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4:28:27

마리아 테레지아/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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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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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의무교육 · 징병제 · 중상주의
가족 관계 가족 관계
아버지 카를 6세 · 어머니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 · 배우자 프란츠 1세 · 차녀 마리아 안나 · 장남 요제프 2세 · 4녀 마리아 크리스티나 · 6녀 마리아 아말리아 ·3남 레오폴트 2세 · 10녀 마리아 카롤리나 · 11녀 마리아 안토니아
기타 오스트리아 · 헝가리 · 합스부르크 가문 · 신성 로마 제국 · 프리드리히 대왕 · 문명 5 · 다둥이 · 여장부 · 성 이슈트반 왕관 · 쇤브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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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대 가계3. 장성한 자녀
3.1. 마리아 안나 요제파 안토니아 (1738~1789)3.2. 요제프 베네딕트 아우구스트 요한 안톤 미하엘 아담 (1741~1790)3.3. 마리아 크리스티나 요한나 요제파 안토니아 (1742~1798)3.4. 마리아 엘리자베트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1743~1808)3.5. 카를 요제프 에마누엘 요한 네포무크 안톤 프로콥 (1745–1761)3.6. 마리아 아말리아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1746~1804)3.7. 페터 레오폴트 요제프 (1747~1792)3.8. 마리아 요제파 가브리엘라 요한나 안토니아 안나3.9. 마리아 카롤리나 루이제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1752~1814)3.10. 페르디난트 카를 안톤 요제프 요한 스타니슬라스 (1754~1806)3.11.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1755~1793)3.12. 막시밀리안 프란츠 그자비에 요제프 요한 안톤 (1756~1801)
4. 요절한 자녀5. 현재 후손

1. 개요

16명의 자녀 중 12명이 성인으로 자랐으나, 마리아 테레지아의 유별난 편애와 차별로 남매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거나, 결혼 이후 자식을 잃고 평생 자식을 낳지못하거나, 배우자에게 배신을 당한 충격으로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거나, 프랑스 혁명에 휘말려 비명에 가거나, 나라를 떠나기도 하는 등 불행을 겪기도 했다.

2. 선대 가계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colbgcolor=#fff3e4,#331c00> 카를 6세
(Karl VI)
<colbgcolor=#ffffe4,#323300> 레오폴트 1세
(Leopold I)
페르디난트 3세
(Ferdinand III)
스페인의 마리아 아나[1]
(Maria Anna of Spain)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Eleonore Magdalene of Neuburg)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
(Philipp Wilhelm, Elector Palatine)
헤센다름슈타트의 엘리자베트 아말리 여방백
(Landgravine Elisabeth Amalie of Hesse-Darmstadt)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Wolfenbüttel)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루트비히 루돌프
(Ludwig Rudolf, Duke of Brunswick)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안톤 울리히
(Anton Ulrich, Duke of Brunswick)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노르부르크의 엘리자베트 율리아네 공녀
(Elisabeth Julian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Norburg)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 공녀
(Princess Christine Louise of Oettingen-Oettingen)
외팅겐외팅겐 공 알베르트 에르네스트 1세
(Albert Ernest I, Prince of Oettingen-Oettingen)
뷔르템베르크의 크리스티네 프리데리케 여공작
(Duchess Christine Friederike of Württemberg)

3. 장성한 자녀

최소 청소년기까지 살아남은 자녀 목록이다.

3.1. 마리아 안나 요제파 안토니아 (1738~1789)

차녀. 그러나 맏이인 언니 마리아 엘리자베트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사실상 장녀였다. 총명하고 성실했으나 병약하여 정략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후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 프란츠 1세가 붕어한 이후 수녀가 되었다.

3.2. 요제프 베네딕트 아우구스트 요한 안톤 미하엘 아담 (1741~1790)

장남. 프란츠 1세 붕어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냉정하고 시니컬한 성격이었으나 가족들에게는 따뜻했다. 차도남

3.3. 마리아 크리스티나 요한나 요제파 안토니아 (1742~1798)

4녀. 그러나 언니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 사실상 차녀였다. 모후와 생일이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자식들 중에서 가장 총애받는 딸로, 해외로 시집간 동생들과 달리 자매들 중 유일하게 연애결혼을 할 정도로 어머니에게 유별난 편애를 받았으며 본인도 어머니의 사랑을 믿고 교만하게 굴어 남매들과 사이가 매우 나빴다.

3.4. 마리아 엘리자베트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1743~1808)

5녀. 애칭은 리슬.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들 중 제일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고 한다.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부심으로 거만하고 경박했지만, 크리스티나 못지 않게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받았으며, 크리스티나와 사이가 좋았던 거의 유일한 형제. 1767년 궁정에 천연두가 퍼졌고 엘리자베트 역시 천연두에 감염됐다. 회복은 됐으나 아름다운 얼굴을 잃어버려 다른 왕실과의 혼담이 영영 깨지고 말았다. 결국 수녀가 됐으며 나중에 인스브루크 수녀원의 수녀원장이 되었다. 먼저 수녀가 된 큰언니 마리아 안나와는 화해해서 세상을 뜰 때까지 같이 살았다.

3.5. 카를 요제프 에마누엘 요한 네포무크 안톤 프로콥 (1745–1761)

차남. 마리아 테레지아와 남편 프란츠가 가장 총애하던 자식이었다. 형인 요제프가 조용하고 약간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과 달리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하고,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지성을 잘 물려받았다고 생각해 자식들 중 편애해서 장남인 요제프와 라이벌이 됐고 사이도 약간 불편했다고 한다. 형인 요제프가 당연히 그를 경계했고, 자신도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고. 그러나 16세 때 천연두에 감염되어 요절했다.

3.6. 마리아 아말리아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1746~1804)

6녀.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들 중 가장 많은 차별과 남매간의 비교를 당해서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원수지간이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 때문에 어릴때부터 사랑받지 못할뿐만 아니라, 원치않는 정략결혼을 하게 되자 아예 친정과는 절연하고 일부러 오스트리아와 반대되는 삶을 선택한다.

때문에 친정 오스트리아에는 영구적으로 입국 금지 당하지만 오히려 시댁인 공국에서는 사랑받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3.7. 페터 레오폴트 요제프 (1747~1792)

삼남. 전근대 이전 시대에는 장남은 대를 이을 후계자이고,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차남까지는 '보험용'으로 관심을 받지만 그 이하의 아들들은 그러기 힘들었는데, 레오폴트도 3남인 탓에 성장기에는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장남 요제프는 어머니의 작위를, 차남 카를은 아버지의 영지 토스카나를 물려받고, 레오폴트는 밀라노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둘째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1765년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고, 1790년 형 요제프 2세가 붕어한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 레오폴트 2세가 된다.[2]

하지만 레오폴트는 이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결국 황제가 된지 2년만에 사망했다.

3.8. 마리아 요제파 가브리엘라 요한나 안토니아 안나

9녀. 예쁘고 유순한 성격으로 다른 형제들과 매우 사이가 좋았고 오빠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767년 빈에 천연두가 돌았을 때[3]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납골당에서 기도하고 온 직후 천연두에 걸려 결국 사망했다. 원래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왕태자와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 요제파가 사망하자 그 혼담은 아래 동생인 마리아 카롤리나에게 넘어갔다.

3.9. 마리아 카롤리나 루이제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1752~1814)

10녀. 나폴리 왕국의 왕비가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친한 언니였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가장 닮았다고 평가될 정도로 활달하고 강한 성격이었다.

3.10. 페르디난트 카를 안톤 요제프 요한 스타니슬라스 (1754~1806)

4남. 아버지처럼 모데나 공국의 상속녀 마리아 베아트리체에게 데릴사위로 팔려(?)갔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 요제프 2세신성 로마 제국 제위합스부르크 제국을, 3남 레오폴트 2세토스카나 대공국을 물려받을 예정이어서(차남 카를 요제프는 요절해서 제외) 기반이 튼튼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상속받을 영지가 없는 셋째 이하의 아들들을 상속녀들과 결혼시켜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려고 했다. 그래서 4남 페르디난트와 모데나의 마리아 베아트리체와의 혼담을 추진했으나 정작 모데나를 통치했던 에스테 가문살리카 법을 적용했기 때문에 페르디난트가 모데나 공국을 상속받을 가능성은 없었고 심지어 에스테 가문의 마지막 공작 에르콜레 3세 데스테도 장수한 덕분에 형 요제프 2세로부터 밀라노 공국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밀라노에서 살았다. 다만 나폴레옹 전쟁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전 유럽에 깽판을 놓은 여파로 아들 프란체스코가 신생 모데나 레조 공국프란체스코 4세로 즉위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노력은 결실을 보았다. 손자인 프란체스코 5세가 1875년에 자식 없이 사망하여 그가 개창한 합스부르크-에스테 가문은 단절되었고, 여계후손의 경우 바이에른 왕국 국왕 루트비히 3세의 왕비가 된 프란체스코 5세의 조카 마리아 테레지아를 통해 비텔스바흐 가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명목상의 모데나 공작위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카를 1세를 거쳐 카를 1세의 차남 로베르트(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동생)에게 상속되어 그 후손들이 잇고 있다.

사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일찌감치 모데나의 상속녀인 모데나의 마리아 베아트리체를 4남의 결혼 상대이자 미래의 며느리감으로 노리고 있었다. 때문에 베아트리스가 다른 혼처를 찾지 못하도록 빈의 궁정에서 놔주지 않았다.

3.11.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1755~1793)

11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다. 원래는 혼담이 없었으나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난 후 마리아 카롤리나 대신 프랑스 왕세손과 결혼했다. 야심만만하고 드센 언니들에 비해 유순하고 얌전한 성격이었으나 최후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3.12. 막시밀리안 프란츠 그자비에 요제프 요한 안톤 (1756~1801)

5남이자 막내. 쾰른 선제후대주교로 선출되었다.[4] 머리가 나쁜 데다 무례하고 자신의 지위[5]를 지나치게 뽐내는 성격이어서 형제들을 항상 곤란하게 했다. 그래도 선제후가 된 이후로는 형들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었으며 프랑스 왕국의 왕비였던 손윗누나 마리 앙투아네트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인 큰형 요제프 2세를 통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참고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어린 시절 등장하는 쾰른 선제후가 이사람이다. 쾰른 선제후국의 수도는 쾰른이 아니라 이었기 때문.

4. 요절한 자녀

영유아기에 사망한 자녀 목록이다.
  • 마리아 엘리자베트(1737~1740): 장녀. 6녀가 이름을 물려받았다.
  • 마리아 카롤리나(1740~1741): 3녀. 7녀 및 10녀가 이름을 물려받았다.
  • 마리아 카롤리나(1748): 7녀. 탄생 직후 사망.
  • 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라(1750~1762). 8녀.

5. 현재 후손

현재 벨기에 왕가, 스페인 왕가, 룩셈부르크 대공가, 리히텐슈타인 공가가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의 후손들이다. 개신교 왕가와는 혼담을 맺지 않아 모두 가톨릭 왕가다.


[1]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딸.[2] 토스카나 대공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면서 차남 페르디난트에게 넘겨주었고, 이후 토스카나 대공위는 이탈리아 통일전쟁 과정에서 토스카나 대공국이 붕괴할 때까지 페르디난트의 자손들이 이어나갔다. 대공가의 계보 자체는 현대에도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다.[3]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와 마리아 엘리자베트가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회복했고, 요제프 2세의 황태자비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는 사망했다.[4] 쾰른 선제후뮌스터 주교베스트팔렌 공작을 겸했기 때문에 그는 쾰른 선제후이자 뮌스터 주교 겸 베스트팔렌 공작이었다.[5]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로서 태어날 때부터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였고, 이후 형들인 요제프 2세레오폴트 2세가 차례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더군다나 누나들인 마리 앙투아네트마리아 카롤리나는 각각 프랑스 왕국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의 왕비가 되는 등, 형제자매들이 대부분 일국의 왕족이라는 뒷배 덕분에 선제후였던 쾰른 대주교로 무난하게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