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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2년 8월 5일 ([age(1952-08-05)]세)[3][4][5] |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캄퐁참성 핌코스나 (現 캄보디아 캄퐁참성 핌코스나) | |||
재임기간 | 제30대 총리 | ||
1985년 1월 14일 ~ 2023년 8월 22일 | |||
서명 | |||
링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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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5명 | ||
배우자 | 번 라니 (1976년 결혼) | ||
자녀 | 장남 훈 마넷 차남 훈 마닛 삼남 훈 마니 딸 훈 마나 | ||
학력 | 베트남 국립 행정 아카데미 (행정학 / 석사) 하노이대학교 대학원 (명예박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 (명예박사)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명예박사) 우석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명예박사) | ||
신체 | 170cm, 72kg | ||
종교 | 불교 | ||
정당 |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01c4fa, 사이즈=.9em, 글자색=#ffffff, 내용=인민당)] | ||
의원 선수 | 7 | ||
의원 대수 | 1 ~ 7 | ||
경력 |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외교부장(1979년 1월 7일 ~ 1986년 12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1981년 ~ 1985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외교부장(1988년 ~ 1990년) 제3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내각 수상(1985년 1월 14일 ~ 1989년 9월 25일) 제26대 캄보디아 내각 수상(1989년 9월 25일 ~ 1993년 7월 2일) 제1~7대 캄보디아 국회의원(1993년 6월 14일 ~ 현직) 캄보디아 왕실정부 제2수상(1993년 9월 24일 ~ 1998년 11월 30일) 제26대(2) 캄보디아 왕실정부 수상(1998년 11월 30일 ~ 2023년 8월 22일) 제5대 캄보디아 인민당 주석(2015년 6월 20일 ~) 캄보디아 상원의장 | ||
군사 경력 | |||
복무 | 캄보디아 혁명군 | ||
1970년 ~ 1977년 | |||
캄보디아 구국 민족 단결 전선 | |||
1977년 ~ 1979년 | |||
캄보디아 인민혁명군 | |||
1979년 ~ 1993년 | |||
캄보디아군 | |||
1993년 ~ 1999년 | |||
최종 계급 | 원수 | ||
보직 | 크메르 루주 동부지구 대대장 캄보디아 구국 민족 단결 전선 지도자 캄보디아 왕군 통수권자 | ||
참전 | 캄보디아 내전 캄보디아-베트남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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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캄보디아의 제30대 총리이자 독재자.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독재자 중 하나다.1985년 1월 14일 만 32세의 나이로 최연소 총리가 된 후 38년간 캄보디아를 통치했다. 처음에는 캄푸치아 인민혁명당 주석 헹 삼린 아래의 2인자에 불과했지만 1991년 헹 삼린 주석이 퇴임한 이래 본격적으로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연정, 쿠데타, 선거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권력을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적 숙청과 탄압, 인권 탄압 논란 등으로 인해 야당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2023년 8월 총리직을 아들 훈 마넷에게 물려주었으나 권력은 여전하다.
2. 생애
1952년 8월 5일 캄보디아의 껌뽕짬 성의 중국계 혼혈인[6] 가문에서 태어났다.[7] 이후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크메르 루주의 부대 지휘관으로 열심히 싸워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후에도 군에 남아 있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킬링필드라는 초유의 악행을 저지르자 점차 크메르 루주를 멀리했다고 하며 결정적으로 베트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변경지대 자국민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자 이를 거부하고 1977년 베트남으로 도주해 베트남에서 반 크메르 루주 군대를 양성했다.훈 센의 젊은 시절 사진.
베트남군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자 요직을 거쳐 1982년 당시 국가주석 헹 삼린에 의해 30세에 부수상 겸 외교부장이 되었고 1985년에는 고작 만 32세라는 젊디젊은 나이에 수상에 올라 세계 최연소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8]
1991년,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캄보디아로 귀환할 당시의 모습(오른쪽에 안경 쓴 사람이 훈 센). 훈 센은 한 쪽 눈을 잃은 후 초창기에는 공식 석상에서 자신의 눈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1991년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유엔 평화유지군이 캄보디아에 주둔하였으나 그는 야권 탄압을 주저하지 않았다. 유엔이 지켜보는 가운데 100명 이상의 야권 인사가 살해됐다.
1993년 UNTAC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거에 캄보디아 인민당을 이끌고 참가했다. 캄보디아 인민당은 노로돔 라나리드가 이끄는 푼신펙에 밀려 제2당에 그쳤으나 무력을 앞세워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기로 합의했다.
1997년 7월 쿠데타를 일으켜 라나리드 제1총리를 축출하고 캄보디아의 절대권력자가 되었다. 이후 그의 휘하 군부대들은 노로돔 라나리드에게 동조하는 부대원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학살했는데 태국으로 도피해 온 캄보디아의 한 경찰관은 "훈 센의 부대가 라나리드 군인들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모두 죽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자료 라나리드 세력에 대해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증언에 의하면 라나리드 편의 병사는 캄캄하고 환기통이 없는 골방에서 눈이 가려지고 손을 뒤로 묶인 채 심문받는 도중 각목과 허리띠, 부러진 책상다리 등으로 심하게 얻어맞고 무거운 쇳덩이로 손바닥을 짓누르는 고문을 당했다고 하고 훈 센 측의 경찰관들과 군인들 등이 라나리드측 병사들에게 결코 잠을 재우지 않았으며 이들에게 인분이 섞인 하수도 물만 마시게 했다고 한다. 기사 전기충격은 기본이고 달군 쇳덩이로 몸을 지지거나 머리를 비닐봉지로 묶어 질식시키는 등의 잔인한 크메르 루주식 고문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이에 항의하는 국민들을 가차없이 진압했다. 노로돔 시아누크가 2012년 사망한 후 그 아들 노로돔 시아모니를 꼭두각시 국왕으로 내세우고 배후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3. 독재
그의 집권 기간은 전두환 이후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모든 대통령들의 재임 기간과 겹친다. 심지어 이승만[9], 박정희[10], 전두환[11]의 18년 7개월, 즉 대한민국의 독재 기간 총합이 그의 통치 기간인 38년 7개월의 반보다도 짧다. 아시아에서 그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집권한 독재자는 장제스와 김일성 2명 뿐이다.[12]캄보디아의 언론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캄보디아의 방송사인 바욘TV와 신문사 캄보디아 트메이 데일리는 그의 맏딸인 훈 마나가 소유하고 있다. 아프사라TV는 캄보디아 여당인 인민당 소속인 사이삼알 환경부장이 운영하고 있으며 마이TV 등을 비롯한 다른 방송들은 중국계인 끗 멩이 소유하고 있다. 끗 멩은 이름 앞에 옥냐란 별칭이 붙어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의 국왕이나 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명예 작위로, 그가 캄보디아 여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준다.
2003년부터 미국 국무부 쪽에서는 그의 개인 자산이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2000년대 들어서 경제적 토지양허가 크게 유행했는데 이것은 부동산 개발 이권을 노린 그와 측근들이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외국계 자본에 마구잡이로 팔아넘긴 거나 다름없다. 이를 위한 법과 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외국인이 100%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차릴 수 있게 했으며 이들 회사가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하도록 허용했고 계약기간 99년에 같은 기간을 한 차례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장기임대’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2008년 4월 26일 “지난 1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토의 절반가량이 외국 투기꾼들에게 팔려나갔다. 크메르 루즈의 학살을 피해 피란길에 올랐던 인구보다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뺏기고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 의해 황폐화된 캄보디아를 안정시켰지만 사리사욕을 챙기는 정책들을 실시하면서 점점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2001년 토지법이 개정되면서 농민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개정된 법은 농민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5년 이상 아무런 분쟁이 없으면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지만 농민은 대부분 권력자들에게 토지를 빼았겼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지난 10년간 연간 7% 이상의 고속성장을 거듭해 왔지만 임금 인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의류공장 노동자의 월급은 80달러(80,000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전 세계의 내로라 하는 의류기업이 모여들고 있지만 캄보디아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적다는 불만이 상당히 팽배하다. 실제로 2013년 12월 말부터 80달러인 최저임금을 2배 수준인 160달러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인 의류노동자들에게 무장경찰과 공수여단을 투입해 진압하면서 최소 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
2013년 1월 5일에는 야당이 수개월째 시위장소로 수도 프놈펜 시내에 위치한 자유공원을 사용하자 그의 큰아들 훈 마넷 중장의 부대원들로 추정되는 오토바이 헬멧을 쓴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철거되었다. 집회 장소에 간이텐트를 치고 임시거처 삼아 장기투쟁을 벌여 온 야당 지지자들과 사회운동가와 승려들도 무력 진압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야 했으며 체포된 사회운동가들과 시위 가담자 23명은 정식재판도 받지 못한 채 외딴 교도소에서 약 5개월 가량 강제 수감되었다가 간신히 풀려나기도 했다. 몇 개월 동안 자유공원 진입로는 군과 경찰이 친 철조망으로 막혔으며 무장한 군과 경찰 병력이 시위진압용 차량을 동원하며 계속해서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2013년 7월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는 투표용지에 여러 차례 표기하지 못하도록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도입했으나 잉크가 라임주스 같은 액체에 쉽게 지워지는 등 표 조작 의혹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돼 투표를 못 할 정도로 부정선거 의혹을 받았는데 부정선거 논란이 크게 일어 야당이 선거불복종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어찌저찌 넘어가고 연임 확정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반대세력을 약화시키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아예 죽여버려야 한다. … 누구든 거리에 나가 시위를 벌일 정도로 강하다면, 그 개새끼들을 흠씬 두들겨팬 다음 우리에 가둬버리겠다." 다만 이런저런 수단을 동원했다고 해도 여당 의석수가 크게 줄어들고 야당 의석수가 크게 불어난지라 그의 입지에 큰 타격이 오기는 했다.
2015년에는 자신의 아들 세 명을 당 내 고위직으로 승진시켰는데 그의 이 같은 조치에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려고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정책 홍보와 이미지 관리에 페이스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반정부 목소리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캄보디아인권센터(CCHR)에 따르면 최근 7개월 사이에 캄보디아 당국이 온라인상의 글을 문제 삼아 최소 7명을 체포했으며 적어도 23명이 자신들의 글 때문에 공개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하며 2015년 8월에는 한 야당 의원이 페이스북에 과거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국경선 합의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그의 지시로 체포되었고 # 제1야당인 캄보디아구국당(CNRP)의 삼랭시 주석에게 입국 금지 조치를 취했다.# 게다가 2016년 11월 27일에는 유엔 인권기구와 갈등을 빚으면서 캄보디아 정부는 내정불간섭을 약속하지 않으면 유엔인권사무소를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항해 1970년대 초 론 놀 정권이 미국에서 빌린 돈을 거론하면서 미국에 진 더러운 빚을 모두 탕감해 달라고 요구했다. 기사 하지만 미국이 거부하면서 미국과의 합동군사훈련을 취소했다. 물론 미국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캄보디아는 이미 충분히 친중 성향이 짙은 데다 옆에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더 유용한 우호국인 베트남이 있기 때문이다.
2017년 6월 지방선거에서 제1야당인 캄보디아 구국당이 크게 약진하여 2018년 총선에서 정권교체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예측이 나오던 와중에 9월 들어서 캄보디아 구국당 당수를 반역죄로 체포하고 캄보디아 영자매체인 캄보디아 데일리에게 압력을 가해 폐간을 강제하는 행보를 보이면서 차기 총선을 앞두고 야당의 세를 꺽을려는 의도로 탄압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야당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모든 의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웠다. 원래대로라면 캄보디아 구국당이 이겼어야 하는 선거였지만 탄압을 강화해서 야당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평이 나왔다.
2018년 12월에 장남 훈 마넷이 후계자로 발탁되었다.# 캄보디아판 연개소문이나 최충헌 혹은 일본 막부의 초대 쇼군이 생각나는 행보다. 2021년 12월에 훈 마넷이 총리가 되는 것을 지지하는 선언을 했다.#
2019년 11월 한국에서 열린 아세안 회의에 장모가 위독하여 불참했다.
2021년 2월에 인터넷을 통제, 검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내용의 법령을 공포했다.#
2022년 1월 7일, 아세안 의장국 국가수반 자격으로 미얀마를 방문했지만 대중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다.
2022년 2월 그의 사진에 신발을 던진 여성이 4년 만에 풀려났다. #
2022년 3월 둘째주에 그의 체제를 반대하는 야당 인사 등 20명이 무더기로 구속되었다.
2022년 4월 1일에는 그의 부재 시 언제든 장남인 훈 마넷 장군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2022년 11월 15일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
2023년 3월 3일에는 캄보디아구국당(CNRP, Cambodian National Rescue Party)을 이끌던 그의 반대파 켐 소카에게 미국 단체와 공모하여 국가 전복을 음모했다는 이유로 가택연금 27년형이 내려졌다. #
그의 친중 성향은 장남 훈 마넷에게 세습하기 위한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4. 총리 사임 이후
2023년 7월 23일 열린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여당이 125석 중 120석을 차지하며 압승했다.2023년 7월 26일 오후 2시 10분 총선 사흘 만에 자신이 총리직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총리직 사의를 표명하고 권력을 아들 훈 마넷에게 이양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확한 퇴임 날짜는 2023년 8월 22일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장장 38년 7개월 8일동안 유지된 그의 기나긴 독재는 시리아, 토고,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과 같은 부자승계로 마무리짓게 되었다. # 물론 퇴임 후에도 상왕 노릇을 하면서 영향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총리직 퇴임 후 틱톡 계정을 제대로 굴리고 있다. 6월 28일에 만들어서 첫 영상을 올렸는데 7월 27일 이후부터는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사생활과 중국 드라마 시청, 손자손녀들의 영상 등 다양한 영상을 올리고 있다. 그의 호화생활이 가감없이 나오지만 댓글의 대부분은 찬양 일색이다.
2024년 4월 상원의장으로 다시 권력에 복귀했다.#[13] 그는 퇴임 후에도 여당 의장과 국왕 최고자문위원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장남은 총리, 차남은 국방부 정보부대장, 막내아들은 공무부 장관, 조카사위는 부총리직을 역임하고 있다. 사실상 캄보디아라는 나라가 훈 씨 일가의 사유물이 된 셈이다.
5. 여담
- 민주 캄푸치아에서 일어난 일을 빼고 해석하면 오삼계, 이완용, 비드쿤 크비슬링, 클레멘트 고트발트, 안타나스 스녜츠쿠스도 능가하는 세계사 최악의 매국노인데 자신이 태어난 조국의 군인으로 복무했으면서 조국의 최대 적국과 손을 잡고 그 적국의 조국 침공과 멸망, 괴뢰국 건설에도 협조하면서 권력을 잡아 그의 자손들도 2대째 독재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려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조국에서 일어난 일이 너무 참혹했기 때문에 딱히 매국노로 비판받지는 않으며 오히려 폴 포트가 한 짓이 더욱 매국노스럽다. 다만 집권 기간 동안 노골적으로 친베트남 행각을 벌이고[14] 외환을 유치한다며 자국의 토지 45% 가량을 외국인 소유로 만든 전적도 있기 때문에(#) 사실상 매국노라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게 되었다.[15]
- 얼굴을 자세히 보면 박지원처럼 한쪽 눈이 이상한데 크메르 루주 지휘관으로 1975년 4월에 프놈펜 공격중 부상으로 왼쪽 눈을 실명하고 의안을 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 부상으로 얼굴에 대각선 방향으로 칼자국도 나 있다.
- 2000년부터 골프에 취미를 붙여서 매주 한두 차례 골프장에 간다고 하지만 골프장에 가기 전에 반드시 집사람의 허락을 받는데 그 이유는 내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노래 작사를 즐긴다고 하며 직접 만든 가사를 가수에게 주기도 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식사 시간은 10분이면 충분하며 뉴스를 접할 때는 TV 두 대와 라디오를 동시에 켜 놓는 습관도 가졌다. #
- 캄보디아 최고의 여배우였던 삐셋 삘리카(ពិសិដ្ឋ ពីលីកា)[16]가 1999년 7월 6일 프놈펜의 한 시장에서 권총 3발을 맞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지 일주일 만에 사망했는데 그녀의 죽음에 대해 그의 연인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몇몇 주장에 의하면 그가 이 여배우와 사랑에 빠진 것을 훈 센의 아내가 알고 크게 질투하여 경찰국장을 통해 관계를 끊으라고 경고했지만 그녀가 듣지 않자 훈 센의 아내가 그녀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려 그녀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
- 무려 5차례나 반대파들에게 벼락에 맞아 죽으라는 투의 폭언을 남긴 적이 있다. 2009년 9월 7일에는 야당인 삼랑시당의 대변인이던 임 소반(Yim Sovann)이 '캄보디아 정부가 자국민을 만족스럽게 부양하지 못한다'는 취지의 지적을 하자 "캄보디아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벼락을 맞을까봐 두렵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남겼으며(출처 1) 2018년 5월 23일에는 "나를 저주하거나 모욕하는 사람들은 번개에 맞아 죽은 후 시신을 묻을 땅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남겼고(출처 2)[17] 심지어 2019년 3월 4일에는 자신의 통치 하에서 캄보디아가 1979년보다 더 가난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벼락에 맞아 죽는다 해도 (캄보디아가 자신의 통치 하에 더 가난해졌다는 주장을) 맹세할 수 있나? 설령 그대의 자식이나 손자, 아니면 가족 전체가 죽을지라도?"라는 말까지 남겼다. 출처 3 2022년 6월 5일에는 지방선거가 부정하다고 비판한 사람들에게 '이 비난이 거짓임이 밝혀진다면 벼락에 맞아 죽거나 아니면 다른 불행에 의해 죽을 것이다.'[18]라고 발언했다. # 게다가 2022년 11월 15일에도 아들 훈 마넷의 프랑스 밀반입 자금 논란에 대해 언급한 인물에게 소셜 미디어로 "저 인간은 왕부터 젊은이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너는 이게 전혀 싫증나지 않나?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면 벼락이 치냐?" 라는 글을 소셜 미디어에 게재하였다. #
- 자신에 대해서도 “Now I would like to make a vow. I swear to die. As long as the devil wants me to die, I can be dead by getting hit by a car, through a plane crash, an electric shock, get struck by lightning or whatever”("이제 나는 서약을 하고 싶다. 나는 죽기를 맹세한다. 악마가 내의 죽음을 원하는 한, 나는 차에 치이거나, 비행기 추락, 전기 충격을 받거나, 번개에 맞거나, 뭐 그런 것들에 의해 죽을 수 있다.")#라는 발언을 했다.
- 벼락과 관련된 발언이 잦은 이유는 캄보디아의 주된 자연재해가 벼락임에 기인하는 것이 원인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캄보디아에서 낙뢰로 인한 사망자는 많은 편이다. ##
- 2006년에는 한국의 우석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 장남이라고 대외적으로 알려진 훈 마넷은 사실 훈 센의 차남인데 그 이유는 그가 1976년 11월 10일에 가진 장남 훈 캄솟(Hun Kamsot)이 태어난 바로 그 날에 의사의 실수로 떨어져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는 첫 자식을 혼자서 출산한 상황이었던 데다 그는 첫 자식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기도 전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포함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인 폴 포트 정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19] 출처 크메르 루주의 학살로 인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피해를 당했던 적도 있고 본인도 정치적인 이유로 탄압과 학살을 지시한 적이 있다는 점을 보면 그도 가해자가 된 피해자 중 한 명인 셈이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그의 경제고문을 맡았는데 이런 인연 덕에 2008년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해 준 바 있으며 퇴임 후 2013년부터 다시 그의 경제고문을 맡았다.
- 외신과의 인터뷰는 거의 하지 않는 고립주의적이고 폐쇄된 성격으로 유명한데 2009년에는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한 바가 있다.인터뷰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18세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는데 그 이유는 캄보디아 내전 당시 정글에서 생활할 때 모기를 쫓기 위해 담배를 피운 것이 지금까지 끊지 못한다고 한다. 동남아시아 같은 열대우림 지역의 모기들은 치명적인 질병을 옮기는 경우가 많고 담배가 독하다 보니 모기도 담배연기를 싫어한다. 물론 자신의 주치의도 금연을 권하고 가족과 국민도 담배 끊기를 바라지만 매우 어렵다고 하며 실제로 몇 차례 금연을 시도했는데 전부 다 실패했다. 다만 손자나 손녀들과 있을 때 또는 국제회의장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 장녀 훈 마나(Hun Mana, 1980 ~)는 2009년 총리 보좌관으로 임명된 바 있으며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캄보디아 도피 중이던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의 사업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2015년 자료에 따르면 2010년부터는 캄보디아의 방송국과 신문사 등 최소 14개의 언론사 의장을 역임하고 있다고 한다. #
[1] 외래어 표기법에 의한 표기로, 실제 크메르어 발음은 /hɔn saen/, '훈 싸엔', '혼 싸엔'에 가깝다.[2] 해당 이름은 크메르어 발음을 주캄중국대사관에서 중국어로 음차한 것으로 본래 그의 중국식 이름과는 다르다.[3] RFA Khmer, “Cambodia’s Hun Sen changes birth year to align with the lucky Year of the Dragon” 자유아시아방송, 2022년 6월 23일.[4] Harish C. Mehta, Julie B. Mehta, Strongman: The Extraordinary Life of Hun Sen: The Extraordinary Life of Hun Sen (Marshall Cavendish International Asia Pte Ltd, 2013), 61.[5] “... 훈센 총리의 변호인인 끼 떼크는 "법적 생년월일이 실제 태어난 날짜로 바뀌었다"고 밝혔다. (...) 실제 생년월일은 1952년 8월 5일이지만 법적으로는 1951년 4월 4일로 등록돼있었다. 이로 인해 (...) 혼선이 생겨서 법적 생년월일을 정리한 거라고 끼 떼크 변호인은 설명했다.” / 김범수, “37년 집권 훈센 캄보디아 총리, 생년월일 변경…추측 '무성'” 연합뉴스, 2022년 6월 24일.[6] 그의 본명은 '운승(雲昇)'으로 '훈센'은 운승의 조주어 발음을 크메르어로 읽은 것이다.[7] 법적 생년월일은 1951년 4월 4일이라 많은 혼선을 빚었다.[8] 북한 김정은이 만 27세에 권좌를 세습받았고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가 만 27세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며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만 35세 때 수상이 되었다. 세계 최연소 대통령(겸 최연소 비군주 지도자)은 만 19세에 대통령이 된 아이티의 장 클로드 뒤발리에. 물론 후자는 아버지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권력을 세습받은 것이다.[9] 6.25 전쟁 3년, 제1공화국 말기 2년으로 5년이다.[10] 약 6년 9개월이다.[11] 6년 10개월이다.[12] 싱가포르의 리콴유는 직접 총리에 있던 기간은 31년으로 앞에 셋 보다 짧다.[13] 이 점도 투르크메니스탄의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와 판박이다.[14]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관계는 매우 나쁘다. 자세한 것은 캄보디아-베트남 관계 문서 참조.[15] 크메르 루주가 나라를 뿌리부터 박살내놓은 탓에, 훈센 일가 정도면 차라리 양반이라고 여겨서 캄보디아인들이 지금을 가장 안정된 시기라며 긍정적으로 여긴다. 심지어 같은 이유로 노로돔 시아누크의 친정 시기와 더불어, 프랑스 식민지배 시기도 캄보디아인들 사이에서 덤으로 함께 미화되는 실정이다.[16] 고아 출신으로 왕실무용단원을 거쳐 영화계에 들어가 대스타가 되었다.[17] 참고로 이 발언으로부터 6일 전에 캄보디아에서는 4세 소년을 포함한 5명의 사람과 개 3마리가 벼락에 맞아 죽은 일이 있었으며(이에 훈센의 반대파 중 한 명은 "그 아이와 개가 야당 의원이었나?"고 비꼬았다.) 이 시점까지 2018년에 캄보디아에서 벼락을 맞고 사망한 사람은 무려 50명에 달했다.[18] 원문은 “If you accuse others of committing fraud – do you dare to swear upon its truth or else be struck by lightning or die by other misfortunes? Do not say that oaths are a laughing matter. Even the president of the US is sworn into office on a Christian Bible.”(당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기를 친다고 비판한다면 당신은 감히 그것의 진실을 맹세할 수 있나? 아니면 번개에 맞거나 다른 불행에 의해 죽을 수 있나? 맹세를 웃음거리라고 하지 마라. 미국 대통령들도 성경에 따라 취임 선서를 한다.)이다.[19] 여기서 폴 포트의 이름이 나온 이유는 킬링필드에 기인한다. 캄보디아에 있었던 800여 명의 전문 의사들은 민주 캄푸치아 치하에서 학살당해 40명 정도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망하였으며 폴 포트는 그 대신 '의사들이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사람들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가야 한다'며 10대 소년들을 아무런 의료적인 경험 마련이나 기본적인 지식 전수 없이 환자들을 치료하게 했는데 소년 의사들은 기본적인 마취도 하지 않고 환자를 치료할 정도로 자질을 갖추지 못했고 이런 참극이 발생한 원인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