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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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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필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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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01

OB / 두산 베어스 등번호 30번
윤준호(1996~1997) 이경필(1998~2004) 맷 랜들(2005~2008)
두산 베어스 등번호 23번
용덕한(2004~2006) 이경필(2007) 최승환(2008~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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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시즌 중 찍힌 사진으로, 선수 본인은 시즌 끝나고 방출되었다...
이름 이경필(李慶弼 / Kyeong-pil Lee)
생년월일 1974년 5월 21일 (만 [age(1974-05-21)]세)
출신지 서울특별시
학력 서울중대초 - 배명중 - 배명고 - 한양대[1]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7년 1차 지명 (OB)
소속팀 OB 베어스 / 두산 베어스(1997~2007)

1. 소개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데뷔 후
2.2.1. 활약상2.2.2. 부상2.2.3. 몰락
3. 은퇴 이후4. 연도별 주요 성적5. 기타

1. 소개

두산 베어스 투수 겸 前 천하무적 야구단 감독. 피칭머슴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배명고 재학 시절 유격수 김동주와 함께 전국대회(봉황대기, 전국체육대회, 황금사자기) 우승에 크게 공헌한 인물 중 하나. 청소년 국가 대표로도 여러 번 뛴 적이 있는 그야말로 A급 유망주. 원래는 사이드암 투수였으나, 한양대학교 체육학과 야구부 시절에서 오버핸드로 전환했다.

2.2. 프로 데뷔 후

2.2.1. 활약상

1997년 OB 베어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으며, 선발+구원 등판으로 7승 4패 평균자책점 3.62를 기록했다. 1998년에는 2자릿수 승수(10승)을 달성했으며, 평균자책점도 3.12로 더 낮아졌다.

1999년은 이경필의 전성기라고 할 만한 해였다. 13승(리그 8위)을 찍으면서 평균자책점은 3.19를 기록했는데, 당시가 극악의 타고투저 시대였던 만큼 3.19라는 평균자책점은 충분히 낮다고 할 수 있는 평균자책점이 되겠다. 리그 평균자책점 3위를 마크했을 정도였으니.

2.2.2. 부상

그렇게 전성기를 달리던 중 1999년 여름에 팔꿈치 통증을 느껴 진단을 받은 결과, 토미 존 서저리가 필요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두산 마운드가 그를 중심으로 돌았기 때문에 김인식 감독은 이경필을 전력에서 제외하기 어려웠고, 팀 사정상 계속해서 진통제를 맞으며 뛰어야 했던 그는 결국 시즌이 끝난 후 수술대에 오르게 된다. 그렇게 2000년을 날렸지만 원래 2년은 재활해야 고칠 정도의 팔꿈치 상태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재활을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빠르게 복귀하여 공을 던지게 되었고, 이것이 몰락의 시발점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했으니 다행. 다만 1차전 패전을 겪었고, 그 뒤의 성과도 좋지 못했다.

2.2.3. 몰락

2001년의 마지막 불꽃 이후 성급한 복귀 후유증이 제대로 나타나며 구위가 급격히 하락, 성적은 그야말로 안습이 따로 없었다. 그 이후 2004년까지 그가 거둔 성적은 도합 12승 27패. 평균자책점도 4점 ~ 5점대를 찍는 등 그야말로 몰락을 보여 주었다. 그 와중에 병역비리에 연루되어 버린 데다가,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기 전에는 아예 두산에서 방출 통보까지 받았다. 방출 통보는 취소되었지만, 이 때 이경필의 마음고생은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

2007년에 복귀했지만 1승 2패에 5점대 평균자책점을 찍는 처참한 성적을 거두었고, 두산은 시즌 후 결국 이경필을 방출하고 말았다.

3. 은퇴 이후

방출된 후 김인식 감독과 김성근 감독의 콜을 받기도 했으나, 두산 유니폼을 벗게 된 것에 큰 상심을 받아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야구판을 아예 떠나 버렸다. 관련 인터뷰를 보면 이 때 받은 충격이 장난이 아니었던 듯.

그런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생겼는데, 그 전환점은 바로 DJ DOC김창열이었다.[2] 김창열은 이경필에게 김창열이 속한 야구 동호인 '만신창이'의 감독직을 부탁했고, 이경필이 이를 수락하면서 비록 사회인야구팀이긴 하지만 그는 극적으로 야구판에 복귀하게 된다.

그 후 김창열천하무적 야구단을 기획하면서 이경필은 코치로 초청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로 출신인 이경필은 아마추어인 천무단을 가르치면서 더 즐겁다는 말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부담감을 내려놓아서 그런 듯. 이것으로 보아서는 천무단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보아도 될 듯하다.

천하무적 야구단이 종영된 이후 천하무적 어린이 야구단 창단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IPTV 스포츠 채널인 IPSN에 해설위원으로 들어가 있다. 같은 방송사에서 해설하는 마해영, 김용달, 구경백, 최익성 등과는 달리 목소리가 하이 톤이라 그냥 들어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당시에는 단독중계하는 JTBC 중계진에 투입되었다.

해설 일을 하면서 대리운전 사업도 겸하고 있는데, 처형이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어서 장애인들의 폐쇄적인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장애인을 위한 대리운전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다음 스토리펀딩.

은퇴 이후 개신교에 입교해 최근에는 몽골에서 야구 보급과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관련 기사

박명환야구TV 오상민 편에서 잠깐 언급됐는데, 껌을 씹는 속도의 차이를 보고 타자들이 이경필의 구질을 간파했다고 한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97 OB 29 126⅔ 7 9 4 0 3.62 126 8 56 10 75 1.44
1998 27 150 10 9 0 0 3.12 137 8 42 6 94 1.19
1999 OB 28 166⅔ 13 7 0 0 3.19 151 12 55 10 91 1.24
2000 1군 기록 없음
2001 5 6⅓ 0 0 0 0 1.42 3 0 3 2 6 0.95
2002 10 24⅔ 1 2 0 0 5.47 30 3 20 2 13 2.03
2003 26 106 8 13 0 1 4.50 122 4 43 12 47 1.56
2004 21 99⅔ 5 12 0 0 4.70 113 4 44 11 49 1.58
2005 군복무(공익근무요원)
2006
2007 15 34⅔ 1 2 0 1 5.19 43 0 16 3 14 1.70
KBO 통산
(8시즌)
161 714⅔ 45 54 4 2 3.82 725 39 279 56 389 1.41

5. 기타

  • 후대에 배영수도 이경필과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되었다. 이유 또한 비슷하다. 혹사로 인한 부상 때문에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는 점, 사정 때문에 예정된 재활을 줄여 복귀했다는 점, 결국 이 문제로 부상이 재발하여 복귀 후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둘은 비슷하다. 이 점 때문에 이경필이 배영수를 걱정하기도 했다. 다른 점이라면 구단삼성 트레이닝 센터가 없던 이경필은 선수 생활이 끝났고, 삼성 트레이닝 센터가 있는 배영수살아남았다는 것 정도. 하지만 뭐가 됐건 조기 복귀를 종용한 구단을 까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다.
  • 간혹 이경필을 천무단 감독으로 임명하자는 의견이 있으나, 이경필이 감독이 되기에는 오만가지 문제점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여기를 참조. 다만 천하무적 야구단 자체는 방송이 끝났음에도 연예인 야구단 중 하나로 남았고 나중에는 결국 정식 감독이 되었다. 지금은 이경필 본인이 해외 선교를 하고 있어서 감독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의문.
  • 김석류의 아이러브베이스볼(책)에서 마운드 위에서 항상 을 씹었었는데, 직구를 던질 때는 몸에 힘이 들어가서 껌도 세게 씹고, 변화구를 던질 때는 잠시 동안 씹는 것을 멈추는 투구 버릇이 있었다고 말했다.
  • 프로야구매니저에선 그의 전성기인 1999년도를 반영하여 99 두산덱의 1선발급 스탯과 함께 8성의 놀라운 능력치를 부여했다. 그리고 2013년에 시작된 카드 재평가에서 8성에서 10성으로 코스트가 증가함과 동시에 변화구 제구력의 스탯이 폭풍 상향되었다.


[1] 체육학과(1993학번)[2] 참고로 김창열두산 베어스의 팬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