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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슈마허/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미하엘 슈마허
1. 개요2. 유소년 시절3. 조던 그랑프리4. 베네통 포뮬러
4.1. 1991 시즌4.2. 1992 시즌4.3. 1993 시즌4.4. 1994 시즌4.5. 1995 시즌
5. 스쿠데리아 페라리
5.1. 1996 시즌5.2. 1997 시즌5.3. 1998 시즌5.4. 1999 시즌5.5. 2000 시즌5.6. 2001 시즌5.7. 2002 시즌5.8. 2003 시즌5.9. 2004 시즌5.10. 2005 시즌5.11. 2006 시즌
6. 1차 은퇴 이후7. 은퇴 번복, 메르세데스 GP로 F1 복귀
7.1. 2010 시즌7.2. 2011 시즌7.3. 2012 시즌
8. 기록
8.1. 슈마허의 서킷 별 우승 목록

1. 개요

미하엘 슈마허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유소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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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애들이 쓰다가 쓰레기통에 버린 타이어들을 다시 모아서 그걸 가지고 카트를 탔다. 그 애들은 이탈리아에서 타이어를 사다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보다 빨랐고, 그 애들은 내 모습을 보면서 어리둥절했다."

무려 4세 때 아버지가 만들어준 카트[1]에 탄 것을 시작으로 일찌감치 레이싱의 재능에 눈을 뜨고는 1983년 독일의 카트 경기 라이선스[2]를 획득하고는 1984년 독일 내 카트 챔피언쉽에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1987년에는 유럽 카트 챔피언이 되었고 1988년에는 포뮬러 포드와 포뮬러 쾨니히[3]에 진출해 2위와 챔피언을 하나씩, 1989년에는 독일 포뮬러 3로 진출해 3위, 이듬해인 1990년에 우승. 우승을 못한 해의 경우도 실은 이 레이스 저 레이스 문어발식으로 출전해 출전한 횟수가 적은 탓에 종합 점수가 부족하여 따내지 못한 것이 대다수일 정도로 전설의 재능은 이때 부터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3. 조던 그랑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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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ichael Schumacher 1991 Jordan.jpg
유소년 시절부터 엄청난 재능을 선보이며 F1 데뷔를 꿈꾸던 슈마허였지만 당시 어떤 팀에도 남아있는 시트가 없었던 탓에 F1에 바로 데뷔하지 못했고[4] 그를 눈여겨 보고 있던 WEC의 자우버-메르세데스가 가장 최상위 클래스인 그룹 C 스포츠카 메르세데스-벤츠 C11의 드라이버로 슈마허를 발탁하면서 1991년부터 슈마허는 본격적인 프로 레이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내구 레이스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이름을 높이던 와중 당시 조던의 드라이버였던 베르트랑 가쇼[5]가 1990년 12월 런던에서 한 택시와 사고가 났을 때, 그 택시기사에게 최루탄를 뿌린 사건[6]의 재판 결과로 1991년 시즌 중 18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이탈함으로써 갑작스럽게 조던의 시트가 공석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급하게 드라이버를 구해야 했던 조던은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던 슈마허를 자우버-메르세데스에게 위약금 15만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데려와 슈마허를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F1에 데뷔시키게 된다. 슈마허 입장에서는 스파프랑코샹 서킷을 어떤 레이스에서도 실제로 달려본 경험이 없었지만 자신의 접이식 자전거로 트랙을 주행하며 레이아웃을 익혔고, 당시 중위권을 전전하던 조던 차량으로 퀄리파잉에서 7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는 조던의 1991 시즌 최고의 퀄리파잉 성적이였으며, 그의 팀 메이트인 베테랑 안드레아 데 체사리스조차 해내지 못했던 기록이기에 패독 관계자들은 이 신예 독일 드라이버에 엄청난 인상을 받게 되었고 독일 언론들은 "스테판 벨로프 이후 최고의 재능"이라며 극찬했다. 레이스에서는 스타트 이후 얼마 못가 클러치 고장으로 인해 첫 랩에 리타이어하면서 슈마허의 데뷔전은 다소 심심한 마무리로 끝났다.

4. 베네통 포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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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ichael Schumacher 1995 Benetton.jpg

4.1. 1991 시즌

1991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인상적인 데뷔전을 치르면서 슈마허는 엄청난 유망주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던은 슈마허와의 계약에 대해 고민하며 계약을 완벽하게 마무리하지 않았는데 이를 간파한 베네통이 슈마허에게 접근하여 낼름 잔여 시즌 계약을 체결하면서 베네통에서 나머지 1991시즌을 보내게 된다. 졸지에 드라이버를 뺏기게 된 조던은 이에 대해 가처분 신청을 했지만 상술했듯 슈마허와의 계약 절차를 질질 끈 탓에 최종 계약이 없던 터라 법적으로 슈마허가 베네통으로 이적하는 것이 문제 없음으로 결론이 지어지면서 기각되었다. 이후 슈마허는 조던과 그다지 다를 것 없는 당시 베네통 차량으로도 남은 1991 시즌 6개의 레이스 중 4개의 레이스에서 포인트를 획득했으며, 그 중 최고의 성적은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의 5위였다. 이는 그의 팀 메이트이자 3회 월드 챔피언인 넬슨 피케보다 앞선 순위였다.

4.2. 1992 시즌

로리 번의 주도하에 철저하게 만들어진 베네통의 1992 시즌 차량은 전년도에 비해 확실한 성능 향상을 만들어 냈고 포디움권을 노릴 수 있는 레이스카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렇게 슈마허는 좋은 차량을 손에 넣음으로써 돌풍을 불러일으킬...뻔 했지만 당시 차량의 지상고를 유동적으로 제어하는 액티브 서스펜션을 비롯한 각종 전자장비로 무장한 윌리엄스 FW14B[7]를 모는 나이젤 만셀과 리카르도 파트레제가 시즌을 지배하면서 다소 묻히게 된다. V12 터보시대의 강점기를 이끌었던 맥라렌과 그 아일톤 세나조차 이때의 FW14B를 따라가기 조차 벅찰 지경인 시즌이었다. 그럼에도 슈마허는 단 두 경기만인 멕시코 그랑프리에서 3위로 완주하며 개인 통산 처음으로 포디움에 올랐으며, 지난해 데뷔전을 치렀던 벨기에 그랑프리에서는 비가 오던 상황에서 완벽한 타이밍에 드라이 타이어로 교체하는 강수를 성공시키며 본인의 첫 레이스 우승을 거두기도 하는 등 맥라렌과 윌리엄스 사이에서 고군분투했다.

그렇게 1992 시즌 드라이버 챔피언십은 나이젤 만셀이 우승을 하고 역시 압도적인 성능의 FW14B를 몰았던 파트레제가 2위를 차지하면서 그 뒤인 3위를 차지했지만, 파트레제와 단 3점 차이밖에 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3회 월드 챔피언 아일톤 세나보다도 앞선 순위였다[8].

4.3. 1993 시즌

1992시즌에 가능성을 발견한 베네통과 슈마허는 1993 시즌에도 더욱 레이스카의 성능을 끌어올리면서 우승을 노리게 된다. 하지만 1992시즌 아일톤 세나와의 불화로 1년을 쉰다음 윌리엄스로 복귀한 알랭 프로스트가 전년도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력한 FW15C를 타고 착실히 시즌을 운영하면서[9] 1993시즌 챔피언을 차지하면서 슈마허는 또다시 아쉬움을 삼켜야했다. 심지어 포르투갈에서의 1승을 포함해 포디움에 9번이나 올랐지만 나머지 7개의 레이스에서는 모두 리타이어하는 바람에 최종 52점을 획득하며 오히려 전년도보다 1계단 하락한 4위로 챔피언십을 마치게 된다.

4.4. 199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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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etton B194

전자장비의 힘으로 외계인을 갈아낸 듯한 속도를 보여준 윌리엄스였지만 1994 시즌 전자장비의 사용이 금지되며 주춤하게 된다. 로리 번이 또한번 깎아낸 베네통의 1994시즌 차량인 B194는 굉장히 빨랐지만 운전하기도 상당히 까다로웠다. 그럼에도 차량을 완전히 휘어잡으며 슈마허는 레이스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개막전인 브라질에서의 우승을 시작으로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기어박스의 고장으로 5단 기어밖에 작동이 되지 않아 2위를 차지하기 이전까지 4연승을 올렸고, 이후 캐나다와 프랑스 그랑프리에서도 모두 우승하며 챔피언십을 완전히 리드하게 된다.

8전인 영국 그랑프리에서는 퀄리파잉에서 데이먼 힐에 이어 2위를 차지했는데 레이스 당일 포메이션 랩을 시작하자마자 갑작스럽게 데이먼 힐을 추월하였다가 스타트 라인에 거의 와서야 다시 자리를 돌려주었다[10]. 이후 데이빗 쿨싸드가 엔진 스톨에 걸리며 포메이션 랩을 한 번 더 돌기로 결정났는데 이번에도 데이먼 힐을 또 추월하는 상식밖의 행동을 보이면서 이후 14랩에 5초 스탑 앤 고 페널티를 부여 받게된다. 베네통은 이에 대해 항의하면서 슈마허에게 우선은 계속 레이스를 이어나가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베네통의 항의는 기각당했고 그 시점으로부터 3랩 안에 페널티를 수행해야 했지만 베네통이 지속해서 어필을 하고 있었기에 우선 슈마허는 계속 달리게 된다. 결국 베네통의 어필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슈마허는 흑색기를 받으며 레이스에서 실격당하게 된다[11]. 그런데 흑색기를 확인했음에도 슈마허는 26랩까지 달리다가 냅다 피트로 들어오더니 뜬금없이 아까 받은 페널티를 수행하고는 다시 차량을 몰고 나가버리는(...) 행위를 저지르고 그대로 데이먼 힐에 이어 2위로 레이스를 완주해버린다. 당연히 실격당한지 오래였기에 성적은 인정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또 한번 우승했지만 스키드 블록의 비정상적인 마모로 인해 레이스 후 또 한번 실격당했고, 영국 그랑프리에서의 흑색기 위반 혐의로 2경기 출장금지 처분을 받아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그랑프리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렇게 슈마허가 삽질을 하는 동안 데이먼 힐은 슈마허와의 포인트 격차를 착실히 줄여나갔고 슈마허가 힐을 단 1점 리드하고 있는 상태로 최종전인 호주 그랑프리가 열리게 된다.

슈마허는 호주 그랑프리에서 힐을 앞서나가며 드디어 챔피언이 결정되나 싶은 찰나, 35랩에서 슈마허는 브레이킹 미스로 코너를 살짝 긁게 되면서 시간 손해를 봤고 그렇게 힐이 바짝 슈마허의 뒤에 붙게 된다. 차량의 손상으로 인해 슈마허는 제대로 달아나지 못했고 그렇게 힐이 36랩에 안쪽으로 추월을 할 기회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이번에도 챔피언은 멀어지나 싶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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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마허와 힐의 36랩의 충돌장면

슈마허는 이때 힐을 막기 위해 무리한 움직임을 강행했고 베네통의 오른쪽 뒷바퀴와 윌리엄스의 왼쪽 앞바퀴가 부딫히며 슈마허는 공중으로 띄워진채 방호벽을 들이받으며 리타이어 하게된다. 충돌 이후에도 힐의 차량은 별다른 문제가 없어보였으나 결국 차량을 이끌고 완주하려 노력했으나 왼쪽 앞바퀴의 위시본이 부러지며 힐 역시 리타이어를 하게 된다. 결국 두명의 챔피언 후보가 모두 리타이어했고 영국 언론은 슈마허의 이런 행위가 매우 비신사적이라며 엄청난 비난을 보냈다. 이후 스튜어드들은 사고를 조사했지만 레이스 중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판단하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994 시즌에 드디어 슈마허는 개인 통산 첫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가게 된다.

4.5. 1995 시즌

많은 사건사고로 어수선했던 1994 시즌과는 달리, 1995 시즌의 베네통과 슈마허는 매우 성공적인 한 해를 보내게 된다. 개막전인 브라질에서 또 한번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시즌 9회의 우승을 포함해 11회의 포디엄에 등극하면서 챔피언십 순위 2위를 차지한 데이먼 힐과의 점수차를 33점으로 따돌리며 여유롭게 두번째 월드 챔피언은 물론, 베네통에게도 첫 컨스트럭터 월드 챔피언을 선사하며 완벽한 시즌을 보내는데 성공한다. 특히 벨기에 그랑프리에서는 오락가락하는 날씨로 인해 퀄리파잉에서 16위에 머물렀지만 레이스 당일에 추월에 추월을 거듭한 완벽한 페이스를 선보이며 결국 우승하기도 하는 등, 벨기에에서 확실히 강한 면모를 보여주며 킹 오브 스파라는 별명이 만들어지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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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etton B195

5. 스쿠데리아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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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ichael Schumacher 2004 Ferrari.jpg
맥라렌에서 우승한다면 많고 많은 드라이버 중 뛰어난 또 한명에 그치겠지.
하지만 페라리 레이스카를 타고 우승하면 자넨 전설이 될 거야.
니키 라우다, 당시 페라리 컨설턴트 前 페라리 챔피언
The Red Baron(붉은 남작)
빨간색 페라리를 타고 시즌을 지배하던 슈마허에게 붙은 별명

5.1. 199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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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압도적으로 챔피언을 따내고 1996시즌을 준비하는 슈마허에게 접근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페라리와 맥라렌에서 3회나 월드 챔피언을 달성한 불사조 니키 라우다. 당시 슈마허에게는 베네통과 1년 옵션 계약을 발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던 건지 더이상 연장하지 않고 새로운 팀을 찾게 된다. 2회 월드 챔피언에게 맥라렌, 윌리엄스 등 당시 쟁쟁한 강팀들이 수많은 제의를 건냈지만 상술했듯 니키 라우다의 한마디에 설득당하며 1979 시즌 조디 셱터 이후로 드라이버 챔피언을 배출하지 못한 페라리로 이적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때 슈마허는 베네통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엔지니어 로스 브런과 로리 번을 페라리에 추천했고 페라리가 이 세 사람 모두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으면서 이때 그 유명한 페라리의 슈마허 사단이 정립되게 된다[12].

당해 페라리 차량은 페라리 답게 나쁘진 않았지만 기존 베네통보다 어딘가 나사빠진 듯한 성능과 걸핏하면 터지는 신뢰성 문제로 인해 슈마허는 16개의 레이스 중 7개의 레이스에서 리타이어를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 3위를 차지했으며,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도 슈마허의 이전 소속팀인 베네통을 제치고 2위를 차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몬자의 티포시들 앞에서 당당하게 페라리를 타고 우승하며 열렬한 환호를 받았고, 웻 컨디션에서 펼쳐진 스페인 그랑프리에서는 3위로 달리는 선수까지 백마커로 만들며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5.2. 1997 시즌

슈마허 사단의 핵심인력들이 노력한 결과 매우 발전한 페라리의 F310을 타게 된 미하엘 슈마허는 윌리엄스의 자크 빌르너브와 1997 시즌에 치열한 타이틀 경합을 벌이게 된다. 빌르너브가 2, 3라운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우승하며 시즌 초반을 이끌었지만 슈마허는 5라운드 모나코 그랑프리부터 8라운드 프랑스 그랑프리까지 3회의 우승을 하며 챔피언십을 이끌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빌르너브가 우승과 포디움으로 슈마허를 넘어서면 다시 또 슈마허가 챔피언십을 뒤집으며 엎치락 뒤치락 시즌이 진행되었고 결국 1994시즌과 마찬가지로 단 1점의 차이를 빌르너브에게 리드한 채 슈마허는 유러피안 그랑프리에 돌입하게 된다.

1997 헤레즈 서킷에서 펼쳐진 유러피안 그랑프리는 퀄리파잉 부터 박빙이었는데 무려 미하엘 슈마허, 자크 빌르너브, 하인츠하랄트 프렌첸 3명의 퀄리파잉 기록이 동일한 명장면이 나오면서 챔피언십의 재미에 불을 붙였다. 먼저 기록을 낸 순서로 그리드를 정립하여 빌르너브가 폴 포지션, 슈마허는 2위로 레이스를 시작하게 된다. 레이스가 시작하자 슈마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빌르너브를 추월했지만 빌르너브도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행방을 알 수 없는 레이스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후 슈마허의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빌르너브는 슈마허를 추월할 기회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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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마허는 3년전과 마치 비슷한 느낌으로 빌르너브와 추돌하게 된다. 이후 본인은 튕겨져나와 자갈밭에 빠지게 되고 자력으로 트랙에 복귀할 수 없어 리타이어하게 된다. 다만 1994시즌과 다른 점은 빌르너브는 약간의 손상이 있었지만 결국 레이스를 3위로 완주해냈고, 1997 시즌의 월드 챔피언은 단 3점 차이로 자크 빌르너브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미 1994시즌에 한번 슈마허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렸던 FIA 또한 이번만큼은 고의성이 짙다고 판단, 2주 후에 열린 청문회에서는 슈마허의 실수라는 항의를 기각하고 1997 시즌의 드라이버 챔피언십 포인트를 F1 역사상 최초로 몰수하는 판결을 내리며 슈마허는 시즌을 통째로 실격당하고 만다.

5.3. 1998 시즌

강력한 레이스카를 만들어오던 윌리엄스였지만 1998시즌부터 경쟁력이 크게 후퇴하면서 혼란을 겪는 사이, 맥라렌의 미카 하키넨이 슈마허의 주요 경쟁자로 떠올랐다. 맥라렌의 MP4/13은 프리시즌 테스트부터 상당한 성능을 보이며 챔피언십 도전을 선포했고, 하키넨 역시 1, 2라운드를 내리 우승했다. 물론 페라리도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라 계속 차량을 개선한 결과 시즌 중반부터 5승을 하며 슈마허도 하키넨을 뒤쫓기 시작한다[13]. 페라리가 업데이트를 착실히 성공시킴에 따라 슈마허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또 한번 티포시들에게 우승을 선사하며 챔피언십 포인트를 하키넨과 동점을 만드는 막판까지 치열한 경쟁을 하였고 마지막 경기까지 챔피언십 경쟁을 끌고오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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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운하게도 폐막전인 일본 그랑프리에서 레이스를 리드하고 있었지만 타이어에 갑작스레 펑쳐가 나며 또다시 세번째 월드 챔피언 달성에 실패한다.

이번 1998시즌 역시 논란에서 슈마허는 그닥 자유롭지 못했다. 영국 그랑프리에서는 슈마허는 레이스 종료 두 랩을 남기고 세이프티 카 상황에서 백마커였던 알렉산터 뷔르츠를 추월한 혐의로 10초 스탑 앤 고 페널티를 부과받게 된다. 다만 이 페널티가 논란이 있었던 것이 스튜어드들이 당시 페널티를 공지할 때 손으로 쓴 페널티 통지서를 페라리 측에 전달했는데 이 통지서에 10초 페널티라고만 적혀 있던 탓에 페라리는 이 페널티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를 수 밖에 없었다[14]. 결국 페라리는 마지막 랩에 혹시 모를 차원에서 슈마허를 일단 피트로 불러들였는데 당시 페라리의 피트 박스가 결승선 이후에 있었기 때문에 일단 슈마허는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것으로 처리 되었다. 맥라렌은 이를 두고 스탑 앤 고 페널티를 수행하지 않았다며 FIA에 항의하였지만 페라리는 페널티는 스튜어드들이 어떠한 조사에 착수한 이후 25분 이내에 결론을 내어 팀에게 전달해야 함에도 31분이 지나서야 자신들에게 페널티 통지를 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페널티 자체가 위법이라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FIA는 페널티를 너무 늦게 부과했던 점, 애당초 통지서에 페널티를 명확하게 명시하지 않았던 점[15] 등에서 할 말이 없었고 결국 이 논쟁에서 페라리가 승리하며 슈마허의 우승 기록은 유지되었다.

이외에도 폭우 속에서 진행된 벨기에 그랑프리[16]에서 2위와 40초 이상의 격차로 순항하고 있었으나, 심한 스프레이 현상으로 인해 시계가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한 바퀴 뒤쳐진 백마커인 데이비드 쿨싸드의 뒤를 그대로 들이받는 일도 있었다[17][18]. 백마커 때문에 우승을 날려버려 꼭지가 돌아버린 슈마허는 피트에 차를 세우자마자 맥라렌의 차고로 달려가 쿨싸드와 현피를 뜨려했지만(...) 저지당하고 이후 인터뷰에서 쿨싸드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맹비난하기도 하기도 했다[19].

5.4. 199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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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웠던 1998시즌을 뒤로 하고 펼쳐진 20세기의 마지막 시즌인 1999시즌에서 시즌 초반 7경기까지 2번의 우승을 포함해 4번의 포디움에 오르는 등 시즌을 순조롭게 보내는 듯 했으나 8라운드 영국 그랑프리참 영국에서 사건사고가 많다에서의 브레이크 고장으로 인해 방호벽에 320kph라는 엄청난 속도로 충돌하는 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이후 6개의 레이스를 결장해야만 했고 일찌감치 월드 챔피언은 물건너 가버리게 되었다.

그래도 복귀 직후의 말레이시아 그랑프리에서는 2위와 1초[20] 차이로 폴 포지션을 차지하고 폐막전인 일본 그랑프리까지 모두 2위로 완주하는 등 복귀의 신호탄을 터뜨렸고 팀메이트 에디 어바인의 드라이버 챔피언 등극을 위해 그를 보조해줬지만 또 다시 하키넨이 챔피언을 차지하게 된다. 이때 슈마허는 다리 부상으로 인해 1/3에 가까운 레이스를 결장했음에도 드라이버 챔피언십에서 5위를 차지했고 어바인도 챔피언십 2위를 기록하며 1982 시즌 이후 17년만에 페라리는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다.

5.5. 2000 시즌

빠르기는 무지 빨랐지만 영 좋지 못한 신뢰성을 보이는 맥라렌 차량 때문에 하키넨이 1, 2라운드 연속 리타이어, 3라운드에서도 2위를 기록하는 동안, 슈마허는 개막전부터 3연승을 올리고 첫 6경기동안 5개나 포디움을 기록하는 등 시즌 초반을 이끌며 챔피언십을 리드한다. 하지만 7라운드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리타이어 한 것을 시작으로 캐나다를 제외하면 독일 그랑프리까지 내리 리타이어했고 이렇게 슈마허가 리타이어한 경기들에서 하키넨이 우승과 포디움을 잘 챙겨오며 격차를 줄이게 된다. 이런 슈마허의 부진 때문인지 많은 팬들과 언론들은 미하엘 슈마허의 실력에 의구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슈마허와 페라리의 조합에 회의적인 반응이 나타나기도 했었다. 게다가 독일 그랑프리 이후에도 하키넨이 더 많은 포인트를 쌓으며 오히려 하키넨이 챔피언십을 리드하게 된다. 하지만 슈마허는 다시한번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기록하고[21] 이후 벌어진 미국 그랑프리에서 하키넨이 리타이어 할 때도 우승을 기록하며 챔피언십 리드를 끌고 오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챔피언 결정전을 일본 그랑프리에서 맞이하게 된다.

일본 그랑프리 직전 하키넨은 80포인트, 슈마허는 88포인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여러 경우의 수는 많았지만 슈마허가 만일 일본에서 우승을 기록한다면 하키넨의 순위와 상관없이 자력으로 월드 챔피언에 등극할 수 있었다. 퀄리파잉부터 슈마허와 하키넨의 경쟁은 치열했는데, 슈마허가 폴 포지션을 잡았지만 레이스에서 스타트가 좋았던 하키넨이 레이스 선두를 꿰차며 도망가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그랑프리인 말레이시아까지 챔피언의 행방을 알 수 없었으나 당시 슈마허와 페라리의 주 특기인 다회 피트스탑 작전을 실시해 두 번째 피트스탑 이후 하키넨보다 앞서 나와 레이스의 선두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슈마허는 크루징하며 그대로 우승에 성공하면서 1979 시즌 이후 마침내 페라리에게 드라이버 챔피언십 타이틀을 안겨주며 본인의 통산 3번째 월드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자신의 우상이기도 한 아일톤 세나와 동일한 위치에 올라서는데 성공한다.

이 때는 몰랐지만 이는 이후 슈마허와 페라리 왕조의 신호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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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rari F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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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만에 페라리에게 드라이버 타이틀을 안겨주다.

5.6. 2001 시즌

그나마 유일하게 페라리를 막아설 수 있는 맥라렌조차 전년보다 더 심각한 신뢰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으면서 페라리와 슈마허는 2001년에 상당히 압도적인 시즌을 보내게 된다. 시즌 17전 중 9승을 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2위 쿨싸드보다도 58점이나 앞선 123점으로 시즌을 마쳤으며 이는 지난 시즌보다 15점이나 향상된 수치이다[22]. 또한 시즌 2번의 리타이어와 이탈리아에서 4위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든 그랑프리에서 포디움에 등극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슈마허의 페라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손쉽게 컨스트럭터 타이틀을 페라리에게 쥐어주었고 슈마허는 개인 통산 4번째 월드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역시 4번의 월드 타이틀을 획득한 알랭 프로스트와 같은 위치에 서는 영광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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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rari F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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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직후 개최된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는 노즈를 검게 도색하고 스폰서 로고를 제거한 추모 리버리를 사용하였다.

5.7. 2002 시즌

프리시즌 테스트에서 맥라렌과 윌리엄스가 고무적인 성과들을 보여주며 2002 시즌은 정말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막상 뚜껑을 까보니 작년보다 더욱 말도 안되는 기록을 보여주는 슈마허와 페라리가 시즌을 지배해버렸다. 슈마허는 이때 17개의 레이스 중 모든 경기에서 포디움에 올랐으며 이 중 우승만 11개를 기록했다. 슈마허는 무려 6개의 레이스가 남아있었음에도 챔피언을 확정지었고 이는 한 시즌에 그랑프리가 20개 이상 펼쳐지는 현재까지도 가장 많은 레이스 갯수를 남겨둔 채로 챔피언을 확정한 기록이기도 하다[23]. 드라이버 챔피언십 2위이자 그의 팀 메이트인 바리첼로보다도 67점이나 앞서는 144점을 기록하며 또다시 전년도 보다 최종 포인트를 끌어올렸고 또다시 페라리의 컨스트럭터 타이틀을 획득하는데 일조하며 시즌을 끝마쳤다.

압도적인 기록과는 별개로 또 슈마허는 논란에 휩싸인 시즌이었다.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레이스 내내 선두를 유지하던 루벤스 바리첼로가 팀 오더를 받고 마지막 랩에 슈마허에게 1위 자리를 넘겨준 것이다[24]. 어떤 스포팅 레귤레이션을 어기거나 한 것은 아닌지라 별다른 징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엄청난 양의 안티팬들을 생성해냈으며, 아무리 팀 오더 였다고 하지만 슈마허의 이러한 행동이 스포츠맨십과 관중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다는 의견도 등장했다. 게다가 슈마허가 오스트리아 이전 5개의 레이스 중 4번이나 우승하며 승승가도를 달리는 동안 바리첼로는 차량 문제로 3번이나 리타이어하고 스페인에서는 레이스를 시작도 하지 못하는 불운한 시즌을 보내면서도 오스트리아에서 레이스를 전반적으로 매우 훌륭하게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논란은 커졌다. 이 때문에 포디움에서 슈마허는 본인이 2위 자리로 가고 바리첼로를 1위 자리로 올려두기도 했지만 FIA에 의해 저지되었다. 추후 페라리는 챔피언십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고작 6경기 만에 일어난 일인지라 10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받기도 했다.

이런 논란 때문인지 챔피언을 확정지은 이후 열린 미국 그랑프리에서는 슈마허가 반대로 바리첼로가 따라오길 기다렸다가 자의로 1위 자리를 넘겨주며 같이 결승선을 통과하기도 했다[25]. 때문에 시즌이 끝난 이후 FIA는 경기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팀 오더를 금지했고 이는 추후 2011 시즌이 되어서야 해제되었다.

슈마허는 그렇게 2002시즌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후안 마누엘 판지오와 동일한 5회 월드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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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rari F2002

5.8. 2003 시즌

압도적인 2002시즌 이후 키미 라이코넨이 맥라렌으로 이적하며 새로운 슈마허의 경쟁자가 될 것임을 예고했고 FIA가 조금 더 다양한 챔피언십 경쟁자를 만들기 위해 기존엔 6위까지만 포인트를 부여하던 시스템을 8위까지 포인트를 부여받도록 시스템을 수정하면서 챔피언십이 상당히 치열해졌다. 이 규정 덕분에 시즌 최종전까지 키미 라이코넨은 2003 시즌 단 1승만으로 슈마허와의 챔피언십 경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전년도에 비해 경쟁자인 윌리엄스와 맥라렌이 페라리를 더 압박하면서 슈마허는 첫 두 경기에서는 포디움에 오르지 못했으며, 3라운드 브라질 그랑프리에서는 충돌에 연루되어 리타이어하는 등 5회 월드 챔피언에 걸맞지 못한 시즌 초반을 보낸다. 그 사이에 그의 가장 강력한 챔피언십 경쟁자였던 키미 라이코넨은 1라운드에서 3위, 2라운드에서는 본인의 첫 그랑프리 우승을 거두어 슈마허보다 16점 앞서나가며 그를 긴장케 했다.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는 슈마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기에 슈마허 형제는 레이스 불참까지 고민했으나 결국 참가했고 미하엘은 우승, 랄프는 4위를 하며 좋은 결과를 냈다[26].

산마리노 이후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에서도 연승을 올리며 치열한 챔피언십 경쟁을 이어나가는 와중 13라운드 헝가리 그랑프리 직후 슈마허가 몬토야와 라이코넨을 상대로 각각 1, 2점 앞선 상황에서 FIA는 타이어 폭을 측정하는 방법에 대한 규정을 수정했다. 페라리의 타이어 공급사인 브릿지스톤은 새 규정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윌리엄스와 맥라렌의 타이어 공급사인 미쉐린은 신속하게 타이어를 재설계해야 했으며, 슈마허는 이를 틈타 이탈리아와 미국 그랑프리에서 우승한다. 몬토야는 미국 그랑프리에서 페널티를 부과받아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최종전 일본 그랑프리에서는 라이코넨만이 슈마허와 경쟁할 수 있었다.

최종전 일본 그랑프리에서는 라이코넨이 우승을 차지해도 슈마허는 단 1점[27]만 확보하면 되는 상황[28]으로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레이스 초반 타쿠마 사토와의 충돌로 프론트 윙이 파손되어 하위권까지 내려앉으며 긴장감을 더했으나 다시 순위를 회복하는 데 성공해 끝내 8위로 완주. 판지오의 5회 월드 챔피언 기록을 뛰어넘으며 당시로선 전무후무한 6회 드라이버 월드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며 통산 챔피언 횟수 단독 1위 자리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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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rari F2003-GA[29]

5.9. 2004 시즌

라이코넨과 치열한 경쟁을 경험한 지난해와는 달리 슈마허는 다시 한번 기록적인 한 해를 보낸다. 개막전부터 5연승을 기록했고 다시 7라운드 유럽 그랑프리부터 7연승을 달리며 4경기를 남긴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챔피언을 확정지었다. 6라운드 모나코 그랑프리에서의 리타이어가 아니었다면 13라운드 헝가리 그랑프리까지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했던 13연승을 올렸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아무도 깨지 못할 것 같았던 2002시즌의 11승을 심지어 뛰어넘어 18전 13승, 15포디움을 기록하며 자신의 한계를 또다시 뛰어넘었고 2022 시즌 막스 베르스타펜이 해당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30] 단일 시즌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또한 당해 페라리의 차량인 F2004는 2017년에 차량 규정이 바뀌기 전까지 순수 랩타임으로 봤을 때 가장 빠른 F1 차량이였다. 또한 당시의 그루브 타이어는 현재의 하드 타이어만도 그립이 못한 점과, 당시의 퀄리파잉 플라잉 랩은 레이스 첫 스틴트에서 실을 연료를 그대로 싣고 달려야 했다. 게다가 현재의 F1 레이스카에 사용되는 배터리 시스템이나 DRS 같은 것도 없이 오직 차량의 깡성능으로 승부를 보던 당대 폴 포지션의 랩타임 기록은 F2004의 한계치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3.0L V10 엔진과 500kg대 무게로 엄청난 추중비를 가진 F2004와 훨씬 발전된 공기역학 기술로 무장한 메르세데스 W11같은 현세대의 명차가 동일한 서킷에서 같은 슬릭 타이어를 끼우고 연료통을 비운 상태로 달렸을 때 어떤 차량이 더 빠를까는 모터스포츠 팬들에게 좋은 설정놀음 거리.

아무튼 엄청난 본인의 실력과 말도 안되는 성능을 지닌 페라리의 레이스카에 힘입어 슈마허는 7회 월드 챔피언과 동시에 5연속 월드 챔피언이라는 역사를 또 한번 써내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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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rari F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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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VOLTE CAMPIONE DEL MONDO[31]
SIMPLY THE BEST

5.10. 2005 시즌

한 세트의 타이어로 레이스를 완주해야 하는 해괴한 규정이 도입되었다. 이는 다분히 페라리와 브릿지스톤을 저격한 규정이였으며, 이로 인해 페라리의 F2005는 F2004보다 한 단계 발전한 엔진을 장착했음에도 챔피언십 경쟁에서 멀어진 채 고전하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다. 반면 미쉐린은 이 규정에 적응해 상당히 괜찮은 성능의 타이어를 만들어내어 미쉐린을 사용하는 팀의 페르난도 알론소키미 라이코넨이 타이틀 경쟁을 벌였던 시즌이다.

슈마허에게 있어 2005 시즌에서의 가장 주목할 만한 순간은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있었던 알론소와의 경쟁이다. 재급유 시대 슈마허와 페라리가 매우 즐겨 사용하던 전략을 이 경기에서도 사용한다. 퀄리파잉에서 연료를 많이 싣고 달려 첫 스틴트를 길게 가져간 다음, 앞서 달리던 차들이 피트에 간 사이 연료량이 줄어 차량이 가벼운 상태로 페이스를 미친듯이 끌어올려 피트스탑을 하고 나왔을 때 상대 차량보다 앞으로 나오는 전략이다.

슈마허는 이 경기에서도 기계처럼 전략을 수행하는데, 11번째 그리드에서 출발하여 3위로 피트에 진입해 3위로 복귀한다. 단 한 스틴트 만에 순위가 8계단이나 상승한 것이다. 2위로 달리던 젠슨 버튼이 백마커를 만나 쩔쩔매는 사이 추월에 성공했고, 알론소는 버튼과 슈마허가 경합을 벌이는 사이 두번째 피트스탑을 마치고 3위로 나와 차량이 무거운 상태였기 때문에 클린에어 상태에서 몇 랩 더 주행한다.

슈마허가 두번째 피트인을 하고 복귀했을 때 알론소와의 간격은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았다. 슈마허는 두번째 피트스탑 직전까지도 패스티스트 랩을 연달아 작성할 만큼 페이스가 최고조였지만 알론소는 그렇지 못했다. 곧바로 알론소의 꼬리에 붙었고 약 10랩간의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당시엔 DRS가 없어 가까이 붙어도 추월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우승은 알론소가 차지하게 되었다.

당해 슈마허의 유일한 그랑프리 우승은 미국 그랑프리로, 인디게이트로 인한 미쉐린 사용 팀들의 부재로 인한 반쪽짜리 승리였다. 당시 페라리 듀오는 1-2 피니시를 일구었지만 별다른 세레모니 없이 트로피만 받고 그냥 들어가버렸다.

5.11. 2006 시즌

2006년 시즌에는 차량의 규정이 대대적으로 바뀐 해였다. 3.0L V10 엔진 규정이 폐지되었고, 2.4L V8 엔진으로 다운사이징이 진행되었다. 또한 인디게이트를 일으킨 주범이였던 레이스 도중 타이어 교체 금지 규정이 삭제되었다. 이 덕분에 페라리와 슈마허는 다시 챔피언십 타이틀 경쟁자로 복귀하게 된다.

슈마허는 첫 세 경기에서 2위, 6위, 리타이어를 하며 알론소에게 17점 뒤졌지만 산마리노와 유럽에서 우승하며 페라리와 본인이 다시 챔피언십을 두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산마리노에서 차지한 폴 포지션은 개인 통산 66번째로, 아일톤 세나의 65회 폴 포지션 기록을 경신하며 최다 폴 포지션 보유자가 되기도 했다.[32]

모나코 그랑프리 퀄리파잉에서는 또 한번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의 강력한 타이틀 경쟁자 알론소가 플라잉 랩을 돌던 중, 라스카스 코너에서 차량을 세워버린 것이다. 이 또한 고의성이 인정되어 슈마허는 퀄리파잉 기록이 모두 삭제당해 맨 뒤에서 출발해야 했지만, 극악의 추월 난이도를 자랑하는 모나코에서 5위로 완주하는 데 성공한다.

9라운드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슈마허는 알론소보다 25점 뒤진 상태였지만 직후 프랑스, 미국, 독일에서 3연승을 올리며 11점차로 좁힌다. 15라운드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우승한 후 슈마허는 기자회견에서 은퇴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이후 중국에서 개인 통산 91번째이자 마지막 우승을 차지하며 챔피언십 선두를 차지한다. 하지만 17라운드 일본 그랑프리에서 선두로 달리던 슈마허는, 2000년 프랑스 그랑프리 이후 6년만에 엔진 고장으로 인해 리타이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알론소가 우승을 차지하며 챔피언십 경쟁의 판도는 알론소에게 매우 유리하게 뒤바뀌어 버린다.

마지막 라운드인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슈마허는 퀄리파잉에서의 연료 압력 문제로 인해 Q3 플라잉 랩을 돌지 못하고 10그리드에서 출발해야 했다. 레이스 초반 6위까지 올라섰지만 6랩 첫 코너에서 지안카를로 피지켈라와의 충돌로 인해 왼쪽 뒷바퀴에 펑처가 발생했다. 첫 코너에서 사고가 발생해 피트까지 매우 먼 길을 운전해 피트스탑을 마친 슈마허는, 레이스 리더이자 팀메이트인 펠리페 마싸에게 70초 뒤진 19위로 떨어졌지만 무려 4위로 완주하는 기량을 보여주며 페라리와의 마지막 레이스를 매우 좋은 모습으로 끝마치게 된다.

6. 1차 은퇴 이후

이후 페라리의 어드바이저 역할과 F1 차량의 개발에 참여하면서(카트에서 포뮬러 쾨니히로 넘어갈 무렵 미캐닉 역할도 함) 취미로 라이더 생활을 했으며 은퇴를 했어도 건재한지 2009년에는 펠리페 마싸가 헝가리 그랑프리에서 스프링을 헬멧에 맞는 사고로 부상을 입고 시즌아웃을 당한 동안 대타로 돌아올 뻔 했다.[33]

은퇴 이후의 일인데 공항에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비행기 시간이 빠듯하여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자신이 운전해도 되겠느냐고 정중하게 부탁한 이후, 자기가 택시기사를 공항까지 모셔다 드렸다. 관련 기사. 심지어 이때 운전한 택시는 보통 승용차도 아닌 승합차인 미니밴 오펠 비바로였는데 이 물건을 갖고 시속 163 km까지 밟았다고 한다. 대충 우리나라로 치면 현대 스타렉스 2세대나 기아 카니발 1세대 콜밴을 가지고 어지간한 차들 바르고 다녔단 이야기다[34]. 택시기사 왈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코너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참고로 이후 슈마허는 택시비 60 유로에 더불어 100 유로 팁까지 줬다고. 기사가 돈 내야 할 듯

페라리에서 은퇴 선물로 페라리 FXX를 선물로 받았다.[35]

축구를 좋아하며[36] 축구선수들과도 친분이 있어 시간이 있으면 자국에서 열렸던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나 월드컵을 참관하는가 하면, 세계 올스타 자선축구경기에도 참가하여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37]

7. 은퇴 번복, 메르세데스 GP로 F1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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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의 무성한 루머 끝에 2010년, 메르세데스 GP 소속으로 다시 그리드에 돌아오는 것이 확정되었다. 마이클 조던처럼 다른 팀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을 것인지 아니면 "두번은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 것인지...

은퇴할 때도 본인은 은퇴하고 싶지 않았으나 페라리가 은퇴 선언을 한 거나 마찬가지라 복귀할 거란 예상이 많았는데 결국 복귀. 페라리에게 해준게 얼마나 많은데

7.1. 2010 시즌

2010년 3월 14일 1전인 바레인 그랑프리에서 무난하게 6위를 기록했다. 그 탓에 "이제 슈마허도 한물갔네"라는 반응과 은퇴한지 몇 년만인데 오자마자 저 등수를 냈다는 점에서 "실력은 여전하네"라는 반응이 나왔으나, 2010 시즌 대부분 종합성적은 간신히 10위권에 턱걸이 하는 정도로, 팀메이트인 니코 로즈버그보다도 하위의 성적을 거뒀다.

사실 2010년의 메르세데스 차량인 W01은 2009년 브런 GP의 BGP-001의 개량형이고 이것도 일단 2009년 챔프인 젠슨 버튼을 위해 개발된 것이어서, 슈마허와는 잘 맞지를 않는다는 의견도 있고 아무래도 은퇴 후 3년여만에 복귀라 아직 실력 발휘가 제대로 안 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팀메이트인 니코도 타 팀에서 이적한 해이기 때문에 차에 대한 부적응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한 상황이라 전설급 기록을 세운 드라이버 치고는 많이 실망스러운 것이 사실.

팀을 슈마허의 개성으로 물들이고 성과를 거두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38] 슈마허의 나이를 생각하면 유망주인 로즈버그에게 그런 투자를 하는게 더 이득일지도 모른다.


헝가리 GP에서는 루벤스 바리첼로의 추월 시도를 막으려고 그의 차를 벽에 몰아붙이는 위험한 주행을 보였으며, 결국 이 때문에 다음 레이스인 벨기에 GP에서 10그리드 페널티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그리드에서 시작해 7위로 마치는 저력을 보여주며 포인트를 확득해 냈다.

이래저래 좀 힘든 상황이지만 2010년 한국 GP에서는 강우로 인해 세이프티 카가 4번이나 나오는 예측불허의 수중전중 탑랭커를 다투던 레드불의 마크 웨버가 코너중 스핀으로 리타이어, 제바스티안 페텔이 46랩중 엔진 과열로 차체에 불이 나며 리타이어하는 등 이변이 속출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버티며 예선 9위로 시작해 4위로 한국 GP를 마쳤다. (2명 추월, 나머지 앞 쪽 선수들은 리타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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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0년 19R 아부다비 GP에서는... 예선 8위에 비교적 피치를 올려 달리는가 싶더니 스핀을 하는 망신을 당하고, 뒤에서 달려오던 포스 인디아의 비탄토니오 리우치가 슈마허의 차량을 덮쳐 하마터면 스틱스 강을 건널 뻔했다. 그래도 유명했던 성깔은 나이를 먹어 변했는지 자기 차량을 덮친 리우치를 챙겨주는등 상당히 여유있는 모습을 보여줬다.[39]

19R까지 72포인트를 획득해 시즌 9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9위면 잘한 것 아니겠냐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8위 로버트 쿠비차와 9위 사이가 나름 넘사벽(64점 차이)이라는 점과 과거에 압도적으로 다른 드라이버들을 발라버리던 슈마허라는 점에서 "다시 만나지 아니했음이 나았을..."이라는 말이 나올 상황.

7.2. 2011 시즌

해가 지나 2011년이 되어 초반에는 역시나 했는데...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나아졌다.[40]
개최지 스타팅 그리드 경기결과 누적 포인트
호주 11 리타이어 0
말레이시아 11 9 2
중국 14 8 6
터키 8 12 6
스페인 10 6 14
모나코 5 리타이어 14
캐나다 8 4 26
유럽 8 17 26
영국 13 9 28
독일 10 8 32
헝가리 9 리타이어 32
벨기에 24 5 42
이탈리아 8 5 52
싱가포르 8 리타이어 52
일본 8 6 60
한국 12 리타이어 60
인도 12 5 70
아부다비 8 7 76
브라질 10 15 76

8R 유럽 그랑프리까지의 종합 순위는 10위다... 14R 싱가포르 전까지 봐도 종합순위는 8위.

하지만, 경기 중단을 고려할 정도의 엄청난 폭우 속에서 치러진 2011년 캐나다 GP에서 경기 후반까지 2위를 지키면서 레인마스터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비가 개이고 노면이 마르면서 아 망했어요 별 저항도 못해보고 순식간에 4위로 주저 앉는 모습. 이 경기 이후로 다들 슈마허가 아니라 메르세데스 W02를 까기 시작했다. 각주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빗속의 경기는 차의 스펙 차이보다는, 드라이버의 능력에 더 좌우된다. 아직 전성기 만큼은 아니지만 경쟁력있는 차만 주어진다면 해볼만 할 듯.

그런데 2011 시즌 후반기 슈마허가 살아나고 있다.

스파프랑코샹 서킷에서 벌어진 벨기에 GP에서는 불운하게 시작하였다. 예선에서 정비불량으로 예선을 치르지 못해 꼴지인 24그리드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먼치킨급의 스타트로 시작하자마자 첫 랩에 15위까지 올라가는 위엄을 보이며 차근차근 다른 드라이버들을 추월해갔다. 레이스 후반엔 팀 동료인 니코 로즈버그를 추월하며 5위로 골인하는데 성공!

이탈리아 GP에서도 카메라는 슈마허를 비추기에 바빴다. 슈마허는 8그리드에서 출발했는데, 스타트와 동시에 또 먼치킨급 스타트를 보이며 3위까지 치고 올라가 2위인 페르난도 알론소를 위협했다. 물론 메르세데스 W02의 퍼포먼스는 형편없었기에 알론소와의 차이는 벌어졌지만, 4위로 뒤따르는 루이스 해밀턴의 공격을 수없이 방어해 냈다. 스트레이트가 많은 몬차 서킷의 특성상 뒤에 있는 해밀턴이 DRS + KERS로 수없이 공격했음에도 꿈쩍하지 않고 20랩 가량 블로킹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추월당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할 수 있지만, 차량 퍼포먼스의 차이가 분명한 가운데 정상급 드라이버를 막아내는 것은 슈마허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루이스 해밀턴은 스파프랑코샹에서도 똑같이 슈마허에게 꽤 많은 시간을 블로킹당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슈마허의 능력을 더더욱 돋보이게 만들 수 있었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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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GP에서는 사고를 당하며 리타이어했다. 9위로 달리던 중 앞서가던 세르히오 페레스를 추월하려다가 페레스의 리어와 슈마허의 프론트 윙이 충돌하면서 노즈가 들리는 사고로 리타이어했다.[42]

스즈카 서킷에서 열린 일본 GP에서는 Q3에서 플라잉 랩을 돌지 않았지만 아웃랩을 돌았기 때문에[43] 8그리드를 차지한다. 레이스에서는 다시 좋은 스타트를 보이며 6위로 점프하고 좋은 타이밍에 핏스탑한 결과[44] 잠시나마 선두에서 달려보기도 했고, 최종적으로는 페라리의 마싸를 막아내며 6위로 레이스를 마치고 8포인트를 얻었다.

그러나, 2011년 한국 GP에서는 "작년에 있었던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과는 별개로 2회차 예선 때 녹아웃을 당하고, 본선에서는 비탈리 페트로프와 충돌하면서 리어 윙이 심각하게 파손, 결국 리타이어되는 불운을 겪는다. 이로서 영암에서 슈마허가 2년 연속 완주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팬들은 아쉬움 속에 눈물을 흘렸다. 이쯤되면 화가 나서 인터뷰에서 소리를 꽥꽥지를만도 한데 한선육교를 건너면서 씨익 미소를 보이는 슈마허의 대인배스러움에 전 세계 모두가 '역시 경력은 그냥 먹는게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후 인터뷰에서도 '그럴 수도 있지. 신경 안 쓴다' 같은 투로 말해서 대인배의 칭호를 획득했다.

그 후 인도 GP에서는 안정적인 레이스를 펼치며 팀메이트 니코 로즈버그보다 앞서는 5위를 기록하고[45], 아부다비 GP에서는 작년에서의 안 좋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7위를 기록하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보였다.

최종전 브라질 GP에서는 아이르통 세나의 조카 브루노 세나와 컨택을 하며 타이어 펑쳐가 나는 손해를 봐 15위를 기록하며 슈마허의 2011 시즌이 마감되었다.

7.3. 2012 시즌

2011 시즌 후반부 상승세를 탄 슈마허의 2012 시즌은 기대되었고, 실제로 개막전 호주 GP 퀄리파잉에서 4위를 하며 드디어 지난 2년동안의 설움을 딛고 좋은 성적을 거둘수 있으리라는 설렘을 가지게 만들었으나, 정작 본 레이스에서는 10랩 정도밖에 달리지 못하고 기어박스의 이상으로 리타이어하였다.

2R 말레이시아 GP에서는 복귀 후 첫 퀄리파잉 3위를 기록하며 또다시 설렘을 가져다 주었으나, 역시 본 레이스에서 한 바퀴도 돌기 전에 로터스의 로맹 그로장과 충돌해 순위 손해를 엄청나게 보았고, 스콜로 레이스가 한번 중단됐다 다시 재개된 이후에도 포인트권 밖에서 레이스를 이어가다가 제바스티안 페텔의 타이어 펑쳐와 파스토르 말도나도의 엔진 블로우로 겨우 10위까지 올라가 1포인트를 따낸다.

3R 중국 GP에서도 역시 3위를 차지하였으나, 퀄리파잉 2위 루이스 해밀턴이 기어박스를 바꿔 5그리드 페널티를 받으며 2위로 출발하게 되 적어도 포디움, 잘하면 우승 까지 기대되었으나, 스타트에서 팀메이트 니코 로즈버그가 로켓스타트로 치고 나가버렸고, 슈마허는 맥라렌,로터스 등을 방어해 내는 역할을 계속 수행하며 2위를 달리고 있던 도중 피트스톱을 했는데, 여기서 오른쪽 타이어의 휠넛을 제대로 조이지 못하고 보내버린 피트크루의 통한의 실수가 나오며 다시 리타이어.
그 뒤 니코 로즈버그의 F1 데뷔 이후 첫 우승을 쓴웃음을 지으며 지켜보았다.

4R 바레인 GP에서는 팀의 판단 착오와 차의 이상, 그리고 앵그리버드 헤이키 코발라이넨의 예상 외의 스피드로 슈마허가 Q1에서 탈락해버리게 된다. 게다가 기어박스를 바꿔 5순위 하락한 23위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레이스에서는 사건사고 없이 무난한 레이스 운영을 보여 13계단 상승해 10위로 1포인트를 얻었다.

5R 스페인 GP에서는 Q3 진출에는 성공했으나 Q3에서 랩타임을 기록하지 않으며 9위에서 출발하였다. 레이스 스타트를 잘 했고, 5위였던 세르히오 페레스가 타이어 펑쳐가 나 스타트 상황에서 6위로 치고 올라갔으나, 첫 피트스톱을 하고 난 몇 바퀴 뒤 피트스톱을 하지 않고 버티고 있던 브루노 세나를 추월하려 DRS를 쓰고 달리던 중 브루노 세나의 리어윙을 박고 슈마허와 세나 둘 다 리타이어해 버렸다. 복귀 후 리타이어를 하더라도 어지간해선 화를 내지 않던 슈마허도 이때만은 팀 라디오로 "Idiot!"이라는 말을 남기고 스티어링을 집어던졌다. 결국 이 사고로 슈마허에게 내려진 처분은 모나코 GP에서 5순위 강등이었다. 이 사건은 세나의 애매한 방어행동과[46] 슈마허의 브레이크 타이밍 미스가 맞물려 팬덤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6R 모나코 GP 퀄리파잉에서 폴 포지션 차지라는 대사고를 쳤다. 복귀 후 첫 폴 포지션은 물론, 햇수로는 6년만의 폴 포지션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황제의 재림을 만천하에 보여주었지만, 스페인 GP에서의 5순위 하락 페널티로 아쉽게 출발은 6위에서 하게 된다. 그런데 레이스가 시작하자마자 출발 과정에서 5위 알론소에게 밀린 4위 로맹 그로장과 말레이시아에서의 충돌을 반복했고, 슈마허는 계속 진행해 2계단 하락한 8위에서 키미 래이쾨넨의 뒤꽁무니를 계속 쫓았지만 여유치 않은 도중 슈마허는 피트 스톱 타이밍을 늦게 가져가 타이어의 문제로 고전하던 키미 래이쾨넨 등을 제끼고 슈마허가 7위가 된 와중 레이스 중후반에 연료 공급 계통의 문제로 슈마허의 페이스가 상당히 처지고, 결국 토로 로쏘의 베르뉴와 포스 인디아의 디 레스타와 휠켄베르크에게 추월당하였다. 그리고 피트로 돌아와 또다시 리타이어...

7R 캐나다 그랑프리에서는 9그리드에서 출발했으나 그 이상 치고 나가지 못하다가 40랩 이후에 리어 윙에 문제가 발생, DRS가 전개된 상태에서 윙이 닫히지 않아 시케인에서 숏컷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47] 결국 피트인을 하였는데 피트 크루들이 여러명이 붙어 리어윙을 닫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열려있는 리어윙은 꿈적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리타이어.

8R 유럽 그랑프리에서는 2번째 퀄리파잉에서 아쉽게 12그리드를 차지했다.[48] 발렌시아 서킷은 시가지 서킷인데다 마땅한 추월포인트도 거의 없어 별 다른 성과를 내지 못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이게 웬걸, 장에릭 베르뉴헤이키 코발라이넨의 충돌로 인해 세이프티 카가 나오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달리던 제바스티안 페텔로맹 그로장이 연달아 리타이어하고 슈마허는 레이스 후반부터 앞선 차량을 차례차례 추월하기 시작해 5위까지 올라왔는데 56랩에서 3위 싸움을 벌이던 해밀턴 마저 말도나도의 무리한 주행으로 인해 사고로 리타이어하고 말았다. 최종순위는 3위. 인터뷰에서 말하길 슈마허 본인은 레이스에 집중하느라 자신이 몇위인지 조차 몰랐다고 한다. 게다가 복귀후 사상 최악의 시즌을 보내던 와중에 오랜만에 포디움에 오르는 모습을 보며 슈마허의 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후문.

유럽 GP 종료 시점에서 17포인트로 13위에 오른 후 계속해서 포인트 짤짤이를 거둬 13전인 이탈리아 GP (43포인트로 11위를 기록. 만년 하위권인 신생 3팀[49]과 부대끼고 있던 상황은 벗어났으나 아직까진 갈 길이 멀기만 하다.[50] 2010 시즌과 2011 시즌에서 부진했던 퀄리파잉의 성적을 레이스 운영으로 메우던 상황이었는데 2012 시즌에서는 본인의 실수보다 차량의 결함으로 인한 리타이어가 대부분이라 더욱 아쉬움이 남고 있다. 이러한 불운[51]을 딛고 재기할 것인가, 아니면 이후로도 하락세가 지속되는가를 지켜보는 것이 2012 시즌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일본 GP를 앞두고 소속팀 메르세데스 GP가 루이스 해밀턴과 2013 시즌 계약을 맺으면서, 결국 슈마허는 2012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코리아 그랑프리에서는 Q2에서 0.05초 차이로 젠슨 버튼의 Q3 진출을 막았고, 10위로 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레이스에서는 메르세데스의 차량의 한계를 드러내며 레이스가 진행되며 점점 순위가 하락하여 13위로 노포인트를 기록했다.
파일:M.SCH 2012 브라질.jpg
그리고 2012년 11월 26일, 브라질 GP에서는 퀄리파잉 14위, 본선에서 7위로 피니시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은퇴를 선언하며 F1에서 마지막으로 완전히 은퇴한다. 당시 3연챔을 눈앞에 둔 페텔을 앞으로 보내주는 장면도 포착되어 더욱 만감이 교차되기도 하였다.

8. 기록

1994~95년 포뮬러 원 월드 드라이버 챔피언
1993년
알랭 프로스트
미하엘 슈마허 1996년
데이먼 힐
2000~04년 포뮬러 원 월드 드라이버 챔피언
1999년
미카 해키넨
미하엘 슈마허 2005년
페르난도 알론소
  • 시즌 챔피언 총 7회(1994~1995년, 2000~2004년)
    역대 공동 최다. 50년대의 전설 후안 마누엘 판지오가 5회, 현역 최다인 루이스 해밀턴의 7회와 공동 1위
  • 레이스 우승 총 91회
    역대 2위. 루이스 해밀턴이 105회로 1위, 막스 베르스타펜이 61회로 3위
  • 포디움(시상대) 155회 오름
    역대 2위. 루이스 해밀턴이 200회로 1위, 제바스티안 페텔이 121회로 3위
  • 폴 포지션(예선 1위) 총 68회
    역대 2위. 루이스 해밀턴이 104회로 1위
  • 폴 투 윈(예선 1위→ 우승) 40회
    역대 2위. 루이스 해밀턴이 61회로 1위
  • 패스티스트 랩(최고 랩 타임) 77회 기록
    역대 최다. 루이스 해밀턴이 65회로 2위

8.1. 슈마허의 서킷 별 우승 목록

서킷 이름 우승 연도 비고
국립 몬차 자동차 경주장 1996, 1998, 2000, 2003, 2006 해밀턴과 최다 우승 타이
상하이 인터내셔널 서킷 2006 마지막 우승
실버스톤 서킷 1998, 2002, 2004
스즈카 서킷 1995, 1997, 2000, 2001, 2002, 2004 최다 우승
세팡 인터내셔널 서킷 2000, 2001, 2004
호세 카를로스 파시 서킷 1994, 1995, 2000, 2002
앨버트 파크 서킷 2000, 2001, 2002, 2004 렉스 데이비슨과 최다 우승 타이
바르셀로나카탈루냐 서킷 1995, 1996, 2001, 2002, 2003, 2004 최다 우승
모나코 서킷 1994, 1995, 1997, 1999, 2001
스파프랑코샹 서킷 1992, 1995, 1996, 1997, 2001, 2002 첫 우승, 최다 우승
바레인 인터내셔널 서킷 2004
질 빌르너브 서킷 1994, 1997, 1998, 2000, 2002, 2003, 2004 해밀턴과 최다 우승 타이
뉘르부르크링 1995, 2000, 2001, 2004, 2006 최다 우승
헝가로링 1994, 1998, 2001, 2004
느베르 마그니쿠르 서킷 1994, 1995, 1997, 1998, 2001, 2002, 2004, 2006
엔초 에 디노 페라리 자동차 경주장 1994, 1999, 2000, 2002, 2003, 2004, 2006 최다 우승
인디애나폴리스 모터 스피드웨이 2000, 2003, 2004, 2005, 2006
호켄하임링 1995, 2002, 2004
오카야마 인터내셔널 서킷 1994, 1995 스털링 모스와 최다 우승 타이
A1-링 2002, 2003
에스토릴 자동차 경주장 1994
헤레스 서킷
후안 이 오스카 갈베스 자동차경주장 1998


[1] 슈마허의 아버지 롤프 슈마허는 지역 카트 클럽의 카트 수리공이었는데, 집안이 매우 가난했었지만 아들래미가 레이싱을 하겠다는 걸 말리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집을 카트장 옆으로 이사까지 했으며 슈마허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샌드위치를 팔았다고 한다. 게다가 독일의 카트 라이선스 규정때문에 연령 제한이 낮은 나라로 가기까지 했다.[2] 독일에서는 카트 라이선스가 14세부터이다.[3] 포뮬러 레이스의 하위단계로 포뮬러 3의 아랫급, 현재의 포뮬러 4 정도로 보면 된다.[4] 다만 조던 그랑프리에서 그를 유망주로 점찍어두며 테스트 드라이버로 임시 발탁해두었고 후술하듯 그의 F1 데뷔에 큰 도움이 되게 된다.[5] Bertrand Gachot (1962~)[6] [52][7] 살아있는 전설인 애드리언 뉴이가 디자인한 첫 위닝카이기도 한다.[8] 당시 아일톤 세나는 최종 4위를 기록했으며 우승을 슈마허보다 더 많이 기록했음에도 시즌의 절반 가량을 리타이어하게 되면서 역시 단 3점 차이로 슈마허에게 3위를 내주었다.[9] 브라질 그랑프리 단 1경기만 리타이어했다.[10] 당시 규정상 포메이션 랩 중엔 별다른 문제상황이 아닌 이상 앞 차량을 추월하여서는 안되었고 만일 실수로 추월했다면 스타트 라인에 복귀하기 전에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11] 흑색기를 받으면 그 시점에서 드라이버는 피트로 복귀하여 리타이어 해야만 한다.[12] 아이러니하게도 슈마허를 조던에서 빼내와 베네통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수장 플라비오 브리아토레는 이때 페라리에 슈마허를 비롯한 핵심 인력을 뺏겨버리면서 업보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이후 그저그런 중위권 팀으로 머무르다가 1997시즌 브리아토레는 경질되었다가 이후 르노가 베네통 팀을 인수할 때 다시 돌아오게 된다.[13] 이때 페라리는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1-2 피니시를 하며 1990 시즌 이후로 8년만에 1-2 피니시에 성공하기도 했다.[14] 10초 페널티는 당시 규정으로 크게 두가지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상술한 10초 스탑 앤 고 페널티이고, 다른 하나는 10초 타임 페널티이다. 스 탑 앤 고 페널티는 경기 중에 수행 해야만 하지만 타임 페널티는 레이스 종료 후 10초를 레이스 시간에 가산하여 최종 순위에 반영하는 방식이다. 즉, 10초 타임 페널티라면 페라리 입장에서는 슈마허를 굳이 경기중 피트로 불러들일 이유가 없다.[15] 이건 FIA가 재판때 스탑 앤 고 페널티를 말했던 것이라고 이야기하긴 했다.[16] 1998시즌 벨기에 그랑프리를 유튜브 등지에서 찾아보면 시작하자마자 개판이 터지는 등 온갖 사건사고가 많았던 그랑프리다.[17] 슈마허를 보내주려고 속도를 줄인 것은 문제가 없지만 레코드 라인에서 바깥으로 비키지 않은채 속도를 줄여버려 앞서 말했듯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슈마허가 이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18] 그 와중에 앞바퀴가 통째로 날아간 슈마허는 안전지대에 차를 세울 수도 있었지만 3륜차인 상태로 차를 피트까지 몰고 들어오는 진기명기를 선보이기도 했다.[19] 다만 이건 쿨싸드가 명백히 잘못한 것이 맞기도 했기에 슈마허를 뭐라하는 사람이 딱히 없었을 뿐더러 쿨싸드 본인 또한 5년 후에 그것이 자신의 실수였다고 인정하면서 마무리 되었다.[20] 모터스포츠에서 1초면 엄청난 차이다.[21] 이때 41번째 우승을 기록하며 아일톤 세나와 우승 동률을 이루는 쾌거를 기록했는데 이후 인터뷰에서 아일톤 세나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자 감정이 북받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게다가 슈마허는 1994년 당시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본인이 그렇게 세나를 몰아붙이지만 않았더라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감에 한동안 시달리기도 했던 탓에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22] 매우 단적으로 표현해서 당시 포인트 규정상 우승을 12번이나 하고도 4위를 한번 기록해야 나오는 포인트다.[23] 굳이 따져보자면 2023년 막스 베르스타펜이 카타르 그랑프리 레이스 전인 스프린트 레이스에서 챔피언을 확정지으며 레이스 상으로는 6경기를 앞두고 챔피언을 확정한 적은 있다.[24] 단순히 비켜준 것도 아니고 거의 결승선을 코앞에 둔 상태로 속도를 줄이며 슈마허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게 했다.[25] 이때 바리첼로와 슈마허의 간격은 0.011초로, 이는 F1 역사상 두 번째로 가까운 1, 2위간 간격이다.[26] 모든 행사가 끝나고 핏월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두 형제의 모습은 이때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27] 당시 규정상 8위[28] 라이코넨이 우승을 차지한다는 가정 하에 슈마허가 8위를 차지하면 포인트는 동점이고 우승수가 더 많은 슈마허가 챔피언이 된다.[29] 당해 세상을 떠난 페라리의 모기업 피아트의 회장 지오바니 아녤리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니셜 GA를 섀시코드에 추가하였다.[30] 이때는 한 시즌에 22라운드나 그랑프리가 열렸다. 승률로만 따져보면 오히려 슈마허가 더 높다.[31] 이탈리아어로 "7회 세계 챔피언". 개인 통산 7번째 월드 챔피언을 확정지은 2004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촬영되었다.[32] 이는 루이스 해밀턴의 103회, 그리고 아일톤 세나가 상당히 단기간에 65회를 기록한 것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뒤떨어져 보이지만 이는 슈마허가 활동하던 시기의 퀄리파잉 규정이 둘과는 달랐기 때문으로, 세나와 해밀턴의 전성기 시절 퀄리파잉의 룰은 연료통을 비운 상태로 플라잉 랩을 도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슈마허의 경우 플라잉 랩을 돌 때 레이스 첫 스틴트에서 사용할 연료량을 그대로 싣고 달려야 했기 때문에 폴 포지션보다는 레이스에서의 전략을 중점적으로 두고 퀄리파잉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특히 슈마허는 상술했듯 첫 스틴트에서의 연료량을 상당히 많이 가져가는 전략과 맞물려 폴 포지션 횟수가 비교적 적은 편이다.[33] 모터사이클 경주에서 입은 목부상이 낫지 않아 결국 무산되었지만...[34] 이런 상용차들은 디젤 엔진이 달리는데, 디젤 엔진은 저회전 토크는 강하지만 고회전에 약해 속도를 내기 어려운 편이다. 또한 내구성과 실용성에 초점을 맞추므로 더더욱 고속 주행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승용차로 163 km/h로 주행한 것과 크게 다르다.[35] 미하엘 슈마허가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참고로 FXX 제작에는 슈마허도 참여했다.[36] 1. FC 쾰른의 팬이며, 쾰른이 이적 자금이 부족해 루카스 포돌스키 영입에 어려움을 겪자 팬들이 이적료 일부를 모금해 부담했을 때에도 참가했다.[37] 2002년 루이스 피구 재단 vs 세계 올스타 자선경기에서 뛰어난 패싱을 보여주며 도움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구석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오른발 킥으로 골 포스트를 맞추는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아쉽게도 득점은 하지 못했다. 직접 봐서 기억한다. LUIS FIGO FOUNDATION 5-5 UNICEF ALL STARS[38] 과거 베네통에서 페라리로 이적 후 이른바 슈마허 사단이 완성되어 전대미문의 시즌 제패를 일군 2000 ~ 2004 시즌의 모습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39] 이 사고를 계기로 차량의 노즈 높이에 제한이 생겨 2012 시즌부터는 대부분 계단식 스텝노즈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이는 오리너구리 노즈라는 악명을 듣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2012년 스파에서 그로장이 유발한 대형 사고 이후 해당 규정은 더 강화되었고, 차량 하부 플로어로 들어가는 공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팀들의 고육지책에 의해 존슨 노즈라고 불리는 기괴한 노즈들이 등장하게 되었다.[40] 호주~영국 GP까지는 5위 안에 1번밖에 못 들었지만, 독일~브라질 GP까지는 5위를 3번이나 기록했다. 하지만 리타이어도 2번 더 많다[41] 조금 자세한 이야기를 적자면, 스파와 몬차에서 메르세데스 W02는 다운포스를 거의 포기하고 직선에서의 스피드만을 극단적으로 중시한 세팅으로 나섰다. 따라서 최고속도는 맥라렌과 거의 비슷했거나 우위에 있었고, 해밀턴의 DRS + KERS 공격에 KERS로 대항하며 라인을 내주지 않을 수 있었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이런 세팅은 다운포스가 부족하기 때문에 차의 안정성이 낮고, 코너에서 조금의 실수만 있어도 탈출 속도 차이로 인해 추월당할 수 있다. 하지만 슈마허는 그 불안정한 차량을 가지고도 절대 실수하지 않았다. 현실이 이니셜D보다 더한 세상[42] 2010 시즌 발렌시아에서 웨버가 당한 사고와 비슷한 느낌이다.[43] 플라잉 랩을 도는 것만 랩타임으로 인정된다. 피트를 나와서 한 랩을 도는 것을 아웃랩이라고 하고, 플라잉 랩 후 피트로 들어가기 위해 도는 랩을 인랩이라고 한다.[44] 피트스탑하고 얼마 있지 않아 세이프티 카가 선언되었다.[45] 사실 슈마허의 인도 GP 5위는 해밀턴과 마싸의 컨택의 영향이 더 컸다.[46] 규정상 방어를 위한 움직임은 1회로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세나의 경우 확실하게 움직이지 않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47] DRS는 리어윙을 열어 차체의 다운포스를 줄여 속력을 얻는다. 속력을 위해 안전성을 맞바꾸는 방식이라 만약 DRS를 사용한 상태에서 코너를 돌 경우 그대로 스핀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퀄리파잉에서 DRS를 열고 코너를 공략하던 레드불에게는 안 통하는 이야기라서 결국 예선에서도 DRS는 DRS 구간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까지 바뀌었다.[48] 유럽 GP 퀄리파잉은 Q2가 가장 치열했는데 1위부터 10위까지의 격차가 0.2초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상황이었다.[49] 케이터햄, 마러시아, HRT. 그나마 케이터햄의 경우 2012 시즌에 단 1포인트라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만반의 준비를 했으며 이를 위한 헤이키 코발라이넨의 노력 또한 가장 두드러졌으나... 베르뉴 ㅅㅂㄹㅁ[50] 일단 팀메이트인 로즈버그조차 13전 기준으로 슈마허보다 40점이 앞서있고, 13전 시점으로 1위가 179점 (알론소), 142점 (해밀턴), 141점 (래이쾨넨), 140점 (페텔), 132점 (웨버), 101점 (버튼), ...[51] 1R 기어박스 이상으로 리타이어, 2R 충돌로 고생, 3R 타이어 문제로 리타이어, 4R 맹구 기어박스로 고생, 5R 충돌로 리타이어, 6R 연료 공급 계통 이상으로 리타이어, 7R DRS 고장으로 리타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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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본인은 택시기사가 본인의 멱살을 잡아 자기방어 용도로 CS가스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Driver used CS gas 'in defence'", 런던 더 타임스, 1991년 8월 15일, 5페이지). 이후 F1 대신 슈마허와는 반대로 르망 24시로 무대를 옮겨 그 전설의 마쓰다 787B를 타고 1991년 르망 24시에서 우승하는 등, 레이스 커리어는 나름대로 잘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