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 1995년, 향년 7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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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주식 및 채권 투자자로, 일명 명동 백 할머니라고 불리는 인물이다.1960 ~ 80년대 명동 금융업계의 대모로 군림했다.
2. 생애
1916년, 평안남도 평양의 부유한 지주 가문의 장녀로 태어났다.1940년 도쿄 시부야에 있던 짓센여자전문학교(実践女子専門学校)[1]를 졸업하였다. 이러한 해외 유학 경험으로 일본어, 영어 등 외국어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북한 지역이 공산화되자 가문 전체가 재산을 적몰당하고 6.25 전쟁 중 1.4 후퇴 때 월남한다. 이후 피란 온 부산에서 생계 해결을 위해 양말 장사를 해서 밑천을 마련하였다. 그러다가 친척의 권유로 밑천을 모두 모아 일본제 페니실린을 매집했는데, 마침 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제 의약품 수입금지 조치를 내렸다. 당시에는 미국제보다도 인종이 같은 일본제 의약품이 더 잘 듣는다는 낭설이 돌아 일본제 페니실린의 수요가 높던 때라, 원가의 10배를 불러도 잘 팔렸다고 한다. 이외에 대구로 건너가 군복 등 군수품 장사를 하여 전후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약 5억 환[2]의 거액을 모았다. 참고로 이 때 백희엽의 사촌동생인 백선엽이 이미 대한민국 국군의 장성급 장교였던지라 군수품 조달은 엄청나게 쉬웠다.
이렇게 장사 수완이 좋았던 백희엽은 6.25 전쟁 휴전협정 시점에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갑부였다. 기존의 갑부들이 전쟁으로 인해 쫄딱 망한 경우가 많았는데 백희엽은 되려 이걸 기회삼아 페니실린과 군수물자 장사로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어들였다.
1950년대에는 이 돈을 조흥은행에 예치해놓고 있다가, 이후 주변의 권유에 따라 국채 투자를 시작했다. 이 무렵에는 1950년부터 발행하던 건국국채가 대표적인 국채였는데, 국내 자본 시장이 워낙 취약하여 금융기관, 무역 업자, 일반 기업 등에 강제로 떠넘기다시피할 정도였다. 게다가 대한민국 정부의 상환 능력도 부족했는데, 1956년에는 심지어 상환 예산이 삭감되어 시장에 대혼란이 벌어졌다.[3] 또 1957 ~ 58년에는 입법 혼선으로 이른바 1.16 국채 파동 사건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투자자들의 불안이 극심화되고, 급기야 건국국채는 투기 상품화되어 급등락을 반복했다. 백희엽은 이런 시장 불안에도 꿋꿋이 낮은 가격에 건국국채를 매집하였고, 결국 만기상환을 받아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이후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주식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때부터 증권업계의 전설을 써내려갔다. 특히 동아건설을 비롯해 해외 건설에 뛰어든 기업들의 주식을 집중적으로 대량 매집했는데, 1975년 중동 건설붐이 일고 이들 주식이 폭등하면서 거부를 일구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단기 투자는 철저히 지양하고, 최소 2 ~ 3년, 길게는 10년 장기 가치 투자로 우량 기업을 매집한 결과라고 한다.[4]
1992년 중풍으로 쓰러지고 투병을 하다 1995년 5월 12일, 뇌졸중으로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사망했을 당시 백 여사가 보유한 실물자산만 해도 200억이 넘었다고 한다.
3. 성격 및 여담
1960년대에 이미 수백억원의 현금을 굴릴 수 있었던 거부였음에도, 본인은 돈을 쓰거나 화려한 생활을 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옷도 매우 싸고 해진 것만 입었으며 검소한 생활을 고집했다. 삼보증권 회장을 지낸 강성진은 “백 여사는 1970년대 초 삼보증권[5]의 지분을 10%나 소유한 2대 주주였으면서도 점심은 항상 자장면만 먹을 정도로 검소했다[6].”고 회고하기도 했다.내 이야기가 신문에 나면 많은 사람들이 돈 버는 요령을 물어볼 것입니다. 돈은 눈이 있어요. 때문에 돈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돈이 찾아옵니다. 단돈 10원이라도 돈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결코 돈을 모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1983년 2월 10일자 인터뷰 기사
《조선일보》1983년 2월 10일자 인터뷰 기사
미래에셋그룹의 박현주 회장을 제자로 두었다. 1970년대 말 고려대학교 재학생 박현주는 백희엽의 명성을 듣고 그녀의 사무실에 무작정 찾아가서 주식 투자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고, 이후 비서처럼 허드렛일을 하며 가치투자의 안목을 배웠다고 한다. 박현주는 “어찌어찌하다가 백 할머니 뒤를 따라다니게 됐습니다. 할머니 사무실로 출근하고 증권사나 기업체 방문 때 동행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분께서 정석 투자만 하는 거예요. 답답할 정도로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광화문 곰’[7]하고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고이율의 대부업으로 축재했다는 설에 대해, 생전에 본인은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정당하게 재산을 모았다."고 항변했다. 실제로 금융업계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1970년대까지는 증권거래소와 증권회사들이 모두 명동에 있었기 때문에, 주식 투자에 거액을 동원할 수 있는 개인 투자자를 명동 사채 시장의 큰 손이라고 흔히 불렀다고 한다. 이 때 사채는 사적 대부업이 아닌 회사채, 채권 등을 일컫는 단어이다. 즉, 채권 투자의 큰 손이었다는 의미이다.
4. 가족 관계
1940년대 말에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을 지낸 박용학을 남편으로 두었다.6.25 전쟁에 참전한 백선엽, 백인엽과는 사촌 관계이다.
장남 박의송은 우풍상호신용금고의 사장으로 재직했으며, 삼남 박의철은 로얄관광의 대주주였다.
큰사위는 박인용 영동세브란스 병원장, 작은사위는 이운형 부산파이프사장이다.
5. 창작물에서
한국 근대기에서 증권, 사채업에 종사하는 할머니 캐릭터가 나온다면 이는 모두 백희엽을 모델로 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웹소설 《증권가 큰손 백 할머니》의 직접적인 모델이다.
영화 '마스터' 에서 주인공 김재명 팀장(배우 - 강동원)이 사기꾼 진현필 회장(배우 - 이병헌)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 자금을 빌린 할머니(배우 - 박정자)가 바로 백할머니 백희엽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이다.
[1] 현 짓센여자대학의 전신.[2] 2024년 현재 가치로 무려 650억원에 달하는 거금이다![3] 이른바 '마호사건'[4] 투자한 주식 대부분이 우량주였기 때문에 똑같은 현금부자였던 '광화문 곰' 고성일과 다르게 증권가를 떠난 이후에도 그 명성은 여전했다고 한다.[5] 미래에셋증권의 전신들 중 하나.[6] 다만 1960년대의 자장면의 위상은 지금으로 따지면 아웃백 스테이크에서 한 끼 식사 정도 되는 수준이 되었다. 즉 서민들도 마음만 먹으면 한 번쯤이야 얼마든지 사먹을 순 있어도 이걸 매일 점심때마다 이런 메뉴를 먹기에는 가격이 부담될 것인데, 당시 매일 점심마다 그 자장면을 사먹을 정도면 아주 사치스러운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그렇다고 아주 검소한 정도라고 보기는 어려웠다.[7] 본명은 고성일이며, 염료 장사와 부동산 투자로 번 자금으로 1970~80년대 주식 시장을 주름잡던 큰 손이다. 백희엽과 달리 막대한 자본을 특정 종목에 쏟아부어 주가를 끌어 올렸다가 일거에 처분하여 차익을 실현하는 과격한 투자를 즐겼다. 가치 투자로 안정적인 큰 수익을 내고 명예롭게 은퇴한 백희엽과 달리, 1990년대 들어 큰 투자 실패를 거듭하며 거금을 잃고 시세 조작, 불법 대출로 기소되는 등 불운한 말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