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0:51:01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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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Alexander Grothendieck
[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exander_Grothendieck.jpg
출생 1928년 3월 28일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사망 2014년 11월 13일 (향년 86세)
프랑스 아리에주 생지롱
국적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바이마르 공화국 (1924~1933)

[[나치 독일|]][[틀:국기|]][[틀:국기|]](1933~1945)
무국적
(1945~71)

[[프랑스|]][[틀:국기|]][[틀:국기|]]
(1971~)
종교 기독교
직업 수학자, 사회운동가
학력 몽펠리에 대학교
낭시 제1대학교
수상 필즈상 (1966)
크라포르드상 (1988, 수상거절)
소속 고등과학연구소 (IHES)
지도교수 로랑 슈바르츠
제자 피에르 들리뉴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파리에서2.3. IHES 설립과 은둔
3. 수학 업적4. 수학계의 평가5. 정치적 성향6. 존 폰 노이만과의 비교7. 여담

파일:Grothendieck-Riemann-Roch (1).jpg
[2]
[clearfix]

1. 개요

파일:그로센딕 강연함.jpg

프랑스에서 활동한 독일 태생의 수학자, 좌파 성향 사회운동가. 표준어 표기는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지만 알렉산더 그로텐딕 또는 그로센딕이라는 표기도 많이 통용되고 있다. 함수해석학, 호몰로지 대수학, 대수기하학 분야에서 거대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스킴에탈 코호몰로지라는 현대 대수기하학의 필수적인 분야를 개발했다. 비유하자면 현대 대수기하학을 수레라고 생각했을 때, 바퀴 그 자체를 이 사람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엄청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파일:그로센딕 어릴적.jpg
파일:schapirosacha03.jpg 파일:Hellelott.jpg 파일:grothendieck05.jpg
알렉산더 '사샤' 샤피로 젊은 시절의 요한나 '항카' 그로텐디크 56세의 항카 그로텐디크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며,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 아버지 알렉산더 '사샤' 샤피로와 독일계 어머니 항카 그로텐디크 사이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성을 따랐는데, 이는 요하네스 라다츠(Johannes Raddatz)라는 저널리스트와 결혼했다가 머잖아 이혼한 후 알렉산더 샤피로와 다시 동거를 시작했지만 샤피로는 가명을 몇개씩 돌려쓰며[4] 지명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전전하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아이임을 숨기고자 독일 함부르크에 친정이 있는 어머니의 성을 따랐기 때문이다. 훗날 이 가족이 프랑스에서 생이별하던 과정을 생각하면 부모의 결정이 현대수학사를 바꿔놓은 셈이다. 그의 부모는 제각기 중산층 이상의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인텔리였지만 모두 타고난 계급적 특권을 내다버리고 세계 혁명에 투신한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였다. 아버지는 과격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로서 네스토르 마흐노의 혁명 동지였으며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10년을 구르다 탈출 (또는 교전 과정에서 수류탄을 던지던) 중 한 팔을 잃은 후 독일로 망명해 가명을 돌려쓰며 거리 사진사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엄마도 만만찮은 강성 투사라서 독일에서 나치에 맞서는 반체제 언론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스페인 내전이 터지자 먼저 국제여단으로 참전한 남편을 찾으러 간다고 자식들을 지인들에게 맡기고 스페인에 갔다가 남편과 함께 목숨 걸고 빠져나와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기 직전 겨우 아이들을 되찾은 인물이었다. 이런 부모들의 기질은 알렉산더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33년~1934년에 부모가 파리를 거쳐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후, 알렉산더는 함부르크에서 지인의 집[5]에 머물며 자랐으며[6], 이후 1939년부터는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는 통에 11세의 나이로 홀로 기차에 올라 파리로 탈출[7]했으나, 짧은 해후로부터 머지 않아 프랑스의 외국인 불순분자 색출이 시작된다. 당시 남프랑스에는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권이 승리하며 탈출한 스페인 공화파 인사는 물론 전세계에서 몰려든 국제여단 잔존세력이나 좌파 지식인, 아나키스트 불법체류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이들은 프랑스 정부에 적발되면 반정부 성향의 외국인 불순분자들을 가두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곤 했다. 사샤와 항카는 러시아계, 독일계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로서 가명을 몇개씩 돌려 쓰며 도피 생활을 하거나 좌파 매체에 기고문을 쓰곤 했으니 프랑스가 불편히 여기던 프로파일에 딱 들어맞았다. 그러던 중 제3공화국이 무너지고 들어선 비시 프랑스 정부는 외국인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순차적으로 나치 독일이 운영하는 절멸수용소로 넘겼는데, 사샤는 도피 중 마흐노주의 서적을 소지한 채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베르네(Vernet)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로 끌려가 사망했다. 항카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행은 면했지만 아들과 함께 남프랑스의 외국인 강제 수용소를 전전하게 된다.

이들이 갇힌 리외크로 수용소(Camp de Rieucros)는 원래 여성만 가두는 수용소였으나 미성년 자녀를 둔 어머니들은 자녀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열악한 자연환경이었지만, 다행히 프랑스의 외국인 수용소 중에서는 그나마 교도관들이 수감자들에게 덜 빡빡하게 대하는 곳이어서 일부 엄마들은 근처 프랑스인 마을에 아이들을 통학시킬 수도 있었다.[8] 그러나 나름대로 고등학교도 경험한 큰 아이[9]였음에도 프랑스어는 같이 수감된 어린 아이들보다도 서툰 마당에, 알렉산더는 프랑스어를 쓰는 프랑스인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주변 마을에서의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나치의 프락치 취급이나 당하면서 겉도는 것은 물론 신체적 공격까지 받으며 극도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언제는 눈이 뒤집혀서 히틀러를 죽여버리겠다고 대책없이 혼자 수용소를 탈출했다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헤매다 붙잡혀 돌아오는 일도 잦았다.[10] 알렉산더는 늘 외톨이 신세로 대부분의 수감생활을 홀로 보냈는데, 훗날에는 그 때의 시간을 수용소 생활이 준 선물로 여겼다. 고독한 시간은 다른 사람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도 생각을 만들고 개념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때 겪은 경험들은 후의 그의 정치성향과 광기 어린 연구 등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로텐디크 모자가 지내던 리외크로 수용소가 1942년 해체되면서, 항카는 다시 아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귀르(Gurs)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항카는 이감되면서 프랑스 중부 생테티엔 인근에 위치한 레지스탕스 조직의 거점이었던 르 샹봉-쉬르-리뇽(Le Chambon-sur-Lignon)이라는 산골마을로 아들을 보내는데 성공했다. 그로텐디크는 이 곳에서 외국인들에게도 호의적이던 레지스탕스 투사들의 보호[11] 속에 세베놀의 콜레주-리세 통합학교(Le Collège-Lycée Cévenol International)[12]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프랑스어를 익히고 바칼로레아에 합격했는데, 이때부터 수학적 재능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다만 이 때에도 그로텐디크는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진부하고 반복적인 문제가 너무 싫어서 스스로 흥미로운 문제를 만들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습관을 가졌다. 수학 교사가 자신의 참신한 증명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틀린 것으로 간주하여 감점해버리는 권위주의적인 교육 행태[13]도 성에 차지 않았다. 허나 무엇보다도 수학 교과서에서 길이·넓이·부피의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않는 데에 특히 불만이 컸는데, 이 사고를 발전시켜 르베그 측도론을 기존의 증명 자료 없이 혼자 힘으로 도출해내기도 하였다. 대학에 와서야 그것이 르베그가 다 정립해놓은 이론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14]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어머니와 함께 몽펠리에에 정착하여 몽펠리에 대학교[15]에서 공부했으며, 이 때 그의 수학적 능력[16]에 주목한 교수들의 추천으로 프랑스 파리의 파리 고등사범학교로 가게 된다.

몽펠리에 재학 당시 그는 미적분을 가르친 술라(Soula) 교수에게 수학계에서 일어난 발견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수학 분야에 남아있던 마지막 공개 문제들은 르베그라는 사람이 모두 풀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그는 이 말에 전혀 낙담하지 않았다.

2.2. 파리에서

파일:그로센딕 젊음.gif

그로텐디크는 파리의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앙리 카르탕의 세미나에 참석해서 앙리 카르탕, 장 델사르트, 클로드 슈발레, 로제 고드망, 장 디외도네, 앙드레 베유, 로랑 슈바르츠 등 당대 프랑스 세계 최고의 수학자들을 만났으며[17] 그보다 두 살 연상의 장피에르 세르 등이 속해있던 유망한 젊은 수학자 집단과 교류하며 수학 공부를 계속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류 수학자들과 한번도 섞인 적이 없었던 그로텐디크는 그 집단에서 동료 학자들의 지식의 양과 습득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18], 다른 수학자들과 협력연구를 하는 데에도 걸맞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이는 상당부분 그로텐디크의 학업 스타일 때문이었다. 그로텐디크는 다른 수학자들이 '합의를 통해' 참이라고 간주하는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어했고, 그 개념들을 직접 증명하면서 나아가려 했다. 또 그는 야심이 매우 커서 쉬운 길을 가기보다는 어려운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을 좋아했고 모든 것을 무척 힘들게 노력해서 얻었다. 그는 그 시절에 대해, 동료 수학자들은 수학을 아주 손쉽게 다루는 것처럼 보인 반면 자신은 '느릿느릿 굴을 파며 산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꼈다고 회고했다.[19]

이를 21세기의 대학 교육과정에 비유하면, 벡터미적분학의 간단한 문제풀이 숙제에서 문제의 답은 간단하지만 논리적으로는 매끄럽지 않은 주장은 독수독과로 취급한 후 해석학과 미분기하학과 위상수학 책을 읽어가며 필요한 정리를 끄집어내어 100페이지 이상의 빌드업을 선보이고서 그 간단한 한 문제를 풀어보이는 격이다. 스스로의 역량 강화에는 당연히 도움이 되고 공부 열심히 한다는 인상을 남기기에도 충분하지만, 당장 수업 진도를 빨리 나가야 하는 교수나 스터디그룹 동료들에겐 고구마가 따로 없는 공부법이다. 함께 공부하는 자리에서 그런 학생을 마냥 기다려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 유도리 없는 공부법을 끝까지 고수한 그로텐디크가 선배와 동료들과 어울리며 겪었을 고난은 굉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경과 고립에도 불구하고 훗날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점에 오른 그로텐디크는 다음과 같은 회고 또한 남겼다.
“그 집단에서 뛰어났던 사람들은 모두 유능하고 저명한 수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30~35년이 지난 후 나는 그들이 우리 시대 수학에 정말로 심오한 족적은 남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그로텐디크는 로랑 슈바르츠에게 1950년부터 지도받았으며 이후 낭시 대학으로 옮겨 학업을 계속하게 된다.

그는 함수해석학을 공부하여 위상 벡터 공간에 있어 세계적인 전문가가 되었다. 박사과정 당시 지도교수 슈바르츠가 그에게 내민 자신의 논문 말미에는 14개의 문제가 있었는데 슈바르츠와 디외도네조차 해결하지 못한 난제였다.

그런데 그로텐디크는 몇주만에 이 문제의 절반 가까이를 해결했고 일년이 지나기 전에 나머지 것도 해결하였다. 당시 지도교수인 슈바르츠는 그로텐디크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하루에 25시간, 26시간씩 일한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는데, 그런 몰입의 결과물이 300쪽이 넘는 학위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 대해 제출할 때 슈바르츠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대작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그로텐디크는 1957년부터 돌연 함수해석학을 그만두고 대수기하학과 호몰로지 대수학 방면에 뛰어들었다. 당시 대수기하학과 호몰로지 대수학은 난제와 미결 문제가 넘쳐나기로 유명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자신의 수학에 대한 고찰과 사색이 담겨있는 자필 저서인 《추수와 파종(Récoltes et Semailles)》에서 그가 수학에 대한 여정을 시작하였던 해석학의 땅에서 대수기하학의 땅으로 넘어갔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던 (물론 내 생각일 뿐이다.) 그때 그 기분을 잊지 못한다. 그건 마치 메마르고 거친 스텝을 지나 갑자기 풍요로운 부가 넘치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선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부는 무한대로 늘어나 아무데나 손만 뻗어도 따고 캐낼 수 있었다.“

2.3. IHES 설립과 은둔

파일:그로센딕 노년.jpg

1958년, 그로텐디크는 수학자 장 디외도네의 지원으로 고등 수학 연구소인 IHES를 창설했다. 이 시기 1966년 필즈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동유럽에 전개되던 소련군의 군사 활동에 항의한다고 모스크바에서의 시상식에 불참했다. 그나마 그리고리 페렐만과는 달리 IHES 동료인 Léon Motchane이 대리 수상을 했다. 그러나 1970년, IHES가 프랑스 국방부의 군사용 연구 자금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그는 자신이 설립한 IHES에서 떠나며 잠시 수학 학계 자체를 떠났다.

또한 그로텐디크는 몸소 겪은 끔찍한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적·평화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보였다. 그로텐디크는 이러한 정치 성향으로 인해 베트남 전쟁 중, 일종의 반전 시위로 미군의 공중 폭격이 가해지고 있던 베트남의 하노이 근교의 숲속에서 범주론 세미나를 연 적도 있었다.

1968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는 이 운동에 영향을 받아 그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1970년에 연구소에 사표를 내고, 반전 운동·반핵 운동·환경 보호 운동·생태계 보존 운동을 펼치며, 이를 위해 ‘생존’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이로 인해 이혼 등을 거치면서 가정은 붕괴됐고, 이들 운동을 위해 캐나다·미국·베트남 등지를 여행했다. 수년 후에는 그룹 내에서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아 많은 충돌이 일어나면서 결국 해체되었다.

1975년에 그로텐디크는 La Clef des Songes라는 315페이지에 달하는 원고를 쓰는데 거기서 그는 꿈의 근원에 대한 고찰을 통해 신이 존재한다고 결론을 얻었다. 원고의 메모 중 일부로 시대를 앞서간 몽상가,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예언하는 이들에 대해 묘사했는데, 수학자로는 리만 가설로 유명한 베른하르트 리만간디, 크리슈나무르티, 크로포트킨, 프로이트, 월트 휘트먼 등과 함께 있다.

이후 그로텐디크는 자신이 공부했던 몽펠리에 대학교에서 교수가 됨으로써 다시 학계로 돌아왔고, 1980년대 초반에 수학계에 컴백하려고 anabelian 기하학과 갈로아-타이흐뮐러 이론에 관한 연구 주제를 프랑스 수학계에 제출했으나 그의 연구 테마는 수학계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근데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이 abc 추측을 풀었다고 주장하여 현재 검토 단계에 있는 모치즈키 신이치 교수가 여기에 대해 지난 10여 년 동안 계속 연구하고 있었고 실제로 abc 추측을 증명하였다는 수백 페이지 정도 되는 논문에 그로텐디크가 창안한 스킴(대수기하학)이론과 tale 및 l-adic 코호모로지 이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다만 논문에서 창안한 '내부 전역 타이흐뮐러 정리(Inter-universal Teichmüller theory, IUTT)'가 너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어 이에 대해 필즈상 수상자 피터 숄체 등이 모치즈키 교수에게 의문을 제기해봤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고("오류가 너무 심각해서 약간의 수정 정도로 이 이론을 구해낼 수는 없어보인다.("so severe that … small modifications will not rescue the proof strategy")) 이내는 네이쳐 지에도 '모치즈키의 연구에 마음이 갈 사람이 그다지 없어보인다'고 실렸다. 교토대학교 내부 동료 검토 결과로는 문제가 없는 완전한 증명이라며 인정했지만 이에 동의하는 수학자는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이다.

파일:그로센딕 은둔.jpg

1980년대 말에 완전히 은퇴하게 되는데, 이는 나이에 의한 자연스런 수순으로 보면 맞을 것이다. 2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환갑 때 학계를 떠났다.

은퇴 후 그로텐디크는 프랑스 남부의 농촌에서 농사로 소일하겠다며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 크라포르드상 수상도 윤리적 이유로 거절했으며, 학계는 물론 거의 모든 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크라포르드상 수상을 거부한 이유로 스스로 작성한 편지 내용(편지)은 다음과 같다.
Ganelius 교수에게

저는 오늘 받은 당신의 4월 13일자 편지와 전보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스웨덴 왕립 과학 재단에서 주는 (나의 학생이었던) 피에르 들리뉴와의 올해의 크라포르드상의 공동 수상에 대해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상(또는 다른 어떤 상)을 받는 것을 다음의 이유들 때문에 원치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1) 저의 대학교수로서의 월급과 연금은 독립적 생활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물질적 필요도를 충분히 넘습니다. 따라서 저는 더 이상의 돈이 필요 없습니다. 기초적인 부분에서 저의 업적의 뛰어남에 관해 저는 시간이 새로운 개념과 관점의 풍부함에 대한 유일한 결정적 테스트라는 것을 납득했습니다. 풍부한 업적은 후학들에 의해 이루어졌지, 영예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2) 더구나 크라포르드상 같은 명망 높은 상이 찾으려고 애쓰는 높은 수준의 연구가들은 대개 권력과 특권을 포함한 과학적 권위와 충분한 물질적 부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의 초부유함이 다른 이들의 궁핍함의 대가에서 비롯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3) 재단에서 주목하는 저의 업적은 과학계에 제가 몸담고 있었고 정신과 가치를 근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던 25년 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는 1970년에 과학계를 떠났고 저의 과학적 연구에의 열정을 유지하는 동안 마음 속으로는 끊임없이 과학적 환경에서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동료들 사이에서 노골적인 도적질(특히, 자신을 방어하는 위치에 있지 않는 사람들의 희생)이 거의 일반적인 룰이 되어버렸고 가장 명백하고 사악한 상황이 용서받지 못하는 상태가 된 시점까지 (적어도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과학계의 윤리가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경우 각종 수상식에 참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건전치 못하며 더구나 사라져야 할 운명으로 봐왔던 과학계의 정신과 경향에 동조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정신과 경향은 정신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자멸되어야 합니다.

이 세 번째 이유가 무엇보다도 가장 필수적입니다. 왕립 학회 기금의 운영에 있어 비판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번 세기가 끝나기 전에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 과학과 목표, 과학적 업적이 이루어졌던 정신에 관한 우리의 관심을 완전히 바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왕립 학회는 사람들과 기관들 사이에서 전례없는 조직 붕괴 후 전례없는 혁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위치에 설 것이라 확신합니다.

저는 크라포르드상을 거절하므로서 당신과 왕립 학회가 불편해하는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며.

(후략) by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말년에 몽펠리에 대학에서 지도하면서 시골촌에 살았는데, 그때 제자였던 윤석임 전 덕성여자대학교 교수가 그로텐디크에게 김치 담그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푹 빠졌는지 그로텐디크가 10페이지 분량의 김치에 관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Le Kimchi 또한 이때 신의 존재성을 받아들이며 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한다.

2014년 11월 13일에 별세하였다. 관련기사

3. 수학 업적

1. Topological tensor products and nuclear spaces
2. "Continuous" and "discrete" duality (derived categories and "six operations")
3. Yoga of the Grothendieck–Riemann–Roch theorem (K-theory, relation with intersection theory)
4. scheme 스킴(대수기하학)
5. topoi
6. Étale cohomology including l-adic cohomology 에탈 코호몰로지
7. Motives and the motivic Galois group (and Grothendieck categories) 모티브(대수기하학)
8. Crystals and crystalline cohomology, yoga of De Rham and Hodge coefficients
9. Topological algebra, infinity-stacks, 'dérivateurs', cohomological formalism of toposes as an inspiration for a new homotopic algebra
10. Tame topology
11. Yoga of anabelian geometry and Galois–Teichmüller theory
12. Schematic point of view, or "arithmetics" for regular polyhedra and regular configurations of all sorts

위 업적에서 중심적인 주제는 5번째로 기재된 topoi 이론이고, 첫번째와 마지막 번째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그로센딕이 밝혔다.

4. 수학계의 평가

그로텐디크의 놀라운 점은 만개했다는 현대의 수학에서 스킴, 에탈 코호몰로지, 모티브 등 난해하면서도 보편적인 개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불가사의함이다. 그로텐디크의 업적은 그 현란한 추상적 접근방식과 그 추상적인 아이디어들을 엄밀하게 표현하는 그의 완벽주의 정신의 결정체로 유명하다. 그는 자존심이 매우 강해 수많은 실패불행한 가정사, 타인무시에도 절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주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노력 끝에 전문성을 인정받은 함수해석학을 버리고 대수기하학에 뛰어드는 등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정신도 출중하였으며, 광기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치열하고 악랄하게 수학을 하였다. 또 한편으로 그로텐디크와 같은 시기에 대수기하학을 연구했던 피에르 카르티에[20]에 의하면, 그로텐디크는 문제 해결사(problem solver) 타입의 수학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그로텐디크는 창조자에 가까웠다.

대체로 비전공자들보다 현대수학의 매운맛을 아는 전공자들의 고평가가 많다. 수학과생들조차도 학부 과정에서는 그로텐디크라는 이름을 접하기 어려울 정도이므로 어쩔 수 없으나, 수학자(특히 대수학, 위상수학, 기하학 관련 전공자)들은 거의 데카르트, 오일러, 가우스, 코시, 리만 등 비전공자들도 누구나 이름 한번 들어봤을 위대한 학자들과 같은 반열에 그로텐디크를 올려놓을만큼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보내고 있다.
현대 수학에 있어 그로텐디크의 영향력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 20세기의 후반부 5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수학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많은 수학자가 주저 없이 그로텐디크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혼자서 현대 대수기하학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수학 전체에 대한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랭글랜즈 프로그램의 기하학적 재공식화에서 사용한 함수와 시프에 대한 사전은 그로텐디크의 연구를 특징짓는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다.
- 에드워드 프렌켈, 내가 사랑한 수학: 천재 수학자가 찾아낸 사랑의 공식
사람들은 흔히 수학에 대해서 점점 더 강력한 폭발물로 바위를 깨고 들어가는 터널 공사처럼 점점 더 강력한 도구를 적용하여 점점 더 깊이 미지의 세계에 파고드는 작업이라는 인상을 품는다. 물론 그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순수 수학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그림에 따라 다시 빚어냈던 그로텐디크는 견해가 달랐다. <우리가 알아야 할 미지의 대상은 흡사 물의 침투에 저항하는 바위나 진흙땅처럼 보였다. ... 바다는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조용히 다가간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 같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으며, 물이 너무 멀어서 우리에게는 소리도 잘 안 들리지만.... 마침내 저항하던 물체를 둘러싸고 마는 것이다.
- 조던 엘렌버그, 틀리지 않는 법: 수학적 사고의 힘
우리(수학자)들은 새로운 결과를 최대한 일반화시켜 설명해야 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있다. 이렇게 하려면 각각의 주제에 관련된 개념과 추상화의 전 세계를 새롭게 건설해야만 한다. 이 과정 후 독창적인 사례는 사라지고, 각 정리에 들어있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명료해질 때까지 이 새로운 우주에서의 진지한 도제 수업은 본질적인 것이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과정이 얼마나 극적으로 잘 작동하는지 알 수 있었는데, 그로텐디크와 함께 활동했던 대수 기하학자 세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로텐디크는 놀라운 천재로 아름다우면서 심오한 아이디어와 전적으로 새로운 담론의 우주, 즉 '스킴' 개념[21]을 이 분야로 끌어들었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이 분야의 지도적인 수학자들 중 일부마저도 이것을 채택하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로텐디크의 성공은 그러한 거부가 어리석은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대수 기하학의 정원에서 자라난 모듈리 공간(moduli space)이라는 꽃에 사로잡혀 있다고 회고한 적 있는데, 이 정원에는 놀라운 사람들이 있다며 대표적으로 날카롭고 뛰어난 베유와 정말로 인간이 아닌 다른 종으로 보이는 그로텐디크를 언급했다.
- 데이비드 멈포드 (필즈상)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대단히 사소하지 않은 정리가 짠 하고 나타났다.
- 피에르 들리뉴 (필즈상, 그로텐디크의 제자)[22]
그로덴티크와의 관계는 그리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의 우월함은 압도적이었다. 그의 세미나는 파리의 모든 수학자들을 매료시켰지만 내게는 그들에게 내세울 새로운 것이 없었다. 나는 그로 인해 엄격한 수학의 세계를 벗어나 좀 더 일반적인 개념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누군가가 계산을 하고 있다면, 다른 누군가는 꿈을 꾸어도 좋지 않겠는가?
- 르네 톰 (필즈상)
창조에는 필요도 있어야 되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욕망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창조 활동을 뒷받침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것을 만들 수 있었으면..."하는 욕망이나 부족한 것을 한결같이 구하는 갈망이 없으면 안된다. 그로텐디크나 자리스키 선생님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역경 속에서 살아온 배고픈 수학자가 뛰어난 업적을 올린 것은, 욕망이라는 정념이 항상 그들을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는 설사 고생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를 그로텐디크가 지나온 가시밭길과 비교하는 것도 부끄럽지만 나의 체험으로 미루어보면, 그도 역시 고생을 실감한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잇따른 역경이 그의 수학에 대한 끊임없는 정념을 만들고 그것이 정열적인 창조 활동을 뒷받침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히로나카 헤이스케 (필즈상)
나처럼 평범한 수학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고등과학연구소에 들어설 때의 기분은 아마도 무슬림 순례자들이 메카에 발을 디딘 순간에 느끼는 가슴 벅참과 비슷할 것이다. 이곳은 그로텐디크가 10여년 동안 쉬지 않고 사도들에게 신성한 말씀을 가르친 곳이 아니던가.
- 응오바오쩌우 (필즈상)
수학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점점 더 추상적이고 일반화되었지만, 이 추세의 가장 큰 핵심은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였습니다. 그의 신비로운 기술은 모든 불필요한 가설을 제거하고 너무 깊게 파묻혀 있는 내부 패턴을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그들 스스로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마술사처럼ㅡ그 진정한 본성이 드러난ㅡ오래된 문제의 해결 방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여줍니다.
- 그로텐디크 사망이 알려진 후 데이비드 멈포드와 존 테이트 (울프,아벨상 수상자)의 부고[23]
수학자들은 다들 어린아이 같은 면모가 조금씩은 있다. 어떤 면에서는 아예 저세상 어린아이 같은 수준이다. 하지만 그로텐딕은 누구보다도 심했다. 세련된 면모도 없고, 가식도 없고, 거짓부렁이도 없이 순진무구했다. 늘 매우 명확하게 생각했고, 굉장히 참을성 있게 설명했지만, 우월의식 따위도 전혀 없었다. 문명과 권력과 선민의식 따위의 때가 묻지 않은 사람이었다.
- 존 테이트
...그로텐딕은 함수해석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수학자인데 부르바키 활동을 통해 대수기하학을 접하고는 이내 대수기하학 연구에 전념했다. 범주 이론을 전면적으로 적용하여 대수적 다양체의 이론을 크게 확장했는데 이를 통해 비로소 (다항식 환을 넘어서) 일반적인 환, 모듈과 같은 대수적 대상에 대한 탐구와 대수적 다양체에 대한 연구가 완벽히 동등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특수한 환만 대수적 다양체에 대응되었는데 그로텐딕은 모든 환에 대응되는 기하학적 대상ㅡ스킴ㅡ을 만들어낸 것이다.
데카르트와 푸앵카레의 꿈을 완성시킨 그로텐딕의 이론은 대수기하학을 크게 확장시켰고, 그 결과로 정수론의 많은 대상들이 대수기하학의 울타리로 들어오게 되어 오래된 미해결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었다. 백 마디 말보다 팔팅스와일즈의 눈부신 업적을 보라!
- 김영훈, 최진원, 대수기하학 입문[24]
20세기 수학의 코페르니쿠스
때론 경이롭고 또 때론 기구했던 20세기 역사가 낳은 수학의 세계인
-김민형, 수학의 기쁨 혹은 가능성

5. 정치적 성향

부모와 어린 시절의 영향 등으로 그로텐디크는 정치적으로 급진 좌파평화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마오쩌둥 체제의 중국공산당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1970년대 중후반부터 수학에서 점점 멀어진 이유 중 하나도 그의 정치 방면의 관심이 커졌다는 것. 환경, 반핵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링크

이런 성향 덕에 반전 시위에도 자주 참여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인데 반전시위의 일환으로 하노이 근교에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그가 세미나를 열던 때, 미군은 하노이에 공중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더 알고 싶은 사람은 Allyn Jackson의 'As if summoned from the void',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 아미르 악젤의 '수학 미스터리, 니콜라 부르바키'[25], 존 더비셔의 '미지수, 상상의 역사' 대수기하 파트, 혹은 그로텐디크의 자서전을 살펴보길 바란다. 또한 구글을 뒤져 보면 그로텐디크의 일생에 대한 많은 글을 찾아볼 수 있으니 역시 참고 바란다.(#) 그로텐디크의 생애에 관한 글

6. 존 폰 노이만과의 비교

20세기의 대표적인 천재 수학자라는 점에서 존 폰 노이만과도 종종 비교되기도 하는데, 사실 이 두 사람은 분야도 다를 뿐더러 활동시기와 연구 배경도 달라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폰 노이만이 순수수학, 응용수학, 컴퓨터공학 등 다방면에 걸쳐 업적을 남긴 천재라면 그로텐디크는 순수수학의 한 분야인 대수기하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은 수학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 수학에 끼친 영향력에 있어서는 그로텐디크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팔방미인으로서의 다채로운 면모는 폰 노이만이 더 높이 평가받는다. 재밌게도 이 두명은 많은 부분에서 대조되기도 하는데 각각 미국과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두 명 모두 유대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가정적 배경[26], 정치성향[27], 연구의 방향성[28]에서는 정반대였다. 여담으로 폰 노이만과 그로텐디크 모두 생전엔 무종교였지만 말년에 기독교로 귀의하였다.

7. 여담

  • 총 55편의 논문과 13권의 학술서적, 15권의 일반교재를 서술하였다. 특이하게도 그가 제출한 논문은 모두 프랑스에서 출간하는 저널에서만 출간되었으며, 모두 프랑스어로 기술되었다. 그로텐디크는 적지 않은 수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두께가 상상을 초월한다. 대표적인 저술서는 Eléments de géométrie algébrique(EGA), Séminaire de géométrie algébrique(SGA) 로 대수기하 전공자들에게 경전으로 꼽히며, 니콜라 부르바키의 원론 시리즈와 함께 수학자들에게 프랑스어 학습을 강요하는 원흉으로 꼽히기도 한다. 다만 저술 및 강연 활동에 썼으나 2차대전기 유대인 수용소에서나 겨우 익히기 시작했기에 원어민들보다는 서툴 수밖에 없던 프랑스어가 아닌 독일어가 모어였기 때문에 수기로 작성한 기록 및 메모는 프랑스어 못지 않게 독일어로도 많이 남았으며, K-theory처럼 그로텐디크가 독일어를 바탕으로 용어를 정해놓은 것이 그대로 분과 학문의 이름으로 굳어져버린 예도 있다. 이외에 미국, 캐나다, 브라질 등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프랑스어 외에 영어로도 많은 강의를 했는데, 강의를 하기에 무리가 없을만큼 유창하면서도 프랑스어와 독일어의 영향이 억양과 발음에서 많이 묻어난다. 프랑스어로 쓰인 대부분의 저술 작업도 본인이 혼자 다 한 것은 아니고 부르바키 창립멤버이자 문서 작업 전담자이자 IHES 창립에도 도움을 줬던 22살 연상의 돈 많은 선배 장 디외도네에게 도움을 받았다.
  • 수학자였지만 1960년대 후반에는 생물학, 물리학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주로 리처드 파인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 암산에 능하지 못했다고 하며 펜과 종이가 없으면 사고가 되지 않아서 늘 펜으로 적어가며 생각해야 연구가 진행되는 버릇이 있었다. 암산에 서툴러 생긴 가장 대표적인 흑역사57 사건이 있다. 강연에서 "소수의 예를 들어보자"면서 들먹인 것이 57=3·19이라는 3의 배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격뿜했고, 57에는 그로텐디크 소수라는 이름이 붙고 말았다. 헌데 57 같은 흑역사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는커녕 그 흔한 쌀집계산기조차 안 쓰는 순도 100% 아날로그형 인간이었는지 나이 들어서는 남프랑스의 산동네에 은거한 자신을 찾아온 제자가 연구 이야기를 하다 계산 따위는 컴퓨터로 후딱 해버리면 된다 말하자 컴퓨터 같은 요사스러운 물건 자기는 평생 안 쓴다고 짜증을 냈다는 썰도 있다. 그나마 평생 손글씨만 쓴 건 아니어서 오래된 타이프라이터 정도는 잘 썼다고.[29] 2017년 몽펠리에 대학에서는 그로텐디크가 생전에 작성한 18,000쪽 이상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자필 노트를 온라인으로 전면 공개했다. 프랑스어, 독일어, 드물게 영어까지 뒤죽박죽으로 혼재되어 있으며 엽서, 쪽지, 이면지에까지 아무렇게나 선을 박박 긋고는 아무도 못 알아볼 일필휘지의 고약한 필기체로 써갈기는등 그로텐디크의 별난 성격이 많이 묻어나있어 언어의 장벽과 손글씨의 압박을 견뎌낼 수 있거든 찾아보기를 권한다. ###
  • 그와 교류한 여러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그의 성격은 한마디로 어린이 같았다. 아틴 가족에 따르면, 그는 매사 극단적인 흑백논리로 바라보고 겉치레 없이 직설적으로 말하는 인물이었지만, 현실과 인간 사회를 초월한듯 순진하고 웃음기 넘치는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가졌다. 카린과 마이클 아틴과 존 테이트는 그로텐디크의 성격을 에밀 아틴[30]의 성격과 비슷하다 평하며 수학자들은 원래 다들 아이 같고 순진한 면모를 조금씩은 갖고 있지만 그로텐디크는 어지간한 수학자들보다 훨씬 심했다고 한다.
  • 한편으로는 전형적인 야행성 연구가여서 오전에 푹 자고 밤에 일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눈만 감으면 바로 잠에 빠져들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이 있어서 한창 연구에 매진할 때에는 길바닥이나 방바닥을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자고 싶으면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릴 적 강제수용소에서 살며 변변찮은 이부자리도 없이 잤던 기억이 몸에 배어있었다고. 또한 음악을 매우 좋아해서 가끔씩 여유시간마다 피아노를 쳤으며 어렸을 적에는 피아니스트나 작가가 되고 싶어했다고 한다. 수학과 피아노 사이에서 진로 갈등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의외의 면모로, 어린 시절 유대인 수용소에서 복싱을 배웠으며 평생 복싱을 연마하여 그 실력으로 교수 신분일 때 경찰관 2명을 때려눕혔던 전력도 있다. 그러면서도 운전은 어지간히도 못했는지 운전면허 주행 시험에 9번이나 낙방하고 겨우 합격했다는 일화도 있다.
  • 수학자들에게는 이른바 '말랑말랑 호두까기' 담론으로도 유명하다. 단단한 호두껍질을 깨겠다고 억지로 힘들게 망치질하는 대신 물에 담궈놓고 오랫동안 지켜보며 기다리다보면 맨손으로도 말랑말랑한 호두껍질을 벗길 수 있다는 존버근성을 강조하는 조언으로, 대수기하학 인접분야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수학과 교수들이 학업부담에 허덕이는 학생들이나 대중교양서 독자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유명한 명언이다.
  • 그로텐디크는 범주론을 원론에서 왜 안 써먹냐는 키배를 벌이다 부르바키의 3세대 멤버들 중 유달리 일찍 탈퇴하고 상당기간을 부르바키까로 지냈다. 그래도 제자들에게 부르바키에 대해 악담만 한 건 아니었는지 그로텐디크의 몇몇 제자들은 훗날 부르바키에 가입하기도 했다.
  • 여기까지 읽어봤다면 느끼겠지만 정말 영화같은 삶을 살았다. 어린 나이에 유대인 박해를 피해 부모도 없이 함부르크에서 홀몸으로 기차에 올라 말도 안 통하는 프랑스로 도망쳐 나온 일, 외국인 강제 수용소에서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익히며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인생의 분기점으로 만든 일, 공교육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수학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고 다른 엘리트 수학자들을 따라잡기 위해 공부했던 일, 늦은 나이에 대수기하로 전공을 바꿔서 마침내 그 분야의 입지전적인 위치에 올랐으나 스스로 학계를 떠나 반전운동과 사회환경운동에 뛰어들었던 일, 이후 사회와의 접점을 끊고 은둔하며 지낸 일화 등. 그러나 업적에 비해서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은 아니다. 사회적 차별, 안타까운 개인사, 역사의 파고를 뚫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로 자주 거론되는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존 폰 노이만, 앨런 튜링, 스티븐 호킹 등에 못지 않은 흥미진진한 서사의 주인공이지만, 그 서사를 비전공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할 수 없을만큼 학술적 진입장벽이 높다보니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흔한 어린이용 위인전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31]
  • 그가 한창 연구에 전념하던 1950~1960년대에 그는 본인의 연구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구의 방향을 잡는 데도 능숙했다고 한다. 한창 때 워낙 영향력이 컸고 존 내시가 정신분열증으로 방황했던 어느 한 시기에도 그로텐디크라는 이름을 여러 번 거론했다고 한다. 사실 그로텐디크가 존 내시 내외에 굉장한 호감이 있었다고 한다.
  • 은퇴 후 한국에 비공식적으로 몇 번 방문했으며, IHES에서 그로텐디크를 사사한 적이 있는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가 서울대에서 강연할 때 같이 와서 서울대에도 온 적이 있다.
  • 뤼크 일뤼지[32]에 따르면 논문지도 받는 학생의 페이퍼를 받으면 어마어마한 분량의 코멘트로 종이를 가득 채워서 돌려 주었다고 한다.
  • 그로텐디크의 자녀는 Mireille Dufour와 낳은 세 명의 자식 외에도 이후 사회환경운동에 투신하며 같이 동거했던 Justine Skalba와 낳은 한 명의 아들이 있다. 나중에 그 아이가 하버드 대학교 수학과에 진학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전쟁 시절부터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던 어머니를 매우 사랑해서 자신의 학위 논문을 어머니에게 바쳤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1957년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그는 반년 가량 연구활동을 모조리 그만두고 마음고생을 했다.
  • 사실 기행으로 유명한 만큼 그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뜬소문도 굉장히 많은데, 그 중 하나로 그로텐디크가 1990년 63세의 나이에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시골로 돌아가 농부가 되었고 아무도 그의 행적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니며, 농사 지으면서도 간헐적으로 친한 선후배 수학자들과 교류하며 잘 지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레일라 슈넵스(Leila Schneps, 미국의 수학자·작가)와 빈프리트 샬라우(Winfried Scharlau, 독일 수학자)가 심층취재하여 알린 썰이 벵하민 라바투트(Benjamín Labatut), 아미르 악젤(Amir Aczel), 존 더비셔(John Derbyshire) 등의 여러 작가들에 의해 드라마틱하게 재가공된 영향이 컸다. 실제로는 단지 언론인이나 신세대 수학자들이 찾기 어려울 정도로 프라이버시를 강하게 추구했고 동료들 역시 가급적 그의 의지를 존중했기 때문에 미디어에 쉬이 비춰지지 않았을 뿐, 친한 동료들과는 조용히 비공개로 가끔씩 연락하고 지냈다. 슈넵스 같은 젊은이나 후대 유망주들이야 수학 그만둔지 한참 된 할아버지 입장에선 알 바 아니었을테니... 그래도 이런 기행은 너무 유명한지 이 은둔 수학고수 할아버지가 독수리타법으로 구글링을 하며 툴툴댄다는 기믹의 트위터 컨셉계가 있다.
  • 대수기하로 전공을 바꿀 때 대수기하에 관한 지식이 전무해서 많은 부분을 장피에르 세르에게 질문해서 보충했다. 지식이 의외로 부족하였는지 세르에게 "리만 제타 함수의 영점이 무한히 많은가?"하고 물어보았었다고 한다.
  • 뮌스터 대학 수학과 명예교수이자 그로텐디크의 전기를 쓴 빈프리트 샤를라우는 2008년 3월 27일 그로텐디크의 80번째 생일을 맞아 《차이트》 지에 그로텐디크를 기념하는 글 [더 높은 차원에서]를 전면에 실었다. 당시 독일 정부 학술연구부 국장은 그 글이 게재된 시기가 만우절이 있는 주간이라는 걸 예리하게 언급하며 질문했다. 그런 사람이 진짜 있기는 한 겁니까?
  • 어느 수학자가 IHES를 방문했는데 도서관에 책이 매우 적었다. 그래서 그로텐디크에게 도서관에 책이 왜 이리 없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그로텐디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을 씁니다."
  • 역대 수학자들의 랭킹을 매긴 사이트(http://fabpedigree.com/james/gmat200.htm)에서는 9위를 기록했다. 50위 이내의 수학자들 중 21세기까지 생존한 유일무이한 인물이며, 100위권까지 범위를 넓혀도 21세기까지 생존한 인물은 아틀레 셀버그, 장피에르 세르, 마이클 아티야, 이즈라일 겔판트, 존 내시, 천싱선 정도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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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lexandre라는 표기법이 쓰이기도 한다. 독일인 아닌 독일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에서 살았던 복잡한 인생사 때문인데, 위키백과의 많은 라틴 문자권 언어판에서는 당사자의 모어를 따라 독일어식 표기인 Alexander를 표제어에 썼지만 프랑스어를 비롯한 일부 언어판에서는 Alexandre라는 이름을 쓴다.[2] 그로텐디크-리만-로흐 정리에 대해 노트에 남긴 독일어 낙서.[3] 위키백과에는 알렉산더 샤피로를 소개하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문서가 작성되어 있는데, 원래 러시아어 화자였으나 우크라이나 독립파 아나키스트로 활동했고 독일과 프랑스에서 살아간 폭풍 같은 인생사 때문인지 이름의 표기가 언어판마다 전부 다르다. 어머니의 경우 프랑스어, 카탈루냐어 위키백과 문서가 있다.[4] 러시아 내전에서는 알렉산드르 타나로프라는 가명을 썼고, 이외에 사샤 표트르, 세르게이 등의 다른 가명도 썼다. 훗날 아우슈비츠에 끌려갈 때에는 알렉산드르 타나로프라는 이름으로 수감되어 사망했다.[5] 항카처럼 아나키즘,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던 진보 지식인 빌헬름 하이도른(Wilhelm Heydorn) 목사 부부가 몇몇 고아들을 맡아 키우던 곳이었다. 어머니가 첫 결혼에서 낳은 누나(Frode Raddatz, 애칭 마이디 Maidi)는 동생과도 떨어져 장애인 복지시설에 맡겨졌다가 미국으로 탈출하여 1997년까지 생존했다.[6] 이 때의 일화도 골때리는데, 항카는 다짜고짜 꼬맹이 아들을 맡기고 가는 주제에 우리는 무신론자니까 애한테 하느님 얘기는 입도 뻥끗 말고 머리카락도 절대 자르지 말라면서 신신당부를 했다(...). 그나마 학교 보내지 말고 목사님이 직접 가르치라는 말은 따르지 못하고 초등학교까지는 보냈다고. 더욱 황당하게도 알렉산더가 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행복한 시절로 여겼는지 전쟁 후에도 하이도른 목사 부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7] 유대인 아이를 데리고 지내기가 위험해져 하이도른 목사 부부가 파리의 거처로 수 차례 편지를 보냈지만 스페인도 갔다오고 도피생활도 반복하며 부모와의 연락이 닿지 않아 함부르크 주재 프랑스 영사관을 통해 수소문해서야 겨우 아이 데려가라는 연락을 할 수 있었다.[8] 리외크로 수용소의 사진 기록을 검색해보면 나치 절멸수용소처럼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빡빡머리로 줄무늬 죄수복을 입고 감시당하는 '평범한' 유대인 수용소와는 이질적인, 오히려 낭만주의 시대의 향수가 묻어나는 아나키스트 협동조합의 생활공동체(?) 같은 사진도 있다. 3공 및 비시 정부가 여성 수용소라고 경계를 늦춘 점도 있고, 적지 않은 수감자들이 스페인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면서도 자식과 가족을 지켜내며 강한 동지애로 뭉칠 수 있던 혁명가들이라 결속력이 강했으며 인근 마을을 통한 레지스탕스 조직과의 연통 또한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리외크로 수용소가 해산되고 프랑스와 유럽 각지의 과밀 수용소로 흩어지면서 아사, 학살, 자식과의 생이별 등 더 끔찍한 고생길을 걷게 된다. 오늘날 남아있는 리외크로 수용소에서는 이런 여성 혁명가들의 행적에 주목하는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추모와 기념사업이 이뤄지고 있다.[9] Lycée는 15세부터 18세까지의 교육과정으로 대한민국으로 치면 고등학교에 해당하지만, 그로텐디크는 Lycée에는 잠깐 다녀본게 전부라 한국으로 치면 사실상 중학생 나이였다.[10] 하지만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냥 심심해서 맘대로 놀러 나갔다오는 거였다고 한다(...).[11]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조직에는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스페인 국제여단, 공화파 망명자 출신 혁명가들도 많았고, 이들의 자녀나 고아들도 이들 레지스탕스 조직의 보호를 받았다. 다만 레지스탕스가 숨어든 마을의 분위기를 독일군이나 프랑스의 파시스트 부역자들도 잘 알았기 때문에 이들이 유대인 단속 실적을 채우러 들이닥칠 때마다 유대인 아이들은 황급히 도망쳐 숨어야 했다.[12] 반전주의 운동가들이 설립한 일종의 대안학교로, 그로텐디크가 다닐 때에는 콜레주(중학교) 과정만 운영되었다. 레지스탕스 투사들의 자녀나 유대인 아이들이 많이 다녔고, 21세기까지도 평화와 진보주의의 기치를 내건 특성화 교육으로 이름이 높았다. 평화주의자들의 국제학교답게 세계대전과 냉전 이후에도 콩고, 르완다, 체첸, 코소보 등 수많은 지역에서 피난 온 난민 어린이들이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안타깝게도 냉전기 이후 프랑스 교육부의 공교육 체계에 편입된 후 재정난이 심해지며 2014년을 끝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13] 교사들도 다들 반전주의 평화운동가들이니 사상적으로 권위주의적인 것까진 아니었으나, 수학자로서 수학을 연구하는 역량과 교육자로서의 역량은 다른 문제이다. 당대의 프랑스 수학 교과서는 니콜라 부르바키가 크게 문제시하던 대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중고교 수학 교과서도 질적으로 좋은 편은 아니었거니와, 전쟁통에 말도 잘 안 통하는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을 데리고 간신히 운영하는 대안학교 수학 교사의 학술적 역량에 대해 대단한 것을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에서만 봐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수학 교사들이 대단히 참신하고 독창적이고 우수한 교육을 행하지는 않으며, 반대로 보수성향의 수학 교사들이 유별나게 권위주의적으로 가르치지도 않는다. 의지나 사상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다. 선생님들의 수학머리는 임용시험 합격자 발표 직후부터 깨끗해져 있다.[14] 대한민국 고등학교 수학의 수준에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다. 보통 길이, 넓이, 부피를 구하기 위해 동원하는 것이 적분법이며, 고등학교 수학에서 배우는 적분법인 구분구적법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엄밀하게 정의하는 것이 바로 베른하르트 리만의 이름을 딴 리만 적분법으로 이는 대학교 수학과 1~2학년생들이 배우는 해석학개론 커리큘럼의 일부이다. 그런데 이 리만 적분조차도 충분히 일반적이지가 않아서, 실수를 자세히 파고들다보면 우리의 직관을 상당히 거스르는 의아한 결과와 반례를 마주하게 된다. 그나마 이상적분, 특이적분이라는 적분의 차력쇼(?)를 하다가 결국에는 디리클레 함수 같은 반례를 마주하면서는 리만 적분이라는 다소 직관적인 방법만으로는 적분을 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 이르게 되는데, 이에 앙리-레옹 르베그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측도'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리만 적분이 잘 정의되지 않는 경우에도 적분을 잘 정의할 수 있게끔 자연스럽게 일반화한 적분법이 등장하니 그것이 바로 르베그 적분론이다. 문제는 여기까지 사고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리적 집합론과 미분적분학의 엄밀한 이해와 함수공간 등에 관한 넓고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인데, 그 넓고 깊은 이해라는 것이 사실상 수학과 전공과목인 집합론과 해석학개론의 엄밀하고 깐깐하고 피곤하고 장대한 빌드업의 전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르베그 측도론을 본격적으로 학습하는 실해석학 커리큘럼은 전공심화과목에 해당하며, 해석학개론과 다른 여러 고급 과정을 섭렵한 학부 고학년 내지 석사과정 대학원생들이나 배우게 된다. 여기에 선형대수학, 현대대수학, 위상수학 등을 끼얹은 혼종 연구분야가 바로 그로텐디크의 첫 전공인 함수해석학이다. 좋아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던 그로텐디크의 오타쿠적 학습 습관과 사고력은 10대의 나이에 대학원 과정에 버금가는 사고를 독자적으로 창안해내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15] 그러나 당시 몽펠리에 대학은 파리의 대학들에 비해 교육적으로 낙후된 곳이었다. 밑에 언급할 앙드레 베유, 장피에르 세르, 앙리 카르탕 등은 모두 그랑제콜파리 고등사범학교(ENS) 출신 수학자들이다. 그로텐디크는 당대의 프랑스 일류 수학자들 중에서는 보기 드문 일반대학 출신 수학자인데, 이는 "무국적자"라는 낙인과 함께 초창기 그가 뛰어난 연구이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대학에서 쉬이 취직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예나 지금이나 그랑제콜 입시를 위한 프레파 과정은 대한민국의 일류 재수학원 이상으로 부모님의 많은 지원이 필요한 과정이었기에 법적으로 프랑스인도 아니었던 그로텐디크 모자의 불우한 가정환경에서는 이를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16] 하지만 이 때에도 천문학 등 일부 재미없어하던 과목들에서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다.[17] 이전까지 수학의 중심은 독일의 괴팅겐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수학의 중심지는 프랑스 파리로 옮겨왔다. 50년대 당시 프랑스 수학은 황금기를 맞이하여 세계 최고수준이었다.[18] 그로텐디크의 주변인들은 어릴 때부터 영재교육을 받은 뒤 명문대에 입학하는 뛰어난 커리어를 거친 영재들이었으며 이들은 자라온 환경이나 학업방식이 대부분 유사하였다.[19] 다른 수학자들이 논리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주장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로텐디크가 어울린 수학자들이 누구누구였는지를 잊어서는 안된다. 단지 이들이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이고 신진 수학자들에게 불친절하기만 한 서술과 토론방식을 고집한 것, 그리고 그로텐디크는 그런 잘난 척 하는 엘리트들의 틈바구니에서도 악으로 깡으로 버텨내는 희대의 독종이었다는 게 문제였다.[20] 카르티에 연산자, 카르티에 인자를 도입하였고, 형식적 군 법칙 등을 연구한 프랑스의 수학자.[21] 대수 기하학에서 국소적으로 가환환의 스펙트럼과 동형인 공간.[22] 베유 추측을 증명하여 필즈상을 받은 수학자. 하지만 그로텐디크는 들리뉴의 증명법이 새로운 연구로의 디딤돌 노릇을 전혀 해내지 못하는 편법이라고 싫어하여 사제관계는 앙숙관계로 치닫고 말았다.[23] 원래 이 둘은 네이처 지로부터 부고를 의뢰받아서 원고를 작성해보냈는데 생물학자 출신이라 수알못이었던 네이처 지의 편집장이 스킴이고 나발이고 그딴 외계어를 독자들이 어떻게 알겠냐며 성화를 부리길래 수학용어를 지우고 싹 다시 썼다는 일화가 있다.(...)[24] 2022년 7월 말에 한국어로 출간된 학부 수준 대수기하학 교과서로, 챕터 0에서 대수기하학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는데 챕터 0.6에서 그로텐딕의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 김영훈 교수가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의 석사과정 지도교수였기도 해서인지 매트로이드나 조합론, 호지 구조 등 허준이 교수가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연구분야도 잠깐 언급되지만, 책 자체가 2021년도 서울대학교 기초연구저술지원사업을 통해 나온 것이라 출간 직전 터진 빅 뉴스까지 원고에 반영하지는 못했다. 다만 교과서에서의 극찬과는 별개로 본문에서는 스킴이란 것을 학부생 독자들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스킴이 나오기보다 한세대 전까지의 고전적인 접근방법을 주로 취하고 있다.[25] 니콜라 부르바키의 역사를 중심으로 다루지만 부르바키 멤버들 중 베유와 그로텐디크의 생애에 대해서는 별도의 챕터로 다룰 정도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범주론 논쟁에 질려버린 그로텐디크의 탈퇴가 부르바키의 쇠퇴로 이어진 큰 요인 중 하나였다고 평가하였으나, 역자가 스페인-프랑스 근현대사 전문가는 아니었다보니 그로텐디크의 생애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약간의 오역이 있다.[26] 폰 노이만은 이름에서부터 명문가 귀족 도련님임을 알 수 있으나, 그로텐디크는 부모가 모두 혁명의 혼에 불타오르며 가정 생계를 등한시하던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란 흙수저 출신이었다.[27] 폰 노이만은 극렬 반공주의자로서 소련에의 선제타격에도 찬동한 우익 인사였으나, 그로텐디크는 극좌 성향의 반전주의자이자 생태주의적 아나키스트였다.[28] 그로텐디크는 장피에르 세르 등과 함께 순수 수학의 추상화에 엄청나게 기여하였고, 대수기하학을 현대 수학의 가장 중요한 분야로 발전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수학이 현실과의 괴리가 심화되어서 물리적 실체가 없는 수학은 공허한 이론일 뿐이라는 비판까지 수학계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폰 노이만은 수학이 보다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니콜라 부르바키가 주도하던 현대수학의 추상화를 언짢아했다. 사실 이는 수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활발히 논쟁되는 문제로, 관심 있는 사람은 인터넷에서 아르놀트-세르 논쟁을 찾아보길 바란다.[29] 20세기 후반부터는 컴퓨터과학의 발전이 수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지만, 프로그래밍이나 인공지능 같은 것을 알아봤자 써먹을 방법이 없는 (어떤 면에서는 써먹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연구분야가 현대수학에는 여전히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컴퓨터의 도움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학자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 하지만 그로텐디크의 경우는 연구 분야의 특성은 둘째치고 아나키스트, 생태주의자로서 '사상적으로' 컴퓨터라는 물건 자체를 거부했다는 점이 문제다. 같은 해에 필즈상을 받은 마이클 아티야의 삶과 대조되는데, 아티야는 (주 연구 분야가 수리물리 쪽으로 뻗어나간 점도 있지만) 그로텐디크만큼 혁명혼에 불타는 인물도 아니었고 너무 모난 성격이지도 않아 학계 커리어도 꾸준히 이어간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열정적인 연구활동을 이어갔다.[30] 오스트리아 출신의 걸출한 수학자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건너왔다. 세 자녀를 뒀는데, 첫째 카린은 에밀 아틴의 제자인 존 테이트와 결혼했다 훗날 이혼했고, 둘째는 희한한 교과서로도 잘 알려져 있는 마이클 아틴이다.[31] 19~20세기 과학사에 대한 소개는 공교육을 이수하는 중고교생 수준의 독자 및 시청자를 대상으로도 서사를 잘 파악할 수 있게끔 대중서나 영상 다큐멘터리 등을 짜낼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수준으로 19~20세기의 수학사를 다루기 위해서는, 컨텐츠를 접하는 독자 및 시청자에게도 19~20세기 수학자들이 개척해온 지적 영역을 전공서적으로 확인해본 수학과 학~석사 수준의 수학적 경험이 갖춰져 있어야만 서사를 서사답게 소개할 수 있다. 20~21세기의 순수수학자들을 소개하는 대중교양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번역가들의 수학적 역량과 경험은 수학과 고학년생의 눈높이에조차 못 미치는 수준이라 전공자들의 눈에는 터무니없는 오역이 심심찮게 보일 정도인데, 비전공자들은 이런 오역이 오역인줄 알아볼 능력조차 없다. 이러한 수학적 경험이 갖춰져있지 않은 비전공자들에게는, 르베그 적분론을 아무 책도 안 보고 혼자만의 사고로 정의해냈다는 외톨이 고등학생의 일화보다 초등학교 때 이미 미적분 계산을 했다는 흔한(?) 영재의 이야기가 더 실감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32] 소멸 정리를 대수적인 방법으로 증명하고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원고 개정에 참여한 프랑스의 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