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16:15:23

김고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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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태종 무열왕의 왕녀
김고타소 | 金古陀炤
이름 고타소(古陀炤)
출생 627년 이후?
사망 642년 8월
대야성
(現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본관 경주 김씨
골품 진골
부왕 태종 무열왕
모후 문명왕후
부군 김품석
형제자매 형제 - 문무왕, 김인문, 김문왕,
김노차(金老且), 김인태,
김지경(金智鏡), 김개원
자매 - 지소부인, 요석공주,
원성왕의 증조할머니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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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인물. 태종 무열왕장녀이자 문무왕의 여동생. 이름은 김고타소(金古陀炤). 아버지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사망했기에 보통 공주라고 불리지 않으나 왕의 딸이라는 의미로 '고타소 공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각종 대중매체에서는 문무왕의 누나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삼국사기에서 문무왕이 백제의 태자 부여융에게 모욕을 줄 때의 기록을 보면 분명히 '나의 여동생(我妹)'이라고 적혀 있으므로 문무왕은 명백히 김고타소의 남동생이 아니라 오빠이다. 문무왕이 626년생이므로 그의 여동생인 김고타소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627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대야성 전투가 서기 642년에 벌어졌으므로 사망 당시 그녀는 15세 미만의 어린 나이였을 것이다. 이로 볼 때 김고타소는 어린 나이에 김품석혼인했고 시집간 직후에 참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야성 전투 당시 그녀의 아버지 김춘추도 39세에 불과했으므로 당시 김고타소의 나이가 10대였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1]

2. 생애

김고타소의 남편 김품석은 요충지에 있는 대야성[2]도독으로 부임했고 김고타소도 남편과 함께 대야성에서 지내게 된다. 그러던 중 백제의 침공으로 대야성 전투가 벌어지는데 신라군이 방어에 실패해 대야성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대야성주 김품석은 아내 김고타소를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다. 심지어 성왕을 죽인 일에 대한 복수로 감옥 바닥에 파묻어버리는 고인모독도 당했다고 한다.[3] 이 때문에 아버지인 김춘추(태종 무열왕)와 오빠 김법민(문무왕)이 백제에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종일 정신나간 사람처럼 기둥에 선 채로 있었으며 앞에 뭔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백제를 멸하겠다는 일념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고구려, , 당나라를 차례대로 방문해 동맹을 타진하게 된다. 이후 김춘추는 이전보다 더욱 몸을 사리지 않는 행보를 이어가는데 고구려에서는 동맹 제의를 거절당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탈출했으며 친 백제국인 왜에서도 거절당하자 김춘추는 마지막으로 당나라를 방문해 당태종나당동맹을 맺는데 성공하게 된다.

드라마 등 대중매체에서는 극적인 스토리를 뽑아내기 위해 김춘추와 김법민의 개인적 복수심을 이후 무리한 고구려 외교, 길게는 나당동맹 체결이나 백제 멸망전까지 스토리 전개의 동기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으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시 신라 정계에서 김춘추 일파가 입은 정치적인 타격 때문이었다. 대야성주 김품석은 아무래도 장인 김춘추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을텐데 김품석은 대야성 상실의 가장 큰 책임자이다. 이런 점과 김품석이 임전무퇴귀족의 미덕으로 여기던 신라 사회 분위기와 정반대로 끝까지 항전하지 않고 항복하려 했던 것은 김춘추에게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고 유추할 수 있다. 신라 정계는 김춘추가 즉위하기 전까지는 비담, 알천으로 대표되는 귀족 견제 세력이 존재했고 이들 계파와 경쟁하는 구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딸을 아끼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대야성 전투의 여파가 크기는 했지만 단순히 정치 인생이 끝나서 그랬다면 빨리 정신차리고 움직이지 하루종일 정신나간 사람처럼 있는 건 지나친 반응이기 때문이다. 이들 부자 입장에서 고타소는 당시 기준으로도 어린 나이에 시집가자마자 남편에게 살해당한 불쌍한 딸이자 동생이었다. 특히 당시 아직 젊어서 오빠의 면모가 컸을 김법민이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여동생 일을 두고두고 떠올리며 괴로워한 걸 보면 단순히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게 아님을 알 수 있다.[4]

그녀의 시신은 나중에 김유신이 647년 옥문곡 전투에서 붙잡은 8명의 백제 장군과 교환해 수습했는데 이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수도 사비성[5]이 660년 함락되고 백제의 태자 부여융도 사로잡히자 당시 태자였던 김법민(문무왕)은 부여융의 무릎을 꿇리고 침을 뱉은 뒤 "네 아비는 나의 여동생 김고타소를 참혹하게 죽이고 옥 중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이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였다."라고 일갈했다. 보통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옛날 역사서들의 기록들은 대부분 정제되고 건조하거나 완곡한 표현으로 기록된 경우가 많은데 문무왕이 부여융을 모욕줄 때의 발언과 행동은 상당히 노골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발언은 신라의 백제에 대한 증오감과 복수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으로 꼽힌다.
法敏跪隆於馬前 唾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나의 여동생을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날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삼국사기태종 무열왕 7년 기사

3. 대중매체에서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최설화가 연기했다. 남편 김품석막장백제군에 잡힌 후에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 정반대로 의연한 인물로 묘사된다.


[1] 김춘추의 외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볼 때 혼인하고 얼마 안 되어 죽은 게 확실해보인다.[2]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3]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이 도도에게 죽은 뒤 성왕의 목을 도당에 파묻어버려 몸통만 백제로 돌아갔다고 한다. 다만 성왕 항목에서도 나오듯 사실일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한편 백제 측이 확보했던 김품석 내외의 유해는 647년 김유신이 옥문곡 전투에서 생포한 백제 장수 8명과 교환되어 신라로 돌아갔다.[4] 역사에서 젊은 나이에 살해당한 형제자매에 대한 한이 평생 동안 맺힌 사람들은 많다. 조위황제조비가 그 예. 그나마 문무왕은 침 뱉고 모욕하기는 했어도 어차피 부여융은 적국의 왕자였고 그의 아버지인 무열왕이 용서해준 것도 아니니 참작 여지라도 있지 조비는 제 아비가 용서해준 사람, 그것도 자기 휘하인 장수를 상대로 마구 핍박을 해 죽게 만들었다는데서 문무왕보다 한 술 더 떴다...[5]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6] 2010년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부여화의 시녀인 단단이 역.[7] 김법민과 연화가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질투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됐다.[8] 극 중 만삭 상태라서 아무리 그래도 임산부를 죽이는건 잔인하지 않나 하는 의견도 있었다.[9] 실제로 대야성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야 신라에게 되돌아오기에 재현 오류이다.[10] 김유신이 대야성에서 잡은 비장 8명과 고타소 부부의 유골을 바꾸자 제안했는데, 이에 대해 의자왕은 마뜩치 않아했고 성충과 흥수도 반대했지만 충성스러운 장수들을 구하기 위한 계백의 간곡한 청으로 결국 교환이 성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