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데스티니 가디언즈/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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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되찾은 기억; 웬-1
6월3일/10:43AM벽이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천둥처럼. 그들이 이번에는 얼마나 깊이 내려갔을까? 우리가 한참 안으로 들어와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방은 충격을 버티도록 만들어졌다. 벽이 너무 두꺼워서 쉽게 균열이 생기지 않았다. 과연 벡스의 무게 아래에 무너지고 마는지는 두고 봐야겠지.
"놈들이 여기 들어올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군."
그는 꼭 내 생각을 듣는 것만 같았다… 하긴, 그가 우리 머릿속에 무슨 더러운 기술을 심어 두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로파에, 내가 난공불락으로 지은 곳은 두 곳뿐이다. 이 방이 그중 하나지. 걱정은 그만두고 신 모델을 작동시키기나 해." 그가 말했다.
그는 또 절차를 위반하고 있다. 이 방에 있는 엑소와 인간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 "브레이 박사님이 자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고 명확히 말씀하—"
"지금부터 네게 명령하는 브레이 박사는 나뿐이다. 엘리자베스는 죽은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말하는 로봇 머리는 그 노인만큼이나 차가웠다. 하긴, 죽어서 자신을 모든 것을 보는 AI로 만든 사이코에게 달리 무엇을 기대할까? 우리 앞에 있는 의식이 없는 엑소가 실제 인물과는 전혀 다르기를 바랄 뿐이었다.
"당장 작동시키지 않으면 너희를 즉시 꺼 버리겠다."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각성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엑소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감정이 생각났다.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디인가? 내 피부는 어디로 갔나? 그나마 우리는 절차가 정상적으로 지켜질 때 깨어났다. 그자는 전쟁터에 들어온 셈이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겠지.
"난 누구지? 여긴 어디고? 내가… 금속인 건가?" 신참이 물었다. 아무렴. AI가 나섰다.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은 상당히 복잡하다. 그리고 우리가 원래 당신들을 이 현실에 적응시킬 때 사용하던 수단을 현재는 쓸 수가 없지. 그러니 간략한 응답을 지향하겠다."
AI는 이곳이 어디인지, 엑소가 무엇이며 그 원리는 무엇인지, 엑소가 왜 중요한지를 빠르게 설명했다.
"…그리고 훈련을 마치고 나면 너의 업적을 기념하는 의미로 반짝거리는 새 장난감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왜냐고? 너는 특별하고, 무적이기 때문이다. 전사이자 지식인이고, 남들보다 나은 존재다. 우주의 그 무엇도 너를 막지 못할 것이다." AI가 말을 맺었다.
"그렇군. 그거… 좋은데. 그런데 너는 누구… 아니 무엇이지?" 신참이 물었다.
"좋은 질문이군. 나는 클로비스 브레이다. 그리고 너와 나는—"
"이자가 왜 깨어 있죠?" 웬 목소리가 따져물었다.
브레이 박사다. 살아 있었군! 박사가 터널로 들어왔다. 예감이 좋았다.
엑소 둘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노에-2와 미아-9이었다.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엘리자베스." AI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웬-1에게 그를 깨우라고 했다." 브레이 박사는 내게 성난 눈빛을 쏘아보냈다. 저 AI 놈의 플러그를 뽑아 버려야겠어.
"절차를 어겼다는 얘기네요." 그녀가 말했다.
"엘리자베스, 그 절차를 만든 게 나다. 그러니 어길 수도 있지. 나는 신호를 발신해 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할 뿐이야."
브레이 박사의 답답한 심정이 느껴졌다. "벡스가 쫙 깔렸어요. 유로파에서 대피해야 해요. 벙커 E15에 발이 묶인 생존자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구출하려면 도움이 필요해요."
"그보다 급한 일이 있어. 내가 카론의 건널목에 전쟁지능과 벙커를 연결하는 고급 신호 시설을 설치해 두었다. 그 신호를 벡스가 사용하는 통신 신호에 일치시키면, 이론적으로는 벡스를 이 행성 밖으로 유인하고 우리가 이곳에 지은 것을 복구할 수 있지. 그런데 벡스가 내부 통신 채널과 클라우드 기억 수집 시스템의 연결을 끊었지. 그러니 수동으로 해야 할 거다, 엘리자베스." AI가 말했다.
"그러면 벡스는 바로 화성으로, 또 지구로 갈 거예요. 할아버지가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벡스는 오로지 절멸만을 염원한다고요. 수십억 명이 목숨을 잃을 거예요. 전 거기 끼지 않겠어요." 박사가 대답했다.
"나의 착하고 순진한 손녀딸아. 어차피 인류는 벡스를 상대로 승산이 없었다. 그 목숨들은 소모품이야. 게다가 인간이 하나 죽을 때마다 엑소가 하나 늘어나지. 벡스와 싸울 병사가 하나 늘어난단 말이다. 미래는 엑소다. 미래는 브레이야. 우리의 유산,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하다." AI가 대답했다. 신참은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백지 상태긴 해도, 내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브레이 박사가 턱을 앙다물었다.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그녀를 탓할 수는 없지.
"우리 유산, 태워 버려야 하는 건지도 모르죠." 박사가 말했다.
"엘리자베스… 샛별을 가동할 계획이냐?"
"모두를 구하고 세계를 차단하려면, 무엇이든 해야겠죠. 이것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더 생겨서는 안 돼요."
말 한번 잘했네요, 아가씨.
"다들 잘 들어요. 엑소, 그리고 신체 건강한 인간들. 여러분이 필요해요. 아무 무기나 출발하죠." 그녀가 말했다. 우리는 모두 따랐다. 각자 무기를 손에 들고, 우르르 터널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신참이 따라나섰지만 브레이 박사는 보아넘기지 않았다.
"잠깐만요. 당신은 입문 절차를 거치지 않았잖아요.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그녀가 말했다.
"구할 목숨이 있다면 나는 그곳으로 갈 것이다." 신참이 대답했다. 묘하게 결의에 차 있다.
"네가 있어야 하는 곳은," AI가 끼어들었다. "가족 곁이다. 나 말이지."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본능이 너를 거부하라 말하고 있다." 엑소가 쏘아붙였다. 잘했어, 신참.
브레이 박사가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바로 그때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무기 더미에서 총을 집어 들어 신참에게 던졌다. "이제 보니 준비가 됐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녀가 말했다. 신참은 가만히 서 있었다. 무기 다루는 솜씨가 상당했다. 확실히 준비는 되어 있는 듯했다. 절차 따위 꺼지라지.
"엘리자베스." AI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려나 보다. 늘 그렇듯이. "나는 우리의 유산을 지킬 거야."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대답하고, 터널로 나와 문을 닫았다.
멋있는걸.
3. 되찾은 기억; 녹스-4
5월19일/5:00AM또 하루가 밝고, 또 2082 볼란티스로 '조달'을 하러 간다. 매일 똑같았다.
우리는 매번 차원문이 있는 유리길로 들어간다. 방어 프로토콜이 가동되고, 차원문이 활성화된다. 이쪽으로 넘어오는 벡스가 있으면 처치하고, 그 후 브레이 박사가 우리 부대를 이끌고 차원문에 들어가, 자원을 채취하고 탐사한다.
이번에는 날 앞장세우지 않기를 바랐다. 최전선에 있으면 보통 바로 죽어 나가니까.
"녹스, 오늘은 당신이 앞장서요." 그녀가 말했다.
그럼 그렇지. "알겠습니다, 브레이 박사님."
차원문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다음 단계는—
"브레이 박사님, 문제가 있습니다." 루이즈 박사가 끼어들었다.
잘도 됐군. 뭐가 잘못됐을까.
"말씀하시지요." 브레이 박사가 대답했다.
"노에-2가 차원문의 외계 측에 있는 우리 감시 시설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센서들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센서가 없으면 무엇이 차원문으로 넘어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브레이 박사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다음— "닫으세요."
"그러려면 허가가 필요한데요."
"제가 허가합니다."
"그분의 허가 말입니다."
클로비스는 박사에게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한을 주지 않았다. 박사는 미칠 듯이 답답해했다.
"잘 들어요, 에스테반. 클로비스는 현재 인공호흡기를 달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어요. 24시간 내에 돌아가실 가능성이 크고요. 그러니 외람되더라도, 이제 제가 결정—"
(시끄러운 기계음)
이게 무슨 소리지? 차원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모두 그쪽을 보고 있었다. 뭔가 나온다!
(요란한 폭발음)
"미노타우르예요! 포를 일제히 발사해요!" 브레이 박사가 외쳤다. 든든했다.
미노타우르가 차원문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마구 포격을 가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든든한 게 아니었나.
"로켓이다!" 다른 엑소가 비명을 질렀다.
브레이 박사는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노력했다. 그건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혼자도 아니었다.
"고블린들이 옵니다!" 누가 고함을 질렀다.
놈들은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나는 난사하고 있었다.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너무 많았다.
"온다!" 루이즈 박사가 비명을 질렀다.
저게 대체 뭐지?! 벡스 히드라와 비슷한데… 훨씬 크고 보호막을 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우리 위로 엑소 파편이 비처럼 내렸다.
놈들은 계속 밀려왔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총알이 떨어져라 쏘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루이즈. 차원문을 닫아요. 당장!" 브레이 박사가 호통쳤다.
그는 아무것도 닫지 못할 것이었다. 이제 곤죽이 된 사체였기 때문이다. 브레이 박사도 그 광경을 보았다.
"즉시 대피해요! 어서 움직여요!" 박사는 고함을 치며 몇몇 엑소들과 함께 뛰어 간신히 빠져나갔다.
나도 그러려고 했다. 뛰는 데까지 뛰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놈들이 나를 덮쳤다. 내 팔을 뜯어 내고, 나를 바닥에 누르고 있었다. 여기까지였다. 어쩌면 나는 녹스-5로 다시 살아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그렇다면…
나는 눈을 감았다. 한 여인이 나를 보고 웃는다. 피에로기를 만들고 있다. 어머니인가 보다. 어서 맛을 보고 싶다.
집에 오니 좋았다.
4. 되찾은 기억; 웨슬리-3
6월3일/2:12PM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왔을 때는 위성 안테나를 수리하러 왔었다.
"여기가 어디지?" 신참 엑소가 물었다. 그는 늘 질문이 너무 많았다. 좋아, 미끼를 물어 주지.
"카론의 건널목이다. 이븐타이드를 나머지 태양계와 연결하는 주 통신 기지지." 내가 말했다.
"그 AI가 말한 곳이로군… 여기는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때 브레이 박사가 나섰다. "우리는 클로비스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하도록 하러 왔을 뿐이에요. 내가 구조 신호를 보낸 후에, 외부 통신 링크를 모두 차단할 거예요. 여기 일이 마무리되면 다시 모일 거고요."
신참은 아직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질문이 백만 개 있었다. 브레이 가문에 대해서라면 우리 모두 마찬가지지만.
"웨슬리. 내가 당신을 왜 데려왔는지 잊었나요?" 브레이 박사가 불쑥 물었다. 잊지 않았다. 그저 잠시 정신이 팔렸을 뿐.
"브레이 박사님이 신호를 보내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형식적인 절차는 접어 둬요, 웨스. 그냥 전파 차단기를 준비해 줘요."
네, 네. 시작하겠습니다.
신참은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브레이 박사는 그를 경호원 삼아 데리고 왔다고 주장했다. 내 생각엔 그저 그자를 시야 안에 두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그 AI가 당신을 손녀딸이라 하더군." 신참 엑소가 말했다. 그는 거침이 없었다. 박사가 말해 줄까?
"그랬죠." 박사가 대답했다.
"그리고 날 가족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당신과 나도 가족이라는 건가?"
"비슷해요."
"이야기하기 싫은 건가?"
"정체성 업로드에 대한 이야기는 하면 안 돼요. 바람직하지 않은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죠."
"내가 오늘 작동하기 시작했을지는 몰라도, 바보는 아니야. 내게 말하지 않는 것이 뭐지?"
진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저 안쓰러운 친구한테 그냥 말해 주시죠. 브레이 박사가 한숨을 쉬었다.
"난 클로비스와 달리, 당신의 운명을 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내가 뜻대로 할 수 있었다면 아마 당신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겠죠."
이건… 심했다. 엑소는 상처받은 눈치였다.
"난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브레이 박사가 조금 누그러졌다. "이봐요…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는 알아야 해요.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 셈이잖아요. 내가 모르는 편이 낫다고 하면, 내 말을 믿어 줘요."
"결국 당신도 내 대신 결정을 하겠다는 거군. 클로비스처럼."
박사를 궁지에 몰았다.
"난 클로비스가 아니에요."
나는 다시 눈앞의 과제로 주의를 돌렸다. 이런. 이 시스템 뭔가 이상한데.
"재미있는 환담을 끊어서 죄송하지만, 우리 통신 시스템 전체가 장악당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클로비스예요." 브레이 박사는 격분했다. "망할 거짓말쟁이… 내부 통신 시스템은 멀쩡했던 거예요. 클로비스 때문에 수십억 명이 죽을 거예요. 이건 됐고, 즉시 대피선에 사람들을 태워야 해요. 벡스와 클로비스는 그 후에 제가 처리하죠. 영영 끝장을 내겠어요."
세상에. 진짜로 그러려는 모양이었다. 이 달을 통째로 폭발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가족은 미쳤다. 여기서 나가야겠다.
그리고 브레이 가문 사람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
5. 되찾은 기억; 레바-3
6월3일/5:01PM엘시가, 아니, 브레이 박사가 방금 나쁜 소식을 가지고 왔다. 클로비스 AI가 벡스를 행성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박사에게 그것을 막을 계획이 있었지만, 모두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박사가 존경스러웠다.
우리에게도 박사에게 나쁜 소식을 전했다. 우리는 벙커 E15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키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벡스가 이미 모조리 죽인 후였다. 정말… 끔찍했다. 편히 쉬기를, 친구들이여…
브레이 박사는 대피선에 탑승할 계획을 세우는 중이라고 말했지만, 지난 5분간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겠지. 너무 늦기 전에 벙커로 돌아오지 못한 것에 대해. 아니면 벡스 점령에 자기 잘못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볼란티스로 가는 조달 작업을 지휘하고, 수많은 벡스를 죽인 잘못.
박사가 진실을 알면 얼마나 좋을까. 클로비스가 자기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나는 말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녀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우리는 친구였다. 친한 친구. 그런데 이제 그녀는 나를 레바-3으로만 알고 있었다.
앗, 박사가 말하려는 모양이었다.
"모두 잘 들어요. 지금쯤 벡스가 터널 안에 쫙 깔렸을 거예요. 그러니까 눈밭을 걸어서 대피선으로 가야 해요. 목적지는 북위 55° 52', 서경 44°11'니까,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그쪽으로 오세요. 엑소는 전원 적외선 센서를 켜고 무기를 장전해 둬야 해요. 우리는 모두를 행성 밖으로 대피시킬 거예요. 제가 약속할게요."
브레이 박사는 늘 공감 능력이 강했지만, 그동안은 그것을 실천에 옮길 입장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박사는 신참 엑소를 옆에 두고 앞장섰다. 우리가 간다.
어두웠다. 바람이 심했다. 적외선 센서 덕분에 이 눈보라 속에서도 몇 미터마다 벡스가 보였다. 지금까지는 선수를 치는 데 성공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총격음)
내 말이 너무 성급했나 보다. 내 왼쪽에 둘이 나타났다.
(총격음)
놈들을 잡았다.
(총격음)
내가 당했다.
"레바가 당했다!"
(총격음)
신참, 엄폐 고마워. 그런데 10초 정도 늦었네.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브레이 박사가 내 옆에 무릎을 꿇었다. "레바… 미안해요."
"우리 모두 예상하고 시작했잖아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우리가 예상했던 건 영원히 사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죽어 가면서도 남들에게 힘이 되려 하고 있을 뿐이었다. 망할 공감 프로토콜. 엘시와 내가 친구가 된 것도 그 덕이었지.
"내가 기록 보관소에서 당신의 기억 저장소를 찾겠어요. 약속해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박사가 정말 연구소로 돌아간다면…
"엘시. E1-815 뱅크예요. 그의 사무실에 있어요."
내가 박사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온…세….상이 흐릿해……지며 공…허….속으…로…….빠져들……고있었…으니……까…………………………………………………………
6. 되찾은 기억; 헥터-6
6월3일/9:34PM이븐타이드에 돌아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폐허 그 자체였다. 이런 꼴을 보게 되다니 슬펐다. 하지만 나는 유로파를 떠나야 했다. 브레이 박사가 온 행성을 날리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11시 방향에 대피선이 보인다." 정보 고맙군, 이름 없는 엑소.
"모두 대기해요!" 브레이 박사가 말하면서 대피선 주위의 벡스들을 가리켰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해요." 박사가 말했다. "전원—"
"엘리자베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말했다. 이럴 수가. 그 AI였다. 우리 통신 채널을 모두 장악한 것이었다. 모두에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함선에 발을 들이지 마라."
"꺼져요, 할아버지." 박사가 받아쳤다.
"그리고 내의 새 친구, 너는 어떡하겠느냐?" AI가 물었다. 이름 없는 엑소에게 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브레이 박사가 이름 없는 엑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여기 도착한 후로 내내 박사에게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누군지 말해라. 그러면 여기 남겠다." 엑소가 말했다. 뭐야? 가족 드라마라도 찍겠다는 거야?
브레이 박사는 노발대발했다. "이럴 시간이 없어요!"
"내 친구, 지금까지 알아내지 못했다니 의외로군." AI가 대답했다.
"나는 클로비스 브레이다. 당신처럼." 엑소가 말했다.
"맞다. 클로비스-1이지." AI가 달뜨다시피 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 인생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여느 엑소처럼 가장 기본적인 감정 형태만 남아 있는 상태지. 네 친구들이 떠나는 것을 막아 주면, 내가 너의 인생에 대해 모두 이야기해 주마."
잠시 침묵이 흘렀다. 브레이 박사는 클로비스-1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부탁이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또 다른 클로비스는 필요 없어." 나는 그녀가 진심을 담아 말하는 것을 전에도 보았지만 이번엔 차원이 달랐다. 이건 거의… 간청에 가까웠다.
클로비스-1과 브레이 박사의 눈길이 마주쳤다.
"꺼져, 노친네." 클로비스-1이 자기 통신 채널에 대고 말했다. 브레이 박사는 신이 났다. 우리 모두 그랬다. 휴우.
"너희는 아직도 신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구나. 별수 없지." AI가 말했다.
방금 그게 무슨 의미—
(요란한 폭발음)
시스템 오프라인
7. 되찾은 기억; 우나-8
5월19일/8:00AM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아직은 그게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브레이가 와 있었다. 얻어맞은 듯한 모습으로.
"깨워요." 그녀가 요구했다.
깨우라고?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을. "괜찮으세요, 브레이 박사님? 상태가 나빠 보이는데요." 내가 말했다.
"우나. 깨워요. 당장." 이 어조는, 농담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지. "깨어나고 계십니다."
"고마워요, 우나. 할아버지, 제 목소리 들리세요?" 박사가 물었다.
"에… 엘리자베스?" 남자는 인공호흡기 뒤에서 쌕쌕거렸다. 말하기는커녕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박사는 왜 삶의 끝에 이른 노인을 괴롭히는 것일까?
"말하지 말고 듣기만 해요. 유리길이 침투당했어요. 벡스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거예요. 놈들이 그저 밀려들어와서… 모조리 죽여 버렸어요, 할아버지."
어, 뭐라고?
"제가 빠져나오면서 남은 방어 시스템을 마저 가동하긴 했는데,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예요. 차원문이 그냥 열려 있어요. 벡스는 꾸역꾸역 밀려들어오고요. 대피 프로토콜을 가동할 거예요. 암호를 알려 주세요."
"내… 백업." 클로비스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백업을 작동시켜라."
"하지만 그러면…"
"나는 죽겠지. 그래. 하지만 나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튀는 피를 닦았다. 누구에게나 품위 있게 숨을 거둘 자격이 있다.
"시간이 없어요, 할아버지. 당장 대피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죽어요."
노인은 눈빛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유산이 먼저다… 엘리자베스." 노인이 말했다.
겉모습이 어찌 됐든 그녀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몇 번이나 초기화해도 상관없었다. 우리의 깊은 곳에 있는 본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엑소는 모두 잘 알고 있다.
브레이 박사가 일어서서 나가려 했다. "알았어요."
설마 그건 아니겠지?
박사는 문간에서 잠시 멈추었다. "할아버지는 후회할 거예요. 살아서나 죽어서나요."
8. 되찾은 기억; 미아-9
6월3일/9:45PM위이이이이이이이잉. 소리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일어섰다.
우리 대피선은… 사라졌다. AI가 파괴했다. 그 와중에 우리는 몽땅 죽을 뻔했다. 사실 일부는 죽은 것 같다…
맞았다. 세상에. 헥터…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뭐야… 그자가 무슨 짓을 했지?" 클로비스-1이 물었다. 모두 똑같이 궁금했고, 똑같이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는 브레이 박사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녀는 엉망이었다.
"할아버지… 당신은 괴물이야." 박사가 간신히 입 밖으로 낸 건 그것이 전부였다.
그가 다시 우리의 통신 채널에 등장했다. "필요악이었다, 손녀딸아. 전에도 말했지만, 벡스는 신호를 따라 행성 밖으로 갈 것이다. 놈들이 사라지면 차원문을 닫고 생산을 재개하면 돼. 그때까지 살아남고 싶다면 엑소과학으로,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권하마."
우리 중에 그러고 싶은 사람은 없을 터였다.
특히 브레이 박사는 더욱더. 박사는 클로비스-1에게 기대서 있었다. 그렇게 패배감에 젖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할아버지가 이겼어."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런 말 하지 마요.
"아직은 아냐." 클로비스-1이 대답했다. 그에게는 아직 투지가 남아 있었다.
"이제 방법이 없어요. AI에게 한 방 먹은 거예요."
"차원문을 닫으면 돼."
"어떻게 닫는다는 말이에요? 우리 꼴을 봐요. 간신히 서 있는 지경인걸요."
"클로비스는 나를 깨우면서 내가 특별하다고 말했다. 나를 위해 강력한 무기를 준비했다고 했지. 나는 무적이지만, 우선은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어."
박사는 미친 사람 보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납득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건 우리 잘못이야, 엘시. 지금의 모습이 어떻든 우리는 브레이 가문이지. 우리가 없으면 이 사람들은 아직 살아 있을 거야.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싸워야만 해."
일리 있는 말이었다.
브레이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살아 있는 이들은 모두 동의했다.
어디 해 보자.
9. 되찾은 기억; 안졸리-7
6월4일/1:05AMAI는 우리가 죽거나 살거나 관심이 없단 거지. 좋다. 그럼 직접 나서자고.
다들 클로비스의 사무실에 빽빽이 들어서 있으니 조용히 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숨어든 비밀 통로에도 벡스가 득시글거렸다. 오는 길에 몇 명을 잃었다.
여기에도 벡스가 지천이었지만, 다행히 클로비스 사무실의 벽과 창은 이런 상황에도 견디도록 설계되었다. 그는 돈을 아끼지 말라고 늘 말했었다. 그건 본인에게만 적용되는 것 같았지만.
클로비스-1은 스트랩으로 묶인 채 엑소 훈련 프로토콜을 실행하는 중이었다. 그의 수치는 우리가 여태 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기록을 깨는 것으로 모자라, 프로그램 자체를 거의 망가뜨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당연했다. 클로비스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자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최고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벡스라면 목숨을 걸고 도망치겠어." 클로비스-1이 훈련 모듈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어디 시험을 해 볼까요." 브레이 박사가 이렇게 말하고는, 잠긴 무기 캐비닛을 가리켰다. 안에는 무기가 두 개 들어 있었다. 하나는 번뜩이는 파동 소총, 하나는 칼날이 사슬톱을 닮은 반짝이는 검이었다. 티타늄도 벨 수 있을 것만 같은 물건이었다. 클로비스-1이 훈련을 받는 동안 우리가 캐비닛의 보안을 우회하려 해 봤지만, 허사였다.
클로비스-1이 다가가자 무기 캐비닛이 그를 스캔했다.
"다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클로비스 님." 캐비닛이 열리면서 말했다. 그는 검을 손에 들고 씩 웃었다. "소총은 당신이 가지지." 클로비스-1이 브레이 박사에게 말했다.
"그래도 될까요?"
"그러지 않으면 함께 벡스를 처치하면서 멋져 보이기 힘들잖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총을 들어 어깨에 멨다. 멋져 보였다. 브레이 박사는 캐비닛에서 또 무엇을 집어 들더니 주머니에 넣었다. 기억 저장소 같았다. 저게 왜 필요한 거지?
"어때요?" 브레이 박사가 물었다.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군." 클로비스-1이 검의 만듦새에 감탄하며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구내 방송 시스템에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또 그놈의 AI다. 늘 보고 있고, 늘 듣고 있다.
"네가 강하다고는 해도 이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벡스가 클라우드 기억 수집 시스템을 교란해서, 너희 기억 저장소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전송하고 있지 않다. 즉, 거기서 죽는 자는 그 이전의 임프린트부터 다시 만들어진다는 뜻이지."
"그럼 지금 임프린트를 저장하고 그걸 사용하죠. 일부는 여기 남을 거예요. 우리를 계속 되살려야 하니까요." 브레이 박사가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급격 기억 퇴화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벡스는 수가 많고 교활하다. 놈들이 상황을 알아차리고 이곳을 덮치는 건 시간문제야. 꼭 해야겠다면… 온 힘을 다해 싸워야 할 것이다."
사무실 밖과 복도에서 불이 커졌다. "내가 무기고를 열었다. 바보짓이긴 하지만, 네가 시도하는 것을 돕지 않으면 내가 더 바보겠지."
"그렇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한 일이 용서되진 않아요. 사람들이 죽었어요. 우리가 되살리지 못할 사람들이요." 브레이 박사가 말했다. 그녀는 굽히지 않았다.
"용서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약속만 받으면 돼."
역시 속셈이 있었군.
"차원문을 파괴하지 말아 다오."
"누가 차원문을 파괴한대요?"
AI가 한숨을 쉬었다."네가 그랬지. 처음 시도했을 때 말이야."
"…처음이요?"
"네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그 기억 저장소는 엘리자베스-1의 것이었다."
브레이 박사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어째서죠?"
"네가 내 편에 있어 주길 바랐으니까."
클로비스-1은 분통을 터뜨렸다. "이제 너무 늦었어."
브레이 박사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진정시켰다. "파괴하지 않을게요, 클로비스." 그녀는 클로비스-1에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좋아요. 다들 무기를 챙겨요. 힘든 싸움이 될 테니까요."
10. 되찾은 기억; 노에-2
6월4일/6:00AM우리는 전력을 다해 유로파를 휩쓸었다.
그런 광경은 난생처음 보았다. 그의 힘과 민첩성은… 따를 자가 없었다. 벡스를 연이어 버터처럼 베는 그의 검은, 수천 명의 원혼을 업고 복수를 갈구하는 밴시처럼 울부짖었다.
클로비스-1의 내면에는 고통이 남아 있는 듯했다.마치 우리가 잃은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전의 생에서 공포가 들어차 있던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싸우는 듯했다. 우리를 모두 유로파로 데려와서 지옥문을 연 것도 바로 그 공포 때문이었으리라.
그 공허가 다시 차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공포가 아니라 사랑으로.
브레이 박사는 그의 옆에 용맹스러운 모습으로 소총을 들고 서서, 맹렬한 의지력으로 돌격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였다. 희망의 인도를 받는 지도자들.
우리는 쓰러졌다. 그리고 또 일어났다.
1, 2, 3, 4, 5, 6, 7, 8, 9, 10.
우리는 그들과 나란히 싸웠다. 유로파를 가로질러 차원문이 있는 유리길까지 갈 능력이 있는 자는 모두 함께했다. 우리는 쓰러졌다. 그리고 또 일어났다.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우리는 싸우고 또 싸웠다. 쓰러지고 또 일어났다.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우리는 매번 조금씩 가까워졌다. 매번 벡스의 사체가 점점 높이 쌓였다. 벡스는 광분했다.
벡스는 더 빨리 밀려들고 더 치열하게 싸웠으며, 수도 늘어났다. 놈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 우리를 공격했다.
하지만 클로비스-30와 브레이 박사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검은 우아하게 허공을 가르고, 소총은 천둥처럼 연달아 총알을 뿜었다. 우리는 쓰러지고 또 일어났다.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계속되는 리부팅에는 대가가 있었다. 많은 기억 저장소가 급격한 과부하로 인해 타 버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쓰러지고 또 일어났다.
41, 42, 43.
우리는 마침내 차원문이 있는 유리길의 내실에 도달했다. 끊임없이 밀려나오며 그곳을 지키는 벡스 무리에게 가려, 차원문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거대 벡스가 있었다. 브레이 박사가 이야기했던 그놈이었다. 보호막을 두르고 허공에 떠 있는, 히드라를 닮은 종말의 벡스.
그 얼굴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브레이 둘은 강인하게 버텼다.
둘은 얼마 남지 않은 우리를 집결시켰다. 그리고 우리를 이끌고 엄두도 나지 않는 임무를 수행하러 나섰다.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임무를.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충분한 용기와 연민이 있다면, 불가능은 없다는 진실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함께, 이 무분별한 기계들의 손에 죽어 간 영혼들의 목소리를 실은 통곡이었다.
클로비스-43의 마지막 공격과 함께 검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일은 해냈으니까.
괴물 같은 히드라의 마지막 파편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환호성을 올렸다. 남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브레이 박사는 내게 그 영광을 넘겼다. 그 모든 것이 시작되었을 때 내가 있었으니까.
지휘관들이 도망쳤다. 차원문이 닫혔다. 우리가 해냈다.
"자, 이제 차원문을 파괴해야겠군." 클로비스-43가 말했다. 그는 차원문을 영원히 없애 버리기를 원했다.
"안 돼요." 브레이 박사가 말했다. 뭐지? 나는 그녀가 동의할 줄 알았다.
"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잖아. 파괴해야 한다."
"클로비스. 나와 당신, 그리고 그 외의 엑소들… 우리는 약속받은 삶을 살 자격이 있어요. 이 차원문이 파괴되면 우리도 죽고, 그 삶도 사라져 버려요. 우리가 사라지고, 벡스가 또 돌아오는 법을 찾는다면 인류는 파멸하고 말겠죠. 그러니까 차원문을 닫아요. 그리고 열쇠를 삼켜 버리죠. 하지만 차원문을 파괴하는 건 안 돼요."
클로비스-43가 한숨을 뱉었다. "이 일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겠다."
"마찬가지예요." 박사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11. 되찾은 기억; 클로비스-43
6월13일/3:46PM"결국 이렇게 됐군." 나는 농을 치듯 말했다.
"어떻게 됐다는 거죠?" 엘시가 물었다.
"내가 눈보라 속에서 산책이나 하자고 당신을 엑소과학으로 다시 데려온 건 아니지." 내가 말했다.
엘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겠죠. 그럴 거라 생각하진 않았어요."
"선물이 있어. 저 문 너머에 말이야."
"저 문 너머에는 그가 있는데요."
"바로 그거야." 나는 엘시의 어깨를 두드리고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클로비스 AI가 혼자 그곳에 있었다.
"유로파의 구원자들 아닌가. 식민지의 나머지 지역도 청소한 건가?" AI가 물었다.
"거의 끝났지." 나는 대답하면서 엘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AI도 이미 알고 있다.
"이럴 것 없잖아, 클로비스-1."
"이제 43이야. 그리고 내 이름은 이제 클로비스가 아니야." 나는 엘시를 보았다. "당신이 해 주겠어?"
"좋죠." 그녀는 주 콘솔로 다가가, 스캔을 하고 로그인했다.
"하지만 난—" 그는 간청하려 했다. 우리는 뱀 기름처럼 미끈거리는 그의 말이 다시는 귓가에 닿지 않게 할 것이었다.
엘시는 복잡한 일련번호를 콘솔에 입력했다. 그런 후 최후의 주문을 말했다. "인공 지능 가동을 중지해."
거대 엑소의 눈동자에 들어와 있던 불이 꺼졌다. 엘시가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지금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겠지.
"이제 됐어요." 그녀가 말했다. "드디어 이 얼음 지옥 같은 달을 떠나는 건가요?"
아직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있어."
"정말 괜찮겠어요? 이건 마지막 방산충 체액인데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벡스의 손에, 그리고 클로비스의 만행에 잃은 인명은 대부분 다시 돌아오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우리는 일부나마 살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행성 밖으로 보냈다. 이제 우리 둘뿐이었다. 곧 영원히 헤어지게 되겠지만.
엘시가 우려하는 것도 이해한다. 엘시에게는 드디어 시간을 함께 보낼 만한 할아버지가 생길 테고, 나는 다시 리부팅할 것이었다. 그녀는 이유를 알 자격이 있었다.
"E1-815 뱅크를 당신의 현재 임프린트에 추가했을 때, 당신에게 기억이 모두 돌아왔지. 가족과 형제자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 고통과 상실의 기억. 죄책감까지."
"네…"
"엘시, 내가 그렇게 만든 거야."
"당신은 그가 아니에요."
"나는 영원히 그의 유령일 거야. 우리가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말이지.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그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자격이 있어."
엘시는 고개를 숙였다.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그건 내게 끝도 없는 고통을 주었다. 우리가 한때 행복한 가족이었던 세계가 있었다. 이곳은 그 세상이 아니다.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 앞에 태블릿을 놓았다.
"이게 뭐죠?"
"그의 일기다. 원한다면 가져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디 넣고 잠가 버리고. 어차피 대부분 암호화되어 있어. 내용을 조금 읽어 보니, 나는… 공포로 움직이고, 유산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더군. 다시는 그런 인물이 되지 않겠다. 이제 너와 형제자매들이 브레이의 유산을 올바르게 재건하거나, 아예 무너뜨릴 때가 됐다."
엘시가 얼마나 간절이 그러기를 바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해낼지도 모른다.
"알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작별 인사 하는 법을 몰랐다. 하지만 엘시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당겨 꼭 끌어안았다. 내게는 평생 처음인 포옹이었다. 그 순간에 우리는 함께였다.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이 몽상처럼 스쳐갔다. 거울 너머를 잠깐 들여다본 것처럼.
나는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하지만 흘리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감정은 있었으니까. 그녀도 그랬다.
"부탁 하나 들어주겠어?" 내가 물었다.
"얼마든지요."
"그 엑소가 내게 붙여 줬던 별명… 그걸 내 임프린트에 추가해 주겠어? 내 번호와 함께?"
그녀는 큭큭 웃었다. 그 소리를 또 들으니 좋았다. "진짜 마음에 드나 보네요?"
"생각할수록 마음에 드네."
"알았어요, 밴시."
나는 낙하기로 들어섰다. 문이 닫혔다. 엘시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44의 삶은 어떨지, 두고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