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박한상 朴漢相 | Park Han Sang | |
출생 | 1971년 ([age(1971-01-01)]세) |
충청남도 천안시[1]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구속 전 거주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60-1[2] |
가족 | 아버지 박순태(1947 ~ 1994. 05. 19) 어머니 조순희(1948 ~ 1994. 05. 19) 남동생 박영상(1973년생)[3] |
큰아버지 박순영(1944년생) 이모, 이모부 이관수(1955년생) 이종사촌 남동생 이석규(1982년생) | |
학력 | 현대고등학교 (졸업) 원광대학교 (토목공학 90 / 중퇴) |
병역 | 방위병 복무 (1991~1992년) |
범죄 유형 | 존속살해, 방화, 도박죄 |
살해 인원 | 2명 |
선고 | 사형 (집행 무기한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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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부를 살해하고 불까지 지른 범인은 바로 그 집 큰아들이었습니다. 소문은 전국적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모두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고,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 박한상의 범행이 밝혀진 날, 앵커 이윤성의 KBS 뉴스 9 오프닝 멘트
대한민국의 존속살인 범죄자.― 박한상의 범행이 밝혀진 날, 앵커 이윤성의 KBS 뉴스 9 오프닝 멘트
2. 성장 과정
▲ 박한상의 가족사진. 왼쪽의 인물이 박한상이고, 가운데 부부가 박한상에게 희생당한 부모[4], 오른쪽의 얼굴을 가린 이는 박한상의 동생이다.
1971년에 아버지 박순태(朴淳泰, 前 고려한약유통공사[5], 현 고려허브 대표)와 어머니 조순희(趙順姬)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했을 때 아버지는 24세, 어머니는 23세로 당시에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아이를 얻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경동시장에서 대형 약재상 '덕양한약방'을 경영하던 부모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거기다 가부장제의 영향력이 강력하던 시절에 장남으로 태어나서 편애 수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자랐다. 부모는 강남 8학군으로 집을 옮겼고, 매일 교회 목사에게 '어떻게 하면 아들을 잘 키워낼 수 있을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2.1. 학업 태만과 유흥 중독
강남의 명문고등학교인 현대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그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성적도 저조했다. 경동시장의 한약방을 기업체로 키워낸 자수성가한 약재상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인 그가 가업을 잇기 위해 한의대에 진학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 자동차 튜닝 분야로 진로를 정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6]유복하게 자란 금수저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욕망을 위해 부모를 죽이는 몹쓸 짓을 저지른 것에서 알 수 있듯, 선천적으로 끔찍하게 나쁜 인성으로 인해서 학교와 병원을 옮겨 다녀야 했으며, 학창 시절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비행을 일삼고, 내기 화투치고 싸움질과 폭력을 일삼기도 했다.[7] 게다가 후술하겠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친구로 하여금 보증을 서게 만들면서 큰 돈을 구하기도 했는데, 애초에 친구가 보증을 서게 했다는 점에서 이 인간의 인성이 매우 저열하다는 것이 제대로 드러난다. 아버지는 아들을 강압과 폭력, 학대로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는 더욱 엇나갔다.
이 때문에 '그의 부모가 막장 부모였고,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서 비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자상한 성격이었고, 차별대우까지 하면서 차남보다 장남인 그를 아꼈으며,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워낙 문제를 많이 일으켰기 때문에 점점 아들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로 변한 것이다. 비록 그를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강압적이었으나, 1993년에 18,000달러라는 엄청난 거금을 그가 달라고 해서 내 줄 정도면, 아버지는 아들을 미워했던 게 아니라, 어떻게든 제대로 된 사람으로 한 번 만들어 보려는 의도로 강압적으로 나왔던 것이라고 보면 된다.[8] 그렇게 편애해 주던 아버지를 강압적으로 만들 정도로[9] 그가 반사회적인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나중에 돈을 목적으로 부모를 살해하면서 확실히 드러났다.
동정할 가치가 전혀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도 사건 이후 그를 극심한 패륜아로 규정하고, 그 형량을 집행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그에게 주어질 동정표는 그가 재산을 탈취하기 위해 존속살해를 저지른 이상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한의대 진학에 관심도, 능력도 없었는데, 원광대학교 토목공학과[10]에 90학번으로 입학했으나, 대학 생활에는 적응하지 못했고, 이미 이때부터 유흥업소를 들락날락했다고 한다.[11] 그를 기억하던 대학 동기들에 의하면, 수업에 거의 안 들어오고 거의 매일같이 놀러다녀서 소문이 안 좋았다고[12] 했을 정도다.
그는 1991~1992년경 대한민국 육군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했는데, 방위병으로 입대한 후에도 저녁에는 외제차를 몰고 압구정에서 오렌지족 생활을 즐겼는데, 함께 근무한 동료들에 따르면, 툭하면 힘든 일을 열외받으려고 했고, 승용차, 여자, 돈에 대한 자랑을 하는 것이 특기였다고 하는 고문관이었다고 하며 그나마 여기까지였다면 동료들한테 "군대에서는 폐급이었지만, 사회에선 멀쩡히 잘사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소집해제 후 복학을 포기하고 학교에 다니지 않자, 아버지가 동네 교회 목사와 상의해서 자퇴시키고, 강제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프레즈노 퍼시픽 칼리지 부설 어학원으로 도피유학을 보냈지만, 친구들조차도 “결국 거기서 놀러다니고 카지노에서 도박이나 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당시부터 예상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대한민국에서 새는 바가지는 바깥에 미국에서도 제대로 새고 있었다.[13] 로스앤젤레스 근교 어학원을 다녔지만 잘 나가지 않았고, 자취방에 틀어박혀 폭력 비디오를 탐닉하다가 비슷한 처지의 또래 유학생을 만나 도박에 손을 댔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차별받고 자란 차남이 한의대에 입학하면서 그는 더 이상 편애받는 집안의 기대 대상이 아니라 돈만 빨아먹는 사고뭉치 골칫덩어리로 전락했다.[14]
그는 전형적인 야타족이기도 했는데, 압구정에서 처음 보는 여자들과 원나잇을 즐기다가, 한 번은 함께 원나잇을 즐긴 한 여자가 자길 임신시킨 걸 책임지라고 하는 바람에 부모가 합의금을 내준 적이 있다고 하고[15] 또 한 번은 여자들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혼자 도망쳐서 부모랑 함께 경찰에 불려가서 조서를 쓴 적도 있다고 한다. 그가 야타족이 된 계기는 스스로가 외모엔 자신이 없으나, 돈과 차를 내세우면 웬만한 여자들은 쉽게 꼬시기 가능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교회를 다니는 집안이었고, 아버지도 교회 집사였다. 그는 고3을 앞두고 교회에서 청소년부 활동을 하면서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모습도 보였다고 하지만, 상술했듯 태생부터 인성이 나빴기 때문인지 도박에 빠지거나 친구를 보증서게 만드는 등 인간으로써 하면 안 될 행동들을 했다.
2.2. 도박 중독
상술한 내용만 봐도 가관인데, 그걸로도 모자라 도박 문제로 그가 3,700만 원에 달하는 도박 빚을 지게 되면서[16] 아버지한테 빚을 갚아 줄 것을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거부했고 그는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사건 당시, 그는 미국에서 유학 중에 도박과 향락에 빠져 학업에 제대로 열중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했는데, 미국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유학생을 만나 함께 학교 근처의 도박장에 가게 된 것을 계기로 도박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처음엔 학교 근처였으나, 나중엔 다른 주로 원정 도박까지 갔다고 하며, 생판 처음 보는 미국인과 도박하다가 돈을 잃으면서도 도박을 멈추지 못했다. 얼핏 보면, 유학 생활 중 친구를 잘못 만나서 인생이 망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상술했듯이 그는 천성적으로 인성이 안 좋아, 학창 시절부터 문제를 많이 일으켰기 때문에 동정의 여지가 없다. 도박이 아니었더라도 유흥 등에 빠져 어떻게든 스스로 인생을 말아먹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
하룻밤에 5천 달러를[17]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1994년 1월 귀국해 아버지에게 혼다 어코드를 사 달라고 졸라 18,000 달러를 받아 출국했지만, 그 돈마저 도박으로 잃었는데, 심지어 이때 친구가 보증을 서게 했다고 한다.
1994년 4월에는 부모 몰래 귀국해 은행에서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그걸 담보로 사채업자에게 현금을 빌린 뒤,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오렌지족 생활을 했지만, 단 4일 만에 부모에게 대한민국으로 귀국한 것을 들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는데, 정확히는 친척이 그를 본 후 그게 부모한테 알려졌다. 하지만 그 뒤에도 술, 마약, 도박에 빠져 살던 그는 오히려 3,700만 원의 빚만 지게 되고, 결국 아버지의 반강제적인 부름을 받아 귀국했다. 이 지경에 이르자, 그간 무슨 사고를 치건 수습을 해주던 부모의 인내심도 한계를 맞이했는데, 아버지는 "넌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놈", "내 아들이 아니니 호적 파서 나가라"고 꾸짖었다.
3. 범행
자세한 내용은 박한상 존속살해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4. 사건 이후
MBC의 교양 프로그램 경찰청 사람들 2015를 통해 알려진 그의 근황(당시 44세)으로, 얼굴은 블러 처리됐지만, 사형수로 지내 온 세월로 인해 나이가 든 모습이 보인다.
2005년 5월 23일자 KBS 8시 뉴스타임 '송창언의 사건파일'에 따르면, 1997년과 2002년에 동료 수형자와 큰 주먹다툼을 하다가 교도관들에 의해 독방으로 보내졌고, 두 달 후 2평 남짓의 혼거실로 복귀했다고 한다.[18] 사건 이후에는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수형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하며, 2005년 기준으로 점심식사 후 운동시간 30분을 빼고 방안에서만 지냈고, 아침 6시에 일어나고 밤 9시에 자는 패턴이었다.
MBC 경찰청 사람들 2015 7월 16일 방송분에 모자이크 처리된 채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되었는데(방송 당시 기준 44세), 본인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살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를 6년 동안 상담한 교화위원 양순자(1940~2014)의 살아 생전 인터뷰에 따르면, '모두 거짓이며,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고 한다.
강남의 똘아이 박한상, 이 아이를 6년 이상 상담하면서 느꼈던 참담한 심정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부모를 살해하고 세상의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리고도 끝까지 태연했던 아이. 반성은커녕 살아서 나갈 꼼수만 두고 있는 놈. 끝까지 어리석은 짓만 하고 있는 놈. 더욱이 범죄 사실을 끝끝내 부인하면서 오히려 다른 이에게 누명을 씌우려고까지 했다. 결국 나는 그 아이를 더 이상 상담할 수 없어 포기해 버렸다. 사형수 상담 30년 동안 이 아이 앞에서만큼 참담해본 일이 없었다. 나는 끝내 용서하고 포용할 마음을 내지 못했다.
- 양순자, <인생이 묻는다 내가 답한다> 99p 中
그가 양순자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내용은 늘 범행을 부인했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며 부모를 탓하는 피해자 코스프레 일관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양씨는 '보통 사형수들을 상담하면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동정이 가는 경우도 많은데 박한상만큼은 지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며 아예 상담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의 흉악범들조차 웬만하면 동정하는 사람마저 이럴 정도면 정말 대책이 안 서는 답이 없는 인간인 모양이다.[19]- 양순자, <인생이 묻는다 내가 답한다> 99p 中
면회 갈 때, 피자를 사 갔는데, 감사하기는커녕 자기가 먹는 브랜드의 피자가 아니라고 투덜대지를 않나,[20] 심지어 교도소에서 만나는 다른 수형자들에게 '자기가 재산이 많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고 다니더라고 했다. 아마 정치, 경제 사범 같이 법 관련 지식이 많은 수형자들한테 조언을 구하러 다니는 듯하며, 줄곧 가석방을 노린다는 얘기인데,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민법 상 존속살인자는 상속 대상에서 자동 제외되므로, 부모의 유산 중 그가 받을 자격이 있는 몫은 단돈 십원 한푼도 없다. 박한상의 수중에 남아 있다고 할 만한 게 있다면, 그건 수천만 원의 빚뿐이다. 결정적으로 무기징역이 아닌 사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탈옥이라도 하거나 중병, 중상 등으로 일시적 형집행정지를 받지 않는 이상) 절대로 살아서 교도소를 나갈 수 없다.
하지만 감형의 여지조차 없는 막장 범죄자인 것과는 별개로, 그가 이런 희망을 품을 만한 이유가 있긴 있는데, 대한민국이 1997년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가 되자 본인도 가석방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은 듯하다.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던 시절에 사형수들은 이미 인생 끝났답시고 수틀리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만큼 막나가서 통제는커녕, 되려 교도관들이 눈치를 볼 정도였다. 그러다가 사형제가 사실상 폐지되자 조금은 통제가 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특히 사형수 중 한 명인 원언식이 언젠간 감형될 가능성이 거론되면서[21] 다른 사형수들도 자신들도 언젠간 감형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경우가 생겨났으며, 박한상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듯하다. 물론 무기징역이라면 모를까, 사형은 가석방도 불가능하며, 죄를 반성하며 모범수로 지내면 언젠가 진짜 감형돼서 가석방이 될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부모를 살해한 희대의 패륜아를 풀어줄 정도로 사법부도 자비로운 건 아니다. 사실 사형을 집행하던 시절에도 그의 사형 집행이 안 된 이유는 사형제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김대중의 개인적인 반감 때문에 김영삼 정부 시절 사형 판결을 당한 이들을 김대중 정부 들어 집행하지 않은 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운 좋게 살아있는 거지, 특별히 박한상이 모범수거나 살려둘 가치가 있어서 살려둔 것이 아니며 계속 사형수로 놔두는 것도 사법부가 그를 풀어줄 생각이 아예 없다는 의미이고, 돈에 미쳐서 부모를 살해했기 때문에 무기수로 감형시켰다가 그가 노역을 통해 돈 한 푼이라도 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가 죄를 반성하며 모범수로 지내다가 극적인 확률로 감형되어 가석방된다고 한들, 최소 70~80대 이상의 노년기에나 가능할 확률이 높고, 그때쯤이면 이미 끝난 인생인 데다,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기 때문에 가석방으로 여생을 교도소 밖에서 보낸다는 것이 그에게 별 의미가 없긴 할 것이다.[22]
가장 결정적으로 사형수가 가석방을 노린다면서 정작 교도소에서 모범수이기는 커녕, 오히려 끝까지 자신의 죄를 반성하지 않았다는 점이나 동료 수감자랑 주먹다툼을 해서 독방에 수감된 일이 무려 2번이나 있었다는 점, 부모의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다른 수감자들한테 물어보고 다닌다는 점을 보아, 자신이 국가와 부모에 의한 억울한 피해자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만, 양순자는 부모가 어느 정도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점도 있다는 입장도 보였는데, '현명한 부모는 자식이 몇 점짜리 그릇인가 알고 있으나 부모로서 그들의 행보는 자기들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패륜아인 것과는 별개로, 부모는 상술했듯 그가 애초부터 공부나 가업을 잇는 것에도 별다른 의욕도 소질도 없고 진로도 한의학이 아닌 자동차 튜닝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의대에 갈 생각도 없고 그릇이 못 된다는 것을 정말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그런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것인지 자동차 튜닝으로 진로를 정하는 것을 반대한 데다, 그가 지방대 토목학과에 입학하자 한의대로 편입시키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강제로 도피유학을 보내 버렸으니 말이다. 결과는 알다시피 공부는 고사하고 도박에까지 빠져 더 심하게 타락하고 다녔다. 물론, 1970년대~1990년대의 사회는 2020년대 이후보다 훨씬 더 가부장적 가치관이 강해서 장남에게 가업을 물려줄 필요가 크다는 의견이 암묵적으로 통했다지만, 설령 부모의 실책[23]을 감안하더라도 본인의 영어 실력이 부족함을 알면서도 미국 유학을 가고, 그곳에서 도박에 빠져서 빚만 떠안은 건 그냥 이 인간의 잘못이다.
5. 여담
- 사건 이후에는 오줌이 마려워서 일어나려는데 무언가 이상한 냄새가 나서 정신을 잃었고 칼을 누군가가 쥐어 주었다는 식의 뻔한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 그에게 형이 1명 더 있다는 기사가 존재하지만, 그 기사에만 그렇게 적혀 있고, 다른 언론들은 모두 그가 큰아들이었다고 보도했으므로, 이 기사를 올린 기자가 그의 가족관계를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 검찰청과 교도소로 송치되는 과정에서 몰려든 취재진을 향해 "비켜, 비키라고 씨발!"이라고 외치며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뉴스 영상을 통해 그대로 방영되기도 했다. 아무리 흉악범이라고 해도 보통 이 과정에서는 다소 체념 상태로 말이 없이 지나가는데, 그는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폭언을 해 댔다. 평소의 성격이 개차반임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범죄자들 중에서도 이런 사례는 정말 드물다.
- 그는 패륜 살인까지 저지르며 100억대 재산을 노렸지만, 결국 본인은 한 푼도 못 받고, 동생이 모두 물려받게 되었다. 민법 제1004조는 직계가족 및 부모를 살해하려 하거나 살해한 사람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 그가 범행을 저지른 것은 극심한 도박에 빠진 것과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 때문에 편안한 금수저 인생을 제발로 차 버렸던 것에 가깝다. 범행을 저지르지 않고 얌전히 지냈다면, 한의대에 갈 능력이 없었더라도 부모와 협상해서 자동차 튜닝업에 종사하거나, 가업은 동생에게 경영하도록 넘기고, 자신은 부모의 재산의 일부를 물려받아 건물주가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불로소득으로 어려움없이 편하게 부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의 부모가 그에게 결정적으로 호적까 파겠다며 실망한 이유는 그의 학업 문제가 아니라, 그가 사채를 써서 빚을 져 가면서까지 유흥과 사치, 도박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 도중 지원을 끊겠다고 하여 그를 반강제로 귀국시킨 것도 친척에게 사채를 쓴 것이 들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부는 못하더라도 얌전히만 지냈다면, 실망한 부모가 가업은 동생에게 물려주더라도 절연까지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본인이 하고 싶었던 자동차 튜닝 쪽으로 취업하거나 부모 돈으로 먹고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 시절에도 유흥에 도박까지 빠져 거액을 날린 적이 있으니,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들, 그 많은 재산을 얼마 못 가서 탕진했을 듯하며, 당시 애인이 있었는데 만약 그 상태로 결혼까지 했다면 재산 탕진으로 인해 가정 파탄까지 났을 확률이 높다.
- 1심(서울형사지법 합의23부)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부장판사는 이명박 정부 시절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김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김황식 본인은 사형제 폐지론자에 가까우며 본인 스스로도 사형을 피할 명분을 찾아보았다고 인정했을 정도였지만 당시 법리상 그가 저지른 범죄는 도저히 사형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
- 비슷한 범죄자로, 대한민국에는 부천 원미동 존속살해 사건의 범인인 김근우[24]가 있으며, 미국에는 메넨데즈 형제가 존재한다.[25]
- 크라임씬/이덕만 회장 살인사건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인다.
- 사이트는 접속이 안 되지만, 고려허브는 사건 이후에도 운영되고 있다. 지금은 접속되지 않는 회사 사이트에 과거 기재된 연혁을 보면, 1994년에 새로운 대표이사가 취임했다고 적혀 있었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경동시장 일대에 여전히 있는 듯하다.
-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악역 '백한상(백 선생)'의 이름은 그에게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 저지른 범죄는 많이 다르지만, 인간쓰레기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 원언식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복역 중인 사형수다.
- 죄질이 워낙 나쁜 데다, 반성의 기미도 없다 보니, 그가 사형 판결을 받은 후 형제들과 친척들, 친구들, 애인, 원나잇한 상대들, 학창 시절 교사들 등 그를 알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면회하러 간 적이 없다고 한다. 전술한 양순자 교화위원이 그를 만나러 오던 단 한 명의 면회객이었지만, 그녀마저도 그가 하도 반성 없는 태도로 일관한 탓에 그를 포기하면서 유일하게 자신을 만나러 와 주는 사람을 볼 기회마저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재판 진행 중에는 동생이 한 차례 면회하러 간 적이 있으나, 참회는커녕 "나는 무죄다"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선 후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2005년 KBS 보도에 따르면, 그는 "동생이 불쌍하다"는 말은 종종 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작 부모에 대한 얘기에는 침묵을 지켰지만. 당연하지만 친척들이라고 이런 인간을 옥바라지하고 싶을 리가 없었는지, 모두 없는 사람 취급하며 연을 끊어 버렸기 때문에, 재판 기간 중 구치소에서 사식 한 번을 못 먹어서 검사가 불쌍하게 여겨 햄버거를 몇 번 사주자 '고맙다'면서 울먹였다고 한다. 자연히 변호사 선임도 못 해서 국선변호인의 변호를 받을 뻔했는데, 담당 검사가 그래도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들었는지, 자신의 연수원 후배에게 무료변론을 해 줄 것을 요청해 검사 후배의 변호를 받았다고 한다.#
- 양순자 교화위원은 '그를 용서하지는 못했어도 피해자인 그의 부모는 너무나도 가엾었다'고 하며, 세상에 이보다 더 불행한 이들이 또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에 기독교인이었음에도 스님을 모시고 두 사람에게 직접 천도재를 지내주었다. 이른 새벽 목욕하고 금식하면서 서교동에서 천호동까지 가 아침 10시부터 2시간씩 사흘간 스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기도하고 연신 절을 올렸다고 한다.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계시다면, 이제 그만 당신 자식을 용서하시고 평안한 곳으로 가시라'고 마음을 다해 절했다. 기도가 끝나고 위패를 태운 종이가 산사 위로 훨훨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세상 모든 고통을 땅 위에 두고 두 사람이 영가가 하늘 위로 가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영가 천도가 잘 된 것 같습니다"라는 스님의 말에 타고 남은 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고. 그런데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운전을 하는데 너무 피곤해서 근처 동생 집에 들러 쉬다 가려고 옆의 뚫린 길로 급좌회전을 한 순간, 하마터면 교통사고가 날 뻔했는데, 죽었구나 싶었지만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 순간 '한상이 부모의 영가가 나를 도와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란다.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영가를 위해 사흘간 수고하고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선물받은 자신은 그분들을 위해 기도했고, 세상에 자식을 용서하지 않는 부모란 없으니, 그분들은 아들을 용서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박한상 본인은 여전히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 만약 그의 범행동기가 가정불화였거나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다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27] 범행동기가 워낙 불량하고 반성도 없었기 때문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도 사형을 선고하면서 "사형을 피할 수 있는 명분을 찾기 위해 고심했으나, 고작 피고인의 부모가 살아있을 경우 아들의 사형을 원치 않았을 것이란 추측 뿐이었다”고 했을 정도다.
- 그에게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는 제대로 똥밟은 꼴이 되었다. 상대는 사형수니 빌려준 돈을 당연히 돌려받을 수 없는데, 그렇다고 흔히 사채업자들이 하는 행동처럼 그의 동생이나 친인척한테 찾아가서 대신 돈을 갚으라고 하는 건 엄연히 불법적이고, 안 그래도 사회적으로 사채업자들은 쓰레기 그 자체로 인식되기 때문에 돈 못 돌려받는다고 딱히 동정을 받지도 못한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지만,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는 존속살해 사건 유족들한테 대신 돈 갚으라고 했다간 언론을 타 세간에 알려지기 너무 쉬울 것이고, 돈을 받기는커녕 온갖 사회적 비난에 경찰이 냄새 맡고 캐기 시작하면 귀찮아질 수 있으니, 그냥 포기해 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1] 해당 기사 참조[2] 이 집은 방화 살인 이후 남에게 팔렸고, 본인은 가석방 자체가 불가능한 사형을 선고받았으니, 법적인 주소지도 자신이 살고 있는 교도소일 것으로 추정된다.[3] 이 기사에는 박한상이 차남이고 박한상 위에 형 박원상이 있다고 적혀 있으나, 이 기사에만 그렇게 적혀 있을 뿐, 다른 기사에서는 형의 존재가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사촌 형이었거나 박한상의 신상을 오해해 박한상과 중복해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기사가 작성된 5월 20일은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고, 범인이 잡히지 않아 범인을 가족 외의 인물로 추정하고 수사를 진행했던 시점이라, 가족관계에 대해 사실확인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동생은 사건 이후 큰아버지 박순영의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된 듯하다.[4] 한겨레에 의하면, 아버지는 당시 47세(1947년생), 어머니는 46세(1948년생)였다고 한다.[5] 1991년에 박순태 등 전국의 한약업자 98명이 7억 5,000만 원을 출자해 세운 법인이다.(관련 기사)[6] 그가 고교생~대학생이었던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는 21세기와는 달리, 자동차 정비사가 꽤나 유망한 직종으로 거론되었고, 일단 한 번 배워 두면 평생 써먹을 수 있어서 자동차 정비소 하나를 차리면 적어도 굶어죽을 일은 없었고, 그쪽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거나 튜닝 뿐만이 아니라 자동차 관련 업체에 취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주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21세기에 들어서는 차량 정비업이 레드 오션화된 데다, 전기자동차가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므로, 완전히 옛말이 되어가고 있어 대표적인 기피직종 중 하나로 꼽힌다. 게다가 자동차 튜닝 분야는 자동차 정비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지만, 전혀 다른 업종인 데다, 지금도 큰 차이는 없지만 당시 자동차 튜닝에 대한 인식은 좋지 못했다. 특히 자동차 문화가 다른 국가에 비해 보수적인 편인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7] 그나마 박한상이 있는 집 자식이라서 비행과 학교폭력을 저지르고도 퇴학이 아니라 매번 전학으로 끝날 수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가난한 집의 자식이라도 대한민국에서는 얼마든지 퇴학이 아닌 전학으로 끝내는 것은 가능하다. 있는 집 자식이라서 퇴학을 면한 비슷한 예가 이영학이다. 둘의 나이차도 10살 정도라 박한상도 이영학처럼 있는 집 자식이란 이유로 폭력을 저지르고도 퇴학을 면했을 가능성이 높은 게 맞다. 실제로 당시의 교사들은 체벌에 있어서도 있는 집안 자식이면 가능한 한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박한상이나 이영학과 또래 세대거나 박한상과 이영학 사이의 세대인 1970~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인 학부모들이 교사들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언론에서 다루기도 했는데, 이들 세대에 해당하는 학부모들이 교사들을 불신하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 교사들의 체벌권 남용 외에도 촌지로 학생들을 차별했던 것도 크다. 자신들이 성장기에 교사들이 촌지로 학우들을 차별하는 것을 직접 겪었으니,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교사들을 불신할 수 밖에 없다.[8] 한화로 약 2500만 원 정도이며, 1989년에는 서울에 갓 지어진 30평짜리 아파트 한 채가 2000만 원이었으니, 말 그대로 아파트 한 채 값이나 되는 엄청난 거금을 아들에게 그냥 준 것이다.[9] 심지어 박한상이 온갖 도박빚을 지고 사고를 친 게 걸려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강제 귀국시키기는 했어도 집에서 내쫓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맏아들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은 것이다.[10] 전과를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한의대로 보내려고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다만, 실제 원광대의 의대, 치대, 한의대 전과 제도는 2010년~2015년에 한시적으로 시행되었다가, 2015년에 제정된 학칙에 따라 전과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인간이 원광대학교를 제대로 다녔다고 해도 전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원광대학교/사건사고 문서 참조. 만약 이 인간이 대학을 제대로 다녔다고 한들, 전과를 했다면 비리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당시 촌지를 비롯해 크고 작은 비리들이 많았던 한국 사회의 분위기상,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재력과 업계 인맥들을 감안하면, 그가 대학만 제대로 다녔다면 그의 아버지가 대학 측에 뒷돈을 줘서라도 한의대로 전과시켰을 가능성이 높은데, 가령 박한상이 도박이나 중범죄를 안 저지르고 한의대를 졸업했다고 해도 기질상 한의사 면허시험에는 합격은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거니와, 혹여나 합격해서 한의사 면허를 취득했더라도 훗날 아버지의 뇌물 덕분에 한의대로 전과했고, 그로 인해 한의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바람에 몰락했을 가능성도 높다. 사실 박한상이 원광대 토목공학과에 진학한 것도 아무리 지방대라지만 공대인 데다, 박한상의 공부 소질과 성적을 감안하면, 이 또한 뒷돈이 오갔을 가능성이 있다. 뒷돈 덕분에 지방대 공대라도 입학이 가능했을 가능성이 있다.[11] 실제로 학창 시절에 자기만의 삶이 없었거나 원하던 삶을 살지 못했을수록 성인이 되어 머리도 커지고 넓은 세상을 알게 되어 부모의 지배에 잘 휘둘리지 않게 되면, 보상 심리와 늦바람으로 인해 학업을 게을리하고 유흥에 빠져 사는 경향이 있는 편이다.[12] 사실 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학들은 흥청망청 노는 분위기가 강했고, 대학만 나왔다 하면 기업들이 모셔갈 정도라고 했지만, 박한상이 토목공학과 소속의 공대생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보통 공대, 의대, 법대는 공부량이 상당히 많은 걸로 정평이 난 단과대학들인데도 박한상은 전형적인 오렌지족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13] 박한상이 유학 보내 달라고 아버지를 졸라서 미국으로 도피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는 박한상이 졸라서가 아니라 복학을 포기하자 다른 공부라도 하라는 의미에서 보낸 것이었다.[14] 박한상의 부모는 장남인 박한상을 기본적으로 편애했는데, 특히 아버지는 장남을 더 많이 편애하면서 키웠고, 당연히 장남이 한의사가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박한상은 평생 한심한 모습만 보여주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런 장남한테 실망도 컸을 것이다. 반대로 박한상의 동생인 차남은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학업에 열심히 임했고 공부도 굉장히 잘했다. 그 사이 부모의 사랑이 조금씩 조금씩 동생에게 향하다가, 동생이 한의대에 입학하게 되면서 부모의 사랑이 자연히 동생에게 돌려지고, 박한상은 아버지한테 구박과 미움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15] 정황상 낙태되었을 확률이 높지만, 만약 태어났다면 이 아이가 박한상의 유일한 자녀가 된다.[16] 원금 2,000만 원. 아마 1,700만 원의 이자를 포함한 액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짧은 기간에 이자율이 이렇게나 큰 것을 보면 알겠지만, 사채 등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조달한 돈이다. 지금도 3,700만 원이 작은 돈은 아닌데, 당시 이 정도면 한국산 최고급 승용차 그랜저 2세대 3.0을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고, 2022년 기준으로도 약 8,000만 원 상당으로 제네시스 G80 풀옵션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다.[17] 1994년 기준으로, 2023년으로 치면 1만 달러를 조금 넘기는 금액이다. 하루만에 도박으로 1천만 원을 넘게 잃은 셈.[18] 그런데 사형수는 독방 수감이 원칙이라, 이는 원칙에 어긋난 것이다. 사실 가석방 없는 무기수 비스무리하게 다뤄지고 있는 데다, 교화 등을 목적으로 혼거 수용할 수 있다는 규정이 적용되다 보니, 예외가 적용된 듯 하다.[19] 인터넷에 떠도는 사형수 근황은 이런 식으로 언론, 방송, 출판물 등에 정식으로 공개된 것이 아니면 철저하게 가려 듣는 게 필요하다. 보통 출처가 사형수 동을 맡는 교도관이 그랬다 카더라인데 사형수 동에 배치되는 교도관들은 은퇴한 이후라도 사형수들의 근황에 대해 절대 함구하도록 서약서를 쓰며 굳이 서약 때문이 아니더라도 심리적으로 사형수 동에 근무했던 일 자체를 몹시 꺼림칙하게 여기기 때문에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20] 90년대 기준 피자는 한판 가격이 15,000원 정도 했던, 레스토랑에서나 먹는 상당히 고급 음식 취급받았기 때문에 나름 브랜드있는 피자를 먹어보고 그 브랜드까지 알 정도면 성장기 내내 소득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거기다 1994년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 사식 한 번도 못 먹어봤으니 교도소 급식에 간이 미니피자 같은 게 아니면 그동안 피자 자체를 못 먹었을 텐데도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21] 거기다 원언식은 박한상이랑 일대일적인 비교도 안 되는 것이 원언식은 수감 이전에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며 사고도 안 쳤다. 범행 동기 또한 아내의 종교 문제 때문이었다. 단지 사망자 수가 많고 그 중 억울한 피해자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사형을 받은 것 뿐이지 범행 동기나 죄질만큼은 상당부분 참작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거기다 수감 중에도 사고 한번 안치고 모범수로 살았다. 그랬음에도 사형 판결을 받은지 30년이 넘게 지나 장기간 사형 미집행자로서 형법상 무기징역이나 유기징역으로 전환될 수도 있는 것을 급하게 법을 바꾸어 감형되거나 사면되지 못했다. 이런 원언식조차 그럴지언데, 죄질도 나쁘고 수감되고 나서도 동료 수감자랑 2번 이상 싸운 기록도 있는 박한상이 혜택을 받을 가능성은 더 희박하다.[22] 사실 남은 생을 교도소에서 보내는 것이 본인 신상에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 이미 지인이나 친척, 동생, 연인을 비롯해 관계를 맺은 사람들에게 의절당해 완전히 버림받은 신세인데, 만약 출소로 나갔다간 만천하에 다 드러난 본인의 범행과 신상으로 인해, 대중들 앞에서 사회적 매장을 당해 얼굴도 못 들고 다닐 확률만 더 높아질 뿐이다. 1994~95년에야 제법 떠들썩했지 현재는 거의 잊혀진 인물이 되었지만 탈옥은 물론이고 감형이나 사면으로 정상적으로 출소한다고 해도 출소하자마자 뉴스에 거의 한두번 이상은 반드시 나올 것이기 때문. 거기다 경제활동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데다, 사회랑 단절된 지 이미 30년이 넘어서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고, 유산을 상속받지 못해 빈털터리 상태로 나오기 때문에 노후를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데, 사회경력 없는 흉악범죄자 출신을 누가 고용할 것인가? 하다못해 겨우겨우 일용직으로 고용되더라도 본인 성격상 얼마 못 가 사장이나 동료 직원들과 트러블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옥중에서도 두 번 크게 싸워 독방에 수감된 이력이 있다. 무엇보다도 박한상의 도박 빚 수천만 원은 아직도 사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만에 하나 석방된다 해도 수중에 아무것도 없는 채 사회에 내던져져서 죽을 때까지 빚을 갚으려 노동해야 할 운명이다.[23] 당장 이병철만 해도 장남인 이맹희가 아닌 3남 이건희를 후계자로 삼았고, 정주영도 장남 정몽필이 죽자마자 차남 정몽구를 건너뛰고 5남 정몽헌을 본인의 후계자로 잡았다. 거기다 이병철의 이건희 후계자 내정은 박한상이 5살이던 1976년에, 이건희 회장 취임은 16살이던 1987년에 이미 이뤄졌다.[24] 카드빚을 갚아 주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어머니와 할머니를 살해했고, 아버지와 형도 살해하려다가 실패했으며, 사형을 선고받고 현재도 수감 중이다. 다만, 이쪽은 박한상과는 달리 집안이 가난했다.[25] 재산을 노리고 노인과 부모를 살해한 친형제. 둘 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26] 주인공의 캐릭터는 박한상에 유영철을 더한 이미지로 설정되었다.[27] 비록 6년이 지난 2000년의 사건이긴 하지만, 가정불화로 인한 범행동기를 인정받은 이은석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