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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백범일지 | |||
기타 | 피 묻은 적삼 · 경교장 · 묘소/기념관 · 대장 김창수 · 드라마 김구 |
1. 개요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역사기념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맡았던 백범 김구에 대한 자료를 소장, 전시하는 기관이다.2. 건립 과정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직후인 1949년 8월 6일,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지만 초기 활동은 어려웠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김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백범일지를 금서로 지정하고, 독립운동을 다루는 교육과정에서도 김구의 공적은 거의 다 지우고 자신의 업적(외교독립론)을 강조했다. 박정희 정부 이후에는 정치적인 복권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기념사업의 전개는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인 1998년 4월 30일 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기념사업회 행사에 참석해 기념관 건립 지원을 약속하였다. 1999년 여름에는 기념관 건립모금 운동이 진행되었다.기념관 준공식에서 축사를 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
2008년 이름을 백범기념관에서 현재의 백범김구기념관으로 변경했다. 현재는 전시 및 강의, 자료 보관과 각종 독립운동 관련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3. 전시물
기념관 중앙홀에는 김구의 좌상이 설치되어 있으며 1층과 2층에 전시관이 있다. 김구의 출생부터 독립운동 가담, 임시정부 주석 시절부터 해방 이후의 정치 활동까지 다루고 있다. 이 중 김구가 암살당했을 때 혈흔이 뭍은 의상, 김구의 인장, 김구의 회중시계, 김구의 유묵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4. 여담
1999년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관련 유혈진압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고문으로 이름을 올려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이름을 올린 것인데, 당시 사면된 지 2년이 조금 안 된 시점이었다.독립운동 관련 행사 외에도 외부 정당이나 시민단체의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2019년 3월 1일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무회의가 기념관 중앙홀에서 열리기도 했으며, 2021년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의 최종 경선도 이 곳에서 열렸다.[2]
[1] 이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거 이후 발매된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김구에 대해 "절세의 애국자" 라며 극찬했다. 다만 정치적으로는 아쉬움이 있었다고 평했는데, 조건부라도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총선에 나섰다면 이승만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었기에 이런 부분에서 부족했다고 말했다. 참고로 DJ는 해방 정국 때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에 동참하고 있었다.[2] 훗날 국민의힘의 선대위원장으로 임명된 노재승 씨가 SNS에서 "김구는 국밥 늦게 나왔다고 사람 죽인 인간"이라는 글을 써서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국힘의 후보인 윤석열이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선출됐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 결국 노재승 씨는 선대위 위원장직을 사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