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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제2기 (1360-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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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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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년

1. 대용병시대의 서막 (1360~1365)
1.1. 퐁 생테스프리 포위전 (1361)1.2. 브리네 전투 (1362)1.3. 조세 개혁 (1363)1.4. 코슈렐 전투 (1364)1.5. 오레 전투 (1364)1.6. 아비뇽 포위전 (1365)
2. 카스티야 내전 (1366~1369)
2.1. 칼라오라 포위전 (1366)2.2. 나헤라 전투 (1367)2.3. 톨레도 포위전 (1368)2.4. 몬티엘 전투 (1369)
3. 프랑스의 반격 (1369~1375)
3.1. 로데즈 포위전 (1369)3.2. 라 로슈 포제 습격 (1369)3.3. 아르플뢰르 포위전 (1369)3.4. 루삭 다리 전투 (1369)3.5. 벨페르슈 포위전 (1370)3.6. 총사령관 임명 (1370)3.7. 리모주 포위전 (1370)3.8. 퐁발랭 전투 (1370)3.9. 베셰렐 포위전 (1371)3.10. 라 로셸 해전 (1372)3.11. 푸아티에 포위전 (1372)3.12. 렌 포위전 (1372)3.13. 브레스트 포위전 (1373)3.14. 트루아 습격 (1373)3.15. 생소뵈르 포위전 (1374)3.16. 브뤼헤 조약 (1375)
4. 아서 왕의 죽음 (1376~1379)
4.1. 흑태자의 죽음 (1376)4.2. 에드워드 3세의 죽음 (1377)4.3. 윈첼시 습격 (1377)4.4. 베르주락 포위전 (1377)4.5. 생말로 포위전 (1378)4.6. 생말로 해전 (1379)
5. 북부 도시들의 반란 (1379~1385)
5.1. 헨트 시민 봉기 (1379)5.2. 낭트 포위전 (1380)5.3. 파리 시민 봉기 (1380)5.4. 와트 타일러의 난 (1381)5.5. 알메이다 포위전 (1381)5.6. 브뤼헤 습격 (1382)5.7. 루즈베케 전투 (1382)5.8. 이프르 포위전 (1383)5.9. 리스본 포위전 (1384)5.10. 알주바호타 전투 (1385)
6. 금성의 기사들 (1386~1389)
6.1. 브레스트 포위전 (1386)6.2. 마게이트 해전 (1387)6.3. 래드콧 다리 전투 (1387)6.4. 오터번 전투 (1388)6.5. 리처드 2세의 역습 (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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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용병시대의 서막 (1360~1365)

"우리는 들과 강의 주인이 되었고, 그곳에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평화조약이 맺어졌고, 조약의 내용에 의하면 모든 중장병과 자유부대는 전쟁 기간 동안 점령한 성과 요새들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대장 아래 종군하는 수많은 가난한 부대원들이 한데 뭉쳤고, 앞으로의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왕들은 전쟁을 관뒀지만, 우리는 전쟁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우리는 부르고뉴로 행군했습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1.1. 퐁 생테스프리 포위전 (1361)

파일:The Tard-Venus pillage Grammont in 1362.jpg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 북부에는 잉글랜드, 가스코뉴, 에스파냐, 나바라, 독일, 스코틀랜드 등 온갖 지역에서 몰려온 자유계약 용병들이 프랑스의 마을과 요새를 점거하고 주민들로부터 보호비를 갈취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자유로운 군대(free company)라 불렀지만, 프랑스인들은 그들이 약탈을 목적으로 정규 군대를 따라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뒤따라온 부대(tards-venus), 또는 소규모 분견대의 부대원들을 의미하는 루티에(routiers)라고 불렀다. 모두 결국 용병대라는 뜻이지만, 루티에는 특히 백년전쟁 중기에 프랑스에서 악명을 떨친 잉글랜드 용병단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였다. 앞에서 말했듯 다양한 지역 출신들이 모였지만 잉글랜드인이나 가스코뉴인들이 주축을 이뤘고 북부 프랑스인들은 가스코뉴인들도 그냥 잉글랜드인이라고 불렀으므로 루티에는 잉글랜드 용병의 동의어로 쓰였다.

하지만 1360년 10월, 브레티니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이들은 모두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시에 프랑스인들로부터 돈을 뜯어낼 명분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들은 얌전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랑드 콩파니(Grandes Compagnies)라고 불리는 대군세를 이루어 남동쪽으로 행군하며 프랑스 동부를 휩쓸기 시작했다.

1360년 12월, 그랑드 콩파니는 프랑스의 변경 지방인 프로방스를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먼저 론 강의 요충지인 퐁 생테스프리를 점령한 뒤 론 강의 수운을 통제하면서 프로방스와 아비뇽 교황청으로의 습격을 개시했다.

1361년 3월, 마침내 교황에게서까지 보호비를 뜯어내는 업적을 달성한 다음, 유명한 잉글랜드인 용병 존 호크우드를 비롯한 군대의 절반 가량은 아비뇽의 교황에게 고용돼 이탈리아 등지에서 교황의 적들과 싸우게 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프랑스 각지로 흩어져서 이전처럼 계속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프랑스 농촌과 소도시 주민들의 미래는 여전히 암울해보였다.

8월 11일, 존 챈더스가 뱅생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챈더스는 에드워드 3세의 대리인으로서 브레티니 조약으로 양도받은 영토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주장하고 인정받았다. 지역의 주요 도시들과 요새들의 양도 과정은 9월부터 시작돼 1362년 2월에 마무리되었다. 절차는 일반적으로 도시 대표들이 국왕 장 2세의 충성 전환 명령서를 읽고, 에드워드의 대리인들이 도시에 들어가 시민들로부터 선서를 받고, 도시 특권을 확인하고, 세네샬을 임명하고, 주둔군을 입성시키고, 에드워드 3세의 문장을 성문에 그리는 식이었다.

잉글랜드인과 가스코뉴인 용병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주권자의 영토를 존중했으며, 잉글랜드에 양도된 지역에서 이들 용병 도적들의 파괴와 약탈은 대부분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프랑스 동부와 북부가 겪는 고통은 더 커졌다.

1.2. 브리네 전투 (1362)

파일:Brigniais136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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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왕 장 2세에 의해 부르고뉴 총독으로 임명된 장 2세 드 멜룬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용병 도적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약 4000명 규모의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1362년 4월, 브리네 전투에서 프랑스 정부군이 용병들에게 대패했고 멜룬 본신과 아르노 드 세르볼 등 주요 지휘관들이 포로로 잡혔다.

브리네 전투의 소식은 동부 프랑스 전역에 공황을 퍼트렸지만, 전투의 정치적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보급 문제와 내분 때문에 용병들은 승리를 활용하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프랑스 정부와 짧은 휴전을 체결한 뒤 일부는 오베르뉴로, 다른 일부는 북쪽의 부르고뉴로 향해서 성벽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농촌과 소도시들을 본격적으로 약탈하기 시작했다.

7월 23일, 장 2세 드 멜룬은 카스티야의 왕위 주장자인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와 협상한 끝에 용병들을 카스티야 내전에 참전시켜 새 일자리를 마련해준다는 내용의 클레르몽 조약을 체결했다. 그에 따라 용병들은 도적질을 그만두고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지만, 마침 피레네 인근에서 아르마냑 백작과 푸아 백작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많은 수가 이베리아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들 백작들의 싸움에 고용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용병들이 랑그독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클레르몽 조약은 결국 용병 도적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9월, 장 왕이 넷째 아들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임명했다.

12월, 푸아 백작 가스통 3세는 잉글랜드 용병들의 활약 덕에 로낙 전투에서 아르마냑 백작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1.3. 조세 개혁 (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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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3년 7월, 베셔렐에서의 대치 도중 샤를 드 블루아와 장 드 몽포르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에 따르면 블루아는 낭트 시를 포함한 북동부를 가지고, 몽포르는 남부와 서부를 가질 예정이었다. 공작 칭호를 사용할 권리에 대해서는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에게 중재를 요청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샤를 드 블루아의 아내인 잔 드 팡티에브르의 거부로 협정은 무효가 된다. 이 결정은 전쟁에 지친 브르타뉴의 많은 귀족들이 블루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9월, 유명한 용병대장 세갱 드 바드폴을 중심으로 1만명 규모의 새로운 그랑드 콩파니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브리우드 시를 점령해 거점으로 삼은 뒤 주변 지역으로 약탈을 감행해 오베르뉴를 철저히 황폐화시켰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워서 용병 도적들이 얼어붙은 센강을 건너 파리 교외를 약탈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군대는 주요 도시들을 간신히 지키고 있었고, 이들 모두를 막기에는 병력이 부족했다.

11월, 아미앵에서 소집된 삼부회는 그랑드 콩파니라는 국가적인 재앙에 맞서 '왕국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6000명의 중장병을 상시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의 몫을 부담하며(le fort portant le foible) 가구 소득에 따라 1프랑에서 9프랑까지 평균 3프랑의 화로세(fouage)를 부과한다는 데 동의했다. 신민소집 대신 가구세를 징수해 상비군을 운용한다는 계획은 크레시 전투 직후 파리 삼부회에서 잉글랜드 문제의 최종 해결책으로 처음 제안되었으나 흑사병으로 중단되었고, 푸아티에 전투 직전 장 2세가 다시 시도했으나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신으로 실패한 개혁이었다. 원래는 장 2세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징수되기 시작한 상품세와 소금세 역시 정기적인 세금으로 정착돼 정부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1.4. 코슈렐 전투 (1364)

파일:1364_Cocherel-Charles-Philippe-Larivier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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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4년 1월, 나바라의 카를로스가 아쟁에서 흑태자를 만나 군사 통행권과 용병 고용권을 얻어냈다.

2월 24일, 샤를 드 블루아와 장 드 몽포르가 흑태자에게 브르타뉴 내전에 대한 중재를 요청했다.

4월 8일, 장 2세가 런던에서 병사했다.

같은 시기, 오베르뉴의 삼부회는 결국 세갱 드 바드폴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4만 피오리노와 국왕의 사면과 교황의 면죄를 대가로 용병들이 모든 포로를 석방하고 브리우드를 떠나기로 합의가 이루어진다.

같은 시기, 렌 공방전에서의 전공으로 명성을 얻은 기사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북부 프랑스에서 나바라파의 주요 거점인 망트, 브뢰퇴유, 묄랑, 베르농을 점령했다. 이로써 센강의 수운과 노르망디의 요충지 대부분이 왕세자 샤를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카를로스의 동맹인 장 3세 드 그레일리는 이 소식을 듣고 에브뢰에서 군사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5월 16일, 장 3세 드 그레일리가 지휘하는 나바라파 군대가 코슈렐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프랑스군과 결전을 벌였다. 게클랭의 군대는 우선 거짓 후퇴로 나바라파 군대를 유인했다. 전투 초반에는 나바라파가 유리해 보였지만 게클랭은 예비대를 활용해 전세를 뒤집었다. 장 3세 드 그레일리는 포로로 잡혔고 그의 군대 대부분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부르고뉴 공령을 차지하고 프랑스 왕위를 찬탈하겠다는 카를로스 2세의 야심은 그렇게 좌절되었다.

코슈렐 전투의 승전 소식이 랭스에 전해진 다음날인 5월 18일, 왕세자 샤를이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프랑스의 샤를 5세로 명명되었다. 대관식 후 샤를 5세는 동생 필리프에게 부르고뉴 공작위를 공식적으로 수여한다.

6월, 프랑스군이 북부 프랑스의 나바라파와 용병 도적단 거점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노르망디로 진격해 코탕탱 반도의 요충지인 발로뉴와 바르플뢰르를 점령했다. 동시에 장 드 부시코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파리와 루아르 강 사이의 도적단 거점들을 청소했다.

1.5. 오레 전투 (1364)

파일:오레 전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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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4년 7월, 휴전이 끝난 뒤 장 드 몽포르는 존 챈더스를 포함한 잉글랜드 용병들과 나바라파 군대로 구성된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블루아 파벌의 몇 안 되는 거점 중 하나인 오레를 포위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이에 맞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프랑스군과 용병들로 4000여 명의 군대를 모았다.

9월 29일, 몽포르파와 블루아파가 오레에서 결전을 벌였다. 맨앳암즈들의 발전된 무장과 전술 때문에 전초전에서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사격은 이전처럼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말에서 내린 채 도보로 진격한 맨앳암즈들 간의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결국 블루아파의 진형이 먼저 붕괴되었고, 샤를 드 블루아는 혼전 중에 전사했으며 게클랭은 포로로 잡혔다. 전투 이후 블루아파는 전부 몽포르에게 항복했으며 잔 드 팡티에브르는 앙주로 도망쳤다.

한편 이 전투에서 게클랭을 비롯한 프랑스의 주요 지휘관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면서 한동안 프랑스의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나바라의 카를로스는 이 기회를 노려 발로뉴를 탈환하고 코탕탱 반도에서 나바라파의 통제력을 다시 강화했다.

11월 1일, 세갱 드 바드폴과 용병 도적단이 리옹 인근의 요충지 앙스를 점령했다. 이에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세갱 드 바드폴과 그의 동료들을 파문한다.

같은 시기, 샤를 5세는 동생인 앙주 공작 루이를 랑그독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앙주 공작 루이는 아라곤 왕국의 페로 4세의 시종장 프란시스코 데 페레요스와 비공식적인 회담을 열고 잉글랜드와 나바라에 맞서는 프랑스와 아라곤의 동맹, 그리고 카스티야 내전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을 논의한다.

1.6. 아비뇽 포위전 (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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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5년 3월, 나바라 왕국에 맞서 프랑스와 아라곤의 동맹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바로 2개월 뒤 샤를 5세가 나바라의 카를로스와 화해하면서 이 조약은 무의미해졌다.

이후 페레요스는 프랑스의 용병 도적단을 카스티야 내전에 보내서 처리하는 사업을 다시 시도했다. 샤를 5세, 앙주 공작 루이,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이 계획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면서 상당한 자금을 지원했다. 원정대의 지휘관으로서 용병들을 이베리아로 끌고 가는 임무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맡게 되었다.

4월 12일, 게랑드 조약에 따라 장 드 몽포르가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되었다. 그 대가로 잔 드 팡티에브르는 리모주를 비롯한 영지와 재산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로써 브르타뉴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5월, 나바라의 카를로스가 샤를 5세에게 다시 항복하고 프랑스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나바라파는 오레 전투로 얻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결국 불리한 전황을 뒤집지 못했다.

9월, 베르트랑 뒤 게틀랭이 지휘하는 1만여 명의 이베리아 원정대가 론 강을 따라 남하했다.

11월, 이베리아 원정대가 아비뇽을 포위했다. 이제 베르트랑 뒤 게틀랭의 부하가 된 전직 도적단 두목들은 아비뇽을 약탈하겠다고 위협해 교황 우르바노 5세에게서 면죄와 보호비를 뜯어냈다.

12월, 이베리아 원정대가 아라곤에 도착했다.

2. 카스티야 내전 (1366~1369)

이제 여러분이 듣게 될 것처럼, 여기서부터는 연민, 사랑, 그리고 정의가 함께 어울리는 고귀하고 인상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챈더스 해럴드, '흑태자의 삶'

2.1. 칼라오라 포위전 (1366)

파일:hyw13561.png

1366년 1월 1일, 아라곤의 페로 4세가 바르셀로나 왕궁에서 프랑스군 지휘관들을 위한 대규모 연회를 열었다. 이 연회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국왕 옆의 상석에 앉았다.

2월 13일, 프랑스군이 사라고사에 도착했다. 이에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는 프랑스군이 소리아를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병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와 비밀 협정을 맺고 나바라 영토를 통해 행군해 카스티야군의 방어선을 우회했다. 이에 페드로 1세는 부르고스를 버리고 톨레도로 후퇴한다.

3월 10일, 프랑스군이 칼라오라를 점령했다.

3월 16일, 프랑스군이 부르고스에 입성했고, 그곳에서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가 카스티야 왕으로 선포되었다. 페드로 1세는 톨레도에서 군대를 다시 집결시키려 했지만 실패하고 포르투갈로 망명한다.

7월 경, 흑태자는 페드로 1세와 동맹을 맺고 이베리아 원정을 위한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2.2. 나헤라 전투 (1367)

파일:Battle_najera_froissar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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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년 1월,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는 예산 부족으로 대부분의 용병대와 계약을 종료했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브르타뉴 출신 맨앳암즈 1000여 명과, 휴 칼블리가 이끄는 약 400명의 잉글랜드 용병들만 남았다. 그러자 막강한 군사력에 억압되었을 뿐인 카스티야인들은 다시 페드로를 지지하며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1월 중순, 엔리케는 산타크루즈 데 캄페소에서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와 만나 흑태자에 맞서 피레네 산맥의 통로를 차단하는 대가로 로그로뇨 시를 양도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엔리케는 이 계획에 자신감을 가지고 휴 칼블리와의 계약을 종료했다.

흑태자는 칼블리와 잉글랜드 용병들에게 나바라를 침공하라고 명령하여 주요 도시들을 신속히 점령했다. 그러자 나바라의 카를로스는 곧바로 편을 바꿔서 피레네 산맥의 통로를 열기로 합의한다.

2월 14일, 흑태자의 군대가 나바라 왕국에 진입했다. 이에 샤를 5세는 엔리케에게 서신을 보내 잉글랜드군과의 야전을 피하면서 지연 전술을 쓰라고 조언했고, 처음에 엔리케는 이 조언에 따랐다.

3월 말, 잉글랜드군이 카스티야의 수도 부르고스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엔리케는 흑태자가 로그로뇨를 통해 동쪽에서 접근할 것을 예상하고 도시 서쪽에 군대를 배치했다. 흑태자는 북쪽으로 행군해 방어선을 우회하려 했지만, 험한 지형과 카스티야군의 효과적인 대응으로 비토리아에서 따라잡혔다. 흑태자가 로그로뇨로 후퇴하자 엔리케는 다시 추격해 나헤라 시 근처에 진을 쳤다.

4월 1일, 엔리케는 지금까지 효과적이었던 방어 전략을 포기하고 나헤라 강을 건너 전투를 준비했다. 여전히 엔리케의 왕권을 지탱하는 기반은 두려움이었고, 그가 잉글랜드군과의 결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은 많은 지역들이 페드로 1세에게 귀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 3일 새벽, 흑태자는 카스티야군이 예상했던 것처럼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대신, 북쪽의 길고 가파른 산등성이를 돌아서 몰래 행군했다. 동이 트자 마자 잉글랜드군이 카스티야군 진영의 왼쪽 측면에 갑자기 나타나 기습을 걸었고, 진영 전체에 공황이 퍼져 나갔다.

사기가 낮은 경기병들과 보병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게클랭은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프랑스군과 카스티야 기사들을 이끌고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곤트의 존과 챈더스가 지휘하는 중군은 이 돌격을 간신히 막아냈고, 잉글랜드군 양익이 엔리케와 그의 동생이 지휘하는 경기병대를 간단히 물리친 뒤 프랑스군을 포위해 분쇄하기 시작했다. 도망친 카스티야군 역시 대부분 좁은 다리를 건너는 도중 추격군에게 따라잡혀 죽었다. 프랑스군 지휘관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아르눌 도드랭은 포로로 잡혔고,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는 아라곤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프랑스로 도망쳤다.

그러나 곧바로 흑태자와 페드로 1세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흑태자는 페드로가 카스티야인 포로들을 반역죄로 처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편 페드로는 흑태자에게 약속한 40만 파운드에 달하는 보상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맹은 파기되었고 반란군들은 풀려났으며 페드로 1세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8월, 앙주 공작 루이는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와 다시 비밀리에 만나 페드로 1세를 축출하고 남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9월 경, 엔리케는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카스티야로 돌아와 페드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불만을 가진 귀족들과 도시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같은 시기, 흑태자는 생 장 피에 드 포르에서 이베리아 원정군을 해산했다. 수천 명의 용병들이 또다시 그랑드 콩파니를 형성하고 프랑스 영토에 침입해 케르시, 루에르그, 오베르뉴, 그리고 부르고뉴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부르고뉴의 도시들이 청야전술로 강경하게 대응하자 그랑드 콩파니는 가스코뉴로 퇴각한 뒤 해산된다.

10월 8일,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가 부르고스에 입성했다. 이후 엔리케의 반란군이 갈리시아와 아라곤 국경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했다.

2.3. 톨레도 포위전 (1368)

파일:Edward_the_Black_Prince.jpg

1368년 1월, 페드로 1세에게 약속된 보상을 받지 못한 흑태자는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다. 이에 흑태자는 아키텐 삼부회의 반대를 무시하고 가스코뉴 지방에 화로세를 도입한다.

흑태자는 건강 악화와 재정적 압박 때문에 지나치게 성급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카스티야 원정 중에 걸린 것으로 추정되는 말라리아와 유사한 질병은 그의 인내심과 정치적 능력에 영향을 주었다. 한 예로, 아르마냑 백작은 자신의 재정적 어려움을 이유로 화로세 면제를 요청하기 위해 기사들을 파견했으나 흑태자는 세금을 납부하거나 반역죄로 죽으라는 강경한 최후통첩으로 대응했다. 흑태자의 고문인 존 챈더스 역시 이 정책에 반대하다가 결국 그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4월 말, 엔리케의 반란군이 톨레도를 포위했다.

5월 4일, 파리 시에서 샤를 5세의 친척인 마르그리트 드 부르봉과 가스코뉴의 유력 귀족인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의 결혼식이 열렸다. 이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한 아르마냑 백작은 흑태자의 화로세 강요에 대한 항소를 '아키텐 공국의 주권자인 프랑스 왕'에게 비밀리에 제출했다. 이 항소를 받아들이는 것은 프랑스 왕 스스로 아키텐의 주권을 포기하기로 약속한 브레티니-칼레 조약을 부인하는 것이며 곧 전쟁을 의미했다.

6월 30일, 프랑스 추밀원 회의에서 아르마냑 백작의 항소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곧 샤를 5세는 아르마냑 백작 등 가스코뉴의 유력 귀족들과 비밀리에 협정을 맺고 연금과 토지를 수여하기 시작했다.

한편 흑태자는 아르마냑 백작이 항소를 제출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 의미를 이해했다. 8월 내내 흑태자의 대리인들은 체셔와 북웨일즈의 영지에서 맨앳암즈와 궁수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11월 16일, 샤를 5세는 흑태자에 대한 공식 소환장을 발부했다. 이에 따르면 흑태자는 1369년 5월 2일까지 파리 고등법원에 출석해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소환장을 받은 흑태자는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만약 주님께서 내게 생명과 건강을 주신다면 나는 이 소환에 응할 것이지만, 대신 머리에 투구를 쓰고 군대를 이끌고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소환장을 전달한 사절단은 이후 툴루즈 인근에서 흑태자의 세네샬에 의해 체포된 뒤 모두 행방불명되었다.

11월 21일, 톨레도 포위군 진영에서 진행된 협상 끝에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와 샤를 5세의 동맹이 체결되었다.

2.4. 몬티엘 전투 (1369)

파일:Battle_of_Montiel 136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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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9년 2월 초,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지휘하는 600여 명의 기병대가 카스티야에 도착했다.

3월 14일, 톨레도의 포위를 풀기 위해 진군해 온 페드로 1세의 군대가 몬티엘 전투에서 패배하고 흩어졌다. 페드로 1세는 탈출을 시도했으나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에게 붙잡혀 그의 손으로 살해당했다.

3. 프랑스의 반격 (1369~1375)

진실의 여왕이 물었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서 그대들이 만든 과부, 거지, 불구자, 고아들이 얼마나 많은지, 폐허로 만든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누가 셀 수나 있을까? 비록 주님의 뜻에 따라 스코틀랜드 왕을 포로로 잡고 크레시와 푸아티에의 끔찍한 전장에서 승리했지만, 그 결과 그대들은 지금 이 두 왕국의 백 분의 일에 불과한 영토만을 차지하고 있다네."
필리프 드 메지에르, '늙은 순례자의 꿈'

3.1. 로데즈 포위전 (1369)

파일:hyw13693.png

1369년 1월 초, 프랑스군 분견대가 주민들의 호응으로 루에르그의 요충지 나작 시를 기습해 점령했다.

1월 9일, 아르마냑 백작의 군대가 프랑스군의 공세에 호응해 루에르그 변경의 요충지 라 록 발세르그를 기습해 점령한 뒤 카스텔마리 성을 포위했다.

1월 16일, 프랑스군 분견대가 몽테귀 드 케르시 인근에서 잉글랜드군을 기습해 케르시의 세네샬과 몽토방의 수비대장을 포로로 잡았다.

같은 시기, 카오르의 주민들이 싸우지 않고 프랑스군에게 성문을 열었다.

1월 말, 툴루즈의 세네샬 레몽 드 라바스탱이 지휘하는 프랑스 주력군 4000여 명이 알비 인근에 집결했다.

같은 시기, 샤를 5세의 사절단이 런던에 도착했다. 이들은 에드워드 3세가 후원한 용병 도적단과 나바라파가 프랑스 전역에서 약탈을 벌이며 농촌을 황폐화하고 장 2세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한 세금 징수를 방해한 사실을 지적하며, 에드워드가 먼저 조약을 어겼으므로 브레티니 조약은 무효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그동안의 사소한 분쟁들에 대해서는 타협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면서, 신의를 배반한 것은 오히려 프랑스 국왕이며 그 때문에 전쟁이 다시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2월 초, 프랑스 주력군이 아르마냑 백작의 군대와 합류한 뒤 알비에서 출정해 루에르그의 주도 로데즈를 점령하고 지휘본부를 세웠다.

이후 3월 중순까지 루에르그, 케르시, 아제네 지방에서 총 921곳의 도시 공동체와 귀족들이 잉글랜드 왕 대신 프랑스 왕을 주권자로 인정했다. 그동안 흑태자는 계속 병상에 누워 있었고, 행정은 토머스 펠턴에게, 군사 지휘는 휴 칼블리와 존 챈더스에게 위임했다.

3월 20일, 몽토방을 방어하는 데 필수적인 후방 기지인 생 니콜라와 뫼삭에 대한 방비를 마친 챈더스는 툴루즈 교외까지 진격하면서 근처의 모든 지역을 불태웠다. 하지만 앙주 공작은 이를 무시하고 주력군 4000여 명을 이끌고 몽토방으로 진군해 리알빌을 포위했다.

4월 초, 2주 동안의 치열한 포위공격 끝에 리알빌이 점령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 몽토방으로 귀환한 챈더스가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의 후방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에 앙주 공작은 몽토방 공략을 포기하고 더 쉬운 거점들을 노리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한다.

4월 중순,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얼마 전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된 뒤라벨을 포위했다. 곧 몽토방에서 북쪽으로 올라온 챈더스의 군대가 합류했다. 하지만 며칠 내내 내린 폭우로 포위군의 사기가 추락했고, 용병 출신의 수비군을 매수한다는 최후의 시도마저 실패하자 잉글랜드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한다.

4월 29일, 프랑스군 궁병대장 위그 드 샤티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아브빌을 기습해 점령했다. 5월 5일에는 르 크로투아를 점령한다.

5월 9일, 샤를 5세는 프랑스의 고위 성직자와 대귀족들, 도시 대표들과 법률가들이 모인 파리 고등법원 대회의실에서 아키텐 공작 에드워드가 소환에 불응했음을 선언하고 공작위 몰수를 선포했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이 주민들의 호응으로 로 강의 요충지 빌프랑슈와 도르도뉴 강의 요충지 돔을 점령했다. 챈더스는 곧바로 돔을 기습해서 탈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5월 15일, 챈더스는 장 3세 드 그레일리의 부대와 합류해 카오르 시를 기습해서 탈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로버트 놀스의 부대와 합류하고 코스 드 그라마로 퇴각한 뒤 곧바로 피쟉을 기습했지만 또 실패했다. 결국 루에르그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은 빠른 전략적 판단과 기동력을 갖췄지만 전력 자체가 절대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3.2. 라 로슈 포제 습격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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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9년 5월 중순, 투르에 주둔한 프랑스군이 푸아투 변경의 요충지 라 로슈 포제를 기습해 점령했다. 이곳은 이후 샤텔레로와 푸아티에로의 공세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되었다. 한편 북쪽 국경에서는 앙제의 수비대장 장 3세 드 뷔에이와 소뮈르의 수비대장 장 드 커르뢰가 지휘하는 습격대가 푸아투 서부 해안까지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5월 말, 사이먼 벌리가 지휘하는 아키텐 공국의 주력군이 푸아티에 서쪽에서 장 3세 드 뷔에이와 장 드 커르뢰가 이끄는 습격대의 매복에 걸려 전멸했다. 이 소식은 아키텐 전역에 공황을 퍼트렸고, 푸아투를 방어하기 위해 존 챈더스가 케르시와 루에르그 지방의 방어를 포기하고 돌아와 흑태자의 친구인 제임스 오들리, 펨브로크 백작 존, 그리고 흑태자의 동생인 케임브리지 백작 에드먼드의 부대와 합류했다.

6월 초, 챈더스가 떠난 사이 프랑스군이 몽토방을 포위했다. 휴 칼블리가 몽토방을 구원하기 위해 진격했지만 몽토방의 주민들은 곧바로 항복하고 성문을 열었다. 이에 칼블리는 아쟁으로 철수한다.

6월 11일, 에드워드 3세는 의회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 국왕 칭호와 프랑스 왕실의 문장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곤트의 존은 비밀리에 칼레로 이동했고, 대규모 함대가 북부 프랑스 침공을 준비했다.

6월 중순, 제임스 오들리가 푸아티에에 지휘본부를 세웠다. 그리고 강을 건너 동쪽으로 진격해 르 블랑을 포위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북쪽으로 행군해 라 로슈 포제의 후방 기지인 르 수동 성을 공격해 점령했다.

6월 19일, 헨트 시에서 플랑드르 백작 루이 드 말의 딸 마르그리트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의 결혼식이 열렸다.

6월 22일, 콩페이르의 주민들이 싸우지 않고 프랑스군에게 항복했다. 잉글랜드 주둔군은 성채로 후퇴해 저항을 계속했다.

6월 26일, 토머스 웨튼홀이 이끄는 구원군이 도착해 콩페이르 시를 포위했다.

6월 말, 케임브리지 백작이 푸아투 북부의 요충지 라 로슈 쉬르 용을 포위했다.

7월 중순, 제임스 오들리의 부대가 라 로슈 쉬르 용 포위군에 합류했다. 도시의 수비대는 얼마 뒤 항복한다.

7월 16일, 프랑스의 지원군이 콩페이르에 도착해 도시를 포위한 잉글랜드군을 역으로 포위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잉글랜드군은 큰 피해를 입고 미요로 퇴각했다. 그러나 토머스 웨튼홀은 몇 주 뒤 습격대를 이끌고 게릴라전을 벌이던 중 소규모 전투에서 전사한다.

8월 중순, 아모리 드 크라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샤토공티에를 탈환했다.

같은 시기, 펨브로크 백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루아르 강의 요충지 퐁 드 세를 점령했다. 이는 프랑스 습격대가 푸아투 지역에 침입하는 것을 이전보다 더 어렵게 만들었다.

같은 시기, 가스코뉴 출신 용병대장 베르나르 드 라 살이 지휘하는 습격대 300여 명이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의 성 벨페르슈를 기습해 점령하고 샤를 5세의 장모이자 부르봉 공작의 어머니인 이자벨 드 발루아를 포로로 잡았다. 이들은 농민으로 변장해 문지기를 속여 성문을 열게 하고, 소수의 주둔군을 신속히 제압한 뒤 성을 점령했다. 이후 이들은 리무쟁 북부의 요충지 라 수테렌의 대규모 용병 부대와 협력하면서 프랑스군의 후방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3.3. 아르플뢰르 포위전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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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9년 8월 1일, 곤트의 존과 헤리퍼드 백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4000여 명이 칼레에서 출정했다. 이들은 아르드르를 포위한 프랑스군을 물리친 뒤, 오드릭 성을 탈환하고 프랑스 영토로 남하해 테루완 시를 약탈했다.

8월 19일,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가 이끄는 1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에스당을 거쳐 칼레로 진격했다. 이에 맞서 잉글랜드군은 발랭종 인근의 가파른 언덕 위에 해자를 파서 야전 진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의 형 샤를 5세와 장인인 플랑드르 백작 루이 드 말은 잉글랜드군과의 야전을 피할 것을 권장했고,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다.

9월 12일, 에드워드 3세가 첩보를 통해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준비해둔 잉글랜드 지원군 2000여 명이 워릭 백작의 지휘하에 칼레에 상륙했다. 그러나 습지에서의 기나긴 대치로 사기가 저하된 프랑스군은 에스당으로 퇴각했고, 잉글랜드군은 근처의 모든 것을 불태우며 아르플뢰르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칼레 국경의 사령관인 생폴 백작은 소수의 병력으로 게릴라전을 벌이며 잉글랜드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었다.

10월 1일, 43척의 습격 함대가 라이에서 출항해 노르망디 해안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군이 아르플뢰르를 포위했다. 잉글랜드군은 곧바로 성벽을 공격했지만 이틀만에 수비군의 화살 5만 대가 소모되는 치열한 전투 끝에 격퇴되었다.

10월 말, 아르플뢰르 포위군 진영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자 잉글랜드군은 포위 공격을 중단하고 퇴각했다. 워릭 백작은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칼레에서 병사했다.

3.4. 루삭 다리 전투 (1369)

파일:Sir John Chandos was carried.jpg

1369년 12월 7일, 샤를 5세의 후원을 받고 있는 웨일즈 귀족 오와인 로고크가 웨일즈에 가서 반란을 선동하는 임무를 가지고 아르플뢰르에서 출항했다. 그러나 겨울 폭풍에 휩쓸려 곧 프랑스로 돌아왔다. 곧 이 사실을 알게 된 잉글랜드 정부는 오와인의 토지를 반역죄로 몰수하고 웨일즈에 있는 협력자들을 체포했다.

12월 말, 미요 시의 주민들이 프랑스에 항복했다. 잉글랜드 주둔군은 협상 끝에 안전을 보장받고 철수했다. 같은 시기 카스텔마리의 수비대도 같은 조건으로 성을 버리고 철수했다.

같은 시기, 장 드 뷔에이가 지휘하는 600여 명의 프랑스 맨앳암즈가 퍼농 인근을 지나는 펨브로크 백작의 부대를 기습했다. 펨브로크 백작은 100여 명의 병력과 수백 마리의 군마를 잃고 도망쳤다.

12월의 마지막 날, 존 챈더스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루삭 다리를 지나는 프랑스 습격대를 기습해 포위했다. 전투는 잉글랜드군의 대승으로 끝났지만, 흑태자의 가장 유능한 부관이자 정치 고문인 챈더스가 백병전 도중 칼에 얼굴을 찔려 전사해버렸다.

3.5. 벨페르슈 포위전 (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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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년 1월, 부르봉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 맨앳암즈 1500명과 쇠뇌수 300명이 벨페르슈를 포위했다.

2월 중순, 협상 끝에 아쟁 시를 비롯한 아제네 지방의 주요 도시들이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아제네를 포기하고 에귀용과 베르주락에 모든 자원을 집중한 방어선을 세운다.

2월 28일, 협상 끝에 페리괴 시가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이 시점에서 잉글랜드는 페리고르 산악 지방 대부분과, 가론 강 상류와 로 강의 요충지를 전부 잃었다. 챈더스가 남기고 간 수비대가 여전히 저항하고 있는 뫼삭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같은 시기, 협상 끝에 바자 시가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2월 말, 케임브리지 백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벨페르슈에 도착해 포위군 진영을 역으로 포위했다.

3월 중순, 케임브리지 백작은 프랑스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부르봉 공작의 어머니를 미끼로 내보였지만 프랑스군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에 벨페르슈 수비군은 성에 불을 지르고 탈출해 케임브리지 백작의 군대와 합류한다.

3.6. 총사령관 임명 (1370)

파일:Karel5_Guesclin_Fouquet.jpg

1370년 4월 중순, 샤를 5세와 그의 세 형제인 앙주 공작, 부르고뉴 공작, 베리 공작, 그리고 왕의 처남인 부르봉 공작이 파리 시에 모여 부활절을 기념하고 전략적 상황을 점검했다.

앙주 공작은 가론 강을 따라 남동쪽에서 아키텐을 침공해 라 레올과 베르주락으로 진격할 것이고, 베리 공작은 리무쟁을 지나서 공국의 심장부로 침투할 것이었다. 이 두 날개는 공국의 수도인 앙굴렘에서 합류해 흑태자를 포위할 계획이었다. 추가로 무통 원수의 지휘하에 분견대가 북쪽에서 공세를 가하는 것과,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총사령관직에 임명하기로 결정되었다.

6월 초,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의 외교 대사들이 런던에 도착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의 기대와 달리 카를로스는 잉글랜드 원정군이 코탱탱에 오래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샤를 5세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심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프랑스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로버트 놀스의 원정군의 상륙 지점을 페이 드 꼬로 변경한다. 그에 따라 함대의 집결지가 솔렌트에서 윈첼시로 변경되면서 원정이 1개월 지연되었다.

3.7. 리모주 포위전 (1370)

파일:hyw13703.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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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년 7월 초, 프랑스군 습격대가 비엔 강의 요충지인 샤텔레로를 기습해 점령했다. 이는 푸아투 지방의 방어에 심한 타격을 입혔고, 고작 25km 떨어진 푸아티에의 안전에 대한 많은 우려를 일으켰다.

같은 시기, 도르도뉴 강의 요충지인 리뫼이 시와 샤를라 성을 포함한 십여 곳의 거점이 프랑스에 항복했다.

7월 23일, 뫼삭의 주둔군이 결국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8월 9일, 로버트 놀스가 지휘하는 맨앳암즈 2000명, 승마궁수 2000명, 종복 2000여 명 규모의 잉글랜드군이 칼레에서 출정했다.

8월 중순, 앙주 공작과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페리괴에서 출정해 각각 브랑돔과 몽퐁을 점령했다. 이 공세의 목적은 보르도와 앙굴렘 사이의 연락을 차단하고 곧 베리 공작이 리무쟁 지방에서 벌일 공세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이 도르도뉴 강의 요충지 베르주락과 라린드를 기습해 점령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8월 21일, 베리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리무쟁 지방의 주도 리모주 시를 포위했다.

8월 24일, 리모주 주교 장 드 크로를 포함한 신시가지(cite)의 시민들은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하지만 구시가지(chateau)의 주민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계속 저항했다. 이에 장기간의 포위공격을 준비하지 못했던 베리 공작은 신시가지에 소규모 주둔군만 남기고 부르주로 퇴각한다.

같은 시기, 곤트의 존이 지휘하는 잉글랜드 지원군 3000여 명이 보르도에 상륙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공세를 중단하고 돌아가버려서 이들 역시 작전을 변경해야 했다. 곤트의 존과 흑태자는 싸우지 않고 적에게 항복한 리모주의 신시가지를 본보기로 징벌하기로 결정했다.

9월 중순, 잉글랜드군이 리모주를 포위했다. 곤트의 존은 신시가지 성벽 아래의 부드러운 석회암 기반에 땅굴을 파게 했다. 방어군이 역땅굴을 파면서 좁은 지하 공간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9월 19일, 잉글랜드군이 땅굴 지지대를 불태워 신시가지 성벽을 무너뜨렸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두 차례의 공격 끝에 주둔군을 몰아내고 시내에 진입했고, 무방비 상태인 주민들을 살육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희생자의 숫자는 기록에 따라 300명에서 3000명 사이로 다양하다. 리모주 주교를 비롯한 도시 유력자들도 대부분 포로로 잡혔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배상금 4만 에퀴를 지불해야 했다.

3.8. 퐁발랭 전투 (1370)

파일:1370Battle_of_Pontvallai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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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8월 9일 칼레에서 출정한 로버트 놀스의 군대는 수확기의 북부 프랑스 농촌을 휩쓸며 10만 프랑에 달하는 보호비를 뜯어내면서 천천히 남하하고 있었다.

1370년 9월 24일, 로버트 놀스가 지휘하는 맨앳암즈 2000명, 승마궁수 2000명, 종복 2000여 명 규모의 잉글랜드군이 파리 시 남동쪽 교외에 진을 치고 주변 마을과 경작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프랑스군이 결전에 나서지 않자 잉글랜드군은 다음날 파리를 떠났고, 두 개의 부대로 갈라져 하나는 서쪽으로 행군해 노르망디 남부를 약탈하고, 다른 하나는 보스 지방과 일드프랑스를 오가면서 프랑스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10월 2일,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오텔 생폴에서 열린 의식에서 샤를 5세로부터 프랑스군 총사령관의 검을 하사받았다.

10월 중순, 잉글랜드군이 재집결해서 방돔 방향으로 남하했다. 이곳은 만약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와의 동맹 협상이 잘 마무리될 경우 노르망디 북부 해안으로 진격할 수 있고, 아니면 푸아투의 잉글랜드군과 협력해서 남부 프랑스를 공격할 수도 있는 위치였다.

11월 초, 베르트랑 뒤 게클랭, 아르눌 도드랭,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알랑송 백작 등이 이끄는 프랑스군 4000여 명이 캉에 집결했다. 한편 방돔에서는 루이 드 상세르 원수의 지휘하에 1200여 명의 병력이 집결했다. 이들에게 앞뒤로 포위당할 것을 우려한 로버트 놀스는 근처의 잉글랜드 주둔지들에 지원을 요청했고, 소뮈르 서쪽의 생모르 수도원 주둔군 일부가 휴 칼블리의 지휘하에 합류했다. 또한 로버트 놀스는 국왕 대리인의 권한으로 부관인 앨런 벅스힐을 코탕탱 반도의 생소뵈르 성의 수비대장으로 임명하고 100명의 병력과 함께 파견했다.

하지만 앨런 벅스힐이 떠난 직후 로버트 놀스의 군대는 분열되었다. 신중한 지휘관인 놀스는 브르타뉴로 후퇴해서 겨울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부관들은 프랑스군과의 야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키텐 국경 지역을 약탈하며 겨울을 지내면서 프랑스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견해 모두 일리가 있었지만, 결국 어느쪽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잉글랜드군은 둘로 분열되었다.

12월 3일 저녁,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하루 50km 이상씩 이동하는 강행군 끝에 르망에 도착했다. 같은 시기 상세르 원수도 방돔에서 출정해 반대편에서 잉글랜드 진영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날 밤 잉글랜드군이 퐁발랭 인근에 흩어진 채 숙영 중이라는 정찰병의 보고를 받은 게클랭은 다시 밤새 강행군을 한 끝에 다음날 새벽 퐁발랭에 도착했다.

퐁발랭에 주둔한 잉글랜드군 중에서 토머스 그랜디슨의 부대는 완벽히 기습을 당했다. 백병전 도중 프랑스군 원수 아르눌 도드랭이 전사했지만 600명에서 1200명 사이로 추정되는 그랜디슨의 부대는 전부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게클랭은 곧바로 올리비에 드 클리송에게 브르타뉴로 향한 로버트 놀스를 추격하게 한 다음, 상세르 원수와 협력해 월터 피츠월터의 부대를 추격했다. 그랜디슨의 부대가 무너지는 사이 피츠월터는 남쪽의 수도원으로 퇴각해 있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이 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상세르 원수의 부대가 도착해 공격을 개시했고, 곧 게클랭의 부대가 합류하면서 방어군은 전멸했다.

그사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친 나머지 잔당들 역시 게클랭의 집요한 추격을 받았다. 게클랭은 캉에서 처음 출정한 이후 약 2주 동안 수백 킬로미터를 겨울 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행군했고, 그의 손을 피해 살아서 잉글랜드로 돌아간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퐁발랭 전투는 잉글랜드군 야전 무적 신화를 깨뜨렸으며, 갑옷을 잘 갖춰 입은 하마 맨앳암즈는 장궁병의 집중 사격을 버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프랑스 군인들에게 심어주었다. 또한 잉글랜드와 나바라의 동맹에 대한 희망도 끝이 났다. 카를로스 2세는 퐁발랭 전투 이후 잉글랜드 용병들을 해고하고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무렵, 흑태자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잉글랜드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에 따라 곤트의 존이 흑태자의 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3.9. 베셰렐 포위전 (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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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브르타뉴 공작 장 드 몽포르는 중립을 유지하고 잉글랜드의 종속국이 되는 것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샤를 5세는 몽포르를 항상 경계했으며, 몽포르가 잉글랜드와 연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샤를 5세는 1369년에 몽포르가 케임브리지 백작과 펨브로크 백작의 군대가 브르타뉴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한 일 때문에 몽포르의 의도를 잘못 판단했다.

게다가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올리비에 드 클리송을 비롯해 샤를 5세의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브르타뉴인들은 몽포르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아서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궁정인은 아니지만 남편 샤를 드 블루아가 죽은 이후로도 브르타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잔 드 팡티에브르 역시 몽포르에 대항했다.

브르타뉴 서부 해안의 잉글랜드 거점들은 게클랭과 클리송이 브르타뉴에 군사를 이끌고 들어올 명분을 제공함으로써 몽포르의 중립성을 약화시켰다. 퐁발랭 전투 이후 몽포르는 바푸아투 지방의 통제권을 잃었고, 그 지역은 사실상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1371년 4월, 올리비에 드 클리송이 브르타뉴 동부의 잉글랜드 주둔지 베셰렐을 포위했다.

8월 초,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추가 병력을 이끌고 베셰렐에 도착했다.

같은 시기, 토머스 퍼시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푸아투 침공을 위한 프랑스 습격대의 전진기지 중 하나인 몽콩투르를 포위했다.

9월 8일,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의 딸 콘스탄자와 결혼했다.

9월 중순, 몽콩투르가 점령되었다.

11월 14일, 리모주 시민들이 프랑스 왕에게 정식으로 항복했다. 이 시점에서 잉글랜드는 푸아투 지방과 가론 강, 도르도뉴 강의 수운을 통제하는 요충지들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방어를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다.

3.10. 라 로셸 해전 (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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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2년 1월 29일, 곤트의 존이 스스로를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으로 선언하고 카스티야 왕실의 문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카스티야에서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의 통치는 안정적이었지만 프랑스 용병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페드로의 딸 콘스탄자와 잉글랜드 왕실의 연합은 새로운 왕조에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트라스타마라 왕조와 프랑스 사이의 동맹을 강화했고, 해상에서의 잉글랜드의 우위를 위협하고 잉글랜드를 본토 방어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한편 브르타뉴에서 장 드 몽포르의 입지는 계속 약화되고 있었다. 베셰렐 포위전이 계속되었고, 몽포르는 에드워드 3세의 의도를 의심하며 잉글랜드군의 지원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2월 초, 결국 잉글랜드측의 양보가 이루어졌다. 에드워드 3세는 베셰렐 성의 통제권에 대한 요구를 포기했으며, 몽포르에게 리치먼드 영지를 돌려주고 빚을 탕감했다. 대신 몽포르는 잉글랜드의 프랑스 침공에 기병 1000명을 지원하기로 동의했다.

3월 1일, 긴에서 외교 회담이 열렸다. 프랑스 사절단은 실질적인 제안을 피하고 중재를 거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회담은 의미 있는 진전 없이 5주 후에 끝났다.

5월 10일, 웨일즈의 왕위 주장자 오와인 로고크가 파리에서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에서 그는 웨일즈의 군주들로부터 이어받은 자신의 혈통에 기반하여 웨일즈 왕국의 왕위를 주장했으며, 그의 조상들에 대한 잉글랜드 왕들의 부당한 행동을 비난했다. 샤를 5세는 오와인의 주장을 지지하며 그에게 30만 프랑을 투자했다.

5월 말, 오와인의 군대가 아르플뢰르에서 출항해 건지 섬을 습격했다. 습격대는 에드먼드 로즈가 이끄는 급조된 수비대를 격파했지만 코넷 성을 점령하지 못하고 함대로 퇴각한다.

같은 시기,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부르봉 공작은 시농을 거점으로 푸아투 지방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게클랭의 장기인 기동 전략으로 프랑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쇼비니 시를 제외한 모든 요충지를 통제할 수 있었다.

6월 초, 올리비에 드 클리송과 베리 공작이 푸아티에에 대한 공세를 시작해 몽콩투르 성을 점령했다.

6월 중순, 펨브로크 백작이 이끄는 함대가 플리머스에서 출항했다. 이 함대는 아키텐에 전쟁 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상당한 보물을 운반하며 라 로셸로 항해했다.

6월 22일, 잉글랜드 함대는 암브로지오 보카네그라가 지휘하는 카스티야 함대와 마주쳤다. 라 로셸 앞바다에서 발생한 해전에서 펨브로크의 함대는 우월한 전역을 가진 카스티야 함대에 의해 압도당했다. 펨브로크 백작은 포로가 되었고 보물은 전부 압수되었다.

이 라 로셸 해전은 아키텐의 잉글랜드 주둔군들에게 파멸적인 영향을 미쳤다. 오와인 로고크의 건지 섬 습격과 라 로셸 해전의 패배로 잉글랜드 본토 침공의 위협이 가시화됨에 따라, 에드워드 3세는 원래 브르타뉴를 통한 북부 프랑스 침공을 위해 소집된 함대를 영국해협을 순찰하고 프랑스 함대의 움직임을 정찰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3.11. 푸아티에 포위전 (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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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2년 7월 초, 앙주 공작은 잉글랜드의 혼란을 틈타 가론 강으로 진격해 에귀용을 비롯한 주요 거점들을 저항 없이 점령했다.

7월 10일, 잉글랜드는 포르투갈과 군사 동맹을 맺고 합동으로 카스티야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7월 중순, 베셰렐 주둔군이 조건부 항복을 협상했다는 소식이 웨스트민스터에 도착했다. 에드워드 3세는 다시 전략을 수정해, 베셰렐을 구하기 위해 브르타뉴에 군대를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다.

같은 시기, 부르봉 공작, 베르트랑 뒤 게클랭, 상세르 원수, 베리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베리 남부의 요충지 생세베르를 포위했다.

7월 30일, 프랑스군이 생세베르를 직접 공격해 점령했다.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주둔군은 대부분 처형되었다. 얼마 뒤 프랑스군이 쇼비니를 점령함으로써 비엔 강의 수운을 완전히 장악한다.

8월 7일, 푸아티에가 프랑스에 항복했다. 이 지역의 잉글랜드군은 투아르와 니오르로 후퇴한다.

8월 중순, 프랑스군이 오와인 로고크의 군대와 합류한 뒤 수비스를 포위했다. 장 3세 드 그레일리가 포위군 진영을 기습했지만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이후 푸아투 지방에서 잉글랜드군의 저항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9월 8일, 라 로셸의 주민들이 잉글랜드 주둔군을 속여서 모두 제압하고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거의 동시에 앙굴렘도 항복했다.

9월 19일, 수르주르와 생장덩젤리가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얼마 뒤, 상트의 수비대장 윌리엄 패링던은 프랑스군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밤에 그를 붙잡아 항복하도록 강요했다.

같은 시기, 앙주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가론 강의 요충지 르마 성을 점령했다.

3.12. 렌 포위전 (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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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2년 10월 중순, 베셰렐이 오랜 포위전 끝에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0월 30일,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브르타뉴를 침공해 렌을 포위했다. 진격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렌에 있었던 브르타뉴 공작부인은 도망치지 못하고 포로로 잡혔다. 부르봉 공작의 병사들은 공작부인의 짐을 수색해 브르타뉴 공작이 에드워드 3세와 체결한 비밀 조약의 사본을 발견했다.

이에 브르타뉴 공작은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잉글랜드군을 끌어들인 것은 인정하지만 올리비에 드 클리송 등 반항적인 귀족들에 맞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협상 끝에 브르타뉴 공작은 공국에서 잉글랜드인들을 추방하고 프랑스군은 렌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진다.

12월 1일, 투아르 시가 프랑스에 항복했다.

12월 11일,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세 공작들이 푸아투 전역에서 붙잡은 포로들을 데리고 파리로 돌아왔다. 루브르궁에서 성대한 환영식이 열렸다.

3.13. 브레스트 포위전 (1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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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포르투갈은 1372년 12월 카스티야의 신속한 침공에 대비하지 못했다. 1373년 초에는 리스본이 거의 함락된 상태였으며, 카스티야 군대는 하부 도시를 점령하고 상부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373년 3월, 기 드 볼로뉴 추기경이 중재자로서 산타렘에 도착해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의 평화 협정을 제안했다. 심한 압박을 받고 잉글랜드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던 포르투갈은 항복했다. 3월 19일 체결된 산타렘 조약에서 포르투갈은 카스티야와 연합해 잉글랜드에 맞서기로 약속했으며 주요 요새와 인질을 카스티야에 넘겼다. 이 산타렘 조약으로 카스티야 함대가 프랑스의 해상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5월 중순, 브르타뉴 공작 장 4세가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제 브르타뉴 공국은 대부분 프랑스의 통제 하에 있었고, 잉글랜드의 통제권은 사실상 무너졌으며 로버트 놀스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몇몇 지역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6월 10일, 장 드 몽포르를 브르타뉴로 복귀시키기 위한 원정 계획이 갑작스럽게 취소되었다. 포르투갈이 동맹에서 이탈하면서 해상을 통한 지원이 제한된 데다가, 몽포르와 에드워드 3세의 의견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포르는 신하들과 화해를 추구했으나 에드워드는 브르타뉴의 군사적 통제를 원했다. 그런 사정으로 곤트의 존의 원정은 칼레에서 가스코뉴까지 프랑스를 가로지르는 기마약탈로 변경된다.

7월 말, 브레스트 주둔군이 말을 잡아먹으며 버티는 동안 결국 솔즈베리 백작이 이끄는 구원군이 도착했다. 프랑스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이후 솔즈베리 백작 지휘하에 잉글랜드 함대는 프랑스와 카스티야의 함대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3.14. 트루아 습격 (1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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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년 7월 중순, 곤트의 존과 브르타뉴 공작 장 4세가 지휘하는 약 9000명의 군대가 칼레에 상륙했다. 브르타뉴에서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던 프랑스인들은 깜짝 놀랐다.

8월 10일, 잉글랜드군이 두 부대로 나뉘었다. 브르타뉴 공작이 남동쪽으로 아미앵을 향해 진군하고, 곤트의 존 자신은 생오메르와 아라스를 거쳐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요새화된 도시에 대한 공격을 피하고 농촌 지역을 약탈하고 불태우는 데 집중했다.

한편 브르타뉴 공작은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적대감을 표현하며 충성 맹세를 철회했다. 프랑스 지휘관들은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를 향해 이동하고 있다고 믿었고, 파리를 지키는 것과 브르타뉴를 방어하는 것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졌다. 결국 샤를 5세는 브르타뉴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고 랑그독에서 작전을 진행 중이었던 앙주 공작의 군대를 브르타뉴에 재배치한다.

8월 19일경, 곤트의 존과 브르타뉴 공작의 부대가 솜 강에서 합류했다.

9월 초, 파리에서 열린 군사 회의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크레시와 푸아티에, 그리고 그밖에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과 싸웠다가 패한 수많은 전투를 상기시키며 야전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프랑스는 부르고뉴 공작의 지휘 하에 잉글랜드군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고 행군 대열을 후방에서 괴롭히는 전략을 따랐다.

9월 22일경, 곤트의 존은 오브 강을 건너 트루아 교외에 도착한 뒤 프랑스군을 야전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오히려 도시에서 갑작스럽게 출격한 프랑스군의 기습으로 잉글랜드군 120명이 전사하고 80명이 포로로 잡혔다. 포로들 중에 존 드 몽포르의 부하로 추정되는 브르타뉴인 3명이 발견되어 반역자로 즉결 처형되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도시를 우회하여 니베르네와 오베르뉴를 향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10월 초, 브르타뉴에 도착한 앙주 공작이 데르발 성을 포위했다.

10월 10일, 잉글랜드군은 물랭에서 알리에 강을 건너다가 프랑스군에 거의 포위될 뻔했다. 결국 포위당하기 직전에 강을 건넜지만 상당한 인명 손실을 입었고 많은 물자들을 버려야 했다.

11월 초, 프랑스군은 전략을 수정했다. 앙주 공작은 데르발 성의 포위를 풀고 랑그독으로 돌아갔고, 부르고뉴에 집결한 군대는 대부분 해산되었다. 게클랭과 상세르 원수가 지휘하는 소규모 기병대만이 잉글랜드군을 계속 추격하면서 괴롭혔다.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의 습격과 식량 부족에 시달리며 리무쟁 지방의 험한 산지를 가로질렀다.

12월 말, 잉글랜드군이 완전히 탈진한 채 보르도에 도착하면서 곤트의 존의 기마약탈은 끝났다. 잉글랜드군은 인력, 군마, 장비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보르도에서도 질병과 물자 부족으로 계속 고통받았다. 지위 높은 기사들마저 거리에서 구걸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

3.15. 생소뵈르 포위전 (1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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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년 1월, 나헤라 전투의 일방적인 결과를 기억하는 피레네 산맥과 이베리아 북부의 군주들은 모두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의 시대가 끝났다고 믿었다. 카스티야에서는 죽은 페드로 1세의 당파들이 도시를 휘젓고 다녔고 아라곤의 페로 4세는 벌써부터 에드워드 3세와 카스티야 정복과 분할 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페로 4세는 주저하다가 결국 잉글랜드군의 카스티야 침공을 지원하기로 동의한다.

2월, 엔리케는 곤트의 존과의 결전에 대비해 약 6200명의 기병과 5000명의 보병을 부르고스 주변에 집결시켰다.

3월 중순, 곤트의 존은 푸아 백작 가스통 3세와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와 카스티야 침공을 위한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이때 이미 보르도의 잉글랜드군은 임금 미지급과 탈영으로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잉글랜드 정부는 칼레 방어와 해상 작전에 예상보다 많은 전비가 투입되어 곤트의 존의 원정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야 했다.

3월 26일, 곤트의 존은 결국 자금 부족 때문에 카스티야 원정을 포기하고 군대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후 잉글랜드 정부는 가스코뉴 주둔군에 대한 지원을 대부분 포기하고 대신 브르타뉴와 해상 방어에 집중하면서 외교적 해결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 원정의 실패는 잉글랜드의 국가적 명성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와 아라곤의 페로 4세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반대로 카스티야와 동맹을 맺었다. 최대의 위기에서 벗어난 트라스타마라 왕조는 이후 정략결혼을 통해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7월 중순, 잉글랜드 추밀원은 프랑스와 휴전 협상을 하기 전 협상력을 강화하기 위해 브르타뉴 침공을 계획하고 약 5만 파운드의 전비를 차입했다.

8월, 프랑스군이 코탕탱 반도에 유일하게 남은 잉글랜드 거점인 생소뵈르를 포위했다. 이 시기부터 공성무기로서 본격적으로 도입된 대포가 성벽을 타격했다. 그러나 수비대장 토머스 캐터튼의 지휘하에 잉글랜드군은 효과적으로 포위 공격을 방어했다.

9월 8일, 약 한 달 간의 포위공격 끝에 앙주 공작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가론 강의 요충지 라 레올을 점령했다.

10월, 잉글랜드 정부는 프랑스 정부와 평화 협상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곤트의 존이 외교 대사로서 브뤼헤에서 협상하기로 결정되었다.

3.16. 브뤼헤 조약 (1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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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년 4월 초, 케임브리지 백작과 장 드 몽포르가 지휘하는 4000명 이상의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 북서부 생마티유에 상륙했다. 이 시기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가스코뉴에서 활동 중이었고 나머지 프랑스군은 생소뵈르를 반 년째 포위공격하고 있으며, 올리비에 드 클리송이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브르타뉴에 있었다.

잉글랜드군은 우선 생폴 드 레옹을 점령하고 브르타뉴 북부 해안을 따라 진군했다. 그러나 5월 중순, 생브리외에서 예상 밖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같은 시기, 브뤼헤에서 외교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프랑스 대표단 모두 주권 문제에 대해 합의에 이르지 못해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5월 21일, 약 9개월의 포위공격 끝에 생소뵈르의 주둔군이 프랑스군과 조건부 항복 협정을 맺었다. 이후 샤를 5세에게 보고된 바에 따르면 요새의 성벽과 성문이 모두 포격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6월 1일, 코냑의 잉글랜드 주둔군이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같은 시기, 올리비에 드 클리송이 캥페를레 인근의 잉글랜드군 거점을 기습해 브레스트의 수비대장 존 데브러를 포로로 잡았다. 이에 장 드 몽포르는 생브리외 포위군 진영에 소수의 병력만 남기고 남하해 캥페를레를 포위했다.

6월 27일, 브뤼헤에서 2년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7월 2일,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휴전 조약을 무시하고 생소뵈르의 주둔군에게 약속대로 항복하라고 강요해 생소뵈르를 점령했다.

7월 7일, 휴전을 알리는 전령이 캥페를레에 도착했다. 장 드 몽포르는 격노했지만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풀었다.

8월 10일, 카스티야 함대가 부르뉴프에서 39척의 잉글랜드 배를 나포했다. 휴전 당사자가 아닌 카스티야는 잉글랜드 선박을 계속 공격할 수 있었다.

휴전 이후 중부 및 남부 프랑스에서 용병 도적단이 또다시 거점을 점령하고 약탈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편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이탈리아에서 상당한 도전에 직면했다. 우르비노, 페루자, 볼로냐 등 주요 도시들이 교황의 권위에 반발하며 피렌체와 연대했다. 교황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용병들에게 의지했다. 저명한 가스코뉴인 용병대장 베르나르 드 라 살이 피렌체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또한 그레고리오 11세는 브르타뉴인 용병대장 장 드 말레스트루아를 고용해 프랑스에서 알프스를 건너 롬바르디아로 1만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4. 아서 왕의 죽음 (1376~1379)

아서 왕 자신은 치명상을 입었고, 그 후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발론 섬으로 옮겨지면서, 콘월 공작 카도르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척인 콘스탄틴에게 브리튼의 왕관을 넘겨주었다. 그리스도 강생 542년에 있었던 일이다.
몬머스의 제프리, '브리튼 열왕사'

4.1. 흑태자의 죽음 (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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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6년 4월 28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의회가 소집되었다. 하원의 불만은 주로 전쟁 관련 문제였으며, 1371년 이후의 높은 세금, 계속되는 군사적 실패, 무능한 정부와 지휘관들에 대한 분노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브뤼헤 조약의 실망스러운 결과는 그들의 불만을 더욱 부채질했으며, 특히 곤트의 존에 대한 불만이 컸다. 마치 백작의 청지기인 피터 드 라 마레 경이 이러한 불만을 대표하여 하원의 대변인이 되었다.

의회는 결국 여러 고위 관료들을 탄핵했다, 부패, 무능, 심지어 반역에 대한 혐의까지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감옥에 수감되거나 벌금을 물었다. 의회는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정부인 앨리스 페러스를 궁정에서 추방하고 추밀원 의원들을 새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6월 8일, 흑태자가 결국 병사했다.

이후 곤트의 존은 반개혁을 시작하여 새로 임명된 추밀원 의원들을 해임하고 라티머와 앨리스 페러스와 같은 인물들을 복귀시켰다. 이렇듯 의회의 개혁을 독단적으로 뒤집은 행위는 왕좌에 대한 그의 야망에 대한 소문을 촉발시켰다.

11월, 브뤼헤에서 종전 협상이 재개되었지만, 주권 문제 때문에 교착 상태에 빠졌다. 잉글랜드 대표단은 어떤 종류의 타협이든 국내에서 반발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샤를 5세 역시 역사적 선례를 인용하며 프랑스의 어떤 지역에 대한 주권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4.2. 에드워드 3세의 죽음 (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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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7년 1월 27일, 임박한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압박에 의회가 소집되었다. 곤트의 존은 의회에서 인당 4펜스의 인두세를 제안했다. 14세 미만의 어린이와 빈민들은 면제되었다.

에드워드 3세의 건강은 다소 호전되었지만 여전히 국가 사무에 완전히 참여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는 공식 행사에 드물게 모습을 드러냈는데, 주로 행사 내내 침묵한 채로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3월, 가스코뉴의 세네샬인 토머스 펠턴이 카스티야와 내통한 반역자 존 민스터워스를 체포해 잉글랜드로 보냈다. 런던 탑에서 고문을 받은 민스터워스는 스코틀랜드와의 협상 등 프랑스의 모든 계획을 발설한 뒤 처형되었다.

6월 21일, 에드워드 3세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4.3. 윈첼시 습격 (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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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7년 6월 29일, 프랑스와 카스티야 연합군이 윈첼시에 상륙했다. 프랑스군은 이어서 라이를 점령한 뒤 헤이스팅스로 향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배틀 수도원장이 민병대를 이끌고 윈첼시를 탈환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다시 돌아와 윈첼시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한다.

6월 30일, 프랑스군은 윈첼시 점령을 포기하고 라이를 불태운 다음 다시 헤이스팅스로 향했다. 헤이스팅스를 불태운 뒤에는 로팅딘 해안에 상륙했고, 잉글랜드 민병대 500명을 매복 공격으로 전멸시킨 뒤 르위스를 불태우고 프랑스로 귀환했다.

7월 16일, 흑태자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인 리처드 2세가 10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정식으로 섭정이 임명되지 않아서 흑태자의 친구들로 구성된 섭정 의회가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새 정부는 곤트의 존의 정책을 빠르게 뒤집었다.

8월 10일 새벽, 마치 백작 조지 던바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군이 록스버러를 기습해 주민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불태웠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2주 후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수천 명의 국경 수비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8월 19일, 프랑스군이 와이트 섬에 상륙해 수비군을 격퇴하고 모든 거점을 불태웠다. 이후 사우샘프턴에 상륙을 시도했지만 해변에서 수비군에게 격퇴당했다.

이 두 차례의 해안 습격은 잉글랜드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고 대중의 분노를 이끌어냈다. 외국인 혐오 의식이 강화돼 프랑스의 첩자로 의심되는 외국인의 체포와 추방이 증가했다. 한편 이 모든 사태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곤트의 존과 그의 당파의 인기는 갈수록 떨어져, 프랑스군이 상륙했을 때 곤트의 존이 파티와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는 루머까지 퍼졌다.

4.4. 베르주락 포위전 (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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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7년 9월 7일, 부르고뉴 공작이 이끄는 1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칼레의 전초 기지 아르드르를 포위했다. 주둔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저항 없이 항복했다. 인근 요새 두 개가 따라서 항복했고, 오드뤽 성의 주둔군은 저항했으나 지속적인 공격으로 성벽이 파손되자 항복했다.

칼레의 수비대장 휴 칼블리는 방어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폭우로 칼레 습지에서의 포위 진영 구축이 불가능할 지경이 되자 프랑스군은 9월 13일 군사작전을 중단하고 퇴각한다.

같은 시기, 앙주 공작이 지휘하는 2000명 이상의 프랑스군이 푸아투와 페리고르를 가로질러 진격하며 거의 저항 없이 주요 거점들을 점령했다. 가스코뉴 방면의 총지휘관인 토머스 펠턴이 에이메 근처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고, 베르주락은 짧은 포위와 포격 끝에 항복했다. 프랑스군은 보르도로 진격을 계속하여 생마케르와 렁공을 점령했다.

4.5. 생말로 포위전 (1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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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8년 3월,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가 잉글랜드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은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에 샤를 5세는 카를로스 소유의 노르망디 영토를 전부 반역죄로 몰수했고, 6월까지 셰르부르를 제외한 모든 거점이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에 셰르부르의 나바라 주둔군은 잉글랜드에 지원을 요청한다.

6월 초, 아룬델 백작과 솔즈베리 백작이 이끄는 함대가 출항해 아르플뢰르를 기습해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셰르부르로 향했다. 잉글랜드군은 셰르부르의 방어를 지원하는 대가로 나바라 주둔군으로부터 통제권을 양도받는다. 같은 시기 카스티야 함대는 콘월 지방의 해안을 습격했다.

8월 10일, 곤트의 존이 지휘하는 5000여 명의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에 상륙해 생말로를 포위했다. 그러나 예상 밖의 강경한 저항을 만나 한 달 만에 포위를 풀고 퇴각한다. 이 실패로 곤트의 존의 군사적 명성은 큰 손상을 입었다.

9월 초, 웨일즈의 왕위 주장자 오와인 로고크가 모르타뉴 포위군 진영에서 잉글랜드 스파이의 손에 암살당했다.

9월 7일, 존 네빌이 지휘하는 잉글랜드 지원군 600명이 보르도에 상륙했다. 증원을 받은 잉글랜드군은 곧바로 모르타뉴를 포위한 프랑스군을 공격해 포위를 해제했다.

한편 프랑스의 동맹인 카스티야 군대는 나바라를 침공해 수도인 팜플로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11월 중순, 토머스 트리벳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도착하자 카스티야군은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이 카스티야 영토까지 추격했지만 카스티야군은 끝까지 결전을 회피했고, 잉글랜드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했다.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는 더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엔리케 2세와 평화 협상을 시작한다.

12월 18일, 파리 고등법원에서 장 드 몽포르의 브르타뉴 공작위 몰수가 선언되었다. 결국 샤를 5세는 브르타뉴 공국을 왕령지로 편입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첫 번째 이유는 재정적 압박이었다.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프랑스 정부는 군사 작전에 매년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장 드 몽포르 대신 브르타뉴 공국을 맡길 적임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브르타뉴 귀족들 사이에서 예상보다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몽포르의 정적인 잔 드 팡티에브르까지 반대했다. 그녀는 공작위 몰수가 몽포르의 권리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들 장 드 블루아의 계승권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4.6. 생말로 해전 (1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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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9년 3월 31일, 협상 끝에 나바라 왕국이 카스티야와 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맺고 주요 요새들을 카스티야에 양도하고 잉글랜드와 가스코뉴 군대를 추방한다는 내용의 브리오네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4월 말,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공작과 올리비에 드 클리송의 지휘하에 브르타뉴 공국을 침공할 군대가 준비되고 있었다. 브르타뉴의 유력 귀족들은 고심 끝에 잉글랜드에 있는 장 드 몽포르에게 사절을 보내 가능한 한 빨리 공국으로 돌아오도록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뒤, 올리비에 드 클리송이 샤를 5세의 위임장을 가지고 낭트에 도착했지만 주민들은 성문을 열기를 거부했다.

5월 중순, 브르타뉴 연맹의 사절단이 웨스트민스터에 도착했다. 하지만 몽포르와 섭정 의원들은 브르타뉴인들의 의도를 의심했고, 상당한 규모의 군대 없이 브르타뉴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6개월 기한의 군사작전에 4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데 약 5만 파운드의 전비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5월 27일, 섭정 의원들의 끈질긴 설득 끝에 잉글랜드 하원은 브르타뉴 원정의 전비를 마련하기 위한 최초의 인두세를 승인했다.

5월 28일,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가 병사했다. 엔리케는 아들 후안에게 잉글랜드인과 다른 기독교도 전쟁 포로를 모두 석방할 것, 그리고 영원히 프랑스에 충실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7월 초, 샤를 5세는 브르타뉴 연맹의 지도자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이에 초조해진 몽포르는 인생 최대의 도박을 감행했다. 군대 없이 즉시 브르타뉴로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8월 3일 오후, 장 드 몽포르와 39척의 잉글랜드 함대가 생말로 인근 해안에 도착했다. 도시 항구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와 카스티야의 갤리선 함대가 잉글랜드 함대를 공격했지만 호위함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몽포르는 해안에 상륙하자마자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귀환을 알리고 디낭으로 소집했다.

8월 16일, 몽포르는 디낭 시에 모인 수많은 군중 앞에서 공국의 자치권을 옹호하는 연설을 했고, 앞으로 브르타뉴 귀족들의 조언과 충고에 따라 통치하고 잉글랜드 고문들을 추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잔 드 팡티에브르가 군중 앞에 나타나 지지를 표명했다.

8월 20일, 장 드 몽포르가 브르타뉴 공국의 수도 렌에 입성했다. 잉글랜드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성공적인 복귀였고, 몽포르의 복위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잉글랜드는 브르타뉴에서 거의 모든 영향력을 상실했다.

10월 17일, 샤를 5세는 퐁토르송에 집결한 국왕군을 해산하고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12월, 브르타뉴 원정 함대가 솔렌트에서 출항했다. 그러나 폭풍을 만나 큰 손실을 입었으며 많은 병사와 선원들이 익사했다. 이 재난은 잉글랜드의 해상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5. 북부 도시들의 반란 (1379~1385)

"나는 7년 전 우리 아버지가 내게 해주셨던 '새끼 고양이가 지배하던 궁궐은 힘든 곳이었다'란 말을 기억한다. 성경도 그 말씀을 증명하고 있다. '아이가 왕인 나라에 슬픔이 있을지니!' 그러니 그의 권위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말자. 한 명의 폭군을 제거한 결과가 가져오는 해악과 슬픔보다는 작은 손실이 더 나으니까. 궁궐의 고양이가 갑작스런 공격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없다면 시궁쥐들은 사람들의 옷가지를 씹고 우리 생쥐들은 맥아를 먹을 것이다."
윌리엄 랭글런드, '농부 피어스의 꿈'

5.1. 헨트 시민 봉기 (1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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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9년 9월 플랑드르의 세 대표 도시인 헨트, 브뤼헤, 이프르가 플랑드르 백작 루이 드 말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시기 플랑드르의 직물 산업은 이탈리아, 브라반트, 잉글랜드에서 온 저가 직물과의 치열한 경쟁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헨트와 이프르의 시 정부는 자신들의 '구역'을 통제하여 플랑드르 소도시들로부터의 경쟁을 제한하려 했다. 루이 드 말은 대도시들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소도시들을 지원하고 행정력을 강화함으로써 대도시들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 때문에 헨트에서 먼저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반란의 직접적인 계기는 루이 드 말이 허가한 즈윈에서 리스로 이어지는 운하 건설이었는데, 이는 헨트의 곡물 무역에 위협이 되었다. 카리스마 있는 곡물 운송업자인 얀 요엔스가 봉기를 주도했으며, 직조공들과 시 민병대의 지원을 받았다. 7월, 요엔스와 추종자들은 공사 중인 운하를 파괴했고, 곧이어 요엔스와 그의 동맹자인 프란츠 아커만과 페터 반 덴 보슈가 시 정부를 장악했다.

요엔스의 반란은 플랑드르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쿠르트레와 이프르가 반란에 가담했다. 브뤼헤 시 정부는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결국 내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었다.

5.2. 낭트 포위전 (1380)

파일:English_army_at_Troyes_in_1380.jpg

1380년 3월, 브르타뉴 공작 장 드 몽포르와 샤를 5세의 협상이 정체되어 몽포르가 다시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모색하게 되었다. 결국 브르타뉴의 군사 통행권과 프랑스의 침공 시 지원을 약속하는 등 합의가 이루어졌다. 경험은 부족하지만 베테랑 지휘관들의 지원을 받은 버킹엄 백작이 원정군의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5000명 이상의 병력이 소집되었다. 카스티야 함대와의 조우에 대한 우려 때문에 브르타뉴에 직접 상륙할 수는 없었고 칼레에서 시작되는 복잡한 작전이 계획되었다.

4월, 플랑드르 백작 루이 드 말이 플랑드르로 돌아왔다. 이후 백작은 저지대 도시들의 지원을 받아 플랑드르 반란군을 잔혹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브뤼헤가 처음으로 항복했으며, 이프르에서는 수백 명의 반란군이 처형되었다.

7월 초, 버킹엄 백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칼레에 상륙했다.

7월 13일,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제보당 포위 공격 도중 사망했다.

7월 24일, 카스티야 갤리선 함대가 다시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습격했다. 처음에는 서식스의 라이 만에 상륙해 윈첼시와 다른 도시들을 불태웠다. 아룬델 백작이 지휘한 반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8월 초, 버킹엄 백작의 군대가 샹파뉴 지방으로 행군해 기마약탈을 벌였다.

8월 말, 카스티야 함대가 보급을 마친 후 두 번째 급습을 시작해 템스 강 하구까지 도달하고 런던 인근 지역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같은 시기, 버킹엄 백작의 군대가 트루아에 도착했다. 여기에는 유명한 지휘관들이 이끄는 대규모 프랑스 군대가 모여 있었다. 프랑스군은 부르고뉴 공작의 지휘 하에 결전을 피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서쪽으로 행군했고 프랑스 군대는 거리를 두고 추격했다.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로 향하고 있다는 게 분명해지자 프랑스군은 사르트 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9월 2일, 플랑드르 백작의 군대가 마지막 저항 거점인 헨트를 포위했다. 그러나 헨트 시는 브뤼헤와 이프르보다 훨씬 강경하게 저항했다.

9월 15일, 샤를 5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10월 초, 플랑드르 백작 루이 드 말은 끝내 헨트 시를 봉쇄하는 데 실패했고, 반란군과 휴전을 체결한다.

11월 4일, 잉글랜드군은 브르타뉴로 저항 없이 진군한 끝에 낭트를 포위했다. 하지만 브르타뉴 공작 장 드 몽포르는 이를 이용해 프랑스와 협상을 벌였고, 결국 프랑스 섭정 의회와 휴전을 체결한다. 잉글랜드의 군사작전은 또다시 막대한 전비만 낭비하고 재난으로 끝났다.

5.3. 파리 시민 봉기 (1380)

파일:Couronnement_de_Charles_VI_le_Bien-Aimé.jpg

1380년 11월 14일, 파리 시의 시테궁에서 랑그도일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다음날인 11월 15일 아침, 플랑드르 반란에 고무된 파리 시의 가난한 하층민들이 그레브 광장에 모여 전쟁세 부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파리 상인조합장이 나서서 이 문제를 정부에 맡기라며 군중을 설득했지만, 폭도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상인조합장을 붙잡고 다리를 건너 삼부회가 회의 중인 시테궁으로 행진했다.

곧 소란을 듣고 나온 세 공작들이 폭도들과 대치했고, 폭도들에게 협박당한 상인조합장은 백성들의 비참함과 가난을 생생히 묘사하는 장황한 연설을 했다. 이에 앙주 공작은 섭정 의회에서 그들의 주장을 고려할 것이라고 모호하게 답했다. 폭도들이 만족하지 못하고 야유하기 시작하자 상서가 나서서 구체적으로 화로세, 판매세, 소금세를 폐지하겠다고 말했다. 폭도들은 환호하며 유대인 거주지로 몰려가 유대인들을 살해하고 약탈하면서 아이들에게 강제로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

조세에 대한 불만이 파리 주민들에게 국한된 것으로 착각한 섭정 의회는 일단 안심했지만, 파리에서 일어난 봉기와 전쟁세 폐지 선언에 대한 소문은 곧 북부 프랑스 전역으로 퍼졌고, 곳곳에서 조세에 반대하는 하층민들의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미앵에서는 폭도들이 '파리 만세! 헨트 만세!'라는 구호를 사용하여 플랑드르 반란과 파리 봉기와의 연관성을 드러냈다.

5.4. 와트 타일러의 난 (1381)

파일:와트 타일러의 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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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반란은 잉글랜드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전황이 암울하기만 한 가운데 1381년 인두세 부과를 계기로 분노한 평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농노나 하층 임노동자들만 들고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자유민 부농과 도시 장인들, 그리고 자의든 협박에 의해서든 젠트리 계층도 많이 가담했다.

반란군이 제기한 불만은 세금 자체가 아니라 그 많은 세금이 왕국의 방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어린 왕의 무능하고 부패한 섭정 의회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헛되이 쓰였다는 것이었다. 이들 반란군은 단순히 굶주림에 미친 농노들이 아니라 '잉글랜드 왕국 공동체'의 안위를 걱정하는 애국자들이기도 했다. 켄트 주의 자유민 소작농들도 자신들과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지역 출신의 농노 한 명이 투옥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했으며 반란군은 런던으로 진군하는 중에도 해안 마을들에 프랑스 함대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수비대를 배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수만 명의 반란군이 런던으로 진격했으나 지도자인 와트 타일러가 협상 자리에 나갔다가 런던 시장에게 살해당하면서 진압되었다.

5.5. 알메이다 포위전 (1381)

파일:FernandoI-01.jpg

한편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의 왕이 된 후안 1세는 아버지와 달리 내성적인 성격이며 군사적 재능과 결단력이 부족했다. 포르투갈의 페르난두 1세는 이 기회를 활용해 카스티야와 프랑스와의 동맹을 철회하고 잉글랜드-포르투갈 동맹을 되살리려 했다.

1381년 6월 말, 케임브리지 백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 3000명과 57척의 함대가 포르투갈을 지원하기 위해 플리머스와 다트머스에서 출항했다.

7월 19일, 잉글랜드 함대가 리스본에 도착했다.

같은 시기, 플랑드르 백작 루이 드 말은 헨트 시를 다시 봉쇄했다. 외부의 식량 공급에 의존하는 대도시인 헨트는 이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헨트 시민 정부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플랑드르 백작은 무조건적인 항복만을 요구했다.

카스티야의 후안 1세는 포르투갈로 공세를 시작하여 알메이다를 점령했지만 병에 걸려 진격을 멈췄고, 9월에 코카로 철수했다.

9월 초, 나폴리의 카를로 3세가 전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를 포로로 잡았다.

5.6. 브뤼헤 습격 (1382)

파일:Battle of Beverhoutsveld 1382.jpg

1382년 1월 7일, 앙주 공작 루이는 나폴리를 정복하고 조반나 1세를 감옥에서 구출하기로 결심했다. 이 결정은 다음 날 추밀원에 발표되었다.

1월 13일, 플랑드르 백작 루이 드 말은 헨트 시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헨트 주민들은 이를 거부하고 야콥 반 아르테벨데의 아들 필리프 반 아르테벨데를 도시의 지도자로 선출했다.

필리프 반 아르테벨데는 곡물을 징발하고 전쟁세를 부과하는 등 효과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루이 드 말은 봉쇄를 강화하여 헨트의 식량 공급을 더욱 제약했다.

2월, 필리프 반 아르테벨데가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내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잉글랜드 정부는 그동안 플랑드르 백작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플랑드르 내전에 개입하는 것을 장차 있을 프랑스와의 종전 협상에서 협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보았다.

5월 3일, 필리프 반 아르테벨데가 지휘하는 헨트 민병대 4000명이 브뤼헤를 기습했다. 이에 플랑드르 백작은 전문 군대와 민병대를 이끌고 성문 밖으로 출격했다. 하지만 축제 기간이었기 때문에 군사들 중 상당수가 술에 취해 있었고, 대포 사격과 동시에 잉글랜드 용병들이 화살을 퍼붓자 백작의 군대의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플랑드르 백작은 성채로 퇴각한 뒤 반격을 준비했지만, 그가 병사들을 이끌고 도착하기 전에 브뤼헤의 시장 광장이 점령되었다. 결국 그날 밤 백작은 해자를 헤엄쳐 건너 브뤼헤에서 탈출한다. 이로써 헨트 시의 봉쇄가 해제되고 브뤼헤와 이프르가 다시 반란군에 합류하게 되었다.

6월 중순, 앙주 공작이 이끄는 약 2~6만 명의 기병대가 알프스로 진군했다.

7월 말, 카를로 3세의 명령에 따라 조반나 1세가 간수들의 손에 살해당했다.

5.7. 루즈베케 전투 (1382)

파일:Slag bij Westrozebeke 138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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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년 10월 8일, 잉글랜드 의회가 웨스트민스터에 소집되었다. 런던 주교의 간단한 개회 연설 후, 헤리퍼드 주교 존 길버트가 열성적으로 연설을 펼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는 위기에 처해 있으며 적극적인 조치가 없다면 정복당해 적의 자비에 맡겨지고 주권와 언어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의원들은 이 자리에서 '플랑드르의 길'과 '포르투갈의 길'이라는 두 가지 전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상원은 포르투갈 원정을 지지했지만 하원은 플랑드르 원정을 지지하면서 논쟁이 계속되었다.

같은 시기, 프랑스 정부가 어린 국왕 샤를 6세의 이름으로 플랑드르 백작과 반란군 사이에 중재를 제안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지원을 확신한 필리프 반 아르테벨데는 협상을 거부한다. 그는 잉글랜드 정부에게 자신과의 동맹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착각했고, 1340년 플랑드르 시민 정부가 에드워드 3세에게 빌려준 14만 파운드를 상환할 것을 요구하는 등 무리한 조건을 전달했다.

10월 25일, 헨트의 사절단이 웨스트민스터에 도착했다. 아르테벨데의 14만 파운드 상환 요구에 추밀원 의원들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같은 시기, 포르투갈의 페르난두 1세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친카스티야 성향인 레오노르 왕비의 파벌이 정부를 장악했다. 이들은 베아트리스 공주와 카스티야의 후안 1세의 결혼동맹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1월 1일, 샤를 6세가 아라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플랑드르 백작 루이 드 말은 지난 30년 동안 꿇지 않았던 무릎을 꿇고 프랑스 왕에게 신서를 했다.

11월 12일, 맨앳암즈 6500명이 포함된 1만 명 이상의 프랑스군이 아라스에서 출정했다. 플랑드르 반란군이 백작의 선발대를 격퇴하고 릴의 다리를 파괴했지만 곧 프랑스군 600명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반란군을 격퇴하고 다리를 보수했다.

11월 20일, 이프르 시가 저항 없이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헨트 시에서 파견된 위원들은 전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후 프랑스군은 서부 플랑드르 전역으로 흩어져 무차별적인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샤를 6세는 항복한 이프르와 브뤼헤의 주민들에게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할 것을 강요했다. 이에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는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교서를 반포하면서, 노리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에게 십자군에 참여하거나 지원하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11월 25일 저녁, 필리프 반 아르테벨데가 지휘하는 플랑드르 민병대 4만여 명이 루즈베케 마을 남쪽의 고지대에 진을 쳤다. 다음날 샤를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루즈베케에 도착했다.

11월 27일 새벽, 프랑스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올리비에 드 클리송이 지휘하는 선봉대는 사기가 높은 민병대의 정연한 밀집대형을 뚫지 못하고 중군이 격퇴당했지만, 양익은 대열을 유지한 채 끝까지 버텼다. 그 동안 부르봉 공작과 쿠시 영주가 지휘하는 두 번째 사단이 반란군 대열을 우회해 후방을 공격했고, 반란군은 3면이 포위된 채 전열이 무너지고 학살당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끝난 후 필리프 반 아르테벨데의 시신은 한 참호 안에서 호위대의 시신 아래 깔린 채 발견되었다.

루즈베케 전투의 대패로 헨트 반란군의 사기는 추락했다. 하지만 북부 프랑스의 습한 겨울은 대군이 기동하기에는 불리한 계절이었고,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12월 중순이 되자 프랑스군은 대부분 철수했고 페터 반 덴 보슈가 아르테벨데의 유지를 이어받아 반란을 이끌기 시작했다.

12월 21일, 노리치 주교가 정식으로 십자군을 선포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섭정 의회는 어린 국왕 리처드 2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 것이라고 발표했다. 비록 페르난두 1세의 병환으로 '포르투갈의 길'이 사라지면서 헨트 반란군을 지원하는 '플랑드르의 길'만이 남은 상황이었지만, 섭정 의회는 노리치 주교의 지휘 능력과 민간인 자원자들로 구성된 십자군의 전투력에 회의감을 가졌다. 명목상 십자군일지언정 군사작전은 직업군인 지휘관들과 정규군이 주도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리처드 2세는 전쟁에 열의가 없었던 터라 참전을 거부했다. 국왕 자신이 아니면 노리치 주교의 지휘권을 강제로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졌다.

한편 앙주 공작의 군대는 보급 문제로 소수만이 나폴리 영토에 진입할 수 있었다. 카를로 3세는 잉글랜드인 용병대장 존 호크우드의 도움을 받아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고, 이 때문에 앙주 공작의 군대에서 보급 부족과 탈영이 발생했다. 결국 앙주 공작은 안전한 퇴각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한다.

이탈리아 원정의 대실패로 앙주 공작이 사실상 몰락하면서, 프랑스 정부 내에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다른 형제이자 섭정 의원인 베리 공작은 무능하고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었으며 모든 정무를 부르고뉴 공작에게 일임했기 때문이었다.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는 아내의 영지인 플랑드르를 효과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친잉글랜드파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잉글랜드와의 종전 협상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5.8. 이프르 포위전 (1383)

파일:Siège d'Ypres (1383).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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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3년 1월 11일, 플랑드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샤를 6세는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 시에 입성했다. 어린 국왕은 이 군사들로 파리 시의 공공장소를 점거하고 무력 시위를 벌인 뒤, 1380년 파리 봉기의 주동자 몇 명을 체포해 처형하고는 파리 상인조합장을 해임했다. 판매세와 소금세는 이전보다 더 높은 세율로 다시 부과되었다.

이후 루앙, 아미앵, 랭스 등 북부 프랑스의 주요 도시들에서도 파리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남부 프랑스에서는 체포와 처형은 없었지만 대신 랑그독 삼부회가 소집돼 반역죄로 80만 프랑의 벌금을 물렸다.

1월 26일, 헨트 반란군이 즈윈 강 하구에 있는 중요한 항구 도시 아르덴부르크를 포위했다. 3일 후 반란군이 도시를 공격해 점령하고 프랑스 수비대를 학살했다.

2월 23일, 잉글랜드 의회가 웨스트민스터에 소집되었다. 먼저 섭정 의회는 플랑드르 원정을 위해 추가적인 전쟁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노리치 주교의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명목상 십자군일지라도 전문 지휘관에게 지휘권을 위임할 것을 주교에게 요구했다. 이에 노리치 주교는 면죄부 판매로 모금된 자금으로 5000명 규모의 군대의 1년 기한의 군사작전을 지원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상원은 주교의 허세를 비웃으며 섭정 의회의 주장을 지지했다. 하지만 세금을 내고 싶지 않았던 하원 의원들은 주교의 주장을 믿고 싶어했다. 게다가 대체로 군사적 지식이 부족했던 도시 대표들은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의 시대 이후 전황이 급격히 악화된 이유를 왕족과 귀족들의 군사적 무능력 때문으로 여겼다. 전쟁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섭정 의회는 결국 하원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5월 16일, 너무 오래 머뭇거리면 섭정 의회가 자신의 지휘권을 박탈할까 봐 걱정한 노리치 주교는 서둘러 출정식을 열고 해협을 건넜다. 주로 무급으로 복무하는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맨앳암즈 3000명과 궁수 1만여 명 규모의 군대가 곧 칼레에 상륙했다.

5월 17일, 카스티야의 후안 1세와 포르투갈 공주 베아트리스의 결혼식이 열렸다. 페르난두 1세는 결혼식 참석을 거부하고 곤트의 존에게 개인적인 사과를 전하는 서신을 보냈다.

5월 20일, 아 강의 요충지 부르부르 시가 짧은 저항 끝에 잉글랜드에 항복했다. 잉글랜드군은 곧바로 항구 도시 그라블린을 공격해 점령하고 수많은 말을 노획했다. 이후 됭케르크는 저항 없이 항복했다.

5월 25일, 플랑드르 백작의 사생아 중 한 명인 루이 드 아즈가 브뤼헤와 인근 도시들에서 징집된 민병대 수만 명을 이끌고 됭케르크에 도착했다.

노리치 주교는 우선 전령을 보내 항복을 요구하려 했으나, 전령이 적진에 도달하기도 전에 플랑드르 기사들이 뛰쳐나와 전령을 살해했다. 그 모습을 본 잉글랜드군은 즉시 공격을 개시했다. 무장이 빈약하고 사기도 낮은 민병대는 장궁병들이 퍼붓는 화살비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전투는 잉글랜드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6월 9일 아침, 잉글랜드군이 이프르를 기습해 점령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다음날 헨트 반란군의 지원을 받아 도시 성벽을 공격했지만 이 작전도 실패했다.

6월 24일 새벽, 잉글랜드군과 헨트 반란군이 해자를 건너 도시 성벽을 다시 공격했지만 방어탑에 설치된 대포들로 십자포화를 맞고 격퇴당했다. 이 전투는 대포가 수성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도시 안의 보급품이 바닥났고, 포위군 진영에는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7월 말, 이프르 시 정부는 잠시 항복을 고려했지만 결국 저항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8월 2일, 잉글랜드군과 헨트 반란군이 다시 도시 성벽을 공격했지만 일주일 동안 계속된 치열한 전투 끝에 격퇴당했다.

8월 9일, 장 드 비엔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선봉대가 이프르에서 25km 거리에 있는 도시 리스에 도착했다.

이때 이프르 수비군은 항복하기 직전이었고, 연합군에는 아직 많은 병력이 남아 있었지만, 계속되는 작전 실패로 노리치 주교가 리더십을 상실하면서 지휘관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헨트 반란군은 도시 성벽을 다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노리치 주교와 대부분의 잉글랜드 지휘관들은 리스 강에서 프랑스 주력군과 대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휴 칼블리는 우선 장 드 비엔의 선봉대를 야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말다툼 끝에 어떤 작전도 채택되지 못하고 연합군은 산산이 흩어졌다. 노리치 주교와 휴 칼블리는 남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군 선봉대를 기습한 뒤 해안으로 후퇴한다.

9월 1일, 3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아 강에 도착했다. 프랑스군과 결전을 벌이기 위해 카셀 시 인근의 고지대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던 잉글랜드군은 엄청난 병력차에 전의를 상실하고 부르부르로 퇴각한다.

9월 8일, 됭케르크가 저항 없이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9월 12일, 샤를 6세가 직접 이끄는 프랑스군이 부르부르를 포위했다. 그날 저녁 프랑스군이 도시 성벽을 공격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격퇴당했다.

다음날인 9월 13일 아침, 겨울이 오기 전에 도시를 점령할 자신이 없었던 프랑스군 지휘관들이 먼저 협상을 제안했다. 결국 17일 모든 전리품과 포로를 가져갈 수 있는 안전한 퇴각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수비군이 항복한다.

9월 23일, 그라블린의 수비군이 부르부르와 동일한 조건으로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한편 프랑스군이 북부 해안에서 잉글랜드군과 싸우고 있는 동안 헨트 반란군은 에스코강 상류의 요충지 아우데나르더를 기습해 점령했다.

10월 22일, 포르투갈의 페르난두 1세가 사망했다.

12월 6일, 페르난두 1세의 이복동생인 아비스의 주앙이 레오노르 왕비의 애인 안데이루를 암살하면서 반카스티야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5.9. 리스본 포위전 (1384)

파일:The Siege Of Lisbon 1384.png

1384년 1월 30일, 플랑드르 백작 루이 드 말이 생오메르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한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로버트 2세는 프랑스의 지원 없이는 잉글랜드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평화를 추구했지만 더글러스 백작을 비롯한 스코틀랜드의 유력 귀족들은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지지했다.

잉글랜드 정부의 정책은 갈수록 커지는 스코틀랜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평화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의 시대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희망을 놓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러한 정책에 반대했다.

3월, 카스티야의 후안 1세가 5000명의 맨앳암즈가 포함된 대규모 군대를 이끌로 리스본으로 진군했다. 이에 아비스의 주앙은 잉글랜드에 사절단을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5월 말, 카스티야군이 리스본을 포위했다. 하지만 도시 성벽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고 수개월째 대치가 이어지는 동안 포위군 진영에 전염병이 퍼졌고, 베아트리스 왕비마저 병에 걸리자 후안 1세는 9월 3일 포위를 해제하고 퇴각한다.

10월 19일, 파리 봉기 이후 프랑스에서 폐지되었던 화로세가 타이유(taille)라는 이름으로 재도입되었다.

5.10. 알주바호타 전투 (1385)

파일:Batalha_de_Aljubarrota_0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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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5년 4월 6일, 아비스의 주앙이 포르투갈 코르테스에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군사적으로 무능한 카스티야의 후안 1세는 작년 리스본 포위전에 동원한 군대의 2배에 달하는 군대를 소집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고, 주앙 1세는 이를 이용해 북부 포르투갈의 대부분을 탈환한다.

5월, 장 드 비엔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스코틀랜드에 상륙했다.

7월 초, 프랑스군이 스코틀랜드군 4000명과 연합해 잉글랜드 북부 노섬벌랜드를 침공했다. 대륙 영토를 대부분 상실한 데 이어 본토를 공격당한 것에 위기감을 느낀 잉글랜드는 대군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고,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포함해 로우랜드 지방의 대부분을 약탈하고 불태웠지만 연합군이 결전을 회피하고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겨울이 다가오자 결국 보급 문제로 회군했다. 하지만 삼촌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왕위를 노리지 않을까 우려하던 리처드 2세가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 원정을 일찍 중단한 것이라는 소문이 당대에 돌았다.

한편 스코틀랜드 측에서는 이 잉글랜드 침공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닌 프랑스의 이득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프랑스 지휘관들을 억류한 채 프랑스에 배상금을 요구했고,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의하면 이 사건으로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와 2, 3년 정도 평화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해서 완전히 파괴하자'는 여론이 생겼을 정도로 동맹 관계가 악화되었다. 결국 스코틀랜드는 이미 비참하게 쇠락했으며 프랑스군을 지원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만 밝혀졌고, 이 원정을 마지막으로 프랑스는 스코틀랜드를 통해 잉글랜드 본토를 침공한다는 전략을 완전히 포기한다. 대신 잉글랜드를 침공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플랑드르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루이 드 말 사후 플랑드르의 영주가 된 부르고뉴 공작은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양보와 사면을 제안하며 헨트 반란군과 협상을 시작했다.

8월 14일, 포르투갈군이 알주바호타에서 카스티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로 포르투갈의 독립이 확정되었고 아비스 왕조의 황금 시대가 시작되었다.

11월 중순, 카스티야의 후안 1세는 코르테스에서 검은 상복을 입고 연설을 했다. 후안 1세는 실패한 정책과 군사적 손실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며 참회를 시작하고 승리를 거둘 때까지 애도를 계속할 것을 맹세했다. 코르테스는 카스티야의 귀족 중에서 열두 명의 의원을 선출하여 왕을 보좌하는 것과 20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남성에게 군복무를 요구하는 징집 제도 등의 개혁을 승인했다.

12월 18일, 부르고뉴의 용담공 필리프 2세는 헨트 시민들의 반역죄를 사면하고 몰수된 재산과 특권을 돌려주는 등 거의 항복에 가까운 조건으로 반란군과 타협했다. 6년 동안 계속된 내전은 그렇게 헨트 시민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내전은 이미 위기에 처해 있었던 플랑드르 직물 산업의 쇠퇴를 가속했고, 이 영광의 순간을 끝으로 헨트 시의 부와 권력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6. 금성의 기사들 (1386~1389)

이들은 전장 대신 침실에서 기량을 떨치는, 창 대신 혀로 싸우는, 언변은 능숙하지만 무술 시연은 굼뜬, 마르스의 기사들이 아닌 비너스의 기사들이었으므로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토머스 월싱엄의 연대기

6.1. 브레스트 포위전 (1386)

파일:Siège_du_château_de_Bres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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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6년 4월 24일, 프랑스 섭정 의회는 맨앳암즈 8000명과 쇠뇌수 3000명 규모의 군대를 잉글랜드 동부에 상륙시키는 군사 원정을 계획했다.

5월 초,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의 동맹이 다시 체결되었다.

5월 말, 첩자들을 통해 프랑스의 본토 침공 계획을 파악한 잉글랜드 정부는 켄트 해안 지역 주민들에게 집을 버리고 도버, 라이, 샌드위치로 피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시기, 곤트의 존의 카스티야 원정군이 출항하기 전, 프랑스를 교란하기 위해 셰르부르의 수비대장이 교체되고 주둔군이 증원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에 완벽히 속아넘어가서 플리머스에 소집된 함대의 목적지가 코탕탱 또는 브르타뉴라고 착각했다. 잉글랜드 본토 침공 준비가 중단되었고 브르타뉴 공작 장 4세가 지휘하는 브르타뉴군이 상륙 예정지인 브레스트를 포위했다.

7월 9일, 곤트의 존이 이끄는 맨앳암즈 2000명, 궁수 2000명, 배 104척 규모의 함대가 플리머스에서 출항했다. 이들은 7월 12일 브레스트에 상륙해 브르타뉴 공작의 포위군 진영을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도시의 포위를 풀고 다시 출항해 남쪽으로 향했다.

7월 25일, 곤트의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가 갈리시아 지방의 항구 도시 코루냐에 기습적으로 상륙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내륙으로 진군해 산티아고와 오렌세를 점령했다. 카스티야의 후안 1세는 이에 맞서 북쪽으로 진군했지만, 코루냐 시가 항복하고 잉글랜드군이 동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후퇴한다.

9월 말, 아라스에 맨앳암즈 15000명이 포함된 3만여 명의 군대가 집결했고 슬로이스에는 1200여 척의 함대가 소집되었다. 런던 시민들은 프랑스군의 상륙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포위공격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10월 1일, 잉글랜드 의회가 웨스트민스터에 소집되었다. 상서인 마이클 폴은 개회 연설에서 국왕이 빚을 갚고 적의 침략으로부터 왕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약 22만 파운드의 전쟁세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국왕과 그의 총신들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나 있었던 양원은 짧은 회의 끝에 마이클 폴을 탄핵했다. 이때 리처드 2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웨스트민스터를 떠남으로써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국왕이 의회를 해산하거나 의원들을 암살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상원은 왕의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과 엘리 주교 토머스 아룬델을 대변인으로 임명했다. 두 사람은 엘섬의 왕실 저택에 칩거 중인 리처드 2세를 찾아가 국왕이 웨스트민스터로 돌아오지 않으면 의회는 전쟁세를 승인하지 않고 해산할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리처드 2세는 불충실한 신하들보다는 프랑스 왕에게 복종하는 것이 낫다고 답했다. 그러자 글로스터 공작은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와 아버지 흑태자, 그리고 수많은 잉글랜드인들이 대의를 위해 위험과 죽음을 무릅쓰고 프랑스를 정복해 폐하께 물려준 사실을 떠돌려보라고 훈계하며, 지금의 모든 문제는 사악한 대신들이 국정을 잘못 관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0월 24일, 리처드 2세는 결국 의원들의 협박에 굴복해 웨스트민스터로 돌아왔다. 마이클 폴이 해임되고 토머스 아룬델이 상서로 임명되었다. 이후 하원은 위컴의 윌리엄의 개혁을 방해하고 세금을 착복하고 프랑스와 내통한 혐의로 마이클 폴을 기소했다. 그리고 행정 개혁을 뒤늦게나마 강행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글로스터 공작과 아룬델 백작의 당파로 구성된 새로운 섭정 의원들을 임명하고 리처드 2세로부터 사실상 모든 권력을 빼앗았다.

11월 1일, 곤트의 존은 포르투갈의 주앙 1세와 만나 정략결혼과 카스티야 침공을 논의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자원병 때문에 잉글랜드 본토 침공 함대의 출항일이 11월 9일로 연기되었다. 그러는 동안 겨울 폭풍이 불기 시작했고, 경험 많은 선장들은 앞으로 2주 동안은 항해를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결국 왕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할 생각이 없었던 섭정 의원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원정을 취소했다.

12월 10일, 봄에 재개될 예정인 프랑스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아룬델 백작이 잉글랜드 해군 제독으로 임명되었다.

6.2. 마게이트 해전 (1387)

파일:Arrestation_Olivier_de_Clisso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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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년 1월 말, 프랑스 추밀원 회의에서 기욤 드 네약과 고셰 드 파사가 지휘하는 2000명의 병력을 카스티야에 파견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카스티야에서 발생한 위기 때문에 잉글랜드 침공 계획도 재검토되었다. 올리비에 드 클리송과 장 드 비엔이 지휘하는, 작년보다 작고 정예화된 3000명의 원정군이 계획되었다. 한편 가을부터 슬로이스에 정박해 있던 함대는 대부분 무역용으로 재활용되었다.

2월 14일, 오포르토에서 곤트의 존의 딸 랭커스터의 필리파와 포르투갈의 주앙 1세의 결혼식이 열렸다.

같은 시기, 리처드 2세는 섭정 의회와의 협력을 거부하고 왕실 가신단과 함께 웨스트민스터를 떠나 미들랜드를 떠돌기 시작했다.

3월 24일, 아룬델 백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 함대가 마게이트 앞바다에서 프랑스 무장 상선 호송대를 기습 공격해 50척을 나포했다. 다음날에는 도망친 함대를 카잔트 섬까지 추격해 몇 척을 더 나포하고 11척을 침몰시켰다. 이후 슬로이스 항구를 2주 동안 봉쇄하며 지나가는 배들을 나포했다.

5월 1일, 아룬델 백작이 지휘하는 60척의 함대가 브레스트에 기습적으로 상륙해 포위군 진영을 공격했다. 그런 다음 브르타뉴 서부에서 기마약탈을 벌이며 브레스트 주둔군이 몇 달은 충분히 버틸 만한 식량을 보급했다. 하지만 다시 잉글랜드로 귀환하는 도중 프랑스 함대의 습격을 받아 일부 함선이 좌초되고 휴 데스펜서가 포로로 잡혔다. 이후에도 아룬델 백작은 북해에서 진행한 해상 작전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군사적 명성을 얻었다.

같은 시기, 리처드 2세는 프랑스로 궁정 기사들을 파견해 샤를 6세와 비밀리에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한편 곤트의 존의 카스티야 원정군은 카스티야군이 결전을 회피하는 전략을 다시 시도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티야의 후안 1세 역시 그동안 막대한 전비를 소모했고, 프랑스에서 파견된 총 5000명에 달하는 지원군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6월 10일, 후안 1세가 보낸 사절단이 트란코소에 머무르고 있는 곤트의 존을 방문했고 고작 이틀 뒤인 6월 12일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트란코소 조약에서 곤트의 존은 60만 프랑(약 10만 파운드)의 배상금과 4만 프랑의 연금, 랭커스터의 캐서린과 왕세자 엔리케의 결혼을 대가로 카스티야 왕위 주장을 포기했다.

6월 25일, 브르타뉴 공작 장 4세가 프랑스군 총사령관 올리비에 드 클리송을 체포했다. 클리송은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는 장 드 블루아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지지하며 그를 자신의 딸과 결혼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 특히 샤를 6세는 클리송의 체포에 분노했다.

6.3. 래드콧 다리 전투 (1387)

파일:Arundel,_Gloucester,_Nottingham,_Derby,_and_Warwick,_Before_the_King.jpg

1387년 8월, 리처드 2세는 섭정 의원들을 제거하기 위한 명분을 주장하기 위해 노팅엄에서 셰리프와 법률가들을 소집했다. 회의에 참석한 셰리프들은 섭정 의회가 '왕국의 모든 평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국왕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리처드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섭정 의원들을 반역자로 선언한 뒤, 왕실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지역인 웨일즈 변경, 미들랜드, 이스트 앵글리아로 가신들을 파견해 2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집하게 했다.

하지만 리처드 2세의 측근 중 일부는 국왕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내전까지 결심한 사실에 경악했다. 이들 중 더블린 대주교 로버트 위크퍼드는 글로스터 공작을 찾아가 국왕이 계획한 모든 음모를 발설했고, 얼마 후 프랑스와 칼레를 오가던 궁정 기사 존 골라프르가 체포되면서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의 비밀 거래가 드러났다. 국왕이 국내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프랑스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잉글랜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9월 말, 곤트의 존이 바욘에 도착했다.

10월 중순, 리처드 2세는 글로스터 공작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체포 영장을 런던 시장에게 보냈다. 하지만 런던 시의회는 이 영장을 집행하지 않기로 결의한다.

11월 10일, 리처드 2세가 런던 시에 입성했다. 다음 날 아침 국왕은 글로스터 공작과 아룬델 백작에게 소환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런던 시민들이 전혀 호응하지 않자 국왕과 측근들은 일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흘 뒤, 노섬벌랜드 백작은 마게이트와 카잔트의 영웅인 아룬델 백작과 글로스터 공작을 적으로 돌린 건 실수였다고 말하며 리처드에게 항복하라고 조언한다. 한편 자신감을 얻은 섭정 의원들은 리처드 2세의 측근들을 반역죄로 고발하는 청원을 제출한다.

11월 17일, 웨스트민스터에서 리처드 2세와 '청원파' 섭정 의원들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리처드 2세는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의원들의 청원을 받아들이고 내년 2월에 의회에서 재판을 열기로 약속한다. 이후 리처드는 글로스터 공작과 아룬델 백작과 워릭 백작을 개인실로 불러 와인을 함께 마셨다.

같은 시기, 장 드 블루아는 오랜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올리비에 드 클리송의 딸과 결혼했고, 클리송의 지지자들이 브르타뉴에서 세력을 늘리기 시작했다. 내전의 위협에 직면한 브르타뉴 공작은 파리 고등법원에 출석해서 재판을 받으라는 샤를 6세의 요구에 굴복하는 한편, 잉글랜드와 다시 동맹 협상을 시작했다.

11월 말, 리처드 2세는 청원파의 청원을 받아들인 지 2주 만에 가면을 벗어던지고 다시 군대를 소집했다. 이에 청원파는 헌팅던에서 곤트의 존의 장남인 더비 백작 헨리 볼링브로크와 노팅엄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의 군대와 합류한다.

12월 초, 웨일즈 변경에서 소집된 4000여 명의 국왕군이 런던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브셤을 지나 동쪽으로 행군하던 중 글로스터 공작과 아룬델 백작의 군대에 가로막혔다. 이에 국왕군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래드콧 다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볼링브로크의 군대에 가로막혀 앞뒤로 포위되었다. 일방적인 전투 끝에 국왕군은 모두 죽거나 항복했다.

래드콧 다리 전투의 소식을 들은 리처드 2세의 측근들은 대부분 국외로 도망쳤다. 마이클 폴은 프랑스로 가서 샤를 6세의 궁정에 피신했고, 요크 대주교 알렉산더 네빌은 브라반트로 망명했다. 로버트 드 베르도 배를 타고 어딘가로 떠났다. 리처드 2세 자신은 런던 탑으로 피신했다.

12월 27일, 런던 시장과 시의원들은 국왕의 마지막 간청을 묵살하고 청원파 군대에게 성문을 열었다. 청원파는 런던탑을 점령한 뒤 리처드 2세의 면전에서 그가 '반역자들과 함께 왕국을 배신했다'며 강도 높은 비난을 가했다. 이후 왕실 기사 십여 명과 성직자 몇 명이 반역죄로 체포되었고, 그밖의 왕실 가신들도 모두 해임되었다.

6.4. 오터번 전투 (1388)

파일:Otterburn_Battle.jpg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오터번 전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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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 1월, 권력을 장악한 청원파는 리처드 2세의 외교 정책을 즉시 뒤집고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을 중단했다. 협상에 관여한 왕실 가신들은 가장 말단의 전령과 서기들까지도 사면 대상에서 제외되고 추방형 등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2월 21일, 잉글랜드 의회는 리처드 2세와 측근들에 대한 보복을 끝내고 아룬델 백작이 지휘하는 해상 작전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를 위한 전쟁세를 징수한다는 소식에 켄트를 비롯한 잉글랜드 남부 지방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7년 전의 대규모 봉기를 기억하는 잉글랜드의 유력자들은 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4월, 부활절 휴회가 끝나고 웨스트민스터로 돌아온 상원과 하원 의원들은 제2의 와트 타일러의 난을 막기 위해 글로스터 공작과 아룬델 백작을 섭정 의회에서 제외할 것과, '왕국이 파멸하기 전에 전쟁 수행 방식을 엄격히 조사하기 위해' 상원 의원들로 구성된 감사위원회를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6월 초, 잉글랜드와 브르타뉴의 동맹 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이에 샤를 6세는 브르타뉴 공작에게 협상을 제안했고, 매우 빠르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거의 동시에 출항한 아룬델 백작의 함대는 뒤늦게 브르타뉴 공작과 프랑스 왕이 화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목표를 변경해 푸아투 서부 해안을 약탈했다. 이 원정은 약탈로 상당한 수익을 얻기는 했지만 전략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6월 29일,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잉글랜드의 방어는 무너졌고 광범위한 파괴와 약탈이 자행되었다.

8월 초, 프랑스와 카스티야의 함대가 포츠머스와 와이트 섬을 습격했다. 동시에 스코틀랜드군이 또다시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파이프 백작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웨스트모어랜드를 침공해 지역 민병대를 격파하고 칼라일을 포위했다. 한편 더글러스 백작은 잉글랜드군을 교란하기 위해 분견대를 이끌고 노섬벌랜드를 침공했다. 더글러스는 더럼 시 인근까지 진출한 뒤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뉴캐슬 교외에서 벌어진 짧은 교전에서 핫스퍼 헨리 퍼시의 군기를 빼앗았다.

8월 5일, 헨리 퍼시가 오터번을 포위한 스코틀랜드 진영을 강행군으로 기습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더글러스 백작이 전사하는 등 스코틀랜드측의 피해도 컸지만, 결국 잉글랜드군이 패배하고 헨리 퍼시 등 주요 지휘관들이 포로로 잡혔다. 전투는 전략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었지만 더글러스 백작의 죽음으로 스코틀랜드 국경의 권력 구조가 불안정해지면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9월, 잉글랜드 의회에서는 청원파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 이어졌다. 지난 정부와 다를 바 없이 저조한 성과를 가져온 청원파 정권은 초기의 추진력을 대부분 상실했다. 하원은 프랑스에서의 전쟁보다는 스코틀랜드의 침공에 대한 대응을 우선순위로 여기고 북부 방어를 위한 전쟁세만을 승인했다.

6.5. 리처드 2세의 역습 (1389)

파일:The_Westminster_Portrait_of_Richard_II_of_England_(1390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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