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21:45:29

버나드 메이도프

<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버니 메이도프
Bernie Madoff
파일:메이도프.jpg
본명 버나드 로렌스 메이도프
Bernard Lawrence Madoff
출생 1938년 4월 29일
뉴욕주 뉴욕시 퀸스
사망 2021년 4월 14일 (향년 82세)
노스캐롤라이나 버트너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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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배우자 루스 메이도프(1959년 결혼)
아들 마크 메이도프(1964년 출생~2010년 사망)
아들 앤드루 메이도프(1966년 출생~2014년 사망)
학력 앨라배마 대학교 (편입) → 호프스트라 대학교 (정치학)
직업 증권 거래인, 투자상담가, 투자가
종교 유대교
소속 Bernard L. Madoff Investment Securities[1]

1. 개요2. 생애
2.1. 역사적인 폰지사기를 펼치다2.2. 최후2.3. 유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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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을 역임한 증권 거래인. 유대계 대학 이사장을 역임한 유명한 유대계 미국인이자,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폰지사기 주동자.

2. 생애

그의 조부모는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건너온 유대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으로 이민하여 퀸즈에서 거주하며 메이도프를 낳았다.

그의 어린시절은 지독하게 가난하여 이성과 얘기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댄스파티에 여자를 데려가기 위해 25센트로 여자애를 움직이게 했다. 다른 이들에 의하면 이는 후일 그의 범죄행각에 동기부여 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해상구조사로 일하며 부업으로 잔디 기계를 판매했다. 그리고 후일 그의 아내가 되는 루스를 만났다.

그의 아버지는 여러 사업을 벌였지만 전부 실패하고 집까지 차압된다. 이로 인해 그의 어머니는 동네 혈액 은행에서 일했다. 버나드 메이도프는 이런 경험 때문에 성공하려는 강박을 갖게 된다. 지능은 꽤 높아 로스쿨에 들어갔지만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그만뒀다. 하지만 루스와 결혼하고 몇 주 후 그의 장인의 회계법인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행정업무를 병행하며 처음엔 성실히 일했지만 뒤로는 소규모 투자 산업을 시작했다. 이후 장인의 도움을 받아 증권 회사를 차린다.[2] 그는 곧 주식 거래 중개보다 직접 투자 자문으로 나서는 게 더 큰 수익을 낼 수 있다 생각하고 투자 자문가로 일하기 시작한다.

메이도프는 장인이 인맥을 이용하여 투자금을 모은 뒤 투기주에 투자한다. 당시엔 주식시장이 물 오를 때라 이런 주식이 많았지만 그만큼 위험도가 높았다. 초기 운용 투자 산업은 장외 시장에서 합법적이었으나 그는 규정집에 있는 거의 모든 규칙을 무시하면서까지 일을 벌였다. 결국 1962년 5월 주가가 곧두박칠치자 휴지 조각 증권인 투기주가 대폭락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는 이 사실을 장인의 도움으로 은폐하는데 성공한다. 사실 이 때부터 그는 싹수가 보였던 셈이다.

메이도프는 미국에서 인정받는 투자자였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으로 투자를 해 자수성가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미국 주식시장에 최초로 전산화를 도입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나스닥의 전신인 전미증권협회에 뉴욕증권거래소보다 더 빠른 네트워크를 구축하기위해 적극적으로 컴퓨터를 도입했고 나스닥의 마켓 메이커 중 한 명으로 한때 그가 세운 회사가 지금의 블랙록[3]처럼 나스닥 전체 주식의 10%~20%의 주식을 움직이는 유동성 공급자 즉 시장메이커의 역할을 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나중에는 나스닥의 회장까지 역임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건 메이도프 가족재단을 만들어 각종 자선활동을 하며 여러 단체에 매년 막대한 양의 기부금을 지원했고 자신의 아들이 암에 걸렸을 때 5억 달러를 암 연구에 지원하기도 했다.

이렇게 능력 좋고 인격도 훌륭하다는 평판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지만, 2008년 금융위기가 일어난 뒤 여지껏 감춰진 그의 추악한 진실이 드러났다.

2.1. 역사적인 폰지사기를 펼치다

메이도프는 주식 브로커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주식 투자를 했으나 큰 수익을 올리지 못했고, 이를 계기로 생각을 바꿔 돈이 많은 투자자들을 찾아 나섰다. 메이도프는 유대인이었고, 폰지사기라는 것이 발각되기 전까지만 해도 유대계의 롤모델처럼 취급받았다. 이렇게 유대인 공동체의 신용을 샀기 때문에[4], 부유한 부자들이 모이는 장소들을 찾아가 자신이 다른 투자자들에게 인정받는 주식 브로커이고 자신에게 투자를 하면 돈을 불려서 매년 10%의 수익률을 보장해 주겠다며 구워삶아서 투자자들을 쉽게 끌어모을 수 있었다. 투자한 사람들의 상당수도 유대인이었다.

메이도프는 이미 22세에 자신의 이름을 딴 설립한 증권사(버나드 메이도프 투자증권)를 통해 모집했다. 처음에는 정상적으로 운영했으며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는데다 수익률도 10% 보장해주니 은행들도 그의 증권사에 투자했다. 이렇게 버나드 메이도프 투자증권는 급격히 성장하여 대기업이 되었다.

그런데 버나드 메이도프 투자증권은 투자금을 받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러 투자자들에게서 투자금을 받고 원금의 10%만 꼬박꼬박 돌려줬을 뿐이다. 하지만 메이도프를 믿고 투자하는 사람들이 많아 돈이 부족하지도 않았고, 메이도프의 명성을 믿고 원체 많은 사람들이 투자를 했으며 원래 돈이 많은 사람들이라 갑자기 돈을 다시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일도 많지 않아 메이도프의 사기행각이 드러나지 않았다.[5] 그렇게 수십 년을 버티다가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원금 상환을 동시에 요구하였고, 이들에게 줄 원금은 진작에 탕진했던 메이도프는 결국 경찰에 자수하여 사기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 투자자금계좌를 관리하던 은행은 JP모건 체이스이었는데, 이들은 이렇게 들어온 투자금액이 한 푼도 투자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방조한 책임으로 26억 달러의 벌금을 냈다. 당시에는 JP 모건도 사기를 도왔다라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JP 모건조차도 "메이도프니까 뭔가 계획이 있겠지" 라고 생각을 했겠지 설마 그렇게 큰 규모의 돈을 단 한 푼도 투자하지 않고 자전거래에 가까운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메이도프는 이때까지 투자금으로 호화생활을 했다는 것도 드러났다. 개인 요트는 물론 수영장까지 갖춘 초호화 저택을 소유하는 등 여러 호화로운 삶을 즐겨왔던 것이다.

총 피해액은 약 650억 달러에 달하며 스티븐 스필버그, 존 말코비치, 케빈 베이컨, 엘리 비젤, 뉴욕 메츠의 구단주 프레드 윌폰 같은 유명인사들도 피해를 당했다. 많은 투자자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비관하고 자살을 택했다.

다만 위의 650억 달러는 사기 과정에서 부풀려진 전체 펀드의 규모이며, 실제 그에게 간 돈은 190억 달러이고 법률 회사 BakerHostetler의 변호사 어빙 피카드의 지휘 하에 거물 투자자 4명과 장기 투자로 투자 원금보다 많은 이익을 얻은 이들에게서 총 140억 달러를 환수하였다. 이렇게보면 좋은 이야기같지만 버니의 장기 투자자들은 그의 커리어 초기에 투자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이미 은퇴한 연금생활자이거나 그들의 자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들이 그간 수령했던 이익을 이미 대부분 써버렸기에 노년에 집과 재산을 빼앗기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졌다. 피카드의 회사는 신탁 관리 보수로 매년 10억 달러라는 거액을 챙겼기 때문에 피해자들에게는 더욱 더 안타까운 일이다.

이후 버나드 메이도프 투자증권은 이 사건의 여파로 파산했다.

2.2. 최후

이후 메이도프는 구속기소되어 재판에서 징역 150년 형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6] 워낙 규모가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다 보니 원한을 많이 샀기 때문에, 교도소에 수감된 직후 동료 수감자들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등 생명의 위협이 잇따랐다. 결국 그는 뉴욕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콜롬보 패밀리 두목에게 붙어 겨우 목숨만큼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마피아/기타 문서 참고.

그의 사기 행각 때문에 죄 없는 가족들까지도 비참한 몰락을 당해야 했다. 장남인 마크 메이도프는 사람들의 비난과 민사소송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7]했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사기 행각을 금융위기 전까지 몰랐다고 한다. 참고로 자살한 날짜는 메이도프의 사기행각이 드러난지 정확히 2년째 되는 날로 그가 이날에 맞추어 일부러 자살했으며 아버지에게 보내는 메세지임이 틀림없다고 수십년 메이도프 증권 직원에서 일해오며 마크의 어린시절부터 지켜본 직원은 증언했다.

두 아들들은 살아생전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으며 부인 루시 메이도프는 13살 때부터 함께했던 버나드 메이도프를 버릴 수 없다며 자식들과 대립각을 세우며 연락을 끊었고, 마크가 자살한 후 차남과 화해하였으나 차남 앤드루 메이도프는 암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현재 루시 메이도프만 생존해있으며, 자살한 장남의 첫 번째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루시가 사기 사실을 알고 적극적으로 도왔는지에 대한 민사소송은 다 끝나지 않았으며, 거의 파산 상태에 가까운 상황이기 때문에 100달러 이상의 지출은 전부 보고해야 한다.

본인도 2021년 4월 14일 82살의 나이로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고혈압, 심혈관질환이지만 고령인점을 감안할 때 사실상 자연사에 가깝다. 유대인으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사망 후 화장되었다. 왜 화장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그의 가족들과 일가친척들은 그의 화장된 유골마져 찾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한때 언론에서는 가난한 집안 출신에서 맨손으로 모든 걸 이루고 거대 회계법인 집안의 부잣집 처가와 명문대 출신의 가정적인 두 아들과 함께 자신의 회사를 이끌어가던 자수성가의 아이콘으로 여겨졌지만 폰지사기의 최후는 매우 비참했다.

메이도프의 폰지사기는 불행 중 다행으로 보수환수제도를 통해 약 75%가 회수되었다. 환수과정도 매우 이례적인데 우선 사기혐의가 드러난 총액이 아닌 애초에 투자자들이 납입한 원금을 손실액으로 잡고 납입한 금액보다 더 많은 배당을 받아간 모든 사람을 추징했다. 물론, 원금의 일부를 돌려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메이도프의 사기행각이 1960년대부터 이어져왔기 때문에 은퇴 후 퇴직금까지 전부 메이도프에게 맡기고 배당금으로 은퇴생활을 해오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원금이 사라지고 더 많은 돈을 배당받았다고 추징을 당해 전재산을 압류당하는 노인들이 매우 많았다.

2.3. 유사 사건



[1] 창립자이다.[2] 이 장인은 버나드가 처음 손해를 입었을 때 몰래 메꿔주는 식으로 도움을 줬다. 이때 솔직하게 실패를 받아들였으면 이 뒤에 일어날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3] 당시의 나스닥은 장외주식시장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버나드의 회사가 블랙록 같은 위상은 아니었다. 다만 많은 주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맞다.[4] 유대계 사업에서는 같은 유대인(친족)으로서 정을 호소해 계약을 따내거나 사업을 하는 케이스가 많다. 쥐(만화)처럼 유대인이 주인공인 작품에서 자주 묘사되는 부분.[5] 과거에 사기가 드러날 뻔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위조 문서와 그의 엄청난 명성 때문에 그대로 묻혔다. 심지어 고객에게 돌려줄 원금이 모자란 순간에도 거액 자산가에게 거액을 빌리는 방식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6] 인간의 수명을 추월한 형량이라 사실상 종신형이나 다름없다. 원래 미국에서 이 정도 형량이면 다른 유형의 범죄같으면 사법거래 여하에 따라 형량이 n분의 1 수준으로 감형돼서 최종 형량은 10년 이하가 되는 경우도 흔하지만 메이도프같은 악질적인 금융사범에게는 그런 거 없다. 그만큼 미국에서 금융범죄는 도저히 용서못할 악질적인 범죄로 간주된다.[7] 사건 당시 현장 상황이 매우 비참했다. 마크는 부인이 외출한 사이 두 살배기 아들을 거실에 두고 방에서 자살했고, 자살 직전 아내에게 문자를 보내어 장인이 마크의 집을 찾아갔다가 시신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