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몬트리올 엑스포스4. 시애틀 매리너스
4.1. 1989 시즌4.2. 1990 시즌4.3. 1991 시즌4.4. 1992 시즌4.5. 1993 시즌4.6. 1994 시즌4.7. 1995 시즌4.8. 1996 시즌4.9. 1997 시즌4.10. 1998 시즌
5. 휴스턴 애스트로스5.1. 1998 시즌
6.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6.1. 1999 시즌6.2. 2000 시즌6.3. 2001 시즌6.4. 2002 시즌
7. 뉴욕 양키스8.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기9.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6.4.1. 1999~2002년 4년간의 기록 평가
6.5. 2003 시즌6.6. 2004 시즌9.1. 2009 시즌
10. 연도별 성적1. 개요
랜디 존슨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2. 아마추어 시절
고등학교 졸업 후 1982년 드래프트에 참가한 존슨은 4라운드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지명을 받았다. 이때 애틀랜타는 당시 기준으로 4라운드 지명자에게는 매우 파격적인 계약금인 5만 달러를 제시했는데, 존슨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제안을 거절하고 USC에 진학하게 된다. 당시 팀 동료이자 투타 겸업을 하던 마크 맥과이어는 존슨의 피칭을 보고 아, 저런 사람만이 투수를 할 수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타자로 완전히 전업하였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혔다.[1]3. 몬트리올 엑스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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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 존슨의 선수 초창기 시절. 그러니까 존슨 말년의 사진이 아닌, 20대 시절이다. |
2년 후인 1985년, 존슨은 동 해 드래프티 중 전체 4순위 유망주로 평가받았었지만 하필 당해에 성적이 부진한 나머지 순위가 많이 밀려 2라운드에 몬트리올 엑스포스에 지명받았고 몬트리올과의 입단 계약을 맺었다.
3.1. 1988 시즌
208cm라는 NBA 평균 신장보다 큰 키와[2] 무시무시한 강속구로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프로에 와서는 무슨 소년야구만화의 주인공처럼 제구 불안에 시달리는 그렇고 그런 유망주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 당시에는 오버핸드였다. 리키 헨더슨은 존슨과의 첫 대결에서 4타석, 4볼넷, 5도루, 4득점을 따내며 존슨을 아주 가지고 놀았을 정도. 1988 시즌에는 4경기 출장에만 그치며 빅리그의 쓴맛을 맛보았다.3.2. 1989 시즌
1989 시즌에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제대로 겪으며 폭망했고 유망주로서는 비교적 많은 나이와 제구불안 때문에 엑스포스는 1989년 시즌 도중 그를 마크 랭스턴과 트레이드시켜 시애틀 매리너스로 보내버린다.[3]4. 시애틀 매리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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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1989 시즌
시애틀 트레이드 이후 첫해에 선발 투수로써 기회를 받으며 몬트리올 시절보다는 나아진 모습을 보여줬지만 제구불안 문제로 볼질을 하는 등 명과 암이 공존한 모습이었다.4.2. 1990 시즌
그러나 1990시즌부터 10승 이상과 3점대 평균자책점을 꾸준히 찍어주는 준수한 투수가 되었다. 1990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고 당대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교타자 웨이드 보그스를 상대로 단일 경기에서 3K를 잡아낸 최초의 좌완이 되기도 했다. 생애 첫 올스타전 선정은 덤. 하지만 제구불안은 여전해서 볼넷왕에 오르는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4.3. 1991 시즌
1991년에도 준수한 활약을 하긴 했지만 제구불안은 여전하여 구단 단일시즌 최다 볼넷 허용이라는 영 좋지 않은 타이틀을 가져가는 등 여전히 리그를 지배하는 에이스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상태였다.4.4. 1992 시즌
1992년 7월에 8연패라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자 경기 전 상대팀의 한 투수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게 바로 놀란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은 상대팀 선수인 그를 성심성의껏 도와주었고, 라이언과 전담코치의 노력 끝에 제구력을 안정시키게 된다.[4]놀란 라이언의 교육이 효과를 봤는지, 랜디 존슨은 이후 두 달 조금 넘는 남은 시즌 동안 3.30 ERA를 찍었고, 9월 27일 놀란 라이언과의 맞대결 경기에서는 MLB 최후의 160구 경기를 치르며 8이닝 18K 경기를 치렀다.[5] 1992년 시즌이 끝났을 때, 존슨은 만 29세의 나이로 일반적인 에이징 커브에 따르면 최전성기가 지나는 시점이었고 [6] 이때까지 커리어를 살펴봐도 49승 48패 평균자책점 3.73에 BB/9가 5가 넘는 구위는 좋은데 제구가 불안한 투수의 전형이었다.[7] 그러나...
4.5. 1993 시즌
1992년까지 3년 연속 볼넷왕에 5~7개 수준의 BB/9을 기록하던 존슨은 1993년부터 커리어가 끝날 때까지 BB/9이 4개 이상인 시즌이 없다. 제구가 잡힌 파워피쳐가 얼마나 무시무시해지는지를 제대로 보여준 것.[8]라이언을 만나고나서 존슨은 제구가 안정되었지만 그해 12월 개인 훈련을 하느라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자책감에 빠진 존슨은 야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듣고(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MLB 역사에 남을 대투수로 성장하게 된다.
1993년에 35경기(34선발) 19승 8패 1세이브 ERA 3.24/135ERA+ 3.05 FIP 255.1이닝 308K/99BB 10완투 3완봉승 fWAR 7.0 bWAR 6.6[9]을 기록하며 드디어 각성했고, 사이영 상 2위를 기록하였다.
여담으로 1993년 트레이드 데드라인 때 존슨은 당시 최강팀이였던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트레이드 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당시 토론토의 GM 팻 길릭은 데드라인때 토론토의 전력을 어떻게든 상승시키기 위해 안전빵으로 두개의 별도 대형 트레이드 시나리오를 동시에 진행했는데, 그 대상 중 하나는 시애틀의 존슨이였고, 다른 하나는 오클랜드의 리키 헨더슨 이였다. 길릭은 오클랜드의 GM과 먼저 대화를 하여 트레이드에 구두합의를 하였지만, 당시 헨더슨은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어서 일단 그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였다. 헨더슨이 거부할 가능성이 꽤 크다고 봤던 길릭은 안전빵으로 시애틀과도 존슨을 대상으로 네고를 하였고, 결국 시애틀과도 사실상 트레이드에 합의한 상태였다. 근데 데드라인이 되기 불과 몇시간 전에 헨더슨이 의외로 트레이드에 동의하자, 길릭은 사실 원했다면 여전히 존슨을 대신 선택할 수 있었지만 먼저 네고를 한 오클랜드 GM과의 의리를 생각하여 결국 핸더슨을 대상으로 트레이드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헨더슨이 토론토에서 그리 큰 활약을 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팀이 결국엔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던 것을 보면, 만약 존슨이 이 때 토론토로 갔다면 그의 커리어 첫 우승은 2001년보다 훨씬 전인 1993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0]
4.6. 1994 시즌
1994년에는 파업에도 불구하고 23경기 13승 6패 ERA 3.19/152ERA+ 3.18 FIP 172이닝 204K/72BB 9완투 4완봉승 fWAR 5.2 bWAR 5.5를 기록하며 사이영 투표 3위에 올랐다.[11] 4월 11일 토론토를 상대로 2.1이닝 11실점을 했는데 이는 본인의 1경기 최다 실점 기록이다. 4월 25일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로저 클레멘스를 상대로 2실점 완투승을 거뒀다.[12]4.7. 1995 시즌
[kakaotv(396036942)]1995년에는 파업 여파가 이어지며 시즌이 단축되었음에도 30경기 18승 2패 2.48 ERA/193 ERA+ 214.1이닝 6완투 3완봉승 294K/65BB 1.045 WHIP fWAR 9.5 bWAR 8.6의 기록을 남기며 문자 그대로 상대 팀 타선을 초토화시켜버렸고, 커리어 첫번째 사이 영 상을 수상한다. 이 해에 기록한 타출장 비율은 .201피안타율/.266피출루율/.303피장타율로 드디어 제구와 장타 억제력을 겸비한 투수로 성장했다. 승률 역시 18승 2패로 NL의 그렉 매덕스(19승 2패)와 함께 역대 최초로 200이닝 이상 승률 9할 시즌을 만들어냈다. 탈삼진 역시 4년 연속 1위를 찍으며 놀란 라이언 이래 최초의 탈삼진왕 4연패를 달성하게 되었다. FIP는 2.08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1위를 차지했다. RE:24 역시 58.79를 찍으며 아메리칸 리그 1위이자 외계인 성적을 찍은 그렉 매덕스(70.36)에 이어 메이저리그 2위를 차지했다. 랜디의 이 시즌이 더 뜻깊은 것은 이 해 시애틀은 창단 첫 지구우승을 달성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이 과정이 정말 극적인 것이, 이 때 시애틀은 8월 말까지 당시 지구 선두였던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게 10게임이나 뒤져있었다. 그러나 팀의 막판 스퍼트로 동률을 달성했고, 지구우승을 놓고 벌인 원게임 플레이오프에 3일 휴식 후 등판한 존슨은 완투승을 거두었다.
다만 이 때문에 디비전시리즈 1차전에 등판하지 못했고 시애틀은 뉴욕 양키스에게 1,2차전을 모두 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리 3일 휴식만을 취한 존슨은 3차전에서 선발승을 따내며 팀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리고 단 하루 쉬고 5차전 9회 동점 무사 1,2루 위기에서 등판해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결국 3이닝, 1실점, 6K 구원승을 거두는 괴물같은 활약으로 팀을 챔피언시리즈까지 진출시켰다. 다음 상대는 당대 최고의 핵타선이었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였는데 존슨은 인디언스를 상대로 3차전에서 비록 8회에 나온 수비에러로 인한 비자책점으로 선발승을 따내진 못하지만 8이닝, 2실점(자책1점)으로 승리에 기여했다. 그리고 2승 3패로 탈락위기에 몰린 팀을 위해 6차전 또다시 3일 휴식 후 등판하지만 타선의 침묵과 수비진의 지원을 받지 못해 7회까지 비자책 1실점만을 허용했음에도 팀은 0:1로 끌려가게 된다. 어쩔 수 없이 8회에도 등판한 존슨은 결국 시즌 말미 계속된 피로가 쌓였던 탓인지 3점을 내주게 되고 매리너스는 그대로 완봉패하며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탈락하게 된다. 하지만 양키스와의 디비전 시리즈에서 매리너스가 명승부를 펼치면서 당시 인기 저조로 연고지 이전 논란까지 있던 시애틀에 야구 열기를 불지폈고 이는 오히려 새구장 건립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해당 문단 참조.
랜디의 이 시즌은 MLB.com이 선정한 역대 사이영 상 순위 25위에 올랐는데 랜디의 전설적인 전성기의 포문을 본격적으로 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4.8. 1996 시즌
1996년에는 허리부상으로 14경기 등판에 그쳤고 일찌감치 시즌아웃이 되었다.4.9. 1997 시즌
허리 부상에서 1년 만에 회복하고 복귀한 1997년에 30경기 20승 4패 ERA 2.28/197 ERA+ 2.82 FIP 213이닝 291K/77BB 5완투 2완봉승 fWAR 7.0 bWAR 8.0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런데 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에서 전부 2위라는 트리플 콩라운을 기록하였고, 다승과 탈삼진에서 하나 차이로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며 리그를 초토화시킨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로저 클레멘스에게 사이 영 상을 내주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ALDS 1차전에서 5이닝 5실점 7피안타 3K/4BB로 망하면서 7이닝 2실점 9K/0BB의 마이크 무시나에게 패했고, 4차전에서는 8이닝 3실점 7피안타 13K/2BB로 분전했으나 7이닝 1실점 7K/3BB의 마이크 무시나에게 또 패하면서 팀도 탈락했다.4.10. 1998 시즌
이듬해에는 재계약과 트레이드[13]가 무산된 시애틀에서 9승 10패 4.33 ERA라는 영 좋지 않은 태업성 플레이를 펼쳤다.5. 휴스턴 애스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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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1998 시즌
시즌 중반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트레이드 후 10승, 1패, 평균자책점 1.28, 시즌 탈삼진 329K[14]로 진정한 괴수로 거듭나게 된다.[15][16] 아직까지도 2004년의 카를로스 벨트란과 함께 반년 렌탈의 레전설로 꼽힌다. 샌디에이고와의 1998 NLDS에서도 1차전 8이닝 2실점/4차전 6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1차전에서는 8이닝 0실점의 케빈 브라운에게 밀리고 4차전에서는 6이닝 1실점의 스털링 히치콕에게 밀리면서 2번 다 패배하며 팀도 탈락했다.6.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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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시즌이 끝나고 그해 겨울 자유계약선수가 되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치열한 영입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디백스의 4년 5,340만 달러 제안을 택하게 된다.[17] 그리고 이 결정은 신의 한 수가 되었고 진정한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프랜차이즈 기록 | |
단일 시즌 탈삼진 | 2001년 372K |
단일 시즌 K/9 | 2001년 13.410 |
단일 시즌 ERA | 2002년 2.32 |
단일 시즌 FIP | 2001년 2.13 |
단일 시즌 fWAR | 2001년 10.4 |
단일 시즌 bWAR | 2002년 10.7 |
단일 시즌 WHIP | 2004년 .900 |
단일 시즌 ERA+ | 2002년 195 |
단일 시즌 RE:24 | 1999년 65.56 |
단일 시즌 WPA | 1999년 6.2 |
6.1. 1999 시즌
랜디 존슨의 전설의 최전성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99년에는 1995년의 감동을 넘어서는 미친 활약을 했는데, 35경기 17승 9패 ERA 2.48 271.2이닝 364K/70BB 12완투 2완봉승 fWAR 9.5 bWAR 9.1을 기록하며 문자 그대로 상대 팀 타선을 초토화시켜버렸다.1999~2000년에 역사상 최고의 외계인 성적을 찍으며 2년 연속 만장일치 사이영 상을 수상한 옆동네 페드로의 임팩트에 묻히지만, 사실 랜디의 1999~2002년은 페드로 못지 않은 외계인 성적을 찍으며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최고의 임팩트를 보여주었다. 일단 1999년 35경기에 나와 먹은 이닝이 무려 271.2이닝인데 이는 현대 야구 투수들이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충격과 공포의 이닝이팅을 보여주었다. 본인의 장기인 탈삼진 역시 364K로 2위 케빈 브라운과는 무려 143개 차이가 난다. 그야말로 비상식적인 탈삼진 능력을 가진 셈. K/9 역시 12.059로 당연히 1위이며 내셔널리그에서 유일한 K/9 10+ 투수였다. 타출장 비율 역시 .208피안타율/.266피출루율/.335피장타율로 준수했다. 이닝을 많이 먹고 삼진을 많이 잡으면 그만큼 비율이 안 좋아진다고 하는데, 페드로의 외계인 비율만큼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한 수치다. HR/9 역시 1.0으로 준수했으며 BB/9도 2.3을 찍으며 출중한 제구력을 보여주었다. H/9는 6.9로 리그 2위를 했으며 WHIP 역시 1.020으로 리그 2위를 차지했다. 이 해에 랜디가 찍은 RE:24는 무려 65.56으로 2위와는 18.01이나 차이가 난다. RE:24가 누적 기록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압도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 해에 찍은 ERA 2.48은 내셔널리그에서 단 3명밖에 찍지 못한 2점대 ERA였으며, FIP 2.76은 내셔널리그에서 유일한 2점대 FIP였다. ERA+ 역시 184로 리그 1위. 물론 그 전설의 2.07-1.39에는 명함도 못 내밀지만 미친 이닝이팅과 탈삼진 능력 속에서도 출중한 제구력과 준수한 장타 억제력을 그것도 스테로이드 시대에 리그 최고 수준의 타자 친화 구장에서 보여주었기에 사이영 상은 받지 않는 것이 이상한 수준이었다. 너무나 세상 문자로 표현하기가 힘든 수준의 성적이었던지라 적수 없이 무난하게 통산 2번째 사이영 상을 수상하였고 양대리그 사이영 상 수상자 명단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마침 옆동네 페드로도 외계인 성적을 찍으며 사이영을 수상하면서 서로가 양대리그 사이영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며 본격적인 랜디-페드로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랜디의 이 시즌은 MLB.com 선정 역대 사이영 상 순위 13위에 오르며 2010년대 이후 투수들은 범접도 못할 만큼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충격과 공포의 성적을 35세 시즌에 보여주었는데 보통 투수들이라면 에이징 커브에 시달리는 시기이기에 더더욱 비상식적인 피지컬을 가진 셈이다.
6.2. 2000 시즌
이듬해인 2000년에는 35경기 19승 7패 ERA 2.64 248.2이닝 347K/76BB 8완투 3완봉승 fWAR 9.6 bWAR 8.1을 기록하며 전년도에 비해 성적이 약간 떨어지긴 했지만, 특유의 그 포스만큼은 여전해서 상대 팀 타선을 초토화시키기에 충분했다. ERA는 2.64로 리그 2위였지만 1위 케빈 브라운(2.58)의 홈구장은 당시 투수 친화 구장이었고 랜디의 홈구장은 타자 친화 구장이다. 따라서 ERA+는 181로 브라운을 제치고 1위를 찍었다. FIP는 2.53으로 지난해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여전히 내셔널리그에서 유일한 2점대 FIP였다.탈삼진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는데 2위 박찬호와는 130개 차이가 난다. K/9 역시 12.559로 압도적인 1위였으며 유일한 K/9 10+ 투수였다. WHIP는 1.118로 리그 3위, H/9는 7.3으로 리그 4위를 차지했으며 HR/9는 전년도보다 좋아진 0.8, BB/9는 전년도보다는 올랐지만 2.8로 여전히 3 미만을 유지했다. 이 시즌에 RE:24는 55.82로 지난해에 비해 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1위를 유지했다. 타출장 비율 역시 .224피안타율/.288피출루율/.356피장타율로 전년도에 비해 나빠지긴 했지만 워낙 높은 위치에 있었으니 내려와도 전혀 티가 안 났다. 결론적으로 전년도보다는 하락했어도 여전히 출중한 제구력과 충격과 공포의 이닝이팅은 덤이었기에 사이영 상을 받지 않는 것이 이상한 수준이었고, 결국 무난하게 2년 연속 사이영 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마침 옆동네 페드로도 2년 연속 외계인 성적을 찍고 사이영 상을 수상하며 2년 연속 랜디-페드로 사이영 상이 완성되었다. 이 시즌은 MLB.com 선정 역대 사이영 상 순위 14위에 올라 전년도 다음 순위로 이름을 올렸으며 2010년대 이후 투수들은 범접도 못할 만큼 여전히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6.3. 2001 시즌
랜디의 4년이 야구 역사상으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위대한 전성기였지만 그중에서도 2001년이 백미였다. 35경기(34선발) 249.2이닝 21승 6패 ERA 2.49 FIP 2.13 372K/71BB 3완투 2완봉승 fWAR 10.4 bWAR 10.1로 문자 그대로 외계인 성적을 찍어버리며 상대 팀 타선을 무참히 학살해버렸다. 이 시즌에 찍은 ERA 2.49는 팀 동료 커트 실링(2.98)과 함께 메이저리그에서 단 두명밖에 없었던 2점대 ERA였으며, 당연히 ERA+ 188 역시 압도적 1위였다. FIP 2.13은 내셔널리그에서 유일한 FIP 2점대이자 메이저리그 전체로 봐도 마이크 무시나(2.92)와 함께 메이저리그에서 단 두명밖에 없었던 2점대 FIP였다. 이 해 내셔널리그 FIP 2위가 3.05였기에 이 시즌의 랜디는 ERA로 보나 FIP로 보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한 투수였다.원래도 압도적이었던 탈삼진은 더욱 괴물로 진화하였다. 이 시즌에 기록한 372K는 메이저리그 최후의 단일 시즌 350K+ 투수로 남아 있으며, 2위와는 79개 차이로 따돌리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K/9는 무려 13.41로 야구 역사상 두번째로 규정이닝 투수로서 K/9 13+를 기록한 투수가 되었으며, 그 전설의 1999 페드로가 기록한 K/9 13.2를 넘어서며 역사를 새로 썼다. 그렇게 삼진을 잡아대면서도 제구력도 미쳐 날뛰었는데 H/9는 6.5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1위를 차지했고, BB/9는 2.6을 기록하며 탈삼진형 좌완 파이어볼러가 제구까지 미친 모습을 보여주었다. HR/9 역시 0.7로 내셔널리그 6위, 메이저리그 10위를 차지하며 탈삼진형 투수의 고질병 또한 없다는 듯이 출중한 장타 억제력을 보여주었고 WHIP도 1.009로 메이저리그 1위를 차지하며 결과적으로 모든 부문에서 커리어 하이를 경신하였다. 이 시즌에 .203피안타율/.274피출루율/.309피장타율을 기록하며 타출장 비율 역시 출중한 비율을 보여주었다. 이 시즌에 기록한 RE:24는 65.03으로 2위와는 12.1이나 차이가 난다. 이 시즌에 기록한 WAR은 fWAR, bWAR 둘 다 10을 넘었는데, 단일 시즌에 fWAR, bWAR 모두 10을 넘은 투수는 랜디의 이 시즌이 마지막이다.[18][19]
2001년 5월 9일 신시내티 레즈전에서는 정규이닝 20K라는 엄청난 대기록을 작성해내며 그야말로 인생 경기를 펼쳤다.
이 시기에 가장 유명한 건 역시 2001시즌 원투펀치 파트너였던 커트 실링과 함께 엄청난 활약으로 팀을 우승시킨 것. 뉴욕 메츠와의 1999 NLDS 1차전에서 8.1이닝 7실점으로 거하게 망했던 랜디는 2년 후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를 상대하면서 2차전 9이닝 3피안타 1볼넷 11K 완봉승을 기록하며 양키스 타선을 떡실신시켰다. 6차전 역시 7이닝 7K 2실점 호투에 화끈한 타선의 득점지원까지 더해지며 가볍게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끝장 승부에서 7차전 구원등판하여 구속과 구위는 평소보다 떨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한 구위와 제구를 앞세워 8회 2사부터 아웃카운트 4개를 쉽게 잡아내는 위력을 선보였다. 하긴 마무리 김병현이 두 게임이나 무너져버려서 어쩔 수 없었던 면도 있긴 했다. 결국 2001년의 활약으로 플레이오프에 약하다는 이미지는 깨끗이 날아갔으며, 함께 하드캐리했던 팀 동료 커트 실링과 함께 2001 월드 시리즈에서 공동 MVP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결국 랜디의 이 시즌은 세상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독보적인 성적을 기록하며 상대 팀 타선을 무참히 학살해버렸고, 사이영 상을 안받는 것이 이상한 성적이었다. 때마침 팀 동료 실링이 존슨 못지 않은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하였기에 원래라면 만장일치 사이영을 받고도 남을 성적이었지만 만장일치 사이영까지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실링을 2위로 밀어버리고 무난하게 사이영 상을 차지하며 3년 연속 사이영 상을 수상하였다. 월드시리즈 MVP까지 수상하며 메이저리그 MVP[20]를 제외한 받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받아간 랜디의 2001 시즌은 본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이자, MLB.com 역대 사이영 상 순위 5위에 오르며 단일 시즌으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21] 여담으로 3년 연속 랜디-페드로의 시대는 열어젖히지 못했는데, 페드로의 2001 시즌이 나올 때에는 압도적이었지만 부상으로 규정이닝을 채우지 못하며 아쉬운 시즌이 되었기 때문이다.
6.4. 2002 시즌
이듬해인 2002년에도 수많은 대기록을 작성해내며 전설의 시즌이 되었다. 35경기 24승 5패 ERA 2.32 260이닝 334K/71BB 8완투 4완봉승 fWAR 8.1 bWAR 10.7을 기록하며 상대 팀 타선을 무참히 떡실신시켰고, 1972년 스티브 칼튼 이래 최초의 좌완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다.[22] 이 시즌에 찍은 ERA 2.32는 1997년 이후 가장 좋은 ERA이자 내셔널리그에서 단 3명밖에 없었던 2점대 ERA였다. ERA+ 195 역시 2위 그렉 매덕스와는 36이나 차이가 난다. FIP는 2.66을 기록하며 커트 실링(2.40)에게 1위를 내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내셔널리그에서 단 3명밖에 없었던 2점대 FIP였다.탈삼진은 그 전설의 2001년보다는 하락했지만 334K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역대 두번째 6번의 단일 시즌 300K를 기록한 투수[23]이자 메이저리그 역대 최초 5년 연속 단일 시즌 300K를 기록한 투수가 되었다. 이 시즌에 기록한 300K는 2위 실링(316K)과 함께 메이저리그에 단 두명밖에 없었던 300+K 투수였다.[24] K/9 역시 11.562로 여전히 1위를 기록했다. 제구력 역시 여전히 명품이었다. H/9는 6.8로 내셔널리그 2위를 차지했고 BB/9는 2.5로 출중한 제구력을 보여주었다. HR/9는 0.9로 준수한 장타 억제력을 보여주었으며 WHIP는 1.031로 내셔널리그 3위를 차지했다. 타출장 비율 역시 .208피안타율/.273피출루율/.346피장타율로 여전히 준수한 비율을 보여줬다. 이 시즌에 기록한 RE:24는 60.19로 2위 실링과는 18.28이나 차이가 난다. WAR의 경우 fWAR에서는 FIP에 밀려 8.1이었지만 bWAR은 무려 10.7을 찍으며 2년 연속 bWAR 10을 넘어선 투수가 되었다. 연속 2년의 bWAR이 20.8로 20을 넘어섰는데, 때마침 fWAR도 2000-2001년에 20을 기록하면서 연속 2년의 fWAR과 bWAR 모두 20 이상을 기록한 역대 두 번째 투수로 이름을 올렸다.[25]
랜디의 2002 시즌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생애 첫 다승왕에 있다. 그동안 좋은 투구내용에도 실력 대비 갖가지 불운 등으로 다승왕을 차지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이 시즌에 무려 24승을 먹으며 다승왕을 차지하면서 드디어 염원하던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할 수 있었다. 다만 메이저리그 트리플 크라운은 실패했는데 옆동네 페드로가 ERA 2.26을 찍으며 MLB 전체 1위를 차지하면서 랜디의 메이저리그 전체 트리플 크라운을 저지했기 때문이다.[26]
사이영 상의 경우 본래 팀 동료 실링의 수상이 더욱 유리했었다. 하지만 실링이 9월에 부진하고 꾸준히 호투하던 랜디가 막판 스퍼트를 내면서 트리플 크라운을 먹어버렸고, 결국 실링을 또다시 2위로 밀어버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생애 첫 만장일치 사이영 상이자 4년 연속 사이영 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랜디는 그렉 매덕스 이후 역대 두 번째로 4년 연속 사이영 상을 수상한 투수가 되었다. 38세 시즌에 트리플 크라운을 먹어버린 랜디의 이 시즌은 MLB.com 선정 역대 사이영 상 순위 9위에 오르며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무시무시한 시즌이자 2010년대 이후 투수들은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전설적인 시즌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랜디-페드로의 시대는 이 시즌에도 물건너 갔는데 사실 2002년 페드로가 갖가지 세부 지표에서 1위를 차지하며 원래라면 만장일치 사이영 상을 타야 하는 성적이었지만, 적은 이닝에다 투승타타에서 그 지느님에게 밀려 억울하게 사이영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맺음은 아쉬웠는데 이어지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2002 NLDS 1차전에서는 6이닝 6실점 10피안타(2피홈런)로 난타당했고 팀도 0:3으로 탈락했다.
6.4.1. 1999~2002년 4년간의 기록 평가
활약상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면 충분하다. MLB.COM 선정 역대 최고의 FA 계약 1위. FA 기간 동안 존슨은 4년 연속 사이 영 상과 워렌 스판 상을 석권하고, 2001 월드 시리즈 MVP에 올랐다. 야구선수의 나이가 만으로 35세면 기량이 떨어져서 신인들에게 자리를 위협받거나 벤치신세가 될 수 있는데, 이 양반은 그 나이에 약물을 했건 안 했건 당대 최고 에이스들과 슬러거들이 즐비했음에도 상대 팀 타선을 초토화시켜버렸다. 게다가 애리조나의 홈구장 뱅크원 볼파크(현 체이스 필드)는 리그 최고 수준의 타자 친화 구장이다. 그런데 그런 구장에서 이런 사람같지 않은 성적을 올린 원투펀치 덕분에 당시의 라이트팬들에겐 타자친화 구장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최전성기 4년간의 누적 기록은 81승 27패 1030이닝 ERA 2.48 1417K이며 연평균 20승 7패 258이닝 ERA 2.48 354K[27]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성적을 찍어버리며 문자 그대로 리그를 학살했다.
참고로 클레이튼 커쇼가 2008년 데뷔 후 2014년까지 잡아낸 삼진 개수가 1445개로, 존슨은 커쇼가 7년 동안 잡아낸 삼진과 비슷한 개수의 삼진을 4시즌만에 잡아버린 셈이다. 동시기 옆동네에서 리그를 초토화시키던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함께 인간계를 아득히 초월한 성적을 찍었다. 이 4년간 케빈 브라운, 톰 글래빈과 정말 많이 붙었다.
6.5. 2003 시즌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와중 2003년에는 부상으로 고생하며 18경기 출장에 그쳤고 성적도 좋지 않았다.6.6. 2004 시즌
부상에서 1년만에 돌아온 2004년에는 35경기 16승 14패 ERA 2.60 245.2이닝 290K/44BB 4완투 2완봉승 fWAR 9.6 bWAR 8.4을 기록하며 40세 시즌인데도 화려하게 부활에 성공했고, 마치 보란 듯이 상대 팀 타선을 초토화시켜버렸다. 이 시즌에 찍은 ERA 2.60은 제이크 피비(2.27)에 이어 내셔널리그 2위를 기록했지만 피비의 홈구장은 투수 친화 구장이고 랜디의 홈구장은 타자 친화 구장이기에 ERA+는 176으로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했다. FIP는 2.30으로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내셔널리그에서 단 3명밖에 없었던 2점대 FIP였다.탈삼진은 290K로 최전성기 4년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한 탈삼진 능력을 자랑하며 메이저리그 1위를 차지했다. 다만 K/9는 10.624로 피츠버그의 올리버 페레즈(10.974)에 밀려 내셔널리그 2위를 기록하였다. 제구력 역시 더 좋아진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H/9는 6.5을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했고 HR/9는 0.7로 내셔널리그 7위에 오르며 출중한 장타 억제력을 선보였다. BB/9는 1.6을 기록라며 내셔널리그 4위에 올랐고 개인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다. WHIP 역시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는데 커리어 단 한번뿐이었던 0점대 WHIP를 기록한 시즌이 바로 이 시즌이었다. 0.900으로 메이저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단 3명밖에 없었던 0점대 WHIP였다. RE:24는 43.6을 기록하며 2위와는 5.3 차이로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했다. 타출장 비율 역시 커리어 하이를 경신하였는데 .197피안타율/.241피출루율/.315피장타율을 기록하며 최고의 제구력을 보여준 시즌으로 남게 되었다.
2004년 5월 18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전에서는 9이닝동안 117구를 던지며 11K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였다. 40세 시즌에 퍼펙트 게임을 기록한 랜디는 역대 최고령 퍼펙트 게임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였다.
부실한 팀 타선과 수비 때문에 실력 대비 16승밖에 쌓지 못하며 불운한 시즌을 보냈지만 부상을 딛고 40세 시즌에 다시 일어서 여전히 리그 최정상급 투수로 올라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시즌이었다. 그렇기에 원래라면 만장일치 사이영 상을 타야만 하는 성적이었지만 이 해 내셔널리그 사이영 상 수상자는 어처구니없게도 로저 클레멘스였다. 1997년의 경우 워낙 클레멘스가 트리플 크라운을 먹고 인간계를 완전히 초월한 성적을 찍었기에 랜디를 확실하게 제압했고 누가봐도 사이영 상 수상자임에 틀림없었지만, 이번엔 현지는 물론 한국에서도 논란이 되었다.[28]
이후 성적들과 비교해보면 1993년에 각성하고 1999년부터 진정으로 시작된 랜디의 역대급 전성기는 이때에 종료된다. 대부분의 지표들이 이때가 마지막 1위였고 탈삼진왕과 2점대 ERA, 2점대 FIP를 기록한 시즌 역시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2005년부터는 이전만 못한 시즌을 보내고 나이가 들어서 부상까지 오면서 황혼기를 맞이하게 된다.
7. 뉴욕 양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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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시즌 종료 후, 연봉부담 때문에 디백스는 랜디 존슨의 트레이드를 시도했고, 2000년 이후 번번히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던 뉴욕 양키스가 슈퍼에이스의 역할을 기대하며 그를 데려온다. 등번호는 41번[29] 그렇지만 뉴욕 언론들은 엄청난 관심을 보임과 동시에 간섭과 감시도 함께 했는데 이는 조용한 성격의 랜디에게 심리적으로 엄청난 압박이 되었다. 실제로 자꾸 귀찮게 구는 카메라를 거칠게 밀쳐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아무리 최강의 에이스라고 해도 어느덧 만 41세 노장이 되었는데 전성기가 지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7.1. 2005 시즌
결국 그 우려는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며 2005 시즌에는 17승 8패에 3.79의 ERA로 평균이상의 성적을 냈지만 기대했던 압도적인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2005년 지하철 시리즈 당시, 뉴욕 메츠에서 뛰던 구대성에게 '충격적인' 2루타를 허용하고, 뒤이은 구대성의 폭발적인 홈 대쉬[30]로 점수까지 헌납한 사건은 한국 팬들에게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7.2. 2006 시즌
여기에 2006 시즌에는 타선의 도움으로 2년 연속 17승을 기록했지만 처음으로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고 디비전 시리즈에서도 1경기 5.2이닝 5실점으로 부진, 체면을 심히 구기며 팀의 광탈에도 일조하고 만다.[31]8.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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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2007 시즌
결국 2007 시즌을 앞두고 형이 세상을 떠나자 가족과 함께하고 싶다며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에게 디백스로의 트레이드를 요청, 다시 피닉스로 돌아와서 2007 시즌에는 부상 때문에 몇 경기 못 나오며 친정팀에서 고생했다.8.2. 2008 시즌
2008년 44세라는 야구 선수로는 환갑 수준의 나이에도 11승 10패 184.0이닝 평균자책점 3.91를 기록하며 선전했고, 시즌 최종전에서는 통산 100번째이자 마지막 완투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또 2008~2009 시즌, 리그에서 2번째로 나이가 많은 선수였다.[32]9.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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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2009 시즌
2008 시즌 종료 후 디백스는 고령의 그를 더 안고갈 뜻이 없었고[33], 300승과 5000탈삼진, 조금 무리하자면 놀란 라이언 추월까지 목표로 하던 랜디 존슨은 다른 팀을 찾아야 했는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그의 새로운 팀이 되었다. 그리고 2009년 6월 5일, 워싱턴 내셔널스 원정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메이저리그 역대 24번째 300승에 성공한다. 300승 이후 처음으로 체이스 필드 원정경기에 등판하던 날에는 디백스 팬들도 뜨거운 기립박수를 보내줬다. 그리고 후반기에는 불펜으로 강등된 끝에 2010년 1월 5일 결국 은퇴를 선언, 역사적인 커리어를 마감했다.MLB 네트워크에서 선정한 그의 커리어 명장면 9개 The best of the Big Unit
10. 연도별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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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88 | MON | 4 | 3 | 0 | 0 | 0 | 26 | 2.42 | 23 | 3 | 7 | 0 | 25 | 1.154 | 151 | 0.4 | 0.7 |
<rowcolor=#ffc425>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89 | MON/ SEA | 29 | 7 | 13 | 0 | 0 | 160⅔ | 4.82 | 147 | 13 | 96 | 3 | 130 | 1.512 | 82 | 1.6 | -0.6 |
<rowcolor=#c4ced4>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90 | SEA | 33 | 14 | 11 | 0 | 0 | 219⅔ | 3.65 | 174 | 26 | 120 | 5 | 194 | 1.338 | 108 | 2.0 | 2.2 |
1991 | 33 | 13 | 10 | 0 | 0 | 201⅓ | 3.98 | 151 | 15 | 152 | 12 | 228 | 1.505 | 103 | 2.6 | 3.0 | |
1992 | 31 | 12 | 14 | 0 | 0 | 210⅓ | 3.77 | 154 | 13 | 144 | 18 | 241 | 1.417 | 105 | 3.4 | 2.4 | |
1993 | 35 | 19 | 8 | 1 | 0 | 255⅓ | 3.24 | 185 | 22 | 99 | 16 | 308 | 1.112 | 135 | 7.0 | 6.6 | |
1994 | 23 | 13 | 6 | 0 | 0 | 172 | 3.19 | 132 | 14 | 72 | 6 | 204 | 1.186 | 152 | 5.2 | 5.5 | |
1995 | 30 | 18 | 2 | 0 | 0 | 214 | 2.48 | 159 | 12 | 65 | 6 | 294 | 1.045 | 193 | 9.5 | 8.6 | |
1996 | 14 | 5 | 0 | 1 | 0 | 61⅓ | 3.67 | 48 | 8 | 25 | 2 | 85 | 1.190 | 136 | 1.6 | 1.2 | |
1997 | 30 | 20 | 4 | 0 | 0 | 213 | 2.28 | 147 | 20 | 77 | 10 | 291 | 1.052 | 197 | 7.0 | 8.0 | |
<rowcolor=#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98 | SEA/ HOU | 34 | 19 | 11 | 0 | 0 | 244⅓ | 3.28 | 203 | 23 | 86 | 14 | 329 | 1.183 | 135 | 7.6 | 5.7 |
<rowcolor=#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1999 | ARI | 35 | 17 | 9 | 0 | 0 | 271⅔ | 2.48 | 207 | 30 | 70 | 9 | 364 | 1.020 | 184 | 9.5 | 9.1 |
2000 | 35 | 19 | 7 | 0 | 0 | 248⅔ | 2.64 | 202 | 23 | 76 | 6 | 347 | 1.118 | 181 | 9.6 | 8.1 | |
2001 | 35 | 21 | 6 | 0 | 0 | 249⅔ | 2.49 | 181 | 19 | 71 | 18 | 372 | 1.009 | 188 | 10.4 | 10.1 | |
2002 | 35 | 24 | 5 | 0 | 0 | 260 | 2.32 | 197 | 26 | 71 | 13 | 334 | 1.031 | 195 | 8.1 | 10.7 | |
2003 | 18 | 6 | 8 | 0 | 0 | 114 | 4.26 | 125 | 16 | 27 | 8 | 125 | 1.333 | 110 | 2.4 | 1.6 | |
2004 | 35 | 16 | 14 | 0 | 0 | 245⅔ | 2.60 | 177 | 18 | 44 | 10 | 290 | 0.900 | 176 | 9.6 | 8.4 | |
<rowcolor=#fff>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2005 | NYY | 34 | 17 | 8 | 0 | 0 | 225⅔ | 3.79 | 207 | 32 | 47 | 12 | 211 | 1.126 | 112 | 4.1 | 5.8 |
2006 | 33 | 17 | 11 | 0 | 0 | 205 | 5.00 | 194 | 28 | 60 | 10 | 172 | 1.239 | 90 | 3.2 | 1.7 | |
<rowcolor=#e3d4ad>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2007 | ARI | 10 | 4 | 3 | 0 | 0 | 56⅔ | 3.81 | 52 | 7 | 13 | 4 | 72 | 1.147 | 125 | 1.6 | 1.4 |
2008 | 30 | 11 | 10 | 0 | 0 | 184 | 3.91 | 184 | 24 | 44 | 6 | 173 | 1.239 | 118 | 3.6 | 3.2 | |
<rowcolor=#fd5a1e> 연도 | 팀 | G | W | L | S | HLD | IP | ERA | H | HR | BB | HBP | SO | WHIP | ERA+ | fWAR | bWAR |
2009 | SF | 22 | 8 | 6 | 0 | 0 | 96 | 4.88 | 97 | 19 | 31 | 2 | 86 | 1.333 | 87 | 0.3 | 0.3 |
MLB 통산 (22시즌) | 618 | 303 | 166 | 2 | 0 | 4135⅓ | 3.29 | 3346 | 411 | 1497 | 190 | 4875 | 1.171 | 135 | 110.5 | 103.5 |
[1] 물론 이는 존슨에게 해주는 립서비스일 확률이 높다.[2] 실제로 USC(남가주대학) 시절까지 농구선수를 겸업하기도 했다.[3] 여담으로 맞트레이드의 당사자인 랜디 존슨과 마크 랭스턴은 6년 뒤인 1995 시즌 아메리칸 리그 서부지구 우승팀 결정 원게임 플레이오프에 각각 시애틀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선발 투수로 맞대결 했다. 결과는 랜디 존슨의 승.[4] 정작 라이언은 명예의 전당에 오른 투수들 중 제구력이 최하위권이였던 건 함정.[5] 이 경기는 라이언 역시 감명을 받았는지, 훗날 랜디가 300승을 달성한 뒤 AT&T 파크에서 가진 기념식에 참석해서 연설을 하며 그날 경기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6] 일부를 제외하면 랜디 존슨 정도의 고령에 더 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동 시대를 풍미했던 그렉 매덕스, 페드로 마르티네스도 만 29세 이후 성적은 그 이전과 확연하게 차이가 났을 정도이며 클레이튼 커쇼는 아예 이닝 이팅 능력이 사라지고 유리몸이 되었다. 배리 본즈나 로저 클레멘스 같은 금지약물 복용 선수들을 빼고 보면 30대 기록이 20대보다 훨씬 좋은 선수는 거의 없다.[7] 동 나이대 그렉 매덕스는 152승 평균자책점 3.18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132승 평균자책점 2.65 클레이튼 커쇼는 144승 평균자책점 2.45를 기록하고 사이영 상을 모두 3회 수상한 상태.[8] 1993년 이후 2004년까지 랜디 존슨은 부상 시즌(1996, 2003)과 태업을 의심 받은 1998년을 제외하곤, 모조리 사이 영 투표 3위안에 드는 기염을 토한다. 이 기간 동안 사이 영 투표 순위는 1위 5번, 2위 3번, 3위 1번. 2위를 한 시즌 중 2번은 약쟁이 로저 클레멘스에게 사이 영을 빼앗겼고, 1998년 휴스턴으로 트레이드 된 이후의 존슨은 리그 최고의 피칭을 펼쳤으므로 부상을 제외하곤 적수가 없었던 셈.[9] 이전에는 140~150개의 볼넷을 내주며 240~250개의 탈삼진을 잡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1993시즌의 기록은 존슨이 리그를 지배하는 에이스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는 매우 고무적인 성적이었다.[10]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면 이 선택은 토론토에게 큰 패착이 됐는데, 이 당시 존슨은 계약기간이 상당히 남아있었지만 헨더슨은 시즌 직후 바로 FA로 풀렸기 때문. 시즌 후 헨더슨은 토론토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클랜드로 돌아갔고, 토론토는 1994년 시즌부터 선발진이 크게 흔들려 장기간 암흑기에 들어가게 된다.[11] 이 해 AL 사이영 상 수상자는 데이비드 콘이었다. NL 사이영 상은 그렉 매덕스의 차지. 이 시즌에 매덕스는 본인 커리어 최저 ERA인 1.56을 기록했다.[12] 로저는 7이닝 3실점.[13] 당시 1997년 ALDS에서 시애틀에 패한 뉴욕 양키스가 랜디에게 반해 그를 영입하려 했는데 시애틀 측에서는 반대급부로 마리아노 리베라, 앤디 페티트를 요구했다고.[14] 시즌 종합 244⅓이닝 동안 19승 11패 3.28 ERA.[15] 삼진 개수로만 따지면 랜디 존슨이 전체 1위가 맞다. 단지 시즌 중간에 AL에서 NL로 옮겼기 때문에 기록이 나눠지면서(AL에서 213K, NL에서 116K) 어느 쪽에서도 수상을 못 한 것일 뿐이다. 당시 AL의 탈삼진 1위는 271K의 로저 클레멘스, NL은 300K의 커트 실링이었다.[16] 비슷한 경우로, 1997년의 마크 맥과이어가 시즌 중간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 되면서 58개(오클랜드에서 34개, 세인트루이스에서 24개)로 양리그 합쳐 최다 홈런을 치고도 홈런왕은 각각 AL은 56개의 켄 그리피 주니어, NL은 49개의 래리 워커가 가져가고 맥과이어는 낙동강 오리알이 된 바 있다.[17] 랜디 존슨의 집은 피닉스이고, 가족들도 양키스 시절부터 피닉스에 살았다. 피닉스는 애리조나의 주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디백스의 홈구장인 체이스 필드가 피닉스에 있다.[18] 그 전설의 페드로도 단일 시즌에는 기록하지 못했다.(1999 fWAR 11.6 bWAR 9.8/2000 fWAR 9.4 bWAR 11.7)[19] 랜디의 이 시즌 전에 단일 시즌 fWAR, bWAR 모두 10을 넘었던 투수는 공교롭게도 로저 클레멘스였다.(1997년 fWAR 10.7 bWAR 11.9)[20] 원래라면 리그 MVP도 노려볼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약본즈가 약을 먹고 야구를 완전히 지배해버리는 바람에…[21] 1위부터 4위까지는 알다시피 1999 페드로, 2000 페드로, 1968 밥 깁슨, 1985 드와이트 구든이다.[22] 이 기록은 9년 후 클레이튼 커쇼가 이어 받는다.[23] 최초는 놀란 라이언[24] 단일 시즌 300+K 기록은 이 둘을 마지막으로 잠시 사라졌다가 2015년에 어느 한 미친 괴물이 301K를 기록하며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25] 최초는 모두가 알다시피 그 전설의 99-00 페드로이다.(1999-2000 fWAR 21/bWAR 21.5)[26] 그 전설의 99 페드로 역시 탈삼진에서 랜디가 364K를 기록하며 313K의 페드로를 발라버리는 바람에 메이저리그 전체 트리플 크라운을 저지한 경력이 있다. 재밌게도 서로간에 메이저리그 전체 트리플 크라운을 한번씩 방해한 셈이 되었다.[27] 2022년 기준 한 시즌 250이닝 이상 소화한 투수는 2011년 저스틴 벌랜더가 마지막이고, 350K 이상 잡아낸 투수는 존슨 이후 전무하다. 선발 투수의 평균 투구 이닝이 점점 줄어드는 현 추세를 봤을때, 상술된 존슨의 4년은 불멸의 기록이 될 가능성이 높다.[28] 당시 두 사람의 성적을 비교하면 로켓 18-4 214⅓이닝 2.98 218K. 빅 유닛 16-14 245⅔이닝 2.60 290K. 이때 클레멘스의 수상은 바톨로 콜론 수상과 함께 투승타타가 어느 정도 유효하던 지표였던 거의 마지막 사례로 여겨진다. 이후 랜디 존슨 사례 때문인지 2006년에 16승을 거둔 브랜든 웹이 논란 속에 NL 사이영상을 수상했고, 2010년 AL 사이영 투표에서 킹 vs CC의 대결에서 킹이 사이영상을 탔다. 또한 클레멘스의 추악한 모습이 밝혀진 이후로는 랜디 존슨은 피해자로 평가받는데, 클레멘스의 1997-1998년은 스플리터 장착이 그의 성공에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하는 반박 여론도 존재하지만, 2000년대는 이미 약빨을 받을 대로 받은 뒤로 여겨진다.[29] 주로 51번을 달았지만 양키스에서는 버니 윌리엄스가 주인이었다. 은퇴후 영구결번[30] 사실 슬로우 카메라로 보면 포수 호르헤 포사다의 태그가 조금 더 빨랐기에 아웃이 맞다. 하지만, 허슬 플레이에 관대한 판정을 내주는 분위기상 세이프가 선언되었고, 상대팀에서도 딱히 항의하지 않아 그대로 인정되었다.[31] 이는 존슨의 마지막 포스트시즌 등판이었다. 8년 동안 통산 19경기(16선발) 7승9패 121.0이닝 평균자책점 3.50, 132k[32] 이 시절 MLB 최고령 선수 1위는 제이미 모이어였다.[33] 랜디 존슨은 팀에 남기 위해 기꺼이 연봉 50%를 삭감할 용의를 내비쳤지만 재정난에 빠진 디백스는 그것도 비싸다고 더 후려치는 바람에 존슨은 결국 팀을 떠나고 만다. 하지만 존슨이 떠난 뒤, 디백스는 랜디 존슨에게 제시한 금액보다 거의 두 배가 더 많은 액수로 선발 투수 존 갈랜드를 영입하였고, 존슨은 이에 대해 대단히 섭섭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