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6 22:53:19

야간통행금지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야통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야통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직 야구선수 및 현직 야구감독에 대한 내용은 류중일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개요2. 대표적 사례
2.1. 조선의 사례2.2. 한국의 사례
2.2.1. 내용2.2.2. 예외2.2.3. 통행증2.2.4. 여담
2.3. 해외의 사례

1. 개요

밤에 허락받지 않은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제도. 현대까지도 밤에 치안이 좋지 못한 곳은 있고 과거엔 더 심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범죄율을 강제로 낮추고자 과거에 많이 시행했던 규범이다. 또, 그 당시에는 어차피 횃불이나 초롱불 외에는 조명이 없고 해 떨어지면 일반인들이 할만한 야외활동이 거의 없어서 별 반발이 없었다.[1] 거추장스럽게 횃불 들고 놀 것도 아니고.

영어로는 'curfew'(커퓨)라고 부르며 어원은 프랑스어로 '불을 덮어서 끈다'는 뜻인 'couvre-feu'이다. 중세시대 영국에서 오후 8시가 지나면 화재 예방을 위해 강제 소등과 통행금지를 명령한 게 유래라는 이야기가 있다. 현대에는 공항에서의 야간 이착륙 금지[2]를 지칭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2. 대표적 사례

2.1. 조선의 사례

조선 시대에도 인정이 울린 뒤 남성이 밖에 돌아다니려면 의원을 부르거나 상을 당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군인같이 특별한 직업을 가져야 했다. 통금이 시작되는 시간을 인정, 끝나는 시간을 파루라고 하는데 태종 때부터 초경 3점(오후 8시)부터 오경 3점(익일 오전 4시 30분)까지 금지였고, 세조 때 이경(오후 9시)부터 오경(익일 오전 3시)까지로 완화되었다. 원래는 명나라의 법을 따라서 파루 때만 종을 쳐서 알렸으나, 통금을 잡는 순관과 통금시간이다 아니다 마찰이 있었는지 세종 때부터는 인정 때도 통금을 알리는 종을 쳤다.

통금이 지난 이후에 사정이 있어 통행을 하려면 경무소에서 허락을 받아야 했다. 허락 없이 이를 어겼다가 잡히면 파루까지 경무소에서 밤을 보내다가 다음날 아침 곤장을 맞고 풀려났다. 초경(저녁 7시) 이후 돌아다니면 10대, 이경 이후로는 20대 하는 식으로 시간당 10대가 추가되었다.

단, 유교적 문제로 바깥 활동을 자제해야 했던 여성들에게는 바깥일을 볼 시간을 준다고 초경부터 이경이 되기 전(저녁 7시~9시)에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했고, 남자들의 통행은 금지하였다. 한 외국인이 조선에 와서 남긴 기록에 따르면 보통 길거리에 여자는 하나도 없는데, 종이 땡 치면 남자들이 싹 사라지고 여자들만 다닌다고 신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음양오행설과도 연관이 있으며 남성을 양, 여성을 음으로 보아 양기가 충만한 낮에는 남성이, 음기가 넘치는 밤에는 여성이 활동하기 좋다는 논리였다.

태종 때까지는 통금 시작을 알리는 종을 치지 않았기에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사헌 이원이 몸종과 밤에 길을 가다가 순관 윤종이 검문을 했는데, 통행금지 위반으로 몸종을 체포해 간 것이다. 이원은 삐져서 태종에게 사실상 윤종을 처벌해 주기 전에는 출근하지 않겠다고 상소를 올렸다.

고작 순관에 불과한 윤종보다는 대사헌인 자신의 편을 들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겠고,[3] 통금을 어긴 죄를 물어봐야 곤장 10대였으므로 쉽게 생각한 듯 하다. 태종은 증인이 없는 상황이라 내가 결론을 낼 수 없으니 그냥 출근하라고 했는데 이원의 삐짐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은 이원을 파직했으며 덤으로 윤종도 몸종만 체포하고 대사헌이라고 봐준 죄로 파직되었다.
대사헌(大司憲) 이원을 파직하였다. 이원이 통행시간을 어겨 집으로 가는데, 순관인 호군(護軍) 윤종이 이원의 근수(根隨, 몸종)을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이튿날 이원이 본부에 가서 윤종을 탄핵하고 수일동안 출근하지 않았다. 임금이 직접 출사하라 하였으나,
"전일에 신이 초경 3점 전에 집으로 돌아가는데, 순관 윤종이 통행시간을 어겼다 하여 신의 근수를 잡았습니다. 윤종이 초경 3점 이전에 검문하였다면 윤종에게 죄가 있으며, 신이 통행시간을 어겼다면 신에게 죄가 있으니 이 일을 판단해 주기 전에는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경이 출사하였으면 한다. 경의 말은 이치에 맞으나 내가 그 일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원이 출사하지 않자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대사헌 이원은 남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위치이건만 통행시간을 어기고 돌아다니다가 검문 당하기나 하고, 윤종도 순관으로서 죄를 지은 사람을 봤으면 잡아놓고 심문했어야 하는데 근수만을 잡았다가 놓아주었으니, 두 신하는 모두 법보다 사사로움이 앞서니 모두 파직하시옵소서."
하여, 이를 윤허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1401년) 9월 21일

이처럼 조선시대에 통금은 엄격해서 고위직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였다. 누구누구가 통금에 걸렸는데 풀어줬더라고 왕에게 고발하고, 왕은 그게 사실로 드러나면 위반자는 곤장을 치고, 봐준 자는 처벌했다는 기사들이 종종 보인다.

2.2. 한국의 사례

2.2.1. 내용

표면적인 목적은 치안 유지였지만, 이 정책 때문에 통금이 시행된 약 36년간 국민들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권리를 제약받았다.

1945년 9월 7일부터 맥아더의 포고령에 의해 실시되고 1982년 1월 5일에 해제되었다. 처음에는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20시부터 5시까지 야간통행금지를 시작했다가 통행금지 시간이 22시부터 4시로 바뀌었다. 그러다 6.25 전쟁 직후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61년부터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1982년까지의 통상적 통금 시간은 0시부터 4시까지였다. 다만 1960년 4.19 혁명, 1979년 부마항쟁 당시와 박정희사망으로 인한 계엄령이 발동될 때는 밤 22시부터 4시까지 통금시간을 2시간 늘린 적도 있었다.[4]

당시에는 나이 불문 전 연령 층이 통금 대상이었으며, 이를 어겼을 경우 거동 수상자로 곧바로 체포해 파출소 등에서 조사를 받고 다음 날 아침에 훈방조치 되는 경우가 많았다. 통금 위반 그 자체는 큰 중범죄는 아니어서 사정을 말하거나 반성하는 모습 좀 보이면 넘어가줬으며, 이나 단위에서는 이웃집이나 마을회관, 구멍가게 잠깐 오가는 정도 등은 암암리에 봐주기도 했다. 이 당시에는 과장 좀 보태서 경찰 기관들이 일종의 숙박업소 역할을 했다. 술집은 23시 30분이 되면 영업을 마쳤으며, TV방송도 23시 30분에 정규방송을 끝냈다.[5]

이 때문에 통행금지 바로 직전인 23~24시 사이에는 집에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고 한다. 물론 심야에 환자 등이 발생할 경우는 예외. 집에 전화기가 없어 직접 환자를 데리고 병원에 가거나 소방서 등에 뛰어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던 시절이라, 이런 때는 단속하려는 경찰에게 요청하거나 아예 파출소로 직접 들어가 사정을 말하면 경찰이 직접 119를 불러 주거나 즉석 통행증을 끊어주고 면책 해 주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통행금지에 잘못 걸린 소수의 사람들은 공권력에 의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끌려가 부랑자라는 오명을 쓰고 국가폭력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로는 대한청소년개척단 문서 참조.

일단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이상 단위에서는 대체로 잘 지켜진 편인데, 존 위컴 장군한미연합 사령관 시절 부인과 야간에 산책을 즐기며 한밤중에 쥐 한마리 안 보일 만큼 적막하고 방해하는 사람이 없어 편했으며, 한국인들이 통금을 칼같이 지키는 데 늘 놀랐다고 회고한 바가 있다.

1982년 3S정책의 일환으로 전두환 정부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이 당시 사람들이 1시에 길거리에 나와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1970년대 초중반 출생자들은 자정이 되면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파출소나 동사무소에서 내보내는 사이렌 소리인데 자정이면 이미 자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이렌을 울렸다. 동장, 통장의 직권으로 주택가는 볼륨을 좀 줄이기도 했다.

2.2.2. 예외

예외 지역이 있었는데 도서 지역인 제주도울릉도는 1964년에, 충청북도는 1965년에 해제됐다. 그 외 주요 고속도로석탄, 시멘트 등 산업이나 생필품을 운반하는 트럭 등 수송수단과 경주시(구 월성군 제외), 온양(구 아산군 제외), 해운대구 등 관광지, 경기도-충청남도 지역을 제외한 전 도서지역은 1966년에 해제됐다. 덕분에 유일하게 바다와 접해있지 않은 도(道)였던 충청북도는 접경 지역에 사는 거주민들이 술 마시다가 자정이 가까워질 것 같으면 시/도 경계를 넘어서 충북 지역[6] 이외에도 농촌 지역에서는 면 소재지의 경우 사이렌을 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정 날짜가 되면 그 날만 일시적으로 풀어주기도 했다. 주로 경사스러운 날에 주로 해제해줬는데 부처님오신날, 크리스마스신정 연휴인 1월 1일~3일이 있었다. 또한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날 역시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고 통금을 풀어주기도 했다. 전 세계가 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특히 한국에서 크리스마스가 흔히들 커플들의 날로 인식되는 데에는 통금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 크리스마스 새벽 때 통행금지를 풀어줘서 밤 늦게까지 마음 놓고 놀 수 있던 몇 안 되는 날이라 통금이 사라진 그 전통이 훗날 1982년에 폐지된 이후에도 지금까지 이어진 것.

전국이 아닌 일부 특정 지역일시에 해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여의도 지역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거기서 치렀던 국풍81이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 대성회 등이 열리던 날은 대형 행사의 여파로 일시적으로 인파가 몰림에 따른 귀가불편 고려 및 정부의 행사 진흥 지원 목적으로 그 지역만 일시에 해제시켜주는 경우가 있었다.

2.2.3. 통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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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적으로 야간통행이 필요한 경우, 야간통행 허용 스탬프를 찍어주기도 했다. 자정을 넘어 역에 도착하는 열차편이나 고속버스 막차를 타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사람들이 주로 적용되었는데, 이 경우엔 해당 역/터미널의 관리 직원이 하차한 승객들에게 찍어주었다. 그 외에도 출산 등 급한 일이 있으면 처음 단속한 경찰이 다른 경찰에게 굳이 사정 설명하느라 귀찮지않게 즉석에서 발급해주기도 했다.

당시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쩌다가 저런 스탬프를 얻게 될 일이 있으면 챙겨뒀다가 다른 날 심야에 경찰에게 보여주고 넘어가려다가 날짜가 들켜서 치도곤을 치루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2.2.4. 여담

통금 덕분에 직장인들 귀가시간이 빨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는 않았고[7] 오히려 외박의 빌미가 됐다. 야근시키다가 통금 시간 넘어가면 회사 건물 내의 숙직실에서 자게 하면서 일을 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점을 역이용해 몇몇 직장인들은 집에 야간 당직이나 야근이라고 뻥치고 밤새 놀다, 여관에서 투숙하는 경우도 많았다. 덕분에 여인숙이나 여관 같은 서민형 숙박업이 높은 수익을 올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린이나 청소년의 경우에는 통금의 영향으로 비행 청소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되겠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야간통행금지로 인적이 없으니까 오히려 더 활개친 면도 있다. 폐건물 등에 숨어서 노숙을 하거나 심지어는 친구 집에서 외박을 하기도 했고, 순찰이 없는 인적 드문 곳에서 탈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당 제도가 아직도 있었다면 야간자율학습은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재도 비상사태 때 임시적으로 해당지역의 민간인에게 야간통금을 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연평도 포격 사태 때가 그렇다. 사실 이러한 이유로 1982년 통금해제 때도 휴전선 인근 해안 지역은 통금해제 제외지역이었다. 이 지역들은 1988년에 통금이 해제됐다.

2019년 현재에도 대성동마을은 통금이 유지 중이며 통금 시간은 0시부터 5시 30분까지이다. 자세한 내용은 대성동마을 문서 참조.

북한의 경우 1955년에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으며 그 시절에는 북한이 남한을 이러한 제도를 들먹이며 비난했었다.

통금이 있던 시절엔 일부러 여친과 마시다가 깜빡한 척 하고 통금을 넘겨버렸다. 그리고 어쩔 수 없잖아, 여관이라도 가자라며 여관으로 가는 꼼수도 있었다.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도 등장인물들이 길에서 울려 퍼지는 통금 사이렌을 듣고 귀가를 서두르는 장면이 몇 번인가 나온 적이 있다.

당시 통금이 걸리면 공항 관제소 직원들도 얄짤 없이 귀가해야 했다. 때문에 통금시간 이후에 관제소에 무전을 보내봤자 관제사들이 전부 퇴근해버려 아무런 응답이 없자 한국 영토에 착륙하지 못한 비행기들은 욕을 하면서 일본, 대만, 홍콩, 알래스카, 하와이 등지로 회항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을 관광하려는 여행객들이 한국의 통금제도를 전혀 인지하지 못해 이를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외국인 간첩으로 오해를 받아 체포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심한 경우 체포후 고문을 받는 사례까지 있었다고 한다.

여의도가 한창 개발되던 때인 1971년 서울시에서 서울시청 이전 계획과 함께 여의도 지역을 서울 유일의 통행금지 해제지역으로 선정하겠다고 계획안을 내놓은 적이 있으나, 무산되었다.

2018년 국군기무사령부가 계엄령선포시 야간통행금지도 시행하려 했다고 한다.

2.3. 해외의 사례

해외에도 아직 남아있는 사례가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치안이나 자연환경 문제로 인해 미성년자에 한해서 야간 통금을 실시하는 국가나 지역들이 다소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이슬란드는 만 12세 이하 어린이는 20시 이후, 만 16세 이하는 24시 이후 외출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

일본 도쿄에서도 조례로 23시부터 5시까지 18세 미만 청소년의 야간 통금을 실시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옛날 얘기로 2018년 10월 현재에는 강제적인게 아니라 권장사항이다. 때문에 야간 순찰중인 경찰관들이 밤에 돌아다니는 청소년들을 발견하면 밤은 위험하니 어서 들어가라는 주의를 주는 수준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시위가 격화되거나 폭동이 발생할 경우 야간 통금을 실시한다. 최근에는 샬럿에서 흑인 시위 때문에 야간통금이 실행된 적이 있다. 또한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는 청소년 폭동이 자주 발생하여 역시 기간 한정으로 청소년 야간통금을 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프랑스의 음악가 장 미셸 자르의 북경 공연당시 통행 금지 시간때문에 공연이 다 끝나기도 전에 관객들이 다 나가버린 일화가 있다.

남미에서는 마약과의 전쟁의 일환으로 일부 오지에서는 어두워진 이후엔 눈에 띄면 사살이라는 극단적인 야간통금을 시행한 바 있다.


[1] 지금도 농촌에서는 해 떨어지면 집으로 귀가하는 경우가 많다. 가로등이 많고 건물 간판이나 내부 조명 때문에 밝은 도시지역과는 달리 농촌은 가로등이 드문 드문 있기 때문에. 물론 농촌 인구가 연령층이 높아서 젊은이들처럼 야간에 잘 안 움직인다는 것도 한몫한다.[2] 주로 활주로에 조명이 고장나거나 항공기 자체의 야간식별 장비에 문제가 있는 경우. 도심에 있어서 소음 문제로 커퓨를 거는 공항도 있다. 예를 들면 김포공항.[3] 물론 대사헌이 종2품의 초고위직이긴 하지만, 윤종도 정4품 호군이였으므로 '고작 순관 따위'는 아니였다.[4] 4.19 혁명 당시에는 21시부터 5시까지 통금이 연장되었다.[5] 라디오의 경우, FM은 익일 새벽 1시까지, AM은 익일 새벽 2시까지 하는 경우가 있었다.[6] 대표적으로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에서 청미천 하나만 건너가면 나오는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으로 넘어가서 계속 마셨다는 일화가 있으며, 1970년 쯤에 나온 유머 모음집에는 '어디로 데이트 갈까?'라는 물음에 통금이 없으니까 충북으로 가자는 말도 있다.[7] 1989년 이전에는 주 48시간 근무제를 시행했을때라서 토요일도 오후까지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도 노동법은 당국의 비호아래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다.