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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무장공비 침투사건 | ||
<colbgcolor=#c0c0ff,#00003f> 시기 | 1995년 10월 24일 | |
장소 |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 | |
교전국 | 대한민국 | 북한 |
병력 | 대한민국 육군 제203특공여단 제32보병사단 충남지방경찰청 국가안전기획부 | 조선로동당 작전부 |
피해 | 사망 2명 | 사망 1명, 생포 1명 |
결과 | 대한민국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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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5년 10월 24일 북한 무장간첩 김동식과 박광남이 접선을 위해 충청남도 부여군의 한 사찰에서 만나던 중 첩보를 받은 국가안전기획부의 협조에 불응해 군, 경찰 병력과 총격전을 벌인 사건.
2. 침투
북한 무장간첩 김동식과 박광남은 조선로동당의 군관으로 1995년 8월 29일 5t급 공작선으로 북한 황해도 해주를 출발해 8월 30일 자정 인천 강화군 양도면 진평리 해안에 침투했다.이들은 10월 24일 부여 정각사 인근에서 군경 합동 수색망에 토벌 될 때까지 성남과 대전에 있는 여인숙을 활동거점으로 확보하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 유가족으로 행세하면서 간첩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위조한 주민등록증 4매를 소지하고 지역과 여건에 따라 바꿔 사용하면서 서울·대구·광주·경기·강원·충남 일원을 활보하며 간첩 활동을 했고 남대문시장 등지에서 지령 수신용 라디오·의류·시계 등의 공작을 위한 장비를 구입하기도 했다.
또 남한의 운동권, 진보 인사[1]들과 접촉해 자신들을 북한에서 온 당 연락원이며 같이 통일 운동을 하자는 등 노골적인 포섭 행위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3. 총격
1995년 4월부터 충남 부여지역에 고정간첩이 활동하고 있다는 첩보를 포착한 안기부는 10월 충남 부여군 석성면에 있는 사찰 정각사에서 고정간첩과 북한 남파공비의 접선 징후를 포착하고 안기부 및 경찰 대공요원등 10여명이 정각사 인근에서 잠복해 북한 무장공비와 고정간첩과의 접선을 기다렸다.무장공비들은 몰랐지만, 이들이 접선하기로 한 1960년대 침투했던 고정간첩 '봉화 1호'는 이미 80년대 초반에 대한민국으로 전향하여 북한에 허위 정보를 보내주었고 그 덕분에 1983년 부산 다대포에 침투했던 무장간첩 2명을 체포할 수 있었다.
1995년 국가안전기획부는 봉화 1호를 시켜 '고령으로 간첩 활동이 어려우니 월북을 도와줄 공작원을 보내달라'는 연락을 북한에 넣었다. 당시 북한 정보기관은 부산 다대포 사건의 진행 과정을 보고 봉화 1호의 전향 여부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에 북한에서는 봉화 1호의 처분을 놓고 토론한 끝에 전향하지 않았다는 쪽이 우세해서 2명의 공작원을 남파하되, 의심스러우면 봉화 1호를 사살하고 도망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봉화 1호는 스님 신분으로 위장했기 때문에 정각사에서 지냈다. 경찰 대공부서 2명과 국가안전기획부 대공부서 2명, 봉화 1호가 6개월 동안 무작정 기다렸다. 이 절에는 주지스님 1명이 있었는데 스님은 아무것도 상황을 몰랐다. 방첩요원 4명은 매일 법당 청소를 하고 절 담장을 고치는 등을 하며 6개월 넘게 무작정 기다리기만 했다. 그러던 중 드디어 무장공비들이 봉화 1호를 접선하려고 7개월 만에 나타났다.
10월 24일 정각사에 나타난 신원 미상의 2명이 안기부 수사관의 불심검문을 뿌리치고 도주하던 중 안기부 소속 수사관과 총격전을 벌이며 30여분간 대치했다.
안기부 직원의 협조 요구를 받고 112 타격대가 토벌차 출동해 무장공비와 총격전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충남 부여경찰서 소속 장진희 경사가 숨졌고 나성주 경사도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 순직[2]했다.
이어 경찰의 지원 요청을 받은 육군 병력이 출동하고 북한 공비 김동식은 군경 토벌대와의 총격전 끝에 종아리에 관통상을 입고 4번 국도에서 생포됐다.
또 다른 한 명인 박광남은 인근 야산으로 도주했다.
경찰과 안기부는 무장 공비들이 경기도 분당 중앙공원 약수터 부근 묘지에 설치해 놓은 무인 ‘드보크[3]'를 찾아내 은닉해 둔 송신기와 난수표, 암호표, 비상식량 등 간첩 장비를 확보했다.
4. 토벌
박광남이 석성산으로 도주하자 다음날 25일 군·경 통합작전본부가 조직돼 공비토벌에 대비했고 공수특전여단, 203특공여단 소속 병력 6000여명이 증파됐다.통합작전본부는 오후 6시부터 부여와 공주, 논산 지역에 야간 통행 금지령을 발령하고 간첩의 식량 약탈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야간 투시장비 등을 탑재한 헬기를 출격시켰다.
26일 경찰과 군은 203특공여단을 동원해 석성산 외곽에 4겹의 포위망을 치고 공수부대원 6000여명을 투입해 정밀수색을 벌이는 한편 도주공비 박광남의 몽타주를 제작해 부여 인근 청양, 공주, 논산 지역에 배포했다.
석성산 근처 부여시내와 논산, 공주 지역에는 오전 6시까지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되었고 임시휴교에 들어갔던 석성면 내 학교는 오전 단축수업만 실시하면서 토벌에 협조했다.
그리고 27일 오전 10시 50분경 부여군 초촌면 신암리 야산에서 무장공비 박광남이 토벌대(203특공여단)에 의해 총에 맞았는데 서울 경찰병원 중환자실로 압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다.
토벌대는 사살한 박광남에게서 벨기에제 베이비 브라우닝 권총 1자루와 소음기, 청바지, 티셔츠 등의 피복, 공작금 한화 9만 3800원과 미화 1500달러, 서울시 지하철 노선도, 버스 토큰과 전화카드가 들어있는 지갑을 찾아냈다.
5. 특징
이들은 조선로동당에서 철저한 이남화 교육을 시켜 북한 사투리를 쓰지 않고 남한 환경에 익숙하게 훈련시킨 이른바 신세대 공작원으로 정교하게 위조된 주민등록증을 사용하면서 남파 간첩들의 지문을 직접 찍고 컴퓨터 조회에서도 걸리지 않도록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과거 분실 주민등록증을 습득해 조잡하게 위조해 사용한 간첩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또 이들은 하이테크와 볼펜 모양의 독침과 최신형 무전기를 휴대하고 있었으며 권총 이외에도 독총과 독약앰플, 무전기 15대 난수표 18종 등 첨단 간첩장비를 휴대하고 있었다.
2개월 간의 비교적 단기 공작 활동임에도 미화 6만 1000불, 한화 400만원 등 거액의 공작금으로 확보해 남한 전역에 설치된 7개소의 무인 포스트를 통해 무전기, 권총과 공작금 등 간첩장비를 고정간첩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1995년 ‘부여 무장간첩 사건’은 당시 남한 운동권 세력에 주체사상 등이 만연되어 있는 점 등을 이용해 그들에게 접근해 북한에서 온 공작원이라고 노골적으로 신분을 밝히는 대담하고 과감한 공작전술을 구사한 북한의 거칠 것 없는 대남공작을 입증한 사건으로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