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3:46:37

미키 맨틀

미키맨틀에서 넘어옴
미키 맨틀의 주요 수훈 /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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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미국 스포팅뉴스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 목록으로 약 25년 전 기록이기 때문에 21세기 스타들이 없는 것을 감안하며 보아야 한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베이브 루스 윌리 메이스 타이 콥 월터 존슨 행크 애런
6위 7위 8위 9위 10위
루 게릭 크리스티 매튜슨 테드 윌리엄스 로저스 혼스비 스탠 뮤지얼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조 디마지오 피트 알렉산더 호너스 와그너 사이 영 지미 폭스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자니 벤치 미키 맨틀 조시 깁슨 사첼 페이지 로베르토 클레멘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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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SPN 로고.svg 올타임 MLBR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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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ESPN의 패널들이 선정한 역대 메이저 리거 랭킹. 금지 약물 복용자들이 버젓이 선정됐고 기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와는 다른 부분들이 있으므로 참고용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베이브 루스 윌리 메이스 행크 애런 타이 콥 테드 윌리엄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루 게릭 미키 맨틀 배리 본즈 월터 존슨 스탠 뮤지얼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페드로 마르티네즈 호너스 와그너 켄 그리피 주니어 그렉 매덕스 마이크 트라웃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조 디마지오 로저 클레멘스 마이크 슈미트 프랭크 로빈슨 로저스 혼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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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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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미키 맨틀
Mickey Mantle
포지션외야수
득표수988,168}}}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51 1952 1953 1956 1958 1961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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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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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빌리 마틴.jpg 파일:데릭 지터.jpg 파일:베이브 루스.jpg 파일:루 게릭.jpg 파일:조 디마지오.jpg 파일:조 토레.jpg 파일:미키 맨틀.jpg 파일:빌 디키&요기 베라.jpg
빌리 마틴 데릭 지터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조 디마지오 조 토레 미키 맨틀 빌 디키
파일:빌 디키&요기 베라.jpg 파일:로저 매리스.jpg 파일:필 리주토.jpg 파일:서머 먼슨.jpg 파일:화이티 포드.jpg 파일:호르헤 포사다.jpg 파일:폴 오닐.jpg 파일:돈 매팅리.jpg
요기 베라 로저 매리스 필 리주토 서먼 먼슨 화이티 포드 호르헤 포사다 폴 오닐 돈 매팅리
파일:엘스턴 하워드.jpg 파일:케이시 스탱겔 감독.jpg 파일:마리아노 리베라.jpg 파일:재키 로빈슨.jpg 파일:래지 잭슨.jpg 파일:앤디 패팃.jpg 파일:론 기드리.jpg 파일:버니 윌리엄스.jpg
엘스턴 하워드 케이시 스텡겔 마리아노 리베라 재키 로빈슨 레지 잭슨 앤디 페티트 론 기드리 버니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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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뉴먼트 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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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 허긴스 루 게릭 제이콥 루퍼트 베이브 루스 에드 바로우
조 디마지오 미키 맨틀 조 맥카시 케이시 스텡겔 서먼 먼슨
엘스턴 하워드 로저 매리스 필 리주토 빌리 마틴 레프티 고메즈
화이티 포드 빌 디키 요기 베라 앨리 레이놀즈 돈 매팅리
멜 앨런 밥 셰퍼드 레지 잭슨 론 기드리 레드 러핑
재키 로빈슨 조지 스타인브레너 마리아노 리베라 티노 마르티네스 구스 고시지
폴 오닐 조 토레 버니 윌리엄스 윌리 랜돌프 멜 스토틀마이어
호르헤 포사다 앤디 페티트 데릭 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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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Mantle%20Mickey%20Plaque_NBL.png
미키 맨틀
헌액 연도 1974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8.2% (1회)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56 ~ 1957년 아메리칸 리그 MVP
요기 베라
(뉴욕 양키스)
미키 맨틀
(뉴욕 양키스)
재키 젠슨
(보스턴 레드삭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62년 아메리칸 리그 MVP
로저 매리스
(뉴욕 양키스)
미키 맨틀
(뉴욕 양키스)
엘스턴 하워드
(뉴욕 양키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62년 아메리칸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 글러브
짐 피어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짐 랜디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알 칼라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미키 맨틀
(뉴욕 양키스)

짐 랜디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알 칼라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칼 야스트렘스키
(보스턴 레드삭스)
짐 랜디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알 칼라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파일:MLB 로고.svg 메이저 리그 타자 트리플 크라운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1947년)
미키 맨틀
(뉴욕 양키스, 1956년)
프랭크 로빈슨
(볼티모어 오리올스, 1966년)

보유 기록
월드 시리즈 통산 최다 홈런 18홈런
월드 시리즈 통산 최다 득점 42득점
월드 시리즈 통산 최다 타점 40타점
월드 시리즈 통산 최다 볼넷/삼진 43BB/54K
월드 시리즈 통산 최다 총루타 123루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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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맨틀1.jpg
<colbgcolor=#132448> 뉴욕 양키스 No. 7
미키 찰스 맨틀
Mickey Charles Mantle
출생 1931년 10월 20일
오클라호마 주 스파비노
사망 1995년 8월 13일 (향년 63세)
텍사스 주 댈러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오클라호마 주 스파비노
포지션 중견수1루수[1]
투타 우투양타
신체 180cm / 88kg
프로 입단 1949년 자유계약 (NYY)
소속팀 뉴욕 양키스 (1951~1968)
기록 트리플 크라운 (1956)

1. 개요2. 수상 내역3. 평가4. 생애
4.1. 유년기4.2. 전성기4.3. 잦은 부상4.4. 은퇴 후
5. 대중 문화에서6. 여성 편력7. 명예의 전당 입성
7.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8. 연도별 성적9. 기타10.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양키스가 매번 우승하는 이유가 뭐겠니?"
"미키 맨틀 때문에요?"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中[2]
훗날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되는 강타자 알 칼라인[3]을 한 꼬마팬이 조롱했다.
"아저씨는 미키 맨틀의 반만큼도 못해요."
칼라인이 대답했다.
"얘야, 세상에 미키 맨틀의 반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단다."[4][5]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전 야구선수.

2. 수상 내역

수상 내역
파일:MLB 로고.svg 월드 시리즈 우승 7회 (1951-1953, 1956, 1958, 1961, 1962)
파일:MLB 로고.svg 올스타 20회 (1952-1965, 1967, 1968)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아메리칸 리그 MVP 3회 (1956[만장일치], 1957, 1962)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아메리칸 리그 골드 글러브 (1962)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아메리칸 리그 홈런 1위 4회 (1955, 1956, 1958, 1960)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아메리칸 리그 타점 1위 (1956)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아메리칸 리그 타율 1위 (1956)

3. 평가

스위치 히터뉴욕 양키스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던 1950~60년대의 메이저리그 대표 간판 스타였고, MVP 3회 수상과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무이한 50홈런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했다. 선수생활 내내 여러가지 잔부상에 시달리면서도[7][8] 후술한 기록들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한 대표적인 5툴 플레이어 중 한 명이다.[9]

월드 시리즈에 자주 진출하고 대단한 성적을 내면서 월드 시리즈 통산 홈런ㆍ타점ㆍ득점ㆍBB/Kㆍ총루타 기록을 차지했다.

통산 성적은 18시즌 동안 타율 .298, 2415안타, 536홈런, 출루율 .421, 장타율 .557, OPS .977[A], 순장타율 .259, BB/K 1.01, wRC+ 170[A], 1509타점을 기록했다.

4. 생애

4.1. 유년기

태어날 때 아버지 엘빈 찰스 맨틀(Elvin Charles Mantle)는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 활동한 MLB 명예의 전당 포수 미키 코크런의 이름을 본떠 이 아들을 미키라고 붙였다고 한다.[12] 아버지는 이후 성장한 아들이 야구를 하려고 하자 왼손잡이었던 미키의 할아버지와 함께 좌우로 배팅 볼을 던져주는 지극정성으로 스위치 히팅 타법을 익히게 했다. 훗날 이는 플래툰 시스템을 극도로 신봉했던 케이시 스텡겔 감독을 만나게 되며 큰 이점으로 작용한다. 아버지의 이런 플래툰 교육은 선견지명이었던 셈이다. 또한 풍족한 것은 아니었던 형편상 미키도 나름대로 집안 형편을 위해 광산부터 농부까지 갖가지 잡일을 맡아 했는데, 그때 단련된 무지막지한 손목과 어깨 힘은 훗날 대성할 홈런 타자의 큰 자산이 되었다.

그렇게 고교 시절에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세미프로 팀에서 뛰었으며, 우연히 양키스 스카우트가 펜스 뒤 강에 빠지는 홈런(...)을 지켜보고는 루 게릭의 후계자를 발견했다는 확신을 하였고, 졸업식까지 기다렸다 졸업 당일 사인하는 정성을 다한 끝에 양키스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4.2. 전성기

파일:external/www.vintagecardprices.com/164237.jpg

맨틀은 마이너 시절 유격수로 뛰었지만, 필 리주토에게 막힌 데다 유격수로서 딱히 수비가 좋은 편도 아니어서 중견수로 보직을 변경했다. 하지만, 양키스에는 이미 중견수 자리를 차지한 괴수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조 디마지오였다. 그래도 맨틀은 강견을 앞세워 우익수로 뛰었지만, 디마지오는 맨틀이 자신을 향후 밀어낼 것임을 직감하고 일부러 쌀쌀맞게 대했다고 한다.

1952년, 디마지오의 예상대로 중견수로 자리잡은 맨틀은 3할 타율을 찍으며 스무 살짜리 치고는 매우 뛰어난 시즌을 보냈지만, 리그 최다 삼진의 불명예 또한 얻으며 양키스 팬들에게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 절치부심한 맨틀은 1955년부터 본색을 발휘하기 시작한다.[13] 23세 시즌인 1955년부터, 1962년까지 그는 비율 스탯 .315 .445 .616에 320홈런을 날렸다.

미키 맨틀은 역대 야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선수 중 하나로 반드시 꼽히며 순수 타격만 보았을 때에는 어쩌면 윌리 메이스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임팩트를 자랑하는 선수였다. 타격 면에서 뛰어난 중견수를 논할 때 전임자 조 디마지오는 물론 윌리 메이스, 마이크 트라웃과 함께 늘 우선적으로 언급된다. 또한 1950년대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를 꼽을 때 절대로 세 손가락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윌리 메이스와 함께 보통 최고봉으로 여겨진다.

맨틀은 부상이 본격화되기 전 전성기인 1952-1964년 13시즌동안 무시무시한 임팩트를 보여주며 상당한 누적을 쌓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 기간동안의 연평균 fWAR는 7.58로, 이전 세대 임팩트형 선수의 대명사인 조 디마지오나 재키 로빈슨의 연평균 6보다 높다.[14] 거기다 맨틀의 재림으로 평가받는 트라웃의 13년 WAR 85보다도 10 넘게 많이 쌓았다.[15] 동세대 임팩트형 투수의 대명사인 코팩스도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에 들어선 뒤 10년간 WAR 55 정도를 쌓았다는 것을 감안하면[16] 맨틀이 얼마나 강력한 전성기를 보냈는 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상으로 전성기가 빨리 꺾였지만, 일반적으로 윌리 메이스, 타이 콥, 트리스 스피커와 함께 중견수 올타임 탑5에 빠지지 않는다.[17]

가장 경악스러운 성적은 1956-1957년으로, 이 기간동안의 맨틀은 논외인 베이브 루스나 약쟁이 본즈를 제외하면 라이브볼 최고의 임팩트를 보여주었다. 각각 기록한 11.5/11.4fWAR과 MVP 3회 수상 (1956, 1957, 1962). 1956년에 맨틀은 MLB 최후의 통합 트리플 크라운(양대 리그에서 타율, 홈런, 타점 1위)을 달성했으며, (0.353, 52홈런, 130타점), 1957년에는 홈런 수가 34개로 줄었지만 0.512라는 어마어마한 출루율[18]을 기록하며 1956년과 최소 동등하거나 어쩌면 능가하는 못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었다.[19][20]

MVP 3회 수상은 도핑의 힘을 빌린 본즈에 이은 메이저리그 최다 수상 타이 기록으로, 이보다 많이 수상한 선수는 약의 힘으로 7회를 수상한 배리 본즈, 맨틀 외 통산 3회 MVP 수상자들은 지미 폭스, 조 디마지오, 알렉스 로드리게스, 스탠 뮤지얼, 로이 캄파넬라, 요기 베라, 마이크 슈미트, 알버트 푸홀스, 마이크 트라웃뿐이다. 단일 리그 타격 트리플 크라운도 맨틀 이후 1967년 칼 야스트렘스키, 2012년 미겔 카브레라 단 둘뿐이다. 게다가 이 시기 무시무시한 홈런 세례를 퍼부으며 과거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이 이끌었던 영광스런 시대를 다시 되돌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양키스 타선은 한동안 맨틀 혼자만 이끌어야 했고, 그가 받은 무수한 견제는 역대 8위에 랭크된 볼넷 수로 남아 있다. 역대 1700볼넷 선수 중 20시즌을 뛰지 않은 선수는 맨틀이 유일하다. 2012년에 짐 토미가 최종 1747개를 기록, 1733개를 기록한 맨틀을 제쳤지만, 토미는 이 기록을 달성하기까지 21시즌이 걸렸고 올타임 2위에 해당하는 많은 삼진을 대가로 지불해야 했다.

동시대 뉴욕의 3대 중견수라 함은 뉴욕 자이언츠윌리 메이스, 브루클린 다저스듀크 스나이더와 함께 미키 맨틀을 일컫는 것이었고, 베이브 루스와 조 디마지오의 후계자라는 프리미엄까지 겹쳐진 맨틀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부상으로 도루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5툴 플레이어라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심지어 좌타석에서 번트를 대고 1루로 냅다 뛰면서 상대를 농락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맨틀에 대해서도 'Mickey could do everything'을 말해야 할 듯하다.

맨틀의 홈런의 가장 큰 특징은 엄청난 비거리인데, 일반적인 타자들에 비해 비거리가 큰 편이었다. 즉 흔히 말하는 목런, 라팍런을 잘 치지 않는 선수. 그의 홈런은 요새 야구장들이 외야 거리 360피트(110m)만 되어도 펜스 멀다고 징징대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450피트(137m), 500피트(152m)급 홈런이 대부분이었다. 양키스 선수가 양키 스타디움에서 날린 유일한 장외 홈런도 그의 기록이며, 다른 팀 선수까지 포함해도 니그로 리거 조시 깁슨의 2개를 제외하면 유일한 기록이다. 그의 홈런 기록에 대해서는 기하학적인 계산까지 동원되며 야빠 수학자들의 단골 떡밥이 되었다. 비공식적이지만 기하학적 계산을 동원하면 650피트(198m)급 홈런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고 한다.

파일:external/www.1960sbaseball.com/mickey-mantle--roger-maris.jpg

또한 1961년에는 그 유명한 M&M포가 결성, 베이브 루스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에 나란히 도전하는 명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결과는 잘 알려진 로저 매리스의 61홈런으로 끝났지만, 뉴욕 팬들은 양키스 프랜차이즈 스타인 맨틀이 54홈런에서 멈춘 것을 전설적인 밤비노에 대한 예우라 여겼다. 실제로는 돌팔이 의사가 스테로이드 주사 바늘로 오염된 것을 쓰는 바람에 엉덩이에 종기가 나서였다고(당시 스테로이드는 메이저리그가 금지한 약물이 아니었다).#[21][22]

4.3. 잦은 부상

이렇듯 맨틀은 역대 최고의 전성기를 지닌 선수였으나 결국 33세 시즌부터 그를 끌어내리게 한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부상이었다. 맨틀은 메이저리그 역대급 임팩트로 유명한데, 생각보다 통산 성적이 낮은 원인은 이 부상이 큰 역할을 했다.[23]

우선 고교 시절 풋볼 경기 도중 당한 무릎 골수염 부상으로부터 맨틀의 파란만장한 부상 수난사는 시작되었다. 당시 심하게는 다리 절단까지 염려될 정도로 부상은 심각했고,[24] 이후 야구를 그만둘 때까지 이 부상은 끝끝내 맨틀을 괴롭혔다.

또한 선수 생활 내내 수 차례나 대형 부상으로 병원 입원을 반복하는 등 그의 선수 생활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에게 야구 외 몇 안되는 낙은 화이티 포드와의 술자리였다. 거기다 맨틀의 집안 내에는 호지킨 림프종으로 인하여 요절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맨틀 본인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상술한 전성기 시절에 매우 적극적인 허슬플레이로 일관했으며 이는 결국 잦은 부상이라는 스노우볼로 굴러와 빠른 하락세에 큰 빌미를 제공하였다. 정작 맨틀은 호지킨 림프종으로 안 죽었고 함께 M&M 포를 결성한 로저 매리스가 호지킨 림프종으로 일찍 죽었다.

사실 알려진 악명에 비해 미키 맨틀은 내구성이 심각하게 나쁜 선수는 아니었다는 여론도 있다. 본 문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유리몸'이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리몸이라고 알려져 있는 선수들과는 비교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출전기록이 넘사벽이다. 당장 현대야구판 미키 맨틀인 마이크 트라웃은 유리몸화된 이후로는 맨틀보다 경기에 못 나오고 있고, 이건 원래부터 유리몸이었던 애런 저지도 마찬가지이다. 개요에서도 서술되어있듯이 18년의 커리어 중 3시즌을 제외하고는 전부 120경기 이상을 출전했다. 1962년 이전까지의 기록은 154경기 체제여서 사실상 매시즌 전경기 출전에 가까웠고, 특히 마지막 2년은 둘 다 정규시즌 전체의 90%에 육박하는 경기를 뛰었다. 즉, 흔히 각인된 유리몸의 이미지 치고는 출장 경기가 지나치게 많다.

다만, 유리몸이라는 표현 자체가 출장 경기수가 적은 것을 이르는 말이 아니고 부상이 많은 선수를 이르는 말이며, 맨틀이 실제로 30대 초중반 이후 부상을 달고 뛰며 성적이 크게 하락하였다는 점을 보면 유리몸이라고 봐도 크게 무리가 없다는 의견 역시 있다. 당장 2007년 이종범을 보면 아무리 뛰어난 선수여도 아픈 상태로 무리하게 뛰면 성적이 박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미키 맨틀이 뛰던 시기는 1950-60년대로 선수 보호와 스포츠 과학의 개념이 없어서 부상 선수고 뭐고 그냥 굴리던 시기라 몸이 아파도 그냥 근성으로 참고 뛴 것이다. 당장 비슷한 시기 코팩스를 보면 그냥 팔꿈치가 박살났는데도 밥 먹듯이 완투하다가 1965년에 결국 팔꿈치 인대가 터져버리며[25] 선수 생활을 30살에 접어버렸다. 부상이 많았다고 알려졌는데도 출장 경기가 많이 나온 것은 그냥 본인이 부상을 참고 경기에 나온 것이고, 이로 인하여 37세의 다른 명전급 선수들에 비해 다소 빠른 나이에 은퇴하기는 했으나 몸이 따르는 한 최대한 많은 경기에 출장하며 결국 500홈런 등의 중요한 마일스톤을 쌓는데 성공했다.

원체 뛰어난 선수였고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중견수이나 젊은 시절부터 이어진 허슬플레이로 인해 전성기가 빨리 꺾이고 유리몸이 되었다는 점에서 맨틀 뒤의 중견수 올타임 4-5위에 위치한 평가를 받는 마이크 트라웃와 유사하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트라웃 역시 5툴 플레이어이고, 허슬플레이로 유명하다는 점에서 초창기 시절 미키 맨틀의 재림으로 불렸으나 유리몸화로 인한 빠른 하락세도 맨틀의 길을 그대로 걷고 있다.[26]

다만 운동 선수치고 잔부상을 달고 살지 않는 케이스가 거의 없는 걸 감안했을때[27] 무리를 해서라도 경기를 뛸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아예 출전 자체에 제약이 걸린 유리몸들과는[28] 차원을 달리한다. 애초에 기량이 뛰어난 선수였으니 부상을 달고도 평균 이상은 해서 부상으로 일찍 기량이 꺾였는데도 계속 나와서 기어이 누적을 많이 쌓는데 성공했다.

4.4. 은퇴 후

1968년을 마치고 맨틀은 비교적 젊은 37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고, 은퇴 후에는 사업 실패, 술로 인해 가산을 탕진했고 건강까지 악화되어 이식을 받기도 했으며, 가족들마저 알코올 의존증으로 이끌었으며,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와중에 맨틀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생존하였으며, 메이저리그의 천재 강타자는 1995년 63세를 일기로 댈러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이가 들고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기 관리에 신경쓸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29]

그 외 자세한 이야기들은 미키 맨틀, 레전드 스토리 참조 바람.

5. 대중 문화에서

영화 머니볼의 첫머리에 그가 남긴 명언이 나온다.[30]
It's unbelievable how much you don't know about the game you've been playing all your life.
자신이 평생 해온 경기에 대해 우린 놀랄 만큼 무지하다.

파일:external/thedroidyourelookingfor.files.wordpress.com/mantle_jane_61.jpg
파일:external/espn.go.com/h_61_i.jpg

로저 매리스의 1961년 홈런 기록을 다룬 2001년작 영화 61*에도 등장한다. 토머스 제인이 맨틀 역으로 출연했다. 매리스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지만, 양키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홈팬들과 구단 관계자, 기자들의 편애를 받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그들의 야유에 시달리는 매리스의 모습이 교차된다. 또한 "우리 집안은 다들 오래 못살았다"면서 몸을 돌보지 않는 모습도 묘사되었다.

명 기타리스트인 스티비 레이 본의 lenny라는 모델에 싸인을 해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1952년에 나온 콜렉팅 카드인 1952 Topps Mantle #311은 많은 카드 수집가들의 기준과도 같으며, 2021년 초에는 더 희귀한 호너스 와그너 카드를 제치고 역사상 가장 높은 경매가를 기록하였다. 아무리 보관 상태가 나쁜 카드라도 만 달러가 넘는 인기 높은 카드이다.

6. 여성 편력

메이저리그 역사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수많은 스타들이 존재했지만, 그 누구도 미키 맨틀의 아성을 넘볼수는 없다. 심지어 양키스의 다른 여색이 강한 레전드인 데릭 지터[31]베이브 루스도 맨틀에 한 수 접어주는 수준. 몇가지 일화를 설명하자면:
  • 은퇴 후 4년이 지난 1972년에는 양키스가 양키 스타디움을 리모델링하고 50주년 행사를 하는 차에 맨틀을 포함한 레전드들에게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최고로 좋은 기억'을 물어보는 일이 있었는데, 맨틀이 여기서 불펜 옆에서 펠라치오를 받은 일이라고 답변하며 현재까지 회자되고 있다. #
  • 1960년대 할리우드의 섹스 아이콘 앤지 디킨슨 (Angie Dickinson)에게 만취한 상태로 커닐링구스를 해주다 구토한 전적이 있다. #
  • 은퇴 후인 1970년, 그를 인터뷰하던 여성 기자 Diane K. Shah 에게 뜬금없이 Wanna Fuck? 이라는 카드를 나눠주고 말았다. 심지어 이런 카드를 나눠주는 것은 해당 기자가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
  • 같은 인터뷰에서, 비시즌에 즐기는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때, Hunt Pussy라고 답했다.
  • 1969년 양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본인 은퇴식에 아주 당당히 내연녀를 데려왔다. 심지어는 아내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 [32]
  • 이 외에 틈만 나면 관심있는 여성들을 방으로 불러오는 추태를 부렸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지? 소속팀 뉴욕 양키스도 이 정도의 낯뜨거운 맨틀의 행위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당대 최고의 거물급 스타였던 그를 구단에서조차 함부로 제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7. 명예의 전당 입성

맨틀은 1974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88.2%의 지지율로 절친한 친구 화이티 포드와 함께 헌액됨과 동시에 뉴욕 양키스의 모뉴먼트 파크에 그의 7번이 내걸렸다.

7.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그레이잉크HOF 모니터HOF 스탠다드
미키 맨틀 62 272 300 65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Center Field (4th)
career WAR7yr-peak WARJAWS
미키 맨틀 109.7 64.7 87.2
중견수 HOF 입성자 평균 71.2 44.6 57.9

8. 연도별 성적

파일:MLB 로고.svg 미키 맨틀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wRC+ fWAR bWAR
1951 NYY 96 386 91 11 5 13 61 65 8 43 74 .267 .349 .443 .792 116 1.5 1.5
1952 142 626 171 37 7 23 94 87 4 75 111 .311 .394 .530 .924 158 6.6 6.4
1953 127 540 136 24 3 21 105 92 8 79 90 .295 .398 .497 .895 146 4.9 5.8
1954 146 649 163 17 12 27 129 102 5 102 107 .300 .408 .525 .933 160 6.7 6.9
1955 147 638 158 25 11 37 121 99 8 113 97 .306 .431 .611 1.042 179 9.8 9.5
1956 150 652 188 22 5 52 132 130 10 112 99 .353 .464 .705 1.169 202 11.5 11.2
1957 144 623 173 28 6 34 121 94 16 146 75 .365 .512 .665 1.177 217 11.4 11.3
1958 150 654 158 21 1 42 127 97 18 129 120 .303 .443 .592 1.035 187 8.8 8.7
1959 144 640 154 23 4 31 104 75 21 93 126 .285 .390 .514 .904 152 6.6 6.6
1960 153 643 145 17 6 40 119 94 14 111 125 .275 .399 .558 .957 159 6.9 6.4
1961 153 646 163 16 6 54 131 128 12 126 112 .317 .448 .687 1.135 196 10.3 10.5
1962 123 502 121 15 1 30 96 89 9 122 78 .321 .486 .605 1.091 192 6.0 6.0
1963 65 213 54 8 0 15 40 35 2 40 32 .314 .441 .622 1.063 192 3.3 2.9
1964 143 567 141 25 2 35 92 111 6 99 102 .303 .423 .591 1.015 176 5.5 4.8
1965 122 435 92 12 1 19 44 46 4 73 76 .255 .379 .452 .831 139 2.4 1.8
1966 108 393 96 12 1 23 40 56 1 57 76 .288 .389 .538 .927 166 3.4 3.6
1967 144 553 108 17 0 22 63 55 1 107 113 .245 .391 .434 .825 149 3.7 3.9
1968 144 547 103 14 1 18 57 54 6 106 97 .237 .385 .398 .782 145 2.8 2.7
MLB 통산
(18시즌)
2401 9907 2415 344 72 536 1676 1509 153 1733 1710 .298 .421 .557 .978 170 112.3 110.2

9. 기타

  • 미키 맨틀은 좌타석에 설때는 907g의 배트를 썼고 우타석에 설때는 거의 1kg에 달하는 992g의 무거운 배트를 썼다.

10. 관련 문서



[1] 18년의 선수 생활 중 첫 시즌은 우익수로 뛰고 14년간 중견수로 출장하고 마지막 2년만 1루수로서 각각 131경기씩 출장했다. 1960년대 들어서는 좌익수와 우익수로도 조금 나왔다. 특히 1965년엔 좌익수로만 108경기 나왔다. 또 투수/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으로 출장해봤다.[2] 영화 초반에 디카프리오가 분한 주인공 프랭크 주니어의 대사. 질문을 던진 아버지 프랭크의 답은 "유니폼 때문이야. 핀 스트라이프 무늬가 상대 선수들의 기를 꺾어 버리거든." 인간관계에 있어 복장의 중요성을 설명해준 셈. 영화 후반에는 프랭크가 자신을 잡으러 온 FBI 수사요원 칼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아버지와 달리 미키 맨틀이 있어 양키스가 이긴다는 (즉 복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복장을 입은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뜻) 반대취지의 답변을 한다.[3] 맨틀과 동시대에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서만 22년을 뛰며 통산 399홈런 3,007안타를 기록한 '미스터 타이거'. 올스타에 18회나 선정됐고, 골드글러브를 10회나 수상했다.[4] 정작 이 말을 한 알 칼라인의 WAR은 90정도로, 미키 맨틀의 WAR 110과 비교하면 낮긴 하지만 절반은 충분히 넘고도 남는다. 물론 미키 맨틀의 반만큼, 즉 WAR 55를 넘게 기록한 선수들은 꽤 많기는 하다. 물론 그정도만 되어도 명예의 전당을 들어갈 가능성이 높긴 하다.[5] 다만 이 시대, 당대 사람들이 미키 맨틀을 가장 잘하는 야구선수로 여겼다 보긴 어렵다. 왜냐하면 맨틀의 라이벌 중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윌리 메이스가 있었기 때문. 그렇지만 단순히 야구 전체가 아닌 타격이라는 면에 한정하여 보자면 진짜 당대에 맨틀을 넘는 선수는 양키즈의 선배 스타 조 디마지오의 라이벌이었던 테드 윌리엄스를 제외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했고, 중견수로 한정하면 이견의 여지가 없는 원탑이다.[만장일치] 만장일치 수상.[7] 맨틀은 베이브 루스의 기록들을 갈아치울 재능이 있던 선수라고 평가를 늘 받아왔던 선수였고 실제로도 그럴 기세였으나 그 놈의 부상으로 여러 번 골골대는 바람에 고작 500홈런(…)을 넘긴 것에 그쳤다.[8] 하지만 최악의 유리몸이라고 하기엔 18년 동안의 선수생활 중 3시즌을 제외하고는 전부 120경기 이상을 소화하는 투철한 근성을 보여줬다. 그 무수한 잔부상들의 고통을 20년 가까이 버틸 정도로 정신력이 대단한 선수였던 셈이다. 다만 이러한 무리는 그가 재능을 온전히 발현하지 못하게 하는 주 요인이 되었다.[9] 물론 상대적으로 유리몸이었어서 라이벌 윌리 메이스보다 WAR이나 누적 성적이 다소 부족하나 공격 지표에서는 우위를 점한다. (통산 wRC+ 170 vs 154, OPS 0.977 vs 0.940, OPS+ 172 vs 155 ) 이렇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출루율 차이(0.421 vs 0.384)가 결정적이다. 메이스에 비해 맨틀이 2,500타석이나 덜 뛴 것이 맨틀의 WAR이 더 낮은 결정적인 이유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bwar를 기준으로 봤을 때 1967년까지 메이스(2,298경기/9,814타석)의 bwar는 133.5로 더 많은 경기/타석(2,401타석/9,910타석)을 소화한 멘틀의 통산 bwar(110.2)보다 23.3이나 높은 걸 봐서 타석 수 차이라고 보긴 어렵다.[A] 중견수 역대 1위[A] [12] 그러나 실제로는 코크레인의 본명은 고든 스탠리 코크레인이었으며 미키는 애칭이었다.[13] 그렇다고 부족했던 건 절대 아니다. 그때까지의 커리어 로우 OPS가 21세 시즌 .895였다. 양키스라서 까인거지, 중견수임을 감안하면 절대로 욕을 먹을 만한 선수가 아니며 신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역대급 괴물에 가깝다.[14] 물론 저 두 선수는 실력에 비해 스타성이나 상징성으로 과대평가되었다는 평가가 있으나, 애초에 저들은 짧은 선수생활동안 엄청난 임팩트를 기록해서 고평가받는 선수들인데 맨틀은 전성기도 아주 짧지는 않으면서 연평균 fWAR이 저들보다 높다. 애초에 맨틀의 전성기 기간 13시즌이 디마지오 커리어 전체이며 메이저에 늦게 데뷔한 로빈슨은 1형 당뇨병까지 겹치며 커리어가 빨리 하락해 통산 10시즌밖에 못 뛰었다.[15] 단 트라웃은 맨틀에 비해서도 비교적 일찍 전성기가 꺾인 케이스이다. 트라웃의 전성기는 보통 2011-2019년까지로 여겨지며 9시즌 동안의 퍼포먼스는 맨틀과 대등하다.[16] 다만 코팩스는 이 중 거의 35 가까이를 선수생활 마지막 4년에 쌓았다. 즉 전성기 4년만 떼놓으면 코팩스가 이들 중 가장 압도적이다.[17] 윌리 메이스와 타이 콥이 가장 티어가 높은 올타임급이고, 트리스 스피커는 그보다 한 티어 낮은 정도이다. 미키 맨틀은 스피커보다도 한 티어 정도 낮은 평가를 받으나, 스피커가 대중들에게 저평가받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질 인지도는 역대 세 손가락이라고 봐도 큰 문제는 없다. 전임자 디마지오는 타격의 임팩트는 맨틀 못지않게 매우 좋으나 수비와 주루 스탯이 상대적으로 낮고 결정적으로 선수생활이 짧아서 역대 중견수 5위에는 못 들어간다. 최근에는 미키 맨틀의 재림으로 불리는 마이크 트라웃도 이 논쟁에 합류해서 보통 중견수 올타임 5위를 꼽을 때 이 다섯이 묶여서 언급된 적이 있었으나 트라웃이 노쇠화 이후로 내구력이 아주 심하게 약해지는 바람에 이들과 묶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18]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가하면, 20세기 이후로 5할 이상의 출루율을 기록한 선수는 맨틀을 포함에 3명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둘은 알다시피 뉴욕 양키스보스턴 레드삭스 각 팀의 역사상 최고의 타자들이다. 21세기까지 포함하면 배리 본즈*도 있지만 그는 약쟁이임으로 사실상 20세기 이후에는 이 셋뿐이다. 또한 좌타자 제외 역대 단일 시즌 출루율 1위이다.[19] 이 덕분에 그의 1957년 OPS(1.177)와 wRC+(217)가 오히려 1956년 OPS(1.169)와 wRC+(202)보다 높다! 다만 트리플 크라운의 임팩트 덕에 일반적으로 미키 맨틀의 커리어 하이 시즌은 1956년으로 여겨진다. 물론 1957 시즌이 굉장히 저평가 받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20] 실제로 맨틀이 1956년 보여준 압도적인 활약은 1909, 1911년의 타이 콥, 1920, 1921, 1923년의 베이브 루스, 1924, 1925년의 로저스 혼스비, 1927년의 루 게릭, 1941년의 테드 윌리엄스, 1967년의 칼 야스트렘스키, 2018년의 무키 베츠, 2022년, 2024년의 애런 저지와 함께 비약물 타자가 리그 전체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쳤던 단일 시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물론 1957년급의 성적도 압도적으로 리그를 지배한 성적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전혀 없다.[21] 이 기사에서는 스테로이드가 아닌 암페타민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2013년 SI의 기사는 스테로이드와 암페타민을 동시에 맞았다고 기술하고 있다.[22] 1938년 연방식품의약품화장품법에서는 처방약은 의사 처방 없이는 판매할 수 없도록 규정했고,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처방약에 포함되었다. 의사가 아닌 돌팔이에게 스테로이드를 맞았으면 불법으로 스테로이드를 맞은 것이다. 여기에 대한 비난은 가능해 보인다. 물론 당시에도 금지 규정만 있었지 처벌 규정은 없었고, 1988년에야 생기게 된다. 처방 없이 처방약을 사용하면 연방법 위반이다. 리그 규정 이전의 문제이다.[23] 물론 맨틀의 누적도 낮은 편은 아니고 전임자 디마지오나 먼 미래의 후배인 트라웃에 비하면 롱런에 성공했으며 누적도 월등히 높은 편이나 맨틀이 루스, 메이스에 비견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짧은 전성기는 다소 아쉽다.[24] 이 부상으로 한국 전쟁 징집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25] 월드시리즈 등판 이후 팔꿈치에 시퍼렇게 피멍이 들었다고 한다. 이는 팔꿈치 인대 파열로, 현대였으면 토미존 수술을 받으면 됐겠지만 이때는 토미존 수술이 생기기 전이어서 그대로 은퇴했다. 인대가 완전히 끊어진 이상 수술을 했어도 재활 기간을 오래 잡았어야 할 것으로 보이며 만약 당시 수술 없이 계속 뛰었더라도 비정상적인 구속/제구 하락으로 인하여 제 성적을 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26] 이로 인하여 트라웃은 누적도 맨틀보다 적게 쌓을 가능성이 높으나 어마어마한 전성기로 인하여 명전이 사실상 확정되었다.[27] 선수 항목에 서술되어있듯이 일반인들은 겪을 일 없는 크고 작은 부상을 다 참고 뛴다. 십자인대 파열같은 부상을 당해도 바로 경기장으로 복귀하는 강행군인데, 아무리 튼튼해도 결국 인간의 몸이기 때문에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해도 평생 후유증이 남는다. 전현직 선수들이 자기 입으로는 굳이 언급을 안하기 때문에 이런 건 대개 은퇴 후 아내나 친구들의 인터뷰로 알려진다.[28] 근육 파열이나 인대 부상 등으로 아예 뛸 수가 없어서 시즌아웃 되는 사례들.[29] 정작 맨틀의 가족들이 걸린 질병인 호지킨 림프종은 되려 팀 동료이자 M&M포로 유명한 로저 매리스가 걸렸고, 매리스는 51세였던 1985년에 사망했다. 참고로 매리스의 장남 로저 매리스 주니어(1959~)는 그 병에 걸리지 않았으며 60대 중반인 현재까지도 멀쩡하게 살아 있다.[30] 원작인 마이클 루이스의 머니볼에는 나오지 않는다.[31] 전여친들의 이름값들은 맨틀을 능가할지도 모르나, 지터는 한번에 한명씩 사귀었다.[32] 나중에 밝혀진 거였지만, 아내랑은 사랑 때문에 결혼한 게 아니라 불치병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서 결혼했다고 한다. 결국 아내도 못 참았는지 1980년부터는 별거했고 맨틀이 죽을 때 화해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