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7 16:08:33

당고의 금

당고의 옥에서 넘어옴

1. 개요2. 배경3. 전개
3.1. 1차 당고의 금(166년)3.2. 2차 당고의 금(169년)
4. 결과5. 분석6. 미디어 믹스

1. 개요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사대부 출신 관료 세력과 환관(宦官) 세력이 충돌하여, 환관 세력이 사대부 세력 인물들 다수를 금고(禁錮)에 처한 탄압사건으로 당고의 옥(黨錮之獄), 당고의 화(黨錮之禍) 또는 당고의 금(黨錮之禁)이라고도 불린다. 시기적으로 보면 《삼국지》의 바로 앞 시대로 당연히 《삼국지》의 흐름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에서도 배경 설명처럼 자주 인용된다.[1]

이 당시의 정치 세력을 크게 보면 정파에 결탁하지 않은 청류파와 궁정정치를 활발하게 하던 탁류파가 있었는데, 탁류파는 또 환관 세력의 엄당과 외척 세력의 척당으로 나뉘었다. 당고의 금은 엄당과의 궁정정치에 패배한 척당이 청류파랑 쌍으로 숙청당한 걸로 요약할 수 있다.

2. 배경

후한 초 환관은 외척 세력에 대항하는 저울추 역할을 하였다. 92년 화제가 환관 정중(鄭衆)과 손잡고 외척 두헌의 실권을 박탈하였고, 121년 안제가 환관 이윤(李閏)과 손잡고 외척 등즐(鄧騭), 등준(鄧遵)을 숙청하였다.

충제질제가 살아있을 때 간신이자 권신양기(梁冀)와 그의 부인 손수는 모든 정권을 손아귀에 넣고 마음껏 권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손수는 양기의 집 말고도 자신의 집을 따로 만들어 양기의 옆에 있었는데, 양기가 집을 크게 지으면 손수도 따라서 집을 크게 짓고 손수가 크게 지으면 양기도 다시 크게 지으면서 병림픽을 벌이고는, 둘이 마차를 끌고 길 한복판으로 나와 신나게 놀고 즐기는 등 전횡이 극심하였다.

환제는 양기의 손으로 옹립된 위치라 힘이 없어 지켜보고만 있었다. 손수의 외삼촌 중에 양기(梁紀)[2]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양기의 부인인 선(宣)씨에게는 이전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만든 딸인 등맹(鄧猛)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이후 손수는 등맹의 성씨를 양(梁)씨로 바꾸고 환제의 후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입막음을 위해 남편 양기를 시켜 선씨를 죽이게 했는데, 어찌된 것인지 선씨는 살아서 궁궐로 달려갔다.

사정을 들은 환제는 이를 명분삼아 159년 환관 선초(單超) 등과 손을 잡고 수도방위사령관격인 사예교위 장표를 회유해 한번에 들이닥쳐 다 박살을 냈다. 양기의 집은 포위되었고, 양기와 손수는 절망해서 자결하였다. 환제가 환관과 손잡고 양기를 자살시킨 후 양씨 집안 사람 60여 명, 연루된 관료와 빈객 300여 명을 살해함으로써 외척과 환관 사이의 균형은 박살나고 대권은 환관에게로 쏠렸다.

환제는 이렇게 양기를 처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에는 되려 이 사건에서 공을 세운 환관들의 세력이 막강해졌다. 그들은 막강한 권세를 바탕으로 전횡을 일삼았고, 내정에 간섭하며, 자기들의 일족을 지방으로 파견시켜 토지 겸병을 벌였다. 지식인/관료 계층인 사인들은 환관의 전횡을 비판하였고, 이는 제1, 2차 당고의 금으로 이어졌다.

3. 전개

3.1. 1차 당고의 금(166년)

당시 호족 세력과 이들이 향거리선제를 통해 진출하여 형성된 사대부 및 관료 계층은 유교를 통해 외척 및 환관의 세력을 비판하고 있었다. 이들을 기반으로, 환관들의 정치 참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청류파 사인들과 태학생 3만 명이 낙양에서 연일 환관들을 비판하였다. 위기를 느낀 환관들은 환제에게 거짓말을 해서 청류당의 이응(李膺)을 비롯한 200여 명을 잡아들였다.

헌데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청류당은 저마다 입을 모아 환관의 죄상을 폭로하는 법정 진술을 택해서 환관들을 물먹였다. 그대로 놓아두면 진짜로 큰일이 나겠다 싶었던 환관들은 외척 두무(竇武) 등이 상주하여 간한 것을 기회로 청류당 200명에게 관직을 박탈하고 이후 평생의 관직 진출을 막는 금고(禁錮)형을 내렸다. 이것이 1차 당고의 금(166년) 사건이었다.

3.2. 2차 당고의 금(169년)

이후 환제가 죽고, 13세의 어린 황제 영제가 즉위하자 두태후(두묘)가 섭정이 되고 외척 두무가 실권을 잡았다. 두무는 당인의 금고를 해제하여 청류당에 속한 사람들을 등용함과 동시에 그들과 결탁하여 환관을 일소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외척 두씨 세력은 진번 · 이응 등 청류에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을 등용하며 기회를 엿보았지만 오히려 환관들에게 계획이 들통나 거센 역습을 받고 패배했다.

두무는 일찌감치 자살해버렸고, 이응을 포함해서 잡혀 죽은 자만 1백여 명이 넘었으며, 사죄(死罪), 유죄(流罪), 금고의 처분을 받은 자는 6~700명이나 되었다. 태학생 1천 명이 체포되어 사인 집단은 강한 타격을 받았다. 사건에 연루된 외척들도 마찬가지였고. 결론적으로 환관을 제어할 집단들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브레이크가 사라진 것. 이것이 2차 당고의 금(169년) 사건이었지만, 단순히 금고형에 처했던 1차 사건과는 달리 아예 이들을 사형에 처하는 등 호족사대부 세력을 극단적으로 배척한것도 모자라 당고를 금방 해제한 1차때와는 달리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기 전까지 무려 15년간 당고를 유지했기에 정권의 지지도가 폭락했다.

4. 결과

당고 사건 이후 이후 환관들의 권력 독점은 더욱 심해졌으며,《삼국지》의 시작을 알리는 십상시의 전횡도 당연히 여기서 비롯되었다. 애초에 후한에서 인재를 등용하던 향거리선제가 사대부 세력에 근거하던 것이었는데, 사대부 세력을 탄압한 것은 새로운 인재 수급을 사실상 끊는 일이었고, 권력 독점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십상시의 전권 남용도 이런 배경하에서 심화되었다.

하지만 두 차례의 당고의 화는 청류파라는 이름의 사인 집단을 결속시켰다. 당고의 화 이전에도 사인들은 자신들의 비판을 청의(淸議)로 명명해왔다. 이들은 사제, 고리 관계 등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공통의 가치관을 형성해 스스로를 청류(淸流), 즉 도덕적으로 우월한 집단으로 인식했다. 그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유교를 더더욱 교조화시킨 것이다. 당고의 금 이후 청류파는 희생자들의 숭고함에 순위를 매겨 삼군(三君), 팔준(八俊), 팔고(八顧), 팔급(八及), 팔주(八廚) 등으로 나누었다.

청류파 다수가 출사하지 못하고 초야에 묻혔으나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황건적과 싸울 인재를 급히 모으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많은 당인들의 금고를 해제해주게 된다. 새로운 외척 세력으로 대두한 하진은 이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았다. 기존 권력을 독점하던 십상시를 중심으로 한 환관 세력과 청류파를 끌여들인 새로운 외척 하진의 대립은 십상시의 난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수세기로 이어진 분열의 시대를 알리는 전주곡이 되었다.

5. 분석

흔히 이 사건에 대해 환관 세력을 탁류(濁流), 사대부 세력을 청류(淸流)라고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청탁이라는 말로 선악의 구도를 형성할 만큼 도덕적인 차이가 컸다고 보기는 어려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사대부 세력은, 특히 태학과 관료계의 인재 등용이 지방의 여론에 의존해 인재를 중앙으로 뽑아 올리는 향거리선제에 의거한 상황에서는, 지방 유력 세력인 호족과 밀접히 연관되었다. 자연히 이들도 토지 겸병을 행하고 일반민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던 대지주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단적으로, 당시 빈곤에 찌들린 농민들을 결집시킨 황건적의 난을 때려 잡던 군웅들은 대체로 군복으로 옷만 갈아입은 지방호족 · 사대부 세력이었다.

즉, 후한의 국가 지배권을 부식시키고 지방에서 각종 모순이 일어나던 상황은 당고 사건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호족들은 지방에서는 대지주로서 소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이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한편, 중앙에서는 관료 계층에 대한 존중과 (지방 세력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법가 사상에 대한 반대를 위해 유교 사상으로 스스로를 무장시켜 사대부로서 활동하였다. 후한광무제 본인부터가 남양(완성)의 대지주라서 재건국 초부터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시작된 정권이었고, 때문에 황제가 직접 이들을 탄압하는 것은 무리수였다.

그래서 황제에게는 자신의 통치력을 확장시킬 측근이 필요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황제와의 관계 속에서만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외척과 환관 세력이었다. 때문에 외척, 환관 세력과 사대부 세력은 계속해서 대립했으나, 2세기에는 어린 황제의 연이은 즉위로 외척과 환관 세력이 득세하여 사대부들의 상위에 섰다. 문제는 이들도 부패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이용하면서도 정국을 통제해야 할 시대의 필요성과는 달리 황제권이 완전히 추락해버렸다는 것이다. 황통이 단절되어 어리고 무능한 황제가 외척들에게 옹립되는 불행이 이런 상황을 악화시켰다. 헌제동탁, 조조의 꼭두각시가 되었던 것처럼, 그 이전부터 후한 황제들은 권신들에게 대부분 농락당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척과 환관 세력들도 내부에서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이 시기에는 환관 세력이 승리했고, 이 시기 이들의 지지하에서 이미 푹 썩은 중앙 정부를 대표하며 사인들을 탄압하고 정치에는 무관심하면서 정작 자신이 휘두를 권력이 위협받을 거 같으면 무자비한 황제권을 휘두른 황제들이 바로 암군의 대명사환제영제[3]였다. 그 과정에서 사대부 세력들은 완전히 싹이 잘려 버렸다. 명망 높은 사대부들이 정부에 의해서는 오히려 탄압받고 관직으로의 출구가 봉쇄된 결과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은 사대부에게 오히려 권위의 출처가 아니게 되었다. 이후 사대부들은 중앙에 대한 관심을 끊는 한편, 신비주의 사상이나 아예 도교 계열의 신종교에 몰입했다. 태평도오두미도가 발생하고 퍼진 것도 이 시기다.

교지[4] 등 벽지로 숨어드는 사대부들도 많았다. 그로 인해 사대부 세력이 협조하며 운영되던 후한의 지방 통치력은 급전직하했다. 쉽게 요약하자면지방 유력 세력은 이 사건으로 후한에 대한 기대를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예 포기했다고 보기까진 어렵다, 400년을 이어온 한 황실의 권위는 아직 작동하고 있었고, 이후의 군웅할거 시기에 각지의 군웅들에 복종하던 호족들은 이런 한 황실의 권위를 빌려 협천자를 실행한 조조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실 외척이든, 환관이든, 사대부든 모두 자신들의 권력을 바탕으로 대토지를 장악하고 민중에게는 압제를 가하는 대상이었음은 동일하다.[5] 그러나 이 사건으로 정계의 자정 능력이 완전히 상실되고, 중앙과 지방의 유기적인 연계가 끊어지며, 곧 이은 황건적의 난으로 군벌이 태동할 기반이 마련되면서, 후한의 멸망은 가시화되었다. 하지만 사대부 세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삼국지》의 시대에 각지의 사대부, 즉 호족들은 지방군벌로 다시 군웅할거의 시대를 주도하며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다. 위진남북조시대로 이어지는 귀족 정치의 모습이 한나라 시대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이 문제를 한나라의 정치적 구조 문제로 해석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대부분의 역사 서술자들이 사대부 계층 출신인 관계도 있어 많은 역사 기록들에서 환관 세력이나 외척의 득세 자체를 부정적인 현상으로 보는 관점에 무게가 실려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환관이나 외척 세력의 득세 자체가 나라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6] 일단 한나라 자체가 당시 시대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광대한 영역을 황제와 황실, 조정(=중앙 정부)의 권위로 다스리는 고대 제국이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7] 이 제국을 다스리는 것은 일단 이론상으로는 황제 1인이었고, 따라서 황제가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황제를 보호하고 보좌할 친위 세력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

그렇다면 이 황제의 친위 세력이 무엇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가가 문제인데... 전근대 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정치적 세력의 기반이 되는 집단은 혈연 집단, 즉 가족 및 씨족, 혈족이다. 하지만 한나라 황제의 입장에서는 유씨 친족에게만 의존하여 자신의 권력과 권위, 영향력을 구축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유씨 친족 집단은 곧 혈연적으로 황제의 자리에 도전할 자격이 있는 황족 집단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씨 친족 집단이 강해지면 그만큼 황실과 조정의 권위는 튼튼해지지만 황제 개인의 입지는 오히려 불안해질 수도 있다는 것.[8][9] 따라서 황제에게는 좀 더 자신에게 의존적인(=자신 이외에는 권력 기반이 없는) 집단을 기반으로 한 친위세력이 필요했다.

말하자면 한나라에서 외척과 환관은 황제의 친위 세력으로써 번갈아가며 득세한 것이다. 황제 입장에서 보면 외척유씨가 아니므로 황위에는 도전할 수 없는 친족으로서 소중한 세력 기반이었고, 환관은 황제의 총애 이외에는 다른 세력 기반이 없으므로 황제를 배신할 수 없는 총신으로서 중요한 세력 기반이었던 것. 그래서 어린 황제가 즉위하면 처음에는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를 보호하다가 황제가 성장하여 친정하게 된 이후에는 자신이 직접 발탁한 환관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외척 세력을 억누르고 친정 체제를 정비하는 형태로 권력 이동과 집권 세력 교체가 주기적으로 일어나게 되며, 이 두 권력집단간의 상호 견제를 통해 한나라의 통치 기구와 체제가 최소한의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대부 세력의 경우, 황제와 직접 연결된 외척/환관 세력이 비해 중앙 정부에서는 명백한 약자였지만... 일단 전국 각지의 호족과 명사들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의 특성상 규모면에서 압도적이었고, 이들 없이는 중앙 정부가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절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또한 어느 정도의 천거 절차(향거리선제)를 통해 지방의 인재를 중앙으로 뽑아 올리는 한나라의 제도적 특성상 대부분의 실무진들 역시 사대부 계층에서 배출되는 것. 말하자면 사대부(+호족) 자신들이 중앙 정부의 주도권을 쥐지는 못하지만, 환관이든 외척이든 사대부 계층의 협력 없이는 한나라라는 제국을 통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한나라의 정치체제를 현대 정치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환관당(엄당)과 외척당(척당)이 여당/야당으로 번갈아 집권하는 양당제 체제에 비교할 수 있고, 사대부 호족 계층은 테크노크라트+지자체 정도로 수권세력은 아니지만 양대 수권세력 모두 이들과 손을 잡지 않으면 정국을 운영할 수 없기에 일종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고 비유할 수 있는 것. 만년야당 이 관점에서 볼 때 당고의 금 이후 후한 말의 혼란상은 나쁜 세력이 착한 세력을 몰아내고 집권해서 나라가 망했다식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연이은 암군의 즉위로 한나라 400년을 지탱해 온 권력 균형이 무너지고, 환관 세력이 일방적으로 득세하면서 외척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외척 세력과 손을 잡은 사대부+호족까지 숙청해 버리고 권력을 독점한 현상에 가깝다.

이로써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된 환관 세력이 최소한의 균형 감각마저 상실하고 완전히 부패해 버리는 동시에 제국의 유지에 필수적인 지방에 대한 영향력 및 실무를 위한 인재풀이 중앙 정부와 단절되어버리는 현상이 벌어져 버린 것. 이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환관이 득세한 것이 아니라 권력 균형이 깨진 것이고, 환관이 아닌 외척이 득세하여 권력 균형이 깨진 상황이더라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는 것.[10]

참고로 사인(士人)이나 사대부라고 해서 무조건 청류파는 아니었다. 사인은 지식인 관료층 전반을 뜻하고, 이들 중에 탁류와 손잡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사인 가문이 사족이고.

6. 미디어 믹스

드라마 《영웅조조[11]에서는 제2차 당고의 금이 조조의 어린 시절을 다루는 것을 통해 나오는데, 조조가 냉혹한 현실과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계기로 나온다.

조절왕보에게서 두무, 진번 일당이 비밀리에 상소를 올려 자신들을 몰래 죽이려 했다는 보고와 함께 두무의 비밀 상소를 받는다. 이에 조절은 왕보를 시켜 옥에 가서 정삽을 빼내 두무를 체포하게 하고 조등에게는 산빙을 잡아두고 궁 문을 전부 닫도록 하면서 일이 새나가지 않도록 입막음하게 한다.

조절은 전쟁 놀이를 하고 있던 영제에게 가서 태후께서 부르신다는 핑계로 궁에서 벗어나게 하며, 조절은 영제와 전쟁 놀이를 하고 있는 조조에게 좋은 구경거리를 보여주겠다면서 자신을 따라오게 한다. 진번이 궁으로 오자 조절이 많은 사람들을 끌고 와서 반란이라도 꾸밀 작정이냐고 묻자 진번과 진번과 함께 온 사람들은 산빙이 어딨냐고 따지며, 조절은 잡아들였던 산빙을 끌고와 보여주고 산빙이 반역자들과 결탁했다면서 글자가 아무 것도 적혀져 있는 가짜 교지를 보여준다.

진번이 어명없이 산빙을 멋대로 잡아들인 것, 교지를 날조했다고 따지자 조절은 진번이 반역자와 가담해 역모에 날조했다면서 그 순간 환관들의 군사들이 나타나 진번, 진번과 함께 온 자들을 모조리 때려죽인다. 싸우는 장면 없이 두무가 이끌던 군사들도 환관들의 군사에게 패하고 두무가 자신 혼자 책임지고 병사들은 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조절은 이를 수락하자 두무는 칼로 자결하고 두무가 죽자 조조는 정말로 저들을 모두 돌려보낼 것이냐 묻는데, 조절은 수하들을 시켜 두무의 군사들을 모조리 죽인다. 조조는 조절에게 저들을 속인 것이 아니냐고 말하자 조절은 웃으면서 그 말에 수긍하고 할아버지가 저들을 속였다고 말한다.

이 일로 조조가 생각에 빠지자 조숭은 악독하고 잔인한 처사였냐고 생각하냐면서 저(환관)들이 외척 당파를 죽이지 않았다면 외척 쪽에서 우리에게 손을 썼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숭이 궁에 데려오면서 그런 일을 보여주게 된 것을 후회하며, 그 일을 알게 된 겸 본래 하후씨인데 조씨 성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알려준다.

그 이유는 환관과 외척 간의 분쟁의 결과로 자신(조숭)을 살리기 위해 조등의 집에 양자로 맡겼다고 하며, 이로 인해 하후씨와 조씨가 가족이 된 것으로 증조부(조절)가 스스로를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환관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조조전 온라인》에서 조조가 몰래 한 밤중에 나갔다가 이 사건으로 도망다닌 하옹을 만나는데, 하옹이 낙양의 지리에 대해 물어보자 하옹은 낙양을 탈출하기 위해 조조에게서 길 안내를 받고 탈출한 것으로 나온다.
[1] 삼국지 인물들 중 가장 첫 세대인 유표, 유언, 정욱, 동탁, 하진, 주준, 노식, 황보숭 등은 한창 나이 때 당고의 금이 일어났다.[2] 간신 양기(梁冀)와는 한자가 다르다.[3] 환제와 영제를 묶어서 부르는 말을 환령이라고 한다.[4] 현재의 베트남 인근[5] 그나마 이들이 환관 세력인 엄당, 외척 세력인 척당보다 나은 점이라면 이들의 출세 루트는 대게 향거리선제였기에 지역에서의 인심을 아주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후한 말에 "OOO이 백성들에게 크게 베풀었다." 등의 내용이 나오면 십중팔구 이런 사대부들이다. 어쨌거나 사대부는 내부 자정이 그나마 저 둘보다는 이뤄지던 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후예뻘 되는 문벌귀족이 성립되는 삼국시대에 이르면 구품관인법의 등장으로 문벌귀족들은 외척이나 환관보다 더 타락하게 된다.[6] 앞서 말했듯 환관과 외척은 군주의 지지하에서 권력을 키워나갈 수 있다. 물론 외척이 너무 폭주하면 왕망이나 수문제 같은 사례가 나올 수 있어 100% 장담은 못하지만 그래도 외척은 환관과 함께 군주의 지지하에서 성장할 수 있는 세력이기는 하다.[7] 해당 시대 기준으로 한나라에 비견할 만한 광대한 영역에 대해 중앙정부의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다른 국가의 사례로 로마 제국 정도 외에 다른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굳이 주석까지 달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8] 황제 자신의 권위가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황족들의 세력을 너무 억누르다가 정작 어린 황제가 즉위하자 권신으로부터 황실을 보호할 울타리가 없어 한방에 제위를 스틸당해버린 것이 조씨위나라이고, 반대로 황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황족들의 세력들을 키워주다가 황족들의 동시다발 반란으로 망해버린 것이 사마씨진나라이다.[9] 그리고 이미 한나라전한 시절 오초7국의 난이라는 선례도 겪었다.[10] 하지만 후세인이 보기에 거기서 거기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사족 세력들이 현실적인 입장에서 그래도 우리가 개중 가장 나은 사람들이고 지금 환관들의 독주와 부패는 너무 최악이다라고 말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11] 한국에서는《제왕을 꿈꾼 남자 조조》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