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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카라한

<colbgcolor=#c70125><colcolor=#ffe400> 레프 미하일로비치 카라한
Лев Михайлович Карахан
Lev Mikhailovich Karakhan
파일:레프 카라한.jpg
본명 아르메니아어: Լևոն Միքայելի Կարախանյան
한국어: 레본 미카옐리 카라하냔
출생 1889년 1월 20일
러시아 제국 티플리스
(現 조지아 트빌리시)
사망 1937년 9월 20일 (향년 48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모스크바 남부 행정구 돈스코예 묘지
재임기간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 대리[1][2]
1918년 3월 ~ 1920년
폴란드 러시아 SFSR 전권대표[3]
1921년 5월 30일 ~ 1922년 10월 9일
중화민국 소련 전권대표
1924년 6월 3일 ~ 1926년 9월 10일
소련 외무인민위원 대리
1926년 ~ 1934년
튀르키예 소련 전권대표
1934년 6월 29일 ~ 1937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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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 학력 대졸[4]
직업 외교관, 언론인
정당
[[소련 공산당|]][5]
종교 무종교 (무신론)
배우자 클라브디야 예프레모브나 마나예바(1909~1918)
베라 빅토로브나 제네예바(1918~1930)
마리나 티모페예브나 세묘노바(1930~1937)
주요 서훈 몽골 인민공화국 적기훈장 }}}}}}}}}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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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소련외교관.

1918~1920년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 대리, 1926~1934년 소련 외무인민위원 대리를 역임했으며, 1918~1920년, 1921~1922년, 1934~1937년에 각각 폴란드, 중화민국, 튀르키예 전권대표(대사에 해당)를 지냈다. 1937년 대숙청에 휘말려 처형되었다. 한국에는 "카라한 선언"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2. 생애

1889년 러시아 제국 서남부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였으며 당시에는 멘셰비키에 속했으나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17년 5월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1910~191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했으나 혁명운동 가담 혐의로 1915년 가을 당국에 체포되었고 톰스크로 유배되어 1916년 톰스크 대학교를 졸업했다.
파일:SovietDelegatesAtBrestLitovsk.jpg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러시아측 대표단.
뒷줄 맨 오른쪽이 카라한이다.
러시아 혁명 직후 석방된 그는 1917년 10월 혁명군사위원회(Реввоенсовет)에 참여했으며 1918년 3월 레프 트로츠키, 아돌프 요페 등 다른 볼셰비키 지도부와 함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했다. 1918년 3월 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 대리가 되어 1919년 7월 25일 이른바 카라한 선언(Karakhan Manifesto)을 발표했다. 해당 선언의 내용은 기존 제정 러시아가 중국과 체결한 비밀조약을 폐기하며 종래 러시아가 중국 내에서 누리던 특수 권익을 반환하고 영사 재판권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중국에서 친소, 용공 분위기가 조성되어 4.12 상하이 쿠데타 전까지 중소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는데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과 1924년 제1차 국공합작도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은 것이다.[6][7] 1920년 5월 7일 조지아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모스크바 조약에 러시아를 대표하여 조인했다.[8]

1921~1922년 주폴란드 전권대표로 파견되었고 1923~1926년 주중 전권대표로 파견되었다. 주중 전권대표로 재직하던 1925년 1월 20일 주중 일본 공사 요시자와 겐키치(芳澤 謙吉)[9]와 일소간 국교회복을 목표로 한 일소기본조약(日ソ基本条約)을 체결했다. 1926~1934년 소련 외무인민위원 대리를 맡았다가 1934년 다시 주튀르키예 전권대표로 파견되었다. 1937년 5월 3일 본국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친파시스트 음모"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1937년 9월 20일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되었는데 시신은 돈스코예 공동묘지에 화장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인 1956년 복권되었다.

3. 여담

당대 최고의 미남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뒤로 빗겨넘긴 검은 머리와 멋스럽게 기른 반다이크식 수염이었다. 1918년 그와 만난 영국의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는 회고록에서 그를 두고 "볼셰비키의 아도니스"라고 불렀다.[10]

잘생긴 얼굴에 걸맞게 여성 편력도 화려한 사람이다. 일찍이 1909년 클라브디야 예프레모브나 마나예바와 결혼하여 1916년 아들 미하일까지 두었으나 1918년 배우 베라 빅토로브나 제네예바와 눈이 맞아서 결혼했다.[11] 그와 제네예바 사이에서는 아들과 딸 각각 1명씩 태어났지만 1930년에는 무용수 마리나 세묘노바와 눈이 맞아서 사실혼 관계를 가졌다.[12]

자녀는 총 3명이 있는데 마나예바와 낳은 아들 미하일(1916~1976), 제네예바와 낳은 아들 유리(1924~1942), 딸 이리나(1926~2019)이다. 이 중에서 유리는 독소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1] 소련 성립 이전 각 소비에트 공화국은 명목상 독립국가였으므로 각 소비에트 공화국도 명목상 개별적으로 외교를 펼쳤다. 소련 외무부(정식 명칭은 소비에트 연방 외무인민위원회)는 1923년 7월 6일 소련 중앙집행위원회(ЦИК СССР) 회기에 통과된 1924년 소련 헌법을 법적 근거로 하여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카라한의 직위는 소련 외무인민위원 대리가 아니라 러시아 외무인민위원 대리였다. 각 서적이나 웹사이트를 보면 1918~1920년 당시 카라한의 직위를 소련 외무인민위원 대리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1922년 소련 성립으로 인한 볼셰비키 세력의 성격 변화를 무시한 것이다.[2] 대리는 "заместитель"을 번역한 것이다. 외무인민위원은 외무장관에 해당하며 대리는 '부-'(副-) 또는 '차-'(次-)에 해당한다. 즉 당시 카라한의 직위는 '외무차관'에 해당한다.[3] 리가 조약 체결 후 러시아우크라이나는 폴란드에 개별적으로 전권대표(Полпред, 대사에 해당)를 파견했다. 왜냐하면 위 각주에서 언급하듯 당시 각 소비에트 공화국은 명목상 독립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자캅카스, 우크라이나, 벨로루시가 통합되어 소련을 결성했고 폴란드 정부는 반 년이 지난 1923년 7월 23일 소련의 성립을 인정했다. 이후 소련은 자국을 대표하는 단일 전권대표를 폴란드에 파견했다.[4]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학부에서 수학했으나 이후 톰스크 대학교에서 졸업함.[5] 본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멘셰비키에 속했으나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17년 5월 볼셰비키로 전향함.[6] 다만 1921년 12월 중국에 도착한 러시아측 사절단장 알렉산드르 파이케스(Пайкес, 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는 카라한 선언을 확인하면서도 무상으로 반환하는 것은 어렵다면서 실질적으로 카라한 선언을 번복했다. 이에 당시 대륙을 통치하던 북양정부는 크게 반발했고 파이케스는 국교 수립에 실패한 채 이듬해 1922년 8월 귀국했다.[7] 러시아가 관리하던 중동로 반환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는 기존 카라한 선언을 번복하고 1924년 5월 31일 베이징 중소협정 체결로 봉천 군벌과 중동로에 대한 권리를 나누었지만 실질적인 철도 관리권은 루블화를 결산 화폐로 삼고 기무처, 차무처, 상무처, 재무처 등의 주요 부서를 러시아인이 독점하여 결국 러시아(소련)의 손에 남게 되었다. 이에 장쉐량은 중동로를 회수하려 들었고 결국 양측의 갈등이 폭발하여 1929년 중동로 사건이 발발했다.[8] 그러나 조지아를 서방의 전진기지로 여긴 러시아는 조지아의 독립을 용납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1921년 2월 소비에트-조지아 전쟁을 일으켜 조지아를 점령했다.[9] 1932년 일본 제국 외무대신을 지냈다.[10] 그리스 신화에서 아도니스는 최고의 미남이다.[11] 사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데 러시아 내전으로 러시아가 헬게이트에 빠지자 마나예바와 아들을 살리려고 그들을 스위스로 보내어 보호한 바 있다. 그런데 심히 외로웠는지 그만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버렸다. 마나예바가 귀국한 후 그녀에게 싹싹 빌었지만 관계를 회복하는 데 결국 실패했다고 한다.[12] 소련 초기에는 전위예술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낙태가 합법화되었으며 커밍아웃게이인 게오르기 치체린이 소련 초대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에 오르는 등 사회 분위기가 상당히 자유로웠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권 이후 사회 분위기가 갈수록 경직되면서 동성애와 낙태가 범죄화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