 자신들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적극적으로 올려서 인지도를 쌓는 것은 에이전시나 본인 입장에서 모두 좋은 일이기 때문에 에어전시의 협조나 조언을 바탕으로 더 적극적으로 인스타그램을 이용하는 것도 있다. 한 때는 빅시가 커머셜 모델 최고의 커리어였지만 현재 새로 시장에 진입하여 인기를 끄는 커머셜 모델들은 더 이상 빅시에 연연하지 않는다.
8. 2020년대
고령화 사회와 발맞추어 백발이라는 뜻의 그레이(Grey)와 르네상스(Renaissance)를 합친 용어 그레이네상스(Greynaissance)의 주역인 '시니어 모델'들도 눈에 띄게 늘어나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1] 파리에 "House of Worth"라는 하이패션하우스를 차린 영국인 디자이너로, 패션하우스로 대표되는 오뜨 꾸뛰르를 탄생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당대 패션산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로서 패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2] 1980년 14살의 나이에 최연소 보그 표지 모델이 되었고, 논란이 됐던 캘빈 클라인 진의 광고에 출연하여 유명해졌다.[3] we don't wake up for less than $10,000 a day.[4] 흑인 모델은 더 일찍이 흑인 민권 운동이 성공한 이후인 1970년대부터 있었는데 이는 미국 흑인이 북미에서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었고 당시 비서양인은 북미에서도 흑인보다 인구가 적었고 미국문화보다는 이민자의 보수적인 문화에서 못 벗어났기 때문에 이들은 2000년대에 들어서 서양 패션계에 지원할 수 있었다. 히스패닉이라도 백인 히스패닉만 주목받았다.[5] 이 모델들 중 하이패션계에서 성공한 지젤 외에는 모두 하이패션 디자이너와 업계 관계자에게 런웨이 올거면 살 빼고 오란 소리를 들었고 그 이후 하이패션쪽은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6] 거식증에 시달리게 되면서 그 문제점을 고발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이사벨 카로는 사망 당시의 신체 스펙이 참으로 깨는데, 키는 165cm인데 몸무게가 31kg인 극단적인 초저체중이었다.[7] 일반인들의 다양한 수요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즉각 재반영된다. 오늘날 기준으로 일반적인 모델 필드에서 안 받아주는 킴 카다시안 같은 체형의 여성들은 인스타그램 모델이 아니면 패션 모델 활동이 아예 불가능하다. 그러나 남성 입장에서는 카다시안 자매들의 경우처럼 엉덩이가 극단적으로 펑퍼짐한 여성들을 선호하는 수요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외에도 대표적인 인스타그램 모델로 유명한 영국의 데미 로즈의 경우 일반적인 패션 모델과는 다른 통통한 체형에다가 공식 프로필상 키가 157cm인데, 실제 패션쇼 런웨이가 아닌 인스타그램에 란제리 사진 등을 올리는 경우 키가 작아도 문제 없다. 서구권 여성 모델들은 키가 170cm 미만이면 활동이 심각하게 어려워진다는 것을 생각하면(여성 키 167,166 정도가 단신 취급받는 것이 서구권 모델업계 기준이다.) 인스타그램 모델이라는 신종 직종이 모델들에게 새로운 틈새 시장을 열어준 셈이라고도 볼 수 있다.[8] #[9]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구릿빛 피부, 두꺼운 입술을 좋아하는 수요가 적지 않다. 사족으로 동아시아에서는 킴 카다시안, 니키 미나즈 같은 하체가 펑퍼짐한 여성 체형은 북한이 아닌 이상(...) 별로 수요가 없는게 사실이고, 서구쪽 여배우들이 일부러 입술을 더 두툼하게 수술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10] 보통 하이패션 모델들은 이목구비가 개성이 뚜렷하고 두드러지는 편인데, 이 쪽은 이목구비가 친근하고 예쁘지만 별 개성이 없는 형태라서 오히려 인스타그램에서 먹혔다.[11] 쌍둥이라는 특유의 개성을 살려 모델을 한다. 과거에 인스타그램이 나오기 전에는 쌍둥이 모델이라는 게 특별히 더 메리트가 있는 게 아니었지만 인스타그램이 나오면서 상황이 변했다.[12] 요즘은 백인 여성 모델이 얼굴이 미형에다가 가슴이 크면 옷보다는 모델한테만 시선이 간다고 하이패션 디자이너 사이에서 기피당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