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일권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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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균 (1995) | → | 황일권 (1996~1997) | → | 김영수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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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일권 黃一權 | |
출생 | 1969년 6월 9일 ([age(1969-06-09)]세) |
서울특별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덕수상고[1] - 한양대[2] |
포지션 | 내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1년 1차 지명 (OB) |
소속팀 | 한국화장품 야구단 (1991~1992) OB 베어스 (1993~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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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OB 베어스의 내야수.2. 선수 경력
국가대표 1번 타자 출신이다. 한양대 시절 1년 선배 김동수(86학번), 동기생 이종택(87학번), 1년 후배 정민태(88학번), 2년 후배 구대성(89학번), 3년 후배 유지현(90학번) 등과 함께 전국대회에서 수차례 우승과 준우승을 경험했다.1991 시즌을 앞둔 신인 지명에서 송구홍(건국대)과 함께 나란히 등장한 서울출신 거물급 3루수로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송구홍보다는 한수 아래라는 평가였기에, 주사위던지기 승부에서 이긴 LG 트윈스가 먼저 송구홍을 지명하고 OB는 황일권을 지명하게 된다. 그런데 이마저도 황일권이 억대 계약금을 요구하며 구단과 마찰을 일으킨 끝에 실업야구팀인 한국화장품 야구단과 계약하면서 OB 입단은 2년 미뤄진다. 실업야구에서 2년 연속 MVP를 수상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993년에 당시로서는 거액이었던 1억원의 계약금을 받고 OB 베어스에 입단한 황일권은 오자마자 등번호 1번을 달고, 주전 3루수였던 임형석을 유격수로 밀어내며 개막전 3루수 1번 타자로 낙점되었을 정도로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으나, 공격 수비 주루 모두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저조한 성적을 내며 주전에서 밀려났다.[3]
1994 시즌에 다시 3루수 주전경쟁을 하여 안경현을 제치고 개막전 3루수 2번타자로 낙점되지만, 역시나 저조한 성적으로 다시 안경현에게 주전자리를 내주고, 1994년 시즌 도중에 현역병으로 입대했으나 요통으로 군복무를 다 마치지 못한채 제대하였다. 복귀 이후 별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은퇴했다.[4]
전통적으로 발야구를 자랑하는 베어스이지만, 93년과 94년에는 역대 최악 수준의 팀도루를 기록하였는데, 여기에는 김광수 은퇴 이후 정수근 등장 이전까지의 공백을 메우지 못한 황일권의 기대 이하의 성적도 한 몫했다고 볼 수 있다.
멘탈이 상당히 약한 선수였다. 어쨌든 1차지명 선수라 집중 지도 받으면서 코치들이 넌 할수 있다 독려하면 그걸 스트레스로 받아들여서 견디질 못했다고 한다. 거기에 2년을 실업야구로 보내면서 기량 발전에도 저해가 온것 역시 실패의 원인이었다.
3.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사구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OPS |
1993 | OB | 63 | .192 | 20 | 5 | 0 | 1 | 6 | 10 | 3 | 8 | 6 | 27 | .288 | .269 | .557 |
1994 | 11 | .214 | 6 | 1 | 0 | 0 | 1 | 3 | 0 | 2 | 0 | 7 | .267 | .250 | .517 | |
1995 | 1군 기록 없음 | |||||||||||||||
1996 | 49 | .185 | 17 | 2 | 0 | 2 | 8 | 4 | 1 | 8 | 6 | 29 | .290 | .272 | .562 | |
1997 | 16 | .167 | 5 | 0 | 0 | 0 | 1 | 2 | 0 | 1 | 0 | 9 | .194 | .167 | .360 | |
KBO 통산 (4시즌) | 139 | .189 | 48 | 8 | 0 | 3 | 16 | 19 | 4 | 19 | 12 | 72 | .276 | .256 | .532 |
4. 관련 문서
[1] 중앙고 시절 덕수상고로 전학[2] 1987학번[3] 마침 이때 임형석도 손가락 부상으로 경기에 나올 수 없게 되면서 유격수와 3루수 자리가 모두 비게 되었는데, 이 자리를 3루수는 안경현, 유격수는 김민호가 메꾸면서 주전 자리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것이 안경현과 김민호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4] 한양대 동기생 이종택은 1991년 해태 타이거즈에서 불과 1시즌만 뛰고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