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2-19 14:45:20

RC 석세션


파일:rcsuccession.jpg

상단 우측의 인물을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이마와노 키요시로(보컬) - 고바야시 카즈오(베이스) - G2 (키보드) - 아이다 고조(드럼) - 나카이도 레이치(기타)

1. 개요2. 상세3. 디스코그래피

1. 개요

RC Succession, RCサクセション.

일본의 록밴드. 60년대 후반부터 시도된 일본 록의 태동에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는 그룹이다. 축약어로 RC라고도 불리는 편이다.

2. 상세

1966년 이마와노가 학교에서 학생끼리 결성한 밴드 'The Clover'가 전신으로서 이마와노 키요시로(보컬), 하렌 겐지(기타), 고바야시 가즈오(베이스) 셋으로 구성되었다. 이당시만 해도 후대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초창기의 RC는 다소 치기어린 포크, R&B 풍의 노래로 활동하던 밴드였다.

일본 록의 태동기 당시 자작곡을 직접 만드는 가수란 개념 조차 생소하던 시절에서 1970년 첫 싱글로 데뷔하여 나름의 돌풍을 일으키곤 했으며, 히트곡들 중 하나인 'Slow Ballad'라는 노래도 이맘때의 작품. 그러나 몇차례의 해산과 휴지기로 크게 활발한 활동을 펼치진 못한 채 야자와 에이키치, 오다 카즈마사가 속한 오프 코스 등 동년배의 가수, 밴드들이 먼저 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고,[1] 설상가상으로 1977년 하렌 겐지 마저 건강 문제 및 노선 차이로 탈퇴하게된 후 밴드는 위기의 시기를 맞게 된다. 이에 이마와노는 멤버들을 재정비하며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기타리스트 나카이도 레이치, 드러머 아이다 고조, 키보디스트 G2를[2][3] 대거 영입하면서 2기나 다름없는 격변을 겪게 된다.

이렇게 변신한 RC 석세션은 발표하는 음악들마다 성공가도를 달리며 5인조는 '라이브의 황제'로서의 행보를 이어가게 된다. 유명한 앨범으로는 라이브 앨범인 Rhapsody[4]와 영미권 록을 자신들의(일본적인) 스타일로 편곡하여 수록한 Covers 등이 있다. [5] 음악사적으로 스튜디오 앨범보다 라이브가 중시된다는 점, 음악에서 토착성을 꾸준히 표현해왔다는 점에서는 미국의 그레이트풀 데드와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이 보여준 파격적인 패션과 무대 퍼포먼스, 특유의 쇼맨쉽과 저항 정신, 그리고 라이브 문화는 현재의 일본 록을 확립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대의 전설 핫피 엔도라는 밴드는 산뜻한 가사를 지향하는 일본 가요의 서막을 알렸다면, 이들은 반항적인 정신으로 쓰여진 노래로 무장했다는 면에서 차이점이 있다.

음악적으로는 특유의 반항 정신으로 인해 펑크 밴드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블루스와 소울 등의 흑인 음악[6]에 기반을 둔 로큰롤 밴드로 우리가 펑크 하면 흔히 생각하는 섹스 피스톨즈 등의 정통 펑크 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펑크의 저항 정신이란 사상은 상당수 흡수하는 행보를 많이 보이곤 했으며, 후대 엘리펀트 카시마시, 호테이 토모야스, 블루 하츠 등 펑크 뮤지션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펑크로서의 중추 역할 또한 맡기도 했다. 또한 '록의 일본화'를 상당히 중시하여 Covers 앨범에서는 전 곡을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번안하여 부르는 등 일본적 감수성을 지키려는 면모도 있었다. 이외에도 비주얼적으로는 뉴욕 돌스 등 글램 록과 결합된 형태의 초창기 펑크 뮤지션들을 모방하였다.

실제로 노래를 들어보면 피아노와 브라스 섹션의 비중이 굉장히 크며, 엔카스러운 면모도 곳곳에 드러난다. 지극히 펑크스러운 무대 매너도 엿볼 수 있다.

그들의 음악 스타일이 잘 드러나는 スローバラード와 흑인 음악에서 받은 영향을 드러내는 Sweet Soul Music
그들의 무대 매너를 엿볼 수 있는 SUMMER TOUR - 80년대 전성기에는 TV 생방송에서 카메라에 침을 뱉어 방송 정지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대표곡 중 하나인 雨上がりの夜空に
그들을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인 라이브 부틀렉 - 라이브의 제왕으로 불렸던 만큼 수많은 곳에서 공연을 치뤘고 그것이 팬들에 의해 상당수 음원 혹은 영상으로 남아 있다.
Covers의 첫 곡인 明日なき世界(니코동 영상)
대외적으로 유명한 80년대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초기의 RC

그나마 핫피 엔도와는 달리 밴드의 분량은 철저하게 이마와노에게 집중되어있는 독재 밴드였기에 [7] 일본 밴드치고는 수명은 제법 유지된 편. 그러다 1990년을 기점으로 G2, 아이다 고조가 음악적 견해차로 차례로 밴드를 탈퇴하게 되고 활동 동력을 잃은 그들은 마지막 앨범 'Baby a Go Go'를 내놓은 채[8] 이듬해 무기한 활동 중단(사실상 해체)을 선언함으로 밴드 역사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이후론 흩어진 멤버들은 솔로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다[9] 2009년자로 이마와노가 후두암으로[10] 별세함으로서 밴드는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5만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렸는데, 미소라 히바리의 장례식때의 기록에 필적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보컬 이마와노가 더 타이머즈라는 솔로 밴드를 할 무렵, 자신의 곡을 금지시킨 FM 도쿄를 TV 생방송 라이브에서 노래에 비속어[11]를 섞어 비판한 사건도 유명하다. 해당 영상 사전에 합의하지 않은 즉흥적인 개사였기에, 라이브가 끝난 후 MC가 당황하여 수습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반항 정신으로 똘똘 뭉친 그의 일면을 보여주는 부분이다.[12]

또한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평소에 라이브에서 조총련 관련 노래를 부르거나 기미가요를 펑크 버전으로 편곡해서 부른 경우도 있다. 현대에야 기미가요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우익 논란에 휩싸이기 충분하지만, 당시에는 기미가요를 펑크같은 경망스런 편곡을 일삼는것을 불경스럽게 여겼으며 이를 신성시하는 일본 구세대 우익들을 도리어 조롱하는 행동이었다.[13] 이외에도 이마와노는 사카모토 류이치와 친분이 있어 서로의 앨범에 자주 참여하였고, 둘이서 이케나이 루주 매직이라는 싱글을 발매하기도 하였다.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서로 추정되는 라이브 영상

이와마노 키요시로의 사촌 동생은 애니메이션 감독 니시쿠보 미즈호다.

3. 디스코그래피

  • 初期のRCサクセション (1972)
  • 楽しい夕に (1972)
  • シングル・マン (1976)
  • Rhapsody (라이브 앨범) (1980)
  • PLEASE (1980)
  • BLUE (1981)
  • BEAT POPS (1982)
  • OK (1983)
  • King of Live (라이브 앨범) (1983)
  • FEEL SO BAD (1984)
  • HEART ACE (1985)
  • the TEARS OF a CLOWN (라이브 앨범) (1986)
  • MARVY (1988)
  • Covers (커버 앨범) (1988)
  • Cobra No Nayami (라이브 앨범) (1988)
  • Baby a Go Go (1990)

[1] 이들의 오프닝 무대에 여러차례 서보기도 했지만, 관객들에게 야유 세례를 받는 등 고충을 겪기도 했다.[2] 본명 시바타 요시야. Gee2wo 라는 예명으로도 불린다.[3] 본래 밴드는 2인 기타 체제로 계획하여 나카이도, 아이다와 함께 세컨 기타를 영입해왔는데, 카르멘 마키 앤 오즈 출신의 가스가 히로후미, 크로스와인드 출신의 오가와 긴지(공교롭게도 둘다 카르멘 마키와 협업하던 뮤지션이었다)가 차례로 영입되었으나, 둘다 바쁜 본업에 밀린 나머지 1년 남짓한 활동만을 한채로 탈퇴하게 된다. 비록 정식 멤버로선 탈퇴했지만서도 둘은 RC의 마지막까지 객원 세션으로나마 음악에 기여를 해왔다. 그리고 둘의 탈퇴 뒤에 지금껏 객원 세션으로 함께 해오다 1980년 정식 멤버로 영입된게 바로 G2.[4] 롤링 스톤 재팬 선정 100대 명반에서 2위를 차지하였다. 당시의 일본 록이 얼마나 거대한 에너지를 표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앨범이다. 오리콘 최고 순위는 47위.[5] Covers의 경우는 RC의 유일한 오리콘 1위 앨범으로, 발매 전 선행 싱글이었던 Love me tender가 정치적 이유를 이유로 발매 중지되었던 사건으로 유명하다.[6] 보컬 이마와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싱어로 오티스 레딩을 자주 언급하였다.[7] 이마와노 독주 체재로 알려져 있지만 기타리스트인 나카이도 레이치(해체 후 serial experiments lain의 사운드 트랙을 담당한 것으로 유명)도 음악적으로 큰 기여를 하였다.[8] 당시 이들을 지원하던 세션 멤버들이 참으로 화려한데, VOW WOW 출신 키보디스트 아츠미 레이, 이전 멤버로 있던 가스가 히로후미가 탈퇴한 멤버들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참고로 가스가는 본업 기타가 아닌 드럼으로 참여했으며 RC 해체 이후론 뜬끔없게도 한국에서도 활동하게 되는데 한국에서 쓰던 예명이 바로 하치.[9] 드러머 아이다는 훗날 또다른 명밴드 우카단이란 밴드의 후임 드러머로서도 활동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이마와노와 나카이도 둘은 해체 이후로도 밴드의 연장선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음악적 교류 또한 활발했다.[10] 일본 내에선 스타급의 인기를 누리긴 했지만, 여러 차례 상술했듯 이마와노 특유의 저항 정신이 높으신 분들을 자극하여 여러 차례 방송, 판매 정지를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정작 수입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동시대 활약하던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플라스틱스, VOW WOW 등과는 달리 세계 진출을 꾀한 바 없고 일본 감수성만을 고집하던 철저한 내수용 밴드였단 점도 한몫했다. 때문에 한동안 열악한 경제 상황에 놓여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스트레스로 흡연, 음주, 약물까지 겹치며 이미 건강 악화는 예견된거나 다름없었다.[11] 좋게 말해 비속어지 실상은 그냥 상욕오X코이다(...)[12] 부랴부랴 수습하는 사회자는 보도 스테이션의 간판이었던 아나운서 후루타치 이치로(古舘伊知郎)인데, 훗날 회고하길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면서 사실 리허설 때 낌새도 이상하고 뭔가 꾸미기는 하는 것 같았지만 설마하니 이 양반들이 저지를 줄은 몰랐다고(...). 그럭저럭 사과하고 넘어간 생방송 상황과 달리, 후폭풍은 다른 포인트에서 터졌는데 이마와노 키요시로와 같은 소속사의 아티스트 중엔 당시 러브송의 대가로 일컫어지던 후배 뮤지션 마츠토야 유미가 앨범을 발표하고 한참 프로모션 중인 상황에서 사건 후 FM 도쿄에서의 프로모션과 선전이 금지되었다(...). 후에 이마와노가 따로 사과했다고.[13] 이마와노 세대 우익들은 오히려 기미가요를 사적인 자리에서 아무렇게나 부르는 것을 비난할 정도로 해당 곡을 (천황과 연관지어) 신성시했다. 이에 관해서 옛 세대의 일본 좌익 가수들은 '기미가요는 원래 단순한 사랑 노래였을 뿐이다'라며 막 부르고 다니는 식의 퍼포먼스를 많이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