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15 21:53:29

강만수(배구)

강만수의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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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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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배구단 역대 감독
이인
(1991~1993)
강만수
(1993~2001)
송만덕
(2001~2003)

}}} ||
대한민국의 배구인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201412112004775885_54897a5f69da5_99_20141211200603.jpg
<colbgcolor=#eeeeee,#191919> 강만수
姜萬守 / Kang Man-Soo
출생 1955년 8월 24일 ([age(1955-08-24)]세)
파일:경상남도 휘장.svg 경상남도 하동군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신체 194cm | 체중 100kg
직업 배구선수 (레프트 / 은퇴)
배구감독
학력 성지공업고등학교[1] (졸업)
한양대학교 (졸업)
프로입단 1980년 금성통신 배구단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금성통신 (1980~1983)
알자지라 (1980~1982)
현대자동차서비스 (1983~1984)
도레이 (1988~1991)[2]
감독 현대자동차서비스-현대자동차 (1993~2001)
대한민국 배구 국가대표팀 (1997)
수원 KEPCO 45 (2009~2011)
아산 우리카드 한새 (2013~2015)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
3.1. 감독으로서의 평가
4. 기타5. 약력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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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국가대표 배구 선수로, 1980년대 국가대표 거포 레프트로 주름잡았다.

2. 선수 경력

파일:선수 시절 강만수.jpg

1970년대와 1980년대 대한민국 배구계를 풍미한 레프트로, '아시아의 거포'란 애칭이 있다. 당시 '컴퓨터 세터'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호철과 대표팀 최강의 듀오를 구성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가대표 경기를 봤던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김호철 세터조차 경기 후반 중요한 상황에서는 강만수에게 거의 모든 공격을 맡겼을 정도라고 한다.

「욘사마」보다 20년 앞서「반사마」시대를 열었던 元祖 한류

3. 지도자 경력

1992년 친정 팀[3] 현대자동차서비스의 코치로 복귀하여 1993년부터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현대자동차서비스 감독 시절에는 호쾌하고 강력한 공격을 강조했다. 특히 높이의 배구로 블로킹이 강한 팀을 만들었으며, 이는 지금도 현대캐피탈의 팀 컬러이기도 하다.

선수 때의 명성과 달리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좋은 편이 못 된다. 물론 1990년대 초중반 고려증권과의 라이벌리를 가졌던 시절에는 팀이 잘 나갔던 시절이라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지만,[4] 1995년에 대한민국 배구판을 집어삼켰던 모 팀이 창단한 후부터는 너무 판에 박힌 전술을 써서 상대 팀이 다 읽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삼성화재의 리즈 시절에 죽어도 삼성화재만큼은 꺾지 못해 현대자동차서비스 배구단을 콩라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결국 2001년 송만덕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물러났다. 그 후 한국전력의 감독을 맡아 현장에 복귀했지만 2년 만에 해임됐다. 여기서도 강만수 감독 특유의 경직된 전술 사용으로 까였는데, 항간에는 강토라레라고 까이기도 했다.

김호철의 후임으로 2013년 4월 30일 아산 우리카드 한새의 감독으로 선임됐으며, 2013년 5월 2일에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팀의 성적이 영 좋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만수와 동명인 점을 따와 갓동니뮤ㅠㅠ로 놀림을 받기도 했다.

프런트의 무관심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면서 팀을 이끌었고, 2014년 12월 23일 계양체육관에서 시즌 두 번째 승을 거둔 후 인터뷰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강만수 감독의 눈물

결국 성적 부진으로 2015년 1월 8일 감독직에서 사퇴했고, 양진웅 코치에게 지휘봉을 넘긴 후 총감독으로 추대되며 현장 일선에서 물러났다.

3.1. 감독으로서의 평가

이름이 같고 성만 다른 이만수와 마찬가지로 화려했던 선수 시절과는 달리 감독으로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부임 기간 줄곧 평가가 좋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시절이야 부임 초기엔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고 말기엔 삼성의 악행이 널리 알려져 있어 딱히 감독 문제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그 때부터 한국전력 시절까지 능력에 대해 줄곧 물음표가 따라붙었고, 우리카드에 막 왔던 2013-14 시즌은 봄 배구를 못가는 게 이상한 전력이었음에도 철저히 주전만 기용하고 비주전은 닭장에 박아놓았다가 선수들 체력 다 갉아먹고 올스타 브레이크 때 대책 하나 마련 못해서 후반기를 통째로 날려먹어 엄청 욕먹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력 시절에는 선수들이 조작을 하던 것을 알기 힘들었을 것이고, 마지막에는 성적이 워낙 개차반이라 최악의 시절이라 보기 쉬워도 우리카드 팬들은 물론이고 타 팀 팬들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막장 우리카드 프런트로 인해 시즌 내내 손 쓸 도리 없이 고생을 했고,[5] 시즌 첫 승 2승[6] 때 팬들에게 미안함을 표하면서 흘렸던 눈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우리카드 팬들이 많다.[7]

이런 감성적인 면이 아니라도 팀 케미가 박살나고 공격력이 반토막난 상태에서 가진 선수들을 최대한 활용해 더 빠르고 많은 횡이동으로 블럭을 분산시키고 한 템포 빠른 공격으로 블럭이 뜨기 전에 꽂아버리는, 높이와 파워의 열세를 기동력으로 밀어붙이는 우리카드식의 스피드 배구라는 팀 컬러로 승화시켜 고군분투한 점을 팬들이 높이 평가했다. 외국인 선수 없어도 몰빵배구하기 바쁘고 있으면 더더 하려는 당시 국내 배구에서 이 정도로 가용 자원을 풀로 이끌어 낸 감독[8]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활동량을 왕창 늘리는 방식은 리시브의 과부하와 공격수들의 체력 한계가 빨리 와서 실질적인 승리는 고작 1승 정도에 불과했지만 저 구질구질한 악조건 속에서 10연패하는 와중에도 풀세트 접전만 4번 치르고 고작 2승 뿐이지만 승점은 10점을 쌓는 우리카드의 포기하지 않는 배구, 저력있는 배구로 대표된 악바리 근성은 리그 내외로 불안함만 가득했던 우리카드에서 유일하게 힘이 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2015-16 시즌, 서울 복귀와 함께 우리카드에 새로 부임한 김상우 감독이 팀의 총체적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2014-15 시즌과 똑같거나 더 심한 모습으로 전락함에 따라 강만수 감독을 그리워하는 우리카드 팬들이 늘고 있다. 그나마 다음시즌인 16-17시즌에는 다시 김상우를 찬양하고 있었지만, 5라운드 및 6라운드에 결국 실현된 DTD와 계양 호구 행각으로 인해 비판받았고 결국 17-18시즌에마저 봄 배구 진출에 실패하면서 김상우 감독의 우리카드 시절은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이후 신영철 감독이 부임 시기까지만 해도 10년 동안 한 번도 봄배구를 못 해본 우리카드를 데리고 재임 기간 내내 3위 이내[9]에 들고 정규리그 1위[10], 포스트시즌 승리, 챔피언결정전 진출 등 구단의 좋은 최초 기록은 다 가져가면서 우리카드 팬들이 강만수 감독을 그리워하는 일 또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첫 챔프전 승리가 계양체육관에서 나오는 바람에 강만수 감독이 우리카드 갤러리 등 팬덤에서 재소환됐고, 그전까진 '그 눈물'이 하위팀의 눈물겨운 전설이었지만 성적이 나는 현재는 좋은 기억이자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길 수 있게 됐다.

4. 기타

동생 강화수 역시 배구선수로 한국전력에서 뛰었다. 차남 강성호는 야구선수로 신일고 - 경희대 - 경찰청을 거쳐 NC 다이노스신고선수로 입단했으나, 1년 만에 방출되었다. 아버지 강만수가 194cm인데 아들 강성호는 KBO 프로필상 189cm로 아들이 아버지보다 작다. 아버지의 그늘에 있기 싫어 배구 대신 야구를 택했다. 세터로 대성하길 바랐던 아버지는 아들의 결정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5. 약력

6. 관련 문서



[1] 現 부산 성지고등학교.[2] 실업리그 시절에 소속되었다, 도레이는 현재도 도레이 애로우즈란 이름으로 일본 V.리그에 참가 중이다.[3] 사실 친정 팀이라고 하기가 조금 애매한 게, 강만수 감독은 한양대를 졸업하고 금성통신(현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 배구단에 입단하여 활동하다가 현대자동차서비스 배구단이 창단될 때 창단 멤버로 들어갔고, 그나마도 몇 년 뛰지 않고 일본에 갔기 때문에 어디를 친정 팀이라고 할지 참 애매하다.[4] 그래도 슈퍼리그에서 우승을 하였다.[5] 프런트는 대놓고 팀 해체 선언, 주전 선수들은 다 군대로 가는데 보강 없고 사전 통지 없이 비밀 트레이드를 하는가 하면, 외국인이 팀의 절반 이상이라 불리는 배구에서 그런 복이 없었고, 주전 세터란 놈은 감독한테 바락바락 대들기나 하는 게 당시 우리카드였다.[6] 우리카드가 첫 승을 했을 때의 상대는 OK저축은행이었고, 경기도 당시 홈이었던 아산이순신체육관에서 했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강만수 감독의 눈시울은 붉어졌었다.[7] 우리카드 팬덤에서는 이 때 강만수 전 감독이 흘린 눈물이 계양체육관에 스며들어 우리카드의 원정경기 때마다 선수들에게 힘을 준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유치해보여도, 그만큼 팬들도 선수들도 감독도 정말 힘든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애잔했던 일화다. 이 얘기가 전설 정도로 끝나나 했더니 우리카드의 창단 첫 번째 챔피언결정전이었던 2021년 4월 11일 계양 대한항공전을 3:0 승리로 장식하면서 강만수 전 감독이 또다시 소환됐다.[8] 몰빵배구의 변명 중 하나가 배구에서는 2군 리그가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닭장 멤버들이 실전 경험을 쌓는데 제약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9] 포스트시즌 진출이라고 표현해도 좋고 구단도 현수막 등에 그렇게 썼지만, 엄밀히 따지면 19-20시즌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시즌이 조기 종료돼 포스트시즌 자체가 개최되지 않았기 때문에 3위 이내라는 표현이 사실에 더 가깝다.[10] 안타깝게도 이 성적을 기록한 19-20시즌은 상술한 이유로 시즌이 중단 및 조기종료되는 바람에 1위를 하고도 챔피언결정전을 뛰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1위팀이 포스트시즌 경험 자체가 일천한 우리카드였기 때문에 더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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