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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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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각의 역대 전쟁 범죄 인정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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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일본의 전쟁범죄 인정과 식민지 지배 사죄
1998년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공동선언 식민지 지배의 가해책임 인정과 식민지 지배 사죄
2005년 고이즈미 담화 무라야마 담화 재확인 및 계승의지 천명
2010년 간 담화 한일병합의 강제성, 식민지 지배의 폭력성에 대해 인정과 사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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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기타4. 전문

1. 개요

河野談話 (こうのだんわ). 정식명칭은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慰安婦関係調査結果発表に関する河野内閣官房長官談話)’.

1993년 8월 4일에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당시 고노 요헤이 내각관방장관이 1년 8개월 동안의 조사를 걸쳐 발표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담화이다.

2. 상세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강제성 뿐만 아니라, 관헌(官憲) 즉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는 점을 인정한 일본 정부의 첫 담화이기에 그 중요성이 큰 담화이다. 다만 당시 미야자와 총리가 아닌 내각관방장관이 발표해[1] 무게감이 좀 떨어졌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이에 대해 고노 전 장관은 관방장관 담화이기 때문에 내각 전체 입장이 아니라는 일각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담화는 일본 내각 전체 의사로 말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지금까지도 자민당을 비롯한[2] 좌우 집권 정당들이 꾸준히 계승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란 점은 분명히 평가할만하다. 즉, 일단은 일본 정부도 많은 일본군 위안부가 강압적으로 모집되었다는 것과 당시 군이 그에 개입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 우익 인사들은 이를 극렬 부인하고 있고,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가 고노 담화의 내용과 모순되는 발언을 일부하기도 했지만 고노 담화는 현재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역대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줄곧 계승되어 왔고 이는 현재의 기시다 내각 또한 그렇다.[3][4] 하지만 후술되어 있듯이 고노담화 수정론이 제기됐고 검정 역사 교과서에서 위안부 표현이 빠지는 등 논란이 되고 있다.

2012년 8월에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반발해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 등의 일본 우익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고노 담화 수정론 및 폐지론이 제기되자 고노 전 장관은 10월에 "위안부 문제를 부정할 경우 국가 신용 상실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경고성 발언을 했다.# 하지만 2014년에도 2월 20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국회에서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 미발견을 주장하며 고노 담화 수정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2014년 3월 16일엔 아베 신조 총리가 직접 고노 담화를 인정한다는 발언을 했다.# 미국의 압박에 못 이겨 성의 표시를 한 것이란 분석도 있지만 어쨌든 틈만 나면 고노 담화 흔들기를 시도해온 아베가 우익들의 기대와 다른 발언을 한 것이었다.

2014년 3월 리처드 아미티지 전 미 국무부 부장관은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은 한국을 이길 수 없으며, 고노 담화를 수정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무례한 행위라고 비판하였다.#[5] 일본 내에서도 고노 담화 수정에 반발하는 인사들이 정권을 비판하였다.#

허나 결국 2014년 6월 고노 담화 검증팀은 본인들에게 불리한 부분은 빼고 유리한 부분은 내세우며 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동원은 확인할 수 없었다는 식의 결론을 내놓게 된다. 고노 담화 역시 한일간에 문안조정이 있었다며, 즉 양국 사이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 나온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식으로도 잘못 해석될 수 있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해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아베 내각이 역사를 직시해야 된다며 비판했다.#

이후 내각총리대신의 입장 발표가 이뤄졌는데, 아베 신조 총리는 앞선 조사단의 결과를 수용해 고노 담화에 한일 양 국가의 이면 협의가 있었을 가능성을 인정하며 정통성에 문제 제기를 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고노 담화를 폐기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몇몇 해석이 존재했는데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의 재조사를 요구하는 우익 지지층 세력을 달래고 지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고노 담화의 정통성을 문제삼으면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정성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일본 국민, 지식인들의 시선과 이 문제에 관한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을 무시할 순 없기에 눈치를 봤다는 것이다.

또 한일 양국 관계의 심각한 훼손 역시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양국 사이에 이면 협의의 가능성은 있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담화의 내용이나 법적 효력에는 문제가 없으므로 내각 차원에선 이 담화를 일본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계승하겠다는 결론을 냈다는 식이다. 즉, 대내외적인 눈치가 보이니 '정부차원에서는 고노담화를 계승한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양국 정부간의 협의에 의한 담화일 뿐이었음을 주장'한 것. 실제로 고노 담화 검증의 핵심인사였던 스가 요시히데는 그 난리를 피워놓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역사 연구와 평가는 "전문가들의 손에 맡기겠다"고 발을 뺐다.

허나 이런 애매한 위치 잡기는 당연히 당시 한일 관계에 대형 악재로 작용했으며, 고노 담화 역시 일본 정부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사과가 아닌 단순한 외교적 립서비스였다고 보일 수 있는 무례를 저지른다. 이 '고노 담화 검증'으로 '고노 담화'는 일본 정부 스스로 그 진정성에 심각한 훼손을 한 것으로 담화 내용에 반하는 여러 사안들, 군의 직접적인 혹은 강제적인 관여 증거가 없다는 식의 왜곡된 물타기성 주장에 은근히 힘을 실어줬다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선 위안부의 탈/불법성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 우익들에게도 그닥 만족스럽진 못한 반응을 얻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어찌됐든 위안부 범죄를 부정하는 쪽에 더 가까운 뉘앙스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 담화에서 약속한대로 1994년부터는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1997년부터는 중학교 교과서에 위안부 관련 내용을 포함시켰다. 하지만 일본 우익 일각에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왜 과거사를 자학하는(...) 내용을 가르치냐’며[6] 가치관이 아직 성립되지 않은 중학생 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내용을 빼라고 요구했고, 이후 2012년 아베 신조 내각 들어 초중고교 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내용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후임 스가 요시히데 내각 역시 고노 담화에서 사용된 ‘종군 위안부’란 표현 대신 ‘위안부’라는 용어가 적절하다고 결정했는데, 역대 내각이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방침을 밝혔음에도 종군 위안부 표현을 교과서에서 변경한 것은 이율배반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어 출범한 기시다 후미오 내각에서는 2021년 4월 각의(국무회의) 결정을 통해 교과서에서 ‘강제연행’과 ‘종군’이라는 표현을 쓰지말라고 했고, 2024년에는 일본 야마카와출판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을 통과시켰는데 여기에서는 '위안부'라는 용어마저도 빠져 단지 "일본·조선·중국·필리핀 등으로부터 여성이 모였다"고만 서술됐다. ##

3. 기타

해당 담화에는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 인정과 사죄는 담고 있지만 배상에 대한 언급은 딱히 없는데, 사실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줄곧 유지해왔다.[7] 하지만 1965년 당시에는 위안부 문제가 잘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직접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일본 정부를 포함한 여러 단체가 출자하여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하고 여기서 조성된 기금으로 보상금[8]이라는 명목으로 간접적으로 배상하게 된다. 다만 이때 수령받은 할머니들을 제외한 상당수 위안부 할머니들은 보상금 수령을 거부했는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에선 일본 정부의 직접 배상이 아니므로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고노 담화가 당시 한일 셔틀외교의 결과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보상, 교과서 기술 문제 등을 촉구한 한국 정부와 한일청구권협정을 문제 삼을 경우 기존 한·일 관계의 기본 틀을 흔든다고 주저한 일본 정부간 교착 상황이 길어지자, 1992년 1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퇴임을 넉 달 앞두고 직접 방일해 정상회담을 가졌고, 이듬해인 1993년 8월 고노 담화가 발표, 1994년에는 일본 고교 교과서 23종 중 22종에 관련 내용이 기술됐다.## 또한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1993년 3월 ‘도덕적 우위에 입각한 자구조치’를 선언하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금전적 보상은 일본에 요구하지 않고 정부가 직접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을 보여온 일본에게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입장 표명이 상당한 명분으로 작용했다는 의견도 있다.#

국내 일부 블로그 글이나 동영상 등에선 고노 담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사과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보다시피 고노 담화에는 사과도 포함되어있다. 다만 상기된 아베 내각의 조사 활동처럼 고노 담화를 훼손, 부정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어왔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사과에 진정성이 없으니 애초에 사과를 한 적이 없다는 주장 혹은 애초에 이런 사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일본이 사과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위안부 문제와는 별개지만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아키히토 상황처럼 한국 내에서도 착실히 사과하고 있다고 언론에서 평가받는 인물들이 있는 것을 볼 때, 마냥 한국이 반일 국가라서 사과하는데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일부 일본 우익들의 주장은 실제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다양한 주장과 반박을 접해보고 싶은 사람들은 2019년 영화 주전장을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사실 한일 양국이 서로 싸우긴 하는데, 정작 왜 싸우는지는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심지어 영화에도 나오지만 일본 젊은이들은 위안부 문제 자체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도 많다. 이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 한일 문제의 원인에 대한 한국 측의 시선을 개괄적으로 배우고, 일본 제국에 의해 조선 등에 대해 강압적 통치가 이뤄졌음을 배우기는 하지만, 위안부 관련 서술의 경우 아베 내각 들어 일부 서술에 문제가 있다는 핑계 혹은 구실로 관련 내용이 축소되거나 누락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일반적으로 일본을 포함한 옛 식민 제국들의 교육 과정이 피식민 국가들의 피해 사실이나 감정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고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나, 일본 젊은이들의 과거사나 국제 문제 자체에 대한 무관심도 원인이다.[9]

4. 전문

2014년 6월 20일 연합뉴스 기사의 번역본[10][11], 일본어 원문, 공식 영어 번역본.
위안부 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

1993년 8월 4일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정부는 재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해왔으나 이번에 그 결과가 정리됐으므로 발표하기로 했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 그리고 광범위한 지역에 위안소가 설치돼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됐다.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런 경우에도 감언(甘言),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官憲)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하의 참혹한 것이었다.

또한 전지(戰地)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에 관해서는 일본을 별도로 하면 한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한반도는 우리 나라의 통치 아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

어쨌거나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다.[12] 정부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그 출신지가 어디인지를 불문하고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 또 그런 마음을 우리 나라로서 어떻게 나타낼 것인지에 관해서는 식견 있는 분들의 의견 등도 구하면서 앞으로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는 일이 없이 오히려 이를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 가고 싶다. 우리는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번 표명한다.

덧붙여 말하면 본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 나라에서 소송이 제기돼 있고 또 국제적인 관심도 받고 있으며 정부로서도 앞으로도 민간의 연구를 포함해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安婦関係調査結果発表に関する 河野内閣官房長官談話

平成 5年 8月 4日

いわゆる従軍慰安婦問題については、政府は、一昨年12月より、調査を進めて来たが、今般その結果がまとまったので発表することとした。  今次調査の結果、長期に、かつ広範な地域にわたって慰安所が設置され、数多くの慰安婦が存在したことが認められた。慰安所は、当時の軍当局の要請により設営されたものであり、慰安所の設置、管理及び慰安婦の移送については、旧日本軍が直接あるいは間接にこれに関与した。慰安婦の募集については、軍の要請を受けた業者が主としてこれに当たったが、その場合も、甘言、強圧による等、本人たちの意思に反して集められた事例が数多くあり、更に、官憲等が直接これに加担したこともあっ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また、慰安所における生活は、強制的な状況の下での痛ましいものであった。  なお、戦地に移送された慰安婦の出身地については、日本を別とすれば、朝鮮半島が大きな比重を占めていたが、当時の朝鮮半島は我が国の統治下にあり、その募集、移送、管理等も、甘言、強圧による等、総じて本人たちの意思に反して行われた。  いずれにしても、本件は、当時の軍の関与の下に、多数の女性の名誉と尊厳を深く傷つけた問題である。政府は、この機会に、改めて、その出身地のいかんを問わず、いわゆる従軍慰安婦として数多の苦痛を経験され、心身にわたり癒しがたい傷を負われたすべての方々に対し心からお詫びと反省の気持ちを申し上げる。また、そのような気持ちを我が国としてどのように表すかということについては、有識者のご意見なども徴しつつ、今後とも真剣に検討すべきものと考える。  われわれはこのような歴史の真実を回避することなく、むしろこれを歴史の教訓として直視していきたい。われわれは、歴史研究、歴史教育を通じて、このような問題を永く記憶にとどめ、同じ過ちを決して繰り返さないという固い決意を改めて表明する。

なお、本問題については、本邦において訴訟が提起されており、また、国際的にも関心が寄せられており、政府としても、今後とも、民間の研究を含め、十分に関心を払って参りたい。
Statement by the Chief Cabinet Secretary Yohei Kono on the result of the study on the issue of "comfort women"

August 4, 1993

The Government of Japan has been conducting a study on the issue of wartime "comfort women" since December 1991. I wish to announce the findings as a result of that study.

As a result of the study which indicates that comfort stations were operated in extensive areas for long periods, it is apparent that there existed a great number of comfort women. Comfort stations were operated in response to the request of the military authorities of the day. The then Japanese military was, directly or indirectly, involved in the establishment and management of the comfort stations and the transfer of comfort women. The recruitment of the comfort women was conducted mainly by private recruiters who acted in response to the request of the military. The Government study has revealed that in many cases they were recruited against their own will, through coaxing, coercion, etc., and that, at times, administrative/military personnel directly took part in the recruitments. They lived in misery at comfort stations under a coercive atmosphere.

As to the origin of those comfort women who were transferred to the war areas, excluding those from Japan, those from the Korean Peninsula accounted for a large part. The Korean Peninsula was under Japanese rule in those days, and their recruitment, transfer, control, etc., were conducted generally against their will, through coaxing, coercion, etc.

Undeniably, this was an act, with the involvement of the military authorities of the day, that severely injured the honor and dignity of many women. The Government of Japan would like to take this opportunity once again to extend its sincere apologies and remorse to all those, irrespective of place of origin, who suffered immeasurable pain and incurable physical and psychological wounds as comfort women.

It is incumbent upon us, the Government of Japan, to continue to consider seriously, while listening to the views of learned circles, how best we can express this sentiment.

We shall face squarely the historical facts as described above instead of evading them, and take them to heart as lessons of history. We hereby reiterate our firm determination never to repeat the same mistake by forever engraving such issues in our memories through the study and teaching of history.

As actions have been brought to court in Japan and interests have been shown in this issue outside Japan, the Government of Japan shall continue to pay full attention to this matter, including private researched related thereto.

[1] 당시에는 부총리가 없었으므로 관방장관이 No. 2 정도 됐다. 사실 일본에서 부총리의 정의 자체가 '관방장관이 아닌 총리 권한대행 서열 1위 국무대신'인지라, 바꿔 말하면 부총리가 따로 없는 일본 내각에서 부총리는 곧 관방장관이라는 소리다. 실제로도 부총리가 없는 내각에서 총리 권한대행 서열 1위는 항상 관방장관이다. 아베 내각과 스가 내각에서 아소 다로가 부총리로 불린 이유도 아소는 관방장관이 아닌 신분으로 서열 1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기시다 내각에서는 다시 관방장관이 1위가 되어 기시다 내각은 부총리라는 이름을 별도로 쓰지 않는다.[2] 애초 고노 요헤이 내각관방장관부터가 자민당 출신이다.[3] '담화'는 내각 차원의 정식 결의이며, 담화를 폐지하려면 또 다른 내각 차원의 결의가 필요하다. 이런 류의 발언은 설사 그 인물이 총리나 국회의원이라고 해도 (물론 우익 정치가들의 움직임은 경계해야 하지만) 일단은 '개인의 발언'이므로 정부의 담화를 취소하는 효력은 없다.[4] 2023년 한일정상회담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5] 사실 미국은 아베 신조 정권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계속된 우익 행보를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중국을 지나치게 자극하고 있는 데다가, 한국과의 공조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고 나아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세계질서에도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6] 참고로 자국 역사엔 영광만 있다는 사관을 영광사관이라고 한다.[7] 다만 2018년 말, 강제징용공 관련해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한국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일본 의회에서 당시 고노 다로 외무상이 이를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다만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진 않았지만 한일기본조약으로 해결되었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에 대해 반대측은 한일기본조약은 정부의 외교보호권(국가청구권)만 상실한 것일 뿐 개인청구권과는 상관이 없으며, 보상과 배상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라고 반발했다.[8] 償い金(쓰구나이킨): 보상금, 속죄금으로 번역된다.[9] 즉, 학교 교육 과정에서 가르치기는 하나, 배우는 학생 입장에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과서 서술 수정 이전에 역사 교과를 이수한 일본 학생들도 관심있게 본게 아니라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은 이후 세대나 이전 세대보다 뚜렷이 다르다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서술 자체를 누락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10] 다음은 1993년 8월 4일 발표된 고노(河野)담화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담화에 등장하는 '정부'는 일본 정부, '우리 나라'는 일본을 의미한다. 고노담화는 일본군 위안부를 '이른바 종군(從軍)위안부'라고 표현했다. 일본에서는 이런 표현이 지금도 주로 사용된다. 군대를 따라간다는 의미의 '종군'이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이제 '종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대신 일본군이 위안부 문제에 깊게 관여하거나 혹은 주도했다는 의미를 분명하게 하려고 '일본군 위안부'로 표기하고 줄여서 '군 위안부'라고도 쓰기도 한다. 일본의 역사적 인식이 반영된 원문을 전하는 차원에서 '이른바 종군 위안부'라는 표현을 '일본군 위안부'로 바꾸지는 않았다.[11] '우리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라고 붙여 쓰면 제3의 의미를 지닌 합성어가 되어 '대한민국'만 뜻하게 된다.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우리(의) 나라', 즉 '일본'을 의미하는 구(句)에 해당하므로 띄어 써야 한다.[12] 여담으로, 일부 일본 우익들은 위안부 문제는 업자들의 문제이지 일본 군부의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당 담화에서도 직간접적 일본 군부의 관여와 책임은 명시하고 있다. 애초에 위안부 문제의 발단이 되는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생각해보면 전제부터가 어리석은 논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