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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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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록
2.1. 『삼국지』2.2. 『화양국지』2.3. 『한진춘추』2.4. 『진서』2.5. 『수경주』2.6. 『개원점경』2.7. 『원화군현도지』2.8. 『자치통감
3. 기록 분석
3.1. 배경3.2. 상규 대치3.3. 노성 전투3.4. 촉한군 철수3.5. 결말
4. 사료 비판
4.1. 진서 비판4.2. 한진춘추 비판
5. 평가
5.1. 제갈량에 대한 평가
6. 역사학자들의 판정7. 여담
7.1. 곽충오사7.2. 위연의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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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鹵城 戰鬪

노성 전투는 231년(위나라 태화 5년, 촉한 건흥 9년) 제갈량의 북벌 4번째 출진 중에 벌어진 전투이다. 영문위키에선 Battle of Mount Qi, 즉 기산(祁山) 전투로 나온다.

본 문서에서는 이 전투를 전후로 농판(隴阪) 이서의 농우(隴右) 지방에서 진행된 제갈량의 4차 북벌 전역(戰役) 전체의 전개 과정을 다룬다.

2. 기록

2.1. 『삼국지』

서진진수(233~297)가 편찬한 역사서이다. 인용문은 150여년 후 유송배송지(372~451)가 덧붙인 주석이다.
3월, 대사마 조진이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이 천수(天水)로 침공하였으므로 대장군 사마선왕(사마의)에게 조칙을 내려 막도록 했다. 지난해 겨울 10월부터 이달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9일에 비를 기원하는 성대한 행사를 거행했다.

여름 4월, 선비(鮮卑) 부의왕(附義王: 이민족 수장에게 수여하는 특수 작위 솔중왕의 일종) 가비능(軻比能)은 그들의 부족 사람과 정령(丁零) 대인(大人: 부족의 실력자) 아선(兒禪)을 인솔하여 유주에 도착하여 좋은 말을 바쳤다. 다시 호흉노중랑장(護匈奴中郞將: 남흉노 등 병주 일대 이민족을 징병하는 책임관)을 설치했다.

가을 7월, 6일에 제갈량이 퇴각하여 도주하자, 조정에서는 전쟁에 공이 있는 자들에게 작위를 봉하고 관직을 더함에 각기 차등을 두었다.

처음에 제갈량(亮)이 출정했을 때, 대부분 제갈량의 군대에는 짐이 없고 군량미도 제공받을 수 없으니, 그를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이므로 군사들을 수고롭게 출동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상규(上邽) 부근의 보리를 베어 버려 제갈량 군대의 식량 보급로를 끊어 버려야 한다고 말했으나 명제(조예)는 모두 듣지 않았다. 다만 앞뒤로 군대를 파견하여 선왕(사마의)의 군대를 증원하고 칙령을 내려 보리를 감시하도록 하며, 이 보리에 의지하여 군대의 식량을 확보하도록 지시했다.
『위서』
권3 「명제기」 태화 5년(231)
제갈량이 다시 기산(祁山)으로 출병하자 장합에게 조서를 내려 제장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게 해 약양(略陽: 광위군 약양도)에 도착했다. 제갈량이 물러나 기산을 지키자 장합이 추격해 목문(木門)에 이르렀는데, 제갈량군과 교전하다 날아온 화살에 오른쪽 무릎을 맞고 죽었다.

제갈량군이 퇴각하자 사마선왕(사마의)이 장합에게 이를 추격토록 했다. 장합이 말했다, “군법(軍法: 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선왕이 이를 들어주지 않아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했다. 촉군이 고지에 올라 숨어 엎드려 궁노(弓弩)를 난사하자 화살이 장합의 넓적다리에 적중했다.
『위략』
권17 「장합전」
견초는 촉로(蜀虜: 촉한)의 제갈량(諸葛亮)이 수차례 출병하였고 가비능이 교활(狡猾)하므로 서로 교통(交通)할 수 있으니 표문을 올려 이를 방비해야 한다고 했으나 의논하는 자들은 제갈량과 가비능이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때마침 제갈량이 당시 기산(祁山)에 있었는데 과연 사자를 보내 가비능과 연결하였다.

가비능이 옛 북지(北地)의 석성(石城)에 도착해 서로 호응했다. 그러자 황제가 견초에게 조서를 내려 편의(便宜)에 따라 그를 치도록 하였다. 당시 가비능은 이미 사막 남쪽으로 돌아간 뒤였으니 병주자사 필궤(畢軌)와 함께 의논하며 말했다.
권26 「견초전」
5년(231) 촉나라가 노성(鹵城)을 공격하러 나갔다. 이때 농우(隴右)에는 식량이 없었으므로, 관중(關中)에서 대량 수송해 오도록 상의했다. 곽회는 위임과 은혜로써 강(羌)과 호(胡) 사람을 어루만지며, 집마다 곡식을 내게 하고, 공평하게 수송 노역을 할당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식량은 충분했다. 양무장군(揚武將軍)으로 전임되었다.
권26 「곽회전」
봄 2월, 제갈량이 다시 출군해 기산을 포위하고, 처음으로 목우(木牛)로 운량했다. 위(魏)의 사마의와 장합이 기산을 구원했다.

여름 6월, 제갈량이 군량이 다해 군을 물렸는데, 장합이 추격해 청봉(靑封)에 이르러 제갈량과 교전하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

가을 8월, 도호(都護) 이평(李平: 이엄이 개명한 이름)이 자동군(梓潼郡)으로 폐사(廢徙: 관직을 폐하여 유배함)되었다.
권33 「후주전」 건흥 9년(231)
건흥 9년(231), 제갈량이 다시 기산(祁山)으로 출병했다. 목우(木牛)로 운송했는데, 군량이 다 떨어져 퇴각하다 위(魏)의 장수 장합(張郃)과 교전해, 활을 쏘아 장합을 죽였다.
권35 「제갈량전」
9년(231) 봄에 제갈량의 군대는 기산(祁山)에 주둔하였고, 이평(이엄)이 수송 업무를 재촉하며 감독했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계속 장마비가 쏟아져 식량 운반이 지속되지 못했으므로, 이평은 참군(參軍) 호충(狐忠)과 독군(督軍) 성번(成藩)을 파견하여 그의 뜻을 설명하고 제갈량에게 후퇴하여 돌아오도록 하였고, 제갈량은 이를 받아들여 퇴군을 하였다. 이평은 군대가 후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놀란체 하며 말했다.

"군량미는 아직 충분하거늘, 어찌하여 돌아옵니까?"

이평은 이렇게 하여 자기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벗어나고 제갈량이 진군하지 않은 잘못을 분명하게 나타내려고 했다. 이에[於是] 유선에게 표문을 올려 말했다.

"우리 군대가 거짓으로 퇴각한 것은 적을 유인하여 함께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갈량이 이평이 앞뒤로 쓴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공개했으므로, 이평의 잘못은 분명해지게 되었다. 이평은 힘껏 변명하다 죄를 자백하고 사죄했다.
권40 「이엄전」
건흥 9년(231),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고 왕평은 따로 남쪽을 포위하고[南圍] 지켰다.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선왕(사마의)이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권43 「왕평전」

2.2. 『화양국지』

동진상거(291~361)가 영화 연간(345~356)에 저술한 익주 지방의 지리서이다.
건흥 9년(231) 봄, 승상 제갈량은 다시 출병하여 기산을 포위하고, 처음으로 목우를 이용해 수송하였다.

참군 왕평에게 남쪽을 포위하고[南圍] 지키게 하였다.

사마선왕(사마의)이 제갈량을 막고, 장합이 왕평을 막았다.

제갈량, 병량의 운반이 원활치 못함을 걱정하고 세 가지 책략을 세워 도호 이평(이엄)에게 알려 말하기를,

"상책은 적의 퇴로를 끊는 것이다. 중책은 적과 지구전을 벌이는 것이다. 하책은 귀환하여 황토(黃土: 익주를 지칭하는 듯)에 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사마선왕 등 위군의 병량도 역시 다하였다.

한여름(5월), 비가 내렸다. 이평은 조운이 막히는 것을 (이로써 병량 수송이 곤란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어 밝히기를 군을 정비해서 귀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했다.

6월, 제갈량은 이평의 조언을 받아들여 철퇴하였다. 장합은 청봉(靑封)까지 진군하여 교전하다가 제갈량에게 죽었다.

8월, 제갈량이 한중에 귀환했다. 이평은 제갈량에게 병량 운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책망당할까 두려워하여, 독운령인 잠술을 죽이려 하였다.

(또한 이평은) 두려워하며 제갈량에게 왜 돌아가는지 물었다. 또한 후주(유선)에게 표문을 올려, 제갈량이 일부러 퇴각했다고 말했다. 제갈량은 노하였고, 이에 상표하여 이평을 폐하여 서민으로 삼아 자동으로 유배 보냈고, 이평의 자식 이풍의 병사를 빼앗고 종사중랑으로 삼아, 장사인 장완과 더불어 거부(居府: 승상부)의 일을 맡게 하였다.
권7 「유후주지」

2.3. 『한진춘추』

동진습착치(?~384?)가 쓴 역사서로, 아래의 기사는 배송지(372~451)가 『삼국지』 제갈량전에 인용한 대목이다.
제갈량이 기산(祁山)을 포위하고 선비(鮮卑) 가비능(軻比能)을 부르자, 가비능 등이 옛 북지(北地) 석성(石城)에 이르러 제갈량에게 호응했다.

이때 위(魏) 대사마 조진(曹眞)이 병이 들어, 사마선왕(사마의)이 형주에서 돌아와 입조했다. 위(魏) 명제(明帝: 조예)가 말했다.

“서방의 일이 중대하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 만한 자가 없소.”

이에 서쪽으로 장안에 주둔하게 하고 장합(張郃), 비요(費曜), 대릉(戴陵), 곽회(郭淮) 등을 독(督)하게 했다.

선왕은 비요와 대릉에게 정병 4천을 남겨 상규(上邽: 천수군 상규현)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기산(祁山)을 구원했다. 장합이 군사를 나눠 옹(雍: 부풍군 옹현)·미(郿: 부풍군 미현)에 주둔시키려 하자 선왕이 말했다.

“전군(前軍: 선봉)이 홀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전군과 후군으로 나누는 것은, 바로 초(楚)나라의 3군이 경포(黥布: 영포(英布))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었소.”[1]

그러고는 진격했다. 제갈량은 군을 나눠 공격을 계속하면서, 자신이 상규에서 선왕에 맞서려 했다. 곽회, 비요 등이 요격하자 제갈량이 이를 격파했다. 이에 그곳의 보리를 대거 수확하다 선왕과 상규 동쪽에서 조우했다. (사마의가) 군사를 단속해 험조한 곳에 의지하며 교전하지 않자 제갈량은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선왕이 제갈량을 뒤이어 노성(鹵城)에 도착했다. (이 때) 장합이 말했다.

“저들이 멀리 와서 우리에 맞서서 교전을 청하는데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니, (저들은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라고 보아 장기적인 계책으로 제압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게다가 기산에서는 대군이 가까이 도착했음을 알고 민심이 자연 안정되었을 것이니, 이곳에 머물러 주둔하되, 군을 나누어 기병(奇兵: 유격대)으로 삼아 그들의 배후로 출병할 것처럼 과시할 만합니다. 전진할 뿐 감히 적을 핍박하지 못하는 것은 의당 해서는 안 될 일로,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제갈량은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적으니 또한 곧 달아날 것입니다.”

선왕이 이에 따르지 않았기에,[2] 제갈량의 뒤를 쫓은 것이다. (노성에) 도착하자, 또 산에 올라 영채를 세우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가허(賈栩), 위평(魏平)이 여러 차례 청하며 말했다.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선왕은 이를 괴롭게[病] 여겼다. 제장들이 모두 싸울 것을 청하니, 이에 5월 신사일, 장합에 명해 남쪽을 포위한[南圍] 무당감(無當監) 하평(何平: 왕평)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큰길[中道]을 따라 제갈량에게로 향했다.

제갈량은 위연(魏延), 고상(高翔), 오반(吳班)을 보내 이를 막게 해 대파하고, 병사의 수급[甲首] 3천, 철갑옷[玄鎧] 5천 벌[領], 각노(角弩) 3,100장(張)을 노획했다. 선왕은 돌아가 영채를 지켰다.

2.4. 『진서』

646년 당태종의 명령으로 방현령 등이 편찬해 648년에 완성한 역사서로, 남제의 장영서(臧榮緖)가 편찬한 『진서』를 저본으로 한다고 평가된다.[3]
이듬해(231년), 제갈량이 천수(天水)를 침범하고 기산에서 장군 가사(賈嗣), 위평(魏平)을 포위했다. 천자가 말했다, “서쪽에 일이 생기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만한 자가 없소.”

그리고는 선제(宣帝: 사마의)를 서쪽으로 가서 장안에 주둔케 하고 도독옹량이주제군사(都督雍涼二州諸軍事)[4]로 임명했다. 거기장군 장합, 후장군 비요, 정촉호군 대릉, 옹주자사 곽회 등을 거느리고 제갈량을 공격했다.

장합이 선제에게 권하길 군대를 나누어 옹(雍: 부풍군 옹현)·미(郿: 부풍군 미현)에 주둔시켜 후진(後鎭)으로 삼자고 하자 선제가 말했다.

“전군(前軍: 선봉)이 단독으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고 헤아린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군을 앞뒤로 나눈다면 이는 바로 초(楚: 초왕 유고)의 삼군(三軍)이 경포(영포)에게 격파당한 원인이었소.”

그리고는 유미(隃麋: 부풍군 유미현)로 진군했다. 제갈량은 대군(大軍)이 곧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뭇 장수들을 이끌고 상규(上邽)의 보리를 수확했다. 제장들이 모두 이를 두려워하자 선제가 말했다.

“제갈량은 생각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니[慮多決少] 필시 영채를 안돈하여 스스로 방비를 굳게 한 뒤에야 보리를 수확할 것이오. 우리가 이틀 동안 급히[兼] 행군[行]하면 충분하오.”

그러고는 갑옷을 벗고[卷] 밤낮으로 달려가니, 제갈량은 멀리서 먼지가 이는 것을 보고 달아났다.

선제가 말했다.

“우리가 급히 행군해 피로하나 이는 용병에 밝은 자라면 바라는 바요. 제갈량이 감히 위수(渭水)를 점거하지 못하니 이는 다루기 쉽소.”

진군하여 한양(漢陽)에 주둔했는데 제갈량과 서로 조우하자 진을 치고 맞이했다. 장수 우금(牛金)을 보내 경기병으로 유인했는데 군사들이 막 접전했을 때 제갈량이 퇴각하니 이를 추격해 기산에 이르렀다. 제갈량은 노성(鹵城)에 주둔하면서 남·북의 두 산에 의지하여 강물로 나눠[斷] 방어선[圍]을 두텁게 했다.

선제가 그 방어선을 무너뜨리자 제갈량은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뒤쫓아 이를 깨트리니, 사로잡거나 참수한 것이 만을 헤아렸다[俘斬萬計].

천자가 사자를 보내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封邑)을 늘려주었다.
권1 「선제기」

2.5. 『수경주』

祁山在嶓之西七十許里,山上有城,極為巖固。昔諸葛亮攻祁山,即斯城也。漢水逕其南,城南四里有亮故壘,壘之左右猶豐茂宿草,蓋亮所植也,在上邽西南二百四十里。
기산은 파총산 서쪽 70여 리에 있다. 산 위에는 성이 있는데 매우 엄고(巖固)하다. 과거 제갈량이 공격한 기산은 즉 이 성(기산 위에 있는 성)이다. 한수(漢水)는 기산성 남쪽을 지나는데, 성 남쪽 4리에는 제갈량의 고루(故壘)가 있다.
20권 양수(漾水)

2.6. 『개원점경』

당나라 개원 연간(713~741)에 고대 천문 관측과 점술 기록 등을 모아 편찬한 역서(曆書)이다.
(태화) 5년 3월, 촉 유승(劉升)(유선)이 승상 제갈량에게 5만 명을 이끌고 천수를 침입하게 하여, 장군 가씨(賈)), 위씨(魏)를 공격했다. 부거기장군(副車騎將軍) 서(舒) 등 3만여 명이 이를 토벌해, 3만여 명을 참수하였고 1만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詩 曰 月離於畢俾滂沱矣謂大雨也
春秋緯考異郵 曰 月失行離於畢則雨
蔡氏月令章句 曰 月離者所歴也
班固 天文志 曰 月入畢則多兩
郗萌 曰 月入畢其國君大憂 又曰 兵起期一年 先起兵者有破亡 又曰 與兩股齊近期二十日 逺期六十日 有將死
劉向 洪範傳 曰 月入畢中 將若相有一家事坐罪者 近期百二十日 逺期十月一曰 國有反臣
郗萌占 曰 月犯畢 兵革起 一曰 有女喪 一曰 女主當之
按 魏 太和四年二月丁未 月加午 在畢大星四寸
其 五年十二月丁未 月犯畢赤星
占曰 下犯上 貴人諸侯當之 又曰 有 大赦
其五年三月 蜀 劉升 為丞相諸葛亮 將五萬人 入天水 攻將軍賈魏 副車騎將軍舒等 三萬餘人 討之 斬首三萬餘人 投降者萬餘
七月乙酉 大赦
六年正月甲戌 皇女泰 薨 上及羣臣皆為之服
五月甲戌 皇太子殿下 薨
十一月壬寅 吳越賊將 周賀 於東莱牟平之內 恣殺掠 與青州刺史程喜戰 射殺周賀 斬首四千餘級 又生擒八千餘人
青龍元年八月己未 大赦
二年三月庚寅 故漢帝 山陽公 崩 以天子禮 葬之 諡曰 獻帝
積 三年六月 應也

13권 月犯畢五

2.7. 『원화군현도지』

上邽縣,上。郭下。本邽戎地,秦伐邽戎而置縣焉。漢屬隴西郡,晉屬天水郡。後魏以避道武帝諱,改曰上封,廢縣為鎮。隋大業元年複為上邽縣,屬天水郡。武德二年屬秦州。
司馬宣王壘,俗名上募,在縣東二里。魏明帝太和五年,諸葛亮寇天水,詔大將軍拒之,此其壘也。
諸葛亮壘,俗名下募城,在縣東二里。初,亮出,議者或欲自芟上邽左右麥以奪賊食,帝不從,又勒令護麥。及宣王與亮相持,賴此麥以為軍糧。
상규현(上邽縣) ...
사마선왕루(司馬宣王壘). 속명(俗名)은 상모성(上募城)으로, 현(상규현) 동쪽 2리에 있다. 위 명제(조예) 태화(太和) 5년, 제갈량(諸葛亮)이 천수를 침공하자, 대장군[5]에게 조서를 내려 이를 막게 한 곳이 이 루이다.
제갈량루(諸葛亮壘). 속명은 하모성(下募城)으로 현 동쪽 2리에 있다. 당초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군하자, 의논하는 자(즉 위나라 조정)들 중에서 혹자는 상규 좌우의 보리를 베어 도적(賊)들의 식량을 없애려 하였으나, 황제는 (그 의견을) 좇지 않고 보리를 보호하도록 명령했다. 사마선왕과 제갈량이 대치할 때, 이 보리에 의지해 군량으로 삼았다.
29권 진주(秦州)

2.8.자치통감

사마광은 진서의 기록을 무시하고 한진춘추의 기록을 서술했다. 사마광 입장에서는 진서보다 한진춘추를 신용한 것 같다.

3. 기록 분석

파일:노성전투.png

231년에 진행된 제갈량의 북벌 사건에 관한 여러 기록을 통해 주요 전개 과정을 나열하자면, 초기에 제갈량은 천수군 상규현에 주둔하며 보리를 수확하고 있었다가 사마의의 본대와 조우하자 퇴각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노성 인근에서 교전이 발생했다. 제갈량은 6월에 철수를 결정했다. 따라서 231년의 전역은 아래와 같이 실질적으로 3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 진행되었던 것으로 정리된다.
  • 2월: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하고 가비능이 이에 호응함.[6]
  • 3월: 촉한군이 천수군에 진입하였고, 위에서는 사마의를 장안으로 보냄. 가비능은 전선에서 이탈함.
  • 4월: 가비능이 유주에서 위나라에 말을 조공함.
  • 5월: 노성 인근에서 사마의와 장합이 각각 제갈량과 왕평을 공격함.[7]
  • 6월: 제갈량이 철수를 결정함. 추격대를 이끌던 장합이 목문(청봉)에서 전사함.
  • 7월: 제갈량이 농우(농서) 지방에서 철수하여 위나라에서 논공행상이 치러짐.
  • 8월: 제갈량이 한중에 도착. 이엄이 탄핵당하여 처벌받음.

231년 전역의 전개를 전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화양국지』 및 『한진춘추』와 『진서』 선제기인데, 『화양국지』에서는 이평(이엄)의 군량 수송 문제 위주로 기술되어 있고, 『한진춘추』와 『진서』가 서로 충돌하는 점이 많아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그 외의 기록들은 내용적으로 위 세 기록보다 명확한 정보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정확한 시점을 기록하지 않고 있으므로 세 기록을 통해 정확한 인과관계를 추론할 수밖에 없다.

이를 기준으로 아래의 하위 문단에선 231년 전역의 배경, 상규 대치, 노성 전투, 촉한군 철수, 결말 순으로 각 사료들의 내용을 분석한다.

3.1. 배경

230년 여름, 위나라 대사마 조진과 대장군 사마의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추진된 한중공략전은 때마침 내린 큰비로 인해 보급이 불가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후퇴하면서 무산된다. 한편 정확한 날짜는 불명이나 제갈량은 230년 모월, 위연오의를 강중(羌中)으로 진군시켜, 위연은 양계(陽溪)에서 옹주자사 곽회를, 오의는 남안군(南安)의 경계에서 후장군 비요를 대파하고 돌아왔다. 이 작전이 무슨 목적으로 진행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시기상으로 보아 조진의 정촉 이후 아직 후퇴하지 않은 곽회군을 쫓아내려는 목적이거나, 이후에 있을 4차 북벌을 위해 해당 농서지역에서 위나라의 세력을 어느 정도 꺾어보려는 목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공로로 위연은 전군사(前軍師) 겸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가절(假節)로 승진하고 남정후(南鄭侯)에 봉해졌으며 오의는 정후(亭侯)가 되었다.

231년 2월, 제갈량은 다시 한번 기산(祁山)으로 출병하여 농우 지방을 공략하고 목우(木牛)로 군량을 수송했다. 기산은 228년 첫 북벌 당시에 제갈량이 본진으로 사용했던 곳이며, 2차 및 3차 북벌은 진창성을 공격하면서 거의 동시에 무도군과 음평군을 점령한 행동이었기에, 실질적으로 이때의 북벌은 228년 가정 전투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본격적인 북벌 작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28년 당시에는 천수군·남안군·농서군·안정군 등의 주민들이 촉한군에 적극 호응했었으나, 231년에는 관련 사실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특히 위나라에서 228년에 4군을 수복한 이후 관련 주민들을 처벌하고 새로 광위군을 편성하는 등의 대응조치를 이미 펼쳤기에, 주민들의 호응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228년과 달라진 점은 당시엔 무인지대였던 무도군·음평군이 촉한의 영역이 되었기에 익주에서 기산까지의 보급로가 확보되었다는 점과, 이번에는 선비(鮮卑)의 가비능을 포섭하여 위나라의 대응을 분산시키려 했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다. 실제로 가비능은 촉한에 호응하여 옹주 안정군에 인접한 옛 북지군의 석성에 주둔까지 내려왔다.

3.2. 상규 대치

제갈량이 천수에 진출하자, 위나라에서는 사마의를 도독옹량주이주제군사(都督雍涼二州諸軍事)로 임명해 옹주와 양주(涼州)에 주둔한 모든 군대의 지휘권을 맡겼고, 이에 따라 거기장군 장합, 후장군 비요, 정촉호군 대릉, 옹주자사 곽회 등이 사마의의 직할로 편성되었다. 장합은 촉한군의 후방 기습을 염려하여 사마의에게 관중 부풍군 일대에 일부 병력을 주둔시킬 것을 제안했으나 사마의는 전력 분산을 우려하며 이를 거부했고, 228년 당시엔 조운의 별동대를 보냈던 촉한군 또한 이번에는 관중 방면으로 병력을 보내지는 않았다.[8] 사마의가 장안을 통과하여 농우 지방으로 진군하는 동안, 제갈량은 천수군 상규현으로 이동했다. 『한진춘추』와 『진서』는 이 시점부터 충돌하고 있다.

『한진춘추』에서는 사마의가 먼저 비요와 대릉에게 병력 4천 명을 맡겨 상규현으로 보내고 자신을 포함한 나머지는 기산으로 향했다. 제갈량은 위군의 출병 소식을 듣고 상규에서 사마의를 상대하고자 군대를 나눴다. 이후 상규에서 곽회와 비요 등을 격파하고 보리를 수확했다. 이에 사마의가 직접 상규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상규에서 사마의가 교전을 회피하자, 제갈량은 상규에서 물러나 노성 일대의 분대와 합류했다. 장합은 사마의에게 제갈량을 직접 추격하지 말고 별동대를 통해 기산을 위협하는 선에서 대처하는 지구전을 제안했으나, 사마의는 이를 거부하고 제갈량을 추격했다. 가허(賈栩)위평(魏平)은 노성 전투 대목에서 등장한다.

『진서』에서는 제갈량이 기산에서 가사(賈嗣)와 위평(魏平)을 포위하고 있다가 사마의가 부풍군 유미현(隃麋縣)으로 향하는 동안 상규로 이동해 보리를 수확한 것으로 나오며, 제갈량이 상규에서 곽회와 비요를 격파한 사실은 없다. 오히려 사마의는 제갈량은 결단력이 부족하므로 급히 행군하면 보리 수확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며 갑옷을 벗은 채 경무장으로 상규에 진입했고 이를 본 제갈량은 퇴각했으며, 이후 한양(漢陽)에 주둔하면서 우금(牛金)을 보내 경기병으로 유인을 시도했으나 교전이 시작되자 제갈량은 기산으로 퇴각했다고 나온다.

두 기록에서 확인되는 공통점은 231년 전역 초기에 제갈량이 상규현에 주둔하며 보리를 수확했다는 사실과, 이에 사마의가 직접 상규현 인근까지 와서 대치했으나 제갈량은 사마의와 직접적인 충돌 없이 회군했다는 사실이다. 그 외의 내용은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한편 옛 북지군의 석성에 주둔한 선비의 가비능에 대응하고자, 조예는 병주의 안문태수 견초에게 필요에 따라 가비능을 공격하라 지시했다. 하지만 견초가 지시를 받았을 땐 이미 가비능이 전선에서 이탈한 상태였다. 이런 점에서 가비능은 당초부터 위나라를 협격하려는 의도까지는 없던 것으로 보이고, 특히 4월에는 위나라에 조공한 점에서 상규 일대에서 대치가 진행되는 동안 위나라와 화해하고 전쟁에서 완전히 철수했음이 분명해진다.

3.3. 노성 전투

상규에서 보리를 수확한 촉한군은 사마의의 본대가 상규현 인근에 도착한 뒤에 교전없이 기산으로 퇴각하였다. 이를 추격한 사마의는 노성에서 촉한군과 충돌했다. 여기까지는 『진서』와 『한진춘추』에서 동일하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또한 『삼국지』 왕평전에서 왕평이 장합을 격파한 사실은 사마의가 촉한군과 교전한 시점에 해당하므로, 앞의 두 기록에서 모두 장합이 당시에 사마의를 따라 종군했던 것으로 기술한 점을 감안하면 노성 전투 무렵에 있던 일로 해석된다.

『한진춘추』에서는 제갈량을 뒤이어 노성에 도착한 사마의는 인근의 산에 영채를 세워서 촉한군과의 대치를 이어갔으나, 가허(賈栩)와 위평(魏平) 등에게 비판을 받고 이윽고 모든 장수가 교전을 청하자, 5월 10일에 공세에 나섰다. 사마의는 장합을 영채 남부를 포위하고 있던 왕평에게 보냈고 자신은 큰길[中道]을 따라 제갈량에게 향했으나, 제갈량이 위연·고상·오반 등을 보내 사마의를 격파했고, 사마의는 돌아가 영채를 지켰다고 나온다. 특히 해당 대목이 『삼국지』 왕평전의 기록과 겹치는 점에서 왕평이 장합을 격파한 사건도 노성 전투 당시로 이해되는데, 이는 『화양국지』에서도 사마의와 장합의 교전을 동시의 사건으로 기재한 것으로도 확인된다.

『진서』에서는 사마의가 한양에서 퇴각한 제갈량을 추격하여 기산까지 이르렀는데, 이후 제갈량이 노성에 주둔하면서 사마의와 교전했으나, 사마의가 이를 무너뜨리자 제갈량은 달아났고, 이에 촉한군을 추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병력이 만(萬)에 헤아렸다고 나온다.

3.4. 촉한군 철수

『화양국지』에 따르면 익주 지방에서 5월부터 큰비가 내렸기에, 한중에 주둔하며 군량 수송을 총괄하던 이평(이엄)이 제갈량에게 철수를 권유했고, 6월에 제갈량이 이를 받아들여 철수가 결정되었다. 이러한 기록은 『삼국지』 후주전이나 이엄전 등과 모순되지 않는다. 『화양국지』에는 같은 시기 위군의 군량도 다했다고 전하나, 『삼국지』 곽회전에 따르면 그 문제를 곽회가 해결했다고 하므로 당시 위군은 군량을 확보한 것으로 판단된다.

제갈량이 철수를 결정하여 기산으로 물러나자, 장합이 제갈량을 추격하기 위해 출진했다. 『위략』에서는 추격을 반대하는 장합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마의가 장합을 보낸 것으로 나와 있다. 여기서 '추격[追]'이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어서 간과되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데, 『삼국지』 장합전에 따르면 이 시점에 제갈량은 기산으로 돌아와[還] 이를 수비[保]하고 있었다. 즉, 퇴각하고 있던 도중 장합에 쫓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산으로 후퇴한 뒤 철수를 준비하고 있던 것으로 해석된다. 장합 부대가 목문(木門)에 이르렀을 때 교전이 발생하여 장합은 다리에 화살을 맞고 그 부상으로 전사했다.[9]

『한진춘추』에선 5월 10일의 노성 전투 이후에 관한 기록이 없는데, 배송지가 그 이후의 내용이 『삼국지』의 다른 본문들과 겹친다고 판단해 인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진서』에서는 노성에서의 패전으로 제갈량이 철수한 것으로 전개된 만큼, 해당 결과에 따르자면 노성 전투가 6월 무렵에 치러진 것으로 보아야 다른 기록에서 제갈량이 철수를 결심한 시점과 일치되고, 장합의 전사는 노성 전투보다 약간 뒤에 이뤄진 것으로 이어진다. 이에 따라 장합과 왕평의 교전은 노성 전투와 동시였거나 그 이전에 치러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제갈량이 철수하는 동안 이엄은 군량 운송이 원활하지 않았던 일로 책임을 지게될 것을 두려워하여 제갈량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권유를 받아들인 제갈량에겐 돌연히 군량미가 아직 충분하다고 입장을 바꾸고, 황제인 유선에겐 제갈량이 유인책을 구사하고자 퇴각하는 것이라 허위보고를 했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군량 수송 담당인 독운령 잠술을 책임자로 몰아 죽이려는 시도도 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대목에 일부 각색이 들어가, 이엄이 군량을 마련하지 못했기에 제갈량이 회군하도록 만들고자 제갈량에겐 오나라가 위나라와 화친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는 허위보고를 올리는 대목이 추가되었다. 이엄이 허위보고를 한 원인이 군량을 마련하지 못했다거나 직무 태만에 의한 것에 있다는 것은 후대에 창작된 매체에서 등장하는 설정으로 역사 기록들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3.5. 결말

제갈량의 철수가 확인되자, 7월 6일에 위나라에서는 논공행상을 벌여, 공을 세운 자들의 작위를 높여주고 봉읍을 늘려주었다.

8월 제갈량이 한중에 도착하였고, 그동안 이엄과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모두 공개하였기에 이엄이 허위보고를 한 사실 등이 드러났다. 제갈량이 이엄을 탄핵하여, 이엄은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자동군으로 유배되었다.

3년 뒤인 234년에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기존처럼 기산을 통해 농우 지방을 공략했던 것이 아니라, 잔도가 놓인 포야도(襃斜道)를 통해 부풍군 무공현(武功縣) 일대로 진입하여 관중 지방을 공략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오장원 전투 문서 참조.

4. 사료 비판

4.1. 진서 비판

그런데 이들 사료는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삼국지』는 진나라 사람의 저술이고, 『진서』역시 진나라 사람의 사료에 근거해 쓰였기 때문이다.
여사면 교수 『삼국지를 읽다』

역사 연구는 객관적인 연구 방법론을 형성하기 어려워 이를 표준화할 수도 없어서, 연구자 개인의 주관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여 논리적인 정합성을 확보하기 위해, 역사 연구자들은 여러 형태의 자료를 수집하고 각각의 정보 가치를 평가하는데, 이를 사료 비판이라고 한다. 사료 비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연구자 개인의 주관에 따른 자료의 취사선택으로 발생하는 해석의 내적 모순을 방지하는 것에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 기록물을 '사료'로 부르기도 하기에 사료 비판이 '서적'을 기준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전근대 왕조들이 공인하거나 직접 편찬한 이십사사는 이미 국가적 공인을 받은 정사(正史)이기에 그 내용적 신빙성이 보장된다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일례로 『사기』에 기록된 상나라 군주의 계보가 실제 발굴된 갑골문 자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여 사기의 기록을 무조건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호평은 그저 전한 시대에 편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00년도 넘는 과거의 일들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사기』에선 진나라가 통일 이후 36군(郡)을 편성했다고 기록하였으나 현재 발굴된 간독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통일 시점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진나라의 군은 36개를 상회한다는 점이 밝혀졌기에, 근래 연구자들은 『사기』의 해당 기록이 잘못된 정보라 판단하지 간독 자료를 분석한 결과가 오류라고 정정하지는 않는다. 즉, 정사로 공인된 사서라고 하여 그 정보들을 무작정 신봉하는 것이 아니며, 해당 사서의 정확성이 입증된 사례가 발굴되었다고 하여 그 사서의 모든 내용이 정확하다고 여겨지지도 않는 것이다.

정사로 공인된 서적들이 가지는 사료적 가치는 역대 왕조들에서 직접 관리를 받아온 서적들이라는 점에서 그 서지학적 연원이 분명하고, 다른 여러 문헌과 달리 내용이 유실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학자의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 되어 왔기에 표준적인 교감(校勘)까지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는 것이다. 특히 이십사사가 오늘날까지 많은 동양사 연구자들이 보편적으로 인용하는 문헌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여러 사건이 해당 인물별로 시기순으로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거나 주제별로 요약된 정보를 제공하는 기전체 사서가 갖는 가장 큰 장점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 내용이 정확하다는 이유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삼국지』 후주전·제갈량전·이엄전과 『화양국지』는 모두 촉한군이 군량 부족으로 철수를 결정한 것으로 나오고, 『한진춘추』에는 노성 전투에서 촉한군이 사마의를 패퇴시킨 것으로 나와 있으며, 『진서』 선제기는 단순히 사마의가 노성에 주둔하던 제갈량을 격파하여 촉한군이 패퇴한 것으로 나온다. 이 가운데 『한진춘추』와 『진서』가 충돌하는 부분이 매우 두드러지며, 두 기록 중 어느 기록을 채택하냐에 따라 이 사건에 연관된 다른 기록을 해석하는 방향이 달라진다.

『자치통감』을 비롯한 전통적인 견해들은 보통 『한진춘추』의 기록을 선택해 왔고,[10] 현대 역사학자들도 앞서 『한진춘추』가 『진서』에 비해 시기적으로 이른 기록임을 참작하여 『한진춘추』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11] 한편 한·중·일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활동하는 일부 아마추어 연구자들은 『진서』가 정사(正史)에 포함되는 점에 중점을 두어 이를 적극적으로 신뢰하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충돌하고 있는 정보들을 사료 비판 과정을 통하여 그 신빙성을 냉정히 평가하기보다는, 이른바 '부참만계(俘斬萬計)' 전과를 긍정하려는 목적으로 『진서』에 관한 종래의 비평을 비판하면서, 『진서』에서 미비한 점은 필요에 따라 『한진춘추』를 인용해 이를 토대로 다른 기록들과 교차점을 찾는 편의적 취사선택 경향이 돋보인다.

본 문서에서 쟁점이 되는 노성 전투에서 『진서』와 『한진춘추』가 충돌하고 있는 대목들에 관한 사료 비판의 목적은 서로 충돌되는 정보들 가운데에 어느 정보를 허위로 판정하여 버릴 것인지를 가리는 것에 있지, 단순히 해당 사서에 대한 종래의 비평을 검토한다거나 어떠한 서술 방식에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서에 유사한 사례가 있으므로 괜찮다는 식으로 두둔하는 것을 사료 비판이라 할 수는 없다. 또한 이러한 모호한 태도로 각각의 정보를 일부만 긍정하고 일부만 부정하는 방식으로 전반적인 해석을 재구성하는 것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럴듯한 해석으로 통할 수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서로 충돌하는 정보를 조합한 이상 그 내재적 모순까지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이런 편의적인 선택으로 구성된 해석이 갖는 가장 큰 약점은 그 결론을 토대로 다시 원래의 개별 기록에 그 해석을 적용하면 반드시 오류가 발생한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진춘추』는 231년을 기준으로 대략 100년 뒤쯤 동진습착치가 편찬한 서적으로 현전하지는 않으나, 비슷한 시기에 배송지가 『삼국지』 본문에서 생략된 정황들을 다른 기록을 통해 보충하기 위해 선택하여 인용한 부분 등이 남게 되어 그 일부 내용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반면 당태종 때 편찬된 『진서』는 『한진춘추』보다 시기적으로 약 300년 뒤에 형성된 것이다. 『진서』에서 『한진춘추』와 충돌하고 있는 대목들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진서』가 상대적으로 나중의 정보인 점에서, 근원적으로 이러한 정보가 습착치나 배송지 등이 활동하던 시기보다 더 이후에 발생한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당나라 『진서』의 모본이 된 장영서(415~488)의 『진서』가 『한진춘추』와 100년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나, 당나라의 『진서』와 장영서의 『진서』가 해당 대목에서 동일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으며, 애초에 이는 회의론자들의 근원적 의혹을 해명하는 논점도 아니다.[12]

『진서』의 해당 대목을 검토해 보면, 제시된 지명을 통해 의혹이 발견된다. 우선 기산(祁山)은 당시 촉한과의 국경 인근의 주요 교통 거점이며 상규(上邽)는 기산보다 북쪽에 있음에도, 제갈량은 기산을 함락했다는 언급도 없이 뜬금없이 상규에 출몰하여 보리를 수확한다. 그리고 한양(漢陽)에서 제갈량이 퇴각하자 사마의는 기산까지 제갈량을 추격했다고 하였으나, 그 직후 갑자기 기산과 상규 사이에 위치한 노성(鹵城)에서 촉한군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기산은 촉한군 본부의 주둔지로 쓰인 곳이며, 다른 기록들의 "기산을 포위했다[圍祁山]"는 표현은 기산(祁山)이 기산성(祁山城)을 의미하는지, 노성(鹵城)의 이칭인지, 서현(西縣) 일대를 가리키는 표현인지 불명확한 점에서, 실제로 "기산성에서 위나라의 군대를 포위했다"는 의미로만 읽히진 않는다.[13] 또한 한양은 천수군의 후한 때 이름인 한양군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그 당시에는 쓰이지 않던 지명이다.[14] 이런 점에서 기산을 실제 위군과 촉한군이 충돌하는 장소로 거론하고 있는 점과 제갈량이 상규와 한양에서 연달아 싸우지도 않고 퇴각했다는 부분은 그 신빙성을 의심스럽게 하는데, 기산이나 한양 등이 거론된 사건을 인접한 사건과 동일한 사건으로 보고 해석하면 전개가 전반적으로 자연스러워지며, 『한진춘추』의 전개와 얼추 유사해지는 점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진서』가 편찬 당시에 참고한 여러 자료를 조합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진행 순서를 혼동하였거나 동일한 사건임에도 지명을 서로 달리 표현한 기록을 서로 다른 사건으로 오인해 기재했다는 점을 시사한다.[15]

『한진춘추』와 『진서』가 충돌하는 부분들을 대조해 보면, 『진서』의 독자적인 정보가 다른 기존의 사서와도 충돌하는 점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위서』에 따르면 당초 조예가 상규의 보리를 감시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으로 나와 있으나, 『진서』에는 해당 지침에 따르는 조치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위서』에는 당초 위나라에선 촉한군이 군량 부족으로 스스로 물러날 것으로 관측하는 여론이 대세였던 것으로 나오고, 『화양국지』에는 제갈량이 지구전에 빠지는 상황을 중책으로 평가하는 발언이 나오나 하책은 철수라고 한 점에서 사실상 지구전을 꺼린 발언으로 해석되는데, 제갈량이 일방적으로 교전을 회피하다가 노성에서 패퇴했다는 『진서』의 전개보다는 제갈량이 교전에 적극적이고 사마의가 소극적으로 나오는 『한진춘추』의 전개가 이런 정황들에 부합한다. 또한 『한진춘추』에서 『진서』와 충돌하고 있는 부분들을 배제하고, 제갈량의 철수 결심 시기와 장합이 전사한 것이 6월이라는 『삼국지』나 『화양국지』 등과 연결하면, 한양 퇴각→노성 전투→제갈량의 패주→장합의 전사라는 사건은 모두 6월 중 며칠간 연속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해석되나, 이렇게 보더라도 여전히 제갈량의 철수 결정이 군량 부족에 의한 것이라고 한 것과 충돌한다.

특히 『진서』의 결과대로 제갈량이 노성에서 큰 피해를 보고 패주하고 있다면, 철수 결정 소식을 들은 이엄이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고자 제갈량에게 책임을 전가할 이유가 없어지는 점에서, 해당 정황을 매끄럽게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럼에도 『진서』를 긍정하려는 해석들은 이엄이 원인 모를 뻘짓을 벌이다가 빌미를 잡혀 제갈량에게 패전의 책임을 독박 씌워졌고, 제갈량은 상당한 인명 피해를 보고도 이와 같은 상황을 악용하여 자신을 향한 책임론을 찍어 눌렀다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고 기록과도 모순되는 이상한 결론을 도출해 버린다. 결국 이러한 결론을 보강하고자, 부분적으로 『한진춘추』를 활용하여 노성 전투 시점을 5월로 잡고 '부참만계' 전과만 6월에 있었다는 편의적 해석으로 『진서』의 미비점을 보완하려 시도하면서도, 『진서』 이전에 성립된 모든 기록물은 촉(제갈량)에 우호적인 평가를 하기 위해 관련 사실들을 누락하거나 왜곡했다는 이율배반적인 음모론을 펴게 되며, 그 근거를 이처럼 이엄 탄핵을 악용했다는 등 자의적 해석의 결론으로 되돌리는 완벽한 논증에 이르게 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진서』의 노성 전투 기사는 그 자체적인 내용으로도 의혹점이 발견되고 있으며 『한진춘추』의 기사에 비하면 외적으로 다른 기록들과도 자연스럽게 합치되지 못하고 있다.[16] 이러한 비관적인 사료 비판론을 오류 없이 극복하기 위해서는 해당 기사의 내용적 의혹을 해소하고, 『한진춘추』를 배제하면서 이전 시기의 다른 기록들과 모순되지 않는 해석이 가능한 논거를 발굴해, 상대적으로 나중에 형성된 정보라는 한계점을 제대로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17]

4.2. 한진춘추 비판

習鑿齒之撰《漢晉春秋》,以魏為偽國者,此蓋定邪正之途,明順逆之理耳。

습착치는 한진춘추를 지음으로써, 위나라를 거짓된 나라(偽國)로 만들고,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은 것의 도(邪正之途)를 개정하고, 순응하고 거스르는 것의 이치(順逆之理)를 밝히려고 하였다.


而檀道鸞稱其當桓氏執政,故撰此書,欲以絕彼瞻烏,防茲逐鹿。

단도란[18]이 칭하길, 환씨[19]가 집정하자, 이 책(한진춘추)을 지어서, 그 첨오(瞻烏)를 끊고, 축록(逐鹿)이 무성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라 하였다.[20]
사통 권7 「탐색제27」

한진춘추가 어떤 책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한진춘추가 어떠한 배경에 위해서 지어졌는지 알아야 한다. 당시 동진은 어린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하며 황제권이 약화되었고, 군부의 실력자 환온의 세력이 대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온의 야심을 풍자할 의도로 지어진 서적이 바로 한진춘추로, 처음부터 순수한 학문적 의도가 아닌 정치적 의도가 들어가 있었고, 찬탈로 탄생한 위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이었다. 한진춘추의 저자 습착치는 또한 촉한정통론의 제창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신(臣) 송지(松之)가 생각하길 이와 같은 말의 부류들은 모두 전사(前史)에서는 실리지 않은 바인데, 오히려 습씨(習氏)에게서만 나온다. 또한 언법체계(制言法體)가 옛날과 같지 않으니 모두 습착치(習鑿齒)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권28 「왕릉전」 배송지주
건흥 3년(225), 제갈량이 남중(南中)을 정벌하러 갈 때, 마속이 수리나 와서 전송하였다. 제갈량이 말하길

“비록 함께 모의한 지 오래되었으나, 지금이라도 좋은 계책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오.”

라 하니, 마속이 대답하길

“남중은 그 멀고 험한 것은 믿고서 불복 한지 오래되어서, 오늘 격파하고 나며 내일 다시 반역할 것입니다. 지금 공께서 바야흐로 온 나라의 힘을 기울려 북벌을 하느라 강적을 맡고 계시니, 저들은 관리들의 형세가 안으로 텅 빌 것을 알고서, 그 반역함이 또한 신속한 것입니다. 만약 저 무리들을 다 없애 후환을 없애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진 자의 마음이 아니며, 또한 창졸간에 할 수도 없습니다. 무릇 용병(用兵)의 도(道)에는 마음을 공격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고 성을 공격하는 것을 하책으로 삼으며, 마음으로 싸우는 것을 상책으로 치고 병사로 싸우는 것을 하책으로 여기니, 원컨대 공께서는 저들의 마음을 복종시키십시오.”

라 했다. 제갈량이 그 계책을 받아들여, 맹획(孟獲)을 사면하고 남방을 복종시켰다. 그래서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남방은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권39 「마속전」 배송지주 양양기

의도야 내놓은 결과물이 좋았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배송지가 이전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한진춘추에만 나오며 언법 체계가 옛날과 같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한 바가 있다. 또한 습착치의 또다른 저서인 양양기에는 제갈량 생전에 다시는 남방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나오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제갈량의 조치는 그의 의도대로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이상에 치우쳤다. 남중의 이민족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주둔군의 지휘관들을 죽였다. 이때 내강도독 이회가 반란을 토벌하고 우두머리들을 성도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리고 복과 유 등 이민족들로부터 농사용 소와 전투용 말, 금, 은, 물소 뿔, 가죽들을 징수해 군자금으로 충당했다. 이러한 착취 때문인지 몰라도 이후에도 남중의 여러 군에서 반란이 발생했고 그때마다 내강도독에 임명된 마충과 장억 등이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했다. 제갈량의 관대한 조치는 결과적으로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최진열, 역사 삼국지, 2022, 854p

이미 제갈량 생전에 수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는 삼국지와 화양국지에도 잘 나와있다. 그의 성향을 생각해본다면 촉의 치부를 감춘 이 서술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며, 지금은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저서의 편린에서조차도 그의 노골적인 기조가 돋보인다. 한진춘추와 대치되는 진서가 관찬사서로 다수의 사관이 편찬에 참여해 특정 방향으로 서술이 치우치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할 때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다.

지금까지의 정보로 짐작해보건데 그렇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설령 습착치 본인이 최대한 공정성을 위해 노력했더라도 넘을 수 없는 시공간적 한계 또한 존재한다. 동진은 서진 말기 유목민 반란군에게 화북을 상실한 잔류국으로, 위의 영토 대부분은 당시 화북을 장악하고 있던 오호십육국 정권의 치하에 있었고, 환온의 군부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 계기 또한 이들과의 전쟁에서 몇몇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의 황제 2마저 빠져나가지 못하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한낱 사료가 무사히 강남으로 넘어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자연히 적국의 영토에 존재하였던 위의 기록보다 자국 영토 내에 있었던 촉이나 오의 기록의 접근이 쉽고, 또 많이 반영되는 이른바 생존 편향의 문제에서 한진춘추를 포함한 모든 동진, 남조계열 사서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而藏書之盛,莫盛於開元,其著錄者,五萬三千九百一十五卷,而唐之學者自為之書者,又二萬八千四百六十九卷。

장서(藏書)의 왕성함이, 개원 연간에 드넓었는데, 그 저록(著錄)이 5만 3915권, 당의 학자들이 직접 쓴 것이 또 2만 8469권이었다.
貞觀中,魏徵、虞世南、顏師古繼為祕書監,請購天下書,選五品以上子孫工書者為書手,繕寫藏于內庫,以宮人掌之。

정관 연간 중, 위징, 우세남, 안사고가 잇달아 비서감이 되어 천하의 책들을 모으길 청하니, 5품 이상의 자손으로 글에 능한 자들을 선발해 서수(書手)로 삼아, [수집된 서적들을] 선사(繕寫)해 내고(內庫)에 보관하고, 궁인들이 이를 관장했다.
黃巢之亂,存者蓋尠。昭宗播遷,京城制置使孫惟晟斂書本軍,寓教坊於祕閣,有詔還其書,命監察御史韋昌範等諸道求購,及徙洛陽,蕩然無遺矣。

황소의 난으로 남아있는 것이 드믈어졌다. 소종이 파천하자, 경성제치사 손유성이 서책을 본군(本軍)에 모아 놓았고, 교방(敎坊)을 비각에 잠시 맡겼다. 책들을 돌려보내라는 조서가 내려지고, 감찰어사 위창범 등에게 여러 도(道)에서 구입할 것을 명했으나, 낙양으로 옮겨질 즈음엔 대부분 사라져 남지 않았다.
신당서 권57 예문지1

반면 진서는 수백년의 분열기를 끝내고 천하가 통일된 후 전국의 서적을 수도로 모았던 당 시절의 관찬사서로, 이러한 생존 편향의 문제에서 자유롭다. 진서와 개원점경 등등 강남의 사서와 다른 내용의 서적들의 등장시기 또한 이 때로, 위나 사마의와 별 관련도 없는 당 시절에 갑작스럽게 이들에 유리한 자료의 조작이 행해진 것인지, 아니면 수백년의 분열기가 끝나고 천하가 안정되면서 그간 수면에 잠들어 있던 위 측의 기록들이 역사에 재등장하게 된 것인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한진춘추의 옹호자들은 진서의 편찬 시기를 문제삼으면서 시간적 요소는 고려하지만 정작 강남에 한정지어진 한진춘추의 공간적 요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또한 시간적 요소를 고려하면서도 정작 진서보다 후대에 편찬된 자치통감 등으로 한진춘추의 신뢰도를 보증하려는 이중잣대를 보이기도 하는데, 당 말에 황소의 난과 뒤이은 절도사 간의 항쟁으로 당이 자랑하던 양질의 사료들이 대부분 소실되었기에 그 이후의 사서들은 진서 편찬에 사용된 자료들에 대해 접근하기 어려워졌다. 정리하자면 중원이 통일되면서 위촉오 삼국의 자료를 균형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589년부터 본다면, 진서의 편찬 시기는 결코 뒤떨어지지 않고 매우 빠른 편이다.
자치통감의 이번 전역(4차북벌)의 정보는 습착치[양양기 역시 서술하였다.]의 한진춘추에서 인용되었다. 습착치는 잘못에 철면피적인(unapologetic) 촉의 지지자이자 유비의 국가를 한의 적통이라 첫번째로 지지한 사람이다. 이는 그가 유비의 국가를 촉이 아닌 한으로 언급했다는 사실로 지지된다. 습착치는 극도로 유비세력에 편향적으로(extremely biased in favor of the Liu) 유명하며, 보통 말하는, 한진춘추의 어떠한 정보도 반드시 격렬한 회의적시각으로 보아야한다. (must be regarded with severe skepticism) 그리고 전반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고려되어야 한다.(should be considered generally unreliable)
Achilles Fang's notes [Taihe 5 and 8]

한진춘추에 대한 Achilles Fang 교수의 논평을 끝으로 전투 외적인 비판을 마치고, 전투 내적인 비판을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설령 진서가 틀렸다고 해서 한진춘추가 맞다고 할 수는 없으며, 그 역 또한 성립한다. 노성전투를 다룬 가장 이른 시점의 사서인 진수의 삼국지에는 노성 전투의 승패는커녕 존재 유무조차도 확인되지 않는다. 어쩌면 진실은 진실을 둘러싼 수많은 논쟁보다 사소할지도 모른다.

5. 평가

『한진춘추』에 따라 231년 5월에 촉한군이 노성 인근에서 사마의를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고 해석하더라도, 노성 전투 이후로 양측의 행보를 기술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기에 해당 전투가 단순한 충돌에 불과한 사건이었는지 농우 지방 전반에 영향을 미치던 대규모 회전이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일각에서는 노성 전투의 승리가 제갈량의 북벌 최대 성과라고 칭송하며, 그 결과 농우 지방이나 옹·양 2주에서 위나라의 통치체계가 붕괴했다는 식으로 확대해석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는 당시 촉한군의 활동은 기산–노성–상규에 국한되는 만큼, 농우 지방에서조차 228년 당시처럼 촉한군에 호응하는 반응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촉한은 무도군을 확보하고 목우를 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양국지』에 따르면 초기부터 군량 운송이 원활하지 못했고 5월 무렵부터는 장마로 인해 간혹 보급선이 단절되는 상황도 겪게 되었으며, 본질적으로 이 문제가 제갈량이 철수를 결정하는 원인이 되었다. 군량 부족 사태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처럼 이엄이 군량 공급에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 아니었으며, 이엄 또한 직무 태만에 의해 탄핵을 당한 것이 아니라 책임을 면하기 위해 허위보고를 한 점과 그 이전부터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했던 정치적 행보가 탄핵의 근거가 되었다. 노성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엄의 직무 태만 때문에 제갈량이 억울하게 철수했다거나, 제갈량이 노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이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정치질로 이엄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워 정치적인 위기를 벗어낫다는 주장 모두 근거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228년에 조운의 별동대를 잔도로 보내 조진의 본대를 관중 인근에 묶어뒀던 점과 대비하여 231년에는 선비의 가비능을 동원하여 옹·양주 지역의 전력 분산을 의도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위나라에선 촉한과 접경하지 않는 지역인 병주의 병력으로 가비능에 대응했기에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한 결과들을 놓고 본다면, 231년 당시 촉한은 위나라보다 열세인 국력 차이를 극복하여 농우 지방을 경략하기 위한 전략적 역량을 확보하지 못했음이 드러난다. 촉한에서도 이러한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한 것인지, 이후 234년에 추진된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은 아예 농우 지방을 경략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완전히 포기하여, 관중 지방에서 장기간 주둔하여 직접 농경하며 식량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이를 주목해 보면 당시 촉한 내부에서 이엄이 실각한 것 외에 어떠한 인사 조치도 치러지지 않았던 점도 해명되는데, 전략적 방향을 수정하기 위해 북벌을 중단하고 나름 성공적인 철수를 이뤄낸 만큼 촉한 내부에선 완전한 실패로 여기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곧바로 이를 만회하기 위한 차기 북벌 준비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위나라 군대가 장합의 추격 실패와 같은 일부 오점을 남겼으나, 본질적으로 촉한군의 작전 범위를 농우 지방 전체가 아니라 기산과 상규현 사이로 국한하는 데 성공한 점을 감안하면, 231년 농우 전역에선 위나라가 전략적인 완승을 거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합당하다. 해당 전역은 당초 위나라에서 지배적으로 관측하던 대로 촉한군이 군량 부족으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으로 종결되었고, 결과적으로 사마의는 제갈량이 꺼린 지구전을 성공시켰다. 당시 위나라 내부에서도 이러한 성과를 높게 평가하였는지, 논공행상이 치러져 전공을 세운 사람들의 작위나 관직이 올려졌다.

5.1. 제갈량에 대한 평가

231년 전역의 결과를 두고, 창작물의 설정에 영향을 받은 '이엄책임론'으로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에 문제가 없었다고 두둔하거나 제갈량의 군사적 무능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른바 '부참만계'를 긍정하는 노력이 대립하여 그를 중점으로 소모적인 논쟁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점이다.

노성 전투의 결과를 어찌 해석하든, 삼국시대 당시부터 제갈량의 전술 능력이 높이 평가되었던 점이나 팔진도를 창안하여 남북조시대의 전술에 영향을 미친 군사적 업적은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또한 제갈량이 융중대를 기안하고 남중 정벌 등을 성공시킨 점이나 촉한의 국정 전반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온 점에서 그 전략적인 식견이 있음은 분명 높게 평가할 수는 있으나, 228년 가정 전투 패전으로 인한 실패와 231년 전역의 진행 과정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북벌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군사전략 과제를 선정하고 현실적인 국력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기책을 마련하는 데는 명백하게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전술적 평판에 비해 전략 단계에서의 군사적 안목은 부족했다고 평가된다.

전략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 있지 않던 현대 이전의 관점으로는 제갈량이 천운이 따르지 않았다는 평가가 다수 존재하나[21]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명쾌하게 콕 집어낼 수는 없어도 제갈량에게 어딘가 부족한 점이 느껴지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수가 제갈량에겐 '기모(奇謀)'가 부족했다고 평가한 점은 굉장히 날카로운 지적으로 보인다.

물론 열악한 상황이라는 점을 결코 무시하지 못한다. 파촉만 보유한 세력이 관중을 완전히 점령한 경우는 유방 이외에는 없다.

최진열 교수는 4차 북벌에서 촉군이 선전했다고 평가했다. 최진열은 곽회가 강족에게 식량을 징발했지만 여전히 군량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이엄이 근무태만을 하지 않았으면 승패를 예측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화양국지의 기록을 보면 촉군의 퇴각 시점에서 위군의 군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서술이 있다. 결국 곽회의 식량 조달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6. 역사학자들의 판정

  • 최진열 교수는[22] 자신의 저서 역사 삼국지에서 저자인 한진춘추의 기록대로 승리했다고 주장했으며 진서의 기록은 무시했다.#
  • 리둥팡 교수도 진서의 기록을 신용하지 않고 한진춘추의 기록을 신용했다.
  • 여명협은[23] 진서의 기록을 신용하지 않고 한진춘추의 기록을 신용했다.
  • 허쯔취안은 자신의 저서인 위촉오 삼국사에서 진서의 기록을 무시하고 한진춘추의 기록을 서술했다.
  • 방북진도 자신의 저서에서 노성 전투가 제갈량의 승리라고 기록했다.
  • 존 킬리그루 또한 진서의 기록을 신용하지 않고 한진춘추의 기록을 신용했다.#[24]

노성 전투에 한정하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진서를 신용하지 못하고 한진춘추가 신용받는 경우가 다수에 해당한다. 오히려 반대의 숫자가 소수에 해당한다.

7. 여담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북벌을 '육출기산(六出祁山)'으로 일컬었으나, 실제 역사에서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한 것은 228년과 231년 단 2번이었다.이출기산

231년 전역에서 위나라 측 천수태수나 광위태수의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들이 촉한군을 요격하는데 동원되지 않고 임지를 지킨 것으로 가정해 보면, 당시 촉한군의 활동이 농우 지방 전역이 아니라 기산–노성–상규에 국한된 점, 제갈량이 교전 없이 상규에서 노성으로 후퇴한 점, 이후 촉한이 두 번 다시 기산 방면의 출병을 하지 않은 점 등의 원인이 파악된다. 과거 조조한중 공방전 직후 유비의 북상을 막고자 단순히 무도군과 음평군을 폐지해 무인지대로 만들었으나, 무도군과 음평군은 결국 촉한의 영역이 되어 멸망할 때까지 위나라의 농우 지방을 위협하는 전진 기지로 활용되어 버린다. 이 사례와 비교하면 조예가정 전투 직후 광위군을 신설한 것은 손해는 적으면서도 촉한의 기산 출병을 저지하는 높은 성과를 거둔 매우 적절한 조치로 평가된다.

한자 '圍'자는 해석이 곤란한 글자 중 하나인데, 해당 글자가 "방어 구조물이 둘린(圍) 일종의 전초기지"를 가리키는 명사로 쓰일 때가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파생되어 '지키다'라는 동사로도 쓰인다. 강유가 258년에 국경지대에 설치한 7개의 위(圍)가 이러한 사례 중 하나로 당시 무도군 경계에 위치한 건위(建威)에도 위가 설치되었다. 『삼국지』 왕평전과 『화양국지』 및 『한진춘추』에 쓰인 '남위(南圍)'도 본 문서에서는 "남쪽을 포위하고"로 해석하고 있으나 이는 "圍南"일 때 정확한 번역이고, 왕평전의 해당 문장에선 동사로 '지키다(守)'가 쓰인 점으로 보아 이런 시설로 볼 여지가 있다. 『한진춘추』의 전개에 따를 경우 아마도 제갈량의 본대(북군)가 상규현으로 향했을 당시 기산–노성 일대에 남겨둔 분대(남군)의 본영을 가리키던 표현이 아닌가 짐작된다. 다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어 그 점을 명확하게 밝히긴 어려운 만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뜻인 '포위하다'로 해석한 기존의 서술을 유지한다. 참고로 호삼성(胡三省)은 『통감음주(通鑑音注)』에서 해당 대목을 "촉 병사들이 기산을 포위한 남쪽 둔영을 말한다.(蜀兵圍祁山之南屯)"라고 풀이했는데, 이는 『진서』 선제기의 내용에 따른 풀이로 판단된다.

7.1. 곽충오사

배송지가 『삼국지』 제갈량전에 인용한 『촉기』에는 서진 초기에 부풍왕(扶風王) 사마준(司馬駿)의 주관으로 제갈량을 평가하는 토론이 있던 중, 금성군 출신 곽충(郭沖)이 5가지 사례를 들어 제갈량에 관한 비판을 잠재웠다는 일화가 기재되어 있다. 그중 다섯 번째 사례[郭沖五事]가 231년 전역에 해당하는데 아래와 같다.
조예가 친히 촉을 정벌하고자 장안에 행차하고, 사마의를 보내 장합과 제군(諸軍), 옹(雍)·량(涼)의 강병, 정병 30여 만을 이끌고 은밀히 진격해 검각(劍閣)으로 향하게 했다. 제갈량은 이때 기산(祁山)에서 깃발과 날카로운 병기로 험요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10분의 2를 교대해 내려보내려 하고 남은 군사가 8만이었다.

위군(魏軍)이 처음 진을 펼쳤을 때 깃발과 군사가 때마침 교체되자, 참모들은 모두 적군이 강성하여 역량으로 능히 제압하지 못하니 의당 임기응변으로 군사를 내려보내는 것을 한 달 동안 멈추어 성세(聲勢)를 아울러야 한다고 했다. 이에 제갈량이 말했다.

"내가 군을 통수하고 용병한 이래 큰 신의를 근본으로 삼았고, ‘원성(原城)을 얻고 신의를 잃는 것’(得原失信)[25]은 옛사람도 꺼렸던 일이오. 떠날 자들이 행장을 꾸리고 기일을 기다리며, 그 처자들은 학수고대하고 날짜만 헤아리는데, 비록 정벌에 임해 어려움이 있다 해도 의(義)를 폐할 수는 없소."

그러고는 모두 조속히 보내주도록 영을 내렸다. 이에 떠날 자들은 감격하여 남아서 일전을 치를 것을 원하고, 남을 자들은 분격하여 죽기로 싸울 것을 다짐했다. 그들이 서로 말했다.

"제갈공의 은혜는 죽음으로도 다 갚을 수 없다."

싸우는 날에 이르자 칼을 뽑고 선두에 서지 않는 이가 없었고, 일당십(一當十)으로 싸워 장합을 죽이고 사마의를 물리쳤다. 한번 싸움으로 대승을 거두니 이는 제갈량의 신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배송지는 이 일화를 인용하면서도, 조예가 228년에는 장안에 왔었으나 이 해(231년)에는 오지 않았었고, 제갈량의 대군이 관롱(關隴)에 있는데 위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기산에 있는 제갈량을 뛰어넘어 곧바로 검각으로 향할 수 있단 말이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또 제갈량이 전장에 머문 뒤로 본래 오래도록 주둔하는 법은 없었으니 병사를 쉬게 하려고 촉으로 돌려보냈다는 건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손성습착치 등의 저술이 당시의 기록 중에 빠뜨린 경우가 적음에도 곽충에 대한 일은 기재하지 않은 점을 거론하여, 『촉기』의 해당 기록은 잘못된 정보라 판정했다.

참고로 배송지는 곽충삼사(郭沖三事)[26]를 인용하면서, 해당 일화의 배경 자체가 실재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곽충이 상급자인 사마준을 상대로 발언하는 상황에 사마준의 아버지인 사마의가 조롱당한 일을 어떻게 대놓고 말할 수 있겠냐면서, 『촉기』가 허황된 일화를 기록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7.2. 위연의 승진?

230년에 위연은 전군사 정서대장군 가절(假節)로 승진하였는데, 231년 노성 전투 이후에 이엄을 탄핵하는 상소문에서는 자신의 직함을 사지절(使持節)로 표기하였다.

남북조시대 이후의 관제에는 사지절이 가절보다 높은 권한을 표현하는 등급 명칭으로 쓰였기에, 이를 두고 위연이 노성 전투에서 세운 전공을 인정받아 승진하였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송서』 백관지에서 사지절–지절–가절이 분화되고 서열 및 권한의 차등을 규정한 것은 진나라 때라고 설명하고 있기에, 그 이전에도 이와 같은 구분이 있던 것으로 소급하긴 어렵다. 아래를 살펴보자.
(선주가 제위에 오르고)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錄尙書事), 가절(假節)로 삼았다. 장비가 죽은 후 사례교위를 겸하게 했다.
「제갈량전」
때는 장무 원년(221년) 5월 신사일, 황제가 말하노라. 태자 유선(劉禪)아, 짐은 한(漢)의 천운이 간난에 처하고 적신(賊臣)이 찬도(簒盜)해 사직에 주인이 없을 때를 만나, 격인군정(格人群正: 천도를 아는 이와 뭇 바른 이들)들이 밝은 천명으로 받들어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제 유선을 황태자로 삼으니 종묘를 잇고 사직을 엄숙히 공경하라. 사지절(使持節) 승상(丞相) 제갈량을 시켜 인수를 주게 한다. 사부(師傅)의 말을 경청하고, 한가지 일을 행하여 세가지 선을 모두 얻도록 하라.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후주전」
유비가 제위에 올라 제갈량을 승상으로 임명한 것이 221년 4월이고, 유선을 태자로 책봉한 것이 같은 해 5월이었다. 이 사이에 제갈량이 승진을 할 만한 어떤 공적을 세웠다거나 승진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후한-조위에서는 어떨까?
相國安樂鄕侯臣歆
상국 안락향후 신 흠

太尉都亭侯臣詡
태위 도정후 신 후

御史大夫安陵亭侯臣朗
어사대부 안릉정후 신 랑

使持節行都督督軍車騎將軍□□臣仁
사지절 행도독독군 거기장군□□ 신 인

輔國將軍清苑鄕侯臣若
보국장군 청관향후 신 약

虎牙將軍南昌亭侯臣輔
호아장군 남창정후 신 보

輕車將軍都亭侯臣忠
경거장군 도정후 신 충

冠軍將軍好畤鄕侯臣秋
관군장군 호치향후 신 추

渡遼將軍都亭侯臣柔
도요장군 도정후 신 유

衛將軍國明亭侯臣洪
위장군 국명정후 신 홍

使持節行都督督軍鎮西將軍東鄕侯臣眞
사지절 행도독독군 진서장군 동향후 신 진

使持節行都督督軍領楊州刺史征東將軍安陽鄕侯臣休
사지절 행도독독군 영양주자사 정동장군 안양향후 신 휴

使持節行都督督軍征南將軍平陵亭侯臣尙
사지절 행도독독군 정남장군 평릉정후 신 상

使持節行都督督軍徐州刺史鎮東將軍武安鄕侯臣霸
사지절 행도독독군 서주자사 진동장군 무안향후 신 패

使持節左將軍中鄕侯臣郃
사지절 좌장군 중향후 신 합

使持節右將軍建鄕侯臣晃
사지절 우장군 건향후 신 황

使持節前將軍都鄕侯臣遼
사지절 전장군 도향후 신 료

使持節後將軍華鄕侯臣靈
사지절 후장군 화향후 신 령
「위공경상존호주」 中
復以仁行征南將軍,假節,屯樊,鎮荆州。侯音以宛叛,略傍縣眾數千人,仁率諸軍攻破音,斬其首,還屯樊,卽拜征南將軍。關羽攻樊,時漢水暴溢,于禁等七軍皆沒,禁降羽。仁人馬數千人守城,城不沒者數板。羽乘船临城,圍數重,外內斷絶,糧食欲盡,救兵不至。仁激厲將士,示以必死,將士感之皆無二。徐晃救至,水亦稍减,晃從外擊羽,仁得潰圍出,羽退走。

仁少時不脩行检,及長爲將,嚴整奉法令,常置科於左右,案以從事。鄢陵侯彰北征烏丸,文帝在東宫,爲書戒彰曰:「爲將奉法,不當如征南邪!」及卽王位,拜仁車騎將軍,都督荆、揚、益州諸軍事,進封陳侯,增邑二千,幷前三千五百戶。
「조인전」
조인은 218년 무렵에 절을 받았고 조비가 즉위한 후에 거기장군 도독형양익주제군사가 되었다.
夏侯惇薨,以休爲鎮南將軍,假節都督諸軍事,車駕臨送,上乃下輿執手而別。孫權遣將屯歷陽,休到,擊破之,又別遣兵渡江,燒賊蕪湖營數千家。遷征東將軍,領揚州刺史,進封安陽鄕侯。帝征孫權,以休爲征東大將軍,假黄鉞,督張遼等及諸州郡二十餘軍,擊權大將呂範等於洞浦,破之。拜揚州牧明帝卽位,進封長平侯。
「조휴전」
조휴는 하후돈이 죽고 진남장군 가절도독제군사가 되었다가 정동장군 영 양주자사로 승진하고 조비의 1차 남정 때에 정동대장군 가황월이 되었다.
文帝卽王位,以眞爲鎮西將軍,假節都督雍、涼州諸軍事。錄前後功,進封東鄕侯。張進等反於酒泉,眞遣费曜討破之,斬進等。黃初三年還京都,以眞爲上軍大將軍,都督中外諸軍事,假節鉞
「조진전」
조진은 조비가 왕위에 오른 후 진서장군 가절도독옹량제군사가 되었고 222년에 상군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 가절월이 되었다.
太祖崩於洛陽,尙持節,奉梓宮還鄴。幷錄前功,封平陵亭侯,拜散騎常侍,遷中領軍。文帝踐阼,更封平陵鄕侯,遷征南將軍,領荊州刺史,假節都督南方諸軍事
「하후상전」
하후상은 조조가 죽었을 때 절을 지니고 업으로 돌아왔고, 조비가 황제가 된 후에 정남장군 영 형주자사 가절도독남방제군사가 되었다.
太祖善之,拜揚威將軍,假節。後權乞降,太祖還,留霸與夏侯惇等屯居巢。

文帝卽王位,遷鎮東將軍,進爵武安鄕侯,都督青州諸軍事。及踐阼,進封開陽侯,徙封良成侯。與曹休討吳賊,破呂範於洞浦,徵為執金吾,位特進。
「장패전」
장패는 217년 유수구 전투 당시 절을 받았고 조비가 왕위에 오른 후 진동장군 도독청주제군사가 되었으며 조비의 1차 남정 이후 집금오가 되었다.

또한 장료는 진란, 매성의 난을 토벌한 직후, 서황과 장합은 한중 공방전 중에 절을 받았다(假節).

정리하자면, 하후상은 조비한테 황제가 되라고 건의할 땐 사지절이라고 하다가 이후에 가절이 되었고, 조인·조휴·조진·장패·장합·서황, 장료는 가절임에도 상소문에는 사지절이라고 나온다. 제갈량도 가절임에도 유선 태자 책봉문에는 사지절로 나온다. 모든 걸 종합해 보면, 한나라 때는 가절·사지절 등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연이 이엄 탄핵문에 사지절로 나오는 것은 가절과 사지절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지, 기록에도 없는 승진의 증거라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1] 한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 『한서』경포전에 의하면, 경포는 반란을 일으키고 형(荊)을 공격하자, 형왕 유고(劉賈)가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유고를 격파한 경포는 회수(淮水)를 건너 초(楚)를 공격했다. 초는 병사를 동원해 3군(軍)으로 나눠 경포를 상대했는데, 경포가 그 중 1군을 공격해 격파하자 나머지 2군 역시 패주했다. 참고로 형, 초 두 나라는 모두 본래 초왕(楚王) 한신(韓信)의 봉국이었는데, 한신을 회음후로 폐한 후 초국(楚國)을 둘로 나눠 회수 이남은 형왕(荊王) 유고(劉賈), 회수 이북은 초왕(楚王) 유교(劉交)의 봉국으로 삼았다.[2] 호삼성(胡三省)은 『통감음주(通鑑音注)』에서 "선왕이 이에 따르지 않고 고의로"로 해석했고, 『자치통감』을 번역한 권중달 교수도 이에 따랐다. 다만 문장 이해를 쉽게 하도록 현대적인 표현으로 고쳤다.[3] 장영서의 저서를 저본으로 한다는 평가는 당태종이나 방현령 등이 밝힌 편집지침에 따른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평가에서 나온 것이다.[4] 원문은 '都督雍梁二州諸軍事'로 표기하였는데, 양주(梁州)는 촉한 멸망 이후인 263년 12월에 등장하였기에 오기(誤記)이다. 전임자인 조진과 후임자인 조엄 모두 옹량(雍涼) 2주로 쓰인 점을 감안하면 '雍涼'으로 정정하는 것이 옳다.[5] 당시 대장군은 사마의, 즉 사마선왕이었다.[6] 가비능의 행동 시점은 정확히 기술되어 있지 않다. 『삼국지』 견초전에 견초가 가비능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이미 가비능은 전선에서 이탈했다고 전한다. 편의상 『삼국지』 제갈량전의 시점에 따라 2월에 호응하여, 『삼국지』 명제기의 시점에 따라 3월에 이탈한 것으로 본다.[7] 『한진춘추』에서 5월 신사일에 있다고 한 것에 근거하며, 당월 신사일은 음력 10일이다. 『진서』에 따를 경우 노성 전투는 6월 무렵으로 보이고, 장합과 왕평의 교전 시점은 불분명하다.[8] 『삼국지』 위연전에선 230년에 위연이 남정후로 승진한 이후로, 제갈량을 따라 출진할 때마다 번번이 군사 만 명을 청했다고 나오는데, 이후 제갈량의 북벌이 231년과 234년 두 차례에 이뤄졌음을 감안하면 231년부터 이와 같은 제안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갈량이 그 제안을 거부했으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9] 『삼국지』 장합전에선 오른쪽 무릎(右膝)에 화살이 맞은 것으로 기록했고, 『위략』에서는 높은 곳에 있던 복병이 궁노를 난사해 넓적다리(髀)를 맞춘 것으로 기록했다. 『삼국지』 신비전에는 배송지가 『위략』을 인용한 대목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추격 중 화살에 맞아 죽어 조예가 이를 탄식했다고 전한다. 『삼국지』 후주전과 『화양국지』에는 장합이 청봉(靑封)에서 전사했다고 전하는데, 동일한 사건임을 감안하면 이는 촉한에서 쓰인 목문의 이칭으로 보인다. 당나라 때 쓰여진 『한표(漢表)』에선 제갈량이 장합의 추격을 예상하여 청봉 목문에 있던 나무에 "장합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라고 적어두고 장합이 이를 확인하자 매복해 있던 천 개의 노를 동시에 발사했다고 나오나, 『삼국지』보다 오랜 시간 이후의 기록임을 감안하면 훗날 민간에 퍼진 소문이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라는 이야기는 『사기』 손자오기열전에 나오는 손빈과 방연의 일화와 거의 일치한다.[10]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하면서 수집한 자료 중에 고증이 필요했던 부분들을 별도로 정리한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를 함께 저술했는데, 아쉽게도 노성 전투와 관련하여 『한진춘추』의 기록을 신뢰한 이유는 서술되지 않았다. 물론 사마광이 『한진춘추』를 선택한 사실이 곧 『한진춘추』가 진실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며,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자치통감』이 가진 영향력과 해당 선택에 대한 비판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여, 단순히 전통적인 견해를 대표한다는 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뿐이다.[11] 『한진춘추』가 정사(正史)가 아닌 점을 들어 이러한 경향을 평가절하하는 의견이 있으나, 앞서 언급했듯 역사학자들은 정사라는 이유로 내용의 진위를 판정하지 않는다. 특히 『한진춘추』의 해당 대목은 비록 진수가 작성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 배송지송문제의 명령을 받아 주석을 단 『삼국지』가 정본(正本)으로 유통되면서 사실상 『삼국지』를 구성하는 일부로 여겨져, 『삼국지』 본문과 동일한 수준으로 오랜 기간 학자들의 검토와 교감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런 점에서 역사학자들이 『한진춘추』가 정사의 본문이 아니라고 하여 평가를 낮춰 볼 이유가 없다. 애초에 이십사사 중 현전하는 『사기』는 저소손(褚少孫)이 자의적으로 보충한 판본이고, 『후한서』는 완성되지 못한 서적을 후대에 다른 서적의 일부와 합쳐 구성한 문헌이다. 해당 문헌들에 이러한 사연이 있다는 이유로 그 서지학적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12] 이전의 본 문서에선 당태종이 직접 쓴 선제기의 논찬을 인용하며 당태종이 선제기의 해당 부분을 검토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해당 논찬에서 231년 당시의 전공에 관한 비평은 없을뿐더러, 애초에 당태종이 검토했다는 사실이 장영서의 『진서』와 당나라의 『진서』가 동일하다고 보증해 주거나 해당 기록의 진위를 판정해 주는 것도 아니다.[13] 일례로 『한진춘추』를 따를 경우엔, 『삼국지』에는 기산으로 표기된 사건이 『한진춘추』에서는 노성에서 일어난 것으로 해석된다.[14] 흔히 알고있는 한수(漢水)는 당시 상규 남쪽에 흐르지 않았으나, 양수(漾水)라고도 불리는 서한수(西漢水)가 상규 남쪽에서 발원해 기산 남쪽을 지나가며, 계속 흘러가 마침내 장강에 합류한다. 전한 초 무도 인근에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한수(漢水) 본류로 흘러갔으나, 지진 이후 수로가 끊기며 한수와 별개의 강이 되었다. 수경주의 저자인 역도원은 한양(漢陽)이라는 명칭이 이 서한수의 북쪽에 위치하여 유래된 것이라 추측했다.[15] 231년 당시의 기록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참고로 『진서』 선제기에는 230년에 한중을 포위 공격할 당시 사마의가 위흥군 서성현(西城縣)에서 한수(漢水)를 거슬러 올라가 구인현(朐䏰縣)과 신풍현(新豊縣)을 함락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구인현은 파동군 소속이고 신풍현은 파동군 한풍현(漢豊縣)의 오기로 보인다. 이를 사실로 본다면 파동군 지역은 위흥군 서성현에서 한수를 따라가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지역이기에, 사마의는 한중을 포위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무시하고, 마땅한 교통로도 없는 험준한 산지를 넘어 파동군을 공격하는 돌출 행동을 벌여, 한중 포위를 무산시킨 것으로 해석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오류는 『진서』 선제기가 편찬되는 과정에서 수집한 정보들을 검토한 것이 미흡했음을 드러낸다.[16] 이 결론은 어디까지나 231년 농우 지방의 전역을 다루는 기록 중, 서로 충돌하는 점이 뚜렷한 『한진춘추』와 『진서』 선제기의 해당 대목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진서』 선제기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입장임과, 충돌하는 정보를 조합하는 것은 그저 모순을 유발할 수 밖에 없는 무의미한 해석이라는 지적임을 확실히 밝혀둔다. 앞서 언급하기도 했듯 사료 비판은 '서적'을 단위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 사례에서 상대적으로 『한진춘추』를 신뢰하는 선택을 하더라도, 그점을 이유로 『한진춘추』의 모든 기록에 신뢰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7] 이전의 본 문서에선 『개원점경(開元占經)』이 신빙성이 높은 천문 기록이라 평가하면서도, 해당 기록은 장합으로 추정되는 '부거기장군 서(舒)'라는 인물이 촉한군 5만 명 가운데 3만을 죽이고 1만 명의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임에도, 해당 전과는 사마의가 세웠고 『진서』가 전공을 축소해 기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해당 기사가 천체관측 기록이 아닌 단순히 찬자(撰者)가 그 해에 있던 일을 적어놓은 것에 불과함에도, 해당 기록이 천문 기록으로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점을 거론하는 것은 그 권위에 기대려는 논리적 오류에 해당하는 것이며, 사마의의 '부참만계' 전과를 긍정하기 위한 목적의 편의적인 해석을 하는 점도 드러난다. 이러한 해석 행태로도 알 수 있듯 『개원점경』의 해당 기사는 근본적으로 『진서』 선제기의 서술과 합치되지 않기에, 해당 기사를 보충적으로 활용하고자 그 내용을 정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해석의 전거가 되는 『진서』의 독자적 정보에 대한 신뢰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회의론의 시선에선 해당 기사가 갖는 의의가 노성 전투 결과를 위군 측 승리로 서술하는 기록이 당나라 시대를 전후로 등장한다는 방증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뿐으로, 단지 그 형식만으론 해당 정보가 삼국시대 당시에 쓰였다는 확증을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18] 속진양추(續晉陽秋)의 저자이다.[19] 당시 동진의 권신이었던 환온을 지칭한다.[20] 첨오는 권세가에 빌붙는 것을 사마귀에 비유한 것이고, 축록은 제위를 노리는 것을 사슴에 비유한 것이다.[21] 전근대 사관이나 평가자들은 전문적인 군인들보단 문인들이 대다수였고 전문적인 군인들조차 문(文)에 능통한 경우가 드물고 그중에서도 대국적 식견까지 기른 사람은 더욱 드물다. 문인들의 문제점은 군인들에 비해 전쟁과 전투를 모른다는 점이지만 그래도 대국적 식견을 가진 문인들이 무인들보다 상대적으로 많았던 건 사실이고, 명재상이나 명장으로 칭해졌다. 문제는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통찰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었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오히려 이러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평하길 꺼렸을 것이니 이런 평이한 감상이 주류가 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22]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연구 교수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갖고 있으며, 대한출판문화협회 올해의 청소년 도서와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는 집필한 최진열 교수다. 최진열 교수는 한국 역사하계에서 위상이 높은 동북아역사재단에 삼국지 연구 관련 논문을 기재한 교수다.#[23] 서주사범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울러 중국태평천국사학회 고문과, 강소성태평천국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강소성역사학회 부회장, 서주시역사학회 회장 등의 직책을 맡고 있다.[24] 참고로 이 교수는 제갈량에게 부정적인 사람이다. 그런 입장에서도 진서가 신용받지 못하는 것이다.[25] 춘추좌씨전 희공 25년(B.C. 635) 조: 겨울, 진문공이 원성(原城)을 포위하면서 사흘분의 군량만 준비하도록 명했다. (사흘이 지나도) 원성이 항복하지 않자, 퇴각하도록 명했다. 염탐꾼이 돌아와 ‘원성이 장차 항복하려 한다.’고 고했다. 군리들이 말했다, “이를 기다리길 청합니다.” 공이 말했다, “신(信)은 국가의 보배이니, 백성들을 비호하는 바이다. 원성(原城)을 얻어도 신의를 잃는다면(得原失信) 무엇으로 백성들을 비호하겠는가? 그리하면 잃는 것이 더 많다.” 일사(一舍: 30리)를 물러나자, 원성이 항복했다.[26]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일화로, 제갈량이 1만 병력으로 성을 지키던 중 사마의가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왔음에도 제갈량의 허세에 속아 군을 물리자, 제갈량이 박장대소하며 사마의를 겁쟁이라 조롱했다는 내용이다. 배송지는 제갈량전에서 228년에 기산으로 출병하기 직전 대목에 이 일화를 인용하였는데, 그 영향인지 『삼국지연의』에서는 가정 전투 패전 직후 제갈량이 성문을 열어두고 문루에서 거문고를 켜면서 추격군을 이끄는 사마의를 물러나게 한 장면으로 각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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