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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Generation 1965.12.03. | A Quick One 1966.12.03. | The Who Sell Out 1967.12.15. | Tommy 1969.05.23. | Who's Next 1971.08.14. | |
Quadrophenia 1973.10.26. | The Who By Numbers 1975.10.03. | Who Are You 1978.08.18. | Face Dances 1981.03.16. | It's Hard 1982.09.04. | |
Endless Wire 2006.10.30. | WHO 2019.12.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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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록밴드 더 후의 음악적 영향력과 평가와 영향력을 정리한 문서.2. 상세
더 후는 음악적 영향력에 비해 인지도가 적어도 국내에서는 높지 않은 대표적인 뮤지션으로 꼽힌다.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비틀즈가 앨범을 수억 장씩 팔고, 롤링 스톤스가 빌보드 차트를 화장실 드나들 듯 점령하고 다닐 때, 더 후는 변변한 차트 1위 앨범도 없고 앨범 판매량도 저조했다. 그나마 Who's Next가 UK차트에서 1위를 잠깐 찍었던 것을 제외하면 영국과 미국 양쪽에서 어떠한 차트 1위 앨범도 내지 못했다. 더 후의 앨범 판매량은 약 1억장 정도로 추산된다.[1]그럼에도 더 후는 록 음악사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고 평가받는 밴드 중 하나로, 비틀즈와 1대 1 비교가 가능한 몇 안되는 밴드로 불린다.[2]
3. 음악 성향
더 후의 음악은 보통 하드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더 후의 전성기 시절 음악이 하드 록, 프로그레시브 록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편 초창기에는 비틀즈, 롤링 스톤스와 마찬가지로 블루스와 로큰롤, 소울 음악 음악을 기반으로 곡을 작곡했기에 당대 유행하던 로큰롤로 분류되거나, 혹은 R&B와 파워 팝,개러지 록으로 분류되기도 했다.[3] 실제로도 더 후 커리어 초기, 즉 1집 데뷔 이전에는 고전 소울 음악 혹은 로큰롤 곡, 블루스 곡들을 커버하였다. 이는 당시 로큰롤 곡들을 좋아하던 밴드 멤버들의 성향과, 당시 유행하던 R&B의 기류에 맞춰가던 것에서 기인했다.하드 록 및 로큰롤로 분류되는 1집의 대성공 이후로 더 후는 로큰롤을 기반으로 각종 실험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2집에서는 약 2분짜리 로큰롤 곡 6개를 붙여 파트가 나뉘어져 있는 약 10분의 러닝타임을 가진 A Quick One, While He's Away를 발매하기도 했다. 이 곡은 최초의 프로그레시브 록 넘버 중 하나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또한 3집에서는 기존의 파워 팝 성향을 이어가는 동시에 아예 앨범 전체의 유기성을 중시하는 콘셉트 앨범을 최초로 제작하기도 했다. 참고로 3집이 발매된 시기인 1967년은 미국과 영국 음악계에 한창 사이키델릭 록 열풍이 불었을 때로, 즉 더 후는 이러한 기류와 상관없이 자신들만의 음악적 실험을 계속해나간 것이었다. 이러한 콘셉트 앨범에 대한 실험을 계속해나간 결과, 4집인 Tommy는 영화로까지 제작될 정도로 스토리라인과 음악성 모두가 뛰어나다고 평가받았다.
한편 이 시기부터 더 후는 기존의 블루스와 로큰롤 성향을 탈피하기 시작하여 하드 록을 완성시키는 실험 또한 시작한다. 원래 더 후 본인들과 롤링 스톤스, 킹크스 등이 만들어 낸 하드 록이라는 장르는 블루스와 로큰롤을 기반으로 두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레드 제플린의 헤비 메탈 넘버들도 블루스를 기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더 후는 하드 록에서 블루스와 로큰롤을 완전히 배제시키기 시작했다. 즉 우리가 현재 아는 ‘현대적이면서 파워코드와 신디사이저 소리로 이루어져 있는 하드 록’의 개념을 바로 더 후가 창시했던 것이다. 이는 당대 음악씬에서는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실험이었으며, 이 때문에 당연히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블루스의 영향력을 배제한 하드 록,’ 그리고 ‘프로그레시브 록’이 바로 더 후의 음악의 기본 뼈대가 되었다.
4. 음악적 영향력
더 후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으로는 그로울링이 있다. 더 후는 그로울링을 1960년대 중반에 처음 시도했는데, 그로울링을 적극적으로 음악에 받아들인 익스트림 메탈의 등장과 그 격차가 약 20년 정도나 난다.대중 음악에서의 콘셉트 앨범도 더 후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The Who Sell Out은 페퍼 상사보다 약 6개월정도 늦고 페퍼상사 이전에도 많은 컨셉트 앨범이 존재했기에 빛이 바랜 면은 있으나, The Who Sell Out은 페퍼 상사의 발매 이전부터 진행되던 프로젝트였으므로 대중음악사 최초의 콘섭트 앨범이라고 봐도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또한 페퍼 상사가 가공의 밴드를 다루고 있다면 The Who Sell Out은 쇼핑 방송의 컨셉으로 색다른 주제가 돋보이며, 후대의 콘셉트 앨범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Tommy의 경우, 대중음악사 최초로 시도된 록 오페라는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수백만장 가량 팔리면서 록 오페라의 대중화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나 이 앨범은 피트 타운젠드의 개인적인 철학관이 담긴 앨범이기도 하기 때문에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 다음가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Quadrophenia도 정말 평가가 좋다. 상업적으로 봐도 록 오페라중에서 이 두 음반은 Bat Out of Hell, The Wall, American Idiot 다음으로 많이 팔린 축에 속한다. 팬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Live at Leeds라는 라이브 앨범도 상당한 고평가를 받는다. 원래는 Tommy의 홍보차 발매하려고 했지만 곡이 겨우 6곡밖에 담기지 않은 매우 실험적인 앨범이 되었다. 대신 고전 로큰롤 뮤지션들을 즉흥 잼의 형식으로 자신들의 형식으로 해석하고, My Generation을 15분 분량으로 늘려 연주하는 등 라이브 앨범임에도 상당히 높은 창작성과 실험성을 가지고 있다. 또 이 앨범은 녹음 기술의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음색이 깨끗해, 후대 음향 녹음에도 영향을 줬다.
단순히 최초를 시도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장르 단위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닌 아티스트다. 프로그레시브 록, 헤비 메탈, 하드 록, 펑크 록이 더 후로부터 어느정도의 영향력을 받았다. Who's Next는 신디사이저와 전자 악기를 전면에 앞세워 일렉트로닉 음악의 효시로도 불리며, 프로그레시브 록 및 그 하위 장르인 크라우트 록에 큰 영향을 줬다.[4] My Generation은 간결하고 파워풀한 기타 연주 때문에 최초의 펑크 록 곡으로도 손꼽힌다. 킹크스, 롤링 스톤스, 벨벳 언더그라운드 등과 더불어서 현대에는 펑크 록을 창시한 뮤지션중 하나로 당당히 평가받는다.
퍼포먼스도 더 후가 우선적으로 시도한 것들이 많다. 조금 과장 보태서 록 음악하면 떠오르는 과격한 이미지의 한 절반 정도는 더 후가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지미 헨드릭스의 그 유명한 기타 화형 퍼포먼스는 피트 타운젠드의 기타 파괴 퍼포먼스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은 야드버즈와 같은 동료 밴드도 따라했고, 더 클래시는 London Calling 표지를 기타를 부수는 것으로 채웠고 1990년대 펑크 록의 재부흥에 따라 너바나나 그린데이와 같은 밴드도 더 후의 과격한 퍼포먼스의 명맥을 잇게 된다.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 이기 팝, 시드 비셔스 같은 과격한 퍼포먼스를 지향하는 프론트맨들 대부분이 더 후의 영향을 받았지만, 사실 관객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더 후가 미친 영향력이 정말 어마어마하다. 대중 음악사 사상 가장 위대한 프론트맨으로 불리는 로버트 플랜트와 프레디 머큐리가 더 후의 광팬이었다는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고, 마이크 줄을 빙빙 돌리며 냅다 지르는 보컬리스트, 풍차 돌리기 기타 연주하는 기타리스트, 과격한 드럼 구타하는 드러머 등은 록 음악 전반의 무대 매너에 영향을 줬다.
5. 음악 외적으로 미친 영향
정치 사회적인 영향력도 컸다. My Generation에서는 기성 세대에게 젊은 세대를 건드리지 말라고 일침을 늘어놓는다. 이 당시는 반문화의 상징이라는 롤링 스톤스도 점잖은 척 양복 입고 다닐 정도로 사회가 보수적이었는데, 겁도 없이 첫 앨범부터 기성세대를 욕하며 꼰대짓 좀 하지 말라고 선언한 것으로, 당시 사회에 미친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5]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가 각각 사이키델릭 록 음악과 장발머리에 화려한 옷으로 히피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면 더 후는 영국의 과격한 모드 족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더 후의 저항 정신은 런던 펑크의 과격 반체제 정신과, 더 나아가 소위 말하는 "록 스피릿"을 형성하는데에 기여했다. 전반적으로는 진보적 아젠다를 담고 있던 밴드였지만[6] Baba O'Riley에서는 히피들을 비판하기도 하며 특정한 이념에 매달리지 않은채 말 그대로 "저항, 반 체제 정신"을 표방했다.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더 후는 이것저것 시도한것도 많고, 후대에 등장하는 여러 장르에도 영향을 크게 줬고, 무대 매너도 아주 혁신적이었으며, 록 음악의 정신에도 일정 부분 기여한 밴드다. 그야말로 록 음악을 만든 밴드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6. 평가
동시대의 밴드인 비틀즈나 롤링 스톤스, 비치 보이스처럼 이것 저것 많이 시도했던 행보로 인해 대중들보다도 평론가들에게 더 큰 찬사를 받는 밴드이다.
7. 더 후의 영향을 받은 음악가
- 비틀즈 - 폴 매카트니는 더 후의 시끄러운 하드 록에 영향을 받아 Helter Skelter라는 곡을 작곡했는데, 이 곡은 현재 최초의 헤비 메탈 곡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 크림 - 지미 헨드릭스와 크림, 그리고 더 후는 1960년대 중후반 같이 활동하면서 상호간 영향을 주고 받았다.
- 레드 제플린 - 더 후의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받은 밴드로, 더 후가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하드 록을 헤비 메탈로 발전시킨 밴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피트 타운젠드는 제플린이 더 후의 메탈에 대한 업적을 다 가로챘다고 제플린을 싫어한다고 한다.[7]
- 핑크 플로이드 - 더 후가 시도한 프로토 프로그레시브를 수용하여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발전시킨 밴드이다. 실제로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은 데뷔 초에 피트 타운젠드에게 여러 조언도 들었다고 한다.
- 오아시스 - 1960, 1970년대 수많은 밴드들의 영향을 받은 밴드답게 더 후의 영향도 짙게 받았다. 오아시스 시절에는 My Generation을 커버하기도 했으며, 리암 갤러거는 더 후의 보컬 객원으로도 참여한 적이 있다.
- 그린 데이 - 더 후의 여러 곡들을 커버했으며, 그런지 밴드인 만큼 더 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밴드이다.
[1] 참고로 롤링 스톤스가 2억장, 비틀즈가 6~10억장.[2] 다만 보통 음악적으로는 비치 보이스가, 영향력으로는 지미 헨드릭스와 롤링 스톤스가, 인기로는 레드 제플린이 비틀즈와 비교되고, 그 외에 더 후를 비롯한 몇몇 밴드들은 비슷한 시기 활동했다는 이유로 비교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더 후가 비틀즈와 비교해도 손색 없을만한 막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3] R&B(리듬 앤 블루스)라는 용어는 당시에는 블루스, 로큰롤, 소울 등의 흑인음악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소울 음악이 록(블루스, 로큰롤)뮤지션들과 독자적으로 발전하다보니 R&B라는 용어는 소울 음악을 칭할때만 쓰는 표현으로 축소되었다.[4] 첨언하자면 Who's Next는 1971년 한 음악 잡지에 의해 "올해 최고의 음반"으로 분류된 바 있다. 록 음악 최고 전성기였던 1971년에 말이다. 같은 년도에 나온 주요 음반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존 레논의 Imagine, 마빈게이의 What's Going On,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There's a Riot Goin' On, 핑크 플로이드의 Meddle, 레드 제플린의 Zoso, 제쓰로 툴의 Aqualung, 데이비드 보위의 Hunky Dory, 캐롤 킹의 Tapestry, 조니 미첼의 Blue,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At Fillmore East, 티렉스의 Electric Warrior 정도다.[5] 물론 롤링 스톤스의 데뷔는 1963년으로, 더 후보다 2년 정도 더 빠르긴 하다.[6] 그도 그럴것이 피트 타운젠드부터 열렬 공산당원으로 유명했다. 그는 반전주의가 자신의 가사를 만드는데 큰 고려 사항으로 작용했다고 한 바 있다. 로저 달트리는 현재는 우파 성향이지만 토니 블레어가 총리가 되기 이전까지는 노동당의 당원이었다.[7] 말은 이렇지만 정작 피트 타운젠드는 레드 제플린 멤버들과 친한 사이이며 음악적 교류도 한 적이 있다(…). 츤데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