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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 갈라수 전투 상상화. 불나방 블로그 作 | ||
시기 | 1109년 (예종 4년) 5월 | |
장소 | 고려, 갈라수 근처 (現 북한 성천강 일대) | |
원인 | 동북 9성 확보를 위한 고려와 여진의 충돌 | |
교전국 | <rowcolor=black> 여진 (공세) 승 | 고려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금나라| 女眞 ]] 완안알새[[금나라| 女眞 ]] 사묘혼탄[[금나라| 女眞 ]] 사묘아리[[금나라| 女眞 ]] 석적환[[금나라| 女眞 ]] 오도본 | 지휘관 오연총 (상원수)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고려군: 약 70,000명(?)~120,000명(?)[1]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2] |
결과 | 여진의 승리 | |
영향 | 여진의 동북 9성 탈환 및 윤관 탄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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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여진 정벌 당시 벌어졌으며, 퇴각하던 고려군이 사묘아리가 이끄는 여진군에게 갈라수에서 참패한 전투다. 고려가 동북 9성을 무력으로 유지하려던 정책을 재고하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금나라의 인간 흉기였던 사묘아리가 처음으로 이름을 날린 전투로, 고려의 인간흉기였던 척준경이 이 전투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역덕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2. 공험진에서의 회전
1107년, 예종의 지시로 윤관을 비롯한 별무반 178,000명은 갈라전 일대를 점령하고, 그곳에 동북 9성을 쌓으며 고려의 영토로 편입했다. 그러나 여진은 끊임없이 이곳을 공격해왔고 1108년 한 해 동안 무려 19번의 전투가 벌어지면서 이로 인해 고려의 국력이 상당히 소모되기에 이르렀다.1109년 5월, 여진은 또다시 길주성을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고려 조정은 오연총에게 병력을 주며 길주성을 구원하려고 한다. 당시 오연총은 북방이 아니라 개경에 돌아와 있었는데, 길주성의 위기를 전해 듣고는 출정을 자원했고, 예종은 지휘권을 줘서 오연총을 북방으로 파견했다. 그런데 길주성을 향해 가던 도중 공험진에서 사묘혼탄이 이끄는 여진군과 조우했고, 이어서 회전을 벌이게 되었다. 불과 반세기 전에 대륙의 지배자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던 고려군이었던 만큼 기병인 여진군에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나, 사묘혼탄의 아들이자 여진의 젊은 장수였던 사묘아리가 고려군의 사이에 파고들어 고려 장수를 창으로 찔러 죽이자 고려군이 당황했고, 결국엔 퇴각하게 되었다.
경신일. 여진이 길주(吉州)를 포위하자 오연총(吳延寵)이 군사를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대패했다.
《고려사》 권7, 예종 4년 5월
《고려사》 권7, 예종 4년 5월
오연총이 (길주가 위험하다는) 그 소식을 듣고 분연히 출정하려고 하자 왕은 다시 지휘권을 부여해 파견했다. 도중 공험진(公嶮鎭)에 당도했을 때 적이 길을 막고 기습하는 통에 아군이 대패해 장졸들이 무기를 버리고 여러 성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성이 함락될 때 수없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고려사》 <오연총 열전>
이후 사묘혼탄(渾坦)의 여진군은 도문수(徒門水)에서 석적환(石適歡)의 군대와 합류하고, 사묘아리를 선봉으로 세워 고려의 동북 9성 중 2개 성을 취하는 데 성공했다.《고려사》 <오연총 열전>
혼탄과 더불어 석적환이 도문수에서 합병(合兵)했는데,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주장(主將)이 되어 적병(敵兵)을 깨트리고, (고려의) 그 2성을 취(取)했다.
《금사》 <사묘아리 열전>
《금사》 <사묘아리 열전>
3. 갈라수와 사묘아리
고려군은 이 빼앗긴 2개 성을 되찾기 위해 다시금 구원병을 보냈으나 여진의 강력한 저항을 못이기고 결국 퇴각했다. 이때 사묘아리가 이끄는 여진군이 고려군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갈라수 부근에서 고려군의 후위 부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던 고려군은 여진군의 공격에 당황해 진열이 흐트러졌다. 이후 석적환의 병력과 합세한 사묘아리는 도중에 50,000명에 달하는 고려군을 공격하여 내쫓는데 성공하고, 잠시후 오연총이 이끌던 70,000명의 고려군과 조우했다.[3]이에 사묘아리는 또다시 앞장서 돌격했고, 오연총의 고려군은 이들과 회전을 펼치게 되었다. 그리고 사묘아리의 맹활약에 고려군은 후퇴했다. 전투 이후 사묘아리는 석적환으로부터 "네 공이 크다"라는 말과 함께 상을 받았다고 한다.
석적환(石適歡)이 말하길 "네가 하루 동안에 중적(重敵)을 세 번 격파(擊破)했으니, 공(功)을 어찌 가(可)히 잊겠는가." 이에 후사(厚賜)했다.
《금사》 <사묘아리 열전>
이후 여진의 완안알새와 오도본, 사묘아리는 고려의 타길성을 공격해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금사》 <사묘아리 열전>
4. 패배 이후
이듬해(1109년) 여진이 길주(吉州)를 포위했는데 오연총이 그들과 싸우다가 크게 패배하자, 왕은 다시 윤관을 보내 구원하게 하면서 근신들로 하여금 금교역(金郊驛)[4]까지 전송 나가게 했다.
《고려사》 <윤관 열전>
고려 조정은 이후 윤관을 급파해 다시 이들을 맞상대하려 했으나, 여진의 화친 요청 소식이 들려오면서 진군을 멈추었다. 지난 2년 동안 동북 9성에서의 국력 소모가 이어지던 차에 굵직한 패전에 이어 성 두 개를 빼앗기니 고려 조정은 동북 9성에 대해 재고해 보게 된 듯하다. 그러나 완안부 여진도 이 전투에 모든 걸 갈아넣은 상황이라 고려와 마찬가지로 국력 소모가 심하여 한계에 달했고, 결국 화친 요청을 하며 스스로 굽히고 들어오자, 그나마 체면을 차리고 전쟁을 그만둘 명분이 생긴 고려는 이를 수락하고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반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윤관에 대한 탄핵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것도 이 전투가 끝나고 난 이후다.《고려사》 <윤관 열전>
계묘일. 왕이 건덕전(乾德殿)에서 조회를 보았는데, 간의대부(諫議大夫) 이재(李載)와 김연(金緣), 어사대부(御史大夫) 최계방(崔繼芳) 등이 나서서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임언(林彦)의 패전(敗戰)에 대해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무진일. 재상 최홍사(崔弘嗣)·이오(李䫨)·임의(任懿) 등이 대간과 함께 다시 윤관(尹瓘) 등의 죄를 물을 것을 건의했다.
《고려사》 권7, 예종 4년 11월
한편 이관진과 허재가 지키고 있었던 길주성은 여진에 가장 가까웠던 길주 지역 최북단에 위치한 성[5]이었기에 고려와 화친을 추진하던 시기에도 여진은 끊임없이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여진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어가며 공격을 했음에도 길주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고, 고려와 여진 간의 화친으로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반환하게 되었을 때, 그제서야 성문이 열리며 여진이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관진과 허재 및 고려군은 여진의 안내를 받으며, 무사히 고려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무진일. 재상 최홍사(崔弘嗣)·이오(李䫨)·임의(任懿) 등이 대간과 함께 다시 윤관(尹瓘) 등의 죄를 물을 것을 건의했다.
《고려사》 권7, 예종 4년 11월
5. 논란
다만 《금사》의 기록, 특히 금나라 초기 무장들의 열전은 전공을 기록함에 있어서, 과장이 극히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요나라와의 대표적인 전투인 출하점 전투에서는 요나라의 병력을 10배 이상 과장하여 1,200여 명의 여진군이 100,000명에 달하는 요나라군을 대파하는 판타지를 만들었다. 실제로 《요사》에서 묘사한 병력은 거란군과 해군 3,000명, 중경금군과 토호 2,000명, 각 로에서 별선된 무용이 출중한 2,000명으로 총 7,000명이었다.
천조제와의 대결전이었던 호보답강 대전에서도 아주 모순적인 묘사가 보이는데, 《금사》<태조본기>에서는 요나라군이 무려 1,150,000명이라고 써놓고는 여진군의 작전회의에서 요나라군이 700,000명을 호왈한다고 했으며 《요사》<천조황제 본기>에서는 번한병 100,000명이 출동[6]이라고 쓰고는 뒤부분에 1,150,000명이라는 수를 추가했다.
이를 거꾸로 추리하면 《요사》의 기록은 남송의 《삼조북맹회편》권21의 《망요록》을 그대로 인용했고, 원인모를 오류로 《금사》에서 과장한 1,150,000명이라는 숫자를 첨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여기서도 적의 병력을 10배 이상 과장했다.
이러한 과장은 송나라와의 전쟁 기록에서도 무수히 찾을수 있다.
합희(合喜)가 단주자사(丹州刺史) 적잔호속로개(赤盞胡速鲁改)를 보내 군사 4,000명으로 덕순(德順)을 지키게 했다. 오린(吴璘)은 200,000명의 병력으로 순덕을 포위했다…송군이 성을 포위한지 40일에야 포위를 풀었다.
《금사》 <도단합희 열전>
《금사》 <도단합희 열전>
흥원도통제(興元都統制) 요중(姚仲)이 덕순군(德順軍)을 포위했다. 먼저 중(仲)이 보군(步軍)6,400명을 네 진으로 삼고 공주(巩州)로 향했다…3일 동안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여 포기했다…중(仲)은 감곡성(甘谷城)까지 후퇴하여 통제(統制) 미강(米剛) 등을 공주에 남겨 적을 관찰하게 한 뒤, 군사를 데리고 덕순으로 갔다.
《속자치통감》<송기> 136
《속자치통감》<송기> 136
이 날에 사천선무사(四川宣撫使) 오린(吴璘)이 진주(秦州)에서 군사를 데리고, 덕순군(德順軍)에 도착했다.이보다 먼저 흥원도통제(興元都統制) 요중(姚仲)이 덕순을 공격했지만 40일이 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건염이래계년요록》(建炎以來系年要錄) 198
《건염이래계년요록》(建炎以來系年要錄) 198
(오린이)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진정(秦亭)을 나가 공주(巩州)를 공격했지만 또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달 초에 감곡성(甘谷城)으로 후퇴하고, 편장(偏將)을 보내 진정을 지키게 했다. 조(洮)와 난(蘭)을 연결하고, 하주(河州)를 차지하며, 희주(熙州)와 덕순군(德順軍)을 도모할것이다.
《한빈집》(漢濱集)
위의 사료를 보면 1162년에 있은 제1차 덕순군 전투에서 남송군은 최대로 잡아도 6,000명 정도였고, 오린이 거느린 총병력은 30,000명 정도였다. 그러나 《금사》의 <도단합의 열전>에서는 오린이 무려 200,000명의 군력으로 순덕을 포위했다고 기록했다.《한빈집》(漢濱集)
당장 고려와의 전쟁에 대한 기록만 봐도, 《금사》의 기록은 《고려사》에 비해 양에서 훨씬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세부적인 묘사에서도 《고려사》보다 간략되어 있다. 심지어 사묘아리의 공로로 탈취했다는 성 2개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금나라 건국 이전의 여진은 전쟁 상황을 기록할 능력이 없었고, 대부분의 기록을 무장들의 과장이 섞인 무용담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완안루실의 신도비에는 고려의 5개 성을 투항시켰다고 했지만 언제 어느 성을 어떻게 점령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고려가 갈라전에 출병하여 성 9개를 세웠다. 종자 증원왕(宗子贈原王) 석적환이 군대를 데리고 토벌하니, 왕이 따라서 성을 공격했으나 오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왕이 원수에게 "저들의 증원과 식량을 막으면 싸우지 않고,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를 따르니 성 5개를 항복시켰다.
《완안루실 신도비》(完顔婁室神道碑)
정말로 동북 9성 중 2개를 점령당했다면 《고려사》에 반드시 기록되었을 것이다.《완안루실 신도비》(完顔婁室神道碑)
그렇기 때문에 <사묘아리 열전>의 내용만으로 고려의 손실을 추산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못하다. 열전의 내용에서도 사묘아리가 섬멸한 적은 2개의 성을 탈환하기 위해 역습한 고려군이었고, 소위 50,000명과 70,000명의 고려군을 격퇴했다[7]. 두 성이 그리 큰 성이 아니라 보루였다면 구원하러 온 고려군은 많아야 수천 명, 적으면 수백 명일 가능성도 크다.
6. 참고글
[1] 고려군의 규모는 공험진에서 50,000명, 갈라수에서 70,000명의 병력이 각각 언급되는데, 이들이 별개의 군대인지, 아니면 동일한 군대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가던 도중에 만난 50,000명을 쫒아내고, 잠시후 70,000명과 조우했다는 것을 보면 초기에 물러난 50,000명이 오연총의 군대에 합류하여 70,000명으로 증강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하지만 별개의 군대를 각각 연파한 것이라면 고려군의 규모는 총합 120,000명이나 된다.[2] 이전에는 최대 70,000명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금사》에서도 승리라고만 나와있지, 정확한 피해 규모는 나와있지 않다.[3] 앞에서 언급된 50,000명의 고려군과 오연총의 70,000명의 군대가 서로 다른지, 같은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혼재되고 있다.[4] 지금의 황해북도 금천군 강음.[5]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성은 공험진이었다.[6] 일부 문서에서는 총병력이 151,000명이라고 했지만 이건 번역의 오류일 것이다.《망요록》의 내용을 보면 천조제가 거느린 총병력이 100,000명이라고 했다.[7] 극히 과장된 숫자일 것이다. 고려군의 최고 수장인 윤관이 직접 데리고 다닌 병력수가 고작 8,00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