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09:35:51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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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피라미드 이집트 5.jpg 흔히 생각하는 피라미드의 모습 (기자의 대피라미드)

1. 개요2. 이집트의 피라미드3. 누비아 피라미드4. 아메리카 대륙의 피라미드5. 귀마르의 피라미드6. 고구려와 백제의 피라미드7. 보스니아의 피라미드?8. 남극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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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라미드(pyramid)는 각뿔, 특히 사각뿔 도형[1] 또는 이나 벽돌 등을 층층이 쌓아 만든 뿔 형상의 거대 구조물을 총칭하는 말이다. 한자로는 금자탑(金字塔)이라고도 부르는데, 뾰족한 모양이 한자의 쇠 금()자를 닮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흔히 역사에 길이 남는 대상이나 행동을 '금자탑', '금자탑을 쌓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피라미드를 비유한 것이다. 이 밖에 '다단계 구조' 혹은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구조'를 나타낼 때도 피라미드라 부른다.[2]

흔히 피라미드라고 하면 이집트의 사각 피라미드를 연상하지만, 실제로는 삼각뿔은 물론, 각뿔 형태가 아닌 원뿔(콘)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러한 형태의 건축물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마야 문명의 치첸 이트사, 아즈텍 등 남미 문명들의 제단으로 쓰인 계단식 돌 피라미드[3]나 중국 고대 황제의 무덤[4], 고구려장군총 같은 무덤들도 피라미드이며, 넓게 보면 지구라트도 피라미드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보스니아에 있는 거대한 흙 피라미드[5]요나구니 수중 유적 등 피라미드라고 '추정'되는 것들도 있다. 피라미드 비슷한 형태의 건물로는 서하왕릉이 있으나 이쪽은 원래 탑 모양에 더 가까웠다.

넓은 밑면과 하나의 정점으로 모이는 형태는 고대 건축의 기술적인 제약 때문에 발생했다. 이렇게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형태는 무게중심이 아래로 몰리기 때문에 매우 안정적인 형태인데, 고대에는 대형 건축물들을 붕괴의 위험 없이 높게 짓기 위해서 윗부분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 결과 고대 대형건물들의 상당수는 피라미드 같은 모양이 되었다. 물론 중력 법칙은 건축술이 더욱 발전한 현대에도 여전히 무시할 수가 없으므로 지금도 피라미드식으로 건물을 만들면 가장 내진 등에 안전하고, 이론적으로는 에베레스트산 높이로 만들기도 가능할 정도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2px-Comparison_of_pyramids.svg.png
위키피디아의 피라미드 크기 비교. 엉뚱하게도 류경호텔, 더 샤드, 트랜스아메리카 피라미드, 룩소르 호텔 앤 카지노 등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위키피디아에서는 고대뿐 아니라 현대에 지은 뿔 모양 건물들도 피라미드에 포함하기 때문이다.

2. 이집트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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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누비아 피라미드

파일:수단 메로에 1.jpg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만, 이집트 남쪽의 수단에도 피라미드가 있다.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던 누비아 문명의 쿠시 왕국에서는 기원전에 '누비아 피라미드'(Nubian pyramid)를 무덤으로 지었는데 이집트의 장례 방식이 바뀐 뒤에도 1000년 동안 계속 피라미드를 지어올렸다. 쿠시 왕국은 신왕국 멸망 후 찾아온 이집트의 극심한 혼란기인 이집트 제3중간기에 상이집트를 거쳐 하이집트까지 전부 정복하고 일시적으로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잠시나마 번영을 누리며 이집트 제25왕조를 개창하여 파라오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누비아 피라미드들은 양식적으로 전성기의 이집트 피라미드와 유사하지만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 이런 이유는 쿠시 왕국이 이집트 신왕국 시절의 고위 귀족들이 가족묘지로 작게 지어서 쓰던 방식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피라미드 중 제일 높은 게 40 m이고 웬만한 것들은 20 m 미만으로 훨씬 작다. 경사 역시 훨씬 급하고 돌에 철분이 함유되어서 전체적으로 색상이 어두운 편이다. 이집트와는 달리 나일강의 동서쪽에 다 있다. # 손상이 심한 이유는 근처에 살던 주민들이 집을 지으려고 자재를 재활용한 이유도 있고 진흙 벽돌과 석재를 혼합해서 축조했는데 진흙 벽돌은 쉽게 손상되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이 이집트 중왕조 시기에 지은 진흙 벽돌 피라미드들은 고왕국 시절에 통짜 돌을 깎아 만든 피라미드보다 더 후대에 지어졌지만 손상이 더 심하다.

누비아 피라미드는 전부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무덤 자체는 피라미드 안이 아니라 피라미드의 밑에(지하에) 있고, 피라미드 옆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대신 피라미드 앞에는 작은 사각형 석실이 있는데 제사를 지내기 위한 방이다. 즉 누비아 피라미드는 제사용 시설, 묘비의 성격이다.

크기가 작아 모래바람에 묻혀버리기가 쉽고, 수단이 상대적으로 고고학계와 여행객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다 보니 아직도 느리게 발굴하는 중이다. 피라미드들이 모여있는 곳이 여태까지 4군데 발견되었고(Meroe, Jebel Barkal, Nuri, El-Kurru), 2018년에 수단 북부에서 다섯 번째로 피라미드가 모인 장소가 발견되었다. 앞의 4군데는 왕실 묘지로 쓰였지만 새로 발견된 세데인가(Sedeinga)의 피라미드는 부유한 일반 시민들을 안치했다는 게 큰 차이점이다. 세데인가가 수도인 메로에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반인도 피라미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누비아 고유의 양식이 강한 메로에의 것과 달리 세데인가는 중부 이집트와 쿠시 왕국을 잇는 주요한 교역도시라는 위치에 더해 교역하러 온 이집트인들이 제일 먼저 도달하는 누비아 도시이기도 해서 이집트 본토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 예로 피라미드 꼭대기에 얻는 캡스톤의 형상이 태양 원반에서 나오는 연꽃이나 새를 조각했는데 이는 이집트 신화의 영향이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여성들을 위한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어 여성의 지위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일:수단 메로에 3.jpg}}}||
위의 사진은 이들 중 제일 유명한 메로(Meroe)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피라미드의 윗부분들이 파괴되었다. 수단도 강수량이 적은 사막지대이고 근처에 큰 도시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2천 년 넘게 피라미드들이 세월을 잘 견뎌내었는데, 1830년대에 주세프 페를리니(Giuseppe Ferlini)라는 이탈리아인 도굴꾼이 보물을 찾으러 와서 다이너마이트로 많은 피라미드의 윗부분을 파괴하거나, 어떤 피라미드들은 피라미드째로 파괴해버렸다. 더욱이 경악스러운 사실은 페를리니의 이런 행태들은 그 당시에 이 지역을 통치하던 토후의 허락을 받고 벌인 짓이라는 거다. 당시 사람들의 고고 유적의 가치에 대한 어리석은 무지에서 생겨난 비극이다. 페를리니는 결국 장신구 등의 부장품을 조금 찾기는 했고, 그것들을 유럽으로 가져가서 팔려고 했지만, 그 시대 유럽인들의 생각으로는 '미개한 사하라 남쪽 아프리카에서 몇천 년 전에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 고로 이것들은 가짜다'였기 때문에 팔리지 않다가 바이에른 왕국루트비히 1세가 일부를 사서 현재는 뮌헨에 있는 이집트 예술 국립 박물관에 있고, 나머지는 현재 보관중인 베를린 이집트 박물관에서 매입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엘-쿠루(El-Kurru)는 나파타 왕조 시기의 쿠시 왕국이 왕실 묘지로 조성한 장소이다. 여기에는 이집트 제25왕조의 시조인 카슈타(제25왕조의 창건자인 피이의 아버지), 피이, 셰비쿠, 타누타멘, 그들의 왕비들의 피라미드 무덤이 있고 누비아 고유의 방식으로 조성한 더 오래된 봉분들이 흩어져있는데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주인을 모르는 무덤이 많다. 1910년대에 최초로 발굴을 시작했을 때 진작에 다 도굴당한 상태였으나 도굴꾼들의 손길을 운좋게 벗어난 유물들이 조금씩 출토되어 쿠시 왕국의 화려한 시절을 알려주고 있다. 엘 쿠루에서 가장 거대한 1번 피라미드는 특이하게도 미완성 상태고 무덤으로 쓰인 흔적도 없다. 이 피라미드를 축조한 왕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나파타 왕조의 20대 왕인데 그의 왕비를 위한 피라미드도 그 옆에 지어졌으나 똑같이 미완성이고 무덤으로 쓰이지 않았다. 18번 피라미드에는 남성의 유골이 현대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그 무덤의 주인인 셰비쿠의 것으로 추정한다. 그 외에 피이, 셰비쿠, 샤바카, 타누타멘이 기르던 말들을 매장한 무덤이 있다. 묻힌 말들은 바로 선 자세로 마구를 전부 착용한 상태로 묻혔는데 역시 도굴꾼들의 손길을 피하지 못해 발굴된 유물은 거의 없다.

누리(Nuri)는 본래 쿠시 왕국의 왕실 묘지로 조성한 엘-쿠루가 가득 차자 타하르카가 대체장소로 조성했다.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누비아 피라미드인 1번 피라미드가 타하르카의 것으로 고대 이집트력으로 1월 1일 일출이 됐을 때 해가 지평선에서 수직으로 뜨는 위치에 있다. 후계자인 타누타멘은 마지막으로 엘-쿠루에 묻혔으나 그 이후의 쿠시 국왕들과 왕비들은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며 누리에 자신의 피라미드 무덤을 조성했고 이는 기원전 4세기 말의 왕인 나스타센 때까지 이어졌다.

엘-쿠루와 누리 모두 1916~1919년에 하버드 대학교 출신 고고학자인 조지 레이스너(George Reisner)가 처음으로 부분적인 발굴을 했는데 발굴 작업 중에 지하수가 계속 차오르는데다가 계단이 무너져 인부 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더 이상의 발굴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작업은 중지되었고, 발굴 성과는 1950년대에 논문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2018년에 재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제벨 바르칼은 본래 이집트 신왕조의 파라오인 투트모세 3세가 누비아를 점령한 후 이집트의 최남부 거점으로 요새를 지었던 곳으로, 이집트인들이 주변에 정착하고 테베의 아문 신을 모신 거대한 신전을 건축했으며 쿠시 총독의 거처이기도 했다. 신왕국이 멸망하고 이집트의 국력이 줄어들던 이집트 제3중간기때 쿠시 왕국은 세력을 키워 나파타 왕조를 창건했고, 이집트인들이 물러난 제벨 바르칼을 수도로 삼고 각종 시설의 증축과 개축을 이어갔다.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이집트에서 축출된 후에도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서 궁전과 신전들이 계속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고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1세기 사이의 시기에 피라미드가 8개 조성되었는데 왕실 무덤으로 쓰던 메로에를 두고 굳이 이곳에 무덤을 조성한 이유는 불명이지만 아마도 무덤의 주인이 제벨 바르칼 출신이었기에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손상이 심한 다른 곳과 달리 제벨 바르칼의 피라미드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현대에서는 파괴된 피라미드 근처에 널린 벽돌을 모아서 복원해놓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이 근방에 살던 사람들이 집 등을 지을 때 사용하느라 없어진 돌들도 많아서 어떤 것들은 복원했다는 티가 너무 나기도 하고, 어떤 것은 터만 남았을 뿐 영영 없어지기도 했다. 좌우간 아쉽게도 현대시대에 메로의 파라미드를 상징하는 것은 윗부분이 날아가버린 피라미드이다.

문명 6에서는 누비아 문명의 고유 시설물로 등장하는데, 기본적으로 식량과 신앙을 제공하며 인접한 지구의 종류에 따라 추가적인 산출을 제공한다. 또 아마니토레의 지도자 특성으로 도심부에 인접한 타일에 건설하면 지구를 건설할 때 강력한 생산력 보너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다만 사막에만 지을 수 있다는 것이 흠.

4. 아메리카 대륙의 피라미드

4.1. 북아메리카

4.1.1. 미국

카호키아의 몽크스 마운드를 소개하는 스미소니언 영상.
9세기부터 17세기까지 미국 동부 및 중부에 자리잡았던 미시시피 문화에선 둔덕이라는 피라미드의 일종이 널리 건축되었다. 해당 문화의 대도시였던 카호키아 중앙에 있는 몽크스 마운드 (Monk's Mound, 수도승의 둔덕)은 멕시코 이북 북아메리카의 최대 피라미드이다. 몽크스 마운드의 정상에는 본래 큰 신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소실되고 없다.

4.1.2. 메소아메리카

파일:attachment/피라미드/M1.jpg
파일:attachment/피라미드/M2.jpg
멕시코 시티 근교에 위치한 테오티우아칸달의 피라미드(위)와 태양의 피라미드(아래).

파일:attachment/피라미드/M3.jpg
멕시코 동부 마야 문명치첸 이트사.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훨씬 더 유명하고 위 항목도 훨씬 더 길지만 사실 아메리카 대륙에도 피라미드가 상당히 많이 세워져 있다. 메소아메리카 문명권 멕시코 중부부터 동부, 그리고 중미과테말라온두라스에 걸친 지역에 대부분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이집트 피라미드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덤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던 신전이라는 것이다. 팔렝케의 피라미드는 이집트 처럼 지배자의 무덤으로 사용된 공간이 발견되어서 메소아메리카의 피라미드가 무조건 신전으로만 쓰였다는 설은 부정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팔렝케만의 특이사항인지, 다른 피라미드에서도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부분인지는 아직 모른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즈텍 제국을 비롯한 여러 중미 문명의 악명높은 인신공양이 피라미드 위에서 행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제단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이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힘들지만 올라가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치안을 포함한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2022년부터 올라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파일:attachment/피라미드/MM.jpg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가장 거대한 위 사진의 테오티우아칸의 태양의 피라미드. 멕시코시티 인근에 있어서 접근성도 좋은 편이며, 어마어마하게 거대하지만 아쉽게도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인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보다 약간 작아서 덜 유명하게 되어버렸다.[6] 특이하게도 이 유적은 기원전 200년부터 건립되어 10~2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도시였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7세기경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폐허가 되었다. 사라진 이유가 수년간 계속된 가뭄 때문이었다는게 밝혀졌다고 한다. 식량이 없어서 제국은 사라졌지만 사람은 남아서 지금 살고있는 사람들이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다.

그 후 14세기 유적을 찾게된 아즈텍인들이 거주하였고, 현재 붙여진 이름들은 전부 아즈텍인들이 명명한 것이다. 태양의 피라미드 외에도 달의 피라미드 및 크고 작은 11개의 피라미드가 있으며 현재 1/10 정도 발굴이 되었다고 한다.

위에서 보듯 그늘 따윈 전혀 없으니, 해가 뜬 밝은 날에 올라가 볼 생각이라면 엄청 더울테니 각오를 단단히 하자.

영화 아포칼립토에서 그 시절의 모습으로 재현된 피라미드들이 등장하며 인신공양은 덤.

문명 5에서 마야 문명의 고유 건물로 등장한다. 성소를 대체하며, 성소보다 신앙을 더 많이 제공하고 과학도 얹어 준다. 과학 보너스는 문명 특성상 최대한 빨리 신학을 연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마야에게 큰 도움이 되며, 게임 후반까지도 소소하게 기여한다. 신앙 보너스는 종교관을 얻고 종교를 창시, 강화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다.

참고로 세계에서 부피로 가장 큰 피라미드도 멕시코에 있다. 멕시코시티 근처에 있는 푸에블라라는 도시 근처에 있는 Cholula pyramid. 피라미드의 거의 모든 부분이 흙으로 덮여있고, 피라미드의 윗부분에는 성당이 있어서 멀리서 보면 그냥 성당에 있는 낮은 언덕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흙으로 덮혀있지 않은 부분은 돌로 만든 피라미드의 일부가 보이고 피라미드의 안으로 들어가볼 수도 있다.

4.2. 남아메리카

피라미드를 비롯한 수페 문명 문화재를 소개하는 페루 관광부 영상.
기원전 35세기부터 기원전 18세기까지 페루에 있었던 카랄-수페 문명 (Civilización caral)에서도 거대 피라미드가 축조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이며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시기가 겹친다.

5. 귀마르의 피라미드

스페인카나리아 제도에도 피라미드가 있는데, 이 피라미드는 귀마르의 피라미드라고 부른다. 원래는 현지의 농부들이 김을 매다가 골라내어진 돌을 버린 장소이거나, 바람막이용으로 조성한 구조물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으나[7], 토르 헤이에르달[8]이 귀마르의 피라미드는 현지 원주민들인 관체족[9]들이 종교의례를 목적으로 지었음을 밝혀내었다. 물론 토르 헤이에르달은 무턱대고 '그래서 관체족들의 조상은 마야인이다'라는 설을 제기했다가 주류 학계로부터 외면당하긴 했지만, 이 건축물이 종교적인 이유로 세워졌음은 확실히 입증했다. 피라미드의 서쪽 계단이 동지 때 뜨는 아침 해의 방향을 따라 나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6. 고구려와 백제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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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석총도 정의상으로 피라미드에 속한다. 고구려의 경우 태왕릉, 천추총, 서대총 등 거대한 것들이 있었으나 아쉽게도 현재 장군총 외에는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적석총이 사실상 없다. 백제의 적석총은 석촌동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7. 보스니아의 피라미드?

관련 영문 위키피디아 문서

2005년, 샘 새미르가 발견한 구조물들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인위적인 모양과 주변에서 발굴된 전돌들 때문에 새미르는 이 구조물을 피라미드 라고 주장하고 있다. 새미르의 주장에 따르면 피라미드의 높이는 무려 220 m, 년도 측정결과 무려 12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만약 위의 주장이 전부 사실이라면 보스니아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피라미드임과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 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고고학자와 지질학자들의 조사결과 플랫아이언(Flatiron)이라고 불리는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가파르게 선 지층이 차별적 풍화작용을 받아 형성된 바위를 가진 지형이라고 반박하였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피라미드 발굴이라는 명목하에 가해지는 자연경관 훼손[10] 및 주변의 실제 역사 유적 훼손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물론 괴베클리 테페같은 말도 안될 정도의 편년을 지닌 유적이 존재하기는 하다.[11]

현재 샘 새미르는 주변마을들과 협력하여 이곳을 관광단지로 개발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새미르가 인부들을 시켜 발굴이 아닌 인위적으로 지형을 다듬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보스니아 정부는 고고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의 권고 및 자연 훼손에 대한 책임을 물러 조사 및 발굴을 중단시켰다. 그럼에도 보스니아 피라미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해 현재까지 미스테리 매니아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보스니아를 여행 중이던 한 한국인 관광객이 위 내용을 전해 듣고 바로 찾아가 본 소감을 올린 블로그 글이 있다.[12]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8년 12월 9일 방송분에서 이 내용을 소개했다.

8. 남극의 피라미드?

파일:99B845335FF152ED18.jpg

2012년, 미국 및 유럽 일부 국가가 참여한 8명의 국제 연구진이 남극을 탐사하던 중 눈으로 뒤덮인 사면체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것은 총 3개이며 높이는 약 400m 정도 되고[13] 사면으로 평평하고 4개의 모서리가 존재한다. 발견된 3개의 피라미드 중 2개는 해안에서 내륙으로 약 16km 들어간 곳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해안선에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피라미드를 발견한 탐사팀은 발표된 사실 외에 어떠한 추가 정보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미정부가 탐사팀을 입막음시켰다',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등 여러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게 남극에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글 어스를 통해 남극 곳곳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고 2016년에 어느 남성이 피라미드의 좌표를 찾아내는데 성공하며 남극에 피라미드형 지형물 자체는 실존한다는 것이 확실시 되었다.[14]

그러나 이 구글 어스에서 관측된 피라미드는 해안선과 가깝지도 않을 뿐더러 가장 가까운 해안에서 대략 800km 정도나 떨어져 있기에 이 탐사진들이 찾은 피라미드의 진위성 자체는 확인할 수 없게 됐다.

파일:남극 피라미드.jpg
▲ 구글 어스로 관측된 남극 피라미드.

미스테리 매니아들은 남극의 산들은 대부분 험준한 산맥에 위치한데에 반해 남극 피라미드는 평평한 주변 지형에 혼자만 우뚝 솟아 있으며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기엔 사면체의 구분이 매우 뚜렷하기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피라미드가 발견된 곳들의 공통점은 문명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남극은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환경이라 아직까지 문명이 존재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이것이 정말 피라미드가 맞다면 아주 오래전에는 남극에도 문명이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과거의 남극은 영상 20도 정도의 따뜻한 지역이라 고대 문명이 존재했을 거란 주장도 있지만 이때는 무려 5000만 ~ 3000만 년 전의 머나먼 과거로 아직 최초의 인류가 등장하기도 한참 이전인 지라 신빙성이 없다. 반쯤 농담으로 외계인이 만들었을 거라는 설도 돌고있다. 남극의 혹독한 기후로 인해 아직은 정확한 탐사도 할 수 없기에 현재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과학자나 남극의 지리를 연구한 전문가들은 이 피라미드가 남극의 극심한 비바람으로 인해, 침식이 일어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산이라고 보고 있다. 누나타크(nunatak) 지형으로, 얼음산의 만년설이 침식되어 언덕이나 봉우리 끝이 빙하를 뚫고 나와 암반이 노출된 것을 가리킨다. 즉 애초에 그냥 자연적인 산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형들은 침식으로 암반이 드러난 것이다보니 인간이 보기엔 마치 인위적으로 깎아낸 것과 같이 예리한 형태를 띄는 경우가 많은데, 남극 피라미드 지형은 우연히 정사분면에 가까운 형태로 이뤄져 있다보니 피라미드란 오해를 산 것이라는 것이다.[15]

과학자들이 인공 구조물로 보기 힘든 한계로 지적하는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이 산이 길이가 400km나 되는 남극의 엘스워스(Ellsworth) 산맥에 있는 봉우리 중 하나라는 것이다. 때문에 위에서 피라미드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지적하는 말과 달리 남극 피라미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형이 아니며, 눈에 묻혀 있을 뿐 실제로는 다른 산맥의 줄기와 다방면으로 이어져 있다. 또한 이어진 산맥의 다른 봉우리들도 누나타크 지형으로 형성되어 지형 자체는 남극 피라미드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1] 본래 사각뿔은 영어로 'quadrangular pyramid(사각 피라미드)'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나, 이집트로 대표되는 사각 피라미드의 이미지가 너무 인상적인 나머지 'quadrangular' 없이 'pyramid'라고만 해도 우선적으로 사각뿔을 가리키게 되었다.[2] 피라미드(동음이의어) 참조[3] 각 층의 위가 평평하다.[4] 대표적으로는 진시황릉이 있다.[5] 산을 깎아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6] 사실 대피라미드보다 컸어도 대피라미드가 워낙 오래되고 이미 "이집트=피라미드"로 각인된 상태라 그만큼 유명해지기에는 무리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인지도는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7] 대한민국에도 이런 용도로 지은 구조물이 있다. 1박 2일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전라남도여서도라는 섬은 강한 바닷바람을 막아내고자 주민들이 돌을 쌓아서 벽을 조성했는데, 그 모양이 고대 유적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기묘해서 종종 '한국마추픽추'라고도 부른다고 한다.[8] 콘티키 호 항해로도 유명한 그 사람이다.[9] 북아프리카유목민족베르베르인들의 사촌뻘되는 민족으로 현재는 절멸했다.[10] 2006년부터 피라미드 발굴이라하면서 언덕을 피라미드처럼 보이도록 개발했다고 한다.[11] 그저 심증뿐인 보스니아 피라미드와는 달리 이쪽은 진짜 12000년 전의 유적이다.[12] 방문을 해도 실제 피라미드로서의 모습이나 고대 유적은 찾기 어렵고, 중세에 남겨진 유적조차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는 아쉬움과 관광지로써도 부족한 점들을 전한다.[13]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큰 피라미드의 높이는 220m인데 반해 남극 피라미드 높이는 육안으로 관측된 것만 무려 400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다. 만약 남극 피라미드가 얼음 아래까지 이어져있다면 그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14] 남성이 공개한 해당 좌표. 79°58'37.9"S 81°57'41.8"W[15] 이렇게 인공물로 오해받은 자연지형들은 생각보다 많은데, 지구에 있는 것으로는 요나구니 해저 지형이 가장 유명하고, 지구 밖에서는 화성시도니아 지역에 있는 오각뿔 모양의 피라미드 지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