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코 크로캅의 챔피언 벨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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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0000><colcolor=#fff> 미르코 크로캅 Mirko Crocop | |
이름 | 미르코 필리포비치 (Mirko Filipović) |
출생 | 1974년 9월 10일 ([age(1974-09-10)]세) |
유고슬라비아 SFR 크로아티아 SR 부코바르스리옘 주 빈코프치 | |
국적 | [[크로아티아| ]][[틀:국기| ]][[틀:국기| ]] |
아마추어 복싱 전적 | 56전 48승 8패 (31KO) |
입식 전적 | 31전 23승 8패 (12KO) |
종합격투기 전적 | 52전 38승 11패 2무 1무효 |
승 | 30KO, 4SUB, 4판정 |
패 | 6KO, 2SUB, 3판정 |
체격 | 188cm / 110kg[1] / 185cm |
링네임 | Cro Cop |
테마곡 | Duran Duran - The Wild Boys |
도핑 적발 | 성장호르몬 (2015년 11월 11일) |
주요 타이틀 | IKBF 헤비급 풀 컨택트 챔피언 |
Pride 2006 무차별급 그랑프리 우승 | |
K-1 2012 월드 그랑프리 우승 | |
IGF 4대 헤비급 챔피언 | |
Rizin FF 2016 무차별급 토너먼트 우승 | |
기타 | K-1 1999 월드 그랑프리 준우승 |
IGF 헤비급 타이틀 방어 1회 |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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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K-1 월드 그랑프리 챔피언, Pride 무차별급 그랑프리 챔피언이자 UFC 출신의 종합격투기 선수였다.2. 평가
전직 대테러제압 SWAT 출신으로, 순수 킥복서로 시작해 종합격투기 선수로 전향한 선수 중 가장 이상적이며 성공적인 행보를 보여줬고, 2000년대 초반 종합격투계를 풍미하며 글로벌 격투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표도르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는데, 사실 무관의 제왕이란 별칭처럼 당시엔 표도르에 밀린 2인자 이미지가 강했고 실제로도 그러했지만, 대중적인 인기는 더 높았던 아이러니한 파이터였기도 하다. 덕분인지 격투기 전문 언론 랜디저널[2] 창간 1주년 선정 최고의 격투기 스타로 선정되기도 했다.3. 전적
※ 킥복싱- 주요 승: 제롬 르 밴너, 리 하스델, 마이크 베르나르도, 무사시, 얀 노르키아, 야나기사와 류시, 샘 그레코, 글라우베 페이토자, 피터 아츠, 레미 본야스키, 마크 헌트, 밥 샙, 레이 세포, 랜디 블레이크
※ 종합격투기
- 주요 승: 후지타 카즈유키(2), 사쿠라바 카즈시, 히스 헤링, 야마모토 요시히사, 카네하라 히로미츠, 오야마 슌고, 이고르 보브찬친, 도스 카라스 주니어, 나가타 유지, 론 워터맨, 알렉산드르 예멜리야넨코, 조쉬 바넷(3), 케빈 랜들맨, 마크 콜먼, 미노와 이쿠히사, 요시다 히데히코, 반달레이 실바, 최홍만, 모스타파 알투르크, 앤서니 페로쉬, 미즈노 타츠야, 패트릭 배리, 에디 산체스, 가브리엘 곤자가, 이시이 사토시(2), 명현만, 킹 모, 바루토 카이토, 아미르 알리아크바리, 코사카 츠요시, 로케 마르티네즈, 로이 넬슨
- 주요 패: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케빈 랜들맨, 표도르 예멜리야넨코, 마크 헌트, 가브리엘 곤자가, 칙 콩고, 주니오르 도스 산토스, 프랭크 미어, 브랜든 샤웁, 로이 넬슨, 알렉세이 올리닉
- 무승부: 타카다 노부히코, 반달레이 실바
- 무효: 알리스타 오브레임
4. 커리어
4.1. K-1
1996년 3월 처음으로 K-1에 입성한 크로캅은 당시 WGP 1995 준우승자였던 제롬 르 밴너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밴너를 맞아 2라운드 레프트 스트레이트로 다운을 빼앗은 끝에 만장일치로 판정승을 거두며 프로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 이래 빠르고 강력한 왼발 하이킥과 빠른 스트레이트 등으로 일본내 K-1팬들 사이에서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파이널에서는 어네스트 후스트와 대결, 질긴 악연이 시작되었다. 당시 크로캅의 스승이 K-1 초대 대회 결승에서 후스트를 KO시켜 초대 챔피언에 등극한 브랑코 시카틱이었기 때문에 스승의 대리전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4] 시카틱에게 훈련받은 크로캅의 우세를 점치는 의견이 대세였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크로캅은 후스트의 로우킥에 의한 TKO패를 당했고 프로 무대에서 2전만에 패배의 쓴 잔을 마셨다.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5] WGP 개막전에서 마이크 베르나르도를 상대로 2번이나 다운을 빼앗으며 승리했고 무사시와의 대결에서는 레프트 어퍼컷에 이은 펀치러시로 TKO승, 다음 경기에서 만난 샘 그레코를 로킥으로 TKO시키며 결승전에 진출한다. 하지만 결승전 상대였던 어네스트 후스트에게 레프트 바디 블로우를 맞아 KO패하며 준우승에 그치게 된다. 그 후 K-1 WGP 2000에서도 후스트에게 또 다시 지면서 전적 3전 전패를 기록했다.[6]
2001년은 크로캅에게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여전히 K-1 입식을 주무대로 활동하고 있던 그는 8월 K-1 앤디 훅 메모리얼에서 후지타 카즈유키를 상대로 생애 처음 MMA룰로 경기를 가지게 된다. 당시 많은 이들은 아직 크로캅의 그래플링 실력이 검증되지 않았고 MMA 전적도 없던 터라 일본 프로레슬링 전설 안토니오 이노키의 수제자이자 자유형 레슬링 국가대표 경력까지 있던 후지타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막상 경기 시작 39초만에 후지타의 태클을 크로캅이 니킥으로 반격해 이마의 큰 컷을 만들어내며[7] 닥터 스톱으로 경기를 끝내 종합격투계에 성공적으로 데뷔하게 된다.
MMA 시합을 가진 후에도 계속 K-1 입식을 주력으로 경기를 가졌고 2002년 3월에는 나고야에서 마크 헌트를 상대로 하이킥에 의한 다운을 빼앗으며 판정승을 거두었다.[8]
7월에는 후쿠오카 그랑프리에서 레미 본야스키를 레프트 어퍼에 이은 펀치 러시로 다운시키며 승리, 레프리 스톱으로 TKO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는 한마디로 크로캅이 '자라나는 새싹을 밟다못해 밀어버렸던' 경기로 남는다. 때리는 쪽이 오히려 지칠 정도의 공세를 퍼부었으니까.
후지타와의 경기를 주시하던 Pride는 2001년 11월 PRIDE 17에서 타카다 노부히코와의 경기를 주선했으나 아직 종합 룰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무승부에 그쳤다. 허나 한달 뒤 12월에 봄바예에서 나가타 유지를 상대로 초살 TKO승을 거두며 MMA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2002년 드디어 PRIDE 무대에서 '도끼 살인마' 반달레이 실바를 상대로 본격적인 MMA 경기를 가졌다. 당시 실바는 미들급 선수였지만 계체에선 오히려 크로캅보다 체중이 더 나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1라운드 초반부터 타격에선 크로캅이 실바를 압도하였다. 실바의 옆구리 멍자국이 당시 크로캅의 킥데미지를 알려준다. 하지만 그라운드 방어에서 취약점을 보여줬고 특별룰로 진행되었기에 경기는 무승부로 끝나게 된다. 판정이 내려졌다면 실바의 승리로 끝났을 경기 내용이었다.
같은 해 8월 사쿠라바 카즈시와의 경기에서 TKO승을 거둔다. 사쿠라바의 하위에 깔리기도 했으나 워낙 체급이 다른 탓에 사쿠라바가 상위를 잡고도 현저하게 밀렸고 결국 업킥에 맞고 스탠딩에서 무참하게 얻어맞아 생긴 눈부상으로 경기를 포기하게 된다. 12월에는 후지타와 재대결하여 판정승을 거둔다. 후지타가 초반 본인 스타일대로 꾸준히 TD로 밀고넘어졌고 끝내 종료 직전 성공시켰기 때문에 판정에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크로캅 역시 2라운드 스프롤 이후 선전했고 스탠딩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였기에 판정불만이 생길 수는 없다..
2003년 3월 다시 입식 룰로 '야수' 밥 샙과의 경기를 가졌다. 당시의 샙은 입식의 최강자 어네스트 후스트를 2번이나 KO시키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후스트에게 3전패한 크로캅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크로캅은 1라운드 1분 26초만에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작렬시키며 화려한 KO승을 거둔다. 이 경기를 계기로 크로캅은 자신의 주가를 한층 올렸고 반대로 샙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며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 경기에서 밥이 격투기에 대한 공포증을 가지게 되었다는 시각도 있을 정도였다.[9]
또한 승리를 거두고 평소와는 달리 미친 듯이 포효하는 세레머니를 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밥 샙에게 전패한 어네스트 후스트에게는 크로캅이 전패했다.
4.2. Pride
4.2.1. 초기
밥 샙과의 경기에서 흥행성을 검증받는 크로캅은 2003년 입식격투기계인 K-1을 떠나 종합격투기계인 Pride로 이적, 본격적인 종합격투기선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2003년 6월 '텍사스 광마' 히스 헤링을 맞아 바디킥에 이은 펀치로 TKO승을 거뒀다. 이 경기까지만 하더라도 크로캅은 K-1에서 넘어온 침략자 이미지가 남아있어서 등장할 때 야유를 받았고 반대로 상대인 헤링이 엄청난 환호를 받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헤링을 KO시키면서 그 야유가 환호로 바뀌었다. 8월과 10월에 각각 이고르 보브찬친과 도스 카라스 주니어에게 하이킥 KO승을 거두는 등, 입식격투가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테이크다운 디펜스와 파워풀한 타격으로 종합 룰로 5연승을 달리며 순항을 계속한다.
같은 해 PRIDE 2대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표도르 예멜리야넨코가 Inoki Bom-Ba-Ye로 이적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효도르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잠정 타이틀전이 벌어졌고 크로캅과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가 잠정 벨트를 두고 격돌했다. 크로캅은 2003년 11월의 경기에서 암바로 패배하며 그래플러의 무서움을 깨닫게 된다. 1라운드 10분 내내 스탠딩에서 노게이라를 난타하며 일방적인 시합을 벌였지만 2라운드 초반 단 한 차례의 태클을 내주었고 이어 마운트를 빼았기며 암바로 패하고 말았다.
노게이라 전 이후 2004년 2월 1일에 론 워터맨을, 13일 후 14일에는 야마모토 요시히사 둘 모두를 사커킥으로 보내버리면서 1R TKO승리를 거뒀다. 특히 요시히사 전에서는 요시히사가 도발을 하면서 소소한 웃음을 줬지만 그라운드로 간 뒤 크로캅의 분노가 담긴 사커킥을 맞으면서 처참하게 당했다. 특히 요시히사 전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면 더욱 재밌다. 요시히사와 경기를 앞두고 있던 크로캅은 지인의 사망소식을 접한다. 이에 DSE측에 양해를 구하고 경기를 미루게 되는데 요시히사는 이를 두고 "크로캅이 내가 무서워 도망을 갔다"라고 도발하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다. 이외에도 요시히사는 자신에게 테이크 다운 하던 마크 커가 바닥에 정수리를 부딪히고 기절해버리자 프로레슬링 기술인 DDT를 넣어 KO시켰다는 개드립을 치는 등 뻥카 기질이 다분했다. 이에 크로캅의 분노는 수직상승하여 경기가 시작되자 글러브 터치를 제안하는 야마모토에게 글러브 터치 대신 로우킥을 선사했고 요시히사는 이 과정에서 로우킥에 맞은 쪽 허벅지를 툭툭 치면서 더 쳐보라는 도발을 시전했다. 이후에도 펀치보다는 주로 킥을 노리고 충분히 KO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도 굳이 머리를 꾹꾹 눌러가며 사커킥을 선사하는 등 일방적으로 구타한다. 당시 요시히사의 별명은 '싸움반장'이었는데, 크로캅에게 두들겨 맞기 시작하자, 중계하던 캐스터가 "폭풍을 부르는 싸움반장, 아~ 폭풍을 너무 불러버렸나요."라는 드립을 날리기도 했다.
어느 정도 떡밥을 충전한 그는 4월 헤비급 GP 개막전에서 UFC 출신의 레슬러 케빈 랜들맨과 시합을 가졌다. 랜들맨은 특유의 파워와 탄력을 앞세워 크로캅을 압박, 1분 57초만에 타이밍을 정확하게 읽은 레프트 훅 + 해머링 콤보로 크로캅을 실신시킨다. 이로서 크로캅은 그랑프리 1차전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게 된다.
PRIDE는 급히 떡밥 수혈에 나섰다. 같은 해 5월과 7월, 카네하라 히로미츠와 오야마 슌고가 각각 제물로 바쳐졌다. 두 선수 다 크로캅과 두 체급 차이가 나는 상대였다. 카네하리 히로미츠와의 경기에선 크로캅이 해보고 싶은 것 다 해보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스탬핑, 사커킥, 심지어는 서브미션까지 시도했다. 이러한 개그 매치 끝에 판정승을 거두었고, 오야마 슌고와의 경기에선 1분 남짓한 경기 끝에 어퍼컷으로 1R 초살 KO승.
4.2.2. 전성기
기력을 충전한 그는 8월 알렉산더 예멜리아넨코와 격돌한다. 이 경기는 MMA 파이터로서의 크로캅의 진가가 여실히 드러나는 경기로 시종일관 전진해 들어오는 알렉산더를 맞아 백스탭을 밟으며 타이밍을 노리다 레프트 한방에 역전, 하이킥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화끈한 시합으로 밥 샵전에 맞먹는 임팩트와 환호를 받았다. 하이킥 피니시를 날리는 장면은 두고두고 인트로 영상에 쓰일 정도.굴욕의 알렉산더
같은 해 10월에는 역시 UFC의 헤비급 챔프였던
2005년 2월에는 역시 UFC 헤비급 챔프 출신인 마크 콜먼에게 레프트 스트레이트에 의한 실신 KO승, UFC 정상급의 레슬러였던 콜먼을 상대로 당 한차례도 태클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래플러에게 약하다는 세간의 이미지를 불식시켰다. 더욱이 바넷 이래로 랜들맨, 콜먼까지 전 UFC 헤비급 챔피언 3명을 연파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때가 크로캅의 전성기. 떡밥도 끊었고.
2005년 6월 효도르의 팀 동료인 이브라힘 마고메도프를 미들킥으로 KO시켰다. 그리고 경기 종료 후 마이크를 들고 다카다 노부히코 총괄본부장과 효도르를 링 위로 불러들이며 효도르와의 헤비급 타이틀전을 성사시켜달라는 마이크 어필을 하자 다카다가 이를 승낙했고 효도르도 이를 피하지 않으며 드디어 많은 팬들이 염원하던 드림 매치를 확정짓게 되었다.
2005년 8월 28일 지상 최강의 타이틀을 놓고 그가 염원하고 있던 표도르 예멜리야넨코와의 승부를 펼치게 된다. 격투기 관계자들은 이 대결을 웰라운드 파이터인 효도르가 MMA 최정상급의 스트라이커인 크로캅을 어떻게 그라운드로 끌고 갈 것인가에 맞춰졌다. 허나 효도르는 예상과는 달리 크로캅과 타격전을 펼치는 전술을 들고 나왔다. 삼보 베이스인 효도르가 당시 MMA 최강타격가인 크로캅을 상대로 타격으로 정면승부를 펼친 것이다.1라운드 초반부터 크로캅에게 전진 압박을 가하며 타격전에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반대로 크로캅 또한 효도르를 상대로 왼손 스트레이트 카운터를 적중시키며 효도르의 코뼈를 골절시키고 그라운드 하위포지션에서 효도르의 상징이었던 파운딩을 완벽하게 봉쇄하며 효도르를 위기에 빠트린다. 그러나 1라운드가 끝나자마자 체력이 뚝 떨어져버려서 2라운드 이후로는 효도르의 G&P 전법에 완전히 압도당하며 아무것도 못한 채 결국 만장일치로 판정패했다.
이 경기에 승리한 효도르는 인류 최강의 칭호와 더불어 종합격투계의 절대강자로 등극한 반면, 크로캅은 염원했던 헤비급 타이틀 획득에도 실패하며 입식에 이어서 MMA에서도 3인자에 머물게 되어, 한번 콩라인은 영원한 콩이라는 진리를 곱씹게 된다.
어쨌든 2005년 10월 다시 만난 조쉬 바넷에게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부활한다. 바넷은 클린치 싸움을 걸어왔으나 크로캅은 이를 잘 방어했다. 이후 3라운드 초반 크로스 카운터를 적중시켰고 이후 마운트를 빼앗기도 하며 판정 승리를 거둔다.
12월에는 K-1에서 싸운 적이 있는 마크 헌트와 경기를 가졌다. 과거 입식에서는 하이킥으로 다운을 빼앗으며 승리한 크로캅이었지만 3년 사이 헌트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하이킥이 2번이나 작렬했지만 헌트는 전혀 데미지가 없다는 듯 밀고 들어왔고 파워에서 밀린 크로캅은 백스탭을 밟다 못해 등을 보이며 물러나기까지 했다. 이 아웃복싱으로 점철된 경기의 결과는 2:1 판정패를 당하며 3년 전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경기 막판 치고 들어오다 밸런스가 무너진 헌트에게 마운트를 뺏기도 했지만 경기 종료 약 20초전이라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3년 전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DSE 대표 사카키바라 노부유키는 이 때 크로캅이 감기+고열+발목부상이 있었다고 기자 회견에서 말했다.
4.2.3. 2006 무차별급 그랑프리
2006년에 PRIDE에서 무차별급 그랑프리가 열리게 되었는데, 이 당시 효도르가 부상을 입어서 그랑프리 참가를 못하게 되었다. 결국 무차별 체급으로 토너먼트를 벌여 최후의 승자가 12월 31일 남제에서 효도르와 타이틀 매치를 갖는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10] 여기에는 호드리고 노게이라, 조쉬 바넷, 제임스 톰슨, 후지타 카즈유키 등 헤비급 선수들 이외에 반달레이 실바, 요시다 히데히코, 미노와 이쿠히사 등 하위체급의 선수들도 대거 참여했다.[11]이 그랑프리에 참가한 크로캅은 5월의 1차전에서 자신보다 두 체급 아래인 미노와 이쿠히사를 상대로 그랑프리 1차전에서 파운딩으로 1라운드 시작 약 1분만에 초살 TKO승을 거두었고[12] 이어 7월에 한체급 아래인 유도가 요시다 히데히코[13]를 로우킥으로 꺾으며 역시 1라운드 TKO승을 따냈다.
그리고 3차전에서 반달레이 실바와 대전하게 된다. 참고로 무차별급 GP의 2nd 라운드 대진, 결승전 대진은 팬 투표로 짰다. 실바는 100kg 가까이 증량을 하고 나온 상태였으나 구색만 맞췄을 뿐, 적정 체급에서의 스피드와 컨디션을 잃은 채 크로캅에게 난타당했다. 이 경기는 크로캅 특유의 왼발 로우, 미들, 하이 3지선다의 수싸움이 먹힌 경기였다. 크로캅은 특유의 압박으로 자신의 거리로 가져가고 왼발킥을 날렸는데 미들킥과 하이킥의 궤도 차이가 없어서 실바는 킥 방어에 애를 먹었다. 그 결과 오른쪽 늑골에 꽂힌 미들킥으로 사실상 경기가 어려워졌고 마지막의 불꽃 하이킥으로 KO패하고 만다. 2003년과는 달리 완벽한 MMA 파이터로 진화를 마친 크로캅을 상대로는 떡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실바는 하이킥 이전에 레프트 보디로 갈비뼈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는데 이때문에 한동안 경기를 가지지 못하고 요양을 해야 했고 이후 뚜렷한 하강곡선을 그리게 된다. 또한 이 경기와 일전 마우리시오 쇼군이 콜먼의 태클을 방어하다가 팔이 부러졌던 경기까지 겹치면서 무제한급 GP의 개최와 함께 한동안 격투 커뮤니티의 강력한 떡밥으로 돌던 '실력만 있으면 체급도 극복 가능'이라는 떡밥이 한동안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앤더슨 실바가 등장하기 전까진.
결승에서 만난 선수는 이미 크로캅에게 2번이나 진 조쉬 바넷, 게다가 실바를 상대로 1라운드 KO로 올라온 크로캅과는 달리 노게이라를 만나 판정까지 가는 접전 끝에 체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크로캅은 바넷의 테이크다운을 모두 막아내며 타격으로 우세를 잡았고, 어퍼컷으로 다운을 따낸 후 파운딩으로 TKO승을 거뒀다. 마지막 파운딩이 아이포크로 들어갔고 여기서 바넷이 탭아웃을 했었는데 고의성도 딱히 없어보였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는 없었다. 크로캅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으며 심판이 말린 것도 아니기 때문.
메이저 무대였던 PRIDE에서의 우승은 크로캅으로서는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프로 격투 무대에서 최초로 우승하며 자신의 주가를 높였고 효도르와의 도전권도 얻었다. 크로캅은 '효도르가 나왔어도 내가 이겼을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때의 기세라면 허풍으로만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12월 31일에 벌어지기로 했던 효도르와의 리벤지 매치는 X맨과 대결한다느니 뭐니 하면서 흐지부지되다가[14] 결국 부상으로 인해 남제 출전 자체가 취소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남제의 예정일을 하루 앞둔 12월 30일, 크로캅은 이전부터 이적설이 나돌던 UFC로 이적하기에 이른다. 원래 남제 출전 경기가 크로캅의 마지막 프라이드 경기였고 그 경기를 앞두고 프라이드와 재계약을 하고 있었는데, 재계약 과정에서 프라이드와 UFC를 저울질하다가 UFC로 이적한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크로캅이 PRIDE의 도산에 일정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차별급 그랑프리 1차전이 끝나자마자 PRIDE를 일본내 지상파로 중계해주던 후지TV가 PRIDE의 방송을 취소하게 되면서, PRIDE의 모회사인 DSE는 자금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덤으로 간판 일본인 스타였던 사쿠라바 카즈시도 탈퇴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랑프리 3차전이 열리기 몇주전, 크로캅은 회사가 자금난을 겪고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우승상금이 적다고 투정하면서, "우승상금을 올리지 않으면 결승 그랑프리에도 참전하지 않고 PRIDE를 떠나겠다"라고 DSE를 협박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여기에 당시 돈 킹이 운영하는 WFA에서 크로캅에게 오퍼를 보냈다는 루머까지 돌면서 진짜 이적하는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DSE측은 사쿠라바까지 떠난 마당에 PRIDE가 크로캅까지 잃게 되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그랑프리 우승상금을 크로캅측이 원하는 대로 올리게 되고, 만족한 크로캅은 예정대로 그랑프리 결승에 나서게 되었지만, 결국 PRIDE 자체가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박살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당시 크로캅이 요구했던 금액은 한화 기준으로 약 4억원이라고 한다.
프라이드 도산 이후 데이나 화이트가 이런 인터뷰를 하면서 크로캅이 프라이드 도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단 위의 우승 상금 관련 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4.2.3.1. 무차별급 GP가 크로캅을 위한 이벤트였다?
무차별급 GP가 모든 것이 크로캅의 우승만을 위해 짜여진 GP다!며 까는 여론이 한 때 존재했었다. 완전히 헛소리만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 2차전부터는 매치 메이킹을 팬 투표를 통해 짰고, 크로캅에게 위협이 될 만한 파이터들이 많이 빠졌기 때문.결론부터 말하자면 토너먼트 매치메이킹 시스템과 여러가지 상황이 겹치면서 크로캅이 어부지리로 우승했다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2차전 팬 투표 당시 일단 팀 메이트인 베우둠[15]을 제외하고 보자면, 대부분의 파이터(=바넷, 노게이라, 효도르(결장 이후엔 실바), 후지타, 헌트)가 크로캅과 대결한 적이 있는 선수들이었고 그들 또한 크로캅만큼이나 흥행의 주축이라 붙을 가능성은 적었다. 그나마 저 중에서 크로캅과 붙여서 떨궈도 주최측 입장에서 큰 타격이 없고 리매치의 명분도 사는 선수가 헌트였다. 헌트가 크로캅을 이긴다면 프라이드 인기 탑인 크로캅이 떨어져서 흥행에 타격은 좀 있겠지만, 헌트 역시 인기가 많았기에 그의 대체재[16]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크로캅과 헌트를 붙이면 일본인과 헤비급 파이터들과의 실력차이의 문제때문에 다른 매치업이 죽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일단 효도르 결장 이전 상황으로 정리해보자면 효도르, 노게이라, 바넷, 베우둠 vs 일본인 노장 둘 중 하나의 매치는 재미와 관심 모두가 떨어지는 매치라 버려지게 된다.[17] 이 상황에 크로캅을 헌트와 붙이면 일본인들끼리의 매치가 나오게 되는데, 이는 2004년 오가와 나오야를 결승전까지 밀어줬다가 비판을 받은 전례로 봤을 때, 또 프라이드가 대놓고 일본인을 결승전에 진출시키려 한다며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 프라이드 입장에서도 그다지 반가운 매치는 아닐 것이다. 때문에 효도르 결장 이전까진 후지타를 그나마 상성상 해볼만한 헌트와 붙이고, 요시다는 로 그나마 한 번도 안 붙어본 크로캅과 붙이자는 의견이 많았다.[18]
그리고 헌트보다 흥행력이 훨씬 좋은 일본인 킬러 반더레이 실바가 효도르의 대타로 들어오게 되었고, 일본인 킬러 스토리를 좋아하고 이 스토리가 깨지길 바라는 프라이드가 실바를 후지타와 붙일 확률이 꽤 높았다. 또한 이 매치업은 크로캅과 요시다의 매치가 성사될 가능성에 쐐기를 박았다.[19] 결국 팬들의 예측대로 크로캅과 요시다가 대결하게 되었다.
3차전 대진은 하위 체급 타격가인 반더레이 실바의 존재와 노게이라, 바넷 모두 크로캅 붙어본 경험이 있어 이로 인해 재밌게 짤 수 있는 매치업의 수가 크게 제한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그림이 좀 나오는 매치업이 크로캅과 실바의 2차전, 노게이라 vs 바넷의 경기였고, 역시 2차전과 마찬가지로 이 매치업들이 투표 결과 1위를 차지했다.
효도르를 비롯한 많은 탑 파이터들이 부상으로 빠진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 아니 아쉬운 수준이 아니라 이게 크리티컬이었다.. 본디 계획이었던 상위 체급 vs 하위 체급 파이터간의 드림매치라는 컨셉이 아예 초장부터 박살이 났기 때문.[20] 그리고 그 파이터들의 자리를 요시다 히데히코 등의 고령의 일본인 파이터들과 줄루징요같은 속칭 '서커스 매치 파이터'들이 들어가버리는 바람에 짤 수 있는 매치업의 수가 많이 줄어들은게 프라이드 입장에선 좀 답답한 일이었을 듯 하다.
팬들이 보고 싶은 매치를 볼 수 있도록 투표 시스템까지 동원했지만 이마저도 결국엔 한 번 본 경기는 보지 말자 & 시시해보이는 경기는 보지 말자는 팬들의 심리가 강하게 반영되는 바람에 크로캅 입장에선 무난한 매치업만 나온 것.
4.3. UFC
데뷔전은 2007년 2월 UFC 67에서 이루어졌으며 당시 8전 전승을 거두고 있던 신성 에디 산체스가 상대로 지목됐다. 타격전의 양상을 보인 시합에서 크로캅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산체스에게 우위를 보이며 1라운드 4분 33초만에 펀치에 이은 파운딩으로 TKO승을 거두었다.불의의 일격을 당한 크로캅에게 데이나 화이트는 2007년 9월 UFC 75에서 프랑스 무에타이 챔피언 출신인 스트라이커 칙 콩고를 다음 상대로 붙여준다. 당시 콩고는 크로캅을 두려워하며 시합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성사됐다. 보양 좀 하라고 나름대로는 떡밥을 준 것인데 그만 크로캅이 못먹고 체해버렸다. 1라운드는 기습 테이크다운으로 앞서갔으나 2라운드에 니킥에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며 상황은 역전됐다. 결국 체격과 레슬링에서 앞서는 콩고를 당해내지 못하고 판정패한다.
이 때 당시 크로캅의 폼을 생각하면 UFC의 활약이 굉장히 아쉬운데, 이유는 몇가지 있겠으나 링과 케이지의 차이를 극복을 못했다는게 중론이다. 링에서는 크로캅 특유의 압박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게 특기였는데, 케이지에선 이러한 전술이 통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맷집과 체력이 좋지 않아 아웃파이팅이 몸에 밴 선수였는데, 공격 패턴 또한 한정적이라 상대방 입장에서는 움직임을 예측하기가 쉬웠고 케이지는 링에 비해 공간과 각이 넓기에 압박에서 벗어나기가 쉬웠다. 크로캅 입장에서는 타격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약점이었던 레슬링이 UFC에서는 더욱 부각되었다.
4.4. 다시 K-1 (DREAM)
팬들은 그가 UFC에 남아 재기하는 모습을 기대했으나 별안간 일본의 HUSTLE이라는 프로레슬링 단체에서 경기를 가졌다. 허슬에 출현했을 때 한국계 데스매치 레슬러 카네무라 킨타로에게 하이킥을 작렬했는데, 여기서 조준을 잘못했는지 정말로 쎄게 때려서 카네무라의 머리에 큰 혹이 났다고 한다. 더불어 너무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고. 2008년 2월 12일 UFC를 떠나 다시 DSE 산하의 DREAM으로의 이적을 발표했다. 아직 UFC와 계약한 경기를 모두 치르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명백한 계약 위반이었다. 하지만 데이나 화이트는 그가 다른 단체에서 기량을 회복하고 돌아오길 원한다는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경악할 발언을 날렸다. 독점 문제로 효도르와의 계약까지 포기했던 그였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2008년 3월에 DREAM 1에서 미즈노 타츠야를 맞은 크로캅은 56초만에 초살승을 거두며 부활에 성공한다. 원래 나카오 요시히로와 경기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나카오 요시히로가 대놓고 센고쿠로 도망가버렸고, 그 후에 마이티 모와의 대전을 거절하고 DREAM 4에서는 K-1 선수 제롬 르 밴너와 종합격투기룰로 붙을 예정이었으나 할렉 그레이시와의 그레플링 매치로 변경되었고, 얼마 후 부상으로 취소되었다.
이어 같은 해 9월 23일 DREAM 6에서 알리스타 오브레임과 대결한다. 당시 오브레임은 근육 두더지로의 증량 막바지 단계로 포텐셜이 막 폭발하려는 시점이었다. 크로캅은 클린치와 레슬링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그라운드에서 관광을 당한다. 끝내 3차례의 로블로를 얻어맞고 NC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크로캅의 패배라고 해도 무관한 내용이었다. 여담으로 경기가 잡히기 전까지 오브레임은 끊임없이 크로캅을 도발해왔는데 본인이 겁나서 시합을 피한다, 약한 놈만 때려잡는다는 등 도발을 했지만 경기후 인터뷰에서는 “나는 사실 그를 예전부터 존경해왔다. 저런 거물과 경기하려면 어그로밖에 끌 수 없었고 경기내용에 대해서는 크로캅에게 미안하다”라고 밝혔다.
시합 이후 로블로로 인해 혈뇨까지 나왔다고 한다
2008 다이나마이트에서 오브레임과의 2차전이 잡혔으나 무산되고, 결국 최홍만과 대결하게 되었는데 1R 후반까지 별다른 공방없이 지루하게 탐색전으로 들어갔는데 크로캅의 기습적인 레그킥 한방이 최홍만의 무릎의 적중하면서 그대로 다운 최홍만은 무릎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고 그대로 경기는 중단 크로캅의 TKO승리가 선언되었다.[21]
4.5. 다시 UFC
최홍만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크로캅은 2009년 6월 다시 UFC 무대에 복귀했다. 무스타파 알 투르크를 상대로 TKO승을 거두는데, 이때 상대가 눈이 찔렸던 것이 빌미가 되어 찌르캅이라는 별명이 추가되었다. 이때 알 투르크가 이 문제를 들어 계속 항의한 덕에, 그는 2연패에도 불구하고 안 짤리고 1경기 연장 계약을 갖게 되었다. UFC는 2연패 이상 하면 방출당하는게 원칙이다. 경기중 눈이 제대로 찔린 알 투르크는 고통스러워하면서 심판에게 눈이 찔렸다고 어필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계속 인플레이 상태였고 공매를 무수히 맞으면서 눈찔렸다고 계속 소리쳤다. 경기 끝난 후 펄쩍 뛰면서 '눈찔렸다고 몆번을 말했느냐!' 하며 강력히 항의했다.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한다. 크로캅측에서 "이 경기는 단발성 계약이었고, 크로캅은 이제 다시 DREAM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말을 한 것. DREAM의 프로듀서 사사하라 케이지도 그와 3~4경기 정도 재계약을 했다는 식의 인터뷰를 했다. 그러자 UFC 대표 로렌조 퍼티타가 직접 크로아티아로 날아가 크로캅과 협상을 했고, 거절할 수 없는 조건에 크로캅이 승낙을 하고 UFC와 재계약을 하기에 이른다.
좌우간 2009년 9월 UFC 103에서는 주니어 도스 산토스와의 대결했다. 강력한 타격을 갖춘 산토스를 상대로 타격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특기인 레프트 카운터와 어퍼컷을 적중시켜 눈가에 출혈을 일으키는 투혼을 잠시 보여줬으나 결국 3라운드부터는 니킥을 가미한 몰아치는 타격을 버티지 못하고 3라운드에 눈을 뜰 수 없다며 심판에게 어필하여 결국 TKO패.
2010년 2월 UFC 110에서는 앤서니 페로쉬[22]를 상대로 TKO승을 거두었다. 원래 벤 로스웰과 대결할 예정이었는데 로스웰이 질병으로 결장하면서 나온 리저버인 셈. 2라운드 닥터 스톱으로 이기긴 했으나 경기가 매우 지루했다는 평이 많았다. 후일 크로캅이 이 경기에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인 이유에 대해 해명했는데, 2일 전 오퍼를 받은 앤서니 페로쉬에 대한 일종의 배려라고 말했다.
2010년 6월 13일 UFC 115에서 패트릭 배리와 맞붙었는데, 이 경기는 계약상 크로캅의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는 경기였다. 상대인 패트릭 배리는 화끈한 인파이터였기 때문에 경기는 타격전으로 초반에 빠르게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고, 1라운드에서 베리의 타격이 이어져 크로캅이 2번이나 다운을 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2라운드부터 크로캅이 안 하던 그래플링을 하며 패트릭 배리를 테이크다운시켰고, 3라운드 막판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진 배리에게 오랜만에 소나기펀치를 퍼부은 다음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간신히 승리를 거뒀다. 크로캅의 두번째 서브미션 승리.
2010년 9월 UFC 119에서 노게이라를 대신해서 리저브로 출전, 프랭크 미어와 맞붙었다. 아웃파이팅 위주의 경기에서 미어의 더티복싱에 고전했고, 결국 3라운드 오버핸드 레프트를 뻗다가 미어의 오른발 니킥에 실신 KO패를 당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기 중 미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내용인 즉슨, 미어가 크로캅에게 "상위를 내줄테니 그라운드로 가자"라고 했던 것. 물론 크로캅은 거절했다.
2011년 3월 UFC 128에서 TUF 10 준우승자인 브랜든 샤웁과의 대결이 예정되었다. 1, 2 라운드는 스탠딩 레슬링으로 차분하게 이끌어가다 3라운드 후반, 로킥을 차다 샤웁의 카운터 스트레이트를 맞고 침몰, 3번째 KO패를 당했다. 결국 경기 후 데이나 화이트의 트위터엔 "이번 시합이 UFC에서 크로캅의 마지막 시합이 될 것" 이라는 트윗이 남겨졌다고 한다. 하지만 크로캅이 '나의 미래는 UFC에 달려있다.
그리고 2011년 10월 UFC 137에서 로이 넬슨과의 마지막 경기를 가졌다. 크로캅은 넬슨의 강렬한 라이트훅에 적중당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전진는 모습을 보여줬고, 2라운드 초반 펀치러쉬에 이어 하이킥을 적중시키더니 넬슨의 크로시픽스를 버티는 투혼까지 보였다. 그러나 3라운드 펀치를 허용하며 다운되었고 백마운트에서 쏟아지는 파운딩을 견디지 못하고 TKO로 패하고 말았다.
실은 UFC 137이 열리기 전에 크로캅은 이미 은퇴를 선언했다. 이기건 지건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격투계를 떠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UFC가 자신을 왕처럼 대접해 주었는데 그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고도 말했다. 시합이 끝난 후 그는 넬슨을 칭찬해 주며 파이터로서의 커리어를 끝낼 것을 선언했다. UFC에서의 행보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전체적인 커리어는 성공적이었으며, 모든 것을 다 했다고 밝혔다.
4.6. 은퇴 번복과 또 다시 K-1 복귀
하지만 은퇴를 한 게 아니라 UFC 계약상 마지막 경기였다면서 뜬금없이 킥복싱 무대 복귀를 선언하며 또 다시 팬들을 당황하게 했다.2012년 3월 자국 크로아티아에서 벌어진 Cro Cop Final Fight 2012에서 레이 세포를 판정으로 잡아내고 킥복싱 무대로 복귀한다.
그 후 K-1과 재계약하며 2012년 5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펼쳐진 K-1 월드맥스 2012 토너먼트에서 슈퍼파이트 매치에 참전, 스페인의 로렌 하비에르 호르헤라는 다소 무명 선수를 상대로 2라운드만에 어퍼컷으로 KO승리를 거둔다.
이후 2년만에 열린 K-1 월드 그랑프리에도 참가, 2012년 10월 14일 16강전에서 미국의 랜디 블레이크를 2-0 판정으로 잡았다. 다만 이 경기는 좀 막장이었는데, 2라운드 도중 블레이크가 로 블로를 맞고 주저앉았는데 레프리가 넉다운 처리를 시켜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슬립다운 당한 블레이크에게 어퍼를 날리기까지 했다. 이에 크로캅이 화해의 의미로 글러브 터치를 하려고 했는데 블레이크가 펀치를 날려서 다운 경기가 트러블이 많긴 했으나 어쨌든 경기는 이겼다.
2013년 12월 31일 이노키 봄바예에 출전하여 프로레슬러 스즈카와 신이치와 대결하여 약 1분 남짓한 경기 끝에 암바로 잡았다.[23]
2013년 2월 2일 리우데 자네이루에서 열리는 Royal FC에서 페드로 히조와의 대결이 예정되어있었으나 방영권 문제와 대회 개최 장소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해 결국 취소되었다.
2013년 3월 15일 Cro Cop Final Fight 2013에 출전 예정이었는데, 이 대회가 K-1 월드 그랑프리 2012 결승전과 공동 개최를 하게 되었고, 8강전에서 미국의 재럴 밀러와 대결하게 되었다. 장소가 다른 곳도 아닌 크로캅의 모국 크로아티아에서 열리며, 눈에 띄는 강적도 없기에[24] 크로캅 입장에선 K-1 그랑프리 첫 우승을 노려볼만 하게 되었다.
2013년 3월. 드디어 대망의 K-1 월드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다. K-1이 사실상 망해버려서 입식의 주요 강자들은 네덜란드가 주축이 된 GLORY로 넘어갔지만, 이때쯤 출소한 바다 하리, 이스마엘 론드, 헤스디 겔게스 등 몇몇 강자가 출전한지라 노쇠한 크로캅이 우승하기는 힘들어 보였는데 뜻밖의 결과였다. 8강전인 재럴 밀러전에서는 정타수에서 밀렸으나 홈 어드밴티지로 판정승을 거뒀고, 수감생활로 기량이 떨어진 바다 하리가 부상으로 탈락한 천운이 따랐다.[25] 16강 멤버 중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고 8강과 4강을 KO로 이기고 올라왔던 이스마엘 론드를 하이킥으로 다운시키며 결승전만은 크로캅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팬들은 어찌됐건간에 그 지긋지긋한 무관의 제왕 딱지를 떼었다는 데에서 의미를 두고 있는 분위기이다. 또한 이 우승을 통해 격투기 역사상 유일한 K-1과 PRIDE 챔피언을 모두 획득한 파이터가 되었다.
2013년 11월 8일 레전드 파이팅쇼에서 알렉세이 올레이닉 [26]과 대결했다. 경기 양상은 계속 TD를 시도하는 올레닉과 이를 방어하는 크로캅의 모습이었는데, 첫번째 테익다운을 당했을때는 크로캅이 탈출했으나 2번째에는 링줄을 잡았음에도 탈출하지 못하고 넥크랭크에 잡혀 탭아웃을 하고 말았다.
이후 Glory와 계약을 맺었다.
2014년 3월 8일 홈인 크로아티아에서 레미 본야스키의 은퇴전 상대로 낙점이 되어 그와 경기를 가졌다. 12년 전처럼 크로캅이 러쉬하고, 본야스키가 가드를 바짝 올린 뒤 아웃 파이팅을 펼치며 미들킥과 헤드킥을 넣는 양상이었는데, 두 선수 모두 몸이 예전같지 않은지 지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결국 유효타에서 앞선 본야스키가 3-0 판정승을 거두었다. 불과 6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 파이터가 일본의 양대(K-1, Pride) 메이저 단체의 탑 클래스 파이터였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참 격세지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다.
6월에는 재럴 밀러와 2차전을 가져 판정승을 거둔다.
8월 24일에는 일본의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이시이 사토시와 IGF 헤비급 타이틀을 놓고 경기를 가졌다. 1라운드 초반 로우킥을 차다가 TD를 허용하며 하위에 깔리긴했으나, 하위에서 이시이의 이마에 엘보우를 적중시키며 컷을 만들었고, 2라운드까지 닥터 체크를 수시로 받았는데도 이시이의 출혈이 멈추지 않아 TKO승을 거뒀다.
12월 31일 이시이 사토시와 2차전을 가졌다. 전체적으로 1차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2라운드 막판 하이킥으로 다운을 뺏으며 TKO승, 8년만에 하이킥 KO승을 거두었다.
4.7. 또 다시 UFC
2015년 1월 21일 UFC와 재계약에 성공했다!2015년 4월 11일 UFN 64에서 가브리엘 곤자가과의 2차전으로 복귀전을 가졌다 1, 2 라운드에서는 점수에서 뒤졌으나 3라운드에 엘보우 공격으로 기세를 잡아 결국 역전 KO승을 거두게 된다. 그러면서 지난 경기의 리벤지를 달성하여 팬들을 열광시킨다.
그리고 2015년 11월 28일 서울에서 UFN 79 출전이 확정되었다. 상대는 앤소니 해밀튼, 크로캅의 첫 공식 방한[27]이다. 한국팬들에게는 크로캅의 등장곡 Wild Boys와 함께 크로캅을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절호의 기회.
4.8. 갑작스러운 은퇴와 도핑 적발
그러나 2015년 11월 10일, 크로캅이 어깨 부상으로 은퇴 의사를 밝히면서 팬덤은 아수라장이다. 메인매치 카드가 죽어버려 효도르나 마크 헌트라도 데려오지 않는 이상 도무지 커버가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흥행에 적신호가 켜진 상태였다.하지만, 다행스럽게도 UFC측에서는 마크 헌트,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존 턱, 줄리아나 페냐, 야이르 로드리게스 등의 선수들의 팬사인회를 포함한 각종 이벤트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고[28], 대회 당일 많은 한국선수들이 선전하면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흥행을 거두었다.
그리고 2015년 11월 12일, UFC측에서 충격적인 발표를 하였는데, 크로캅에게서 약물 양성 반응이 나왔기 때문에 출장 정지 처분을 내린다는 내용이었다. 공개된 사실에 의하면 크로캅은 고질적인 어깨 부상의 회복을 위해선 성장 호르몬을 필수적으로 투약하여 사용해야만 했고 어깨 부상의 완치를 위해 금지 약물인 성장 호르몬 성분이 포함된 혈장 주사를 맞았다는 것. 금지 약물 복용 징계가 강화되며 출장 정지 기간이 2~3년으로 대폭 늘었는데, 고령의 파이터인 크로캅 입장에서는 출장 정지 기간을 기다리느니 은퇴를 선택한 것이다.
은퇴와는 별개로 2년간의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미국반도핑기구(USADA)측의 검사 결과, 금지 약물 성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검사 시점에서 약을 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이미 본인이 성장호르몬을 주사했고 이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했기 때문에 징계는 여전히 유효하다. 약물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검사결과가 시사파는 바는 크게 두 가지로 크로캅이 최소한 치료 목적을 통해 사용한 혈장 주사 이외에는 도핑을 하지 않았다는 것, 이미 도핑을 시인한 선수의 샘플로부터도 양성반응을 검출해내지 못했을 정도로 USADA의 검사 역시 허술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로써 매우 불명예스러운 형태로 두 번째 UFC 퇴출을 당하게 됐다.
4.9. 두번째 은퇴 번복 (Rizin FF)
2016년 7월, 크로캅이 복귀 의사를 밝히면서 UFC도 크로캅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9월에 열리는 Rizin FF의 무차별 토너먼트에 참전한다고 한다. USADA에서 부과한 2년 출전정지 징계는 미국 내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열리는 라이진에 참가하는 데에는 절차상 문제는 없지만, 은퇴 선언에 이어 도핑 적발 후 이를 시인했다가 복귀하면서는 스테로이드를 쓴 건 아니니 문제 없다는 식으로 나오는 등, 이중적인 태도로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토너먼트 1회전에서 명현만과 대결했다. 1라운드 초반 니킥으로 크로캅을 압박하여 링 구석으로 몰아세웠으나, 크로캅은 클린치에서의 테이크 다운과 가드패스 이후 풀마운트까지 차지하고 파운딩을 퍼붓다가 곧바로 암 트라이앵글 초크로 서브미션 승을 거뒀다.그리고 8강 상대였던 무하마드 '킹 모' 라왈을 펀치 연타로, 4강 상대인 바루토를 바디 니킥으로, 결승 상대인 아미르 알리아크바리를 체크훅으로 넉다운시킨뒤 파운딩으로 실신시키는 등 모든 경기를 화끈한 피니쉬로 장식하며 Rizin FF 무제한급 월드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했다.[29]
2017년 12월 31일에 Rizin FF에서 코사카 츠요시를 1분만에 TKO로 승리하였다.
2018년 9월 30일 로케 마르티네즈를 팔꿈치 공격으로 TKO 승리하였다.
4.10. Bellator MMA와 계약과 세 번째 은퇴
2018년 5월에 Bellator 200에서 로이 넬슨과 붙는다고 한다. 3년 만에 북미 무대 복귀전이다. 로이 넬슨에게 UFC 137에서 KO패를 당한 적이 있어서 이번이 7년만에 설욕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나 무릎 부상을 심각하게 당하면서 출전이 불가해졌고, 장기간 결장이 불가피해졌다.2019년 2월 Bellator 216에서 넬슨과의 2차전이 치러졌다. 일단 타격에서 우위를 보이며 판정승으로 이기긴 했다. 하지만 넬슨이 경기 직후 크로캅이 약물을 한거 같다며 강하게 의심을 표했다. 넬슨이 UFC 말년부터 투덜대는 이미지가 매우 강해진데다 크로캅은 약물이 걸렸건 말건 여전히 인기스타인지라 오히려 넬슨이 발리니까 어깃장을 놓는다는 의견도 있는데, 크로캅이 케이지를 등지고 클린치를 잡히더니 별 기술도 없이 넬슨을 반대편 케이지까지 직선으로 구겨넣는 경악스런 모습을 연출한지라[30] 3자 입장에서도 의심이 들법한 상황이긴 하다. 다만, 노쇠화할 나이가 한참 지났음에도 예상을 뛰어넘는 경기력이 의심스럽긴하나 경기중에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덩치가 눈에 띄게 커진 것은 아니었다.
3월 뇌졸중으로 인해 인스타를 통해 은퇴 의사를 밝혔다.
4.11. 또 다시 복귀
2024년 인스타를 통해 칙 콩고와의 리벤지전을 라이진에서 치룰 예정이라고 한다.5. 파이팅 스타일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아도 종합격투기 정상급 기량을 가진 스트라이커이자, 하이킥의 대명사. 2009년에 Inside MMA에서 있었던 '사상최고의 MMA 타격가' 선정에서는 앤더슨 실바, 척 리델, 바스 루텐에 이어 4위를 기록한 바 있다. 이것이 그가 뚜렷한 하락세를 보이던 2009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그가 MMA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파이터라는 사실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MMA 데뷔 초기에는 그래플링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바닥에 누워있는 노게이라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피나는 노력 끝에 약점을 극복하고 정상급의 레슬러들을 연파함으로써 입식 스트라이커도 종합 룰에 적응할 수 있다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기도 했다.
실은 종합 커리어가 10년이 넘는 베테랑인데, 커리어 말년의 모습들을 살펴보면 주짓수나 레슬링이 크게 향상된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테이크다운 디펜스가 좋고 그라운드에서의 움직임이 나쁜 편은 아니다.
다만 k-1에서 뛰던 크로캅이 프라이드로 이적하면서 단기간에 그래플링 실력을 올려야되었고, 이때 정석적인 그래플링이 아니라 프라이드 룰에 특화된 그래플링을 익힌게 문제가 되었다. 프라이드는 '스탑 돈 무브'라 하여 교착 상태에 빠지면 심판의 재량에 따라서 일으켜 세우거나 링 중앙에서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하위포지션에서 이스케이프 할 필요없이 심판이 스탠딩 선언할 때 까지 클로즈 가드 상태로 버티기만 하면 되었다. TD디펜스시에도 링 줄을 이용해 튕겨내거나 링 줄에 기대는 식으로 링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이러한 경기 운영은 프라이드에서는 효율적이지만, 문제는 심판의 개입없이 스스로 탈출해야 하는 UFC에서는 약점이 되고 말았다. UFC는 하위 포지션이던 케이지 구석에 있던 흔히 말하는 개비기에 당하면 심판의 중재가 거의 없다. 본인이 스스로 탈출해야 되는 것. 이 점이 생소한 룰이었기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걸 돌파할 그래플링 실력도 없어서 결정적인 약점이 되어버린 것.
하지만 의외로 클린치 싸움에서는 강한 면모를 보일 때가 많다. TUF 10 헤비급 토너먼트 준우승자이자 2010년 3월 크로캅과 경기를 했던 브랜든 샤웁은 크로캅은 내가 싸워본 이들 중에서 가장 힘이 강하다. 셰인 카윈과도 훈련해봤지만 크로캅의 힘은 카윈보다도 더 강하다. 클린치에서 크로캅을 상대하기란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크로캅을 철창으로 몰아세우고 클린치에서 이기려고 했다간 힘만 빠진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을 했을 당시 샤웁은 UFC 해설자 조 로건과 함께 크로캅과 곤자가의 2차전을 생방송으로 보고 있었는데 샤웁의 예상대로 곤자가는 클린치에서 크로캅을 철창으로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힘이 다 빠져버렸고, 그 순간 터진 크로캅의 엘보우 한 방에 전세가 역전됐다.
타격에서는 'Right leg hospital, left leg cemetery'라는 별명답게 불꽃 하이킥으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그의 가장 큰 무기는 레프트 스트레이트이다. 백스탭을 밟으며 카운터를 노리는 아웃복싱이 기본 스타일로 압박보다는 한방을 노리는 편이다. 왼손잡이에 펀치와 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로우-미들-하이로 이어지는 콤비네이션이 강력하다. 래그킥으로 하체를 공략하거나 바디로 몸통을 흔들어 준 후 갑자기 머리를 노리는 방식.
그러나 이 패턴은 곧 공략당하게 된다. 이것을 가장 먼저 실행에 올린 선수가 효도르인데 킥을 피해 크로캅의 오른쪽으로 돌면서 전진스텝을 밟는 것인데, 이렇게 할 경우 왼손잡이인 크로캅의 타격은 위력이 반감한다. 그리고 계속 전진하면서 테이크다운을 노려 그라운드에서 체력을 소모시키는 방식이다. 킥 대비능력이 있고 레슬링이 강한 선수가 이 방식을 쓸 경우 크로캅은 할 게 거의 없었다. 더구나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후반에 페이스가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대해 '크로캅의 코의 연골이 부러져서 호흡이 힘들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실제로 크로캅이 무제한급 GP 우승 이후 연골 수술을 하였지만 체력 문제는 여전했다. 이런 이유로 2007년 이후에는 스트라이커를 상대로도 고전하는 일이 잦았다.
물론 크로캅 역시 파브리시오 베우둠, 호나우도 자카레, 딘 리스터, 리코 로드리게스 등 쟁쟁한 주짓떼로들과 주짓수를 수련했고 레미 본야스키와 길버트 아이블, 킥복싱 레전드인 이반 히폴리트 등과 트레이닝을 하면서 스탠딩을 보강했고, 약점이었던 레슬링을 보강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매 경기마다 새로은 기술을 연마하고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MMA가 발전하는 속도가 크로캅보다 빨랐다. 크로캅의 약점은 1974년생의 킥복서라는 그의 태생적인 한계라고도 볼 수 있다. 프로 파이터는 경기를 가질수록 잦은 부상 때문에 내구도가 떨어지고 기량이 하락하며, 자신의 기술체계에 변화를 꾀하는 것 또한 새로운 무기를 얻을 기회가 되지만, 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것들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기타
6.1. 어린 시절
초등학교 때부터 런닝, 볏짚치기,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하였으며, 또래친구들이 즐기는 축구, 농구등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장 클로드 반담의 근육질 몸매에 반해서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직접 만든 운동기구를 사용하여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였다. 사는 곳이 시골마을이라 운동기구를 구할 수 없어서 철도원인 아버지가 가져온 철도부품에 콘크리트를 부어 역기를 만들거나 창고에 쇠막대기를 연결하는 등의 방식으로 직접 운동기구를 만들었다고 한다.아침에 일어나 러닝을 마치고, 방과 후엔 톱밥을 채워만든 샌드백에 펀치 연습을 하거나 벽에 그려놓은 사람 형상에 발차기 연습을 하는 등, 이미 학창시절부터 파이터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엄청 빡세게 훈련했는지 샌드백이 수시로 터져서 수백번이나 고쳐가며 사용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격투기를 배운건 고등학교 시절 마을 인근의 태권도 도장에 다닐 때부터였다는데 크로캅의 전매특허인 하이킥도 이때 배운 태권도에 영향을 받았다고 크로캅은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때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이 발발하여 크로캅은 태권도 수련을 중단하고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떠나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고향마을은 6000발의 포탄을 맞고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크로캅의 가족들은 집도 재산도 모두 잃고 남의 집에 빌붙어사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특히 고향친구들이 눈앞에서 폭사하는 광경을 목격한 크로캅은 이 때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느날 밤 나는 내 친구와 함께 고향에 있는 모래언덕 뒤에 숨어있는데, 탱크부대 한 무리가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부근의 다리를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그뒤 폭격이 시작되었는데, 불행히도 그 공격으로 인해 어린아이 2명과 내 친구들이 사망하였다. 초원에 지어진 집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탱크가 진군하면서 집들을 깔아뭉개버린 것이다."
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서도 격투기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는지, 크로캅은 새로운 체육관을 찾아나선다. 킥복싱 체육관을 염두에 두고 근방을 물색하였지만, 찾아낸 유일한 체육관이라곤 가라데 도장뿐이었다. 그리하여 가라데로 다시 수련을 재개하지만 가라데의 실전과 동떨어진 형 위주의 수련은 크로캅에게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크로캅은 5~6명의 남성들이 글러브와 보호장구를 착용한 채 복싱훈련을 하고있는 걸 목격한다. 순간 무언가에 홀린 듯 그들에게 다가가,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코치를 맡고 있는 사람에게 '저들과 한판 붙어도 되겠느냐?' 고 물어본다. 코치는 '해봐라. 상관 안 할테니 가서 붙어 봐라'며 흔쾌히 도전을 받아들인다. 그 대결에서 크로캅은 흠씬 두들겨 맞았으나 복싱의 강함에 매료되어 그 뒤부터 복싱훈련에 매진하게 된다. 학교수업이 끝나자마자 복싱체육관으로 달려가서 체육관 문이 열리기도 전에 1-2시간씩 기다렸고, 훈련시간이 끝난뒤에도 저녁 늦게까지 추가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복싱이 소질에 맞았던지, 크로캅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여 크로아티아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합류할 정도가 되었다.
1993년(혹은 1992년) 크로캅은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당시엔 아직 내전이 끝나지 않은 때라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때 전장에서 소총을 든 적들과 마주한 경험이 훗날 링 위에서 냉정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종전을 1년 앞둔 1994년 군복무중이던 크로캅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게된다. 크로캅은 아버지를 잃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며 훗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털어놓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20살이었고 군복무중이었다. 그때까지 아버지와 나는 남자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대화의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는데, 그것이 평생의 후회로 남는다. 차고에서 3~4시간씩 밤늦게까지 훈련할 때마다, 아버지께서 들어오셔서 그만 자야할 시간이라고 말씀해주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때 전쟁에 참여한 경력 때문에 훗날 크로캅은 ufc시합차 캐나다에 입국했을 때, 캐나다 입국관리국에서 전쟁범죄혐의로 4시간이 넘게 취조를 받은 적이 있다. 크로캅 본인은 당시 전쟁에서 직접적인 전투에 참가한 적이 없다고 밝혔지만, 이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선 수차례 교전경험이 있었음을 밝힌 적이 있어 논란이 된 바 있다.
제대 후 크로캅은 막막한 처지에 놓였다. 전쟁으로 집과 재산을 잃어 가세가 기운데다, 부친은 돈 한푼 남기지 않고 사망했기에 격투기 수련은커녕 가족부양에도 빠듯할 지경이었다. 어릴 적 꿈이었던 경찰이 되기위해 1995년 크로캅은 자그레브로 상경하여 경찰학교입학시험에 응시하지만, 나온 점수는 합격선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맥으로 대뒀던 연줄을 활용하여 결국 경찰관으로 정식 임용된다. 이는 크로캅 본인이 직접 다큐멘터리에서 밝힌 사실이다.
그 뒤, 사업가였던 즈보니미르란 사람이 크로캅의 후원자가 되어주면서 크로캅은 본격적으로 격투기훈련에 몰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31]
6.2. 그 외
생계를 위해 나이트 클럽의 바운서로 일한 적이 있다.프로 파이터 입성전엔 태권도와 아마추어 복싱45전의 경험이 있었다고 하며, K-1 파이터로서의 커리어가 시작된건 초대 K-1 그랑프리 챔피언이였던 브랑코 시카틱의 티가짐에서 훈련을 하면서부터였고, 당시 시카틱은 자신의 링네임이였던 Tigar '티가'(크로아티아 말로 호랑이라는 뜻)를 미르코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어느날 미르코는 티가짐을 탈퇴한후 '크로캅'이라는 새 링네임과 함께 자신의 체육관인 Crocop Squad Team을 만들게된다. 티가짐 탈퇴이유는 미르코가 시카틱의 교육방식이 맘에 안들어서라는 설과, 시카틱이 미르코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다는 설이 있지만 아직도 정확히 탈퇴사유를 알수없다. 그러나 현재 시카틱과 크로캅과의 사이를 보면 후자가 맞는 듯 싶다. 또 이 이후 시카틱이 감옥에 갔다가 크로캅 이름을 팔아서 나온 일이 있다고 한다. 전 매니저의 말에 따르면 돈 문제때문에 갈라져서 시카틱이 K-1에 크로캅을 출전시키지 마라고 사주했고 크로캅은 96년~99년 사이 K-1에 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사실 여부는 불확실.)
2000년대 초중반 일본의 종합격투기계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전설과도 같은 선수. 입식 무대에서 넘어와 효도르, 노게이라와 함께 PRIDE 3강 체제를 구축했고 효도르와 타이틀 매치를 갖기도 하는 등 PRIDE K-1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런 시절도 있었다.
인기나 흥행력 측면에서는 여전히 톱파이터 수준이다. PRIDE 시절부터 효도르, 노게이라보다 높은 흥행력으로 거액의 몸값을 받고 있었고 UFC에 이적한 뒤에도 드림과 양다리를 걸치며 협상을 통해 높은 파이트머니를 받아냈다. 고국인 크로아티아를 포함하여 유럽, 아시아에서 인기가 높다. 미국 무대에서는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았으나 UFC에서 오랫동안 활약했기 때문에 레전드로서 충분히 예우받고 있다.
다만 한국에서는 효빠와 캅빠의 고질적인 대립으로 인해 많이 왜곡된 감이 있다. PRIDE의 인기가 한창이던 2004년 ~ 2005년 무렵부터 시작된 감정적인 대립이 2010년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크로캅과 효도르라는 두 명의 전설에 누를 끼치고 있는 상황. 특히 크로캅은 격갤의 전성기였던 2005년 당시 격갤이 효빠들의 집결지였기 때문에 디씨인들의 집중포화를 맞아 이미지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2007년 이후 격갤의 주도권이 캅빠에게 넘어가지만 그때 실추된 이미지는 회복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UFC를 지지하면서 UFC에 안 오는 효도르를 까는 안티들[32]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크로캅이 팬 서비스 차원에서 보여주던 독설이나 여러 단체와의 협상에서 보여주던 강격한 대응, 혹은 떡밥매치들을 비꼬았는데, 이때 만들어진 무수한 짤방들은 지금도 웹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실은 크로캅이 경기 외적으로까지 문제가 되는 선수는 아니다. 거만한 성격은 그의 캐릭터에 불과하며 매번 쏟아내는 독설은 자신을 캐릭터로 상품화시키려는 일환이다.[33] 가장 논란이 되는 떡밥매치 역시 당시 MMA 단체들의 선수풀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강행군으로 컨디션을 상했으면 상했지. 그리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MMA 시장이다보니 그때그때의 금전에 집착하게 되는 것.
무엇보다 크로캅은 그의 커리어나 기량 뿐 아니라 현재의 MMA를 만들어낸 선수 중 한명이라는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다. 그의 파이팅은 90년대 후반 일본의 격투기 붐을 일으켰던 K-1에서부터 PRIDE, UFC[34]를 넘나들며 수많은 팬들을 열광시켰고, 그 많은 시합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MMA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몰락한 후에도 팬들은 여전히 그의 퍼포먼스에 열광했던 것이다.
전성기 시절에 1년에 약 8경기를 뛰면서 영화도 찍고 축구 경기도 뛰는 둥 강행군+겸직으로 인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몸을 많이 상했기 때문에 결국 이는 노쇠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크로캅이 사쿠라바 전을 앞두고 출전을 거부해서 파이트머니를 2배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 매니저의 입을 통해 뒤늦게 밝혀져서 논란이 되고 있다. 크로캅 본인은 페이스북을 통해 파이트머니를 2배로 불렸던 적이 있던건 인정하지만 출전 거부 및 다른 사실과 전 매니저란 사람 자체가 원래 자기 매니저가 아니었다고 밝히면서 부인 중이다.
1990년대 중반 국내 태권도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에 온 적도 있다. 크로캅 본인이 2015년 UFC 한국 대회 참여를 앞두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은 제2의 조국"이라며 자신을 키워준 일본 격투기 무대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밝혔다.
2015년 9월 한국을 방문하여 팬간담회를 가졌다. UFC의 전직 캐스터 성승헌의 사회와 UFC의 한국해설자이자 종합격투기 선수인 김대환의 통역 하에 1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1부, 2부,3부
입장음악은 빌보드 2위까지 올랐던 The Wild Boys. Duran Duran의 노래다. 프라이드에서 잠시 사용했던 음악인 Dodji u Vinkovce[35]도 있다.
또한 캐나다 프로레슬러 랜스 스톰과 닮은꼴로 유명한데 둘이 형제나 사촌 혹은 친척이냐고 하거나 그렇게 알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
6.2.1. 크로아티아의 영웅
크로캅은 특히 조국 크로아티아에서는 완전히 영웅이다.크로캅이 K-1에 진출해서 승승장구한 1996년 당시는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가까스로 독립하고 겨우 1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을 때였다. 전후복구도 덜 끝나서 전쟁의 피해가 아직도 크게 남아 있었을 무렵이다.
이런 상황의 크로아티아에서, 전쟁 영웅인 크로캅은 세계 무대에 나아가서 외국의 격투기 선수들을 거침없이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크로캅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과거 일본 프로레슬링 계의 역도산, 우리나라의 김일 선수 같은 위치인 것이다. 아마 옛날처럼 정보의 흐름이 늦고 역도산이 했듯이 자신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매치업을 스스로 꾸릴 수 있는 사업가였다면 지금보다 더 엄청난 국가적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찰과 무술교관을 역임하고, 특수부대에서 복무했으며 기부도 하는 등 꾸준히 자국을 위해 분골쇄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엄청난 인기로 고국에서 국회의원까지 역임했다. 심지어 대통령이 효도르를 이기면 체육부장관 시켜주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지는 바람에 물건너가긴 했지만.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크로캅은 영웅이고, 그와 계약할 경우 크로아티아에서의 TV 방영권이 보장되기 때문에 흥행성은 여전히 막강하다. 이것이 아직도 많은 단체들이 그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래서 크로아티아출신의 파이터들이 크로캅을 모티브로 출전했으며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크로아티아 선수들은 킥복싱 스타일의 타격가였다.
요즘 제일 잘나가는 크로아티아 선수라면 크로아티아계 미국인인 UFC 헤비급 챔피언 스티페 미오치치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도 크로아티아계인 걸 자부심으로 생각하고 크로캅처럼 크로아티아 국기 문양의 팬츠를 입고 출전한다.
2015년 1월 21일 UFC와 재계약에 성공하는 충격과 공포의 결과를 이끌어냈지만 크로캅을 아끼는 팬들은 이제 노후를 편히 보내도 되지 않느냐며 걱정스런 의견들을 냈다. 그도 그럴 것이 크로캅이 경기란 경기는 간격을 안가리고 모조리 뛰어댔던대다 너무 많은 경기를 뛰고 KO도 많이 당하면서 몸이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뇌진탕 후유증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나오게 했던 동영상이 나오기도 했고 인간의 뇌는 큰 충격을 받으면 회복이 안되기 때문에 크로캅을 아끼는 팬들중에서는 저러다 펀치 드렁크나 파킨슨병을 얻는 게 아닌가 하면서 제발 선수생활 그만했으면 하는 걱정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7. 관련 문서
[1] Rizin FF 공식 프로필 체중은 110kg, UFC 공식 프로필 체중은 105.21kg이다. 가장 최근 경기인 로이 넬슨전에서는 234.5 lbs(약 106kg)로 계체를 통과했다. 경기 영상[2] 당시 랜디저널은 5명의 격투기 스타를 팬 투표로 선정했는데 반달레이 실바, 마우리시오 쇼군, 표도르 예멜리야넨코 등이 선정된 바 있다.[3] 스위스 출신의 K-1 선수로 앤디 훅이 운영하던 팀 앤디 소속이었다.[4] 또한 이 당시 미르코의 링네임은 <미르코 크로캅>이 아닌 <미르코 타이거>였는데 브랑코 시카틱이 운영하는 타이거 짐 소속이었다.[5] 무려 3년의 공백이었는데 그 이유가 당시 브랑코 시카틱이랑 미르코의 불화가 있었고 미르코가 시합에 뛰지 못하게 브랑코가 막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확실한건 미르코랑 브랑코 간의 불화가 있었다는 것.[6] 덕분에 항상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고 2인자, 무관의 제왕 등의 별명이 크로캅을 따라다니게 되었다.[7] 크로캅의 니킥 적중후 잠시 클린치 상황이 있었는데 크로캅의 어깨와 뺨이 후지타의 피로 물들정도로 큰 출혈이 일어났다.[8] 사실 이 경기는 ‘판정승’이라는 부분이 중요하다. 즉 헌트는 저걸 맞고도 끝까지 싸웠다.[9] 실제로 저 레프트 스트레이트로 인해 안와골절을 당했다고 하니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10]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정해놓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원래 효도르도 무차별급 GP에 출전할 예정이었으나 부상으로 개막전에 결장하고 챔피언 자격으로 2회전에 자동진출한다는 구실로 출전을 미뤘지만 부상이 심했는지 결국 아예 결장하고, 챔피언 자동 출전권은 반더레이 실바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우승자 특권을 효도르와의 타이틀 매치로 내걸었다. 이로 보건대 무차별급 GP의 진짜 목적은 어떻게든 효도르 vs 크로캅 2차전을 보는 것이 주 목적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11] 하지만 많은 팬들이 원하던 헤비급 vs 미들급 구도에서 대부분의 미들급 파이터들이 부상이나 기타 이유로 결장하였고, 웰터급 파이터들은 같은 해 열린 웰터급 GP때문에 무차별급 GP에 참여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헤비급 GP가 되어버렸다. 결국 이 대회에 출전한 하위 체급 파이터들의 처참한 성적으로 인해 많은 매니아들로부터 '차라리 헤비급 GP를 열지 그랬냐'(원래는 헤비급 GP를 개최할 예정이었다.)며 까이게 되었다. 다행히 크로캅의 첫 우승 대회 버프 덕에 흑역사 취급받지는 않았지만.[12] 무차별급 GP에서 막장의 끝을 달리는 매치업이었는지라 DC 격갤에선 이 경기의 장면 장면을 캡처하여 수많은 짤방을 양상해냈다. X가캅, 강간캅 등의 별명의 근원이 된 것도 이 경기.[13]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1999년 세계유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 출신으로 그레이시 일족과의 연이은 대결에서 승리하거나 반달레이 실바와 접전을 펼치는 등 PRIDE에서는 사쿠라바에 이어 일본인 에이스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크로캅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없는 모습만 보여줬다. 이 경기에서 한 체급 아래라고는 하지만 크로캅은 유도 선수 출신인 요시다의 메치기 시도를 죄다 방어해내는 괴력을 선보였다.[14] 이 X맨의 정체에 대해 당시 프라이드와 비밀히에 계약한 러시아의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하산 바로예프라니 최홍만과 붙느니 뭐니 하면서 수많은 추측이 나왔지만, 정체는 전혀 뜬금없는 K-1 출신의 가라테카 프란시스코 필리오였으며 그마저도 크로캅의 상대가 아니었다.[15] 아시다시피 MMA에서 팀메이트끼린 웬만해선 안 붙는게 암묵의 룰이며 프라이드에선 이걸 매우 철저하게 지켜줬다. 더군다나 팀 메이트 매치는 워크 가능성이 있기도 하고.[16] 2006년 프라이드 첫 대회였던 프라이드 31 대회 오프닝 영상에서 헌트를 New hero라면서 밀어주는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헌트는 (노린건지는 모르겠지만) 2006년 마지막 대회였던 2006년 남제에서 효도르와 타이틀을 놓고 대결하게 된다.[17] 때문에 이 네 파이터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 붙을 수 밖에 없다.[18] 실제로 매치업 투표 결과에서도 크로캅 vs 요시다의 경기가 1위를 차지했다.[19] 헌트, 실바 모두 이미 요시다와 붙어봤으며 서로간의 대전 경험이 있었고, 또한 둘 다 크로캅과의 대전 경험이 있었다. 위에서 말했듯 요시다는 한 번도 안 붙어본 크로캅 외엔 답이 없었다. 또한 헌트는 실바가 들어온 상황에서 헌트 이상의 흥행카드인 실바의 존재+반쪽짜리 타격가라는 헌트의 가장 큰 단점 때문에 재밌게 짤 수 있는 매치업의 수가 크게 제한된 상황이라 결국 대결 경험이 없는 바넷과의 매치업이 잡힌 것으로 보인다.[20] 이 GP를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얻은 게 있다면 상호간에 체급을 맞추지 않은 경기는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경기라는 인식이 격투 팬들 사이에 아주 확고하게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21] K-1 WG결승토너먼트 경기중 레미본야스키의 킥을 수십대도 넘게 버틴 최홍만이 아무리 크로캅이 강하다지만 레그킥 한방에 주저앉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은 게 2007년 마이티모에게 승리 이후 기량이 수직하락 중이었고 뇌수술 때문에 몸도 제대로 만들 수 없었다.[22] 라이트헤비급이 주무대인 선수다.[23] 참고로 스즈카와 신이치는 훈도시 비스무리한 것을 입고 나왔다.[24] 그나마 강자가 자빗 사메도프, 헤스디 겔게스, 이스마엘 론드 정도였다.[25] 원래 토너먼트 시합 자체가 변수가 워낙 많은지라 운도 어느 정도 중요한 요소이다.[26] 원래 상대는 예멜리아넨코 알렉산더였는데 알렉산더가 노인 폭행 사건으로 단체에서 퇴출당하며 약 3~4일전에 대체 파이터로 투입되었다.[27] 비공식적으로는 1996년 익산에서 열린 아마추어 태권도 대회 참여를 위해 내한한 적이 있다.[28] 원래 VIP석 구매 고객에게만 공개되는 계체량 행사를 무료로 개방했다.[29] Pride 2006 무차별급 그랑프리 우승에 이어 무려 10년만에 무차별급 토너먼트에서 우승하였다.[30] 이건 맷 휴즈 등 힘깨나 쓰던 레슬러들이 보여준 소위 '쌀배달 슬램'과는 비교도 할수 없는 난이도다. 쌀배달 슬램은 뽑는거 자체가 어려운게 문제지 일단 들쳐매는데 성공하면 케이지 끝까지 들고가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 하물며 크로캅은 프로필상 100kg에 많아야 헤비급 최소체중만 맞추는 정도인데 넬슨은 프로필만 119kg이지 경기 당일 리게인 체중은 130kg은 우습게 넘긴다는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31] 프라이드에서 활동하던 당시 그의 회사인 Zvonimir Security(보안관련 업체로 추정) 로고가 붙어있는 티셔츠를 입고 크로캅이 나온적이 있었는데 열혈팬들은 격투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 티셔츠를 사입기도 했다.[32] 물론 이런 성향을 보였던 이들이 모두 캅빠라는 건 아니다. 또한 격갤은 2007년 이후로는 UFC를 지지하고 프라이드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이 되었기에 프라이드의 스타 플레이어들이었던 효도르와 크로캅 둘 다 많이 까이게 되었고 2007년 이후에도 크로캅을 조롱하는 분위기(특히 곤자가 전 패배 이후)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2008년 이후로는 크로캅이 매우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헤비급 중심 전선에서 물러나게 되어(더불어 캅빠들의 찬양도 수그러들면서) 크로캅을 까는 것이 전보다 줄어들은 탓도 있다. 첨언하자면 2006년 이후의 캅빠와 효빠간의 전장은 주로 격갤이 아닌 네이버 카페나 다음 카페였으며 UFC를 지지하는 캅빠나 그 외의 단체를 지지하는 효빠 성향이 많이 나타난것도 이들 카페였다.[33] 이런 성향은 주로 상품성을 주요시 여기는 일본 무대에서 많이 보였는데, 고미 타카노리, 최홍만 등이 그랬다.[34] 실제로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UFC가 인기를 많이 얻은 것도 그가 UFC로 이적한 이후였다.[35] 직역하면 '빈코브치에 돌아와요'. 빈코브치는 미르코가 태어난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