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20403><colcolor=#BD0837>{{{#!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020403> | Die toten hosen 디 토튼 호젠 | }}} | |
미샤엘 브라이트코프 • 폼 리치 • 안드레아스 프레게 | ||||
결성 | 1982년 | |||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 | ||||
현재 멤버 | 안드레아스 모이러 (베이스) 안드레아스 프레게 (보컬) 폼 리치 (드럼) 안드레아스 폰 홀스트 (기타) 미샤엘 브라이트코프 (기타) | |||
이전 멤버 | 발터 노벰버 트리니 트림폽 야콥 코이젠 볼프강 로데 미샤엘 브라이트코프 | |||
장르 | 펑크 록 | |||
데뷔 | 1982년 싱글 ‘Wir sind bereit’ | |||
레이블 | Charisma (미국 한정), JKP | |||
링크 |
[clearfix]
1. 개요
디 토튼 호젠(Die Toten Hosen, 약칭 DTH)[1]은 독일 뒤셀도르프 출신의 펑크 록 밴드이다.2. 상세
1982년 초 독일의 펑크 록 장르의 붐을 타고 결성된 밴드이다. 거의 모든 가사를 모국어인 독일어로 쓰며, 노래의 장르는 펑크 록이다. Die Ärzte(디 애어츠테)와 함께 독일의 펑크 밴드 중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밴드 중 하나이다.2019년 기준으로 20장 이상의 정규앨범, 여러 장의 라이브 앨범, 많은 수의 베스트 앨범을 발매하였고 1990년 이후 독일 음악 앨범 차트 1위에 총 여덟 번 올랐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뿐만 아니라 국외[2]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공연 활동과 팬들에게도 친밀한 관계형성에 중점을 두고 데뷔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는 전설적인 그룹이다.
3. 역사
밴드의 역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디 토튼 호젠(Die toten hosen)이라는 이름을 '밴드'라는 이름으로 줄여 표현하고 있으니 이에 유의하기를 바란다.3.1. 결성 초기 (1982~1987)
(1987년 라이브 당시의 모습) Campino (보컬) | |
밴드는 1982년에 Ratinger Hof[3]를 모체로 하여 결성되었다. 당시 멤버는 캄피노[4], 안드레아스 폰 홀스트, 미샤엘 브라이트코프, 트리니 트림폽과 발터 노벰버였다. 브레멘에서 진행되었던 'Schalthof'의 첫 번째 공연에서 밴드명이 인쇄실수로 인해 Die toten Hosen[5]으로 알려지게 된다. 같은 해에 데뷔 싱글인 'Wir sind bereit[6]'와 'Reisefieber' 를 연이어 발매했다.
같은 해 밴드의 첫 번째 앨범 Opel-Gang / Eisgekühlter Bommerlunder[7]을 발매한다.
전 기타리스트였던 발터 노벰버는 마약 문제로 인해 1983년 11월 밴드를 떠나게 된다.
1983년 7월, 밴드는 볼프강 뵐드가 감독한 'Eisgekühlter Bommerlunder(뮤직비디오)' 앨범의 뮤직 비디오에 자금을 조달한 EMI 레코드와 계약했다.[8] 또한, 1983년 말에 뉴욕의 래퍼인 Fab Five Freddy와 싱글앨범 'Hip Hop Bommi Bop'을 발매했는데,앨범곡 중 하나인 'Eingekühlter Bommerlunder'의 힙합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 세 번째 싱글인 파티송 'Eisgekühlter Bommerlunder'이 1984년 BBC의 존 필 쇼(John Peel Show)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틀어지면서 처음으로 평단에서 찬사를 받게 된다.
처음 계약했던 EMI 음반사는 콘서트 기간 중 소비되는 밴드의 비싼 여행 비용과 콘서트에서 독일의 전설적인 가수인 하이노를 공개적으로 패러디 한 것에 불만을 느꼈고, 이로 인해 밴드와 마찰이 생기게 되고, 결국 Die Toten Hosen은 EMI를 떠나 버진 레코드와 계약했다.[9]] 소속이다.]
그들의 두 번째 앨범 Unter Falscher Flagge [10]는 1984년에 발매되었다. 이 때부터 그들은 그들의 대표적인 마크가 된 독수리 모양의 마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5년 봄, 밴드는 독일 문화원의 행사를 위해 프랑스 순회 공연을 진행했고, 가을에는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순회공연을 진행했다.1985년 말, 트리니 트림폽이 밴드에서 탈퇴하고 1992년까지 밴드의 매니저로 활동한다. 1986년 1월 볼프강 로데로 드러머가 바뀌기 전까지의 임시 드러머는 야콥 코이젠이 맡았다.
이후 드러머의 역할을 맡은 볼프강 로데가 드러머로써 처음 등장했던 콘서트는 밴드 최초의 대규모 콘서트였던 7월 왁스도르프의 핵 폐기물 재처리 시설의 건설에 대해 반대하는 의미를 담아 열린 콘서트였던 Anti-WAAhnsinns 콘서트에서 헤르베르트 그뢰네마이어, 우도 린덴베르크, 마리우스 뮐로 베르턴하겐, BAP 로드가우 몬노톤즈 등 많은 가수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1986년에는 앨범 Damenwahl[11] 를 발매했다 . Damenwahl 앨범의 발매 이후 이루어진 투어는 북부 독일에 위치한 콘돔 제조업체 Fromms가 후원했다.[12]
1987년에 밴드는 Never Mind the Hosen, Here 's Die Roten Rosen[13]이라는 앨범을 통해 첫 번째로 차트에 진입하였다. 이 때 당시 그들은 디 토튼 호젠이라는 이름 대신 디 로튼 로젠 (빨간 장미들)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14]
이 앨범에는 1960년대 독일 팝송들이 록 버전으로 리메이크되어진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다. 앨범의 이름과 커버 아트는 1977년 발매되었던 LP 앨범인 Never Mind the Bollocks, Here 's the Sex Pistols by the Sex Pistols를 패러디하여 만들어졌다.
1987년 말 첫 라이브 앨범인 Bis zum bitteren Ende[15]을 발표했다. 이 앨범을 통해서 독일, 오스트리아 앨범 차트 상위 30위 안에 진입하였다.
3.2. 첫 전성기 (1988~1995)
1988년에 상업적인 면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던 앨범 Ein kleines bisschen Horrorschau[16]를 발표했다. 앨범은 앤서니 버지스 의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 와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의 영화를 참고하여 만들어졌고, 베른트 샤드발트가 연출한 시계태엽 오렌지의 연극에서 사용하기 위해 작곡되었다. 1988년 9월, 밴드는 리투아니아에서 열렸던 락 페스티벌인 리투아니카 페스티벌Lituanika Festival에서 공연하였다. 그들은 페스티벌의 공연을 심사하였던 배심원들의 심사에서 행사의 밴드 중에서 최고의 밴드로 선정되었다.1989년, 봄 투어에는 도르트문트의 Westfalenhallen[17]에서의 전석 매진 공연이 포함되었다. 밴드는 그들이 활동했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18]인 3 Akkorde für ein Halleluja[19]를 발표했다.
1990년, 밴드는 뉴욕에서 열리는 뉴 뮤직 세미나(New Music Seminar)에 초청되어 쾰른의 롤링 스톤즈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20]
1991년, 밴드는 과거에 존재했던 밴드들이 음악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찬양하는 의미를 담은 앨범인인 '영어 배우기 레슨 1(Learning English Lesson One)' 앨범을 발매했으며, 주로 영국의 클래식 펑크 록의 커버 버전으로 구성되었다.[21] 이 앨범은 또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The Adverts의 작곡가이자 리드 보컬이였던 티모시 T.V. 스미스와의 공동 작업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1993년, 앨범 카우프 미치!(Kauf MICH!)[22]가 출시되어 독일 차트 1위에 올랐다. 이 앨범은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소비주의와 각종 자극적인 광고들, 우익 극단주의들에 대해 풍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해 여름, 밴드는 투어에서 U2를 지원하는 역할로 50,000명 이상의 관객이 입장한 콘서트에서 공연을 펼쳤다. 이 투어 일정 동안 새로 나온 앨범인 Kauf MICH!의 뮤비를 상영하였다.
같은 시기인 1993년 후반기에, 밴드는 Reich & Sexy[23]라는 제목의 베스트 앨범[24]을 출시하였다. 앨범 커버에는 나체의 여성들에 둘러싸인 토튼 호젠 멤버들을 그려넣었다.
1994년, 밴드는 해외 시장을 위해 만든 앨범인 Love, Peace & Money를 출시하였다.[25] 이를 통해 토튼 호젠은 독일 차트에서 동시에 3개의 앨범이 순위권에 들어가는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1994년, 밴드는 독일과 해외 국가에서 거의 1년 내내 콘서트를 진행하였다. 11월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4번의 콘서트를 Green Day를 지원하는 역할을 통해 개최하였다.
1995년 4월부터 밴드는 베를린의 Fritz 라디오 채널에서 Tausend Takte Tanzmusik[26] 이라는 자체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 라디오 프로그램은 1년 동안 매주 일요일 오후 7시부터 8시까지 방송되었다. 1995년 말에는 밴드의 자체 음반사인 JKP를 설립하며 전의 음반사와 결별하였다.
3.3. 자체 레이블(JKP)의 시작 (1996~2000)
1996년, 자신의 레이블에서 첫 번째로 발매된 앨범인 Opium fürs Volk[27]을 발매한다. 노래는 신앙과 종교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앨범은 Kauf MICH!에 이어 세 번째로 플래티넘 등급[28]을 달성한 앨범이 되었다. 또한 싱글 앨범으로 편집되어 발매된 젠 클라인 예거마이스터Zehn kleine Jägermeister[29]는 독일 차트 1위에 달성하게 된다.1996년 앨범 발매 이후, 밴드는 이기 팝, 라몬스와 함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공연에 참가한다. 이로써 1982년에서 시작해서 1997년까지 밴드는 1000회에 달하는 콘서트를 진행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97년 6월 28일 1,000회 기념 콘서트가 열린 뒤셀도르프의 라이헨스타디온(Rheinstadion)[30]에는 6만 명의 관중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무대 일부분이 무너지는 사고로 인해 네덜란드 국적의 16세 소녀가 무대가 무너지면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이 벌어지자 밴드는 즉시 콘서트를 중단했고, 남은 모든 콘서트를 취소하고 반년 동안 록 음악계에서 활동을 잠시 멈추었다.
1998년 초, 밴드는 밴이 투어워프를 하다(Vans Warped Tour)[31]의 일원으로서 뉴질랜드, 호주, 일본 그리고 미국과 유럽, 하와이등을 순회하는 콘서트에 참가하게 된다. 이듬해 가을에도 다시 콘서트 투어에 참가하며 투어 기간동안 팬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공감하며 공연하는 모습을 보였다.[32] 호주에서 콘서트를 진행하던 도중에는 콘서트를 두어 번 한 후 잠시 입원하기도 했다.
같은 해인 1998년, 밴드는 싱글 앨범 Pushed again을 발매한다. 사이드 곡으로 앨범에 수록된 곡인 Alles ist eins는 콘서트에서 사고로 인해서 사망한 그 소녀에게 바치는 곡이었다. 1998년 말 밴드는 다시 Die roten Rosen이라는 그룹 이름을 사용하여 크리스마스 기념 앨범 Wir warten auf Christkind[33]를 발표한다.
1999년까지 밴드의 드러머였던 볼프강 로데는 건강상의 문제로 인해 1998년 크리스마스 기념 콘서트 무대부터 폼 리치에게 드럼 스틱을 넘겨준다. 이후 그룹 활동에서는 폼 리치가 드럼을 도맡아 활동하게 된다.
(1987년 라이브에서의 드러머) 볼프강 로데 | |
(2009년 라이브에서의 드러머) 폼 리치 | |
1999년, 밴드는 정규 9집 앨범인 Unsterblich(불사, 불멸)를 발매한다. 앨범 발매는 자신들의 레이블 JKP에서 진행되었다.
2000년 6월 11일 캄피노는 록 암 링에서의 공연 도중 무대에서 미끄러져 십자인대가 파열된다. 밴드는 당일 진행되어야 했던 공연들은 강행하였으나, 남은 70개의 투어를 취소하게 된다.
3.4. 새로운 시대, 여전한 인기 (2001~2005)
2001년, 쿠바에서 잠깐 체류하며 휴가를 즐기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에서 진행되었던 소규모 콘서트에 참가한다. 이후 밴드는 독일에서 여름에 개최되었던 AC/DC의 공연에 헤드라이너로 참가한다. 그리고 이듬해 2001년 정규 10집 앨범인 Auswärtsspiel(게임에서 멀어져)을 발매한다.2002년 2월부터 12월까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진행되었던 투어에서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약 70회의 투어를 진행하며 콘서트를 진행하였다. 콘서트를 통해 여전히 Die toten hosen이라는 밴드가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전설적인 밴드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2002년 말까지 진행되었던 콘서트를 통해 밴드의 공연을 본 관중이 전 세계적으로 50만 명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니, 전설적인 밴드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2002년 후반기에는 두 번째 베스트 앨범 Reich & Sexy: Die fetten Jahre[34]를 발매했다. 첫 번째 베스트 앨범의 제목이었던 Reich & Sexy의 뒤에 Die fetten Jahre[35]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새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2003년 초반에는 잠시 활동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다가 가을에 아르헨티나에서 진행되는 콘서트에 참가하였다.
2004년 싱글앨범 Friss oder Stirb(먹을래 아니면 죽을래 Eat or die)으로 음악계에 복귀했다. 독일권 차트에서 10위 안에 들어가는 등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2004년, 밴드는 2000년에 진행되었던 록 암 링의 공연 실황을 DVD로 발매한다. 또한 정규 앨범 11집 Zurück zum Glück(다시 행복으로)을 발매하면서 앨범들 중 6번째로 독일 앨범 차트 1위에 오르고, 이 앨범을 통해 또 다시 플래티넘을 기록한다.
같은 해인 2004년에 독일 17개의 방송사에서 밴드에 관한 다큐멘터리 Friss oder Stirb을 방영했다. 이후 2005년 DVD판으로 발매되기도 하였다. Friss oder Stirb은 밴드멤버 5명의 친구, 가족관계에 초점을 맞추었고, 3장의 DVD으로 구성되었다.
2005년 10월 Friss-oder-Stirb 투어를 진행하였고, 전석이 매진된 마지막 공연을 뒤셀도르프의 LTU 아레나에서 치렀다. 그리고 이 공연 영상을 '하임스피엘!!!(Heimspiel!!!, 홈게임!!!)이라는 타이틀의 DVD로 발매했다.
3.5. 약 3년의 휴식기 (2006~2009)
2006년, 밴드는 잠시 동안 활동을 멈추고 휴식을 가질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아무래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콘서트마다 열정적으로 참여하면서 몸이 많이 다치고 힘들어진 상태였기에, 밴드의 이러한 결정은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06년에는 앨범 발매도, 콘서트도 없었다.밴드의 보컬인 캄피노는 밴드 휴식기간 동안 베를린의 Admiralpalast 극장[36]에서 클라우스 마리아 브란트다우어의 '브레히츠 드라이그로쉔오페라'에서 연출을 맡았고, 멕베스 역할도 맡았다.[37]
이후 2007년 밴드는 H.그뢰네마이어, 판타스티셰 피어[38], U2, 밥 겔도프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가난에 반대하는 너의 목소리'[39]라는 제목의 콘서트에 참가한다. 이 콘서트는 2007년 7월 7일 하일리겐담[40]에서 열렸는데, 8만명의 관중이 콘서트를 보기 위해서 운집했다.
2007년 5월 27일에는 함부르크, 28일에는 베를린에서 공연을 가졌고, 그해 6월 초 록 암 링과 록 암 파크에서 개최되었던 록 그룹 콘서트에 참가하여 공연을 했다. 이외에도 'Machmalauter'[41]라는 이름의 연말공연을 준비하였고, 그 해 개최되면서 많은 이들이 Die toten hosen의 음악을 다시 한 번 라이브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2009년 4월, 밴드는 아르헨티나 시장을 겨냥한 앨범 La Hermandad - En el Principio fue el Ruido[42]를 발매한다. 이 앨범은 In aller Stille(조용함)와 Zurück zum Glück의 수록곡과 3개의 신곡을 담고 있다. 앨범 발매 후 밴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콘서트 투어를 다시 시작하였고, 투어는 성공적으로 진행되며 아르헨티나 록 시장에 Die toten hosen이라는 그룹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
2009년 5월 2일, 밴드는 결성 이래 최초로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공연을 진행한다. 이듬해 11월에는 파타고니아, 과테말라, 파나마와 멕시코에서 콘서트를 진행하며 중남미 지역에서 그룹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2009년 11월에는 밴드의 세 번째 라이브앨범인 Machmallauter!은 두 개의 CD와 DVD, 그리고 216 페이지의 한정판 포토북[43]의 세 가지 버전으로 발매되었다.
3.6. 전설의 재시작 (2009~)
(2013년 1 LIVE Krone 2013에서 우승상을 받은 모습) Die toten hosen | |
2010년 9월부터 10월까지 밴드는 Schall und Rauch[44]라는 슬로건으로 중앙아시아 투어길에 올랐다. 카자흐스탄의 수도인 알마티와 아스타나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두샨베, 이스탄불, 암만, 텔아비브에서 공연을 치르며 콘서트 투어를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2011년 말에는 그들의 곡을 정리하여 담아낸 베스트앨범 All die ganzen Jahre[45]을 발매했다.
2012년 5월 4일, 밴드는 13집 앨범 Ballast der Republik[46]을 발매한다. 이 앨범은 30년간 밴드활동을 하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준 밴드들의 커버곡을 주로 담은 앨범 Die Geister, die wir riefen zu erhalten와 합본으로 제작되었다. 이 앨범은 후에 스플릿 앨범으로 발매되기도 하였으며,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3개국의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타이틀곡 Tage wie diese [47]는 유로 2012에서 독일 국가대표팀의 응원가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독일 싱글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2012년 4월 10일, 밴드는 결성 30주년 기념 투어를 진행하였다. 그들이 첫 무대를 가지게 해주었던 뜻깊은 곡인 브레멘의 Schlachthof(도살장)를 시작으로 2012년 5월 13일 일련의 투어를 진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2012년 9월에는 20 Jahre in Argentina[48]라는 슬로건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밴드의 아르헨티나 진출 20주년 기념 공연을 진행했다. 12월에는 아르헨티나 공연과 독일 내 방문공연 라이브 영상[49]을 수록한 DVD (Noches como Estas이런 밤들)를 발매한다.
밴드는 2013년 11월 13일 라이프치히 중앙 경기장을 시작으로 Der Krach der Republik(공화국의 추락) 투어를 진행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대규모 공연장에서 24회를 했는데, 모든 공연이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4. 음악 성향
주로 펑크 록 계열의 음악이지만, 다양한 앨범을 내면서 잔잔한 음악도 있고, 진지한 분위기의 음악도 만들었다. 그만큼 다양한 곡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이 밴드가 가진 매력이다. 팔색조 같은 곡과 가사들은 항상 음악을 감상하며 새로운 경험을 가져다준다.4.1. 가사 및 작곡
밴드의 거의 모든 가사는 캄피노가 담당하고, 그 외의 멤버들[50]이 음악 외적인 부분을 담당한다. 초기 노래들은 전 드러머였던 폼 리치나 볼프강 로데가 쓰기도 했다. 음악의 가장 큰 부분은 프로듀서인 존 카프리 [51]가 담당한다. 2008년부터는 빈센트 소그[52]라는 프로듀서와 함께 일하며 노래를 만들었다. (2010년 브레슬라우 라이브 당시의 모습) Die toten hosen | |
가사의 주제는 사회, 정치적인 영역이고, 비판적이며 종종 반어적인 방식으로 쓴다. 주로 1인칭 시점으로 쓰는 가사들은 주로 믿음, 종교, 심리학적으로 외국인을 혐오등을 주로 다룬다. 이외에도 가사의 중심적인 테마는 친교와 시민정신, 그리고 술이다.밴드는 애주가[53]나 열 명의 예거마이스터[54]를 발표할 정도로 술에 대해서 대단한 애정을 보인다.
밴드의 정체성 중 하나는 축구도 포함되는데, 이 노래들은 응원가 형식을 띠고 있다. 곡에 추가되는 코러스와 브릿지는 모든 밴드의 멤버들이 함께 부른 목소리를 편집하여 곡에 삽입한다고 한다. 특히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팀의 광팬으로 알려졌고, 밴드의 곡들 중 몇몇은 지금도 축구 팀 응원가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거의 모든 가사는 주로 멤버들이 대부분을 작업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Funny van Dannen 과 Hanns Christian Mueller과 같이 밴드와 친한 가수들이 가사작업과 녹음작업에 참여하기도 한다. 캄피노와 밴드는 그들의 영어 버전 곡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Honest John Plain, Matt Dangerfield과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많은 커버곡들 이외에도 30년이나 되는 긴 활동기간 동안 238개의 자작곡을 발표했다.
4.2. 음악 스타일의 변화
밴드 멤버 5명 전원이 악기를 독학으로 배웠다. 그럼에도 많은 시간동안 악기들 다루면서 음악 학교에서 악기를 배운 연주자들보다 더욱 뛰어난 연주 실력을 보여준다.밴드 초기에는 대부분의 멤버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 신분이었다. 그렇기에 1집 Opel-Gang은 밴드가 활동하는 지역 가까이에 있는 스튜디오를 대여해서 녹음하였다. 앨범에 수록된 곡들의 가사와 기타리프는 단순하였고, 연주와 보컬이 서툴었다는 인상 강한 앨범이었다. 그러나 간단한 리프와 보컬은 오히려 당시 독일권 락 음악에 새로운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오히려 이런 서투르고 간단한 음악으로 청취자들에게 다가가며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었다.
(2022년 라이브 콘서트 투어 중의 모습) Die toten hosen | |
밴드에게 음악적 영향을 준 밴드들은 70년대 말 영미권에서 활동하였던 펑크 락 밴드들이었고, 밴드는 오늘날까지 모든 앨범과 모든 공연에서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밴드에 대한 헌정곡을 수록하거나, 연주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다.
Eisgekühlter Bommerlunder [55]등 독일 민요를 리메이크하여 곡을 만들면서 Schunkelpunk [56] 장르의 도약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러한 독일 민요곡들과 독일 히트곡을 커버한 Azzurro와 같은 곡들을 발매하면서 밴드는 Volxmusik[57] 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한다.
밴드의 음악스타일은 다년간의 무대경험과, 다른 아티스트들과 친교를 맺거나, 외국에서 받은 다양한 인상을 통해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면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갔다. 1980년대 밴드의 인기가 점점 올라가면서 밴드의 재정 상황이 좋아졌다. 이로 인해 음악을 작업하는 것에 있어서 재정적인 사정이 좋아지면서 밴드의 아이디어와 지향점을 적절하게 음악에 접목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앨범 수록곡에서 보여주기도 했다. 몇몇 곡에서는 현악기와 관악기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하며 당시 시대보다 한 두발 앞서나가는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Warum werde ich nicht satt에서는 재즈를, Zehn kleine Jägermeister에서는 레게와 구 유고슬라비아의 집시 음악을 차용하기도 했다. Nur zu Besuch: Unplugged im Wiener Burgtheater와 같은 높은 수준의 어레인지를 요구하는 작업에서는 한스 슈잉잉겐과 팀 크로스같은 전설적인 클래식 작곡가들의 도움을 받아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밴드는 결성초기부터 꾸준히 펑크록을 연주하고 있다. 이는 현재 록 음악에서 유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소인 현재까지도 8비트 다운피킹, 파워코드, 쉬운가사, 단순한 멜로디, 합창 코러스와 기타 솔로파트가 거의 없는 것에서 알 수 있다.
4.3. 콘서트
모든 라이브 콘서트의 구심점에는 밴드의 보컬이자 대표자인 캄피노가 있으며, 그는 공연할 때 선동적인 액션 [58]과 몸을 사라지 않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풍자적인 멘트를 자주 구사한다. 그는 다른 그룹들보다 특히 무대 위에서 종횡무진[59]한다. (2009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라이브 콘서트 투어 중의 모습) 캄피노 | |
(2007년 라이브 콘서트 투어 중의 모습) 캄피노 | |
또한 밴드는 종종 실시하는 게릴라 콘서트[60]와 베를린과 뒤셀도르프의 교도소나 축슈피체. 알퇴팅의 수도원, 함부르크, 옥센촐[61] 병원의 정신병동과 같은 특별한 장소나 [62],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경우나, 밴드의 팬의 가족이나 친구들을 관객으로 하는 '거실 콘서트'를 열어주기도 한다.
밴드의 인지도가 높아져 가면서 비틀즈의 동명의 앨범을 제목으로 한 Magical-Mystery-Tour-Gigs 투어에서는 수많은 초대에 일일이 응하여 게릴라 콘서트를 여는 것이 점점 어려워져 갔다. 이러한 이유로 1992년부터 밴드는 공고를 내어 순위를 정해 방문 콘서트를 가졌다. 이에 대한 일례로 2005년에는 비디오 컨테스트에서 우승을 차지한 피르마젠의 대학생의 공동 아파트를 방문하여 공연한 것을 들 수 있다. 2009년 9월에는 베를린 시의 공연장 주인들이 이웃주민들간에 공연소음으로 인하여 다투면서 생긴 부과금을 콘시트의 입장료를 탕감해주는 것으로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밴드는 소규모의 관객을 대상으로 공연을 하기 위해 가명을 쓰기도 했다. 1993년에는 'Das Katastrophenkommando', 1998년에는 'Rheinpiraten', 2000년에는 'Essen auf Rädern'이란 가명을 사용하여 소규모 공연을 진행했었고, 두 번은 평소 친분이 깊던 밴드 Die Ärzte 와 함께 'Die Zu Späten'라는 이름으로 베를린과 뒤셀도르프에서 공연을 하였다.
(2021년 뒤셀도르프 이벤트 라이브 콘서트 중의 모습) Die toten hosen | |
콘서트 입장 티켓을 예매 시에 개인정보를 기입하거나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실제로 표를 예매할 때는 이러한 개인정보를 입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또한 암표가격이 비싸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타인에게 티켓 양도를 금지하도록 하고 있다.
[clearfix]
5. 사회적 활동
5.1. 정치계 관련 활동
밴드는 수십 년동안 꾸준히 공연 활동을 통하여 다양한 정치 단체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고, 그들의 활동에 동참해왔다.그러나 밴드의 멤버들은 정치적으로 깊게 개입하지 않을 것을 밝혔다. 1994년, 유럽선거캠페인에서 정당 홍보를 위한 곡을 써달라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요청을 거부한 것을 통해 밴드가 의미하는 바를 확인 할 수 있다.1991년 Nazis Raus[63]라는 샘플러 앨범에 Fünf vor Zwölf라는 곡으로 참여하였고, 2006년에는 밴드 ZSK의 캠페인 Kein Bock auf Nazis[64]를 지지하기도 했다.1992년 본의 Hofgarten에서 외국인 혐오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 하고, 헤르베르트 그뢰네마이어, 니나 하겐과 다른 뮤지션들과 20만명의 시위대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1995년에는 그린피스, 핵전쟁에 반대하는 의사들, '핵실험금지행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샘플러 Stop Chirac에 Tout Pour Sauver L'Amour라는 곡으로 참여하였다.
2002년에는 동물보호협회 PETA에 Lieber nackt als im Pelz[65]라는 모토 하에 나체로 등장하며 동물보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일깨우기도 했다.
2005년에는 인권단체인 Pro Asyl의 샘플러 앨범 On The Run 제작을 지원했고 Meine Stadt라는 곡으로 앨범에 참여하기도 했다.
2007년 초에는 아프리카 국민들의 생활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밴드는 개발원조단체 Oxfam과 함께 말라위, 잠비아, 우간다로 여행을 간다. 헬라 벤더스[66]가 여행에 동행했고, 아프리카에 체류하면서 생활상을 경험하는 동안 짧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도 했다.
2008~2009년의 투어에서 밴드는 Oxfam사와 함께 개발원조자금 인상을 위하여 5만명의 서명을 모았고, 이 서명을 2009년 7월 3일 하이데마리에[67] 당시 독일 개발부 장관에게 전달했다. 서명의 목적은 2010년까지 국민총소득의 0.51%를 개발원조지원금에 사용하기 위하여 독일의 연간 개발원조지원금을 27억 유로로 인상하기 위한 것이었다.
2013년 10월 뒤셀도르프의 톤할레 콘서트 홀[68]에서 열린 세 번의 콘서트에서, 밴드는 뒤셀도르프 음악대학의 오케스트라와 협력하여 나치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음악들이 잊혀지는 것을 기념했다.
2015년 10월에 이 콘서트는 Entartete Musik - Willkommen in Deutschland라는 더블 앨범으로 편집되어 발매되었다.
2014년 12월 6일에는 주미얀마 독일 대사관의 초청을 받아들여 랑군에서 미얀마와 독일 수교 60주년을 맞아 6,000명의 미얀마 방문객들 앞에서 무료 콘서트를 열었다.
2018년 9월 3일에는 Casper[69], Feine Sahne Fischfilet[70], K.I.Z[71], Kraftklub[72], Trettmann[73], Nura[74] 및 Marteria[75]와 함께 외국인 혐오 및 우익 폭력 반대 콘서트를 가졌다 콘서트 주최의 추산에 따르면 약 65,000명의 방문객이 콘서트를 즐겼다고 한다.
5.2. 뒤셀도르프 관련 활동
밴드는 결성 후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의 고향인 뒤셀도르프에 대하여 깊은 애향심을 보여왔다. 1995년 여름에는 뒤셀도르퍼 EG[76]과 함께 핀란드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이 지원하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즈[77]와 뒤셀도르프의 Brehm 로[78]에 있는 DEG의 홈구장에서 'Powerplay des Wahnsinns'라는 이름으로 시합을 가졌다. 밴드는 뒤셀도르퍼 EG와 함께 'Knochenbrecher Düsseldorf'[79]라는 이름으로 시합에 나섰으나, 10:11로 석패했다. 경기에서 패배한 이후 밴드는 팬들과의 약속대로 이듬해 'Wir beerdigen den guten Geschmack'[80]이라는 모토하에 여성복에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고 자신들에 자동차에 올라탄 채로 뒤셀도르프의 시내 카니발 행렬에 참여한다.밴드는 뒤셀도르프의 축구팀인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의 가장 유명한 팬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구단이 경제적인 위기에 빠진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구단의 스폰서활동을 하기도 하고, 2002년에는 맥주회사 Diebels와 광고계약을 맺고, 밴드의 마스코트 'Totenkopf'가 새겨진 유니폼을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유소년 팀에 기부하는 등 구단과 연계된 활동을 활발히 해나갔다. 또한 Nordfriedhof[81]에 그곳에 묻히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17곳의 묘지를 임대하기도 했다.
6. 음반
1983: Opel-Gang1984: Unter falscher Flagge
1986: Damenwahl (Album)|Damenwahl
1988: Ein kleines bisschen Horrorschau
1990: Auf dem Kreuzzug ins Glück
1991: Learning English Lesson One
1993: Kauf MICH!
1996: Opium fürs Volk
1999: Unsterblich
2002: Auswärtsspiel
2004: Zurück zum Glück
2008: In aller Stille
2012: Ballast der Republik (2번째 음반은 Die Geister, die wir riefen)
2012: Tage wie diese
2017: Laune der Natur
2017: Learning English Lesson 2
2022년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모든 음반은 여기 참조.
[1] 뜻을 직역하면 죽은(toten)바지(hosen). 본래 뜻은 발기부전, 죽을만큼 지루한이라는 속어이다.[2] 특히 남미의 아르헨티나[3] 부쉬하우센에 있는 공연도 하는 큰 술집이다.[4] 본명: 안드레아스 프레게 Andreas Frege[5] 직역하면 "죽은 바지"라는 의미이나, 원래 쓰임새인 속어로 "발기부전", '죽을만큼 지루한'이라는 의미이다.원래는 Die Roten Rosen (빨간 장미)라는 그룹명을 사용하려했다고 한다.[6] '우리는 준비되었다' 라는 의미이다.[7] 정식 앨범 이름은 Opel-Gang이지만 대중적으로 불리던 이름은 Eisgekühlter Bommerlunder이다. 뜻은 아주 차가운 부머룬더(술).[8] 이 뮤직 비디오는 바이에른의 어느 교회의 결혼식 중에 일어난 일에 대해 다루는 스토리로, 교회가 매우 부정적으로 표현되어있었다. 이로 인해서 독일 공영 텔레비전은 교회 신자들의 기분을 상하게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몇 년 동안 이 뮤직 비디오를 상영하지 않았다고 한다[9] 버진 레코드는 이후 EMI 산하로 들어갔다가 현재는 유니버셜 뮤직 그룹[10] 가짜 깃발 아래서Under False flag[11] 여자의 선택(Ladies 'Choice)[12] 이 회사는 자신들의 상품을 광고하기 위해 군중 사이에 무료 샘플을 흩뿌리는 식의 광고를 펼쳤다(...)[13] 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라, 여기 빨간 장미가 있다. (Never mind the Trousers – Here 's the Red Roses)[14] 아무래도 그룹명이 그래서, 처음에는 이러한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15] 씁쓸한 마지막까지To the bitter end[16] 약간의 호러 쇼A little bit of horrorshow[17] 독일의 거대한 공연장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월드컵 경기장과 비슷한 공연장.[18] 한국으로 치면 아이돌의 브이로그와 비슷한 개념이다. 다만 이 다큐멘터리의 경우는 그 길이가 브이로그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길다.[19] 할렐루야를 위한 3개의 코드[20] 토튼 호젠도 성공한 밴드였지만, 롤링 스톤즈는 이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엄청난 인기를 쌓아나가던 상황이었다.[21] 그렇기에 앨범의 뮤비를 보면 비틀즈와 같은 영국의 그룹들을 오마주한 장면이 종종 나온다.[22] 나를 사! (Buy ME!)[23] 돈과 섹시함(Reich & Sexy)[24] 가장 판매량이 높고 유명한 곡들을 모아 만든 앨범[25] 사실 말이 새로운 앨범이지, 전에 있던 곡들 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곡을 정리하여 만든 앨범이다.[26] 댄스 음악의 수천 개 비트 ("a thousand beats of dance music")[27] 사람을 위한 아편[28] 등급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인터넷에 음반 판매량 인증에 대해서 검색하도록 하자.[29] 열 명의 사냥꾼들, 혹은 열 명의 예거마이스터[30] 독일 뒤셀도르프에 위치한 다목적 경기장이다. 정식 명칭은 뒤셀도르퍼 라이헨스타디움Düsseldorfer Rheinstadium.[31] 원래는 미국만을 순회하는 콘서트였으나 그 크기가 점점 커져 세계일주와 비슷한 느낌의 규모로 성장한 투어가 되었다.[32] Die toten hosen이라는 그룹 자체가 라이브 공연에서 관객들과 호응하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예를 들면 노래를 부르다 무대 기둥을 타고 올라가 무대 지붕 뼈대에 앉아 노래를 부른다거나, 팬을 무대 위로 초대해서 같이 음악을 연주하는 식으로 팬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그룹이다.[33] (우리는 착한 크리스트교도를 기다린다.)[34] 돈과 섹시함: 뚱뚱했던 나날들[35] 직역하면 뚱뚱했던 날들[36] 1910년에 독일 베를린 미테 지구 프리드리히에 세워진 1756석 규모의 극장[37] 감독인 클라우스 마리아 브란트다우어는 이 작품을 통해 비판을 받았지만, 캄피노는 오히려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고, 작품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38] Die fantastschen Vier, 독일의 유명한 힙합 장르의 그룹이다[39] 독일 내의 빈부격차를 줄이자는 취지로 이러한 콘서트가 진행되었다.[40] 로스토크 인근의 소도시로, G8 정상회의가 열렸었다.[41] 가끔은 시끄럽게[42] 동지여, 태초에 소음 (록 음악)이 있었다.[43] 이 포토북에는 베를린에서 진행되었던 공연의 사진이 추가적으로 수록되어있다고 한다.[44] 환호와 연기[45] 그 모든 나날들[46] 밸러스트 공화국[47] (이런 똑같은 날들 Days like this)[48] 아르헨티나에서의 20년[49] 요즘에 흔히 말하는 브이로그와 같은 개념[50] Kuddel, Andi, Breiti[51] Jon Caffery[52] Vincent Sorg[53] (Trinklieder)[54] Zehn kleine Jägermeister[55] 술을 마신다는 내용의 독일 전통민요를 그룹이 재해석하여 만든 곡이다.[56] 슝켈펑크: 독일 전통가요에 펑크록을 접목시킨 펑크록[57] 다양한 장르의 독일 히트곡들과 독일 민요곡들을 혼합하여 음악을 만들어내는 장르[58] 이를테면 공연장의 기둥을 오른다던가, 콘서트 천장에 올라가 관중의 호응을 유도한다던가 등의 행동을 자주 한다.[59] 관중들에게 다이빙을 하기도 하고, 10미터 높이의 공연장 헤드라이트 탑에 올라가서 한 곡을 다 부르고 다시 탑을 타고 내려오거나, 곡을 부르면서 다리를 찢으면서 점프를 한다던가 하는 쇼맨십을 보여준다.[60] 소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깜짝 콘서트[61] 오스트리아 발터풀라스키에 위치한 정신병원[62] 이런 경우에는 개런티를 받지 않거나, 무료공연을 실시한다.[63] 나치 아웃![64] 의역하면 나치 따위는 원하지 않는다! 정도로 해석된다.[65] 모피보다는 알몸이 낫다[66] 독일의 유명한 영화감독[67] Heidemarie Wieczorek-Zeul, 독일 사회민주당 출신 전 독일 개발부 장관[68] (Düsseldorf Tonhalle)[69] 독일의 힙합 및 Rap-Rock 장르 음악가[70] 독일의 락 밴드[71] 독일의 힙합 크루[72] 독일의 Rap-Rock 장르 밴드[73] 독일의 힙합, R&B 장르 가수[74] 독일의 힙합 장르 가수[75] 독일의 래퍼[76] 독일 아이스하키리그 1부리그 소속 뒤셀도르프 아이스하키팀[77] 당시 러시아 레닌그라드의 하키 대표팀[78] 독일 뒤셀도르프에 위치한 거리[79] 뒤셀도르프의 싸움쟁이[80] 여러분의 미각을 망쳐놓도록 하겠습니다[81] 뒤셀도르프에 위치한 공원묘지. 정식 명칭은 Nordfriedhof Düsseldorf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