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38b8><colcolor=#fff> 로마 제국의 역사가 티투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Titus Flavius Josephus | |
출생 | 37년 |
예루살렘 | |
사망 | 100년 (향년 62~63세) |
종교 | 유대교 (바리사이파) |
저서 | 《유대 전쟁사》 《유대 고대사》 《아피온 반박문》 《요세푸스 자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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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시대의 유대인 정치가 겸 역사가. 1세기 유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인 《유대 전쟁사》 등을 남긴 인물이다.2. 생애
37년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는데 그리스어 이름인 "요세포스 마티우 파이스"로 미루어 보면 "맛다디아의 아들 요셉"이 그의 히브리식 이름으로 추정된다. 물론 요세푸스 자신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한 게 남아있지는 않으나 대체로 요하난→요한, 예호수아→예수, 시므온→시몬 같은 식으로 히브리 이름을 그리스어화한 걸로 미루어 보면 요세푸스의 히브리식 이름은 요셉이 분명할 것으로 보인다.예루살렘에서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고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제가 되었다. 그의 혈통은 하스몬 왕조와 닿아있다고 추정되는데 이런 덕분인지 그는 하스몬 왕조의 역사적 상황을 잘 알 수 있었고 《유대 전쟁사》에 이를 기록할 수 있었다.
요세푸스는 또한 유대교의 여러 종파들을 두루 거치기도 했는데 사제 출신에 하스몬 왕조의 혈통과 닿아있었던 터라 사두가이파에서 시작해 에세네파 등을 거쳤고 최종적으로는 바리사이파로서 자신의 입장을 정했다. 그러나 여러 종파들을 거친 그의 이력으로 1세기 유대교의 각 종파들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64년 네로 황제 시절로 이때 반로마 폭동을 주동하였다는 이유로 로마로 압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은 유대인들의 구명 탄원을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로마에 이르렀다. 네로를 움직이기 위해 유대인 배우의 도움으로 네로의 부인 포파이아 사비나를 만났고 포파이아는 젊은 요세푸스를 맘에 들어 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로마를 다녀온 경험은 바리사이파임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에게 국제 정세의 냉혹함을 알게 된 계기로 보인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제1차 유대-로마 전쟁) 요세푸스는 로마에 맞서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파멸을 가져올 것임을 알았지만 강경파들의 득세에 어쩔 수 없이 갈릴리의 요타파타 마을을 방어하는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요세푸스는 최대한 베스파시아누스군의 진로를 막는 전략을 써서 몇십 일 동안 베스파시아누스군을 붙들어 두었지만 결국 전력의 한계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요세푸스와 동료 지휘관들은 자살을 결정하고 제비를 뽑아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방식[1]으로 마지막에 요세푸스와 한 병사가 남았는데 요세푸스는 그 병사를 설득해 로마군에 투항하게 되었다. 야사로 이때 자살을 할 당시, 사람들을 줄을 세운 뒤 특정 수에 해당하는 사람을 골라서 죽이는 형태로 했는데 요세푸스가 이 순열을 계산해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순서에 섰다는 이야기가 있다. 수학에서는 이 일화에서 이름을 딴 요세푸스 문제(Josephus problem) 혹은 요세푸스 순열(Josephus permutation)이란 문제가 있다.
베스파시아누스 앞에 불려간 요세푸스는 그에게 “당신은 황제가 될 것입니다.”라는 예언을 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런 그를 죽이지 않고 로마로 보냈다.
이 요세푸스의 예언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는데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에 야심이 있어서 그런 예언을 즐거워했다는 주장부터 요세푸스가 살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환심을 사려고 도박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이런 발언은 어찌 보면 위험할 수도 있었는데 당시 네로가 건재한 상황이라[2] 요세푸스는 물론이고 베스파시아누스까지 반역죄로 몰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건만 별달리 문제가 없었던 걸 보면 그냥 베스파시아누스는 실없는 소리로 웃어넘겼던 모양이다. 물론 냉철하게 보면 유대의 고위층인 요세푸스의 이용 가치가 있어서 살려두었겠지만.[3]
유대인들의 지침서인 탈무드에는 이 예언 일화를 각색한 이야기가 있다. 벤 자카이란 랍비[4]가 비슷한 내용의 예언을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한 뒤, '황제가 된 뒤 예루살렘을 파괴하더라도 작은 학교만은 남겨달라'고 간청해 이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이 소원을 들어줬다는 이야기.
어쨌든 로마로 간 요세푸스는 한동안 연금 상태에 있다가 69년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면서 석방되었고 티투스의 막료가 되어 유대의 망국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게 된다. 티투스는 요세푸스를 보내서 예루살렘에 항복을 권했지만 강경파들이 들어먹을 리가 만무하고... 결국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대성전은 파괴되었다.
이후 요세푸스는 티투스의 절친으로서 로마로 돌아와 평생 로마에서 플라비우스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요세푸스에게 자신이 황제가 되기 전에 살았던 저택과 유대의 토지를 하사했으며 황제의 성씨인 플라비우스를 내려줄 정도였다.
이런 안정된 생활 가운데 요세푸스는 마카베오 전쟁부터 로마의 예루살렘 대신전 파괴까지를 기록한 《유대 전쟁사》와 천지창조로부터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유대 고대사》, 《아피온 반박문》, 《자서전》 등을 집필했고 100년에 사망했다.
세 번의 결혼에서 아들 셋과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 하나를 낳은 걸로 전해진다.
3. 저서
- 유대 전쟁사(75년경)
- 유대 고대사(95년경)
- 아피온 반박문(97년경)
- 요세푸스 자서전(99년경)
4. 평가
유대인들 입장에선 상당히 골 때리는 인물이다. 유대인이고 망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람이라 그의 기록을 보기는 보지만 한편으로는 로마에게 붙어서 여생을 안락하게 보냈으니 정통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도 이런 매국노가 없을 듯. 그래서 심지어 그가 기록한 《유대 전쟁사》는 친로마 입장에서 쓴 프로파간다 선전물이라고 보는 사람들까지도 있었다.# 그의 저술 목적이 자신을 보호해 준 로마 황제들을 칭송하고, 유다인들에 대한 로마인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려는 것이고, 유다인들이 로마에 맞서 무장 봉기를 일으킨 것은 온 민족이 그런 것이 아니라 현명치 못한 지도자들과 젤롯파 같은 과격한 그룹들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려 한 것이며[5] 그런 한편으로 동족을 배신해 가면서까지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한 자신의 비겁한 행동에 대한 보상 심리로 유대 역사에 대해 온갖 다양한 형태의 과장과 미화된 수식을 발라가며 서술했다고 보기도 한다.#[6]요세푸스의 기록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가 비록 인간적인 면이나 윤리적인 측면에선 매우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자아도취에 빠져 있기도 하는 등 비판받을 점이 많지만,[7] 그의 기록은 상당히 정확하고 1세기 유대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기록이라 인정을 받고 있다. 만약 요세푸스의 기록이 없었다면 마카베오기나 신약성경, 로마 역사가들의 기록 말고는 1세기 유대의 복잡한 상황을 알 만한 자료가 없었을 것이다.
요세푸스를 단순한 매국노로 부르기에는 복잡한 문제가 있다. 그는 앞장서서 나라나 동료들을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 패배가 확실해진 상황에서 자살 대신 투항을 택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 생존을 택한 것을 나라를 팔아먹은 것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 이후에 잘 먹고 잘 산 것은 별개로 평가받을 일이며, 그것을 가지고 매국노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리고 그의 저작에는 유대인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유대교에 대한 애정, 그리고 봉기의 실패로 자신의 동족에게 떨어진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한탄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또한 로마에 항복한 뒤에도 그는 동족들의 목숨을 최대한 구하려고 노력한 바는 있어도, 동족을 팔아넘기는 행위를 한 증거는 딱히 없다. 아피온 반박문 같은 경우는 애초부터 “헤브라이즘이 그동안 세간에 많이 왜곡되어 있다”며 이러한 왜곡을 퍼뜨리는 아피온[8]의 주장을 반박하고 왜곡을[9] 바로잡겠다는 목적으로 저술한 것이고, 헬레니즘과 비교해서 사상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우월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니.
한편 《유대 고대사》에 기록된 예수에 대한 기록인 "플라비우스의 증언"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예수/역사 문서를 참조. 요약하자면, 이 "플라비우스의 증언"은 가필 흔적이 보인다는 이야기다. 더불어서 전체 가필이 아니라 부분 가필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란 내용도 담겨 있다.
5. 기타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한 걸로 알려진 살로메 3세의 이름이 그의 저작에서 나온다. 성경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헤로디아의 딸, 헤롯의 의붓딸이라고만 나온다. 다만 춤을 춰서 헤롯 왕에게 세례자 요한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것은 요세푸스의 저작에는 나오지 않는다.의외로 북방 유럽에 거주하는 게르만족들의 전투 방식에 대해서 서술하기도 했다.
6. 관련 문서
[1] 기독교도 마찬가지지만 유대교 또한 스스로 죽는 자살은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다.[2] 물론 요세푸스가 이 예언을 한 1년여가 지난 68년에 네로는 자결한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요세푸스가 그런 정황을 예측했을 리는 만무하다.[3] 영국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로마 제국의 탄생과 멸망》에서는 요세푸스가 갈릴리 지역을 지키면서 동지들에게 성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얘기하면서 “47일 정도?”라고 던지듯 말했는데, 이게 포로를 통해서 당시 아버지와 함께 갈릴리 성을 공략하던 티투스의 귀에 들어가고, 정말 요세푸스의 말대로 47일 만에 성이 함락된다. 베스파시아누스 앞에 붙들려온 요세푸스는 심문 도중에 “유대는 로마 땅이고 너는 황제의 신민으로서 황제께 충성해야 한다”고 일갈하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당신이 황제가 될 텐데 누구더러 충성하라는 거요? 난 이 전쟁이 얼마나 갈지 맞혔고 이번에도 자신 있소. 베스파시아누스 당신, 틀림없이 황제가 될 거요”라고 조용히 말한다. 당연히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유대인 반역자 놈이 무슨 헛소리야. 황제의 일족도 아닌 내가 어떻게 황제가 된다는 거야. 어디서 되지도 않은 아첨을 하고 있어. 끌어내.”라며 들으려 하지도 않는데, 옆에서 관심 있게 듣고 있던 티투스가 말리면서 “이 자를 잘 구슬리면 남은 반군의 마음을 돌릴 수 있습니다. 날짜도 맞췄는데 또 모르잖습니까? 써먹을 데가 많을 겁니다.”라며 아버지를 설득하는 장면으로 각색되어 나온다.[4] 이때 협상을 숨기기 위해서 자신이 병사한 것으로 위장해 관에 숨어서 로마군 진영으로 갔다. 항전을 주장하던 강경파 인사들은 존경하는 랍비의 '시신'을 차마 모독할 수 없어서 그냥 진영 밖으로 나가게 하고, 관을 의심하여 칼로 찔러보려 하던 로마군에게는 벤 자카이의 제자들이 "우리는 비무장이오. 그리고 당신들의 황제가 돌아가셔도 이런 식으로 시신을 확인합니까?"라고 결사적으로 말려서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5] 실제로 유대 전쟁사에서는 요세푸스가 예루살렘에서 농성하며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와중에 “동물들을 봐도 강한 짐승 앞에서 약한 짐승이 몸을 사리지 않는가. 강한 자 앞에서 약자가 몸을 사리며 복종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렇게 하도록 전지전능하신 유일신께서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이다”라며 더 이상 로마군에 맞서봐야 현실적으로 부질없는 저항이고 동시에 신의 창조 섭리에 대한 거역이라는 논지를 펴는 장면이 나온다.[6] 그러나, 이런 평가가 100% 합당한 것인지는 조금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도 외국에 투항하기를 주장한 선지자라던가, 조국을 정벌한 강대국들 여럿의 고관을 역임한 사람이라던가, 심지어는 외국의 고관 출신으로서 예루살렘을 재건한 인물까지 다수의 유대 왕국의 멸망에 관여하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국가에 종사한 유대인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 당연하지만 상기 인물들을 매국노라고 비난하는 유대인은 보이지 않는다.[7] 요타파타에서 다른 지휘관들이 다 서로를 죽이는 방식으로 자살하는 걸 말리지 않다가 한 사람과 자신만 남자 그를 설득해서 로마군에 투항한 것은 분명 윤리적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겠지만, 《유대 전쟁사》를 보면 실제 유대인들이 지휘관답게 자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너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요세푸스로서도 “나는 다 데리고 오고 싶었는데 답이 없었다”고 변명할 여지는 있는 셈.[8] 1세기경에 활동한 이집트 출신의 헬레니즘화된 이집트인 서기관이다.[9] 요세푸스가 지적한 아피온의 ‘왜곡’ 가운데는 유대 민족들이 이집트를 나오게 된 과정에 대해서 “이집트에서 살던 유대 민족들 사이에 나병이 돌아 파라오가 이집트인들에게까지 나병 옮는 것을 막으려고 유대 민족들을 모조리 이집트 외부로 내몰아서 격리 수용시킨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에서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역사가라는 마네토의 저서를 인용해 "이집트 역사에 등장하는,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를 쳐서 함락시켰다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이집트를 떠나 예루살렘을 세웠다는 힉소스 민족이 다름 아닌 유대 민족이었다"라는 주장을 편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관련된 유물이 하나도 안 나와서 아직은 말만 그럴싸한 떡밥 수준이며, 유대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했다는 타이밍부터가 분분하다. 참고로 힉소스의 어원은 외국 땅의 왕자(외지인)들이라는 "히카우 카슈트(Hikaw khasut)"였는데, 이집트 사학자 마네토의 오류로 '양치기(목자, 유목민)의 우두머리'로 오역하면서 유목민으로서의 "힉소스 민족"이란 개념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힉소스 민족이란 곧 셈족이다.# 힉소스가 셈족임도 맞고 셈족 가운데 유대인과 아랍인이 들어있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힉소스=유대 민족은 아니라는 소리. 굳이 비유하자면 동이족과 한민족의 관계와 같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