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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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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서는 1987년 창당한 정당을 다루고 있습니다. 2010년 창당한 정당에 대한 내용은 평화민주당(2010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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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제1야당
통일민주당
(1987.5.1.~1988.5.30.)
평화민주당
(1988.5.30.~1991.4.15.)
신민주연합당
(1991.4.9.~1991.9.16.)
대한민국 민주당계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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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평화민주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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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합류)[1]


[[민주한국당|
파일:민주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개별 합류)[2]


[[한겨레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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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합류)[3]
평화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연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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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명 변경)


[[한겨레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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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합류)[4]

[[제3세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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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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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평화민주당 로고.svg
평화민주당
<colcolor=#324a70,#FADA5E>공식명칭 <colbgcolor=#FFF,#1F2023>평화민주당 (平和民主黨, Party for Peace and Democracy)
약칭 평민당
창당일 1987년 11월 12일 (통일민주당에서 분당)
당명변경 1991년 4월 15일 (신민주연합당)
해산일 1991년 9월 16일 (민주당으로 신설합당)
선행조직

[[통일민주당|
파일: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87년 후보단일화 실패로 인한 분당)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제금융로6길 33
(여의도동)[5]: 제1당사
서울특별시 마포구 토정로 318 (용강동): 제2당사
총재 김대중 / 5선 (5-8·13대)
원내총무 김영배 / 3선 (10·12·13대)
사무총장 김봉호 / 3선 (10·12·13대)
정책위의장 조세형 / 재선 (10·13대)
당 색
노란색 (#FADA5E)
당기 파일:평화민주당 깃발.svg
국제 조직 기독민주 인터내셔널(옵저버)[6]
1. 개요2. 역사3. 평가4. 역대 당직자
4.1. 총재4.2. 원내총무
5. 역대 선거 결과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pyungmin_changdang.jpg
1987년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이 동교동계를 규합해 탈당하여 만든 정당.

신민당 이래로 당내 비주류를 면치 못한 동교동계가 스스로 주류가 되어 당권을 잡은 것은 처음이었다. 성향은 김대중 총재 왈 온건개혁주의 노선으로 사회주의적 혁신까진 아니지만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노동계 등 재야 인사들을 적극 수용, 진보적 중산층과 노조의 지지도 받지만 자유시장경제 체제도 지지하는 미국 민주당을 롤모델로 한다고 말했다. 연장선상에서 1988년 2월 3일 문동환 목사[7]서울 지역 재야인사 98명이 대거 평민당에 입당해 당의 체질에 변화를 줬다. 김대중 총재가 총선 이후 한 인터뷰에 따르면 "우리 당은 중도좌파중도우파가 모두 모여있는 당으로, 공산주의를 찬성하는 혁신정당도 아니고[8] 정의있는 자유경제를 지지하는 만큼 보수정당도 아닌 중도정당이라고 말했다.

창당 초기에 중앙당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4-11 대하빌딩에 소재했으나, 1988년부터 여의도백화점 6층으로 이전했다. 같은 해에는 마포구 토정동에도 제2당사를 뒀다.

2. 역사

김대중을 죽이기 위해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을 일으킨 신군부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 사실상 국제사회를 주도하던 인물들의 경고 섞인 구명운동에 결국 김대중을 석방하고 미국으로 망명시키기에 이르렀다. 김대중은 훗날 귀국하고 1987년 6.29 선언 이후 사면되었으나, 전두환의 김대중 사형 계략 전까지 사실상 압도적인 민주화 운동 지도자였던 김대중의 빈 자리를 김영삼이 채우고 있었고, 15년 만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그가 통일민주당 후보가 된다. 다만 대선 후보를 김영삼이 가져가는 대신 당권을 김대중이 가지기로 했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서 양김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게 된다. 약속이 깨진 이유와 양김의 갈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13대 대통령 선거 문서의 '과정' 문단에 서술되어 있다.

아무튼 김영삼과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자 김대중은 결국 대선을 앞두고 동교동계 정치인들을 데리고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당을 창당하게 된다. 그는 1987년 10월 말에 창당발기인대회[9], 즉 창준위를 만들기 위한 대회를 열었고 발기취지문에서 “우리는 수구주의와 급진적 개혁주의의 양극을 배제, 온건한 개혁노선을 표방해 중산층과 근로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민정당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마침내 1987년 11월 12일 창당대회를 열어서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였는데 김대중을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그리고 '평화민주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재야 민주화 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입당시키며 세를 불렸다.[10]

이미 통일민주당에서 민주당이라는 이름을 먼저 사용하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당명을 평화당으로 하려 했다. 그러다가 "우리도 통일민주당처럼 민주당 이름을 못 쓸 이유가 없으니 우리도 평화당이라고 하지 말고 평화민주당이라고 하면 되는 게 아니냐?"라는 제안이 당무 회의에서 받아들여져 평화민주당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풀네임이 길어 일반적으로는 축약어인 평민당으로 불렀고, 이는 후술할 김대중의 대선 구호에서도 알 수 있듯 애초에 의도된 당명이기도 했다.

창당대회에서 채택된 정강·정책에 나타난 창당 이념 및 주요 정책은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 정의경제의 구현, 진정한 복지사회 실현, 자주적 평화통일의 달성, 국민화해 등이다.[11]

파일:13대 대선 김대중 후보 선거벽보.jpg

"평민은 평민당, 대중은 김대중"이라는 구호와 함께 의욕이 넘치던 출발에 비해 평민당은 1987년 13대 대선에서 36.64%의 득표율로 당선된 민정당 노태우, 그리고 28.03%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한 통일민주당 김영삼에 이어 김대중이 27.04%의 득표율을 얻어 3위로 떨어지면서 단일화 실패책임과 당 존립 자체에 위기를 겪었다

사실 대선 당시 평민당 나름대로 전략도 있었다. 이 당시 노태우의 어부지리 당선을 염려한 민주화 세력은 양김의 단일화를 촉구하였다. 사실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가 번복하고 대선에 뛰어든 것이었던 김대중은 명분 싸움에서 밀리자 '4자필승론'을 주장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자신호남, 노태우TK, 김영삼PK, 김종필충청을 나눠먹을 테니, 자신이 수도권에서 압승하면 도리어 양자 대결이 아닌 4자 대결일 때 승산이 높다는 것이었다.[12] 하지만 KAL기 폭파 사건으로 PK충청도경기도의 지역주의 정서가 옅어지며 노태우에게 민심이 쏠렸고, 군인 투표자들[13]의 표가 대부분 신군부 정권의 수뇌부였던 노태우에게 몰표하여 결과는 3등으로 낙선하여 노태우 정권 수립에 크게 일조하고 말았다.

당시엔 여론조사가 시범적으로 시행된 정도라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한국갤럽에서 대선 여론조사를 진행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재 정권 시절이다보니 제대로 된 표본을 무엇으로 잡을지 의문시 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권에서 야권 분열을 위해 일부러 김대중에게 유리해보이는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했다는 음모론도 존재한다. 심지어 앨빈 토플러의 책에도 등장하는 컴퓨터 선거 조작설도 호남에서의 지나친 몰표에 따라 큰 인기를 끌었으나 총선 결과를 보면 그다지... 다만 이전까지 호남은 여당 지지세는 전국 평균 수준으로 나쁘지 않았다. 물론 당대에는 관권 선거나 금권 선거가 대놓고 벌어진데다가 중대선거구제이기도 했다. 이것이 단박에 뒤집어진 것은 김대중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13대 대선 직후인 1987년 12월 21일, 평민당은 오전 김대중 총재 주재로 확대간부회의 부정선거 대책위원장 회의를 잇달아 열고 국민들에 대한 감사의 뜻과 단일화 실패에 따른 사과의 뜻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김대중 총재는 이날 '감사와 함께 사과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한 한 원인이 야당 단일화 실패에 있었다고 할 때 그 책임은 원인에 있다할 때 참으로 크다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국민에게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김대중 총재는 이어서 이번 선거는 관건과 금력으로 이루어진 원천적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하고 선거무효화를 위해서 결사 투쟁하기로 한 민주인사 대열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김대중 총재는 그러나 우리 젊은이들이 더 이상 희생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폭력과 무질서를 배제한 투쟁을 통해 부정선거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국민적 결단을 보여주자고 호소했다.

평민당은 이와 함께 오전 김총재 주재로 각 지부당 부정선거 대책회의를 열어 이번 선거를 전면적인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지역별 부정사례와 증거를 취합해서 백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정대철 평민당 대변인은 이날 오전 성명을 내고 민주화에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해 대변인 직을 사임한다고 밝혔다. 정대철 대변인은 참다운 민주 정부를 세울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무산시킨 데에 대해 두 지도자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인 모두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국민 앞에 용서를 빈다고 밝혔다.[14]

다음 해인 1988년 13대 총선에서는 박영숙 총재 권한대행이 선거를 운영하였는데 당초 통일민주당과의 단일화에도 실패하여 김대중김영삼에 대한 실망감이 더더욱 강해지는 바람에 야권 성향 유권자들이 대거 기권해서 평민당과 통일민주당 모두 참패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지만 선거 막판에 민주정의당이 알아서 자폭한 덕택에 여당 표심이 옅어져서 호남호남에서 출향한 서울 시민들이 평민당에게 표를 대거 몰아주었고[15] 그에 따라 평민당은 서울 17석 + 호남 36석+ 경기도 1석을 얻어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의 자리에까지 올라서는 반전을 일으켰다.

이런 평민당의 약진은 당 상징색이 누렇게 익은 벼를 상징하는 노란색이어서 이른바 황색 폭풍이라 불렸다.[16] 이를 통해서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때로는 합종연횡을 하면서 민정당을 견제했다. 2016년에 출범한 20대 국회와 비슷한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1990년 3당 합당을 단행해 민주자유당이 되면서 이런 여소야대 상황은 뒤집혀 버렸고, 평민당이 원내의 유일한 야당으로 남게 되었다. 3당 합당 직후 민자당의 의석수는 무려 216석에 달했다. 반면 평민당의 의석은 70석에 불과했다.[17] 이렇게 여당과의 규모가 안드로메다급으로 나면서 밀려나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1990년 당시의 여론조사를 보면 민자당과 평민당간의 지지율 차이는 비슷비슷하게 20% 정도에서 형성되었지만 기존 통일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이 꼬마민주당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평민당의 지지율이 크게 늘어났던 것은 아니었고 1991년 3월 지방선거에서 선전을 목적으로 재야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영입하면서 신민주연합당으로 명칭을 바꾸었지만 1991년 6월 광역 의원에서 투표율 저조와 야권분열로 참패했다.

이후 1991년 9월 꼬마민주당과 합당하면서 민주당이 된다. 합당 후에는 후자의 이전의 민주당과 구분하는 의미에서 통합민주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 평가

3당 합당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호남을 기반으로 삼는 김대중과 평화민주당이 5.18 민주화운동 이후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민주정의당과의 합당을 받아들일 수 없기도 했지만, 그와 별개로 3당 합당은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 체제를 부정하는 면이 컸기 때문이다. 또 3당 합당의 원래 구상대로 보수대연합을 명분으로 4당 합당이 이뤄졌을 경우[18] 안 그래도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지 못하던 진보 세력의 정계 진입은 더욱 요원해졌을 것이며, 비록 평민당이 진보 정당은 아니었다고는 하나 유의미한 세력을 가진 정치 집단 중에서는 사실상 유일한 反민주자유당 세력으로 남아 진보 세력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주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3당 합당 거부 이후 평민당은 3당 합당 반대파들이 통일민주당에서 갈라져 창당한 꼬마민주당과 합당해 민주당계 정당의 역사를 이어 나가게 된다.

한편 평민당의 창당은 김대중이 불복의 멍에를 쓰는 데 가장 일조한 사건이 되었다. 김영삼이 대권을, 김대중이 당권을 가져가기로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등의 이유가 있었다고는 하나 어찌되었든 대선 후보가 김영삼으로 정해진 이후 김대중은 탈당 및 독자 출마를 했고, 이것이 13대 대선에서 민주 세력 집권 실패의 가장 유력한 이유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9] 또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은 당시 정치권에 큰 피해를 남겼다. 평민당 창당 이전에는 표심의 구도가 여소야대의 선거이었지만, 평민당 창당 이후에는 13대 대선13대 총선의 개표 결과에서 알 수 있듯 영호남의 표심이 극단적으로 동서로 나누어졌고 지역감정이 악화되어 그 폐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김대중 본인은 생전 여러 차례 평화민주당 창당에 대한 깊은 후회를 표현하곤 했다.

4. 역대 당직자

4.1.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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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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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
제2·3대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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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원내총무

파일:평화민주당 심볼.svg 파일:평화민주당 글자.svg 원내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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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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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역대 선거 결과

6. 둘러보기

민주당계 정당
제5공화국 ~ 문민정부
(1981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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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교동계 등.[2] 김원기 등.[3] 박형오 등.[4] 박형오 등.[5] 속칭 '여의도백화점'으로 알려진 맨하탄빌딩이다.[6] # 현 중도민주 인터내셔널(2001년 명칭 변경). 당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총재였던 김대중이 생전 가톨릭 신자였음을 생각해 보면 놀랄 일은 아니다.[7] 문익환 목사의 동생이자 배우 문성근의 작은아버지. 13대 전국구의원·부총재 및 광주특위위원장을 역임했다.[8] '혁신정당'은 '진보정당'과 같은 말이다. 당시에는 혁신정당이라는 말이 주로 쓰였다.[9] 창당발기인대회는 창당을 위한 법적 조직인 창당준비위원회 구성을 위한 사전절차다. 창당대회와 다르다.[10] 당시 평민연 소속으로 입당한 재야 인사들은 이해찬, 임채정, 박영숙, 문동환 등 총 98명으로 이들은 계속 민주당 계열에서 활동하면서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서 국회의원, 장차관, 청와대 수석 비서관 등 고위직에 오른다.[11] 평화민주당 정강정책 발표[12] 후에 이것이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지역 등권론"으로 이어진다. 이 4자 필승론은 김대중의 오리지널 아이디어가 아니라 훗날 민주당동교동계 푸대접을 하며 많이 진보화되자 새로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게 되는 한화갑이 제기한 아이디어라고 한다.[13] 부대에서 은근히 노태우를 뽑으라고 압박을 준 곳도 있었다고 하며, 이 과정에서 정연관 상병 구타 사망사건까지 일어났다.[14] 부정선거대책위원장 회의에서 김대중 총재,단일화 실패 사과 1987.12.21 mbc[15] 다만 득표율로 보면 나름대로 골고루(?) 표가 나눠지기는 했다. 서울 지역 선거 득표율로만 본다면 평민당은 27%, 민정당은 26%, 민주당은 23%, 공화당은 16%의 득표율을 보였다.[16] 후에 15대 총선 자민련의 선전과 2016년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호남에서 압승한 것을 두고 "녹색 바람" 또는 "녹색 돌풍"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7] 사실 원래 민정당은 평민당을 합당 대상으로 삼아서 교섭을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지 10년이 채 되지도 않는 시점에서 전두환 정권의 피를 이어받은 민정당과 한솥밥을 먹는다는 건 평민당 스스로가 텃밭인 호남을 배신하는 것이 되어버리는데다가 재야 인사들로부터 욕을 들어먹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포기했다.[18] 3당 합당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평민당에는 중도 보수에 해당하는 인사들도 섞여 있었으며 한화갑이나 한광옥 같은 경우는 박근혜 정부 이후 보수로 전향했다. 때문에 보수야당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당시 비제도권의 재야세력, 노동운동 세력들은 평민당보다도 훨씬 왼쪽에 있었고 당시 민정당과 평민당의 간격보다도 평민당과 노동운동 세력들과의 간격이 더 넓었다고 해도 무방하다.[19] 이외에도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선거 낙선 이후 정계 은퇴를 번복했고,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후 의원내각제 개헌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개헌의 경우 1990년~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의 민자당(총 의석의 70%에 달했다.)과는 달리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을 합해서 과반을 넘긴 했지만 개헌선에 한참 모자란 상태인데다가 개헌저지선은 확보한 한나라당에서 적극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질래야 이루어질 수가 없는 상태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공조가 제대로 안 이루어지는 바람에 개헌선 확보는커녕 군소 정당과 무소속을 끌여들여서 겨우 과반을 확보했으니, 내각제 개헌이 물건너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