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賣官賣職글자 그대로 관직을 돈,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재물을 받고 파는 것을 말한다.
2. 배경
관료제가 정착한 현대에는 부패와 국가 멸망의 상징으로 볼 정도로 인식이 좋지 않으나과거 제도를 통해 유능한 인재를 뽑았다는 인식이 있는 동아시아만 해도 과거제는 송대에야 자리잡은거고, 그 이전 시대까지는 향거리선제, 구품관인법 등이 있었다고는 하나 결과적으로는 가산제적, 족벌주의적 선발이 이뤄졌다. 그리고 과거제가 자리잡은 시대인데다가 바로 코 앞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명, 청, 조선 모두 연납(捐納)과 공명첩이 제도적으로 존재하였다. 또 중근세 서구권은 아예 매관매직과 엽관주의, 족벌주의 외에는 관료 등용 제도가 없었다. 서구의 경우 차라리 매관매직이 그나마 유능한 관료를 뽑는 제도였다.
유럽의 경우, 매관매직조차 비교적 가까운 시대인 중세말~근세의 산물이다. 중세까지만 해도 사적 인간관계 속에서 확인 가능한 범위 내에서 능력이나 혈통(신분)으로 인재를 뽑았다. 때문에 이 시대 인물 생애들 살펴보면 부모 빽이나, 교수 추천서나, 높으신 분들 인맥과 추천이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 귀족들이 명성에 집착하는 것도 그 관계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외로 매관매직은 실제로 능력있는 인물을 뽑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모든 사람에서 기본적인 공교육이 제공되는 현대 사회에서조차 잘 사는 집안 자녀가 사교육을 받고 온전히 공부에 집중할 수 있어 부모의 재산은 학업 성적과 상관 관계가 있다. 공교육은 존재조차 하지 않고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거액을 들여 개인 가정교사, 무술 사범 등을 고용하거나 성직자라도 되어야 했던 전근대에는 귀족 혈통이거나 재산이 많다는 것은 곧 고급 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과 같다. 즉 돈을 주고 관직을 산다는 것은 그 관직에 맞는 교육을 받을 재력이 있다는 증명 비용인 셈이다. 물론 빈민들 중에서도 재능있는 인물들이 있었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교육받을 기회가 없었기에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을 것이며, 드물게 그 천재성이 귀족의 눈에 드는 경우 귀족이 교육비와 관직 값까지 후원해주고 빈민 출신 관료는 자신을 후원해준 가문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이를 갚았다.
매관제가 오랜 기간 동서를 막론하고 유지되었던 원인은 그 관직이 맡는 업무에서 발생하는 행정비용을 직관적으로 확실하게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서구권에서는 행정 비용을 관료 개인의 재산과 권력으로 지불하는 것은 당연한 관념이었다. 동양권도 사정은 비슷했는데, 지방에서 세금을 걷으면 중앙에서 할당한만큼의 세금을 중앙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알아서 지방에서 행정 비용으로 쓰며, 그러고도 행정 비용이 부족하면 지방 관료가 알아서 어떻게든 해야했다. 중앙이 행정 비용을 지원해주는 일은 거의 없었고, 중앙이 걷은 조세의 90% 가량은 군사비로 지출했다.[2] 따라서 관료들은 사적인 인간 관계와 현지 주민들과의 협력을 통해서 행정을 처리했으며, 이 때에는 사적인 재산을 털어서 그런 비용을 벌충하거나, 권력을 통해 현지에서 징발한 인력과 돈으로 채웠다.[3] 당장에 고대 로마의 거대한 공공건축물들은 전부 정치가들이 출마하면서 사재를 털어서 건설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관료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충분한 사적인 재산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재산=능력이라는 계산이 성립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현지에서 공명첩 등을 발행해서 부자들에게 기부금(?)을 받아서 재정을 확충하기도 한 것이다. 흔히 전근대 재정 특유의 부패라고 불리는, 각종 관리들이 배임·횡령·뇌물과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저지르는 행위들이나 지방관 및 그 아래에 속한 가신이나 막우(幕友), 막료, 청부업자, 이서(吏胥)들의 비리 또한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한 것이다. 행정비용을 줄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것을 담당자들에게 전가하는 것인데, 담당자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어떤 식으로든 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근대에는 이 정도로도 인재 수요를 감당할 수 있었으나, 18세기에 이르러 사회와 조직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더 능력이 검증된 사람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고, 계몽주의의 영향과 중국의 과거제를 모티프로해서 시험을 통한 관료 선발 제도가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다. 현대적 관료제와 시험을 통해 유능한 사람을 뽑는다는 개념은 19세기 중반 이후 시행된 정말 생긴지 오래 안 된 따끈따끈한 개념인 셈.
물론 그 특성 상 부작용이 쉽게 나타나 재정난이 심화되는 경우는 매우 많았다. 특히 수취권, 수조권을 가진 관직을 매매하면 필연적으로 수탈이 나타나 국민들에게 고통이 전가되었다. 유럽의 경우 세금을 걷는 직책을 징세청부업자에게 팔아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고, 동아시아의 경우 지방관을 그렇게 팔면 심지어 중앙 정부에도 조세를 안 보내는 사례가 나오기도 했다. 근세 유럽의 경우 매관매직을 비교적 효율적으로 운용했으나, 관료의 수 증가→관료에게 지급할 급여 증가→매관매직→관료의 수 증가 라는 함정에 빠져서 재정위기가 심화되기도 했다. 그 재정 위기가 가장 심각하게 터진 나라가 프랑스 왕국이다.
3. 사례
시랜드 공국과 같은 마이크로네이션에서도 주요 수입원으로(...) 관직을 팔기도 한다.3.1. 동아시아
3.1.1. 중국
특이한 사례로 매관매직이 국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장본인은 바로 그 유명한 진나라 시황제.재정난에 시달려서 시행하긴 했는데 실무에 영향을 주는 '관직'은 거래하지 않고 '작위'만 거래했다.
관직과 다르게 작위는 실무에 손대지 않기 때문에 부정적인 영향은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관련 내용 엄밀히 말하자면 진시황의 사례는 '매관'은 아니고 '매작'인 셈이다. 이십등작은 실제 효용성도 어느 정도 없지는 않았는데, 그 효과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코방귀 좀 뀌거나 법을 어겨서 벌받을 때 작위를 대신 까는 정도이므로 미리미리 국가에 기부 좀 해놓고 큰 영향력은 없는 이득을 얻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실권이 없는 작위나 명예직을 파는 행위는 중세 이후의 시대에도 벌어지던 일이다.
물론 이런 '매작' 역시 지나치면 계급 인플레이션으로 변질되어서 사회에 큰 혼란을 줄 수 있다.[4] 이 부분은 해당 문서에 나와 있다.
가장 낮은 벼슬인 '낭관'에 대해서 매관매직을 했다. 관련 내용 낭관 역시 실무직은 아니므로 영향력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후한의 영제는 원래 장사꾼을 지망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모든 벼슬에 정가를 붙이고, 심지어 외상구매까지 장려하는 등 화려하게 매관매직을 벌였다. 그 정가는 다음과 같았다.
직책 | 정가 |
삼공 | 1천만 전[5] |
태수 | 2천만 전[6] |
현령 | 4백만 전[7] |
이 때문에 자질이 모자라는 관리가 대거 임명되어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삼보의 난으로 연쇄붕괴를 일으키며 후한을 화려하게 말아먹었다. 하지만 영제는 매관매직으로 벌어들인 돈은 거의 국고에 채워넣었으니 자기 호주머니에 넣는 게 매관매직의 주목적이던 사마염이나 아래 몇몇 사례들과 비교하면 동기는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진짜로 후대에 사마염은 신하 유의에게 "폐하는 영제만도 못합니다."는 말을 듣는데 사마염이 "헐 영제는 매관매직한 자인데 어째서 짐이 걔보다 못함?" 이라고 하자 그가 말하기를 "영제는 매관매직해서 국고에 집어넣었지 폐하는 자기 주머니에만 넣지 않습니까?!" 라고 비판한 것(...) 영제가 이 말을 들었으면 목을 치고도 남았겠지만 사마염은 "영제는 이런 말 한 자가 없었는데 나는 있었으니 내가 더 나음" 이라고 말하고는 관대하게 용서해줬다. 사실 영제때도 간언하는 충신이 있었지만 전부 목이 날아갔다. 자리에서 내쫓기기도 했지만 문자 그대로 목이 날아간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그 국고에 넣은 돈을 십상시들이 꿀꺽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이런 형국이니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는 시점에서 지방관 중에서 그 관직을 돈주고 사지 않은 이가 거의 없을 지경이며 유명인 중에서 매관매직 없이 관직을 딴 이들은 군공을 많이 세워 현령직을 얻었던 유비와 장사태수 자리를 따낸 손견 정도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기존의 관리들이 다른 관직으로 옮겨 갈 때도 돈을 상납하도록 강요했다. 게다가 그 관리가 스스로 더 '뜯어먹을 수 있는' 관직을 요구해서도 아니고 그냥 명령에 따라 자리를 옮길 때도 이랬다. 양심 때문에 백성을 수탈하지 않던 관리들은 차라리 관직을 버리길 원했으나 이 것도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는 셈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얼마나 심했냐면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당시 사마직이라는 관리에게 거록 지역의 태수로 임명하면서 그가 청렴하다며 상납금에서 '특별히' 300만 전을 깎아주자
또한 천거 형식의 매관매직 역시 존재했다. 이것은 황제에게 직접 돈을 주는 게 아니라 유력 호족에게 돈을 주고 그 호족에게 관직을 사서 관직을 달고난 뒤 관직을 준 호족이 황제에게 해당 관직을 천거하는 형식인데 후한의 관직임용체계는 '천거'가 매우 성행했기에 가능한 짓이다. 대표적인 게 효렴으로 효렴은 아예 오직 천거로만 등용되는 관직이었다. 그래서 원소는 안량과 문추에게[8], 원술은 손견에게 각각 임시로 관직을 주기도 했다.
명청 시대에는 연납(捐納)이라는 것이 성행했다. 원래는 국경에 주둔하는 군인들의 유지비를 자진납부한 것에 대한 포상이었으나, 명 시대부터는 관료에게서 급여를 원천징수(...)하는 세금이 되고 동시에 과거에 합격하고서도 관직을 얻지 못한 신사층이 관료 지위를 얻기 위해 납부해야하는 돈이 되었다. 또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이들 중 학위를 원하는 자들이 연납을 통해 명예학위를 얻기도 했다. 청 대에는 연납이 제도화되었으며, 특히 옹정제의 경우 많은 측근이 연납을 통해 자리를 얻은 이들이었으며, 국가 세입 중 최대 30% 가량이 연납을 통한 수입이었다.
참고로 매관매직이라는 표현은 중국어에서 사용되지 않으며 매관매관(买官卖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3.1.2. 조선
조선시대에는 돈을 내고 합법적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공명첩이란 제도가 있었는데[9], 그 중 관직을 하사하는 '고신첩'을 구입하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실권 없는 명예직만 하사되었지만, 법적으로 양반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인 이하 계층에게는 매우 큰 이점이 되었다.유독 한국에서 매관매직=망국 이미지가 강한 이유는 조선이 망하게 된 계기인 세도정치 시기에 이 매관매직이 본격적으로 판쳤기 때문이다. 위에 말한 공명첩이나 납속 등은 명예직이거나 신분을 상승하여 면세혜택을 보는 정도에 그쳤다면 이 시기부터는 녹봉이 나오고 권한이 생기는 실직을 팔아 넘겼기 때문이다. 당연히 과거제도가 무너지면서 그만한 돈을 낼 수 없는 지방의 향반, 잔반 계층의 불만도 커져갔고 지방관들이 더 높은 직위를 얻기 위한 돈을 얻기 위해 수탈을 하면서 국가가 점점 엉망이 됐기 때문이다.
조선 고종은 매관매직을 자주 행했다. 세수 확보라는 측면도 있지만 비자금 마련이란 목적이 더 크다. 청나라나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조선의 입장에서 남몰래 쓸 수 있는 돈이란 매력적인 조건이다. 광무개혁 당시에는 정부의 세수보다 고종의 비자금이 더 컸다. 매관매직으로 얻은 자금은 신무기 구입, 전기 및 전화 설치, 은행 설립, 제중원 건립 등에 쓰였으며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주요 자금원이 고종황제의 비자금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관리들의 수탈은 더 많아졌고 당시 백성 대다수를 차지한 농민들이 더 몰락하여 유랑민과 화적이 증가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인해 세수감소로 이어져 조선의 국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앞에 언급한 후한 영제하고 닮은 점이 많다. 일단 통치자 본인이 직접 매관매직을 했고 그로인해 탐관오리들을 대거 양산하여 종교적 성격을 가진 태평도와 동학이 농민봉기를 일으켰다는 점이 같다.
3.2. 중근세 유럽
중세 이후 유럽에서 나타난 관직 매매는, 그 개념이 공공의 직무에 권력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던 점에 원인이 있다. 경제력이나 군사력 등 권력은 사유물로써 소유될 수 있다는 개념이 선행하고, 공공의 직무는 이미 권력을 지닌 유력자에게 사회적 책무로써 위탁된 것이었다.[10] 도시 바깥의 봉건제 하에서 특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곧 봉토였고 자산이었다. 재판을 하고 그 수수료를 받는 권리, 특정한 토지에서 징세할 권리, 특정한 토지에 사는 인물들을 부역에 동원할 권리, 특정한 지역에서 사용금지령(ban)을 내릴 권리 등등이 중세 시대에 '봉토'로 간주되어서 상속되거나 거래된 권리다.'세금을 징수할 권리'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저러한 권한들이 바로 관직으로 발전한 것이다. 때문에 관직은 곧 부동산이며 자산으로 간주되었고 상속도 가능했고 심지어 저당 잡는 것도 가능했다. 프랑스의 중앙집권 역시, 왕이 돈이나 권력 빨로 저렇게 복잡하게 나뉘고 흩어진 다양한 종류들의 '봉토'들을 싸그리 사들이거나 압류하는 등으로 이뤄낸, 모자이크 같은 형태였다.
12세기 이후 서유럽이 중앙집권화를 진행하면서 생긴 관직들도 다 매관매직, 특히 경매 혹은 강매를 통해서 임명되었다. 잉글랜드에 존재했던 재판권, 군사징집권, 징세권을 행하던 관료인 셰리프(sheriff)는 남작이나 기사 정도의 귀족이 매관매직으로 임명되는 것이었으며, 후대에 프랑스에서 생긴 행정, 사법관인 치안판사(bailiff)나 지사(seneschal) 역시 매관매직으로 선발되었다. 특히 악명높은 징세청부업자도 돈이 오가는 공개입찰을 통해 징수자로 선정되었다. 또 강매란 부분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왕이 돈이 부족하면 새 관직을 만들고 팔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는 이 매관매직을 통해 누진세적 효과를 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중세 및 근세 유럽에서 귀족들이 작위를 사고 판 '매작' 역시 넓은 의미에서 보면 매관매직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바로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가 로마 황제 작위를 판 것이었다.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였던 안드레아스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한 후, 교황령으로 망명하여 명목상의 동로마 제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생계를 유지하기 곤란해지자 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 팔아넘겼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는 이미 한 번 팔았던 황제 자리를 스페인의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에게 또다시 팔아먹기까지 했다. 그러나 제국이 멸망한 뒤에 이어진 명목상의 제위였기에 거창한 타이틀과는 달리 실질적인 이득을 얻을 수는 없는 자리였고, 작위를 구입한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들도 실제로 칭제하지 않았기에, 말이 구입이지 사실상 기부나 다름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주로 재정수입의 증대라는 관점에서 관직매매(vénalité)가 성행하였다.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는 1604년 관직보유자가 관직가치의 60분의 1에 해당하는 연(年) 세금을 매년 납부할 경우 관직의 세습을 인정하는 폴레트(Paulette)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폴레트 제도는 왕의 명령을 받는 중앙 상비 관료 외에 지방관, 판사와 온갖 말단 관직에까지 확대되었으며[11], 이 제도의 전성기인 루이 14세 때에는
3.2.1. 군대
나폴레옹이 프랑스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던 시기의 잉글랜드 육군을 비롯한 대다수 국가에서는 모병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중 떨어지는 떡고물, 즉, 전리품 탓에 육군에 매관매직이 성행해서 입대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병사 계급이야 특별히 권력을 누리는 지위도 아니었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12][13] 장교로서 들어가기 위해 오늘날로 따지면 최하 몇백만 원의 돈을 당국에 합법적으로 바쳐야 군복무가 가능했다. 대위 계급장은 오늘날의 시세로 약 4억 원에 달했는데도 한 번만 승리해서 이에 따르는 전리품만 챙겨도 이윤을 몇 배나 뽑을 수 있었다.이 제도를 이용해 부잣집에서는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소위 계급을 사서 이름을 올리고 그 아이가 성인이 되면 호봉이 차있어서 대위를 사서 물려주는 합법적인 신분 세습이 가능했다. 소위직도 구매가격이 당시 소위 연봉의 몇 배에 해당하고, 장교들은 피복과 식사, 병기와 자기가 타고 다닐 말도 자비로 마련해야 했으며, 각종 품위유지비가 월급보다 더 들어가고 장교들끼리 사교문화에 돈을 쓰는 게 가능해야 했기에 일반 서민층에서는 임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간혹 전공을 세운 평민 부사관들이 포상으로 소위 계급을 받으면, 노략질 등으로 돈 좀 있는 경우 아니면 그 자리에서 소위 계급을 팔아 버리고 고향에서 땅을 사든 가게를 열든 하는 게 보통이었다. 말단 소위라도 가격이 억대이니 시골이나 소도시 출신이라면 그 돈으로 못해도 평생 가족 부양하며 먹고 살기에 충분했다. 현역 장교들도 이런 사병 출신 소위들은 자기들과 어울리기엔 격도 떨어지고 돈도 없는 처치곤란이라, 계급을 팔 것을 장려하며 적극 주선해주는 등 열심히 쫓아내려 기썼다. 장교직에 큰 관심은 없으나 명예나 인맥, 스펙 관리 차원에서 장교 신분을 가지려는 이들은 반쯤 명예직인 예비역 계급을 사기도 했는데,[14] 이는 동 계급 현역보단 값이 반 정도로 훨씬 쌌다.
다만, 돈만 있다고 무조건 쾌속 진급이 가능했던 건 아니었다. 기존 편제된 직책에 편입되려면 계급별 최소복무기간이 지나야 하고, 바로 윗 계급에서 사망, 퇴역, 예편, 전출, 강등, 진급, TO 신설 등으로 공석이 나야 가능했다. 그것도 원칙적으론 부대 내 동계급 최선임자가 가져가게 되어 있었으나, 계급 살 돈이 없는 경우에는 차선임자 이하 인원을 대상으로 경매를 하기도 했다. 예외적으로 왕명이나 군공을 인정받아 의회 등의 승인을 얻어 특진한 경우는 계급값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전란기에는 아예 돈 좀 있는 양반들이 재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 부대를 자비로 창설해 육군에 상납하고 대신 장교 계급을 공인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럴 경우 군대 한 번 안 가본 지방 귀족이 육군 대령 계급을 한방에 다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 경우 보통 그 대령은 연대장으로서 지방에서 계속 연대를 유지하고 모병되는 인원은 진짜 군인인 중령이 부연대장 겸 대대장으로서 지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5]
육군 중에서도 보병이나 기병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급이 느리고 인기가 없던 포병이나 공병 등의 장교는 매관매직이 아닌 실적 및 연공 서열에 따라 진급했으며, 장군 자리는 애초에 돈 주고 사는 게 불가능해 의회나 왕의 인가를 받아 진급했다.
현대인 시점에서는 막장 제도이지만, 당시에는 납세자의 세금이 들어가지 않는 합리적인 제도로 각광받았다. 관직을 팔고 나가면서 퇴직금을 땡길 수 있으니 국가로서는 예산을 아낄 수 있고 납세자들의 세금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계급제 사회에서 평민 출신 장교의 명령을 사병들이나 하위 장교가 잘 듣지 않아 고위 장교가 될수록 많은 돈이 필요하다=신분이 높다여서 잘 맞았다고 한다. 게다가 아직 보편교육이 시행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전 시대와 인재 풀은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여전히 효용성이 남아있었고, 매관을 하더라도 인사제도적으로는 인맥이나 학맥에 의한 추천제와 결합되어 나타났기에 어지간히 무능한 사람들은 그다지 고위 실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더불어 그와 별도로 사관학교가 설치되어 전문 교육을 받은 장교들도 공급되었기에 꽤 오랜 기간 매관제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점차 고도화하는 군사제도에는 부적합한 제도였으므로, 나폴레옹 전쟁 시기 수많은 장교들의 병크에 대한 반성으로 개혁이 진지하게 논의되다가 몇십 년 뒤에 크림 전쟁 때 발라클라바 전투를 계기로 완전히 폐지된다.
한편, 영국 해군은 안 그래도 거칠고 험난한 함상생활 탓에[16] 매관까지 할 매력이 없던 데다가 철저한 실력주의였기에 빈민가 노동자의 자식이든 귀족 집안의 자식이든 장교가 되기 위해서는 맨 밑바닥 계급인 장교후보생(Midshipman)부터 시작해야 했다. 따라서 수병 출신 제독이나 흑인 노예의 자식이지만 함장까지 올라갔던 대령도 나타날 수 있었다.
물론 해군에서도 인맥 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함장이나 제독, 의회 의원 등의 피후견인 신분으로 사관후보생이 되면 의무적으로 채워야 하는 함정 근무를 반도 안 하고 날로 먹거나,[17] 임관 순서가 빽 없는 후보생들보다 빨랐던 점 등 당시 체제하의 모순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 했다. 유명한 제독인 호레이쇼 넬슨도 수병 출신으로 경력을 시작해서 시험을 쳐서 임관하였지만, 외가쪽에 후견인이 있어서 말이 수병이지 정식 사관후보생 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특별 대우를 받았다. 더불어 혼블로워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 함장 이후의 계급은 연공서열에 따라서만 주어져 진급적체 및 유능한 제독이 부족해지는 사태가 일어났었다. 이는 차후 Yellow Admiral이라 불리는, 진급은 시키되 한직으로 돌리고 유능한 후임 함장을 요직에 앉히는 제도가 도입되고, 계급별로 정년 퇴임 제도와 half-pay도 도입되어 이것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자리잡으면서 제도적으로 교정이 되었다. 물론 그러한 조치 이전에도 최소한 함장이나 제독처럼 번듯한 지위까지 오르려면 제 실력을 입증해야 했다. 안 그래도 사람에 비해 자리가 부족하여서 빽이 있어도 자리를 못 얻는 수가 있었으므로 당사자들은 조금이라도 군공을 세우고 싶어서 안달을 내었고, 후견인들도 자기가 추천한 장교들이 삽질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집 꽤나 남기므로 자신이 후원할 인재를 좀 가렸기에, 빽만 있고 지나치게 일 못하는 장교들은 당시 기준으론 꽤 걸러진 편이었다. 이를 영국 해군이 전세계를 제패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학자들이 많다.
잉글랜드의 사례가 워낙 유명하고 접하기 쉬울 뿐 이러한 사정은 다른 나라들도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프랑스에서도 앙시앵 레짐 당시 육군 내에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이쪽은 원래 귀족들이 말단 소위 계급까지 차지하자 귀족들의 군 지위 독점을 막기 위해 돈으로 계급을 살 수 있도록 했지만 이마저도 귀족들 또한 자신들의 재산으로 사는 폐단이 생기기 시작해 점점 심화되어 혁명 전의 군대에선 평민 출신의 장교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귀족 출신의 장교들이었다. 그래서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주축은 보병이 아닌 포병들이었다. 여기에는 수학과 물리학 등의 지식이 필요한 포병의 특성상 신분보다는 실력주의가 더 강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는 특성도 작용했다. 귀족이지만 코르시카 출신의 비주류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포병 출신인 것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영국군에서 매관제를 몰아낸 것으로 유명한 발라클라바 전투 이후로도, 사관학교 및 군사학교 체계가 자리잡았는데도 전쟁이 거대해지면 이와 비슷한 상황이 종종 나타났다. 미국 내전 당시 남군과 북군 모두 군 규모를 크게 확대하면서 의용군을 대거 받아들였는데, 그러한 경우 지역 민병 연대나 집단 자원한 정규 연대의 장교들은 지식인이나 부자 등 지역 명사를 그대로 기용하고는 하였다. 그나마 북군은 군수 체계가 비교적 통일된 편이었으나, 남군으로 가면 숫제 당사자들이 가진 것을 그대로 군용 장비로 쓰거나 부유층들이 자비로 부대를 만드는 수준이 되었다.
3.3. 대한민국
가장 비일비재한데도 고쳐지지 않는 현대 한국사회의 매관매직 분야 중 하나는 사학단체들의 교직 매매다. 사립학교 정교사가 되기 위해선 사학재단에 최소 1억에서 수억씩 돈을 주고 교사 자리가 거래된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연합뉴스-사립학교의 교사 채용 가격표, 이제는 그만. 그러나 언론에 뜨면 해당 학교가 있는 시도교육청이 감사에 나서서 대표자만 처벌할 뿐, 대다수의 사학재단과 사립학교들은 계속 이 불합리하고 더러운 관행을 유지해오고 있다. 물론 단순히 돈만으로 사립학교의 교사가 될 수 있다면 정말로 실력 있는 교사 후보가 있어도 돈을 내지 않으면 불합격하거나 임용이 거부되고, 돈을 내는 후보들은 실력이 다소 떨어져도 임용될 수 있으니 학교의 실력과 평판이 중시되는 사학의 특성과는 모순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많은 사립학교들이 기간제교사로 한시 임용했다가 그 교사가 실력이 있으면 돈을 받고 정식 채용하는 구조를 택한다. 국공립학교보다 사립학교에서 기간제교사를 공고하는 횟수가 많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시각에 따라서 공직선거의 기탁금 제도를 매관매직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아무 선거나 그런 건 아니고 대통령 선거에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대통령선거에서 군소후보 난립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로 사실 매관매직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애시당초 일정 표를 얻으면 돌려받을 수 있기도 하고...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에서 조한규 전 세계일보 사장이 부총리급 인물이 정윤회에게 뇌물을 주고 직을 받았다는 증언을 하였다.
우병우의 처제 이민경은 몇 년 전 남미 온두라스 위조 여권으로 자녀를 국내 외국인 학교에 넣었다가 징역 8개월 형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바 있다. 이번엔 이 세인트 키츠 네비스 국적을 매관매직해 자식을 다시 다른 외국인 학교에 입학시켰다.
이팔성 전 우리금융회장이 연임, 민원 대리 청탁, 선거 자금 지원을 위해 이명박 대통령 측에 삼성과 공모하여 22억 원을 뇌물로 보낸 사실이 드러났다.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의 1심 판결문에 따르면 김경수는 두르킹 김동원에게 댓글 공작을 하는 대가로 드루킹 김동원이 지목한 인물에게 오사카 총영사 자리를 보장하였으나 중요직인 오사카 총영사를 줄 수 없게 되자, 도호쿠 지방의 센다이 총영사를 역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드루킹 측에서 이 역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발하게 되면서 거래는 성립되지 않았고, 김경수를 압박하기 위해 반민주당, 반정권 댓글공작을 펼치다가 민주당의 고발로 경찰에 덜미가 잡혔다. 현재 이 사안은 2심 재판이 진행중이므로 본 서술은 2심 재판 판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감사원 조사에 따르면 기존 별정우체국장에게 약 3억원을 건네고 별정우체국장이 된 15명이 적발됐다고 한다. 관련 내용
대한민국 대통령이나 지자체단체장 선거시 자기 비용뿐만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봉사의 형태로 돈이나 노동력이 소모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엔 논공행상이 필수고 그와중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은 실무를 담당하는 장차관 자리로 가게 되지만 공직을 맞기엔 능력이 부족하다 싶은 사람들에게 줄수 있는 다양한 자리가 있다. 주고 공기업 감사같은 자리이며 이 자리는 주로 의전받는 역할을 한다. 엄밀한 의미의 매관매직은 아니지만 매관매직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매관매직의 폐해도 막는 역할을 한다
3.4. 마이크로네이션
현대에 전세계에 산재하는 마이크로네이션에서는 시민권과 매관매직이 주요 수입원이라 할 수 있다. 이 분야의 선두주자(...)인 시랜드 공국의 경우에는 공작, 백작, 남작, 귀족(lord and lady)와 기사(Knight) 작위를 국가차원에서 팔고있으며, 실제로 서임 관련 서류를 보내준다. 이 밖에도 아틀란티움 제국은 유료 시민권을 팔며, 북수단 왕국도 시민권과 각종 개발 이권(?) 등을 팔고 있다.4. 창작물에서의 등장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쿠게[19]를 통해 벼슬자리를 구매할 수 있다. 실제로 다수의 전국무장들이 오래전에 유명무실해진 조정의 벼슬을 얻는 것으로 정통성을 챙기려 했던 역사가 반영된 것이다.
가담항설의 이갑연은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으로 야무지게 벌어먹었단다.
고수의 혈표가 매관매직 식으로 귀족 직책을 사들였다는 추측이 있다.
네이버 지식iN에 매관매직은 무슨 마술인가요?라는 어이없는 질문이 올라온 적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실제 마술사가 답변을 하는 바람에 화제가 되었다.
5. 관련 항목
- 삼정의 문란
- 히어로즈 앤 제너럴스
- 매관매직 스크램블
- 엽관주의
- 직분 헌금: 대한민국 개신교 교회의 병폐 중 하나.
[1] 이것을 제외하면 인맥 추천(천거)이나 세습 정도인데, 어차피 재산도 금수저가 많기 때문에 비슷한 맥락에서 선발된 셈이다.[2] 이는 중앙에서 관리하는 것이 경제적이지 못했던 점도 한몫했다. 고대 로마의 빵바구니로 불린 이집트 곡물의 사례는 물론, 중세에도 이탈리아 도시들이 근방에서 생산한 곡물을 수입하는 것보다 거리가 더 멀더라도 해상으로 운송해온 곡물을 수입하는 것이 저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등, 운송 상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도 중국 왕조들은 수나라 시대부터 남북으로 대운하를 파기 전까지만 해도 남방의 잠재성을 알면서도 그 부를 쉽게 끌어올 수가 없으니 개발이 더뎠고, 고려나 조선에서도 수로를 통한 조세 운반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산업 혁명 후 기술 발전으로 육해를 막론하고 운송비용이 크게 격감하고, 대량생산을 통하여 단가가 줄어드는 등 여건이 크게 완화되면서 해소되기 시작한다.[3] 말이 징발이지 전근대의 징발은 그냥 병사들 시켜서 강도질한 것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고대 로마의 기록을 보면, 로마 병사가 서신을 전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다리가 아팠는지 지나가던 농부에게 말을 징발하겠다고 외쳤고, 로마 병사는 라틴어로 말했지만 그 농부는 그리스인이어서 병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로마 병사는 칼을 빼들어서 위협하여 농부에게 말을 삥뜯었고 병사는 서신을 전달하면서 그 징발 사실을 보고했다. 병사는 합법적으로 권한을 행사한 것으로 간주되어 처벌 받지 않았다.[4] 다만 진나라 쳬계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었을 듯하다. 진나라에서는 신분별로 오를 수 있는 작위가 제한되어있고 법을 어길 시 받을 처벌 대신 작위가 깎이기도 했다.[5] 다만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이 삼공 중 하나인 태위를 1억전에 샀다는 것을 보면 정가는 정가일 뿐이고 실제로는 어쩌다가 더 비싼 값에 판매되었을 수도 있다.[6] 계급은 삼공이 훨씬 높은데 왜 태수가 더 비싸냐고 반문할 수 있다. 태수가 비싼 이유는 부임지로 가면 중앙 권력의 감시가 덜하므로 세금을 투자한 만큼 뽑아먹을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또 뜯어먹기만 하지, 뜯기지는 않는 직위기도 하다.[7] 현령은 복불복인데, 세금을 백성들로부터 뜯어먹을 수 있음과 동시에 태수에게 삥을 뜯길 수도 있다.[8] 이것 때문에 여포가 잠시 원소의 객장으로 있을 때 안량과 문추를 개 돼지 취급하며 심하게 업신여겼고 그 결과 원소는 여포를 추방했다.[9] 다만 군공을 세우는 것처럼 국가에 대해 매우 큰 기여를 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하사되었다.[10] 사실 그 유명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이러한 맥락이다.[11] 이를테면 돼지 검사관, 가발 제작, 버터 시식관 등(...)[12] 18세기까지 평상시 육군 병사는 진짜 할 수 있는 일이 없거나, 멋져 보이는 군복에 반해 온 철부지거나, 범죄를 면책해주는 조건으로 온, 혹은 단지 술 배급이 매일 나온다는 거에 혹해 입대한 질 떨어지는 자들의 집합소라 지원율은 항상 간당간당했다. 그러다가 전쟁 등으로 병사가 급해지면 징집관을 동원해서 할 일 없어보이는 젊은 남성을 납치하는 것으로 병사를 '징집'했는데, 징집관들이 신분을 숨기고 다니다가, 마을에 들어간 다음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곤봉을 꺼내들고 할 일 없어보이는 젊은 남성을 두들겨패고 묶어서 병영으로 끌고 가는 방식이었다.(...) 물론 이 짓은 유럽 내에서도 비상식적인 짓으로서 워낙 인력이 부족한 영국 해군이나 했던 일이었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경우 국왕 본인이 친히 징집관 일을 해서 제정신이 아니라는 취급까지 받았다. 워낙 악명이 커서 신분을 숨긴 징집관을 먼저 알아보고 선빵을 쳐서 격퇴한 마을도 있었다.[13] 사실 영국 육군은 프랑스군을 제외하면 오히려 나머지 국가들보다 대체로 사정이 더 나은 편이었다. 요크 공작 프레더릭 어거스터스가 체계적인 군사 개혁을 하기도 했고, 프랑스와 더불어 국민 의식이 빠르게 성장한 덕에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민병대나 나름 중상류층인 요먼으로 구성된 요먼대 등 국립 지역방위군 겸 예비군으로부터도 자원병 형식으로 부대와 병력을 대거 충원받았다.[14] half pay. 현역 동 계급 기본급의 반액 조금 넘는 급여만 지급되는 일종의 예비역인데, 원래는 무능한데 자리만 지키는 인원들 탓에 발생하는 인사적체 문제를 해소하고자 도입되었다.[15] 대령(Colonel) 계급을 받은 것은 애초에 대령 계급 자체가 원래 연대장 직책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당시의 부대 창설은 연대 단위로 이루어졌는데, 부대 창설이 생각보다 돈이 많이 깨지는 일이었기에 막상 연대 내에 대대가 2개 이상인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 결과 원래 부연대장을 가리키던 "Lieutenant Colonel"도 자연스럽게 대대장이라는 뜻을 거쳐 중령 계급으로 변하였다. 이 개념은 오늘날에도 흔적으로나마 남아있어서, 영국 육군에는 지금도 실제 연대장과는 별개로 명예연대장(Colonel of the regiment)을 두며, 미국에서도 지역 명사나 민병대 대장 등에 대한 명예로운 경칭으로서 "Colonel"이라는 말이 쓰인다. KFC의 창립자 할랜드 샌더스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16] 그래도 육군은 나름 혹해서 오는 어리숙한 병사들이라도 있었지만, 이쪽은 웬만큼 배를 타본 선원이라면 다들 수병 복무를 기피하려고 들었으므로, 정상적인 모병 외에도 그냥 항구에서 납치하거나 술집에서 고주망태가 된 주정뱅이를 배에 실은 뒤 항구를 떠나는 식으로 징집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해상에서 상선을 상대로 트집을 잡아 선원을 체포하는 식으로 충원하기도 했는데, 아예 자기편 사략선하고도 서로 수병을 확보하려고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17] 승선 명부에 이름만 올려놓고 육상에서 딴짓하는 경우가 많았다.[18] 매관매직 스크램블이라는 조선 시대 마법소녀 이야기 라이트 노벨인데, 탐관로리가 등장한다.[19] 公家, 사무라이들인 부케(武家)와 구분되는, 천황 밑에서 조정의 일을 맡아 보던 귀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