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주요 선거·투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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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 제6차 1987년 10월 27일 | 시행 불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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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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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
투표 독려 공익광고[1] | ||||||||||
{{{#!wiki style="margin: -7px -12px" | 1996년 4월 11일 15대 총선 | → | 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 | → |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 | }}} | ||||
투표율 | 57.2% ▼ 6.7%p | |||||||||
선거 결과 | ||||||||||
▼ | ||||||||||
{{{#!wiki style="margin: -16px -12px; letter-spacing: 0px" | 한나라당 133석 | ㅤ | 115석 새천년민주당 | }}} | ||||||
정당 | 지역구 | 비례대표 | 총합 | 비율 | ||||||
[[한나라당| 한나라당 ]] | 112석 | 20석 | 132석 | 48.35% | ||||||
96석 | 19석 | 132석 | 48.35% | |||||||
12석 | 5석 | |||||||||
[[민주국민당(2000년)| 민주국민당 ]] | 1석 | 2석 | 3석 | 1.10% | ||||||
[[희망의한국신당| 희망의한국신당 ]] | 1석 | 0석 | 1석 | 0.36%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5석 | - | 5석 | 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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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0년 4월 13일 치러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20세기 마지막 총선이었다. 투표율은 57.2%였다.[2] 지금과는 달리 1인 1표제였으며, 비례대표 의석은 지역구에서 각 정당이 득표한 것의 합산으로 결정했다. 법률에 따른 공식명칭은 '비례대표'였지만, 실상은 15대 총선에서의 전국구를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3] 이 때문에, 이 시기의 비례대표를 그냥 전국구로 칭하는 일도 잦은 편이다. 참고로 본 선거는 민주당계 정당이 여당으로 치른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이기도 하다. 또한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2년 만에 치러졌다는 점에서 중간평가 격인 선거이기도 했다.2. 배경
의원 정수는 273명[4]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비해 26명이 줄었다. 비례(전국구) 의석수를 동수로 유지한 채 지역구 의석수만 26석 줄였다. 현재, 제6공화국 역사상 의원 정수가 줄어들었던 유일한 경우인데, 이는 1997년 외환 위기 여파로 전 국가적으로 고통 분담을 하는 데 국회 역시 몸집을 줄이고 불필요한 비용 지출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에 의한 것이었다.출마 정당은 연립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과 야당인 한나라당, 민주국민당, 민주노동당, 청년진보당(사회당의 전신), 희망의한국신당 등이 참여했다.
참고로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던 시기라, 여야의 승패를 분석해보려면 두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수를 합산해서 봐야 한다. 다만, 이 선거에서는 양당 후보간 선거 연대는 없었다.
2.1. 남북정상회담 개최 발표
선거 3일 전인 2000년 4월 10일에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발표돼 선거에 미칠 영향을 두고 정치권의 셈법이 복잡해졌다.박재규 전 통일부장관은 총선 직전이니 신중해야 한다며 "총선 이후 발표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당시 김대중 정부 실세였던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장관이 "이것으로 총선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발표를 종용했다고 한다. 야당인 한나라당에선 '총선용 신북풍이자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쏘아붙였다.
다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같은 정치권의 기대 또는 우려와 달리 정상회담 개최 발표는 총선 판세에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고 평가받는 편이다.[5] 물론 당시에도 남북 정상회담 자체에 대한 여론은 지지가 압도적이었지만[6], 국내 정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선 33%의 국민이 국내 정치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응답한 반면, 48%는 그렇지 않다고 답해 남북 정상회담을 국내 정치와는 별개로 생각하는 견해가 많았다.
3. 선거 결과
3.1. 지역구
자세한 내용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국회의원 문서 참고하십시오.제16대 총선의 지역구 결과 지도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의석 현황 | |||||||
지역 | 한나라당 | 새천년민주당 | 자유민주연합 | 민주국민당 | 희망의한국신당 | 무소속 | <colbgcolor=#eeeeee,#2d2f34> 합계 |
서울 | 17 | 28 | 0 | 0 | 0 | 0 | 45 |
인천 | 5 | 6 | 0 | 0 | 0 | 0 | 11 |
경기 | 18 | 22 | 1 | 0 | 0 | 0 | 41 |
강원 | 3 | 5 | 0 | 1 | 0 | 0 | 9 |
대전 | 1 | 2 | 3 | 0 | 0 | 0 | 6 |
충남 | 0 | 4 | 6 | 0 | 1 | 0 | 11 |
충북 | 3 | 2 | 2 | 0 | 0 | 0 | 7 |
광주 | 0 | 5 | 0 | 0 | 0 | 1 | 6 |
전남 | 0 | 11 | 0 | 0 | 0 | 2 | 13 |
전북 | 0 | 9 | 0 | 0 | 0 | 1 | 10 |
부산 | 17 | 0 | 0 | 0 | 0 | 0 | 17 |
대구 | 11 | 0 | 0 | 0 | 0 | 0 | 11 |
울산 | 4 | 0 | 0 | 0 | 0 | 1 | 5 |
경남 | 16 | 0 | 0 | 0 | 0 | 0 | 16 |
경북 | 16 | 0 | 0 | 0 | 0 | 0 | 16 |
제주 | 1 | 2 | 0 | 0 | 0 | 0 | 3 |
전국 | 112 | 96 | 12 | 1 | 1 | 5 | 227 |
3.2. 비례대표
비례대표 |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당선인 |
| 7,365,359 | 38.96% | 20 |
[[새천년민주당|]] | 6,780,625 | 35.87% | 19 |
[[자유민주연합|]] | 1,859,331 | 9.84% | 5 |
[[민주국민당(2000년)|]] | 695,423 | 3.68% | 2 |
| 77,498 | 0.41% | 0 |
[[민주공화당(1997년)|]] | 3,950 | 0.02% | 0 |
[[민주노동당|]] | 223,261 | 1.18% | 0 |
| 125,082 | 0.66% | 0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774,221 | 9.39% | - |
총합 | 18,904,740 | 100% | 46 |
3.3. 정당별 분석
무소속 당선인들의 복당이 가능한 이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의 의회 구도[7] | ||||
여권 137석[8] | 야권 137석 | |||
새천년민주당 | 자유민주연합 | 한나라당 | 민주국민당 | 희망의한국신당 |
119석 | 18석 | 134석 | 2석 | 1석 |
- 새천년민주당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이인제 선대위원장 체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제주, 호남에서 충청, 수도권을 거쳐 강원까지 이른바 "S자 노선" 전국 정당을 꿈꾸었다. 그리고 선거 결과 전략이 어느 정도 들어맞으며 의석수가 늘어나 호남 석권과 함께 수도권과 강원, 제주에서 1당을 차지했고[9], 충청권에서도 상당수의 의석을 확보한다. 하지만 영남권에서 단 1석도 얻지 못했고, 공동 여당이었던 자유민주연합과의 선거 공조 무산으로 한나라당에게 20여개 선거구를 어부지리격으로 내주며 1당 확보에는 실패하고 만다.[10] 수도권도 제1당 달성에는 성공했지만 경기와 인천에선 경합 우세 정도 수준이라 당초 기대치보단 못한 결과였다.[11]
- 자유민주연합
공동 여당이었던 자유민주연합은 텃밭인 충청도에서 기대보다 부실한 성적을 낸다. TK와 강원도에서 크게 선전하고 충청을 석권하며 무려 50석을 기록한 15대 총선 의석의 1/3 토막난 결과였다. 세부 내용을 보면 반민주자유당, 반민주당 정서를 자극하여 15대 총선 당시 TK 의석을 상당히 차지했지만, 16대 들어서는 DJP연합 등의 여파[12]로 TK를 비롯한 비충청권 보수 유권자들은 자민련 대신 한나라당에 다시 몰표를 던지게 되었고, 충청권도 당시 충청 출신인 이인제 선대위원장을 내세운 새천년민주당에 상당수 의석을 뺏기게 된다.[13] 특히 충청북도는 이전부터 있던 캐스팅보트 성향을 다시 한번 드러내며 한나라당3, 민주당2, 자유민주연합2의 구도를 만들어준다.
- 한나라당
한나라당은 영남 지역을 제외하곤 (충북을 충청도로 합칠 시) 어느 지역에서도 제1당이 되지 못했지만, 여권 분열 등에 힘입은 수도권 접전 지역 선방과 인구수가 풍부한 영남 텃밭의 몰아주기로 의석을 쓸어담으며[14] 과반에서 4석 모자라는 133석으로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영남을 기반으로 한 지역주의 기반의 1당이란 점에서[15] 전국적 지지세가 약하다는 한계점을 뚜렷히 드러내게 되었다. 실제 이 선거는 이후 보수정당이 수도권에서 본격적으로 밀리기 시작한 기점이 된 총선이었다고 평가받는다.[16]
- 군소 정당
한나라당 낙천 현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국민당은 제법 거물들이 많아 기대를 모았으나, 막상 결과는 지역구와 전국구에서 1석씩밖에 못 건지며 대패하였다. 반면 한때 김종필의 가신이었던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해 희망의한국신당을 만든 김용환 후보는 보령시-서천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된다. 김용환 후보가 허화평과 손을 잡았지만, 사실상 선거에 홀로 나와 홀로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거물들이 대거 낙마한 민주국민당을 생각하면 저비용 고효율의 극치를 보여준 셈이었다. 이후 민국당은 한나라당 대신 여권에 협조하고, 김용환 전 의원은 당을 해체한 후 이듬해인 2001년 한나라당에 입당한다.
선거 직전인 2000년 1월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당초에 창원과 울산에서 의석을 획득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측되었고 실제 출구조사 결과에서도 2석의 의석을 확보하는 것으로 나왔지만 막상 투표함을 까보니 두 곳 모두 한나라당 후보가 이기는 바람에 원내정당의 꿈이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청년진보당(1998년)은 비례득표에선 마찬가지로 저조했지만 지역구 득표에선 서울 전 지역구에 출마한 젊은 후보를 중심으로 진보정당 치고는 만만찮은 2~5%의 득표를 올렸으나[17], 이후 선거에서 진보 정당 포지션을 민주노동당에 빼앗겨 사실상 듣보잡화되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정리하면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기대치엔 못 미친 약진[18], 한나라당의 선전, 자유민주연합의 교섭단체 달성 실패 정도로 요약되며, 선거는 백중세였지만[19] 그래도 당만으로 따지자면 제1당을 차지한 한나라당이 최대 승리자라고 간주되었다.
참고로 이때 노무현 후보가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종로구 대신 부산광역시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다만 이런 그의 모습은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는 밑거름이 되고, 이런저런 여파가 겹쳐 1990년대 3당 합당 이후 보수 텃밭이 된 PK 지역은 2010년대 이후부턴 다시 TK 대비 보수세가 약화된다. 한편, 재미있게도 이때 영남에서 비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된 유일한 사람이 울산에서 당선된 정몽준 후보였다.
3.4. 문세표의 전설 - 초, 초, 초박빙선거
16대 총선에서 1위와 2위 후보간 표차가 1000표 미만이었던 지역구는 총 15곳이다. 그런데 16대 총선은 다른 총선과 비교해서 100여 표차 이내의 선거구가 유난히 많았기도 했다. 심지어 20표차 이내로 당락이 결정된 선거구가 무려 4개나 되었다. 그야말로 1표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보여준 초접전의 본좌급을 보여준 총선이다.- 경기도 광주군[20](한나라당 박혁규 vs 새천년민주당 문학진) 3표차(0.006%p차!)[21]
문학진 전 의원의 별명을 문세표가 되게 한 이 선거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로 길이 남았다.
- 서울 동대문구 을 11표차(0.014%p차)(한나라당 김영구 34,796표 vs 새천년민주당 허인회 34,785표)
다만 동대문구 을은 위장 전입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줬다고 판단되어 선거 자체가 무효로 처리되었다. 양 후보가 모두 위장 전입을 한 것으로 밝혀져 그 숫자 차이가 표차보다 많다는 이유였다. 당선 무효가 아니라 선거 무효이므로, 재판부는 의원직을 상실한 김영구 의원의 재출마도 가능했었다고 해석했으나, # 김영구 전 의원은 나오지 않고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며, 허인회 후보만 재도전 했다. 그 때 치러진 재보선에서의 당선자가 바로 한나라당의 홍준표다. 결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허인회 후보가 또 설욕전을 펼쳤으나, 홍준표가 1.5%p 차로 아슬아슬하게 당선된다.
- 충북 청원군 16표차(0.03%p차)(한나라당 신경식 vs 민주당 정종택[22] vs 자민련 오효진)[23]
15대 총선에서도 신경식 vs 오효진 두 후보가 맞붙어 375표(0.66%p)차로 신경식 후보가 당선되었는데, 16대에는 이보다 더한 접전이 벌어졌다. 출구조사에서는 정종택 후보가 경합우세를 보일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실제로는 3위에 그쳤고, 불과 16표 차이로 신경식 후보가 4선에 성공했다.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0%E6%BA%CF_%BA%C0%C8%AD%3F%BF%EF%C1%F8.png
- 경북 봉화군∙울진군 19표차(0.03%차)(한나라당 김광원 vs 민주당 김중권[24])
여기는 표차도 주목을 받았지만, 당시 한나라당의 텃밭 중 텃밭이던 TK의 군 지역이라 더욱 주목을 많이 받았다. 만약 김중권이 20표만 더 받았다면,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 타이틀로 당선된 안동시 갑 권오을에 이어 민주당계 정당이 TK에서 의석을 배출할 수 있었다. 또한 영남권에서 승리한 유일한 민주당 후보가 될 수도 있었다. 김중권의 낙선 이후 TK에서 민주당계 정당의 당선자는 아래 등장하는 김부겸의 2016년 당선까지 없었다.[25]
김중권 후보는 고향인 울진군을 중심으로 강한 표몰이를 했지만, 김광원 후보도 동향이었을 뿐더러, 삼척시 산불로 인해 많은 울진군민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해 낙선했다는 말이 지역 정가에 오르내렸다. 울진 원자력 발전소를 반대했다가 낙선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의 전력도 한 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
- 서울 용산구 113표차(0.12%p차)(설송웅[26] vs 진영[27])
- 경남 진해시 115표차(0.18%p차)(한나라당 김학송 vs 무소속 김우석)
- 서울 동작구 갑 146표차(0.16%p차)(서청원 vs 이승엽)
- 인천광역시 중구∙동구∙옹진군 193표차(0.27%p차)(한나라당 서상섭 vs 민주당 서정화 vs 자민련 이세영)[28]
- 경기 군포시 260표차(0.25%p차)(한나라당 김부겸[29] vs 민주당 유선호) 등이 있었다.
- 울산 북구 한나라당 윤두환 43.03% vs 민주노동당 최용규 41.79% - 563표차
- 강원 춘천시 민주국민당 한승수 28.71% vs 한나라당 류종수 28.12% - 628표차
- 서울 마포구 을 한나라당 박주천 46.20% vs 민주당 황수관 45.23% - 691표차
- 경북 문경시∙예천군 한나라당 신영국 47.35% vs 자민련 신국환 46.39% - 786표차
- 경기 안양시 동안구 한나라당 심재철 49.12% vs 민주당 이석현 48.43% - 869표차
- 강원 영월군∙평창군 한나라당 김용학 36.55% vs 민주당 염동열 34.67% - 884표차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양당 초접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당 초접전 선거구가 제법 나왔다지만, 이 16대 총선에 비해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셈이다.[30]
여튼 이 초접전 격돌의 승자는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이 되었다.[31]
3.5. 아슬아슬한 여소야대 - 50:50 국회
16대 국회는 한나라당이 1당을 차지했으나 새천년민주당이 의석을 불리면서 어느 당도 과반(137석)을 점하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 호남 지역 무소속을 더하면 민주당은 119석에, 자민련이나 정몽준같은 반 한나라당계 보수가 20석을 구성했으니 그야말로 절묘했다. 이런 배경 속에 전반기 국회는 국민신당 출신의 이만섭 전 새천년민주당(여당) 의원[33]이, 후반기 국회는 야당 한나라당의 박관용 전 의원이 의장직을 맡았다.15대 국회의 캐스팅보터였던 자민련의 의석이 줄어들면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할 제3당 없이 여야 양당의 협의정치로 대부분의 법안이 처리되었다. 여기에는 '날치기 절대불가'를 역설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역할도 컸다. 한 예로 민주당은 개원 이후
DJP의 사이가 서먹해지면서 무산된 선거공조로 인해 벌어진 충남 진검 승부에서 자민련은 텃밭 의석을 대거 내주며 큰 타격을 입었지만, 민주당도 자력으론 과반이 안되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결국 두 당은 다시 화해하며 손을 잡았고, 자민련 총재권한대행 이한동이 전격적으로 국무총리에 지명되면서 DJP공조는 사실상 복원되었다. 그리고 16대 국회 개원 이후에는 민주당과 자민련, 민국당이 모두 힘을 합쳐 이만섭 전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당선시키고, 이한동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참고로 두 건의 표결은 모두 찬성 140(민주당 119석+자민련 17석+민국당 2석+한국신당 1석+정몽준) : 반대 132(한나라당 133석 중 1명 이탈)로 여권의 아슬아슬한 승리로 끝났다.
이런 협력무드의 연장선상에서 급기야 2000년 12월 말엔 민주당에서 자민련에 의원을 꿔주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즉, 민주당 의원 중 3명(송석찬, 배기선, 송영진)을 자민련으로 이적시켜 교섭단체 조건인 의원수 20명을 맞추도록 한 것. 그런데 또 자민련 의원 한 명이 이런 꿔주기에 반발해 탈당[35]하면서 교섭단체 조건에서 1석이 미달하게 되자 한명(장재식)을 더 꿔주었다. "꿔줬다"는 표현이 참으로 정확하게도, 2001년 통일부장관 파동으로 양당의 공조가 붕괴되자 이들 네 명의 의원은 민주당으로 다시 복당한다. 어찌되었든 당시 여권은 당분간만이라도 민주당(115석) + 간신히 교섭단체를 구성한 자민련(20석) + 사실상 와해된 민주국민당(2석) + 정몽준 등으로 아슬아슬하게 원내 과반수를 확보했었다.
그러다 2001년 9월 3일 통일부장관 파동으로 공조가 붕괴되고, 한나라당의 재보궐 선거 승리와 일부 의원들의[36] 한나라당 이적으로 16대 국회 2기(2002년 6월부터)가 시작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 말기에는 한나라당이 140석이 넘는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다.
16대 국회의 마지막 해인 2004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 이후 따른 정치적 갈등으로 새천년민주당에서 분당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면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도 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13, 14, 15대 총선에 이어 16대 총선까지 선거 직후 결과는 아슬아슬한 여소야대로 끝났고, 이후로는 반대로 17대(열린우리당)-18대(한나라당)-19대(새누리당)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을 차지한다. 때문에 16년 뒤인 2016년 20대 총선과 24년 뒤인 2024년 22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이 총선이 마지막 여소야대를 만든 선거로 남게 된다.
4. 여담
4.1. 출구조사 大실패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결과 # | ||
정당 | - | |
| 115(K: 104~126/S: 113~119) | 120 |
[[새천년민주당|]] | 132(K: 119~138/S: 126~133) | 127 |
[[자유민주연합|]] | 17 | 17 |
[[민주국민당(2000년)|]] | 2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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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정치)| 무소속 ]] /기타[37] | 6[38] | 5[39] |
하지만 막상 개표가 중반에 이르면서 새천년민주당 경합 우세로 예측되었던 곳이 상당수 뒤집혀지는 바람에 개표 결과는 반대로 한나라당의 원내 1당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전체 득표율 예측은 한나라당이 약간 우세한 수준으로 오차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KBS-SBS: 한나라당 38% vs 새천년민주당 37%) 어차피 지역 단위에서 많이 빗나간 건 마찬가지였고 당연히 방송사들은 1996년 총선에 이어 또 다시 사과 방송을 해야했다. 선거 다음 날 뉴스데스크 도중 사과방송.[42]
16대 총선에서 KBS-SBS 예측조사와 실제 당선인이 바뀐 지역은 아래와 같다. (앞쪽이 예측조사 1위, 뒤쪽은 실제 당선인) 총 21개 지역. 그 중 14석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43] 굵은 글씨는 출구조사에서 경합으로 표시되지 않았는데도 결과가 뒤집힌 지역이다.
- 경기도
- 성남시 분당구 을 : 이상철(새천년민주당) → 임태희(한나라당)
- 안양시 동안구 : 이석현(새천년민주당) → 심재철(한나라당)
- 광명시 : 조세형(새천년민주당) → 손학규(한나라당)
- 동두천시·양주군 : 정성호(새천년민주당) → 목요상(한나라당)
- 남양주시 : 이성호(새천년민주당) → 조정무(한나라당)
- 군포시 : 유선호(새천년민주당) → 김부겸(한나라당)
- 하남시 : 정영훈(새천년민주당) → 유성근(한나라당)
- 파주시 : 이재달(새천년민주당) → 이재창(한나라당)
- 안성시 : 이해구(한나라당) → 심규섭(새천년민주당)
- 광주군 : 문학진(새천년민주당) → 박혁규(한나라당)
예측 민주 승리/실제 한나라 승리가 15곳, 예측 민주 승리/실제 무소속 승리가 2곳, 예측 민노 승리/실제 한나라 승리가 2곳, 예측 무소속 승리/실제 한나라 승리가 1곳, 예측 한나라 승리/실제 민주 승리가 1곳이다.
16대 총선에서 MBC 예측조사와 실제 당선인이 바뀐 지역은 아래와 같다. (앞쪽이 예측조사 1위, 뒤쪽은 실제 당선인) 총 23개 지역. 역시 이 중 13곳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예측 민주 승리/실제 한나라 승리가 14곳, 예측 한나라 승리/실제 민주 승리가 4곳, 예측 민주 승리/실제 자민련 승리가 1곳, 예측 자민련 승리/실제 민주 승리가 1곳, 예측 민주 승리/실제 무소속 승리가 1곳, 예측 민국 승리/실제 한나라 승리가 1곳, 예측 민노 승리/실제 한나라 승리가 1곳이다.
4.2. 낙천 운동
'함량 미달 정치인에 대한 낙천·낙선 운동'을 벌인 광범위한 시민단체연합인 '2000년 총선 시민연대'가 처음으로 등장해 힘을 발휘한 선거였다.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안티 조선일보" 운동으로 대표되는 언론개혁 운동과 "깨끗한 정치"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시기의 산물이지만, 당시 한나라당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이들을 지원해 선거에서 유리하게 활용하게 했다는 식의 비판이 일기도 했으며 게다가 이들 시민단체가 김종필과 정몽준에게 명예로운 은퇴를 권유한 것도 치명타였다. 결국 이래저래 DJP 공조는 큰 손상을 입고 말았다.결과적으로 선관위에 의해서 낙천 운동은 불허되었으나, 선거법 개정으로 낙선 운동은 허가되면서 이런 특정 후보 떨어뜨리기 열풍은 4년 뒤인 2004년 17대 총선까지 계속되었으며 일부에서는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당신들이 시민 전체를 대표하는가? 우린 그런 위임을 한 적이 없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反) 총선 시민연대'가 활동하기도 했다.
5. 국회의원
자세한 내용은 제16대 국회의원 문서 참고하십시오.6. 관련 항목
[1] 개그맨 이홍렬과 배우 한고은이 출연했다. 근데 한고은은 데뷔 초부터 국적이 미국이여서 국회의원 투표권이 없다.[2]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52.7%)에 이어 연속으로 50%대 투표율이 나와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실제 2000년대 치러진 일부 선거들은 투표율이 40%대까지 떨어지기도 하는 등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지만, 그래도 2010년대 이후부턴 다시 조금씩 회복되었다.[3] 1인 2표제에 따른 비례대표제는 다음 총선인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실시되었다.[4] 지역구 227명, 비례 46명.[5] 비슷한 사례로 2010년 MB정권 당시,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천안함이 북한의 도발로 침몰했다고 밝히면서 북한이 도발을 하면 강력하게 응징하겠다고 한, 쉽게 말해 북풍몰이를 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다. 마찬가지로 선거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다만 북한 변수가 항상 선거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건 아니라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같은 케이스도 있긴 하다.[6] 당시 KBS 여론조사를 보면 정상회담 개최가 바람직하다 81%, 남북관계 좋아질 것 58%, 이산가족 상봉이 쉬워질 것 80%, 경제교류 늘어날 것 79%, 햇볕정책 찬성 61%, 회담으로 통일이 더 빨리 다가올 것 53% 등이었다.[7] 무소속의 경우 민주계 4석, 보수계 1석.[8] 당시 자유민주연합은 새천년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꾸렸다.[9] 참고로 헌정 사상 민주당계 정당이 강원도에서 다수의석을 확보한 것은 5대 총선과 해당 선거가 유이하다. 보수정당이 기록적으로 참패한 21대 총선과 22대 총선에서도 보수정당이 승리하였다.[10] 단순 산술적 계산만 따져보면 선거 공조 무산으로 서울 6석, 인천 3석, 경기 11석, 충북 3석, 경북 2석, 강원 1석해서 무려 26석을 날렸다. 물론 선거 공조를 한다고 무조건 시너지 효과를 낼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선거 공조에 성공했으면 공동 여당이 아무리 못해도 과반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실제로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득표율을 합하면 45.7%로 한나라당을 6.7%p 정도 따돌리는 수준인데 이 정도면 상당한 의석 격차를 벌려나갈 수 있는 수치다.[11] 경기도 41석 출구조사 중 빗나간 의석이 8석이나 되었다.[12] 15대 총선 당시 TK 지역에서 상당수의 의석을 자민련에게 내준 한나라당(15대 총선 당시 신한국당)은 15대 대선을 앞두고 TK 지역의 보수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박근혜를 영입했다. 비록 15대 대선에서는 패했으나, TK 지역의 보수층은 한나라당에 몰표를 던졌다. 그리고 이후 선거부터 TK 지역은 완전히 한나라당 지지로 굳어졌다. 반면, 자유민주연합은 15대 총선 당시 TK 지역에서 보수층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DJP연합 체결 직후부터 TK 지역 보수층들은 자민련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게다가 TK 지역 일부 국회의원들이 아예 자유민주연합에서 탈당하여 한나라당으로 넘어갔고, 이 사건은 TK 지역 보수층에서 DJP연합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는걸 보여준 증표였다. # 결국 이후 선거부터 TK 지역에서는 자민련이라는 간판의 메리트가 사라지게 되었다.[13] 1999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이전부터 주장해온 내각제 개헌에 대해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자유민주연합의 충청권 정세가 나빠지기 시작했고, 그 여파가 총선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다.[14] 실제 이때 한나라당이 얻은 지역구 112석 중 자그마치 64석이 영남권 의석이였다. 참고로 이때 영남권 총 의석은 65석이었는데, 한나라당이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1석은 울산 동구의 정몽준 지역구였다.[15] 사족으로 당시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선거때마다 민주당에 90% 이상의 득표를 몰아주던 전라도 지역을 싸잡아 공산당이냐는 식으로 색깔론 비아냥대는 경우가 잦았는데, 정작 영남쪽 총선 결과가 저렇게 나온 이후로는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니들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란 식으로 역공을 당하는 웃픈 일도 있었다.[16] 민주화 이후 1990년대에도 그런 기운은 있었지만, 민주당에서 넘어온 YS 집권기였던데다 민주당계도 DJ민주당과 꼬마민주당 등으로 갈라지면서 갈팡질팡하던 시절이라 확실한 의석수로 나타나진 않았다.[17] 일부 지역은 자유민주연합을 달고 나온 군소후보나 민주노동당 후보를 앞서기도 했다.[18] 의석수를 늘렸고 전국정당화도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과반과 제1당 달성은 실패했다.[19]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친여권 성향 무소속(정몽준 등)까지 합치면 범여권 의석이 과반을 간신히 넘겼다. 그래서 후술되어있듯 전반기 국회의장도 새천년민주당이 가져갔다.[20] 2001년에 시로 승격되었다.[21] 중간 판결에선 2표차로도 나와서 "문두표"가 되었다가, 결국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 3표로 바뀌었다(대신 전체 무효표가 늘어나게 판결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문세표가 맞다.[22] 원래 5공 인사였으나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되어 출마했다.[23] 각각 16,795표(28.88%), 15,928표(27.39%), 16,779표(28.85%)를 득표해 신경식 후보가 승리했다.[24] 원래는 5공 유력인사였으나, 김대중의 사면으로 국민의정부 초대 비서실장을 지내고 당시 새천년민주당으로 출마했다.[25] 중간에 민주당으로 당적을 변경한 신국환이 있다.[26] 초대 민선 용산구청장이자 역사강사 설민석의 부친. 4.19 혁명 당시 중동고등학교 재학생으로 이승만을 만난 시민(학생) 대표 5인 중 한 명. 새천년민주당 소속. 후단협 출신이 되나, 열린우리당에 갔다가 불출마를 선언했다. 2012년 18대 대선 당시엔 새누리당에 입당해 박근혜를 지지하기도 했다.[27] 박근혜 의원 시절 비서실장과 박근혜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냈으나, 국민연금 문제로 박근혜와 마찰을 일으키고 사이가 멀어져 이후 보복성 공천 탈락까지 당하자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기게 된다. 공교롭게도 앞 각주에 설명한대로 설송웅이 새누리당으로 옮겼으니 이 선거로부터 16년 만에 두 사람의 당적이 엇갈리게 된 셈이었다.[28] 각각 21,724표(30.43%), 20,351표(28.50%), 21,531표(30.16%)를 득표해 서상섭 후보가 승리했다.[29] 훗날 독수리 오형제로 열린우리당으로 옮기게 되며, 16년 후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에서 당선되어서 민주화 이후 첫 대경권 소속 민주당계 정당 국회의원이 된다.[30] 참고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최소 표차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의 129표차이다. 정작 초접전이라던 19대 총선의 최소 표차는 고양시 덕양구 갑(現 고양시 갑)의 170표차로 18대보다도 큰 편이다. 20대 총선은 인천광역시 부평구 갑의 26표차, 전라북도 전주시 을의 111표차, 강원도 원주시 갑의 134표차 등이지만, 역시 16대 총선의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다.[31] 한나라당: 7승 1패, 새천년민주당: 1승 5패, 자민련: 0승 1패, 무소속(김우석): 0승 1패. 만약 민주당-자민련이 경합지를 얻었더라면 한나라당 126~127 : 138 민주당-자민련으로 과반을 확보했을 것이지만 고작 1석 차이로 한나라당에 밀렸고 5석 차이로 과반에 실패했기에 너무나도 아쉬운 결과였을 것이다.[32] 대표적인 접전 지역. 박주천 vs 황수관 박사의 대결 결과 691표차로 석패했는데, 2013년 시점에서는 두 맞수 모두 고인이 되었다.[33] 14대에서 한 번 국회의장을 맡은 적이 있다. 이때는 민주자유당 소속.[34] 이때 법사위 여당측 간사였던 천정배 전 의원이 날치기의 총대를 맸다.[35] 19대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강창희 전 의원이다.[36] 강성구, 김윤식, 원유철, 이근진, 전용학, 김원길, 박상규 & 충남권의 김용환, 강창희.[37]
[[민주노동당|]].[38]
[[무소속(정치)|
[[민주노동당|]] 2석.[39]
[[무소속(정치)|
[[민주노동당|]] 1석.[40] MBC와 갤럽이 열흘 전부터 전화 여론조사를 통해 선정한 80여 개 경합 지역구를 선정해 유권자 22만명을 대상으로 출구조사를 실시했다. 나머지는 15대 총선과 동일하게 선거 당일 전화 여론조사로 했다. # KBS-SBS도 4개 여론조사 기관이 세 차례에 걸쳐 모든 지역구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고 이 중 경합이 치열한 77개 경합 지역구에 대해 선거 당일 출구조사(하나의 선거구 당 투표소 최대 6개)를 실시해서 신뢰성을 한층 높였다고 한다. # 이런 출구조사는 17대, 18대 총선에서도 경합 지역구에 한하여 출구조사를 했고 전국 모든 지역구를 대상으로 한 출구조사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시행하게 된다.[41] 4년 전인 15대 총선에서도 예측조사는 했지만 이는 출구조사가 아닌 전화조사로 예측한 것이였다. 더 정확하겐 15대 총선 당시 MBC에서 전국 67개 경합 지역구를 중심으로 자체적으로 현장 출구조사를 했지만, 당시 기준으로 불법이라서 타 방송사의 훼방으로 실패한 적이 있다. 물론 이 출구조사 결과는 선거 당일엔 발표되지 않았고, 선거 다음 날 MBC 뉴스 프로그램에서 자사가 벌인 출구조사가 정확하다고 홍보할때 공개되었다.[42] 사실 각 지역구마다 출구조사를 하면 표본이 부족해서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아예 19대 총선의 경우 전국 246개 모든 지역구 단위로 하나의 지역구당 10여개의 투표소에서 출구조사를 했는데도 별 효과를 못봤다.[43] 신기하게도 다음 총선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난다.[예측조사] 1위였으나, 실제 개표에선 3위로 낙선했다.[예측조사] 1위였으나, 실제 개표에선 3위로 낙선했다.
[[민주노동당|]].[38]
[[무소속(정치)|
무소속
]] 4석, [[민주노동당|]] 2석.[39]
[[무소속(정치)|
무소속
]] 4석, [[민주노동당|]] 1석.[40] MBC와 갤럽이 열흘 전부터 전화 여론조사를 통해 선정한 80여 개 경합 지역구를 선정해 유권자 22만명을 대상으로 출구조사를 실시했다. 나머지는 15대 총선과 동일하게 선거 당일 전화 여론조사로 했다. # KBS-SBS도 4개 여론조사 기관이 세 차례에 걸쳐 모든 지역구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고 이 중 경합이 치열한 77개 경합 지역구에 대해 선거 당일 출구조사(하나의 선거구 당 투표소 최대 6개)를 실시해서 신뢰성을 한층 높였다고 한다. # 이런 출구조사는 17대, 18대 총선에서도 경합 지역구에 한하여 출구조사를 했고 전국 모든 지역구를 대상으로 한 출구조사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시행하게 된다.[41] 4년 전인 15대 총선에서도 예측조사는 했지만 이는 출구조사가 아닌 전화조사로 예측한 것이였다. 더 정확하겐 15대 총선 당시 MBC에서 전국 67개 경합 지역구를 중심으로 자체적으로 현장 출구조사를 했지만, 당시 기준으로 불법이라서 타 방송사의 훼방으로 실패한 적이 있다. 물론 이 출구조사 결과는 선거 당일엔 발표되지 않았고, 선거 다음 날 MBC 뉴스 프로그램에서 자사가 벌인 출구조사가 정확하다고 홍보할때 공개되었다.[42] 사실 각 지역구마다 출구조사를 하면 표본이 부족해서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아예 19대 총선의 경우 전국 246개 모든 지역구 단위로 하나의 지역구당 10여개의 투표소에서 출구조사를 했는데도 별 효과를 못봤다.[43] 신기하게도 다음 총선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난다.[예측조사] 1위였으나, 실제 개표에선 3위로 낙선했다.[예측조사] 1위였으나, 실제 개표에선 3위로 낙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