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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의 세력권이 그려진 리보니아 연맹지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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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식명칭은 리보니아의 그리스도 기사수도회(騎士修道會). 통칭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은 1202년에 리보니아[2]의 제3대 교구장 알베르트 폰 북스퇴펜(Albert von Buxthoeven 1165~1229) 주교가 창설한 기사 수도회이며, 1204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정식 인가와 축복을 받았다.이들은 독일 출신의 전사적인 수도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리보니아 기사단, 검의 형제 기사단, 도검 기사단, 그리스도의 민병대라고도 불렀다. 한자로 번역해서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역사
12세기 중반, 리가 만 일대에서는 뤼베크와 브레멘에서 독일인 상인들과 같이 온 독일인 선교사들과 현지의 이교도 원주민들 간의 알력이 나날이 고조되어 소규모 전투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1199년에 리보니아 주교구의 주교로 발령받은 시토회 출신의 알베르트는 이 지역 교회를 지키고 이교를 신봉하는 원주민들에 대한 선교 활동을 위해 1200년 3월 북방 십자군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군대를 일으켰다.
그는 이때 모인 병사들을 자신의 가신으로 삼아 훈련시킨 후, 리가로 이동하여 그곳 지역 주민들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또한 1201년에는 자신의 주교좌를 리가로 이전시켰다. 이를 위한 사전준비로서 알베르트는 1202년에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이라는 이름의 상설 군사기구를 설립하였다. 1204년 첫 기사단장으로 베노 폰 로어바크가 선출되었다.
1209년 라트비아인과 라트갈레인에 대한 정복을 완료한 검우기사단은 에스토니아로 방향을 돌렸다. 에스토니아인은 1208년부터 1227년까지 처절하게 저항했는데, 특히 사레마 섬을 중심으로 한 바이킹 후손들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검우기사단은 덴마크인과 힘을 합치고 나서야 1261년에야 에스토니아 정복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후 에스토니아는 북부의 덴마크령 에스토니아 공국과 남부의 검우 기사단령으로 분할되었다. 에스토니아 정복이 완료된 후에는 검의 형제 기사단과 에스토니아 공국 사이에 영토 분쟁으로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레반트 지역의 십자군이 투르코폴레스들을 보조부대로 이용했듯이 리보니아 기사단도 현지 추디-에스티인[3]을 화살받이 겸 잡역수로 징집하여 굴렸다.
검우기사단은 학살만 한 것은 아니고 추디-에스트인과 발트어족 주민들에게 소작료를 거두고 리가를 중심으로 발트해의 여러 부족들과, 노브고로드 공화국 등 여러 루스계 공국들과 무역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검우기사단 연대기에서는 얼버무리고 넘어가지만 이들은 노예 무역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정복당한 이교도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와 전투 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적들을 잔인하게 살육하면서 기사단의 악명은 멀리 로마 교황령까지 알려지게 된다. 결국 기사단을 진정시켜 활동을 제약하려고 온 교황 특사에게까지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다.
악명으로 인해 고립이 심화되어가던 기사단은 종종 현지인들의 저항에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1236년 샤울라이(Šiauliai) 전투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에게 크게 패했다. 다음해 1237년 튜튼 기사단에 흡수 합병되면서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4] 이후 동방으로 진출하려던 시도도 1242년 페이푸스 호 전투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하여 물거품이 되었으며 1260년에는 두르베 전투에서 사모기티아인[5] 전사 4천여 명에게 리보니아 기사단 8천 명이 대패하면서 기사단장이 전사하는 치욕을 겪기도 하였다. 두르베 전투의 패배 직후에는 리보니아 기사단 영지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많은 기사단원들이 전사했다. 해체 직전까지 갔었던 검의 형제 기사단이었지만 신성 로마 제국에서 새로운 멤버들을 영입하고 튜튼 기사단의 힘을 빌어서 몇십 년에 걸쳐 차근차근 반란을 진압해 나가면서 복구하였다. 1267년에는 쿠로니아인들을 1290년에는 사미갈레인들을 정복하면서 검우기사단은 결국 라트비아 정복을 완료하였다.
1410년 튜튼 기사단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연합군을 상대로 그룬발트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몰락하고 영지가 프로이센 공국으로 세속화하자, 1418년에 리가 대주교로 임명된 요하네스 암분디(Johannes Ambundii)가 테라 마리아나의 기존 5개 교회 국가(리보니아 기사단, 쿠를란트, 외젤-비크, 도르파트, 리가)를 다시금 독립시켜 독자적인 세력으로 남아 인근의 영주들과 1435년 12월 3일 리보니아 연맹 체결에 관한 협정을 맺어 리보니아 연맹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리보니아 전쟁이 발발하여 1560년 러시아의 침입을 받고 대패해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후 마지막 기사단장인 고트하르트 케틀러는 1561년까지 직위를 유지하다가 루터교로 개종해 세속화하고 쿠를란트-젬갈렌의 공작이 되었으나 루스 차르국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종속협약서를 체결하여 연방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3. 관련 문서
[1] 테라 마리아나(성모의 토지)라 불리며 인근의 영주들과 합세해 리보니아 연맹을 구성하였다. 에메랄드 색이 기사단령이다. 연맹을 구성하는 다른 색들 중 노란색은 리가 대주교령, 진한 주황색은 도르파트 주교령, 붉은색은 외젤-비크 주교령, 옅은 주황색은 쿠를란트 주교령이다.[2] 지금의 라트비아 북서부 비제메(Vidzeme) 지역과 에스토니아의 남부[3] 발트 핀어를 쓰는 에스토니아인과 이조라인[4] 와해되었다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튜튼 기사단에 속한 별개의 기사단이었다. 튜튼 기사단의 산하에서도 자체적인 단장을 계속 유지했다.[5] 리투아니아인의 친척뻘 되는 민족으로 현재는 대부분 리투아니아인에 동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