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실베이니아 주지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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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로버트 패트릭 케이시 시니어 Robert Patrick Casey Sr. | |
<colbgcolor=#f7f7f7,#fff><colcolor=#000> 출생 | 1932년 1월 9일 |
미국 뉴욕주 뉴욕시 퀸스 | |
사망 | 2000년 5월 30일 (향년 68세)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 | |
국적 | 미국 |
재임기간 | 제42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
1987년 1월 20일 ~ 1995년 1월 17일 | |
제45대 펜실베이니아 감사원장 | |
1969년 1월 18일 ~ 1977년 1월 21일 | |
정당 | |
학력 | 홀리 크로스 칼리지 (B.A.) 조지 워싱턴 대학교 (J.D.) |
가족 | 배우자 엘렌 하딩 케이시 자식 밥 케이시 주니어 등 8인 |
종교 | 가톨릭 |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법조인, 제42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직을 역임했다.2. 생애
2.1. 주지사 당선 이전
석탄 광부 출신 변호사의 아들로 뉴욕시 퀸스의 잭슨 하이츠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가족이 원래 살던 펜실베이니아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성장했다. 학창시절에는 농구를 잘해서 장학금도 받고 프로 스카웃 제의도 받았다. 홀리 크로스 칼리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조지 워싱턴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한다. 대학 졸업 직후 배우자 엘렌 하딩 케이시와 결혼했고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다 1961년 펜실베이니아주 민주당의 영입에 응해 주 상원의원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주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펜실베이니아에서 출생하는 아이의 페닐케톤뇨증 검사를 의무화하는 주법을 요구했다.케이시는 사회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 포퓰리즘을 결합한 이미지로 주의 농민,노동자 계층에게 고평가를 받았다. 1966년과 1970년에는 민주당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경선에 도전하지만 모두 밀턴 샤프(Milton Shapp)[1]에게 근소한 차이로 밀려 낙선했다. 그렇다고 그가 주지사직에만 도전한 것은 아니다. 1968년과 1972년에는 주 감사원장 선거에 출마해 승리했다. 감사원장 임기 중에는 같은 민주당원인 밀턴 샤프와 갈등하면서 주정부의 부패를 고발했다.
이 와중에 동명이인들이 그의 인기를 이용해먹는 일도 있었다. 로버트 E. 케이시(Robert E. Casey)라는[2] 인물은 보잘것없는 인지도와 경력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혼동으로 1976년 주 재무장관에 당선됐다.[3] 1978년에는 또다른 짝퉁 밥 케이시가 민주당 부지사 경선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정작 진짜 밥 케이시는 또다시 주지사 경선에서 낙선한다.
계속된 경선 낙선에도 주지사에 도전한 케이시는 1986년 드디어 민주당 후보 지명을 받았다.[4] 본선에서 케이시의 상대는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주UN 미국대사를 지낸 윌리엄 스크랜턴의 아들인 현직 부지사 윌리엄 스크랜턴 3세[5]였다. 여론조사에서 케이시는 선거 후반까지 스크랜턴에게 12%p차로 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스크랜턴을 무능한 세습 정치인,[6] 마리화나 흡연자라고 비난했고 명상을 하는 스크랜턴의 사진을 이용해 그를 히피 약쟁이 이미지로 만드는 네거티브 전략으로[7] 역전승했다.
2.2. 주지사 당선 이후
주지사 취임 이틀만에 주 재무장관 버드 드와이어가 자살하는 어려운 상황에도 8년의 임기간 다양한 개혁에 성공한다. 주의 수질 개선을 위해 PENNVEST라는 대규모 프로그램을 만들어 25억 달러를 투자했고, 아동 건강 보험법(Children's Health Insurance Act./CHIP)을 통과해서 의료보험 수준을 높였다.환경 분야에서도 주의 재활용 시스템와 독성 폐기물 규제를 강화했다. 주요 유권자 그룹인 노동자의 권익을 지지하면서도 여러 차례 감세를 진행해 기업 활동 또한 장려했다. 세금 개혁이 실패해 일시적으로 인기를 잃은 적도 있지만, 곧 인기를 회복해 1990년 몽고메리 카운티[8]를 제외한 주의 모든 카운티에서 승리하며 압도적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가 유능한 주지사기는 했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당원 대부분의 의견과 반대되는 강력한 반 낙태 주장이 가장 컸다. 대표적으로 낙태에 대해 24시간 대기시간과 미성년자 낙태 시 부모에게 의무적으로 통지하도록 한 펜실베이니아 낙태 규제법을 통과시키려다가 미국 연방대법원까지 가서 무효화된 사건인 가족계획연맹 대 케이시(Planned Parenthood v. Casey, 1992) 판결이 있다. 1990년대에는 남부 민주당원들도 많았기에 반낙태 민주당원도 희귀하지는 않았으나 북부 자유주의 성향 주의 민주당 주지사로는 이례적이었다. 이런 성향 때문에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 요청이 당내 분열 야기 우려를 이유로 거부되었다. 1996년에는 '생명을 위한 싸움'이라는 자서전 겸 낙태죄 논쟁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다룬 책을 쓰기도 했다.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반 클린턴 후보로 경선에 출마를 고려했으나 건강 때문에 철회했다. 사실 주지사 임기 중에도 장기이식으로 겨우 생존한 적이 있다.[9] 결국 희귀암인 아밀로이드증 합병증으로 2000년 5월 30일 사망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2 |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 선거 | 펜실베이니아 22구 | | - (-%) | 당선 (1위) | 초선 |
1966 |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 선거 | - (-%) | 재선 | |||
1968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감사원장 선거 | 펜실베이니아 | 2,451,789 (54.09%) | 초선 | ||
1972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감사원장 선거 | 2,448,938 (55.39%) | 재선 | |||
1986 | 미국 주지사 선거 | 1,717,484 (50.69%) | 초선 | |||
1990 | 미국 주지사 선거 | 2,065,244 (67.65%) | 재선 |
4. 관련 문서
[1] 1966년에는 본선에서 낙선하지만 1970년,1974년에 당선되어 1979년까지 주지사를 역임한다. 케이시보다 더 리버럴한 성향이었고 1976년 대선 경선에도 출마했다.[2] 밥 케이시 Sr.의 풀네임은 로버트 P. 케이시(Robert P. Casey)였다.[3] 일부러 주민들을 혼동시키려고 광고도 신문광고 딱 한번만 했다. 주 공화당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4년 뒤인 1980년에는 로버트 E. 케이시가 로버트 P. 케이시가 아니라고 광고했다. 그 덕인지 간발의 차로 공화당 후보였던 버드 드와이어가 짝퉁 밥 케이시를 이겨서 주 재무장관에 당선되지만...[4] 이때 케이시에게 경선에서 밀린 에드 렌델(Ed Rendell)은 2003년부터 2011년까지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를 역임했다.[5] 아버지같은 온건파 공화당원으로 친낙태 성향이었다. 20년 뒤 2006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주지사에 재도전했지만 경선에서 중도 사퇴했다.[6] 정작 자신의 아들도 20년 후인 2006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펜실베이니아주 연방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7] 반대로 스크랜턴은 네거티브 전략을 거부해 케이시의 공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8] Montgomery County, 필라델피아 교외 카운티 중 하나다. 현재는 조 바이든이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63%를 득표할 정도로 민주당의 텃밭이 되었다.[9] 그래서 주의 장기 조달 프로그램을 효율화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